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책은 미디어와 저널리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탐사보 도의 최근 상황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그 의의와 가능성을 다양한 각도 에서 고찰한다. 탐사보도는 정부나 행정기관, 기업 등이 발표한 정보를 그대로 보 도하는 방식인 발표보도*가 아닌, 살아 있는 중요한 사실을 저널리스트 나 미디어가 독자적으로 취재·조사해 보도하는 수법을 말한다. 최근 의 저널리즘은 ‘발표보도’에만 안이하게 의존해 권력 감시의 기능이 쇠 퇴했다는 엄중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저널리즘이 이 같은 상황을 극복 하고 권력 감시라는 본래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탐사보도 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관 련해 발표보도가 버젓이 지속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본영발표’ 보도를 보는 듯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반면 탐사보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위기를 맞은 저널리즘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탐사보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훌륭한 논고나 저작들이 발표돼 왔
* 하라 도시오(6장 저자)는 그의 저서 저널리즘의 사상에서 발표보도에 대해 이렇게 언
급하고 있다. “매일 보도되는 뉴스의 태반은 어떤 형태로든지 ‘발표된 것’이다. 기자회견 을 비롯해, 비공식적인 기자간담회나 자료 배포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제공은, 발표자나 발언자의 주도하에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보는 가능한 한 숨기고, 보도해 줬으면 하는 내용만을 발표하는 원칙이 통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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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탐사보도를 단행본으로 정리·요약한 책은 없었다. 이 책은 취재 현장의 저널리스트들이 직접 탐사보도 사례를 수록 한 1부 ‘탐사보도의 실제’와, 탐사보도에 깊은 관심을 보여 온 저널리스 트, 연구자들이 탐사보도에 대한 논점과 과제를 제시한 2부 ‘탐사보도 의 가능성과 저널리즘’으로 구성됐다. 이 책의 출판은 선구적인 시도이 자 저널리즘에 대한 중요한 문제 제기가 될 것이다.
2011년 4월 저자 대표 다지마 야스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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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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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탐사보도의 실제 01 범죄와 원죄를 파헤치다: 오케가와 스토커 사건, 아시카가 사건 02 핵 밀약을 파헤치다: 일미 동맹의 그늘 03 경찰의 비자금을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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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검찰과 편파수사를 파헤치다 05 탐사보도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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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탐사보도의 가능성과 저널리즘 06 왜 지금 탐사보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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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위키리크스는 저널리즘인가: 인터넷 시대의 탐사보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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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센카쿠 영상 문제와 저널리즘의 원칙: 인터넷 시대의 탐사보도 2 09 불멸의 탐사보도: 탐사보도 분류와 저널리즘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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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탐사보도와 표현의 자유: 탐사보도의 조건과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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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한국의 탐사 저널리즘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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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탐사보도의 실제
01 범죄와 원죄를 파헤치다: 오케가와 스토커 사건, 아시카가 사건 시미즈 쿄시 니혼TV 기자
사건 사고 정보가 가장 많은 곳은 경찰이다. 사건기자들은 상황이 발생 하면 경찰서로 달려가 홍보 담당이나 부서장을 취재한다. 아침저녁으 로 경찰 간부의 관사나 집을 찾아가기도 한다.1) 때로는 검찰도 취재 대 상이다. 취재 결과는 매체마다 같은 내용의 기사로 처리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특정 매체의 특종이 되기도 한다. 현장 상황이나 수사 진척 상황 등 경찰이 기자에게 제공하는 정보 는 대부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제공되는 정보가 무언가의 사정에 의 해 왜곡됐다면 탐사보도 경험이 적은 기자들이 그 진위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저널리스트라면 자신의 판단으로 제대로 된 기사를 쓸 수 있어 야 한다. 경찰에게 들은 내용만을 토대로 ‘경찰에 의하면…’ 식으로 기 사를 쓴다면, 그 직함은 아무래도 경찰기자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내가 취재했던 두 사건을 사례로 탐사보도를 소개하고자 한다.
1) 한국과 달리 일본의 기자들은 정치인이나 경찰 등 취재원의 집을 아침저녁으로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취재 정보를 얻는 관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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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가와 스토커 살인 사건-수사는 하지 않고 정보를 조작 스토커와 경찰에게 살해됐다
1999년 10월, 사이타마현 JR오케가와역 앞에서 여대생 시오리가 칼에 찔려 살해됐다. 범인은 현장에서 도주했다. 사이타마현 아게오 경찰서 에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백주대낮에 역 앞에서 21살 미모의 여대생이 칼에 찔려 살해됐다. 기자들은 경찰서로 몰려들었다. 경찰 간부의 기자 회견이 끝나자 사건의 초점은 여대생의 복장과 소지품으로 모아졌다. 검정 미니스커트, 부츠, 프라다 가방, 구찌시계. 평소 사건 정보를 숨기 기에 급급한 경찰치고는 자세한 정보였다. 경찰 간부는 ‘유흥가 아가씨 의 B급 사건’, ‘선물 사 달라고 졸라댄 여대생 살인 사건’이라고도 했다. “기자 여러분들, 어떻게 쓰실 건가요?” 수수께끼를 내는 듯한 경찰 의 발표에 기자들은 농락당했다. 범인은 달아났고, 보도의 초점은 피해 자인 시오리에게 맞춰졌다.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제목들이 난 무했고 전파를 탔다. ‘칼에 찔려 죽은 유흥가 여대생’, ‘브랜드 의존증’, ‘보도 피해’라는 표현조차 생소했던 때의 일이었다. 나는 사진 주간지 ≪포커스(FOCUS)≫(2001년 휴간) 기자로 기자 클럽2)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자회견에도 갈 수 없었다. 경찰은 “기 자클럽 회원이 아니면 취재에 응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취재를 거부했
2) 정부나 경찰 등 공공 기관을 지속적으로 취재하기 위한 주류 미디어 중심의 조직. 기관
의 홍보 담당이 해당 기관 기자클럽에 소속된 가맹사 기자들에 한해 보도 정보를 제공하 는 시스템이 일반적이다. 국민의 알 권리 보장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지만, 가맹사가 아닌 언론사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등의 취재가 제한되는 데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주류 미디어에 대한 차별적 편의 제공과 기관의 일괄적인 정보 제공에 따른 기 자의 취재력 저하, 보도 내용의 획일화 등 악폐가 많아 기자클럽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의 기자협회제도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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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유족은 어떤 언론사의 취재에도 응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목격자들을 찾아다니며 당시 상황을 물어보거나 피해자 시오리의 친구들을 만나보는 정도였다. 두 명의 친구가 취재에 응해 줬다. 그중 한 명은 친구 시오리가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경위를 자세히 알고 있 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말하기를 꺼렸다. 나 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노래방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보도는 전부 거짓말이에요. 시오리는 스토커와 경찰에게 살해당 한 거예요” 분함에 손까지 덜덜 떨던 그 친구의 이야기를 흘려들을 수 가 없었다. 시오리는 만났던 남자로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 린 그녀는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내가 살해당하면 범인은 그 남 자야. 전부 적어 둬” 마치 유언처럼 말했다. 경찰이 기자들에게 제공했 던 정보나 보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나는 그 친구들의 증언을 단서로 취재를 시작했다.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을 찾아내며 사건을 심층적으로 취재했다. 시오리는 유흥가에서 일하는 여대생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여대생이었다. 스토커는 부하들까지 이용해 조직적으 로 시오리를 괴롭혔다. 그들은 시오리와 그녀의 아버지를 비방하는 편 지 1000여 통을 부친의 회사로 보냈다. 집 주변과 학교에는 그녀의 사 진이 인쇄된 종이를 붙이기도 했다. 스토커 일당의 조직력도 가볍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시오리는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미행을 당하기도 했 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는 세 명의 남자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너에게 2000년은 오지 않는다”라는 협박에 살해 위협을 느낀 시오리는 경찰서 로 달려갔다. 나중에 살인 사건의 수사본부가 마련된 아게오 경찰서다. 경찰은 냉담했다. “안 돼요, 안 돼. 이런 건 사건이 안 돼요”, “남녀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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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서 경찰은 개입할 수 없어요.” 그녀는 방치됐다. 협박 편지를 보여 줘도 “이야, 좋은 종이네요”라고 농담이나 하며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시오리는 아게오서에 수차례 찾아가 “이대로라 면 살해당할 거예요. 도와주세요”라며 호소했고, 급기야 스토커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경찰은 고소장을 수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아 무런 수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오리는 살해당했다. 사건 발생까지 의 경위를 알고 있던 사람은 경찰과 유족, 그리고 시오리의 친구 몇뿐이 었다. 신고와 달리 고소는 수리한 이상 수사를 해야만 한다. 보고 의무도 엄격하다. 그런데도 고소 내용을 수사하지 않고 방치한 끝에 사건이 발 생했다. 이 사실은 아게오서 입장에서는 숨겨야만 하는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기자회견장에서 경찰은 “피해자로부터 명예훼손 비슷한 피해 신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라며 애매한 태도로 얼버무렸다. 시오리의 호소를 무시했던 경찰은, 사건이 발생하자 시오리의 집 에 형사들을 상주시켰다. 유족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지 만, 그로 인해 유족과 매스컴은 단절됐다. 유족은 경찰도 신뢰할 수 없었지만, 딸의 명예를 만신창이로 만든 매스컴은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매스컴의 보도는 스토커 일당이 뿌린 전단지나 편지와 다를 바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스토커 일당에게 초점을 맞춘 나의 보도는 독보적이었지만, 나는 경찰과 다른 기자들로 부터 고립됐다. 경찰은 내 보도를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범인을 밝혀내다
범인이 체포되면 경찰이 시오리의 고소장을 방치한 사실이 드러나게 돼 있다. 과연 경찰이 적극적으로 사건을 수사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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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나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 나섰다. 현장에서 목격된 살인범은 키 170센티미터의 작고 뚱뚱한 30대였 다. 그러나 스토커의 키는 180센티미터, 마른 체구의 20대로 목격자 정 보와 일치하지 않았다. 먼저 시오리가 생전에 했던 말을 참고해 스토커가 일할 만한 곳을 뒤졌다. 자동차 영업사원이라며 시오리에게 접근했던 그 남자는, 사실 도쿄 이케부쿠로(도쿄 북서부 지역의 번화가) 유흥업소의 사장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취재한 끝에 스토커의 부하 K라는 남자가 살인범 의 인상착의와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K를 찾아냈고, 카메라맨과 잠복해 촬영에 성공했다. 그러나 시오리의 절박함을 알았던 나는, 특종 욕심만 낼 수는 없었 다. 살인범을 체포하기 전에 사진을 보도해 버리면 스토커 일당이 도주 할 가능성이 컸다. 나는 고민 끝에 사진 보도를 일주일간 보류했다. 어 떤 식으로든 살인범 관련 정보를 경찰에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아게오서 간부는 기자클럽 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담조차 거부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친분이 있는 신문기자 다카하시 히데키를 통해 경찰에 정보를 제공했다. 물론 정보 제공의 목적은 사건 해결이었다. 아게오서는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내가 경찰에게 알려 준 범인은, 시오리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고 지목했던 스토커의 부하다. 그를 체포하면 경찰이 감춰 온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경찰은 곤란했을 것이다. 경찰은 그를 좀처럼 체포하지 않았다. 경찰에 대한 불신이 점차 커 지던 나는, 결국 그 사실과 스토커의 사진을 보도하기로 했다. 기사 마 감 전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성의로 나는 아게오서를 찾아갔 다. 사실을 보도하겠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역시 경찰은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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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않았다. 나는 경찰서의 접수 창구에서 간부를 향해 소리쳤다. “취 재가 아닙니다. 다음 주 발행되는 ≪포커스≫에 용의자에 대한 중요한 기사를 보도할 겁니다. 내용은 수사본부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겠지 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모두 사실이다.
경찰의 고소 철회 요구 의혹
살인범 K를 포함해 공범 4명이 체포된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잡지가 발행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범인 체포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고 할 수 없었다. 경찰의 태도에 큰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던 나는 경찰 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살해당하기 전 시오리는 형사가 자신을 찾아와 “고소를 취하해줄 수 없을까”라고 요구했다고도 말했다. 경찰의 말을 듣고 시오리는 절망 했다. 간신히 고소장이 접수돼 도움을 받게 됐다고 생각한 순간, 경찰 은 또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다카하시 기자가 아게오서에 ‘고소 취하 요구’가 있었는지 확인했 다. “그런 형사는 우리 서에 없어요. 스토커들이 형사로 위장했던 거 아닌가요?” 처음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뭔가 의심스러웠다. 스토커 가 형사로 위장한다? 정말 그렇게까지 했을까? 진실을 알고 싶었다. 거절당할 각오로 유족에게 취재를 요청했다. 달리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유족은 의외로 취재에 응해줬다. 나는 그때까지 시오리의 생전 증언을 토대로 기사를 썼고, 경찰이 제공한 시오리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는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미모의 여대생의 숨겨진 사생활’ 같은 기사가 마치 매스컴의 합창처럼 보도되 는 와중에 내 기사는 좀 달라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를 만났던 시오리의 두 친구가 유족에게 믿을 만한 기자라고 말해 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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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시오리의 부모를 취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기자가 됐다. 형사가 없는 시간에 시오리의 집을 찾아가 취재했다. 몇 가지 사실이 확인됐다. 고소장을 취하해 달라고 찾아온 ‘가짜 형사’는, 가짜가 아닌 ‘진짜 형사’였다. 게다가 그 형사는 시오리의 고소장 조서를 직접 쓴 담당 형 사였다.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요구한 것도 그 형사가 확실하다고 했 다. 경찰은 지금까지 “그 사람은 가짜 형사”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조직일수록 방어 본능도 강하다. 이를 절감한 나는 ‘직접 본 것과 들은 것’만을 믿고 기사화하기로 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시오리가 고소장을 제출했지만, 경찰은 그것 을 방치한 것도 모자라 취하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시오리가 살해당한 것’, 나는 이 내용을 잇따라 보도해 경찰의 태만함을 고발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찰 정보에 의존하는 경찰 기자들은 “아게오 서에 의하면…” 식의 기사만 쓰고 있었다. 시오리의 생전 증언과 유족 의 호소 내용을 다룬 나의 기사, 경찰의 해명과 변명만을 늘어놓는 신문 과 방송. 그 둘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다섯 달, 매스컴에 대한 불신 때문에 침묵을 지 켜오던 시오리의 아버지가 마침내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많은 기자들 앞에서 “(경찰이)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요구했다. 아게오서의 태도는 절대 납득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유족을 취재할 수 없으니까…” 라고 변명만 해 온 기자들. 이제 “아게오서에 의하면…” 대신 “유족에 의하면…”식의 대형 기사가 지면 을 장식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1∼2단짜리 단신 기사, 지역 뉴스가 전부였다. 바로 이것이 경찰 기자의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이다. 매일같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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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에게 취재를 요청하고, 기삿거리를 얻는 기자들은 경찰이 보증하는 수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그 절대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경찰에 의하면…’ 식의 기사는, 기자에게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책임지 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경찰 발표 기사는 너무나 도 비굴한 저널리즘의 실태를 드러낸다. 이 사건처럼 경찰을 비판하는 기사는 더욱 그러하다. 간신히 듣게 된 유족의 이야기는 그걸로 그만이 고, 기자들은 그 내용을 다시 경찰에게 확인한다. 경찰이 그 내용을 부 정하면 기사의 가치는 작아진다. 경찰이 “그 유족은 원래 좀 이상해요” 라고 하면 그것이 정답이 된다. 이처럼 비굴하고 무책임한 저널리즘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기자들의 취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국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내용만 홍보한다. 기자들에게 정 보를 살짝 흘려 기사화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결국 그 보도가 자신들에 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사건을 해결한 공적, 검거율이 올라갔다는 통계 같은 홍보성 정보를 마치 특종이나 되는 것처럼 귀띔 해 주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기자는 흘러나온 정보라는 물을 운반하는 수도관에 불과하고, 미디어는 단순한 수도꼭지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이 마시는 물이 어떤 물인지 확인하지도 않는 기자와 ‘수돗물이니까 괜찮겠지’라 며 근거 없는 정보를 믿는 독자.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보도의 의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꼼꼼한 취재를 거듭해 정보를 선별해 내는 것이야말로 저널리스트의 의무 아닐까? 이 사건을 취재하는 동안 나는 계속 생각했다. 나는 경찰의 태만함이 스토커를 방치했고 살인이라는 최악의 결과 를 초래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이어갔다. 이제 경찰을 취재하는 의미는 살인 사건의 수사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찰 그 자체가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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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경찰에게 취재를 요청하면 “기 자클럽 회원이 아닌 기자의 취재에는 응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대 답이 돌아온다. “(정보를 제공하면) 타사가 시끄럽게 굴어요”라며 기자 클럽 회원사에게 책임을 돌리는 태도마저 보였다. 나는 단독으로 ‘고소 취하 요구 의혹’을 보도했다. 고립된 나를 지원사격해 준 것은, 역시 기자클럽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민영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아사히 TV의 <더 스쿠프(특종)>의 진 행자 도리고에 슌타로 씨와 TBS의 리포터들이 경찰 수사 태만의 문제 점을 방송해 줬다. 방송을 본 민주당 여성 의원이 이 사건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다. 그녀는 국회 예산위원회에서 내 기사를 그대로 읽었다. “안돼요, 안돼. 이건 사건이 안돼요”, “남녀문제라서 경찰은 개입할 수 없어요.” “이게 사실인가요?” 형사국장을 추궁하는 영상이 NHK를 통해 전 국으로 생중계됐다. 이날을 기점으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경찰의 내 부조사가 시작됐고,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고소 취하 요구’ 정도가 아니었다. 형사가 직접 고소장을 피해신고 로 바꿔 쓴 사실이 드러났다. 형사가 마음대로 고소 조서의 ‘고소’에 두 줄을 긋고, ‘신고’로 바꾼 것이다. 당연히 이 사건은 형사사건으로 처리 돼 경찰 3명이 기소됐다. 사이타마현 경찰본부장을 포함해 11명이 처 벌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현경본부장, 형사부장 등 경찰 간부들이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숙인 순간, 기자클럽의 기자들은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듯이 1면 톱기사로 ‘경찰 때리기’를 시작했다. ‘경찰이 인정하면 보도한다’는 기자들의 태도는 그렇게 끝까지 이어졌다. 왜 기자클럽에 소속된 기자들은 직접 취재하지 않는 것일까. 취재 력 저하도 문제지만, 이런 태도가 더 근본적인 문제다. 다카하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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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렇게 말한다. “기자들에게 기댈 곳은 ‘대의’입니다. 그것이 경찰인 것이죠. 출입처가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것이 자기검증을 할 수 없는 기자들 스스로의 함정입니다.” 기삿거리를 얻고 싶은 기자의 계산도 존재한다. “특종을 해서 칭찬 받고 싶고, 승진하고 싶은 마음이죠. 많은 기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타 사를 앞지르기 위해서만 취재하고 있어요. 그게 의무화돼 있는 거지요.” 대부분의 기자들이 회사원 입장으로 일하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한 신문기자가 내게 지적하듯이 말했다. “범인 찾는 일은 기자의 일이 아니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그것은 경찰이 경찰로서 올바르게 기능할 때의 이야기로, 이 사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나는 범인을 찾 았던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탐사보도를 했다.
아시카가 사건-국가가 살인범으로 만든 남자 ‘경찰이나 검찰, 재판에는 실수나 거짓이 없다.’ 발표보도의 밑바탕에는 이 런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에 실수가 없을 리가 없다. 모 든 사법기관이 잘못을 인정하고 머리를 숙인 사건. ‘아시카가 사건’이다. 무기징역이 확정돼 치바형무소에 수감됐던 스가야 도시카즈 씨. 그는 ‘원죄’3)가 아닐까. 나는 이 개인적인 의문 때문에 취재를 시작해 일 년 이상 캠페인성 보도를 이어갔다. 그 결과, 재심에서 판결이 번복
3) 원죄(冤罪)는 법적으로 확립된 개념은 아니고, 수사나 재판 과정에 문제가 있는 형사
사건을 의미하는 일본식 표현이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됐지만 재심에서 증거불충 분에 의해 무죄가 된 경우 등 죄가 없는 사람이 체포돼 피의자로 취급되거나 기소돼 형사 재판을 받는 경우를 ‘원죄사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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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 스가야 씨는 무죄가 됐다.
왜 아시카가 사건만 해결됐나
2001년 ≪포커스≫가 휴간됐고, 나는 출판사에서 민영방송사인 니혼 TV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곳에서도 기자클럽에 가입하지 않고 나만 의 취재 스타일을 고수했다. 2007년 <액션>이라는 보도 프로그램이 기획됐다. 몇 가지 주제를 정해 1년간 방송하는 프로그램으로, 이른바 ‘일본을 움직이는 프로젝 트’였다. 내가 제안한 주제는 미해결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거의 알려 지지 않았지만 북관동 지방에서 여아 유괴 살인 사건이 이어지고 있었 다. 아시카가 사건은 그중 하나였다. 이 기획은 나의 추리로부터 시작됐다. 잡지 기자 시절 취재한 요코 야마 유카리 유괴 사건이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1996년 군마현 오타시 파친코에서 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된 사건이다. 가게 안 보안카메라에는 야구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찍혀 있었다. 남자 는 유카리와 친한 듯 대화하고 있었다. 그 뒤 둘은 사라졌다. 영상이 일 본 전국에 공개됐지만 남자도, 유카리도 행방을 알 수 없다. 취재를 시작하고 나서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의 파친코에서도 네 살 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된 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아시카 가 사건이다. 군마현과 도치기현. 현은 다르지만 두 도시는 인접해 있 다. 현장의 거리는 11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취재 과정에서 그 주변에서 유사한 사건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 게 됐다. 아시카가 시내에서 세 건, 군마현에서 두 건. 반경 20킬로미터 안에서 여아 유괴 사건이 다섯 건이나 발생한 것이다. 모두 네 명이 살 해됐고 파친코 유괴가 세 건, 하천 부지에 시체를 유기한 사건이 세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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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대부분 휴일에 발생했고, 수법이나 상황도 비슷했다. ‘동일범에 의한 연쇄사건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추리해 봤다. 그러 나 이 추리에는 결함이 있었다. 다섯 건 가운데 아시카가 사건이 스가 야 씨의 체포로 해결됐기 때문이다. 이걸로 동일범이라는 추리는 들어 맞지 않게 됐다. 다섯 번째 사건은 스가야 씨가 체포된 뒤에 발생했다. 나는 역으로 생각해 봤다. 스가야 씨가 범인이 아니기 때문에 연쇄 사 건으로 판단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스가야 씨는 정말로 범인일까? 모든 것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아시카가 사건은 1990년 5월에 발생했다. 아빠와 함께 아시카가 시 내 파친코에 있던 마쓰다 마미가 행방불명됐다. 마쓰다 마미는 다음날 아 침 근처 와타라세 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범인은 현장에서 달아났다. 아시카가 시에서 발생한 세 번째 여아 살인 사건이었다. 수사에 어 려움을 겪던 도치기현 경찰은 사건 발생 일 년 만에 유치원 버스 운전기 사 스가야 씨를 체포했다. 체포의 근거는 자백과 DNA 감정이었다. 경찰은 피해 여아의 셔츠 에 묻어 있던 정액의 DNA가 스가야 씨의 DNA와 일치한다고 발표했 다. 이른 아침 경찰에 임의동행된 스가야 씨는 91일간의 막무가내식 취 조로 자백에 몰렸다. 형사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정강이도 걷어차였다. 자백 뒤에도 계속되는 심한 취조에 스가야 씨는 자포자기하고 아 시카가 시내에서 발생한 세 건의 사건이 전부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 했다. 신문은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여아에 집착…유치원으 로’, ‘성실함 이면에 잠재된 병’. 스가야 씨를 범인으로 확정한 제목이 난 무했다. 그러나 스가야 씨가 기소된 건 마미 살인 사건 한 건뿐이었다. 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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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매하고 증거도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치기현 경찰은 “세 건 모두 스가야 씨의 범행이다. 사건은 모두 해결됐다”며 기세등등했다.
무죄를 호소한 스가야 씨
스가야 씨는 1심에서 무고함을 호소했지만 최고재판소에서 무기징역 이 확정돼 사실상 사건은 종결됐다. 치바형무소에 수감된 스가야 씨는 재심을 청구했다. 나는 취재를 요청했지만 법무성은 확정인과의 면회 를 허가하지 않았다. 옥중 편지만이 취재의 수단이었다. 스가야 씨는 편지로 무죄를 호소했다. “다시 한 번 DNA 감정을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DNA 재감정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 했다. 절대적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DNA 감정 결과. 나는 전문가와 변호 사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DNA 감정이 아직 초기 단계로 그 정 확도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견해가 많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경찰, 검 찰 그리고 매스컴도 DNA 감정 결과는 절대적이라고 맹신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스가야 씨의 자백 내용을 검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취재를 진행했다. 만약 자백이 꾸며진 거라면, 틀림없이 모순이 있을 것이다. 대량의 조서를 외우다시피 반복해 읽었다. 도쿄에서 사건 현장 인 아시카가를 왕복해 가며 사건 현장과 사람들을 취재했다. 스가야 씨의 진술 내용은 구체성이 부족하고 특별히 범인만이 알 고 있을 만한 사실도 없었다. 사건 당일 파친코 주변에서 스가야 씨를 봤다는 목격자도 없었고, 경찰도 진술의 근거는 없었다. 자백에는 스가야 씨가 마미에게 “자전거에 탈래?”라며 말을 건 뒤, 자신의 자전거 짐받이에 마미를 태워 하천 부지까지 유괴해 살해했다 고 돼 있다. 이 내용은 재판에서도 사실로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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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취재를 통해 아직 네 살에 불과했던 마미가 유아용 의 자가 없는 자전거에는 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기본적인 사 실이 사건 발생 17년이나 지난 뒤에, 그것도 취재를 통해 확인된 이유 는 무엇일까. 마미의 유족이 기자들의 취재에 응해 주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다.
취재에 응해 준 유족
사건 발생 직후 매스컴에 둘러싸인 피해 아이의 부모. 생때같은 외동딸 을 갑자기 잃어버린 충격 속에 매스컴에 포위된 마미의 부모는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널어 놓은 빨래를 걷지도 못하고 열흘이 지 났다. 새벽에도, 장례식 때도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보도로 인한 2차 피해가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괴로움 때문에 몇 번이나 이사를 했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나는 사실상 끝난 이 사건을 다시 보도하려고 하고 있었다. 유족의 묵은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해와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해자인 마미의 이름이나 사진도 보도할 것이기 때 문이다. 가능한 한 ‘보도 피해’는 없도록 한다. 하지만 취재를 포기할 수 는 없다. ‘가장 약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것이 취재에 임하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약자는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 에 살해당한 마미다. 그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엄마였다.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유족을 찾아다녔다. 기자는 수사권이 없기 때 문에 호적을 확인할 수도 없다. 두 발로 뛸 수밖에 없다. 나는 일단 사건 당시의 자료를 닥치는 대로 조사했다. 그리고 마미의 엄마인 마쓰다 씨 의 지인을 찾아 편지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성의를 담은 편지를 보 내 볼 수밖에 없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가는 실을 감는 듯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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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었다. 마쓰다 씨로부터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전화가 걸려온 것은 2007년 가을이었다. 취재 허락이라기보다는 항의에 가까웠다. 엄마는 물었다. “다 끝난 사건을 왜 또 취재하는 건가요?” 초조한 대화. 쉽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설명했다. 마쓰다 씨는 일 단 나를 만나주기로 했다. 그녀와 처음으로 만난 곳은 교외의 패밀리레 스토랑이었다. 살해로 딸을 잃은 엄마. 그 딸을 살해한 용의자로 체포 된 남자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기자. “이제 와서 왜 그러시죠?” 마쓰다 씨는 면전에서 나를 비난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잖아요? 범인은 벌써 체 포됐잖아요. 왜 아직도 취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체포된 스가야 씨가 무죄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쓰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나
네, 처음엔 자백했었지요.
마쓰다 마미를 데리고 간 걸 자백했다고 형사님한테 들었어요. 나
네, 자전거에 태워서 유괴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마쓰다 네? 자전거라뇨? 나
짐받이에 태워서요.
마쓰다 그럴 리 없어요. 마미는 자전거 짐받이 같은 데 못 타요. 나
그렇지요? 네 살이었으니까요.
마쓰다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가 아니면 무리예요. 나
짐받이에 태웠던 적은?
마쓰다 저는 없어요. 탄 적 없을 거예요. 나
재판은 방청하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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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매스컴 때문에 갈 수가 없었어요. 신문에도 실렸는지 모르
겠지만…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여기에 기록한 대화는 극히 일부다. 마쓰다 씨는 처음엔 나에게 항 의했지만 대화는 자연스럽게 취재로 이어졌다. 촬영을 할 수는 없었지 만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스가야 씨의 자백에는 역시 모 순이 있었다. 유족조차 의문을 품는 모순이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마쓰 다 씨에게 범행 내용을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유족이 첫 공판을 방 청하기 위해 법원에 갔을 때 형사는 “매스컴이 많이 와 있으니까 법정 에 들어오지 말고 그대로 돌아가는 게 좋아요”라며 유족을 돌려보냈다. 사건 발생 이후 줄곧 매스컴에 쫓겨 다니며 사생활을 빼앗긴 부부는 순 순히 형사의 말을 따랐다. 마쓰다 씨는 스가야 씨의 진술이나 판결 내용을 나에게 듣게 됐다. 진술의 모순, 그리고 수사의 부자연스러움. 그녀가 느낀 의문은 어느새 카메라 앞에 설 용기로 바뀌었다. 사건 발생 17년 만에 마침내 유족은 나와 사건 현장에 동행했다. 나는 사건에 사용됐다는 스가야 씨의 자전거와 똑같은 자전거를 빌려, 마쓰다 씨와 함께 마미가 유괴됐다는 현장으로 향했다. “이 짐받 이에 그대로 탔다는 건가요? 그건 무리예요” 마쓰다 씨의 의문은 자전 거를 보자마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직접 실험을 했다. 자전거의 짐받이에 마미의 체중과 같은 18 킬로그램의 무게를 실었다. 취재팀의 스태프인 스기모토 준코는 우연 히도 스가야 씨와 키와 체중이 비슷했다. 그녀가 같은 조건에서 자전거 를 굴려 봤다. 스가야 씨의 자전거는 소형이다. 그 때문에 둑으로 올라 가는 언덕에서 앞바퀴가 뜨며 위험해졌다. 경찰도 한 번만 해 보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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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들 상황이었다.
경찰 취재
나는 사건을 담당했던 도치기현 경찰 간부와 수사원들도 취재했다. “스 가야 씨는 100% 범인이에요. 이상하게 보도했다가는 창피당할 겁니 다”, “그 사람은 자백한 뒤에 내 무릎에 엎드려 40분이나 울었어요. 바 지가 눈물로 흠뻑 젖었지요.” 이런 얘기를 지겨울 정도로 들었다. 내가 경찰 담당 기자였으면 이 단계에서 기획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케가와 스토커 사건 취재를 통해서 스스로 본 것, 들은 것 외에는 믿 을 수 없다는 것을 학습했다. 근거가 없는 설 따위에 절대 흔들리지 않 는다. 형사들의 근거는 DNA 감정 결과 말고는 전부 감에 지나지 않았 다. 내 추리와 같은 수준일 뿐이다. 한번은 경찰 간부에게 “스가야 씨는 로리콘4) 취미가 있었나요?”라 고 물었다. 그러자 “가택수사에서도 그런 것들이 나왔으니까요. 로리콘 비디오도 나왔고…”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경찰이 압수한 비디오 목록 을 살펴보니, 로리콘 비디오는 한 편도 없었다. 그 점을 캐묻자 이번에 는 “피해자들이 모두 유치원이나 보육원 아이들이잖아요. 세 명 모두 여자 아이들 아닙니까?”라고 잘라 말했다. 이 정도라면 감은커녕 근거 와 결론이 반대다. 지인의 소개로 경시청 퇴직 간부도 만나 봤다. 아시카가 사건의 자 료를 자세하게 읽어보도록 부탁했지만, 일주일 후 “틀림없는 범인이에 요”, “원죄사건 같은 거 아니에요”라는 단호한 답변만 돌아왔다.
4) 로리타 콤플렉스(Lolita complex)의 일본식 줄임말이다. 남자들이 어린 여자아이를 동
경하고 좋아하는 콤플렉스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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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원 판결과 DNA 감정.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진 않았지만 취재 결과는 모순투성이였다. 만약 원죄사건이라면 중대한 문제가 은폐돼 있는 것이다. 잇따라 발생한 사건들은 모두 미해 결 상태로 재발 가능성도 있었다.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현장 에서 검증 취재를 계속했다. 백 번도 넘게 사건 현장을 찾았다. 계속된 취재를 통해 내린 결론은 ‘수사는 엉터리, 자백은 날조’였다. 나는 힘든 싸움을 각오하고, 원죄보도라는 수렁에 스스로 발을 집어넣었다.
원죄보도 개시
‘북관동 연쇄 여아 유괴 살인 사건’이라는 타이틀로, 나는 보다 다각적 인 취재와 보도를 시작했다. 이 화려한 타이틀은 프로그램 기획회의에 서는 주목을 받았지만, 사회부 등 기자클럽 회원들로부터는 환영받지 못했다. 원래 매스컴은 원죄보도를 기피한다. 경찰이나 검찰과 정면으 로 충돌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재판부라는 ‘성역’이 결정한 판결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틀렸다고 보도하기는 곤란하다 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 또한 보도의 의무 중 하 나일 것이다. 방송은 2008년 1월에 시작됐다. 스가야 씨의 자백에 대한 검증과 DNA 감정의 문제점에 근거해 원죄사건 가능성을 보도했다. 하지만 방 송 시작 직후인 2월, 내 의지는 한풀 꺾이고 말았다. 스가야 씨가 우쓰 노미야 지방법원에 낸 재심청구소송이 각하된 것이다. 캠페인 보도를 시작한 직후라는 타이밍은 나를 괴롭게 만들었고, 내 입장은 더욱 곤란 해졌다. “그런 보도를 하다니 어쩔 생각이지?” 경찰과 타사로부터 비난과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이나 DNA 감정이 틀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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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없다.” 만약 원죄사건이라고 해도 탐사보도를 반복하는 것은 도저 히 무리라는 것이다. 원래 일본에서는 중대 범죄일 때 재심이 열리는 일 자체가 없다. 고립무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취재를 계속했다. DNA 재감정을 촉구하는 내용의 캠페인 보도를 이어갔다. 나는 취재 과정에서 사건 당일 마미의 시체가 발견된 현장인 하천 부지에서 ‘루팡3세’5)를 닮은 남자가 여러 사람에게 목격됐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마미가 사라진 바로 그 시간. 그 남자는 여자 아이의 손을 잡 고 시체가 발견된 현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 ‘루팡’이야말 로 범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DNA 감정 실태도 알아봤다. 미국에서는 DNA 재감정에 의 해 많은 사형수와 무기징역수의 무죄가 증명됐다. 프로그램의 디렉터 가 현지로 건너가 자세히 취재했다. 살인죄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수형 자가 DNA 감정으로 무죄가 밝혀져 변호사가 된 사례도 있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수형자가 원하면 DNA 감정을 실시한다는 법률까지 제 정돼 있었다. 나는 이 같은 미국의 사례를 예로 들며, 아시카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DNA 재감정을 해야만 한다고 보도했다.
뒤집힌 DNA 감정
방송이 시작된 이후 10개월이 지나 스가야 씨가 재심 특별항고를 진행 중이던 도쿄고등법원이 DNA 재감정을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 해 일본 에서 최초로 DNA 재감정이 실시됐다. 그 결과 범인의 DNA와 스가야
5) <루팡3세>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인 몽키펀치가 1967년에 연재한 만화와 그것을 애니
메이션화한 작품이다. 괴도 루팡의 후손인 루팡3세를 주인공으로 한, 난센스 코미디의 요 소가 가미된 액션작품으로 루팡3세는 장신에 마른 체형(179cm, 69kg)으로 설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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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의 DNA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는 속보를 방송했다. 아시카가 사건 보도는 그날을 기점으로 180도 달라졌다. DNA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공식 결과가 발표되자 무관심했던 기자들이 벌떼처 럼 달려들었다. 당국이 재감정 결과를 인정하자마자 원죄를 외쳐대며 광란의 보도가 일제히 시작되었다.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하천 부지에 카메라를 맨 매스컴 집단이 갑작스럽게 모여들었다. 민영방송의 한 기 자는 변호단에게 “왜 니혼TV만 편의를 봐 주나”라며 정색을 하고 항의 했다. 우리는 단지 오랜 시간 취재를 통해 모은 정보를 보도했을 뿐이 다. 기자클럽 근성과 특권의식으로 물든 한심한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 졌다. 검찰은 DNA 재감정을 실시하는 것은 수긍했지만 결과를 받아들 이기는 힘들었다. 재감정 결과가 불일치로 나온다면 새로운 문제가 발 생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모든 DNA 감정이 잘못됐던 것은 아닐까라는 당연한 의문이다. 이 판례는 다른 사건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과학경찰연구소에서 실시한 DNA감정법은 MCT118법이다. 이 감 정법은 염색체의 특정 부위에 나타나는 염기배열의 반복 횟수를 파악 하는 방법이다. 단, 당시의 감정은 현재의 컴퓨터 해석과 같은 고도의 기술이 아니 라, 한천배지에 나타나는 밴드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는 저차원적 기 술이었다. 이 초기 단계의 MCT118법은 기술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 확 인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이 MCT118 방식으로 마미의 셔츠에 남 아 있던 진범의 DNA와 스가야 씨의 DNA는 모두 18-30형으로 확인됐 다. 그러나 STR이라는 최신 감정법을 사용한 재감정에서는 범인과 스 가야 씨의 DNA가 확실하게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의 감정이 MCT118법으로 실시됐다면 재감정에서도 같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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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사용해 정말로 결과가 다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변호인 측 의 추천 감정인인 쓰쿠바대학 교수는 MCT118 방식의 감정을 실시했 다. 단, 해석만 최신 컴퓨터 기법을 사용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셔츠에 남아 있던 진범의 DNA는 18-24였고, 스가야 씨는 18-29였다. 이 결과 가 사실이라면 당시의 감정 자체가 완전히 엉터리였다는 결론이 된다. “충격적이었어요. 설마 과학경찰연구소가 틀렸을 것이라고는 생 각할 수 없었고, 내 감정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400번이 넘게 감 정을 반복했지요. 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MCT118법을 사용해 재감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검 찰은 ‘MCT118 방식으로 DNA 감정을 실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데다 검 찰에 불리할 수 있다’(검찰의견서)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자신감 으로 가득 찼던 사건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의 감정 방 식을 그렇게까지 기피한 이유는 무엇일까. 검찰과 과학경찰연구소는 교수가 실행한 MCT118 방식의 감정에 대해 ‘신뢰성이 결여됐다’고 비판했다. 검찰 측의 재감정만으로도 스가 야 씨의 무죄는 증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검찰은 또 물밑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수사를 담당했던 도치기현 경찰 수사원의 DNA를 감정한 것이다. 수사원 중에 18-24형 이 있으면 새롭게 검출된 DNA는 진범의 것이 아니라 수사원의 DNA라 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거품 취급에 실수가 있었다고 변명할 수 있 게 된다. 사실 검찰은 어떻게 해서라도 18-24 DNA를 없애고 싶었을 것 이다. 검찰은 피해자인 마미의 DNA 감정도 시도했다. 셔츠의 주인인 마미의 DNA가 18-24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검찰은 처음으로 마미의 엄마에게 연락해 “이번에 검출된 DNA는 새로운 감정법을 썼기 때문에 피해자의 DNA가 검출됐을지도 모릅니다”라며 DNA 감정에 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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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미의 엄마는 탯줄을 제공해 감정에는 협력했지만 “사건은 해결 됐다”는 말만 반복해 온 검찰의 행동을 쉽게 납득할 수는 없었다. 검찰 에 불신감을 갖는 게 당연했다. “혹시 스가야 씨가 무죄라면 빨리 방향 을 바꿔 줬으면 좋겠어요. 수사가 잘못됐다면 바로잡아야만 해요.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잖아요.” 마미의 엄마는 직접 검찰에 호소했다. 유 족조차도 스가야 씨가 무죄라고 믿게 된 것이다. 나는 검찰이 비밀리에 감정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과 유족의 입장 을 방송했다. 방송 나흘 뒤, 검찰은 스가야 씨를 석방했다. 재심 전의 석 방이었다. 이 또한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검찰에서 연락이 왔 는데 오늘 스가야 씨를 석방한다는 것 같아요” 나는 마미의 엄마로부터 스가야 씨의 석방 소식을 들었다. 살인 사건의 유족, 그리고 수형자의 무죄를 조사하는 기자.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훗날 검찰은 마미의 엄마가 했던 말이 스가야 씨의 석방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17년 만의 출소. 스가야 씨를 만나기 위해 나는 치바형무소로 향했 다. 형무소 벽돌담 앞에서 처음으로 스가야 씨를 만나 악수를 청했다. 기가 약해 보이는 그는 차 안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수차례 면회를 거 절당하고 허무한 기분으로 지나쳤던 형무소 정문. 수많은 보도진이 촬 영용 사다리를 펼친 채 스가야 씨를 기다리고 있었고, 중계차는 위성안 테나를 세우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헬리콥터가 날고 있었다. 혼란이 예상되는 취재. 니혼TV는 치바 시내의 한 호텔에 스가야 씨의 기자회견장을 마련했다. 기자클럽 회원이든 아니든 올 수 있도록 했다. 큰 홀을 가득 메운 기자들과 카메라맨들. 이 중 스가야 씨의 무죄 여부에 관심을 가졌던 기자는 몇 명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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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스가야 씨는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스가야 씨 체포의 근거가 된 DNA 감정 결과는 도대체 어떻게 나온 것일까? 검 찰의 피해자 감정 결과는? 셔츠에서 검출된 18-24 유전자는 피해자의 것인가, 범인의 것인가?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다. 연쇄 사건의 진범을 밝혀내기 위한 중요한 증거다. 그러나 검찰은 감정 결과를 밝히려고 하 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미의 탯줄과 마미 엄마의 구강 점막을 제공 받아 직접 DNA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두 명의 DNA 모두 18-24가 아니었다. 18-24는 진범의 DNA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 다른 의혹도 떠올랐다. 그것은 아시카가 사건의 수사 결과와 판 결을 뿌리째 흔들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내가 직접 의뢰한 감정으로 밝혀진 DNA는 마미가 18-31, 마미의 엄마가 30-31이었다. MCT118 방 식은 DNA를 이처럼 두 개의 숫자를 조합한 형태로 나타낸다. 그러나 직접 혈액을 감정하는 경우와 다르게 셔츠 같은 물건에서는 복수의 DNA가 검출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몇 가지 숫자가 검출된 다. 이것을 오염(contamination)이라고 한다. 피해자인 마미의 셔츠에 함께 생활하는 엄마의 DNA가 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즉, 셔츠 에는 범인의 정액이 묻기 전부터 ‘18, 30, 31’이라는 DNA가 묻어 있었 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문제는 이 부분이다. 17년간 범인의 DNA로 인식돼 온 ‘18’과 ‘30’이 피해자 측의 DNA와 똑같은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또 있었다. 사건 당시 셔츠의 DNA를 감정할 때, 셔 츠의 주인인 마미의 DNA는 감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피해 자나 관계자의 DNA를 감정한 뒤 검출된 DNA를 제외하는 것이 상식이 다. 그러나 사건 발생 당시 수사 기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아시카가 사건의 DNA 감정 결과는 형사 재판의 증거가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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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을 정도로 허술한 것이었다. 마치 피해자의 혈액형이 A형인 사건에 서 현장에 있던 A형의 혈흔은 범인의 것이라는 얘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검찰은 피해자의 DNA를 감정한 사실도 숨겼다. 나는 이런 사실들 을 모두 보도했다. 그러나 다른 미디어들은 보도할 수 없었다. 당국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가야 씨를 범인으로 몰았을 때 당 국은 DNA 감정 기술을 극찬했지만, 사정이 안 좋아지자 모르는 척 했다.
무죄의 확정
2010년 3월, 스가야 씨는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판결 당일, 우쓰 노미야 지방검찰 재판관6) 세 명이 법복을 입은 채로 스가야 씨에게 머 리를 숙였다. 신문과 방송은 그 장면을 보도하는 데 열을 올렸다. ‘당국 이 인정하면 보도한다’는 그 말 그대로였다. 마침내 자유를 찾은 스가야 씨는 “무죄판결이 나왔어도, 진범이 잡 히지 않으면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어요. 제대로 수사해 주세요” 라며 진범을 잡아 줄 것을 호소했다. 결국 북관동 지방에서 이어진 다 섯 건의 사건은 전부 미해결 상태가 됐다. 무죄 판결 뒤, 최고검찰7)은 아시카가 사건 수사의 문제점을 조사 했다. 검찰은 일련의 사건들이 동일범에 의한 연쇄 범행일 가능성도 있 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또 한 남자가 하천부지에서 여자아이 와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두 명 있다고 발표해, 진범으 로 볼 수밖에 없는 루팡3세의 존재를 인정했다. 미리 그 정보에 대해 조 사하지 않았던 잘못도 인정했다. 미디어들은 그때서야 연쇄사건일 가
6) 법관, 판사를 뜻한다. 7) 한국의 대검찰청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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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추리가 사실로 확인되기까지 2년 넘게 걸렸다. 경찰청은 수 사 문제점을 정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나는 경찰 보고서가 기자클럽 회원사들에게 배부되기 전에 보고서를 입수해 그 내용을 보도했다. 그 때문에 내가 소속돼 있던 니혼TV는 2개월 동안 ‘경찰청 기자클럽 출입 금지’라는 처분을 받았다. 보고서의 내용을 보도한 나는 기자클럽회원 도 아니었고, 그 정보는 개인적인 취재로 입수한 것이었다. 이처럼 기 자클럽 제도는 보도와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한심할 정도로 수준 낮은 보도 현장. 인터넷에 정보가 흘러넘치는 시대 에 이 같은 자기 규제와 의존으로 상호의 정보까지 컨트롤하는 언론계 에 비전이 있을까. 니혼TV의 아시카가 사건 보도는 스트레이트 뉴스를 제외한 특집 방송이 50회, 총 방송 시간은 아홉 시간을 넘겼다. 그러나 이 탐사보도 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연쇄 사건의 진범인 루팡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찰들은 바보였다.” 한 경찰이 털어놨다. DNA 감정 결과는 절대적이라며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데 대한 반성일까. DNA는 절대적 이라고 해도 거기에 감정이라는 단어가 붙는 이상, DNA 자체는 절대적 인 정보지만 감정 결과까지 절대적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DNA 감정 결과는 수사 당국이 이용하기 좋은 정보에 불과했지만 기자들은 아무 런 검증 없이 받아쓰기에만 열중해 스가야 씨를 범인으로 확정해 보도 했다. 당국이 발표한 정보라면 어떤 내용도 문제되지 않는 것일까. 다카하시 기자의 말이다. “사내 보고에서는 당국이 그렇다고 했다 는 게 중요해요. 마치 범인인 것처럼 보도해도 당국으로부터 나온 정보 와 발표 내용에 근거해 그냥 넘어갈 수 있죠. 보도에 무슨 문제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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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다음부터는 충분한 근거를 확보한 뒤에 보도하겠다고 대충 해명하 면 그만이고, 다음 날부터 또 당국에서 나온 정보만을 취재하지요.” 기자의 자질이나 경험이 부족한 것도 큰 문제다. “요즘 기자들은 100% 기관에서 나온 정보밖에 듣지 않아요. 당국에서 나온 정보가 모 든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수사가 잘못됐어도, 거짓이 있어도 그것을 지적할 수가 없어요. 기분을 상하게 해 기삿거리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도 두려운 거지요. 기자 100명에게 물어보면 100명 모두 진실을 추구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죠.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 면 어떻게 진실을 추구할 것인가? 그 답을 알고 있는 기자는 극히 소수 일 테지요.” 결국 문제는 단순한 수도관으로 전락해 버린 거대 미디어 의 현실이다. 내가 소개한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취재 현장의 문제점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관이 발표 하는 정보 중에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내용도 많다. 그러나 그 정보에 거짓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에는 조작된 정보가 혼재해 있다. 공공 기관도, 민간 기업도 자신 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한다. 사죄하고 인정하는 경우는 퇴로를 완전히 잃었을 때뿐이다. 손에 들어온 정보를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기자들의 숙제다. 오케가와 스토커 사건을 취재할 때, 나는 취재 내용과 경찰의 발표 가 너무나도 달라 몇 번이나 당황했다. 결국 경찰은 당당하게 거짓말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보장하는 정보=진실이 라는 도식하에 책상 앞에만 앉아 기사를 쓰고, 현장에는 가 보지도 않는 기자들이 너무나 많다. 탐사보도는 후퇴 일로를 걷고 있다. 기자는 자 신이 직접 취재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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