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노신이치단편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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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와 달빛 (吊籠と月光と)57)

57) 원래 제목은 직역하면 ‘엘리베이터 박스와 달빛과’다.


나는 철학과 예술의 분기점에서 충돌해 자유를 잃어버린 머 릿속이 처치곤란이었다. 숨 막힐 듯 힘들게, 사막에서 길을 잃고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는 듯한 포즈를 고수해 나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자신을 세 개의 개성으로 나누어 그 인 물들을 가공의 세계에서 활동하게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는 얼마간 휴식을 취했다. 아니 휴식을 취했다기보다, 망상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그 부칠 데 없는 정열 때문에 이 몸은 고 무풍선처럼 파열했을 것이 틀림없다. 내 세 개의 개성이란 이러하다. A는 “여러 힘이 상승하고 하강하며 황금 두레박을 서로 주고 받고 한다.” 말하자면, 그 같은 부류의 태평스러운 예술가다. 그래서 A는 그 말을 우리에게 남긴 중세기의 대방탕 시인의 작품을 애송해, 애틋해서라고 생각하면 미움으로, 미워서라고 생각 하면 애틋함으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저것에서 이것으로 굴 리고 굴리자, 이 통을 세인트 디오게네스의 나무통처럼− 과 같은 병사의 노래를 외우거나, 오늘은 흰 빵, 내일은 검은 빵…과 같은 노래만 흥얼거리며 곤충채집으로 들판을 쫓아 다니거나, ‘머메이드 태번’58)의 구석 쪽에서 시 창작에 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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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나, 수제 망원경으로 별을 바라보거나, 변덕 심한 사랑 의 고뇌로 수척해져 있는 것이었다. B는 “그 아비, 어미, 아내, 자녀, 형제, 그리고 너 자신의 목숨 까지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로 적당치 않느니라.” −라고 한 성인의 충실한 종이었다. 그리고 그는 <말시 아스 강의 비애>의 작자 에우리피데스를 내친 스토아학파 의 피를 받아 비극을 조소하고 오로지 신과 힘을 신봉했다. 논리적 기교를 버리고 이성을 통일시킴으로써 가장 명료하 고 건전한 생활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C는 피사의 탑 꼭대기에 틀어박혀, 크고 작은 여러 금속 제 공을 지상으로 떨어뜨리며 ‘낙하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 자59)의 제자다. C는 늘 슬픈 듯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왜냐 하면 그가 아무리 열심히 많은 공을 내던지며 낙하 상태를 연구한들, 결코 그 과학자의 발견에 의한 ‘낙하의 법칙’ 이상

58) 머메이드 태번(Mermaid Tavern): 옛날 런던 중심부에 있던 술집의 이름이다.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의 극작가, 시인들이 모이던 곳이 다. 59)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 293개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리며, 두 개 의 공으로 낙하 실험을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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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리를 찾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그저 장난삼아 떨어진 공을 줍고는 다시 탑 위로 올라가 또 떨어뜨리고 쳐다보고 또 줍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느 날, 이 세 사람이 전국을 편력하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어딜 가더라도 어차피 더 나은 일은 없 을 거라는 체념에 빠져 있던 우울한 C는 썩 내키지는 않았 지만, 짐이라곤 금속제 공만을 챙겨 포켓에 넣고, 수다스러 운 A나 까다로운 B를 길동무 삼아 우선 수도를 목표로 여행 길에 올랐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세 사람은 늘 티격대는 사이로, 길에서 만나도 변변히 인사조차 나눈 적이 없을 정 도다. …. 이 정도의 설정을 떠올리고는,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 져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내 머릿속은 장마가 개고 초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것처럼 말개졌다.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뻐서 팔짝팔짝 뛰면서, 벽 장식으로 걸려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깃털이 달린 모자를 집어 들고, 인디언 가운60)을 걸치고, (정말이지 그런 일이라도 하지 않 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는 멍청하고 희비의 감정

60) 마키노는 인디언, 인디언 가운 등을 그의 작품에서 다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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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이 노골적이어서, 예를 들면 요즘에도 생활에는 불필요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기하나 대수 풀이를 시도 하곤 하는데, 극히 드물게 혼자 문제가 풀리는 일이 생기면 기쁜 나머지 미친 듯이 이상한 소리를 내곤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터무니없이 커서 한밤중이면 우리 집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친목회 멤버들이 몹시도 곤혹스러워하다가 그 때문에 다음 날 아침 늦잠을 자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래서 나는 아침 식사를 기다리지 못하고 정류장 대합실로 건너가 매점의 도시락을 사 먹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만 함성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순간 그 것을 떠올리고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째서 몇 날 며칠이고 우울하기만 하던 침상에서 환한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춰 인디언 댄스라도 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세 명의 방랑자가 이제부터 기이한 여행길에 올라, 다양한 사건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공상하고 구상할 수 있는 것이 한없이 유쾌했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무’의 방 랑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더 이상 심각할 수도 없는 갈등상 을 계속 안타깝게 지켜보며 지냈다. 나는 ‘병사의 노래’의 A 를, 번얀61)의 험준한 여정에 세워서 악마와 싸우게 할까, 까 칠한 B를 라만차 신사와 대면시켜 문답하게 할까, 피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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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을 스위프트의 비행섬에 보내, 라가드 대학의 과학실62) 을 견학시켜 깜짝 놀라게 해 줄까… 등등의 생각만으로도 신이 나서 자신을 망각할 정도였다. “저주받는 원시 철학이여, 조소할 만한 소예술이여, 비참 한 어제까지의 감정(이펙트)의 국토여!” 이런 말을 중얼거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동 네 한길가에 내려와 서 있었다. 채찍처럼 가늘고 긴 검을 가 지고 있었는데, 이것도 벽의 ‘WASEDA’63) 페넌트 아래 십자 모양으로 걸어 두었던 연습용 Fencing Sword64)의 하나였 다. 이것은 취미 삼아 걸어 둔 게 아니라, 아침저녁 이걸 들 고 우리 집 친목회 멤버 중 누굴 상대로든 검술 연습을 하는 것이다. 도무지 마음이 울적해져 어쩔 바를 모를 때는 이걸 로 전쟁놀이를 하며 기분을 풀고, 무협소설을 읽으며 흥분 하게 되면 이걸 휘두르며 작중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61)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으로 생각된다. 62)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중 비행하는 섬 라퓨타의 수 도 라가드에 있는 아카데미를 가리킨다. 오이에서 햇빛을 뽑아내려 는 등 엉뚱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63) 와세다는 마키노가 다닌 대학이다. 64) 펜싱 검도 다용되는 모티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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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찬란히 비치는 밝은 거리다. 언덕 중턱에 자리한 우 리 집 창문을 돌아다보니, 새가 도망친 것처럼 창문이 흔들 흔들 몽환적으로 바깥쪽으로 열려 있다. 나는 검을 휘두르며 쾌활하게 평평한 거리를 달리고 있 었다. 모자 깃털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주 편안하고 상쾌하게 바람을 가르고 있다. “시인은 따르라, 철학자도 물리학도도 날 따르라… 국경 의 언덕까지 배웅할 테니” 하고 나는 소리쳤다. 그리고 이런 걸 생각했다. ‘너희를 수행 길로 떠나보내고 만 뒤의 고독한 나야말로 내 본연의 모습이다. 오늘 밤은 이것으로 나와 너 희들의 인연도 끝이다.’ “머메이드 태번의 작부(웨이트리스)한테는 자네가 내 말 을 전해 주게나.−무당벌레를 발견하면 여행지에서 보낼 테니, 나 그녀에게 보내는 복잡한 사랑의 징표로 브로치를 가슴에 달아 달라−고.” 하고 시인이 내게 속삭였다. 그런 너저분한 선술집을 아 마도 키츠의 시인가 뭔가에서 따온 말이겠지만 머메이드 태 번이라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마음을 뺏긴 시인의 순진함에 는 할 말이 없.−하고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계관시인이여!” 하고 추켜세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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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에 가면 자네는 보석점 쇼윈도에서 칠보 날개를 단 황금 무당벌레를 발견할 테지. 머메이드의 애인과 사랑을 이어 가고 싶다면 보석점의 무당벌레를 보내오게나.” 시인은 내 작별 인사를 건성으로 듣고는 앞서의, “이것에서 저것으로 저것에서 이것으로!”를 큰 소리로 부르며 의기양양하게 달빛 가득한 언덕을 내려갔다. “불안이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억측에서 나온 것으로, 본 래의 사물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에게만 비 극이 생긴다. 나는 오디세이를 따라 숲을 빠져나와 야수처 럼 오로지 내 자신의 힘만 믿고 가자.” 라고 B는 만물유전설을 신봉하는 아테나이의 호언가 목 소리를 흉내 내며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갔다. 불안도 비극도 자신감도 내게는 마이동풍일 뿐이다. 너무나도 B의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어쭙잖아 보여서, “어리석은 자신감 때문에 도리어 불안의 늪에 발을 들여 놓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걸세. 이 활을 주지. 배고플 때를 대비해서.−” 라고 주의를 주려 했지만 돌아보지도 않아서 관두었다. 그래서 나는 활 모양의 검 사이로 존경인지 조소인지 모를 윙크를 보냈을 뿐이다. C는 말없이 포켓 속의 공을 금화처럼 짤랑짤랑 소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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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뚜벅뚜벅 내 옆을 스쳐 갔다. “자, 이로써 드디어 나만의 세상이 되었군…. 베리 브라 잇!” 나는 희미한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모습을 배웅하며 언덕 위에서 두 손을 들어 소리쳤다. 낮에는 야산을 돌아다니며 양식을 구하고, 밤에는 길거 리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유쾌한 무협담을 나누자. 나는 ‘사유의 사유’를 거듭하며 감람산을 꿈꾸는 철학자에게 연 민을 느끼고, 디오게네스의 나무통을 굴리고 있는 시인을 경멸하고, 통일을 위한 통일로 연신 무미건조한 계단을 오 르내리는 물리학도와 절교하고는, 유쾌하게 모자를 흔들었 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낯선 여행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통쾌했다. 이런 생각으로 우쭐해진 나는 홉스텝으로 산을 뛰어 내 려가, A의 소위 머메이드 앞에 가까이 갔다. “어머, 마키노 씨잖아요?” 라고 그 술집 여자가 소리치며 달려 나와 내 앞을 가로막 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내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살펴보 더니, “그런 모습으로 제 눈을 속이려 들면 안 되죠”라고 응석 부리듯 내 가슴에 안겼다…. “아이참, 어찌 된 거예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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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처럼 일부러 마중 나온 저를 안아서 빨리 가게 안으로 데 리고 들어가 줘요.” “그런 시인 흉낸 낼 수 없어, 난.−” “능청 부리시긴!” “결코.− 난 오늘 밤 시치로마루(七郎丸)한테 부탁해서 밤낚시에 데려가 달라고 할 참이거든, 마땅한 옷이 없기에, 이런 차림으로 온 거야.” “그럼, 이제부터 시치로마루 씨한테 갈 작정인가요?” “고기를 잡든 못 잡든 귀가 시에는 꼭 들르도록 하지. 무 용담을 기대해 봐.” 나는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여자는 느닷없이 내 가슴을 세차게 주먹으로 쳤다. “거짓말쟁이! 이런 달밤에 밤낚시라니 말이나 돼요?” “어허, 그런가!” 하고 나는 주춤했다. “밤낚시는 깜깜한 밤에만 하는 거였나?” “당연하잖아요.” 그때 술집 창으로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벌건 얼굴이 나 타났다. 보니 시치로마루였다. “아까부터 자네 오길 기다렸어. 그런 곳에서 달님한테나 거들먹거리지 말고 어서 들어오지 않겠나?” “시치로마루, 자네가 있다면 난 물론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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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왠지 기분이 상해서 성큼성큼 술집 안으로 들어갔 다. “시치로마루 씨, 이제 이런 거짓말쟁이하고는 친구 하지 마요. 그리고 이제부터 저랑 친하게 지내는 게 어때요?” 내 뒤를 신발 소리를 크게 내며 따라 들어온 여자는 느닷 없이 우리들 사이를 헤집으며 시치로마루 목에 매달렸다. 시치로마루란 그의 집 대대로 내려오는 뱃사람으로서의 택호(宅號)이자 어선 이름인 셈이지만, 이제 배는 없어지고 택호만 남은 내 친구다.−가을이 되어 밤낚시가 시작되면, 올해야말로 꼭 데려가 달라고… 하는 말을 나는 늘 그에게 해 왔던 것이다. “모처럼 준비하고 왔는데 안됐군.” 그는 여자를 슬쩍 옆으로 밀치고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결코 도락으로 그러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낚시 말만 나오면 어디까지나 시치로마루의 충실한 제자였다.− 오늘은 그런 이유로 방을 뛰쳐나온 거지만, 항상 시치로마 루는 일 나갈 땐 이걸 입고 가는 게 좋겠다고 주장하고 있었 기 때문에, 나도 아까는 이 복장이 창피한 나머지 여자에게 그리 말을 뱉고 말았지만, 물론 지금 당장 배를 띄우겠다고 하면 이대로 출발할 것이 틀림없다. “방금 자넬 찾아 자네 방에 가 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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