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동화선집 미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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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된 꽃씨

천천히



1. 꽃씨 한 알이 있었습니다. 꽃씨 속에는 씨눈이 숨어 있었습니다. 꽃씨 속에는 하늘도 숨어 있었습니다. 꽃씨 속에는 향기도 숨어 있었습니다. 꽃씨 한 알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개미가 지나다가 꽃씨를 보았습니다. 개미는 꽃씨를 물고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개미네 창고 속에는 다른 꽃씨도 들어 있었습니다. “맨드라미야 안녕!” 봉숭아 꽃씨가 말했습니다. “봉숭아야 안녕!” 맨드라미 꽃씨가 말했습니다. 겨울이 되었습니다. 개미들이 창고 속을 드나들며 먹이를 물어 갔습니다. “개미야, 우리들은 꽃씨야.” 맨드라미 꽃씨와 봉숭아 꽃씨가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남겨 줘, 꽃을 피워야 해.” “꽃을 피운다고?” “그래, 봄이 오면 우리 몸에서 싹이 나와. 그리고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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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운다니까!” “정말?” “그럼, 기다려 보면 알 거 아냐?” “꽃이 피면?” “꽃이 피면 하늘두 보구, 향기도 내지. 그리구 너희들 개미네가 쉴 수 있는 그늘두 만들어 주구.” “우리들이 쉴 그늘두 만들어 주구?” “그럼, 그뿐만 아니라 꽃가루랑 꿀두 낸다구….” “그럼, 기다려 보지 뭐.” 꽃씨는 땅굴 속에서 겨울을 지냈습니다. “그늘을 만들구, 꽃가루랑 꿀을 내고, 그밖에 다른 건 없 어?” 어느 날 개미가 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뿌리를 내리지.” “뿌리를 내리는 게 무슨 소용 있어?” “뿌리가 있으니까 너희들이 굴을 팔 때 무너지지 않는 거야.” “아하, 그렇구나. 그럼 기다려 보지 뭐.” 개미가 다시 다짐했습니다. 꽃씨는 그렇게 땅굴 속에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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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자 꽃씨는 싹을 틔웠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웠습니다.

2. 염소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눈알도 까맣고, 발톱도 새까만 흑염소 한 마리가 있었 습니다. 염소는 겨우내 마른풀만 먹었습니다. 마른풀만 먹는 흑염소는 바짝 마른 똥을 누었습니다. 똥그란 똥은 언 땅 위를 굴러다녔습니다. 흑염소는 똥그란 똥을 흘리며 아스팔트 길을 걸어갑니 다. 새까만 눈알을 굴리며 건강원 앞길을 걸어갑니다. 어젯밤에 먹은 무시래기를 되새김질하며 ‘흑염소육골 즙’ 간판 밑을 지나갑니다. 찬 바람이 불며 나뭇잎을 굴렸습니다. 찬 바람 속에 눈발이 흩날렸습니다. 염소를 끌고 가는 아저씨도 추운 모양입니다. 염소를 끌고 가던 아저씨가 국밥집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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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춥다, 국밥 한 그릇 주슈.” “염소는 왜 끌구 들어와유?”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미안혀유.” 아저씨가 염소를 끌고 문밖으로 나갑니다. “아주머니두 참, 충청도 인심이 그래서 쓰겠습니까? 산 짐승인데 추위를 모를라구요.” 국밥 집에 있던 손님이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다시 염소를 끌고 문 안으로 들어옵니다. “다 팔구 이놈 한 마리 남았죠.”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술 한잔 드시구, 잘해서 파슈.” 손님이 말했습니다. “아이구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꾸벅꾸벅 절을 했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이 몸이 약하셔서….” 손님이 흑염소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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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할머니는 눈이 침침합니다. 할머니는 허리도 결립니다. 할머니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아파트 생활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머님, 이 약 드시고 건강하게 사셔야지요.” 아들이 말했습니다. “할머니, 이 약 잡숫고 오래 사셔야 돼.” 손자가 말했습니다. “오냐, 그러구말구.” 할머니가 손자를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할머니가 왜 오래 사셔야 되지?” 아빠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옛날얘기를 두고두고 들을 수 있으니까.” 아들이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구나.” 엄마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봅니다. 손자를 무릎 위 에 앉혔습니다. 며느리가 난로 위에 보약을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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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옛날얘기….” 손자가 말했습니다. “옛날얘기란 옛날얘기는 모두 재탕 삼탕 다 했으니 또 뭘 해 주나….”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무거나, 아무거나 해.” 손자가 말했습니다. 난로 위 보약이 하얀 김을 뿜어냅니다. 하얀 김 속에 흑염소가 보였습니다. 그 염소가 뛰어다녔을 풀밭도 보였습니다. 시골집 뜰 안에 피었던 맨드라미 봉숭아도 보였습니다. “꽃씨 한 알이 있었느니라, 그 꽃씨 속에는 씨눈이 숨어 있고, 하늘도 숨어 있고, 향기도 숨어 있었느니라….” 할머니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할머니 배 속에서 맨드라미 꽃씨가, 봉숭아 꽃씨가 천 천히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꾸러기의 달≫, 새소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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