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한국영화 정책과 산업 김미현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한국영화, 지속가능한 성장
영화 정책과 산업의 연관성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영화가 크게 성장하면서 한국영 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가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 실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구조적 동력에 대한 이해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영화가 어떤 역사적 요인에 의해 변화를 겪었는지, 공적 부문의 법과 정책은 산업구조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 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작품 경향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 인 부분이다. 이 책은 영화 정책과 산업의 역사를 함께 설명함으로써 한국영화의 구조적 이해에 접근하고자 했다. 우리나라에 서는 1900년쯤에 외화가 상영되기 시작했고, 20여 년 후 인 1919년부터 한국영화 제작이 이루어졌다. 근대 100여 년의 격변기에서 영화는 산업, 사회, 정책을 매개하는 대 중문화의 일부로서 시대와 상호작용을 통해 그 형태를 구 성해 왔다. 이 기간 동안 영화의 제작과 상영은 사회·정 치적 맥락에서 비롯된 정책과 법제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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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일제 군국주의 시기와 군사독재 기간에는 영화 공급 량도 통제되었으며, 가혹한 검열은 작품을 왜곡했고,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시장 개방은 위기와 함께 대기업의 영화 산업 진출과 새로운 제작 방식을 불러왔다. 이에 대 한 이해 없이 영화의 작품 경향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영화 정책과 산업을 통합적으로 살펴보 기 위한 열 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법과 제도를 중심 으로 서술한 정책부문과 한국영화 산업의 형성과 구조 변 화를 고찰한 산업부문으로 크게 나누었다. 한국영화 정책 을 설명하기 위해 다섯 개의 주제를 선정했다. 한국영화 를 규율하던 영화법제를 식민지 시기부터 1950년대까지, 영화법 시기(1962~1995년), 영화진흥법 이후 시기(1996 년~ )의 세 단계로 구분하고 특징을 살펴봤다. 이어서 영 화 정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심의제도와 지원정책을 다 루었다. 1950년대까지의 영화 정책은 영화와 극장에 대한 통제 와 검열이 주요한 목적이었으며, 1960~1980년대 중반까 지는 영화의 내용은 통제하고 산업적으로는 육성하려는 모순적인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영 화 산업과 문화를 진흥하기 위한 지원 중심의 정책이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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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진흥 재원과 지원 기구 등이 재정 비되었다. 한국영화 산업 부문도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했다. 우 선, 한국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후의 시장형성 과정을 설 명하고, 다음으로 한국영화 산업의 구조를 이룬 세 개의 주제를 구분했다. 외화 상영과 시장 개방, 영화 배급 및 유 통 구조의 변화, 그리고 대기업의 역할이 그것이다. 한국 영화 산업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흥행통계를 마지막 주제로 구성했다. 우리나라는 영화 정책으로 제작업과 수입업이 통제되 는 오랜 시기를 거쳤고, 1980년대 중반 이후 시장 개방을 거쳐 새로운 인력이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국 영화사는 한국영화만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상 영된 모든 영화들의 기록이고 관객들이 관람한 공적 공간 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영화는 식민지 시기 신파극단과 극장의 흥행자본으로 제작되기 시작해 점차 자본을 축적 하고 기술적 요인을 수렴하며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정책과 산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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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법제와 정책 첫째 주제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서 1950년대까지의 정책 이다. 이 시기에는 영화에 대한 체계적인 정책과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고, 새로운 대중문화 공간인 극장과 ‘활동사 진’을 검열하기 위한 행정 명령이 정책의 중심에 있었다. 일제는 전국의 학교, 공회당, 병원 등의 공공장소에서 활 동사진을 상영했고, 군국주의 시기에는 제작과 배급을 국 유화하고 영화를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이용했다. 권 력 주체는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다시 대한민국 정부로 이 관되었으나, 영화를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는 큰 변 화가 없었다. 그러나 1954년부터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 조치가 시행되어 영화 산업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우수 한국영화에 외화수입권을 배정하는 보상제도가 시 행됨으로써, 영화 지원 정책의 시작을 알렸다. 둘째 주제는 1962년부터 1984년까지 영화법 시기의 정 책을 다루었다. ‘영화법’은 영화 분야를 독자적으로 규정 한 첫 법률로서, 1962년 제정되어 1995년까지 약 34년간 시행되었다. ‘영화법’은 군사독재 시기를 포괄한 영화법제 로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져 온 조선영화령을 모체로 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었다. 영화 산업의 기업화 정책에 따라 제작사를 통폐합하고, 규모 있는 영화사를 육성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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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기준을 정함으로써 사실상의 등록제를 유지했다. 제 작업과 외화 수입업을 통합해 허가 받은 제작사만 제작과 수입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제작 편수와 외화 수입 편수, 금액을 규정함으로써 영화시장의 공급량을 조절하기도 했다. 이 기간은 시나리오와 영화의 이중 검열을 요체로 한 통제의 시기라는 특징을 가진다. 영화법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그 기조에 큰 변화가 있 었다. 1970년대 말부터 미국의 통상압력이 심해지면서 2차에 걸친 한미 통상협상 결과를 반영한 개정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에 따라, 1985년부터 영화 제작업과 수입업 이 분리되어 자유화되었고, 외국영화사의 지사 설치와 미 국 영화 직접배급을 허용하는 등의 시장 개방이 이루어졌 다. 이로써 한국영화 산업은 폐쇄적 독과점 시장에서 개 방된 경쟁 시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영화법’은 1995년 ‘영화진흥법’이 제정되면서 폐지되기까지 정책의 힘이 가 장 막강했던 시기의 영화 법제였다. 셋째 주제는 1996년 ‘영화진흥법’ 제정 이후 시기의 정 책을 다루었다. 영화를 진흥의 대상으로 간주한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 시기의 영화 관 련 법률은 1995년 12월 30일 공포된 ‘영화진흥법’과 2006 년 4월 28일 공포되어 2012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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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및비디오물의진흥에관한법률’(이하 영비법)이 있다. ‘영화진흥법’ 시기의 정책 방향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 는다’는 것으로 대변되었다. 영화 검열을 철폐하고 등급제 를 도입했으며, 영화 산업과 문화에 대한 지원 환경을 획 기적으로 개선했고, 영화진흥공사를 영화진흥위원회로 개 편하는 등 한국영화 지원을 위한 혁신도 가져왔다. 한편, ‘영비법’은 ‘영화진흥법’과 ‘음반·비디오물및게임물에관한 법률’(이하 음비게법)에서 각각 구분하던 영화와 비디오의 관련 법제를 통합한 것으로, 뉴미디어 시대의 콘텐츠 개념 을 담고 있다. 2007년부터 영화발전기금 설치를 입법화하 고, 2010년부터 극장업자는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의무 가입하도록 규정하는 등 영화 산업의 투명화와 지속 적 발전을 위한 입법 체계를 모색하고 있다. 넷째 주제는 영화 심의제도의 변천과정을 다루었다. 영 화 심의제도는 검열과 등급제로 대표된다. 검열은 정치적 자유와 성적 표현 수위 등을 제한하고 특정 장면이나 대사 의 수정 삭제를 명시할 수 있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의제도로 비판받아 왔다. 이에 비해 등급제도는 연령대 별로 관람 가능한 영화의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합 의의 수준을 보여 주는 지표가 되고 있다. 일제의 검열에 서 시작해 등급제도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은 매 시기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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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회가 허용한 대중문화의 상황을 보여 준다.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정책의 관심이 된 것은 공중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인지를 결정하 는 것이었다. 검열의 기준은 정치권력에 종속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 시기에는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거나 제국의 위신을 손상할 우려’가 있는 영화가 검열의 대상이 었고, 군사독재 시기에는 국가의 권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 거나 사회질서를 문란할 우려가 있는 영화 등이 문제시되 었다. 일반적으로는 국가 법률, 종교·교육, 풍속, 성관계, 잔학성 등에 대해 금지와 제한사항을 규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영화 심의제도가 검열에서 등급제도로 변화 한 것은 영화진흥법 시기의 일이다. 헌법재판소는 1996년 과 2001년 각각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와 ‘등급 분류 보류’ 조항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이에, 2002년 ‘등급분류 보류제도’를 폐지하고 ‘제한상영가’ 규정을 신설 함으로써, 이후 한국영화의 심의는 전체 관람가, 12세(이 상) 관람가, 15세(이상) 관람가, 18세(이상) 관람가(2006 년 이후 청소년 관람불가), 제한상영가 등 5개 등급을 기 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제한상영가’ 등급의 존폐 여부나 영화의 민간 독자적인 심의기구의 설치 등에 대해 서는 아직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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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주제는 한국영화 산업의 성공 요인과 지원 정책 을 다루었다. 한국영화 성공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의 사 항들을 언급할 수 있다. 영화 정책이 ‘규제에서 지원으로’ 변화해 공공부문의 지원이 대폭 증가했고, 검열제도가 폐 지되어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창의적 인재가 유입되 어 새로운 세대가 주역으로 부상했다. 영화에 대한 대기 업의 투자가 이루어졌고, 영상전문투자조합이 결성되어 영화에 투자 가능한 자본의 크기가 확대되었으며, 멀티플 렉스가 관람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디지털 등의 기술혁신으로 저예산 영화의 제작과 창작 실험이 증가했 다. 우리나라 영화의 대표적인 보호제도인 ‘스크린쿼터제’ 의 역할도 중요했다. 스크린쿼터제도는 1966년부터 입법 되었으나 1993년 미국 영화의 직접 배급으로 한국영화 산 업이 위기에 처하자 영화인들이 자발적으로 ‘스크린쿼터 감시단’을 조직해 활동하면서 비로소 살아 있는 보호정책 이 되었다. 한편, 영화 산업과 문화의 지원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이 지원 예산의 확보와 지원 기구의 구성이다. 영화 지원 기구는 1971년 영화진흥조합에서 1973년 영화진흥공사 로 이어졌고, 1999년 민간전문가의 자율 행정기구인 영화 진흥위원회가 발족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영화진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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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사업을 발전적으로 확대하고, 한국영화투자조합 출 자사업을 통해 한국영화 제작 재원을 늘렸으며, 독립영화 및 문화 다양성을 위한 지원 사업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 다. 영화진흥재원은 1971년부터 국산영화진흥기금에서 출발해, 국고의 출연과 문예진흥기금을 재원으로 영화진 흥금고가 조성되어 운영되었다. 2007년부터 영화발전기 금이 신설되어 영화진흥금고의 이월금과 영화관 입장요금 의 100분의 3에 해당하는 금액을 모금해 재원으로 활용하 고 있다.
한국영화 산업 구조 여섯째 주제는 한국영화시장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식민지 시기 연쇄극으로 시작한 한국영화는 1920년대부 터 본격적으로 극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기에는 다수의 제작사와 더불어 단성사와 같은 극장 자본이 제작에 참여 했다. 1950년대까지 정부기관 및 공공 주도의 영화 제작 이 이루어졌으나 1950년대 말부터 민간 영화 산업이 형성 되었다. 1962년 영화법 제정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4~26개 영화사만 제작과 수입을 할 수 있었던 폐쇄적 시 장구조가 이루어졌다. 신필름은 1962년 영화사 통폐합 시 에 유일하게 영화사를 독자 등록하고 스튜디오 시스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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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시킨 대표적인 메이저 제작사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제작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독립제 작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코리안 뉴웨이브’는 이러한 영화계의 흐름과 분단, 노동, 사회문 제가 부각된 시대의 민주화를 반영한 작품 경향이었다. 1990년 이후 한국영화계를 이끈 제작 인력들은 1970, 80 년대 외국문화원을 섭렵하면서 영화적 감성을 키워온 신 진 영화인들로 시장 조사를 기반으로 젊은 세대의 영화를 생산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기업 자본과 금융자본 등 이 진입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예고했다. 한국형 블록 버스터는 산업화 시기의 대작영화로 할리우드 영화의 스 타일과 한국 역사의 민족주의 정서를 결합해 극장 관객의 폭발적 증가에 기여했다. 일곱째 주제는 외화의 수입 상영 제도의 변화와 영화시 장 개방 과정을 기술했다. 1900년경부터 형성된 극장가는 외화 중심이었고 미군정기와 한국전쟁 시기까지 이와 같 은 특징은 지속되었다. 영화법 시기에는 외화 수입 편수 와 금액 쿼터제가 실시되어 정부에 의해 규모가 조절되었 다. 외화 수입쿼터제는 외화의 공급량을 제한해 한국영화 를 육성하고자 한 취지였으나 오히려 외화의 가치가 상승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960년대에는 한국영화의 점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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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50% 내외를 유지했으나, 1970년대부터 한국영화 관객 수는 급격히 감소한 반면, 외화는 오히려 증가해 다시 외 화 중심의 시장으로 재편되었다. 한국영화의 시장 개방은 1986년 9월 우루과이라운드가 시작되면서 미국영화수출협회(Motion Picture Export Association of America, MPEAA)와 두 차례 한미영화협 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1987년부터 외국영화사의 국내 지 사 설치를 허용하고, 외화 수입 편수 쿼터제 및 외화 수입 가격 상한제를 폐지하는 등의 사항이 합의되었다. 1988년 부터 외화의 직배가 시작되었고 미국 메이저 배급사들은 1993년까지 한국에 지사 설치를 완료했다. 1994년 이후 프린트 벌수 제한 조치가 풀리면서 전국 규모의 직접 배급 과 광역개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80년대 중반 이 후 일련의 정책 변화 속에서 영화의 제작과 수입은 자유화 되었고 할리우드 영화사의 직접 배급이 시작되면서 한국 영화시장은 완전히 개방되었다. 여덟째 주제는 한국영화의 극장 배급과 부가시장 유통 구조를 고찰했다. 영화사 초기에는 영화가 완성되면 제작 사가 극장과 계약을 맺고 흥행해 수익금을 나누었다. 경 성과 주요 지방 상설관의 상영을 마친 프린트는 개인 흥행 사가 인수해 전국의 지역 극장과 임시 극장을 돌며 유통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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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1950년대까지 영화의 제작비는 개인적으로 조달했 고 공적 기관의 후원을 받는 일이 많았다. 1950년대 말부 터 한국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개인 간 거래로 영화를 상 영하기 어려워지자 행정 체계에 따라 배급 구조가 정착했 다. 서울 개봉관을 제외한 서울 변두리, 부산·경남, 광 주·호남, 대구·경북, 대전·충청, 경강(경기도, 강원도) 등 6개 권역으로 나누어졌다. 지역으로 배급된 프린트는 지역 개봉관에서 상영한 후 수년 간 시장규모가 큰 순서대 로 지역을 순회했다. 이 지역별 간접 배급체계는 1988년 이후 UIP(United International Pictures)의 직접 배급에서 변화가 시작되었 고, 1995년부터 국내 중앙 배급사가 전국 배급을 시작하 면서 본격적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까 지 지방 중소도시의 일부 상영관은 지역 배급업자가 대행 하는 간접 배급 구조가 혼재되어 있었다.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로 대표되는 대기업 투자배급 사는 한국영화의 주요 투자처이며 전국 배급망으로 기능 하고 있다. 영화 부가시장의 유통 창구는 극장→비디오·DVD→ 인터넷→유료 케이블TV→지상파TV→무료 케이블TV→ 기타·해외 등으로 형성되었고, 2010년 이후 IPTV와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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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프리미엄 서비스 등이 뉴미디어 창구로 부상하고 있 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영화 산업 수익 구조에서 부가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20% 이하로 감소되어 있어 활성화 대책이 시급하다. 아홉째 주제는 한국영화 산업에서 대기업의 역할을 살 펴보았다. 영화의 산업화와 자본의 역할은 긴밀하게 연관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활동했던 영화사들 이 미국, 일본처럼 스튜디오형 투자배급사로 성장하지 못 했고, 1980년대 시장 개방 이후에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 다. 1990년대 변화한 산업구조에서 활동한 것은 대기업 자본의 투자를 통해 성장한 제작인력이었다. 영화의 제작 과 수입이 자유로워지자 1990년대부터 삼성, LG, 대우 등 대기업 자본이 영화계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충무로’ 중 심의 영화계는 재편되었다. 1998년 IMF 이후 1차 진입한 대기업 자본이 퇴각하면 서 CJ, 롯데, 오리온 등 대기업의 2차 진출이 이루어졌고 금융자본의 영상전문투자조합을 통한 투자가 이루어졌 다. 대기업의 1차 진출이 비디오 판권 구입과 영화 제작 투자를 통해 시작되었다면, 이후의 CJ엔터테인먼트, 쇼박 스, 롯데엔터테인먼트는 멀티플렉스(multiplex) 체인을 기반으로 투자-배급 영역에 확장함으로써 진입했다.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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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투자배급사로서 한국영화의 자본 조달과 수익 분배 관 리를 담당하며 영화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영화 제작을 총괄하며 제작 관리, 감독, 자금 조달, 완성에 대해 책임을 지는 등 영화 프로젝트를 이끌고 가는 역할을 한다. 2000년대 중반 DMB, IPTV와 같은 뉴미디어 창구가 형성되면서 SK, KT 등 통신자본도 영화 산업에 진 입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영화 산업 유통 구조 변화에 멀티플렉스는 결정적인 역 할을 했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의미의 멀티플렉스가 도입 된 것은 1998년 서울에 강변CGV가 11개 스크린으로 설립 되면서다. 2000년대 이후 멀티플렉스는 점차 규모와 영향 력이 확대되어 2012년 말 전국 스크린 수의 94.5%를 점유 하고 있다. 2012년 현재 멀티플렉스는 영화 투자, 배급, 상 영의 수직계열화를 이룬 CJ(CGV), 롯데엔터테인먼트(롯 데시네마), 씨너스와 통합한 메가박스, 3대 멀티플렉스 체 인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열째로 한국영화의 흥행통계를 일별했다. 한국영화 전 성기였던 1960년대에는 국민 1인당 한 해 동안 극장을 찾 은 회수가 무려 5∼6회에 달해, 2000년 이후의 평균 수치 인 3회 보다 2배 정도 많다. 197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오 랜 동안 정책과 시장의 변화과정에서 부침을 겪었다.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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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도약의 기점이 된 것은 1999년 이후다. 2000년 6462 만 명이었던 극장 관객은 2002년 1억 513만 명, 2011년 1 억 5979만 명까지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한국영화 산업이 성장한 이후에도 한국영화사 최고 관객 수 기록인 1969년 1억 7300만 명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2012년에 비로소 1억 9849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여 역 대 기록을 갱신하였다. 지난 10여 년 간 약 3배 증가한 것 이다. 1인당 관람 횟수도 2000년 1.3회에서 2012년 3.83 회로 증가했다. 제작 편수도 2006년부터 100편 대를 회복 했고, 디지털 저예산영화의 제작이 활성화되면서 2012년 에는 229편까지 증가했다. 한국영화 성장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수치는 한국영화 점유율이다. 1993년 15.9%로 최저를 기록했지만, 1999년 39.7%로 변화의 신호를 알렸다. 2001년 50.1%를 기록한 후 2006년 63.1%로 최고의 점유율을 보였다. 이후에도 꾸 준히 50% 내외를 유지하고 있으며 2012년 한국영화 점유 율은 58.8%이다. 세계적으로 자국 영화 점유율이 50%를 넘는 국가는 미국, 인도, 중국 등에 불과하다. 할리우드 영 화의 세계 시장 지배력 때문에 프랑스, 일본 등의 영화강 국도 30∼40%대의 점유율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 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스크린 수도 1999년 588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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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648개, 2012년 2081개로 크게 증가했다. 꿈의 수치로 여겨지던 천만 관객 영화도 2003년 <실미도>(강우석 감독) 를 시작으로, 2012년까지 <괴물>(2006, 봉준호 감독), <광 해, 왕이 된 남자>(2012, 추창민 감독)까지 7편 출현했다.
지속적 성장을 위한 과제 한국영화는 지난 시기 지속적으로 정책의 영향에 놓여 있 었다. 그러나 더 이상 영화 산업에 규제나 강력한 제도가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장의 기능과 자본의 힘이 확대되면서 공적인 힘이 시장을 규정할 수 없는 산업의 시 기에 진입한 것이다. 영화사의 허가제, 검열 등의 부정적 규제는 발전적으로 해소되었고 체계적인 지원을 위한 노 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산업이 정책에 자율성을 획득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함 의를 지닌다. 그러나 대기업 계열사가 투자-배급-상영을 가로지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형성하고 전체 배급·상영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어 자유경쟁 시장(freebooking market)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정책의 역할 은 산업의 공정거래 질서와 문화적 균형을 이루는 것에 집 중해야 한다. 한국영화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은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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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한국영화 정책과 산업의 흐름을 이해하고 한국 영화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접근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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