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종교사상사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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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종교사상사 1: 키예프 루시 시대의 기독교


지은이 서문

≪The Russian Religious Mind≫를 나의 책 제목으로 선정 하기까지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영어로 ‘mind’란 말이 주로 지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 단어가 의식의 전반적인 내용이란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가 쓰고 있는 것은 러시아 종교사상(Russian religious thought)의 역사가 아니라, 러시아 종교의식(Russian religious consciousness)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 사 용하고자 하는 개념은 광의의 의미에서 사용되는 ‘mind’이 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나아가 그럴 만한 이유를 필요로 한다.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인 측면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종교의 주관적인 부분을 기술하는 것이다. 즉, 조 직된 도그마라든지, 성례(聖禮, sacraments)와 의례(rites), 전례(典禮, liturgy), 교회법(Canon Law) 등과 같은 것에 반 대되는 것들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인간, 종교적인 인간, 그리고 신과 교우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태도는 보통 감정적이지만, 때로는 이성적 21


이고 의지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종교적 개성의 전체성 (wholeness)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중심인 바, 이로부터 종 교뿐만 아니라 문화생활의 주요 현상들이 일반적으로 그 기 원과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연구의 중심에는 신학, 전례, 교회법들이 하나의 표현이자 형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 금욕 적, 신비적 삶과 종교적 윤리의 의미에서 ‘영적인 삶’에 대한 연구가 자리한다. 영적인 삶과 윤리는 전통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요소보다도 더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 점에 있어서 종교 예술과 흡사하다. 종교적 삶의 상이한 측 면에 대한 주관적 해석(subjectivity)의 정도는 이것들의 가 치를 역사적 사료로 결정짓는다. 객관적인 요소와 주관적인 요소 간의 불일치는 도그마와 실질적 의례, 성례와 의례들 이 낯설고, 이미 오래전에 파멸된 문명으로부터 기인했음을 시인하고 있는 기독교 국가에서 점차 심화되어 간다. 자체 의 고유한 신학이 부재하고, 비잔티움으로부터 수용한 불변 의 전례상의 의례와 기도를 보존해 오던 고대 러시아와 같 은 국가에서는 신학과 전례가 러시아 종교사상사를 공부하 는 학생들에게 역사적 자료로 치부되며, 이미 실질적으로 사라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영적인 삶, 윤리, 예술, 그리고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사회 규범들은 우리가 연구할 주요 22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같이 인간의 주관적인 측면으로부터 종교에 접근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여러 기독교적 고백의 신학에 나타나는 현대의 일부 흐름은 19세기 휴머니즘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제 한된 의미에서 현대의 신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과 함께 출발하며, 독일어의 ‘Religiosität’란 용어를 처분해 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영어의 ‘종교’란 단어 자체까지 지극 히 인간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나는 초자연적인 것, 즉 기독교의 성스러운 성격을 계시의 종교로 보는 것을 반대하 지는 않는다. 다만, 성스러움의 현현이 은총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바이다. 기독교의 역사 는 곧 이 같은 반응의 역사이다. 이것의 문화는 바로 이 같은 경험의 문화인 것이다. 역사와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적이 다. 영적인 삶의 역사는 여전히 역사과학 분야에서 연구가 덜 된 영역이다. 이 역사는 금세기 초엽, 이른바 로마 가톨 릭의 모더니즘의 영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성되었다. 그러나 동방 정교와 러시아 정교는 오늘날까지도 유달리 무시되어 왔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의 비교권 사학자들 (secular scholars) 가운데 종교적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자 23


가 적다는 것에 있다. 19세기 동안 두 학자 그룹은 러시아 종교사상의 문제들에 접근했다. 즉, 러시아 종교 전통의 고 대 자료를 연구했던 비교권 문학사가들이 그 첫째요, 같은 자료 연구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던 교회사가들이 두 번째 그 룹이다. 첫 번째 그룹은 종교 문제에 대해 어떠한 핵심도 가 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러한 자료가 본질적인 가치 를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은 이것의 언어적 형태 라든가 혹은 문화적 내용 때문에 연구되었다. 종교적 본질 에 대해 말하자면−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 있는 바, 고대의 모든 러시아 문학은 종교에 우선적으로 관 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이다−이것은 극단적으로 간단 하고 안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동방에서의 모든 운동과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지 만 종교적 삶의 모든 분야에 있어 이것들은 지금까지도 여 전히 움직여 나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이유로 고대의 선입견은 학자들로 하여금 종교적 삶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탐구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외적인 형식과 종교에 대한 데이터들은 연구되었고 때로는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 지만, 그 깊이는 여전히 고무적이지 않았고 때로는 회의적 이지도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일부 다행스런 예외가 있다. 우리가 살펴 24


보는 고대 러시아 시대에는 종교적 이슈가 사회·정치적 문 제와 결부된 위대한 운동들이 왕왕 있었다. 그것은 바로 17 세기 중반 러시아 교회에서 있었던 엄청난 분열(schism)이 었는데, 이것은 ‘구교도들(Old Believers)’의 계승과 상이한 분리파 교도들(dissenting sects)의 형성이란 결과를 초래했 다.1) 보다 작은 규모에서 이 같은 분열은 1500년경 두 종교 파벌 간의 갈등, 즉 영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이슈를 포함했 던 조세파이트교도(the Josephites)와 트란스-볼가교도 (the Trans-Volgans) 간의 갈등에 다름 아니었다. 혼란의 이 시기는 역사 연구가 지금껏 관심을 기울여왔던 두 가지 초 1) 1652년, 노브고로드의 부주교였던 니콘은 총주교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성호를 긋는 방식을 포함한 예배 절차가 그리스풍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면서 일단의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러시아 정교는 원래가 의식 의 미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배교 행위나 마찬가지였고 그것을 사주한 니콘은 그리스도 신앙을 욕되게 하는 적 그리스도였다. 의식과 신앙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던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목 숨을 걸고 전례 개편에 반대했다. 옛 의식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 구교파와 니콘 개혁파의 신교도 간의 싸움은 결국 교회 대분열로 귀결되었고, 이 과정 에서 주사제 아바쿰은 구교도의 선봉에 서 있었다’, ‘종교 대분열은 두 가지 심 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러시아 교회는 이제 속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황제의 전제정치를 견제할 수 있는 제반 능력을 상실했다… 둘째, 종교 대분열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교회는 주류와 비주류, 제도권과 비 제도권으로 양분된 채 존속하게 되었다.’ 석영중, ≪러시아 정교: 역사·신 학·예술≫(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97∼106쪽, 니콜라스 체르노프, ≪러 시아 정교회사≫, 위거찬 역(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123∼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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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드러내 준다. 그 첫째는 구교도와 분리파 교도 내의 종 교 인물이 정교의 종교 인물보다도 더 많이 연구되어 왔고, 또 지금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 는 조세파이트교도와 트란스-볼가교도 간의 갈등에 대한 연구는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적어도 선행 시기 동안의 러 시아 수도사의 영적인 경향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를 하게 끔 이끌었다. 카들루봅스키(Kadlubovsky)의 책 ≪고대 러 시아 성자전의 역사에 대하여(Essays on the History of Ancient Russian Lives of Saints)≫는 이 분야에 있어서 아 마도 유일하게 진지한 연구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영 감과 방법론 모두 다소 잊혀진 이 학자로부터 많은 빚을 지 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쓰인 ≪고대 러시아의 성자들 (Saints of Ancient Russia)≫에 대한 나의 두 소규모 연구와 러시아의 ‘영적인 노래(Spiritual Songs)’가 지니고 있는 종 교적인 내용은 사실 본 연구서의 사전적 단계 작업이었다. 게오르기 플로롭스키(G. Florovsky)의 ≪러시아 신학의 제 갈래(Ways of Russian Theology)≫는 상당 부분 나의 책과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러시아 신학이 생겨난 이후 2, 3세기 즉, 17세기 후반까지만 다루고 있다. 실제로 플로롭 스키의 저작은 신학적인 사고의 역사라기보다는 일반적으 로 신학자들의 종교적 사변과 러시아 식자층의 역사에 대한 26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일반 사람들은 이 연구의 그림에서 밀려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러시아 사상, 특히 러시아 종교사상을 기술해 보려는 여러 노력이 있어왔다. 이 같은 노력은 러시 아 혁명에 의해서 생성된 러시아에 대한 활발한 관심을 증 거하고 있지만, 이 연구는 러시아인에 의해 쓰인 저작들을 포함해 대체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러시아인들의 연구서 을 보면 서방인들이 쓴 것보다도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 이 유는 너무 멀리 떨어져서 거리감을 두고 관찰하고 있기 때 문에 생기는 불만족스러움이라기보다는 편파성과 선입견 때문에 생겨나는 것에 더 가깝다. 한 외국인은 소수 특징적 인 요소만을 가지고, 러시아의 한 연구자는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기준으로 러시아인을 판단하고 있다. 모두들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고 있다. 일천 년 러시아 역사로부 터 추출된 현대라는 순간은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서 러시아 의 영원한 영혼이라는 표현으로 손쉽게 선택되고 있다. 하 지만 러시아의 과거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릇 된 접근 방법으로 인해 기형이 되고 있다. 이는 러시아 종교사상을 파헤치는 문제가 비현실적이고 신화적이라고 거부당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와는 반대로 종교적, 문화적 이유에서 나는 러시아 사상과 러시 27


아 종교사상의 현상이 공존한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이 것을 과학적 탐색으로 귀속시킨다는 것, 다시 말해 정확한 개념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아주 힘든 일이다. 모든 집단적 삶(collective life)이란 다채로움 속의 통일성이다. 그 삶은 개별 인간들 내에서만 존재하며, 개인은 다수의 보 편적인 것(the common being)이라는 부분으로부터 소수 의 측면만을 반영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단 한 명의 개 인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선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 라, 상호 모순적이고 일치하지 않는 특정 성향을 합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서로 다른 영적인 그룹들의 대표격인 전형, 그리고 만약 적절하 게 선별했다면 전체성 속에서 공공성을 표현할 수 있는 전 형을 선택하는 일이다. 통일성에 대한 지적인 욕망은 학생 들로 하여금 전형적인 그룹들의 숫자를 하나의 보편성 (single generality)으로 감소시키도록 호도하기 때문에, 전 체 그림의 정확도와 구체성에 피해를 주게 된다. 축소와 같 은 과정에서 혹자는 이중성(duality)에 도달하게 되지만 바 로 여기에서 우리는 멈춰야 한다. 오직 이중성에서만 실제 현실이 그 모든 모순과 함께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역 사적 현실을 그 모순된 연합의 틀 속에서 숙고하고 있는 헤 겔식의 방법에는 뭔가 언제나 옳은 것이 들어 있다. 삶의 이 28


중성을 단일성(monism)으로 감소시키는 일은 그 이중성을 죽이는 꼴이다. 러시아에서 지난 2세기 동안에 있었던 사회 분열과 더 오 랜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던 지리적 확장은 문화적으로, 종교 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었다. 더욱이 몽고의 지배와 표 트르 대제의 ‘개혁’과 같은 일종의 역사적 대변혁은 영적으로 나 종교적으로나 풍부한 결과를 낳았으며, 동방적 생활양식 (eastern life)의 불변성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정면 대치되 는, 이른바 그간 견지해 온 국가 차원적 사고(national thought)의 연속성에 실질적인 간극을 제시했다. 준비 작업이 미비하단 생각을 하던 차에, 위의 주제에 대 한 책을 독자들에게 언제 보여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곤 했 다. 순전히 과학적 견지로 볼 때, 예비 연구가 거의 결여되 어 있는 부분에서 종합한다는 것은 견고한 기초를 얻어내기 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역사과학에서 출발점은 분석이 아니라 종합, 즉 직감적이고 주관적이라고 하더라도 일종의 예비적 종합이라는 신념하에 위와 같은 시도를 해볼 생각을 감히 하게 되었다. 러시아 종교를 연구하는 과학은 아직 그 분석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들은 하나 의 예비적이며, 분명하고 진보적인 종합에 의해서만 해결되 기 마련이다. 29


영적인 삶에 대한 역사적인 문제들은 우리 시대, 특히 러 시아 역사와 관련하여 하나의 도전이다. 여러 변화와 혁명에 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역사 발달은 러시아 종교사상의 통일 성을 하나의 신화가 아닌 현실로 만드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 같은 통일성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양식으로 만 표현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사상(national mind)이란 것은 그 국가의 생명이 존속되는 한 존재의 새로 운 형식이 선포되는 것을 중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국가 가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엔 그 나라에 대한 정의는 여 전히 불완전하며 불확정적이다. 한편, 지난 과거의 어떤 본 질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라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몇몇 흔적은 그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었겠지만 또 다른 것 은 사회 계층들의 저 낮은 지면으로까지 혹은 국민 영혼의 덜 의식적인 부분으로까지 침잠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흔적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며, 러시아 종교 사상의 과거를 조명할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규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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