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의 기본 원칙_맛보기

Page 1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빌 코바치 · 톰 로젠스틸 지음 이재경 옮김


서문

세계적으로 몇 개 남지 않은 원시 문화에서 관찰한 커뮤니케이션의 성 격에 대한 연구 기록을 비교하면서, 인류학자들은 예상하지 않았던 사 실을 발견했다.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 있는 지극히 고립된 부족사회 에서부터 태평양의 멀리 떨어진 섬에 있는 작은 사회에 이르기까지, 사 람들은 뉴스에 대해 근본적으로 동일한 정의를 공유했다. 그들은 가십 을 서로 나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에 대해 얘기했다. 그들은 심 지어 뉴스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전달자(messenger)를 고를 때도 같은 자질을 가진 사람을 찾았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정확하게 정보를 수집한 뒤, 그 내용을 흥미롭게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취향은 시대에 따라 바뀌고, 뉴스는 때에 따라 더 심각 하거나 덜할 때도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다양한 인류 사회는 기본적인 뉴스 가치들을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공유해 왔다고 정리했다. “인류는 시간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비슷한 내용의 뉴 스를 오랫동안 교환해 오고 있다.” 저널리즘 역사가인 미첼 스티븐스 (Mitchell Stephens)가 그가 펴낸 책에 쓴 말이다.1) 이러한 지속성과 일관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역사가와 사회 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에 따르면, 그 대답은 뉴스는 한 가지 기본적인 인간의 충동을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재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그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경 계를 넘어, 다음 언덕 너머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싶은

xviii


욕구다.2)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일들을 알게 되면, 사람은 안전감을 확 보하고, 자신감과 주변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한 학자는 이 러한 욕구를 “알고 싶은 데 대한 굶주림(a hunger for awareness)”이라고 불렀다.3) 사람들은 친구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정보를 나눈다. “이 런 일 들어 봤어?”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들은 소식을 들었는지 궁금해 한다. 또 그들이 우리가 들은 내용과 똑같이 알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무언가를 함께 발견하는 느낌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이 어떠한 정보에 대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바탕으로 친구를 사귀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또 인성을 판단하 기도 한다. 뉴스의 흐름이 장애물에 막히면 “어둠이 내린다.” 그리고 불안감이 커진다.4) 세상은 결과적으로 너무 조용해진다.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전번 대통령 후보이자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인 존 매케인(John McCain) 은 그가 하노이에서 5년 반을 전쟁포로로 갇혀 있는 동안 가장 그리워한 것은 안락함도, 음식도, 자유도, 심지어 가족과 친구들도 아니었다고 했 다. “내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정보였다. 검열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풍요롭고 자유로운 정보가 내가 가장 원하던 것이었다.”5)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캠퍼스의 한 저널리즘 수업에서는 학생들 에게 뉴스 블랙아웃(News Blackout)을 체험하게 한다. 이 기간 동안 학 생은 모든 매체와 접촉을 단절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은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필요 없는 날 우산을 들고 오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불안한 상태가 된다.6) 이것을 ‘알고자 하는 본능(Awareness Instinct)’이라고 부르자. 우 리는 각자 삶을 살기 위해 뉴스가 필요하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서

xix


로 관계를 다지기 위해, 또 친구와 적을 구분하기 위해서도 뉴스가 필 요하다. 저널리즘은 지금 어떠한 일이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정보를 공급하기 위해 사회가 고안해 낸 시스템 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가 얻는 뉴스와 저널리즘의 성격이 어 떠한가에 관심을 갖는다. 뉴스와 저널리즘은 우리 삶의 질에 영향을 미 친다. 우리의 생각과 문화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뉴스는 애초부터 기 술중심주의자들이 말하는 정보의 “사회적 흐름(social flow)”을 만들어 냈다. 종교의 역사에 관해 여러 권의 인기 있는 책을 쓴 토머스 카힐 (Thomas Cahil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민족의 세계관 … 그리고 보 이지 않는 두려움이나 욕망 등은… 그 문화의 이야기들(stories)을 보면 알 수 있다.”7)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이 시점에,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세계관에 대해, 우리의 두려움과 욕망과 가치들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디지털 혁명의 전야인 1997년 6월, 어느 비 내리는 토요일에 25명 의 언론인들이 하버드 교수 클럽에 모였다. 기다란 탁자를 둘러싸고, 미 국 최고 신문의 편집책임자들 서너 명,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활동하 는 저명 방송인 몇 사람, 지도적인 저널리즘 교수 몇 사람과 유명 저자들 몇이 앉았다. 우리도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디지털 시대는 막 시 작하는 중이었지만 그날 모인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직업과 관련해 무엇인가가 심각하게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생산하는 수많은 기사들 가운데 그들이 저널리즘이라고 인정하고 싶은 기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들은 이러한 기사들과 자신들의 직업이 전 사회적인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기보다는 거꾸로 공공의 이익 을 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xx


공중은 당연히 기자들을 점점 더 신뢰하지 않게 됐다. 심지어 증오 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더 나빠질 게 분명했다. 1999년, 절반이 안 되는(45%) 미국인들이 언론이 민주주의를 보호한다고 믿었다. 이 수치 는 1985년에 비해 거의 10퍼센트포인트 낮은 결과였다.8) 2011년 조사 에서는 언론이 민주주의를 해친다고 느끼는 사람이 42%로, 보호한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중과 엇비슷했다. 언론이 독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 람은 단지 15%에 불과했다. 1985년에는 이 숫자가 37%로 2011년에 비 해 두 배가 넘었었다.9) 문제는 공중의 인식에 그치지 않았다. 1990년대 말이 되자 많은 기 자들도 날로 증가하는, 공중의 언론에 대한 회의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편집국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저널리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당시 ≪필라델피아인콰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의 편집책 임자였던 맥스웰 킹(Maxwell King)의 말이다. “우리는 경영 압박에 사 로잡혀 있다. 수지를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다른 편집책임자 가 동의했다. 걱정거리의 핵심은 뉴스의 가치가 쇠퇴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문 제는 뉴스 회사들이 더 이상 뉴스 가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 점이었다. 뉴스는 오락(Entertainment)이 돼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연예오락에 관한 뉴스가 돼 간다. 기자들의 상여금은 점점 더 회사의 이 익 규모와 연결된다. 그들이 하는 일의 질과는 관계가 흐려지고 있다. 모 임이 마무리될 무렵, 작고한 컬럼비아대학 저널리즘스쿨의 제임스 캐리 (James Carey) 교수가 여러 사람이 그날 토론의 총정리에 해당한다고 회고한 내용을 말했다. “문제는 점점 더 거대해지는 커뮤니케이션 산업 의 영역 안에서, 저널리즘이 사라지는 현실을 여러분이 보고 있다는 점 이다. 여러분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그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세계에서

xxi


저널리즘을 다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디지털 기술은 아직 저널리즘에 자금을 지원했던 광고 수익 모델을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았다. 또 공중이 기사를 보기 전 기자가 뉴스 내용 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없애 버리지 않았다. 신문의 수입은 그 후로도 7년 정도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5년에 최고점을 기록했다. 미국 언론계와 교육계 주요 인사들을 걱정스럽게 한 것은 상업화였다. 상업 화는 언론사 경영자로 하여금 투자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익을 확대 하는 데만 몰두하게 하고, 더 좋고 혁신적인 저널리즘을 위한 투자가 독 자를 늘려 줄 것이라는 신념은 설자리가 없게 만들었다. 이미 뉴스 산업의 기업적 구조로 인해, 편집국 지도자들은 중요한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 있었다. 캐리 교수가 한 이 말에는 더 큰 의미가 포함돼 있다. 만약 우리가 뉴스를 얻고 있는 이 저널리즘이라는 시스템이 무너진다면, 무엇이 그것 을 대신할까? 광고? 오락? 인터넷 쇼핑? 선전선동? 이데올로기적 뉴스? 더 쪼개지기?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사용자 생산 콘텐츠에 대한 생각, 모두가 참여하는 뉴스라는 생각 은 아직 우리 선구자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방에 모여 있던 사람 대부분은 자신들의 언론인 생활 기간 동 안 뉴스 산업이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는 과정을 목격해 왔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1세기 정도의 기간 동안 매 15년에서 2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파괴적 기술이나 새로운 매체 형태가 등장하곤 했었다. 1920년대 에 라디오가 등장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지쳐 있긴 했지만 1950 년대엔 텔레비전이 나타났다. 그리고 1980년대엔 유선방송과 전자매체 에 대한 탈규제 움직임이 등장해 라디오와 텔레비전 분야에서 새로운 정파성의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양식

xxii


의 오락 프로그램이 나타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경쟁을 격화시켰다. 그러면 기존의 매체는 변화해야 했다. 비켜서기도 하고 수용자의 일부 를 잃기도 하면서, 축소된 상태로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 왔다. 최고의 수준을 유지할 때, 저널리즘은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저널 리즘은 한 사회에 독특한 무엇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민들이 주변 세상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독립적이고, 신뢰할 수 있 고, 정확하고, 포괄적인 정보를 말한다. 이러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뉴스 가 아닌 다른 무엇을 공급하도록 요구받는 저널리즘은 민주주의 문화를 망가트린다. 이러한 일들은 나치 독일이나 공산주의 소련에서처럼, 정 부가 뉴스를 통제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싱가포르 같은 곳에서도 일어나는 사례를 목격한다. 거기서는 자본주 의를 격려하기 위해 뉴스가 통제된다. 그런가 하면, 공적 정치과정에 대 한 시민의 참여는 저지된다. 1980년대 시작된, 저널리즘에 대한 공중의 불만은 저널리즘 가치에 대한 배척은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기자들이 그들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한 결과였다. 예를 들어 신뢰에 관한 자료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공중은 지금도 뉴스는 독립적이고 믿을 수 있어야 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생산해야 한다는 기대를 버 리지 않고 있다. 퓨연구센터(the Pew Research Center) 자료를 보면 64%인 다수의 공중은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은 공급원으로부터 뉴스 를 얻기를 원한다. 이 숫자는 지난 20년 동안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10) 온라인 뉴스에 관해 질문했을 때 사람들의 답변은 더욱 분명해, 74%의 사람이 이 같은 답변을 제시했다.11) 공중은 여전히 대체로 뉴스가 숙련 된 전문가들에 의해 공급되기를 원한다. 그들을 실망시키는 건 뉴스가 그러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점이다. 한 차원에서, 신뢰도 위기는 모순적이기도 하다. 많은 뉴스 회사들

xxiii


은 변하는 시장에 적응해 공중이 원하는 뉴스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뉴스가 오락 프로그램처럼 바뀌어 갔다. 텔레비전 뉴스는 특히 명망가들의 스캔들과 흥미로운 범죄기사를 통해 시청자를 되찾고자 노 력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1990년대, 범죄 자체가 줄고 있는 상 황에서, TV 저녁뉴스가 가장 많이 다룬 주제는 범죄였다. 오 제이 심슨 (O. J. Simpson) 재판이나 존 베넷 램지(Jon-Benet Ramsey)라는 어린 이의 살인 사건 등을 다룬 보도는 잠시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지만, 시청 자들은 자신들이 농락당한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뢰도 조사 는 공중이 매체의 선정주의를 싫어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매체 경영 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공중의 위선이라고 무시했다. 과거 매체 양식에 관심 있는 수용자를 붙잡으려는 근시안적 집착과 회사 이익을 지키기 위한 원가 절감 노력 등에 정신을 빼앗겨 뉴스 회사 들은 매우 근본적인 요소들을 놓쳤다. 사람들은 뉴스를 버리는 것이 아 니었다. 그들은 더욱 편리해진 새로운 뉴스 전달 방식을 선택하며, 과거 방식을 버리는 것뿐이었다. 첫째, 저녁 6시 30분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24시간 뉴스 채널에서 주요 뉴스를 확인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이는 비 록 6시 30분 뉴스의 품질이 크게 더 좋다 해도 그러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이 훨씬 더 편리하고, 깊이 있고, 그리고 궁극적 으로는 이동성이 편한 매체임을 입증했다. 기자들은 그들대로 공중을 실망시켰고, 그들의 이탈을 조장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고품질 뉴스(quality news)의 정의에 지나치게 많은 가치를 부여해 변해 가는 뉴스 수용자를 연구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인터넷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새로운 수 용자에게 새로운 내용과 전달 양식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 는 데는 실패했다.

xxiv


1997년 케임브리지 모임은 하나의 신호였다. 디지털 파괴가 시작 되기 한참 전 이미 기자들은 자신의 산업이 공중에 대한 초점을 상실했 고, 공중의 필요에 봉사해야 하는 저널리즘을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을 느꼈었다. 줄여 말하면, 디지털 혁명에 적응하는 데 대한 집단적으로 실패한 것이 이미 10여 년 전부터 경보음을 울려대던 뉴스에 대한 신뢰의 위기 에 그 뿌리가 있었다. 그때 이후로, 뉴스 산업에서는 한 무리의 지배자들이 다른 무리에 의해 대체돼 왔다. 뉴스를 생산하고 광고 판매를 통해 수익을 확보하던 매체사들은 더 작은 수의 기술회사에 자리를 내줬다. 이 기술회사들은 단말기를 제작해 인터넷 접근로를 통제하거나 운영체제를 생산하고, 앱 을 팔거나 온라인에서 콘텐츠를 제공하는가 하면 상품도 판매하는 회사들 이다. ≪뉴스위크≫나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U. S. News & World Report) 같은 브랜드는 사라졌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과거 이러한 매체들 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공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양쪽 시나리오 모두에 같은 질문이 유효하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스스로를 통치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독립적이고 정확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갖고 있는가? 1997년 케임브리지에 모였던 언론인들은 한 가지 계획을 추진하기 로 결정했다. 그 계획의 내용은 언론인들과 시민들을 참여시켜 저널리 즘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두 가지 질문에 답을 찾고 싶었다. 만약 뉴스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저널리즘을 어 떻게든 다른 양식의 커뮤니케이션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저널리 즘은 어떻게 다른가? 만약 그들이 저널리즘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 지만, 몇 가지 핵심 원칙은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원

xxv


칙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그 뒤로 2년에 걸쳐, 이제 ‘저널리즘을염려하는언론인위원회(the 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라고 불리는 이 집단은 뉴스 취재 와 보도의 책임 문제에 대해 과거 어느 언론인 집단에서 시도했던 것보 다 가장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그리고 종합적인 분석을 실시했다. 우리 는 30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하고, 300여 명의 기자들이 증언에 나섰던 21차례의 공개 포럼을 개최했다. 우리는 대학의 연구팀과 힘을 합해 100여 차례에 걸쳐 한 사람에 3시간 30분이나 걸리는 언론인 심층 인터 뷰를 시도하며 그들의 가치관을 탐구했다. 우리는 기자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원칙들에 대해 언론인을 대상으로 두 차례 설문조사를 실시 했다. 우리는 최고 수준의 수정헌법 1조 전공 교수들과 저널리즘 학자 들을 모아 토론회도 개최했다. ‘우수한저널리즘을위한프로젝트(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 연구팀과는 10여 차례에 걸쳐 뉴스 취재 와 보도에 대한 내용 분석을 실시했다. 우리는 또 회의에 찾아온 기자들 의 과거 배경을 연구했고, 전국 각지에 있는 편집·보도국을 방문해 기 자 연수도 실시했다.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은 그러한 연구의 열매로 시작됐다. 이 생각들 은 그 이후 여러 해에 걸친 탐구를 통해 계속 발전해 왔다. 여러분이 이 책에서 읽는 내용은 저널리즘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은 아 니다. 오히려 이 책은 초기에 저널리즘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시민이 생 각하는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를 무엇이라고 해석하는지를 차근차근 설 명한다. 그리고 그들이 기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수행해 야 한다고 이해하는지도 제시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저널리즘이 진 화하면서 축적한 역사와 가치들이 새로운 세기 우리가 실천하는 저널리 즘의 바탕이 돼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새로운 저널리즘은 과거

xxvi


에 실천됐던 최고 수준의 저널리즘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저 널리즘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모든 세대는, 이전 세대들의 성취를 바탕으로, 늘 새로운 저널리즘 모델을 창조해 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21세기에 뉴스를 생산하려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일련의 원칙들을 제시한다. 이들은 정식 편집국의 기 자일 수도, 또는 사건 현장을 목격하며 촬영한 사진을 사진 교류 사이트 에 올리려는 일반 시민일 수도 있다. 혹은 소셜 미디어에서 포착된 사건 이나, 진행된 토론 내용을 뉴스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려는 사람일 수 도 있다. 이 책은 또한 수용자들은 그들이 소비하는 뉴스에서 어떠한 가 치를 기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도 포함한다. 2001년 출판된 초판은 20세기 말 시점의 저널리즘 이론과 문화를 정리했다. 2007년 나온 개정판은 디지털 시대의 시작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출간한 3판은 대부분 편집·보도국의 축소 를 불러온 사업 모델의 붕괴와 뉴스를 훨씬 광범위하고 다원적인 과정 으로 바꿔 버린 소셜 미디어의 등장 등 근본적인 뉴스 환경의 변혁 속에 서 저널리즘의 핵심 가치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탐색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 가운데 일부는 개정판 이후 그것이 암시 하는 의미가 제법 많이 바뀌었다. 앞서 우리가 설명했듯이, 기자 (journalist)는 과거 뉴스 조직에서 일하는 전문직 종사자를 가리켰다. 이들은 앤더슨(C. W. Anderson)과 클레이 셔키(Clay Shirky), 그리고 에밀리 벨(Emily Bell)이 산업적 저널리즘(Industrial Journalism)이라 고 부르는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 었다. 이제 기자는 그들이 윤리적으로 책임감 있게 접근한다면 뉴스를 생산하려는 남자, 여자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12) 이는 중요한 변화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엄청난 변화는 아니다. 우리는 이 책에

xxvii


서 지속적으로 누가 기자고 누구는 기자가 아닌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 니라고 주장해 왔다. 문제는 생산된 기사가 우리가 저널리즘이라고 부 르는 일의 성격에 합당한가하는 점이다. 이는 여전히 그러하다. 디지털 시대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전에도, 그동안 발생했던 일의 뿌리는 단단히 내려져 왔었다. 대부분의 기자가 쉽게 저널리즘 이 론을 설명할 수 없었을 때(심지어는 그들이 함께 공유하는 전문 직업적 원칙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도 못할 때) 대부분 시민은 기자들이 전 문직 이론에 따라 작업하기를 기대했었다. 좀 더 혼란을 무릅쓰고 말하면, 우리 교육제도는 학생이 고등학교 와 대학을 졸업하면 대수나 기하학, 외국어, 문학 등 영역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앞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시민 생활 의 교본(the literature of civic life)이라 할 수 있는 뉴스에 대한 이해는 별로 심각하게 강조되지도, 교육이 제공되지도 않아 왔다. 시민과 기자들 양측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명료성의 부족은 우리 저 널리즘을 약화시켜 왔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이 함께 일어서 고 쓰러진다는 명언을 받아들인다면, 이 명료성의 부족은 2008년 이후 미국 사회가 정치의 양극단화와 경제위기 상황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 도록 하는 데도 상당 부분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저널리즘은 무엇이 어야 하는가와 뉴스를 어떻게 현명하게 소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명료 성의 부족은 기자와 시민 모두가 디지털 변혁의 결과를 제대로 대처하 지 못하도록 방해해 왔다. 디지털 혁명은 뉴스를 생산하는 자들에게 훨 씬 더 명료한 목적의식을 요구하고, 소비하는 시민에게는 더 분명한 각 성을 기대한다. 자유 언론의 이론과 실천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의 첫 번째 헌법적 권리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소비하는 저

xxviii


널리즘의 품질은 단순히 발행인이 원하거나 할 수 있는 선에서 제공하 는 것이 아니라 공중이 요구하는 수준을 지켜 줘야 하는 가치다. 그리고 자유 언론(free press)은 표현의 자유(free speech)와는 명백히 다르다. 그날의 사건에 대해 보도하고 논평하는 일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동의어는 아니다. 줄여 말하면, 우리들의 민주생활의 품질은 공 중이 사실을 알 수 있는지와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좌우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요즘 같은 네트워크 사회라 할지라도 기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기자를 보유하는 일은 시민들이 점 점 더 선전선동과 뉴스를 구분할 수 있는지와 또 그러한 분별이 중요하 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원칙들이 있다. 이 원칙들은 시민들이 반드시 지켜지기를 기대하는 것 들이기도 하다. 이 원칙들은 시간이 흐르며 강화되기도 약화되기도 해 왔다. 그러나 계속 살아남아 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시민이 갈수록 복 잡해져 가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려면 꼭 필요로 하는 뉴스를 제공 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원칙들은 기술과 소셜 미디어 등의 압력으로 저널리즘이 변화해도 기자와 시민을 도와 왔다. 그것들이 저 널리즘의 기본 원칙들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저널리즘의 목적은 시 민이 자유로울 수 있고 자치정부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공 급하는 일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저널리즘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에 대한 것이다. 2. 저널리즘의 최우선적인 충성 대상은 시민들이다. 3. 저널리즘의 본질은 사실 확인의 규율이다.

xxix


4. 기자들은 그들이 취재하는 대상으로부터 반드시 독립을 유지해 야 한다. 5. 기자들은 반드시 권력에 대한 독립적인 감시자로 봉사해야 한다. 6. 저널리즘은 반드시 공공의 비판과 타협을 위한 포럼을 제공해야 한다. 7. 저널리즘은 반드시 최선을 다해 시민들이 중요한 사안들을 흥미롭 게 그들의 삶과 관련 있는 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한다. 8. 저널리즘은 뉴스를 포괄적이면서도, 비중에 맞게 다뤄야 한다. 9. 기자들은 그들의 개인적 양심을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10. 그들의 선택을 통해 뉴스 생산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뉴스에 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 들이 스스로 생산자와 편집자가 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왜 이들 열 가지인가? 일부 독자는 무언가 항목이 빠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공정성(fairness)은 어디 있는가? 균형성(balance)은 어디 있 는가? 우리는 저널리즘의 과거를 조사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작업을 하 면서 뉴스와 관련된 익숙하고 유용하기까지 한 여러 개념들이 사실은 너무 모호해서 저널리즘의 근본적인 원칙의 수준까지 가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공정성(fairness)은 너무나 주관적 인 개념이어서 실제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지침을 제시하지 못했다. 반면에 균형성(balance)은 너무 제약적이어서 자주 진실을 왜곡하는 보도 방법이었다. 또 다른 신화는 독립성(independence)이 기자가 중립적이기를 요 구한다는 내용이다. 이 혼란은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개념이 아주 망가져 그 개념이 바로잡으려고 했던 바로 그 상황을 지칭하는 상태까

xxx


지 갔기 때문에 발생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문제는 바로잡고자 한다. 우리는 20세기 초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사회과학 영 역에서 저널리즘으로 건너왔을 때의 의미를 복원하려 한다. 객관성은 기자는 편견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개념이 아니었다. 거꾸로, 기 자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방법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는 뜻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는 말이다. 그러면 뉴스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방어할 수 있고, 엄밀한, 그리고 투명한 취재와 보도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 달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오늘날 같은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더욱 중요 하다. 오늘날 콘텐츠는 온갖 종류의 취재원과 보도 경로를 통해 전달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 객관성이 아니라 투명하게 전달되는 방법 의 객관성이란 개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중하다. 새로운 뉴스와 정보의 열린 생태계에서 전문직 기자의 역할은 축소 되고, 시민의 역할은 확장된다. 그러나 목소리가 동등하지는 않다. 열린 장터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는 자들, 예를 들면 자 본가, 혹은 홍보 전략을 수행할 역량이 있는 이들, 그리고 메시지의 효능 을 키울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운영할 수 있는 이들은 유리한 위치를 점 하게 된다. 과거 20세기에 산업적 언론 또는 전문직 언론사가 제4부를 형성했다면, 시민이 생산자이자 증인이 될 수 있는 오늘날의 열린 시스 템은 제5부를 구성한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중요한 요소는 이 새 로운 주체에는 과거 기자들이 취재 대상으로 대하던 기관과 인물들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 뉴스 메이커들은 상업적 또는 정치적 목적을 위 해 공중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출처가 많다는 것이 더 많은 진실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만약 우리 가 뉴스를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원칙들을 잃어버린다면, 축소된 제4부

xxxi


와 새롭게 추가된 제5부의 공헌을 모두 합쳐 놓아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내용을 공급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 안에 있는 다른 강력한 세력 과 기관을 자유롭고 체계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독립기관으로서의 언론 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세기에 민주주의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는 뉴스는 독립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의 공급자로 살아남을 것인가다. 아니면 뉴스가 자기 이익 중심의 선전선동물에 자리를 내주 거나 지극히 정파적 필터들이 시민들에게 협소한 채널을 통해 제한된 정보를 제공하는 생태계가 자리를 잡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모 든 주장은 검증되지 않고, 목소리가 가장 큰 자가 이기게 된다. 답은 믿 을 수 있는 뉴스가 제공되는가뿐 아니라 시민들이 어떠한 뉴스가 믿을 수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또 우리가 뉴스와 뉴스를 생 산하는 자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도 중요하다. 우리가 독립적인 언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념을 갖고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는가도 중요하고, 시민으로서 그러한 가치가 소중하다고 느끼는지도 매우 중요 하다. 누군가는 이러한 저널리즘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지를 물을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답변은 한순간에 대담한 행동으로 또는 정형화된 해결책으로 문제 를 해결하고 싶은 욕심은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저널리즘은 그러한 방식으로 성장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오늘날 사회에서 저널리즘이 당면한 문제를 풀어낼 해결책 을 5개 또는 10개로 정리된 프로그램 방식으로 찾아낼 수 없는 두 번째 답변은 우리가 함께 지난 70여 년 축적한 저널리즘 체험이 그 문제의 해 법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더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xxxii


것이다. 그 대답은 뉴스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저널리즘의 원칙들을 완전히 익히고, 그 원칙을 자신들이 매일 작업하고 생각하는 방식에 엄격하게 적용할 때 찾아질 것이다. 답은 또 시민이 훌륭한 뉴스를 인정하고, 그 들 자신의 뉴스를 만들고, 그래서 좋은 뉴스에 대한 더 큰 수요를 만들어 갈 때 찾아질 것이다. 해결책은 마치 운동선수들이 그들의 능력을 완벽하 게 만드는 과정과 같은 방식으로 찾아질 것이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이 원칙들을 제2의 천성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해야 목적의 명료성, 실천의 자신감, 그리고 시민의 존경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의 열쇠는 우선 저널리즘의 목적을 지탱하는 원칙들을 가려내고 어느 한 세대가 그러한 원칙을 수행하기 위해 개발해 쓰는 기 술적 요소들과 혼동하지 않는 일이다. 원칙의 최우선성을 인정하고 나 서야, 그리고 그 원칙을 제작 기법과 혼동하지 않고서야, 저널리즘은 새 세기에 맞게 진화하고 그에 걸맞은 윤리적인 변화를 이뤄 낼 수 있다. 그 래야 새로운 세기, 새로운 기술 환경에서 새롭게 정보의 망에 연결돼 생 활하는 시민을 위해 민주주의적 사명을 실천할 수 있다.

xxxiii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