삼국사기 천줄읽기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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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삼국사기


삼국사기를 바치는 글(進三國史記表)

신 김부식이 말씀 올립니다. [중국] 고대의 여러 나라에서도 각기 사관(史官)을 두어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맹 자≫에 이르기를 “진(晉)의 승(乘), 초(楚)의 도올(檮杌), 노(魯)의 춘추(春秋)[와 같은 사서]는 한가지다”라고 했습니 다. 생각건대 우리 해동[海東: 중국을 기준으로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 삼국은 지낸 연수가 길고 오래되어 마땅히 그 사실을 나라의 역사책에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께 서] 늙은 신하에게 명해 편집하도록 하셨으나, 스스로 돌아 보니 부족할 뿐이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성상(聖上) 폐하께서는 요(堯)임금의 넓은 덕과 총명함을 천성으로 갖추셨고, 하(夏) 우왕(禹王)의 부 지런함과 검소함을 본받으시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 이전의 옛 역사를 두루 읽어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학사와 대부들은 [중국의] 5경(經)과 제자(諸子) 의 책과 진·한 역대의 역사는 혹 널리 알아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넓고 멀어 아득해 그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하물며 신라씨·고구려씨·백제씨가 터전을 열고 솥의 세 25


발처럼 서서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통했기 때문에 범엽 (范曄)의 ≪한서(漢書)≫와 송기(宋祁)의 ≪당서(唐書)≫ 에 모두 [삼국의] 열전(列傳)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의 일은 자세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해서 [삼국의 기록이] 자세 히 실리지 않았다. 또한 그 ≪고기(古記)≫는 글이 난잡하 고 서투르며 사적이 빠지고 없어져서, 군주와 왕비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사악함, 나랏일의 안위, 백성의 잘 다스려짐 과 어지러움을 모두 펴서 드러내어 후세에 전해 권하고 경 계할 수 없다. [이에] 마땅히 삼장[三長: 재주(才)·학식 (學)·식견(識)]의 재주를 얻어 능히 한 집안의 역사를 완성 해 이를 만세에 물려주어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신과 같은 사람은 본래 삼장의 재주도 없고 또한 깊은 식견도 없습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서 날이 갈수록 정신이 혼미해져 비록 글을 부지런히 읽어도 책을 덮고 나 면 곧 잊어버리고, 붓을 잡는 데 힘이 없어 종이에 닿아도 아 래로 내려가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학술이 이같이 굼뜨고 낮으며 이전의 말과 지나간 일들이 저같이 어둡습니다. 이 런 까닭에 정열과 힘을 다 쏟아 겨우 책을 이루었으나 끝내 볼만한 것이 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 옵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신이 이 책을 편찬하는 데 있어] 뜻 만 크고 실제 일에는 소략하게 한 것을 헤아려주시고, 함부 로 만든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책이] 비록 명산(名山)에 26


보관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하찮은] 장 단지를 바르는 데는 쓰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의] 구구하고 망령된 뜻을 하늘 의 해가 비추어 보듯이 굽어살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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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 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 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했다.1)

신라 본기 제1 시조(始祖)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유 리이사금(儒理尼師今)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파사이사금(婆娑尼師 今)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시조[BC 57∼AD 4]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 전 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BC 57] 4월 병진(丙辰)일에 즉위해 거서간(居西干)이라 불렸 다. 이때 나이가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었다. 첫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넷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다섯째 금산가리촌(金山加 利村), 여섯째를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라 불렀는

1) ≪삼국사기≫ 각 권의 앞부분에 항상 이와 같은 문구가 있다. 이하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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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이것이 진한(辰韓)의 6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가서 보니 돌 연 말은 안 보이고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잘랐는데 어린아 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 데려다 길렀다. [아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성숙했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이했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 러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 진한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 이라 불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과 같았기 때문에 박(朴) 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이다−혹은 귀한 사람을 부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5년[BC 53] 봄 정월에 용이 알영(閼英) 우물에 나타나 오 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늙은 할머니[老嫗]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는데,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불러주었다. [아이가] 자라 덕스러운 모습이 있어 시 조가 그 소문을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행실이 어질 고 안에서 보필을 잘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두 성인(聖人)이라 했다. 21년[BC 37] 서울[京: 경주]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26년[BC 32] 봄 정월에 금성에 궁실(宮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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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차차웅[4∼24]이 왕위에 올랐다−차차웅은 혹은 자충이라 고 한다. 김대문이 이르기를, “[차차웅은] 방언에서 무(巫)를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배하는 까닭에 그를 두려워하면 서 존경해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자충이라고 불렀다.”−혁거세의

맏아들이었다. 3년[6] 봄 정월에 시조의 사당[始祖廟]을 세웠다. 5년[8] 봄 정월에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맏딸 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10] 가을 7월에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사와 국 정의 일을 맡겼다.

유리이사금[24∼57]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의 태자다. 처음 에 남해가 죽고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대보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탈해에게] 미루 어 사양했다. 탈해가 말했다. “신기한 기물과 큰 보물[神器 大寶: 왕위를 상징]은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치아가 많 다고 한다.” 떡을 깨물어서 시험해 보니 유리의 치아가 더 많았다. 이에 좌우[의 신하]와 함께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 금(尼師今)이라 불렀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것이 이와 같 다. 김대문이 말했다.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齒理]을 일 컫는다. 옛날에 남해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와 사위 31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석 (昔) 두 성은 나이가 많은 순으로 왕위를 이어라’고 했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 이 서로 왕위를 이은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9년[32] 봄에 [왕이] 6부의 이름을 바꾸고 이어 성(姓)을 내려주었다.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라 하고 성을 이 (李)로, 고허부(高墟部)를 사량부(沙梁部)라 하고 성을 최 (崔)로, 대수부(大樹部)를 점량부(漸梁部)−혹은 모량(牟梁)이 라고도 한다.−라 하고 성을 손(孫)으로,

간진부(干珍部)를 본

피부(本彼部)라 하고 성을 정(鄭)으로, 가리부(加利部)를 한지부(漢祗部)라 하고 성을 배(裵)로, 명활부(明活部)를 습비부(習比部)라 하고 성을 설(薛)로 했다. 또한 관(官)을 설치해 17등급을 두었다. 1[위]은 이벌찬 (伊伐飡), 2는 이척찬(伊尺飡), 3은 잡찬(迊飡), 4는 파진찬 (波珍飡), 5는 대아찬(大阿飡), 6은 아찬(阿飡), 7은 일길찬 (一吉飡), 8은 사찬(沙飡), 9는 급벌찬(級伐飡), 10은 대내 마(大奈麻), 11은 내마(奈麻), 12는 대사(大舍), 13은 소사 (小舍), 14는 길사(吉士), 15는 대오(大烏), 16은 소오(小 烏), 17은 조위(造位)였다.

탈해이사금[57∼80]이 왕위에 올랐다−토해(吐解)라고도 한다. −그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씨(昔氏)였다. 탈해는 본 32


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 동북쪽 1 천 리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인 나라[女國] 왕의 딸 을 아내로 삼아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 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니 마땅히 그것을 버려라”고 했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궤짝 속에 보물과 함께 두어 바다에 띄 워 그 가는 대로 맡겨두었다. 처음 금관국[금관가야]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 이 이상히 여겨 거두지 않았다. 또한 진한의 아진포 입구[경 북 경주 양남]에 다다랐다. 이때는 시조 혁거세 재위 39년이 되는 해였다. 그때 해변에 있던 할머니가 밧줄로 끌어당겨 해안가에 매놓고 궤짝을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할머니가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아이가] 자라 키가 9척 이나 되고 풍채가 빼어나고 환했으며 지식도 남보다 뛰어났 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모르니, 처음에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 울어서 그것을 따랐으 므로 마땅히 작(鵲)에서 [조(鳥)를] 생략해 석(昔)을 성씨로 삼고, 또한 궤짝에 넣어둔 것을 풀고 나왔으므로 마땅히 탈 해(脫解)라고 불러야 한다”라고 했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아 그 할머니를 봉 양했는데 게으른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할머니가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뼈의 생김새가 33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해서 공명을 세우라”고 했다. [탈해 는] 이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했고 더불어 땅의 이치[地理]까 지 알게 되었다. [이에] 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한 땅이라고 여겨 거짓 꾀로써 그곳을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이 나중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9년[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에 있는 시림(始林) 의 나무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 려 호공을 보내 그곳을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 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아뢰자, 왕이 사람을 시켜 그 궤짝을 가져와 열어보니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 일러 말하 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내게 귀한 아들을 보낸 것이 아니겠 는가”라고 했다. 이에 그를 거두어 길렀는데, 자라면서 총명 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閼智)라고 불렀고, 그가 금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했으며, 시림(始林)의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바꾸어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파사이사금[80∼112]이 왕위에 올랐다. 유리왕의 둘째 아들 이다−혹은 유리의 동생인 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처음에 탈해 가 죽었을 때 신료들이 유리의 태자인 일성을 세우려 했는 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왕위를 이을 맏아들 34


이지만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으로] 세웠다. 22년[101] 봄 2월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불렀다. 가을 7 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가 살았다. 23년[102] 가을 8월에 음즙벌국[경북 안강]과 실직곡국 [강원 삼척]이 영토를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해결해 주기를 청했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아 지식이 많다”고 하고 불러 물으니, 수로가 의논 해서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했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해 수로왕에게 베푸는 잔치에 모이게 했다. [이때] 5부는 모두 이찬으로써 접대주를 삼았는데, 유독 한지부만이 지위 가 낮은 자로 주관하게 했다. [이에] 수로가 화가 나 노(奴) 탐하리에게 명해 한지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 다. [그] 종은 도망가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의 집에 의 지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는 보내지 않았다. 왕이 화가 나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 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했다. [또한] 실직국과 압독국[경 북 경산] 두 나라의 왕도 와서 항복했다. 25년[104] 가을 7월 실직[국]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보 내 토벌했고, 그 남은 무리는 남쪽의 변방으로 옮겼다.

지마이사금[112∼134]이 왕위에 올랐다. 파사왕의 친아들 35


이다.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으로 갈문왕 마제의 딸이다. 일 찍이 파사왕이 유찬의 연못에서 사냥할 때 태자가 따라갔 다. 사냥 후에 한지부를 지나가는데 이찬 허루가 잔치를 베 풀었다. 술에 취하자 허루의 부인이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와 춤추었다. [이에] 이찬 마제의 부인도 자기 딸을 데리고 나왔 는데, 태자가 보고 기뻐했다. 허루가 불쾌히 여기자 왕이 허 루에게 말하기를 “이곳 땅 이름이 대포인데 공이 이곳에서 잘 차린 음식과 맛있는 술을 마련해 잔치로써 기쁘게 해주 니 마땅히 주다(酒多)의 지위로 이찬보다 위에 있도록 하겠 소”라고 했다. 그리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나중에 각간[角干: 이벌찬의 별칭]이라 불렀다.

일성이사금[134∼154]이 왕위에 올랐다. 유리왕의 큰아들 이다−혹은 갈문왕 일지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년[138] 봄 2월에 금성에 정사당(政事堂)을 두었다. 13년[146] 겨울 10월에 압독[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 를 보내 토벌해 평정했다. 그 나머지 무리들은 남쪽 지방으 로 옮겼다. 15년[148] 박아도를 갈문왕(葛文王)으로 봉했다−신라에 서는 죽은 후에 봉하는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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