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현덕 작품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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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 작품집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전 세계 모든 학문 분야 고전이 3000종 이상 출간됩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은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은 고전의 완전한 번역입니다. 고전선집을읽고다음으로클래식을 읽고 마지막으로 원전을읽는점진적독서로 더욱 심오한 지식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일러두기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에서 출간하는 한국 근현대 소설 100종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 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 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 을 엮은이로 추천했습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 석을 덧붙였습니다. ∙이 책은 <남생이>(조선일보, 1938. 1. 8~25), <驚蟄>(조 선일보, 1938. 4. 10~23), <層>(조선일보, 1938. 6. 16~19), <두꺼비가 먹은 돈>(조선일보, 1938. 7), <골목>(조광, 1939. 3), <잣을 까는 집>(여성, 1939. 4)을 저본으로 삼았 습니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습니 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 용했습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 로잡았습니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습니다. ∙주석은 현대에는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 현대의 독자들이 쉽 게 뜻을 알기 어려운 한자어, 원전의 글씨가 잘 안 보여 엮은이 가 추정한 글자, 사투리, 토속어, 북한어 등 설명이 필요한 경 우에 달았습니다.


<골목>, 조광, 1939. 3


남생이



호두형으로 조고만 향구 한쪽 끗흘 향해 머리를 들고 안즌 언덕 그 서남면 일대는 물미1)가 밋밋한 비탈을 감어나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부터다. 거의 방 한 아2)에 부억이 한 간, 마당이랄 것이 곳 길이 되고 대문이자 방문이다. 개미집 가튼 길이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군대군대 껌언 재털이가 싸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 깨여 진 사기요강이 굴러 잇는 토담 양지짝에 누덕이가 널여 한 종일 퍼덕인다. 남비 한아 사기그릇 멧 개를 옆퍼논3) 가난한 붓두막에 볏 치 들고 아무도 업는가 하면 쿨룩쿨룩 늙은 기침소리가 난 다. 거푸 기침은 자즈러지고 가늘게 조라들드니 방문이 탕하 고 열린다. 해볏츨 가슴 아래로 바드며 가죽만 남은 다리를 문지방에 걸친다. 가느다란 목, 까칠한 귀밋, 방안 어둠을 뒤 로 두고 얼굴은 무섭게 차다. “노마야—.” 힘 엄는 소리다. 대답은 업다. 좀 더 소리를 노펴 부른다. 세 번째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악성을 친다. 역시 대답은 업 다. 다시금 터저 나오는 기침에 두 손으로 입을 싼다. 길 한아 건너 영이집 토담 미테서 노마는 그 소리를 곰보

1) 물미: 물매. 수평을 기준으로 한 경사도. 2) 한아: 하나. 3) 옆퍼논: 엎어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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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곰보를 부르는 소리로 쯤 드러넘기고 만다. 맛춤 영이가 부억문 여페 부터서서 손을 뒤로 돌려 숨기고 “이거 뭔데.” 조곰 전 영이 할머니가 신문지에 떡을 사들고 드러가든 것과 영이가 투정을 하든 것까지 아는 일이니까 노마는 가즌 것이 무언지 의심날 게 없다. 그러나 “구슬이지 뭐야.” “아닌데 뭐.” “물부리지 뭐야.” “아닌데 뭐.” “석필4)이지 뭐야.” “이거라누.” 맞츰내 영이는 자신이 먼저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하고 턱 미테 인절미 한 쪽을 내민다. 금새 노마는 어색해진다. 두어 번 억개를 저흐니 슬몃이 뒷짐 진 손이 풀려 밧는다. 영이보다 먼저 먹어버리지 안흘 양으로 적은 분량을 잘게 씹어 천천히 넘기며 차츰 노마는 곰보를 부르든 소리는 기실 아버지가 저를 부르든 음성이든 것을 깨다러 간다. 그러나 일부러 대답하지 안흔 그 일이 목을 넘어가는 떡맛보다 더 고수하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하는 반항이다. 날마다

4) 석필: 납석 따위를 붓 모양으로 만들어 석판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는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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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츰에 집을 나갈 때 어머니는 노마에게 어르는 말이 잇다. ‘아버지 겨테서 떠나지 말고 시중 잘 드러 마음 상하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것은 어머니 자신이 할 일이지 노마가 할 일 은 아니다. 자기가 할 일을 노마에게 맛기고 어머니는 한종 일 조흔대 나가 멋대로 지내다가 해가 점으러야5) 도라온다. 그동안 아버지나 노마가 얼마나 자기를 기다렷든거나 그 하 로가 얼마큼 고초스러웟든가6)는 조곰도 아란곳하려고도 안 는다. 다만 봉지에 저녁쌀을 가지고 온 것이 큰 호기7)다. 그 리고 바람에 문창호지가 떠러진 것까지 노마의 잘못으로 눈 을 흙인다. 실로 야속하다. 이런 어머니가 이르는 말쯤 어기 엿기로 그리 겁날 것이 없다. 그러나 노마 저는 모르지만 여기엔 자기네답지 안케 어머 니만이 인조견이나 문의8) 잇는 비단옷을 입고 단이는 것이 며 선창에 나가 만은 사람에게 귀염을 밧는 여기 대한 샘이 크다. 어머니는 이른바 ‘항구의 들병장사9)’다. 노마는 이런 어머니를 보앗다. 본래 어머니의 뒤를 밟어 선창엘 갓섯다. 그러다 마당 군중 가운데서 어머니를 일헛

5) 점으러야: 저물어야. 6) 고초스러웟든가: 괴롭고 어려웠던가. 7) 호기: 꺼드럭거리는 기운. 8) 문의: 무늬. 9) 들병장사: 예전에, 남사당놀이 판에서 구경꾼에게 병에 술을 담아서 팔던 일. 또는 그런 장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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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시 차섯슬 때 노마는 좀 더 놀랏다. 목선10) 싸하올린 볏섬 우에 올라안저서 어머니는 사오인 사나이들과 석겨 히 롱을 하고 잇다. 어깨에 팔을 걸고 몸을 실린 조선바지에 양 복저고리를 입은 자에게 어머니는 술잔을 입에다 대주랴 하 고 그자는 손바닥으로 막으며 고개를 젓고 그리고 술을 바더 마시고나서 또 빈 잔에다 술병 아구리11)를 기울이는 어머니 를 제 무릅 우에 안치려 하고 아니 안즈려 하고 나머지 사람 들도 모두 어머니를 중심으로 히히낙낙 하는 것이였다. 노마 는 그런 어머니를 전혀 꿈에도 본 적이 업다. 어머니는 그곳 에 와서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떨고 일직이 노마 자신도 한번 바더보지 못한 귀염을 뭇사람에게 밧는 것이 아닌가. 자기 어머니가 그처럼 소중한 존재인 것은 몰랏다. 노마는 저도 갑자기 흥이 오르는 듯 시펏다. 모든 사람에게 저와 어머니 의 관게를 크게 알려주고도 시펏다. 노마는 어머니를 불럿 다. 두 번 세 번 그러나 해벼츨 손으로 가리고 찌긋이 노마를 보든 어머니는 점점 자기 집 부어케서 흔이 볼 수 잇는 일그 러진 얼굴로 변햇다. 가튼 얼굴로 어머니는 노마를 창고 뒤 로 끌고 가 말업시 머리를 쥐여박엇다. 이런 때 등 뒤로 배여 잇든12) 양복 조고리가 나타나서 조핫다. 그는 어머니를 안어

10) 목선(木船): 나무로 만든 배. 11) 아구리: ‘아가리의 ’ 북한어. 물건을 넣고 내고 하는, 병`그릇`자루 따위의 구멍의 어귀. 12) 배여 잇든: 배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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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밀고 양복 주머니에서 밤을 꺼내 노마 머리 우에 흘려 떠러트리며 우섯다. 붉은 얼굴에 밤송이 가튼 털보엿다. 집에 잇슬 때 어머니는 담벼락가티 말이 업고 난 나이가 적다. 노마를 나무래도 말보다 손이 압서 소리 업시 꼬집거 나 쥐여박거나 할 뿐 언제든 성이 안 풀려 몽총이13) 입을 오 그린다. 남편이 부르면 대답은 업시 얼굴만 내놋는다. 그를 대하고는 아버지도 멍추14)가 된다. 어쩌면 아버지는 안해가 보는 대서는 일부러 더 알는 시늉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고 눕거나 이불을 들쓰고 될 수 잇는 대로 안해에게서 눈을 감으려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나가고 업스면 이러나 안저 이불도 개여올리고 노마를 상대로 이야 기도 한다. —노마야 노마야. 가락니피15) 다그르 굴러나리며 지붕 넘어로 아버지의 가 느다란 음성이 넘어 온다. 방안에서 들창16)을 향해 부르는 소리다 노마는 살금살금 아프로 도라간다. 필시 요강을 가시 여17)오라고 창문 박게 내노핫슬18) 것이니 살몃이 부시여

13) 몽총이: 몽총히. 붙임성과 인정이 없이 새침하고 쌀쌀하게. 14) 멍추: 기억력이 부족하고 매우 흐리멍덩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15) 가락니피: 가랑잎이 16) 들창: 들어서 여는 창. 17) 가시여: 가시어. 물로 깨끗이 씻어. 18) 내노핫슬: 내놓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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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9) 들고 갈 작정. 웨냐면 노마는 요강을 가시느라고 지금까지 가래20)를 한 것이지 결코 부르는 소리를 듯고도 모른척한 것이 아니라는 변명을 삼을란다. 그러지 안허도 아버지는 요즘으로 노마를 겨테서 잠시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오줌을 누러 가도 벌서 ‘어디 가니’ 그리고 영이하고도 놀지 말고 아무하고도 놀지 마라, 만날 아버지와 가치 방안에만 잇서달라는 거다. 그러 니까 노마는 아버지가 잠드는 틈을 엿보지 안흘 수 업고, 그 러나 잠이 깨기 전에 도라와 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여서 흔 히 날벼락을 맛는다. 노마는 안가슴을 헤치고 벼츨 쪼이고 안젓는 아버지와 마 주친다. 갈갈이 뼈가 드러난 가슴이다. 그 가슴을 남에게 보 이는 때면 고연이21) 화를 내는 아버지니까 노마는 또 한 가 지 죄를 번 셈이다. 지래 울상을 하고 손가락을 입에 문다. “노마 이리 온.” 그러나 고개를 처들게 하고 코미틀22) 씨치드니23) “저리 가 안저봐라.” 비탈을 찍어 판 손바닥만 한 붉은 마당에 오지항아리 몇

19) 부시여다: 부시어다. ‘부시다는 ’ ‘그릇 따위를 씻어 깨끗하게 하다라는 ’ 뜻. 20) 가래: ‘지체의 ’ 뜻으로 짐작됨. 21) 고연이: 공연히. 22) 코미틀: 코 밑을. 23) 씨치드니: 씻기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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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섯고 구구자나무 그림자가 지튼 한편은 벼치 단양하 다24). 아들을 땅바닥에 주저안치고 아버지는 묵묵히 바라다 보기만 한다. 장독 뒤로 한 포기 억새가 적은 바람에 쏴쏴 하 고 어되서 귀드람이도 운다. 몰랏드니 여기는 흡사 고향집 울 안 가튼 생각이 낫다. 추석 가까운 날 맑은 어느 날 어린 노마가 양지짝에 터벌 거리고25) 안저 흙작난을 하는 그런 장면인상 시픈26) 구수한 땅내까지 끼친다. 지금 안해는 종태기27)에 점심을 담어 뒤로 돌려 차고 뒷산으로 측넝쿨28) 거드러 갓거니−. “노마 너 절골집 생각나니.” “응.” “너두 가보구 시플 때 잇니.” “응.” 밧 가슬29)에 주춧돌만 남은 절터가 잇는 적은 마을이다. 뫼갓30)에는 나무가 흔하고 산답31)이나마 땅이 기름지고 살 24) 단양하다: 당양(當陽)하다. 햇볕이 잘 들어 밝고 따뜻하다. 25) 터벌거리고: 퍼더버리고. ‘퍼더버리다는 ’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편하게 뻗 다라는 ’ 뜻. 26) 장면인상 시픈: 장면인 것 같은. 27) 종태기: ‘종다래끼의 ’ 방언(경기). 작은 바구니. 다래끼보다 작으며 양쪽에 끈을 달아 허리에 차거나 멜빵을 달아 어깨에 메기도 한다. 28) 측넝쿨: 칡넝쿨. 29) 밧 가슬: 밭 가장자리. 30) 뫼갓: 멧갓.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가꾸는 산. 31) 산답(散畓): 한 사람의 소유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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