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의 이해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급변하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 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주제를 10개 항목으로 묶어서 달걀 꾸러미처럼 엮었습니다. 사회의 변화를 빠르게 알기 원하는 대중과 시대에 앞선 지식을 단시간에 알고자 하 는 연구자, 실무자,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편집자 일러두기 ∙ 인명, 작품명, 저서명, 개념어 등은 한글과 함께 괄호 안에 해당 국 가의 원어를 병기했습니다. ∙ 외래어 표기는 현행 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의 이해 정연구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5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의 이해
지은이 정연구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펴낸날 2015년 5월 20일 커뮤니케이션북스(주) 출판 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46 3층 전화(02) 7474 001, 팩스(02) 736 5047 commbooks@eeel.net www.commbooks.com CommunicationBooks Inc. 121-869 3rd F, 46 Worldcup north road Mapo-gu, Seoul,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가 저작권자와 계약해 발행했습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정연구, 2015 ISBN 979-11-304-3662-3 04300 책값은 뒤표지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과 사고의 여닫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 현상의 실재는 동일할까? 내 가 알고 있는 내용과 사물의 실제 모습은 같을까? 나는 사 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을까? 내가 언어의 주인일까, 언어가 나의 주인일까? 언어는 단순히 대응하는 사물이나 현상을 지시하는 도구에 불과 한 것일까, 자기 나름의 독특한 지향을 가지고 인간의 사 고를 이끄는 인도자일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커뮤니케이션 관점에 서 제공한다. 책의 제목인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은 커뮤 니케이션에서 동원되는 기호의 특성과 이 기호를 둘러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인간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할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정연구, 1993). 마치 배를 운전하는 선장이 마음대로 자유롭게 배를 운 전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배의 구조 가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나서 운전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제한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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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한 개념이다. 인간은 자신이 언어를 만들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태어 나서 언어를 배워 사용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지시하는 언어와 지시되는 사물이나 현상의 관계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의 관계 즉 언어의 체계(기호론적 맥 락)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고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 속에 서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가(화용론적 맥락)에 대해 서도 배우게 된다. 촘스키(Chomsky, 1965)는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게 되면 언어의 심층에 깔려 있는 변형생성문법을 알아차리게 되 어 배우지 않은 내용도 마음대로 만들어 이야기할 수 있다 고 했다. 배운 것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고 창의 적인’ 표현을 인간이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 각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인간과 언어의 관계만 본 것이 지 언어를 둘러싼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보지 못했다. 하버마스(Habermas, 1970a)는 언어의 용도가 커뮤니 케이션에 있음에 착안해 촘스키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의 사소통적 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이라는 개념 을 제시하였다. 언어를 둘러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잘 알고 이를 다룰 줄 알아야 비로소 언어를 마음대로 사용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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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고 생각했다. 하버마스의 이런 생각은 화용론(pragmatics)의 개척자 라 할 수 있는 존 랭쇼 오스틴(John Langshaw Austin)과 같은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람이 언어로 의사소통 을 하는 경우에는 표현되는 말이 담고 있는 뜻의 오고감이 다가 아니라고 한다. 말과 사물·현상의 관계에 해당하는 언표적(locutionary) 교환이 있는가 하면 이런 내용에 맥 락을 제공하는 언표내적(illocutionary) 교환, 말하고 있는 내용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지만 듣는 사람을 일정하게 이 끌려는 숨은 의도에 해당하는 언표외적(perlocutionary) 교환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언표적 표현을 상대방에게 할 경우에는 이 말을 내가 어떤 느낌(mood) 으로, 예를 들어 ‘맹세한다’와 같은 분위기도 말로나 몸짓 으로 담을 것이고,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나 이외 누구에 게도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의 직접적인 내 용과는 관련이 없는 생각을 담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말 을 한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사물이나 현상을 표현하는 것 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일정하게 물리적인 힘을 미치는 것 과 다름없는 행위(act)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언 어를 자유로이 사용한다는 것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이런 속성을 정확히 이해해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 중에 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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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성, 사실성, 맥락 적합성, 이해 가능성 등을 따지고 물 을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호를 알고 화용을 알게 되면 인간은 마음대로 완벽히 언론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을까? 촘스키의 이야기대로 언어의 심층에 깔려 있는 변형생성문법을 알고 하버마스 의 말대로 다른 사람과 대화 속에서 언어 표현 외의 의도 와 그 타당성을 따져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될 경우 사람 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촘스키의 자유는 문법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자유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기호체계 를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언급한 내용이 상황에 맞는지 사 실인지 따져 본다고 하더라도 커뮤니케이션 당사자가 함 께 영향을 받고 있는 화용적 맥락의 구속이 어느 정도인가 에 따라 논의할 수 있는 주제와 내용에는 상당한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가령 커뮤니케이션 당사자에게서 초 월적으로 존재하는 가치나 규범에 기대어 이야기하는 관 행이 화자와 청자의 언행을 부지불식간에 상당한 정도로 제한한다면 커뮤니케이션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기호 체계의 전복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생각을 확대해 보기 위해 처음에 질문한 내용처럼 보다 근본적인 질문, 즉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실재와 동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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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를 다시 해 보면 대답은 ‘아니다’로 해야 할 것이다. 루 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초기 언어 이론에서처럼 언어가 사물을 일대일로 그림처럼 잘 묘사 하고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일대일로 그림처럼 잘 묘사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바 로 커뮤니케이션의 화용론적 맥락과 기호론적 맥락이다. 그것은 잘 묘사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일 뿐만 아니라 잘못 된 내용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구도를 형성한다. 언어가 사물을 잘 묘사하지 못함을 보여 주는 사례로 한국어나 영어 등 현재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가 가진 이항 대립 구조를 들 수 있다. 페르디낭 드 소 쉬르(Ferdinand de Saussure, 1915/1959)는 개별 어휘의 값(value)은 이런 이항 대립 구조(binary opposition) 등 그 어휘가 다른 어휘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관계들의 총체로서 언어를 바라봤다. 그러므로 언어는 개별 어휘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하 나의 체계(langue)를 형성하고 있으며 개인들의 발화 행 위(parole)는 이런 체계 속에서 움직인다고 했다. 언어가 이러한 속성을 가진다면 언어는 더 이상 세상과 일대일의 관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무색무취한 도구가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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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체계가 세상과 똑같은 체계 를 가지고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와 세상이 일대일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세상의 제반 현상은 단절되지 않은 연속적 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이를 분절적으로 잘라 이름 을 붙이는 데 있다. 가령 늙음과 젊음이라는 이항 대립 구 조를 하나의 예로 이런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언어 의 이항 대립과 달리 현실은 늙음의 저편에 젊음이 있지 않다. 현실 속에서는 늙음과 젊음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절 단점을 결코 찾을 수 없다. 그저 가능한 것이 있다면 나이 가 다른 두 사람을 동시에 놓고 한 사람에게는 늙음을, 다 른 한 사람에게는 젊음을 붙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젊음과 늙음을 절대적인 어떤 현상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인식한다. 사전(辭典)은 사람들의 이런 인식이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젊다’는 말에 대해 ‘(사람이) 나 이가 상대적으로 적거나 한창때에 있다’라거나 ‘(사람이나 그 외모가) 실제 나이보다 나이가 적게 느껴지다’거나 ‘(무 엇이) 청년다운 활기와 생생함이 있다’는 등의 뜻풀이가 동원되고 있다. 이런 뜻풀이를 통해 늙음이라는 대립쌍을 동원하지 않고는 존재하기 힘든 말을 단독으로도 어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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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젊음이라는 말과 일대일 관계를 맺 는 현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만약 절대 적인 의미의 젊음을 이해하려면 젊음을 젊음이라고 이해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은 산을 산이 라고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인 산을 인위의 언 어 속에 가둬서 실재의 산과는 다른 내용으로 보고, 기억 하고, 표현할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그 산을 그 산으로 보 고, 기억하고, 표현하는 것이 산과 나, 산과 우리의 관계를 보다 정확히 하는 방안이 된다. 이러지 않고 산을 기억하 고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고 있는 단어를 나열하기 시 작하면 끝없는 작업을 해도 결코 내가 본 그 산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산에는 내가 본 그 산도 있지만 그 산과는 높이나 모양이 다른 산도 있으며 산이라 할지 높은 언덕이라 해야 할지 애매한 대상도 있기 때문에 그 산이라 고만 해야 그 산을 온전히 이해하고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 이 된다. 그 산을 그 산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인류가 사물을 점점 더 작은 것으로 나누고 정의하고 검증하는 방식을 통해 발 전시켜 온 문명의 발전 방향에 조화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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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 교과서는 이런 설명을 항진명제(tautology), 즉 항 상 진리인 명제이긴 하나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알게 하지 못하는 무용한 명제라고 설명한다. 정말 무용한 것일까? 인류가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개발한 언 어는 모든 것을 선형적, 순차적으로 정리하도록 되어 있지 만 실제로 인류가 사물을 경험하는 것은 일시에 총체적으 로 경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처음 문자 가 발명되어 인류가 사물을 기록하는 방식은 ‘불편하고 온 전하지는 않지만 할 수 없이’ 인간의 실제 경험과는 다른 방식인 문자를 문장이라는 선형적 틀 안에 기록해 왔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은 인류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언어의 오류를 최대 한 줄이고 감정을 배제할 목적으로 언어가 아닌 수학 기호 등의 사용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분석철학 등의 노력이 있 었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인간의 경험을 기억하 고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기록 방식들이 점차 인간의 경 험 체계에 근접하고 있다. 언어 중심에서 사진, 동영상으 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오감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매체가 발달하고 있다. 그래서 그 산이 어떻다고 백번 이 야기하는 것보다 그 산을 스스로 경험하게 할 때 훨씬 더 많은 정보와 온전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음을 인류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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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고 종종 이야기해 왔다. 그 산을 그 산이라고 총 체적으로 온전히 바로 느끼게 해 줄 방법이 뒷받침해 주지 않아서 못했을 뿐이지 그 산을 그 산이라고 전하는 방식의 유용성이 인류 역사 속에서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젊음을 젊음이라 하고 산을 산이라고 해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노력을 통해 인류가 얻을 수 있는 것 은 무엇일까? 현재까지 인류가 만들어 온 다양한 개념이나 기호가 실 재와 달랐던 관계로 인간에게 다양한 불편함이나 고통을 제공해 왔던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다. 남자를 여자의 저편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다면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지금과 어떻게 달라질까? 남자 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 제4의 성이 들어설 여지가 많아 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호의 호명(呼名)으로 부여된 개 인의 성 정체성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폭력적인 상황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은 질적으로 섞일 수 없는 여 성과 ‘달라야 하므로’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면 이를 따라야 하는 폭력 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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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내가 아는 그 삶은 실제로 존재할까? 죽음의 이편에 있는 ‘삶’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는 것일까? 고통은 어떨까? 삶과 죽음의 이분법이 있지 않다면 고통은 존재할까? 내 가 알고 있는 그 고통이 존재하기는 할까? 내가 아는 그 어 머니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아버지의 이편, 자식의 저편에 있는 그 어머니가 가끔은 한 소녀였고 한 딸이었던 사실에 종종 놀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듯 인류가 쓰고 있는 언어는 그 나름대로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류가 세상을 일정한 방향에서 일정한 내용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을 보면서 이를 인식하고, 기록·표 현하고 기억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 쓰는 것이 아니라 완 전히 백지상태에서 이미 있는 언어를 배워서 쓰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언어가 지시하는 세계관을 배워 세상을 인식 하고 표현하고 기억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배우려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실재와는 관계없이 나름대로 의 고유한 우주관에 입각해서 언어가 시키는 대로 세상을 보게 된다. 혹시 태초에 누가 언어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언어와 세상이 일치한 모양이었을지 모르지만 언어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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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간 전수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동일성을 꾸준히 유지해 가는 반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 왔기 때문에 언어와 세상 은 지속적으로 유리될 수밖에 없음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의 지시대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실재와 달리 세상을 보고 있음에도 좀처럼 이 한계를 뚫는 혁명적 파괴가 생기지 못하는 데는 당장 놓아 버리면 바로 아무것도 인지, 기록·표현, 기억을 못하게 하는 기호체계의 구속과 함께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언어 를 사용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청자와의 화용관계가 만들어 내는 구속 또한 한몫을 한다. 화자와 청자가 하나의 언어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 문에 어느 일방이 마음대로 대화의 규칙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동체의 목적과 전통에 따라 대화 에 나와 너의 거리가 무한히 멀어져 있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나와 네가 사실상 하나와 다름없을 정도로 미분화되 어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하루아침에 변경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종종 ‘우리’라는 말로 타자를 묶는 경향이 있다. 이때의 화자 와 청자의 거리는 미분화 상태다. 서양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리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화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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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가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쉽게 비판적으로 객관화해 볼 수 없는 거리감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아 침에 나와 네가 함께 가지고 있는 편견을 비판적으로 논의 해 보기 위해 나와 너 사이에 인위적으로 거리를 만드는, 즉 이른바 비판적 거리(critical distance: Habermas, 1970b)를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서양권 사회라고 하 더라도 매스미디어의 선전 효과가 국민의 일치된 생각을 상 당 수준 만들어 내는 분위기라면 역시 비판적 거리를 만들 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술가 집단에서 기대되는 청자와 화 자 사이의 화용적 거리가 종교적 집단에서 보이는 청자와 화자 사이의 화용적 거리보다 상대적으로 더 미분화된 상태 여서 함께 가지고 있는 기호론적 체계나 이 기호체계를 사 용하는 방법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기가 더 힘들 것이다. 화용론적 거리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대화 공동체에서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이런 화용 론적 힘의 작용 때문에 세상의 실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 로 세상을 설명하고 이해함을 쉽게 알아채지 못하고 알아 챈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를 변혁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 다. 그렇다면 결국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한 것이라는 뜻 에서 창의적 사고, 다시 말해 지금까지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 보기라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의 창의적 사고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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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을러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이 라는 비가시적 장애물로 못하는 것이라 해야 마땅하지 않 을까? 이런 질문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자 발간 배경이다.
이 책의 구성 ‘기호를 중심으로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화용론적 맥락)’ 와 그 관계 속에서 ‘관찰대상 기호가 다른 기호와 일반적 으로 맺고 있는 관계(기호론적 맥락)’를 살펴보기 위해 만 든(정연구, 1993)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이라는 개념은 커뮤니케이션학에서 아직은 널리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 다. 이 책은 그래서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의 정의를 설명 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반드시 직면하 게 되는 기호론적 맥락과 화용론적 맥락을 동시에 고려함 으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현상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그 런 연후 그 현상을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을 통해 구태여 포착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 장에서 밝힌다.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의 불가시성, 자율성, 항상성으로 사람들은 매우 제한된 범위의 비판적 사고만 하게 되는 내용을 설명한다.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에 대해서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과 형식에 대해서 관심을 제대로 가지지 못함으로써 인류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 개척과 같은 큰 변혁을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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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거나 논의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기호론적 맥락과 화용론적 맥락에 대 한 보다 상세한 이해가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에 대한 이 해를 풍부히 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따라 이들 각각에 대 한 설명을 별도의 장으로 만들어 다음 순서에 넣었다. 기 호가 어떻게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고 제한할 수 있는지, 이런 기호를 대화 당사자가 함께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기호론적 맥락과 화용론적 맥락이 개별적으로 인간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한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이 라는 틀에서 살펴볼 경우 커뮤니케이션과 인간의 사고는 어떤 관계일까를 설명하는 다음 장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언론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하더 라도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기호(언어)체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구가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의 기호(언어)가 보여 주는 세상과 실제 로 존재하는 세상이 어떻게 다를 수 있음도 논의한다. 이후 네 개의 장에서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을 소개한 다. 세상에는 한 가지의 준거양식만 존재하지 않는다. 커 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이라는 형식적 틀은 시대와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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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하고 언제나 있었겠지만 그 작동 방식이나 그 틀에 담 기는 내용은 인류 역사를 통해 다양하게 존재해 왔다. 예 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 사회와 같이 노예를 제외한 모든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 했던 사회에서 형성된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이 있었던 가 하면 구체제의 계급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되 계급 간의 조화를 통해 이상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유가 사회에서 형 성된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도 있었다. 짧게 역사 속에서 실현되기는 했지만 법가 사상이 한 국가의 지도 원리로 등 장한 시기에 형성된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도 있었다. 한 나라 전체의 지도 원리로 채택된 경험은 없지만 여러 형태 의 조직을 통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 온 도가적 커뮤니케이 션 준거양식도 인간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구조에 대 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인류 역사 속에서 꾸준히 하게 만들었다. 이 밖에도 국가 운영이나 사람들 간 커뮤니케이션 방식 을 제안하고 있는 다양한 사상들에 담긴 다양한 커뮤니케 이션 준거양식들이 더 있을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살펴보 는 것은 현재 내가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커뮤니케 이션 준거양식을 낯설게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함께 배우는 커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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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이션 준거양식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어서 이것이 내 커뮤니케이션에 어떤 한계를 설정하고 있 는지를 모르게 하기 때문에 이런 거리 두기는 완전히 새로 운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자극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현재 한국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준거 양식이라 할 유가적 준거양식을 통해 한국민의 커뮤니케 이션과 사고에 어떤 한계가 설정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기록에 있는 내용만 보더라도 삼국시대부터 조선조에 이 르기까지 천 년 이상 유가 사상이 국가 통치 원리로 작용 했다. 그런 관계로 유가적 커뮤니케이션 준거양식이 여전 히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고, 어떻게 이 양식이 작동하고 그 결과 한국민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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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정연구(1993). 한국신문에 나타난 ‘자유’와 ‘평등’개념의 어용(語用)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Austin, J. L.(1976). How to do Things with words(The William
James lectures delivered at Harvard Univesity in 1955). Oxford University Press. Chomsky, N.(1965).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 M.I.T. Press. Habermas, J.(1970a). Toward a theory of communicative competence. Inquiry, 13, 360∼375. (1970b). On systematically distorted communication. Inquiry, 13, 205∼218. Wittgenstein, L.(1922).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Routledge. 이영철 옮김(1991). 논리-철학 논고. 천지. Saussure, F. D.(1959).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W. Baskin, trans.). McGraw-Hill Book. (Original work published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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