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이 젠조 단편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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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西善藏 短篇集 가사이 젠조 단편집


편집자 일러두기 ∙ 이 책은 분센도(文泉堂)판 ≪가사이 젠조 전집(葛西善藏全 集)≫(1974) 가운데 초기·중기·후기의 대표 단편 네 편을 번

역했습니다. ∙ 총 5권으로 발간된 ≪가사이 젠조 전집≫ 중 <애절한 아버지>, <어린 자식을 데리고>는 1권, <모밀잣밤나무의 어린잎>, <호반 수기>는 3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이 책의 주석은 모두 옮긴이가 붙인 것입니다. ∙ 괄호 안의 말과 바깥 말의 독음이 다를 때, 괄호가 중복될 때에 는 [ ]를 사용했습니다. ∙ 외래어 표기는 현행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 다.


차례

애절한 아버지···················1 어린 자식을 데리고 ················19 모밀잣밤나무의 어린잎 ··············59 호반 수기 ····················79

해설 ······················131 지은이에 대해··················135 옮긴이에 대해··················138


애절한 아버지


1 그는 또다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변두리 구석진 생 활로 떠밀려나가고 있었다. 4월 말 무렵이었다. 하늘에는 뿌연 연무와 같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햇볕은 따갑게 벚나무의 푸른 잎에 내리 쬐고 있었으며, 갓 태어난 새끼 참새가 짹짹 지저귀고 있었 다. 어디선가 아침부터 밤까지 길을 닦는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피곤에 지쳐 얼굴이 창백했고 눈빛은 병든 짐승처 럼 거슴츠레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가만히 있 어도 심장은 두근거렸고 애써 진정시키려 하면 할수록, 주 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습격이라도 당한 듯 심장의 두근 거림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번 하숙집은, 하급관리의 미망인처럼 보이는 마흔대 여섯 살의 주인아주머니가 시골뜨기 식모와 함께 알뜰하게 꾸려가고 있었다. 수목이 무성한 변두리의, 처마가 낮은 단 층 건물로 어두컴컴하고 우중충한 작은 집이었다. 그가 지 닌 것이라고는 침구와 책상, 그리고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 은 오동나무로 만든 작은 장롱뿐이었다. 이 오동나무 장롱 만이 그가 길고 긴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전당포에 팔아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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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고 남겨둔, 애절한 추억이 깃든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옻칠이 벗겨진 작은 책상을, 대나무 울타 리 너머 좁은 길을 향해 난 창가에 놓아두었다. 눈비에 삭아 하얗게 부식된 창문의 양철 차양과 거의 맞닿은 곳에, 시들 시들한 벽오동나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아무렇게 심어 져 있었다. 그리고 검은 쐐기 한 마리가 매일 그 나무줄기를 기어 다니거나, 채 자라지도 않은 잎사귀 안쪽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었는데, 늘 고독에 잠기곤 했던 그는 어느새 그 쐐기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 느 사이엔가 하찮고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어떤 숙명적인 암시와 연관 짓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그에게는, 쐐기의 움 직임 하나하나로 자연스럽게 날씨 변화를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독한 그의 생활은 그 어디를 가나 변함이 없고 외로웠 으며,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한 사람의 애절한 아버지 였다. 애절한 아버지−그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지금부터 장마에 접어드는 기간이 1년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계절이 되어버렸다. 그는 요사이 느껴지는 기후의 압박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예년과 마찬가지로, 해가 지는 오후부터 동네 주변을 거닐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하는 것은 괴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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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기도 했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병사를 태우고 도쿄의 이타바시(板橋) 화약 제조소의 화약고를 드나드는 지저분 한 자동차가 덜커덩덜커덩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연이어 그 의 옆을 거칠게 지나치곤 했다. 들것에 실린 채 누워 있는 병 자의 늘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느티나 무의 어린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부드러운 바람, 반짝이며 일렁이는 아지랑이, 쉼 없이 지저귀는 작은 새들…. 그는 그 러한 것들에 몸서리쳤고 현기증을 느꼈지만, 온몸이 저려오 는 괴로움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거리에서 금붕어를 보 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금붕어와 그의 어린 아들은 어느새 그에게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2 그는 아직 젊었다. 하지만 그의 아이는 벌써 네 살이나 되었 다. 그리고 그의 먼 고향에서, 늙어 홀로 지내는 그의 어머 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그와 아이, 그리고 아이 엄마 셋−작년 여름 전 까지는 교외의 작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세상으로부 터 완전히 은둔한 듯한, 가난하지만 조용한 삶이었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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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나사로 만든 신을 신고 아장아장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나, 고독한 시인에게는 유일한 벗이요 형제였다. 그와 아이는 신불(神佛) 잿날 신사(神社)에 다녀오던 길 에 사온, 활악기의 일종인 싸구려 티가 나는 호궁을 켜거나, 연필로 그림을 그리거나, 술래잡기 따위를 하면서 놀았다. 버려진 강아지와 금붕어와 새끼 거북 몇 마리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부자의 즐거운 일과의 하나로, 맑게 갠 날 오후에는 아이 손을 잡고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어귀에 있는 논두렁으로 먹이를 주우러 가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 행복했던 생활도 잠시뿐, 나락의 끝으로 점점 빠져들기 시 작했다. 순종적이었던 그의 아내의 한숨이 점점 힘없이 깊 어만 갔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채 방치된 마당에는 풀이 제멋대로 자랄 대로 자라 있었다. 금붕어는 새끼 거북과 함께 하얀 세숫대야에 넣어져 툇 마루에 내놓여 있었다. 그들의 운명은 하루하루 절박한 상 황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아이를 위한 일과는 여전히 계 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따금 그의 집에 드나드는 짓궂은 술친구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새끼 거북을 마당 풀 속에 풀어주는 바람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 는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 거북이 없네. 새끼 거북이 없어….” 아이도 며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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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새끼 거북 잃어버린 일을 잊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그들 의 일과도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으며, 이윽고 그들의 가슴 아픈 이별의 날이 오고 말았다.

3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달래며, 오후의 산책 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그가 산책하는 범위 내 에서는, 어느 전등 가게에 금붕어가 있는지 없는지 대충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도시, 생활, 친구들, 모든 색채나 음악, 그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집요하게 담을 쌓은 채 그저 자신 만의 협소한 세계 속에서 묵상하며 지내는 냉담하고 우울한 시인과도 같았다. 금붕어를 보는 것은 그의 협소한 세계에 모질게 인두질을 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금붕어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금붕어가 보이지 않는 길을 택해 걸었지만, 무심코 발길을 멈추어 선 채 유리 어항 속에 서 하늘거리며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를 넋 놓고 볼 때도 있 었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고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거리 를 애써 눈물을 머금고 걷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 것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그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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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변두리 동네 어귀에서 나무 그늘에 짐을 내려놓고 쉬 고 있던 금붕어 장수를 보았을 때의, 가슴 시린 첫 감상을 잊 을 수가 없었다….

4 어느새 장마 직전의 눅눅함, 그리고 질식될 것만 같은 변덕 스러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들이 왔다. 그는 요즘 오후가 되면 으레 나타나는 불쾌한 열 때문에, 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부식과 불안 에 시달리고 있었다. 겨우 먹고 자기만 하는, 허덕이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음침한, 낮이나 밤이나 웃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집이 었다. 하지만 눅눅한 냄새로 찌든 지저분한 예닐곱 개의 방 에는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얌전하지만 가난한 학생 들과, 그의 옆방에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고, 그 맞은편 방 에는 무직인 예비역 사관이 살고 있었다. 언제나 집요하게 아이의 장래와 암울한 명상에 사로잡혀 투덜거리며 하릴없 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의 음침함과 적막감은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지만,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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