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물결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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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ешние воды 봄 물결


편집자 일러두기 ∙ 이 책은 총 28권으로 나온 나우카(Наука) 출판사의 ≪투르게 네프 전집(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 писем в двадца-

ти восьми томах)≫(1962∼1968) 제9권에 실린 ≪봄 물결(Вешние воды)≫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 이 책은 원전의 약 80퍼센트를 발췌해서 번역했습니다. ∙ 본문의 주석은 모두 옮긴이가 붙인 것입니다. ∙ 외래어 표기는 현행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 니다.


새벽 두 시쯤 그는 자기 서재로 돌아왔다. 하녀가 촛불을 밝 히자 그는 그녀를 그만 물러가게 하고는 벽난로 옆 안락의 자에 몸을 던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여태껏 이런 육체와 정신의 피로를 느껴본 적이 없 었다. 저녁 내내 그는 유쾌한 부인들, 교양 있는 신사들과 함께 보냈다. 부인들 가운데 몇몇은 미인이었고, 신사들은 거의 모두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자신도 자 리를 빛낼 정도로 아주 훌륭하게 이야기를 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 사람들이 말했던 ‘지루한 삶’, 다시 말해 ‘삶에 대한 혐오’가 매우 강력한 힘으 로 그를 사로잡고 숨 막히게 했다. 이것은 여태껏 없었던 일 이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우수와 권태와 울분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쑥물처럼 살을 에는, 타는 듯한 쓰라림은 그의 영혼을 가 득 채웠다. 지겹고 역겨운 그 무엇이, 꺼림칙하고 묵직한 그 무엇이 가을밤의 어둠처럼 사방에서 그를 에워쌌다. 그러 나 그는 이 어둠으로부터, 이 쓰라림으로부터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할지 몰랐다. 잠에 의지하는 것도 소용없었다. 그는 잠 들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힘없이, 증오와 함께. 그는 인간적인 모든 것의 허무함, 무익함, 저속한 허위에 21


대해서 생각했다.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가 그의 마음의 눈 앞에 차례차례 지나갔다(그 자신은 최근 쉰두 살을 맞이했 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서는 어느 삶의 단계도 용인될 수 없었다. 도처에 같은 헛수고, 똑같은 물의 흐름, 반은 진지하고 반은 의식적인 똑같은 자아망상이 있다. 그러는 사이에 갑 자기 머리 위에 눈발이 내리듯이 늙음이 찾아온다. 이와 함 께 저 꾸준히 성장하고, 모든 걸 잠식하고 모든 걸 먹어 삼 키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심연 속으로 풍덩 빠진다! 삶 이 이렇게 펼쳐진다면 그래도 괜찮다! 대개는 종말이 오기 전에, 쇠에 녹이 슬듯이 노쇠와 고통이 찾아온다…. 그의 앞에 놓인 삶의 바다가 시인들이 묘사하듯이 그렇 게 거친 파도로만 뒤덮여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 그 는 이 바다를 조용하고 잔잔하며, 어두운 밑바닥까지 속속 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상상했다. 그리고 자신은 쪽 배를 타고 앉아 있다. 그러나 어둡고 진흙투성이인 밑바닥 에는 흡사 거대한 물고기 같은 추악한 괴물들, 다시 말해 삶 의 온갖 질병, 비애, 광기, 빈곤, 맹목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괴물 하나가 어둠 속에서 빠져 나와 점점 위로 올라오면서 그 모습이 점점 분명해진 다. 혐오스러울 만큼 더욱더 분명해진다. 조금 더 지나면 쪽 22


배는 틀림없이 괴물과 부딪혀 뒤집힐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괴물의 모습은 다시 어슴푸레 흐려져 멀어지고 다시 밑바닥으로 내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곳에 누워 있 다…. 그러나 정해진 날은 찾아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괴물 은 쪽배를 뒤집어엎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두어 번 왔다 갔다 하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서 랍을 하나씩 열어보면서 서류들을, 대부분이 여자들이 보 내 온 옛날 편지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는 무엇이든 일을 해서 그를 괴롭히고 있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따름이었다. 닥치는 대로 몇 통의 편지를 열어보면서(그중 한 통에는 색이 바랜 리본으로 묶은 말린 꽃이 들어있었다) 그는 어깨 를 으쓱했을 뿐이었고, 벽난로를 흘끗 보고 나서 이런 쓸모 없는 쓰레기는 죄다 태워버리겠다는 듯이 한쪽으로 던져버 렸다. 그리고 건성으로 이 서랍 저 서랍 뒤지는 사이에 갑자 기 그의 눈을 커졌다. 그는 팔각형의 작은 구식 상자를 천천 히 꺼내서 그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상자 속에는 세월 이 흘러 노랗게 변한 두 겹의 면포 아래 작은 석류석 십자가 가 들어 있었다. 23


잠시 동안 그는 그 십자가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리고 갑자기 가냘프게 소리쳤다. 연민인지 기쁨인지 모를 무언가가 그의 얼굴 표정에 떠올랐다. 한때 다정하게 사랑 했었지만 헤어져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과 갑자기 만났을 때, 여전히 똑같지만 세월이 흘러 많이 변해버린 모 습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을 때의 얼굴 표정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벽난로 쪽으로 돌아가 다시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오늘? 왜 하필 오늘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지나 가버린 많은 것들을 회상했다. 그가 기억해 낸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의 이름, 부칭, 성을 언급해야겠다. 그는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사닌이다. 그가 회상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1840년 여름의 일이다. 스물 두 살의 사닌은 이탈리아에서 러시아로 돌아가는 도중 잠시 프랑크푸르트에 머물고 있었 다. 1840년에는 철도가 거의 놓여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 24


행자들은 승합마차를 이용했다. 사닌의 승합마차는 밤 열 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 고, 다행히 날씨도 아주 좋았다. 그래서 사닌은 당시 유명했 던 <백조>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뒤 도시 산책에 나섰다. 그는 다네커1)의 아리아드네 조각상을 보러 들어갔지만 별 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괴테의 집도 방문했지만 그의 작품 을 읽어본 것은 ≪베르테르≫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프랑 스어로 번역된 것이었다. 그는 마인 강변을 따라 산책도 해 보았지만, 고지식한 여행자가 으레 그렇듯이 곧 따분해졌 다. 마침내 저녁 여섯 시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피곤한 몸 으로 먼지투성이의 발을 이끌고 프랑크푸르트의 한 평범한 거리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거리를 그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이 거리의 몇 안 되는 건물 중에서 그는 ‘이탈리아 제과 점 조반니 로셀리’라고 쓰인 간판을 발견했다. 사닌은 레모 네이드 한 잔을 마시려고 제과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잡한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 왔다. 사닌은 잠시 서 있었다. 이윽고 초인종을 크게 울리고

1) 요한 하인리히 폰 다네커(Johann Heinrich von Dannecker, 1758∼1841): 독일의 조각가로 <표범 위의 아리아드네>라는 작품으로 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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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아무도 없습니까?” 하고 목소리를 높여 사람을 불러 보았다. 바로 그 순간 옆방의 문 하나가 활짝 열렸고, 사닌 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깜짝 놀랐다.

2 드러난 어깨 위로 검은 곱슬머리를 흩날리고, 드러난 두 팔 을 앞으로 쭉 뻗으면서 열아홉 살쯤 되는 처녀가 상점 안에 서 급히 뛰어나왔다. 그녀는 사닌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그 의 손을 붙잡고 뒤로 그를 끌고 가면서 숨 가쁜 목소리로 말 했다. “빨리요, 빨리. 이쪽으로요. 구해주세요!” 사닌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멈춰 섰다.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평생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닌 을 향해 돌아서서 목소리와 눈, 떨리는 창백한 볼을 감싼 손 으로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드러내며 말했다. “제발 와주세요, 와주세요!” 그 말에 그는 즉시 처녀를 따라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갔 다. 그가 처녀를 따라 뛰어 들어간 방 안에는 구식의 마미단 26


소파 위에 밀랍처럼 혹은 오래된 대리석처럼 누르스름하고 온통 창백한 얼굴의 열네 살쯤 되는 소년이 누워 있었다. 처 녀와 굉장히 닮은 것으로 보아 그녀의 남동생임이 분명했다. 두 눈은 꼭 감고 있었고,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의 그림자가 돌처럼 굳은 이마와 연한 눈썹 위에 드리워져 있었으며,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는 앙다문 이빨이 보였다.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한쪽 팔은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었고 다른 팔은 머리 위로 내던져져 있었다. 소년은 정장 차림으로 단추가 채워져 있었고, 꽉 낀 넥타이가 소년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죽었어, 죽어버렸어!” 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금방까지 여기 앉아서 나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져서 딱 딱하게 굳어버렸어요…. 오, 주여! 이 애를 구할 방법이 없 을까요? 게다가 어머니도 안 계시고! 판탈레오네, 판탈레오 네, 의사 선생님은 어떻게 됐어? 모시러 갔다 온 거야?” “아가씨, 제가 가지 않고 루이자를 보냈어요.” 하고 쉰 목 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왔다. 그러더니 안짱다리의 키 작은 노인이 검은색 단추가 달린 라벤더 프록코트에 하얀색 넥타 이를 매고 짧은 무명바지에 푸른색 소모사 양말을 신은 모 습으로 발을 절뚝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루이자는 빨리 뛸 수 있지만 전 그러지 못하잖아요.” 하 고 노인은 리본 달린 긴 슬리퍼를 신고 통풍 걸린 다리를 질 27


질 끌며 이탈리아어로 계속 말했다. “자, 여기 물을 가져왔 어요.” 그는 쇠약해져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기다란 병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에밀은 죽고 말 거야!” 하고 처녀가 두 손을 사닌에게 내밀며 소리쳤다. “아아, 당신께서 그를 위해 뭔가 해주실 수 없을까요?” “피를 빼야 해요. 이건 뇌일혈이에요.” 하고 판탈레오네 라는 노인이 의견을 말했다. 사닌은 의학 지식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열네 살의 소년 에게 뇌일혈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 다. “이건 실신이지 뇌일혈이 아닙니다.” 하고 그는 판탈레 오네를 향해 말했다. “혹시 솔 같은 것 없을까요?” “네?” 하고 노인이 작은 얼굴을 쳐들었다. “솔, 솔 말입니다.” 하고 사닌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연 거푸 말했다. “솔 말입니다, 솔.” 하고 그가 자기 양복을 터는 시늉을 하면서 덧붙였다. 그러자 마침내 노인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 솔! 그 쇄모 말인가요? 있고 말구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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