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이동화선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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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제삿날

감사



학교 끝나자마자 집으로 오라던 어머니가 집에 없었다. ‘오늘이 외할머니 제삿날이라고 했는데?’ 어머니 손전화는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는 출장 중이니까 당연히 모를 거 고.’ 다른 일도 아니고 외할머니 제사 지내러 가야 하는데 연락이 안 되니 걱정이 되었다. ‘엄마 혼자 갔나?’ 외갓집에 전화를 걸었다. 외숙모가 음식을 하다 달려오 셨는지 숨을 헐떡이며 전화를 받았다. “엄마 아직 안 왔다. 현준이 너도 올 거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문단속 잘하고 삼거리로 나와.” 어머니는 왜 늦었냐고 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 다. 삼거리로 달려 나갔더니 슈퍼마켓 앞에 어머니 차가 서 있었다. 자동차 범퍼가 찌그러진 것이 눈에 띄었다. 차 문을 열자마자 어머니에게 물었다. “사고 났어? 엄마 안 다쳤어?” “응. 차 수리하느라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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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그랬는데?” “무단 횡단하는 사람을 피하려다 가로수를 들이받았어. 얼마나 놀랐는지…. 생각하기도 싫다.” 어머니 어깨가 빨랫줄에 걸린 옷처럼 축 늘어진 것이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엄마, 힘들면 외갓집 가지 마. 전화하고 다음에 가요.” “천천히 가면 돼. 어서 타.” 어머니는 운전대에 바싹 다가앉아 어두워진 차도를 뚫 어져라 내다보았다. 자동차는 지방 도로로 이어지는 큰길 을 벗어나 저수지를 끼고 돌았다. 보름달이 저수지 물에 잠겨 찰랑찰랑 물놀이를 하고 있 었다. 저수지를 지나 샛길로 들어선 다음부터는 돌이 많 아 울퉁불퉁 흔들렸다. 황톳길 언덕 과수원에서 꽃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하얀 배꽃들이 눈꽃인 양 눈이 부셨다. 백 미러 속에서 눈꽃들이 일렁일렁 춤을 추었다. 과수원 길 을 지나자 아리랑 고갯길이 나왔다. 고갯마루에서 갑자기 차가 덜컹하더니 멈추어 서고 말 았다. 어머니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아까 급하게 수리한 사람인데요. 아리랑 고개에서 차 가 멈췄거든요. 예에.” “카센터 아저씨가 여기로 오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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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젖혀 운전석에 비스듬 히 누웠다. “오늘 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회사 일로 오전 내 내 골치 아팠는데….” 어머니가 라디오를 껐다. 갑자기 소리가 뚝 끊겼다. 사 실은 소리가 끊긴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소리들이 들려왔 다. 개구리 울음소리, 새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 풀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 가늘게 어머니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는 어 디만큼 오고 있는 걸까? 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고갯길을 내려다보았 다. 어머니는 이 고갯길을 넘나들 때마다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나도 이 고갯길을 지날 때면 엄마가 한 말 이 생각나곤 했다.

“엄마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이 고갯길을 걸어 다녔 어. 안골까지 마을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 았거든. 초등학교는 읍내에 있는 학교를 다녔지만, 중·고 등학교는 읍내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어. 그러니까 새 벽별 보고 집을 나서서 밤하늘 별을 헤며 돌아오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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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집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할머니가 이 고갯마루 에 앉아 기다리셨지. 여름엔 미숫가루 탄 물을 준비했다 가 목을 축여 주셨고. 한겨울엔 아궁이에 넣어 빨갛게 달 군 돌멩이를 품고 계시다가 언 몸을 녹여 주셨어. 어느 가을밤이었다. 억새풀 사이로 어른어른 할머니 뒷 모습이 보이더라. 할머니가 엄마를 놀래 주려고 숨어 계 시는 줄 알았어. 할머니 몰래 살금살금 다가가 놀래 주었 는데, 글쎄 할머니가 소변을 보시다가 졸고 계신 거였어. 얼마나 일이 힘들고 힘에 부치셨으면…. 그날 엄마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속으로 울었단다. 할머 니께 잘해 드리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 어. 엄마는 결혼을 하고 너를 낳자마자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너까지 할머니에게 맡겼거든.”

그리 오래지 않아 카센터 아저씨가 왔다. 어머니가 자동차 소리에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엔진을 들어내야겠어요.” 아저씨가 자동차 보닛 뚜껑을 열어 보고 말했다. “되도록 빨리 고쳐 주세요. 차 없이 출퇴근이 힘들어서 요. 수리되는 대로 연락 주세요.” 어머니는 아저씨께 명함을 건네주고 차 안에서 가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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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백을 꺼냈다. 어머니와 나는 안골 외갓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달빛 이 자갈길에 내려앉아 하얗게 빛났다. 어머니와 내 발밑 에서 자갈들이 짜그락짜그락 소리를 냈다. 나도 여기 오면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저녁마다 엄 마 보고 싶다고 울면 할머니가 나를 업고 엄마 마중을 나 오셨으니까.

“할무니, 엄마 언제 와?” “달 뜨면 온다. 쪼매만 더 기다려라.” “달 떴는데 엄마 왜 안 와?” “어디만치 오나 머리 긁어 봐라.” 내가 손으로 머리를 긁으면, 할머니는 엄마가 어디쯤 오는지 점을 쳐 주었다. “뒤꼭지 긁는 거 보니께 삼거리까지 왔네.” 할머니 품에 안긴 나는 어둑어둑한 고갯길을 눈이 빠지 게 내려다보았다. 바람결에 나뭇가지라도 흔들리면 왈칵 무섬증이 일었다. “할무니, 엄마한테 가자.” “엄마 금방 올 끼다. 머리 한번 긁어 봐라.” 나는 머리를 조심스럽게 긁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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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머리 긁는 거 보니 아리랑 고개 넘는갑다.”

할머니 점괘는 더러 빗나가기도 했지만 잘 맞았다. 어 두운 수풀 저쪽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나면 엄마 얼굴이 불쑥 나타나곤 했으니까.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여기 지날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한테 죄 를 지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파서.” “무슨 죄?” “눈 오는 날이면 눈까지 치우셨다는데…. 엄마는 할머 니가 깨끗이 비질해 놓은 길을 걸어오면서도 한 번도 감사 하다는 생각을 못 했어. 할머니가 엄마를 위해 눈을 치운 줄도 몰랐으니까. 할머니께 감사해야 할 일이 어디 그 일 뿐이었겠니? 하지만 한 번도 감사하다는 말을 못 했다. 그 렇게 쉽게 가실 줄 몰랐는데…. 두고두고 가슴이 아파.” 오늘 밤 나도 할머니 냄새가 그립다. 바람에 돌배나무 꽃잎이 함박눈처럼 날렸다. “오늘 밤 할머니도 이 길을 걸어오시겠지?” “엄마도 참, 하늘나라 엘리베이터 놔두고 왜 걸어오세 요?” “그래 니 말이 맞다. 하늘나라로 이사 가셨으니 이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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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그만하셔야지.” 어머니와 나는 푸른 달빛을 밟으며 외할머니 댁으로 왔 다.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외양간에서 누렁이가 울었다. 울 음소리가 점점 잦아지다 다시 커졌다. 누렁이 비명에 사 촌 동생 수만이가 달려 나갔다. 나도 수만이를 뒤따라 나 갔다. 누렁이가 외양간 벽에 몸을 부딪치며 몸부림을 칠 때마 다 누렁이 입에서 허연 거품이 나왔다. “누렁아, 울지 마래이. 할부지, 누렁이 죽심니더!” 수만이는 누렁이를 달래다가 할아버지를 부르다가 어 쩔 줄을 몰랐다. 제사를 지내던 식구들이 외양간으로 달려 나왔다. “걱정 마. 누렁이가 새끼 낳으려고 아픈 거야.” 어머니 말에 마음이 놓였지만 누렁이가 힘들어하는 모 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외삼촌이 외양간에 전등을 환하게 켜 주고 마른 짚을 수북하게 깔아 주었다. 누렁이가 엎치락뒤치락 몸부림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힘이 주어졌다. “진통제 같은 것 먹이면 안 돼요? 너무 불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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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누운 채 숨을 헐떡거리던 누렁이가 침을 질질 흘렸 다. 누렁이 배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코에서 콧김이 뿜 어져 나왔다. 힘을 줄 때마다 아랫배가 꿈틀거렸다. “엄마도 나를 낳을 때 저렇게 아팠겠지….” 나도 모르게 목이 잠기고 눈 밑이 젖었다. “시간이 지난 것 같지예? 손봐 줘야 되는 거 아입니까?” 외삼촌이 할아버지께 물었다. “송아지 위치가 잘몬됐는가? 함 봐라.” 외삼촌이 외양간으로 들어가시더니 누렁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늘어진 배를 만져 보았다. “위치는 제대로인데 배 속의 송아지가 너무 큰 거 같심 니더.” 누렁이가 음매 하고 큰 소리로 울더니 배에 힘을 주었다. “어? 나온다!” 수만이가 소리쳤다. 송아지 머리가 조금씩, 조금씩 밀려 나오는 것을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외삼촌이 밧줄로 송아지 발목을 묶었다. “아비야, 누렁이가 힘줄 때 같이 잡아댕기야제 서두르 면 안 된데이.” 할아버지께서 외삼촌을 거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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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렁아, 힘 주그라! 옳지 잘한데이.” 누렁이가 다시 한 번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송아지를 밀 어냈다. 털썩하고 송아지가 빠져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외삼촌이 짚으로 송아지 콧구멍을 간질이자 재채기를 하면서 오물을 뱉어 냈다. “하이고, 인제 살았데이.” 누렁이가 송아지의 젖은 몸을 정성껏 핥았다. 송아지는 가느다란 다리로 휘청거리며 다가가 젖꼭지를 빨았다. 누 렁이는 잠시도 쉬지 않고 송아지의 젖은 몸을 핥아 주었 다. 누렁이의 혀가 불에 덴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송아지를 바라보는 누렁이의 순한 눈빛이 기쁨과 사랑 으로 촉촉이 젖었다. 나는 누렁이 얼굴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 다. 누렁이 젖을 빠는 송아지를 지켜보던 나는 어머니를 와 락 끌어안았다. 어머니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것이 참 감사했다.

≪칠공주 집≫, 파랑새어린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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