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나오는 사람들
새터나이너스: 전 로마 황제의 장남, 차후 황제가 됨 배셔너스: 새터나이너스의 동생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로마의 귀족, 고트족 정벌군 장군 마커스 앤드로니커스: 로마의 호민관, 타이터스의 동생 러비니아: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의 딸 루셔스, 퀸터스, 마셔스, 뮤티어스: 타이터스의 아들들 어린 루셔스: 루셔스의 아들, 타이터스의 손자 퍼블리어스: 마커스 앤드로니커스의 아들 셈프로니어스, 케이어스, 밸런타인: 타이터스의 친족들 에밀리어스: 로마의 귀족 태모라: 고트족의 여왕 앨라버스, 드미트리어스, 카이런: 태모라의 아들들 에런: 무어인, 태모라의 연인 전령, 광대 유모와 흑인 아기 고트족과 로마인들 타이터스의 친족들, 원로원 의원들, 호민관들, 장교들, 병사 들, 시종들
3
3막
1장
원로원 의사당 앞. 재판관들, 원로원 의원들, 호민관들 등장. 뒤이어 결박된 타이터스의 두 아들 등장. 타이터스, 앞으로 나서며 탄원한다.
타이터스
판관과 의원 여러분, 내 말을 들어주시오! 존경하는 호민관들이여, 잠깐만 멈춰주시오! 여러분들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청춘을 송두리째 위험한 전쟁터에 바친 이 늙은 몸을 불쌍히 여겨서라도 로마를 위해 아낌없이 흘린 내 모든 피를 봐서라도 보초를 서느라 꼬박 새운 수많은 추운 밤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나이 들어 쭈글쭈글해진 이 뺨의 주름을 타고 한없이 흐르는 비통한 눈물을 봐서라도 제발 죄지은 내 자식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오. 저 애들의 영혼은 생각만큼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전사한 스물한 명의 아들을 위해 나는 결코 울지 않았습니다. 그 애들은 명예의 높은 침상 위에 잠들었으니까요.
91
(타이터스 땅에 쓰러진다. 재판관들, 원로원 의원들, 호민 관들, 그 곁을 지나간다)
타이터스
호민관 여러분, 하지만 이 애들을 위해서는 내 가슴의 번민과 내 영혼의 눈물을 이 흙먼지에 대고 쓰겠소. 메마른 땅의 식욕을 내 눈물로 채우겠소. 내 아들의 피를 흘리면 이 땅은 부끄러움에 홍조를 띨 거요. 오, 대지여, 젊은 사월이 봄비로 너를 적시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이 낡은 두 항아리에서 쏟아지는 홍수 같은 비로 네 갈증을 달래주리라. 여름날 가뭄에도 여전히 비를 뿌려주고 이 뜨거운 눈물로 겨울의 눈도 녹여주어 네 얼굴에는 영원한 봄이 그치지 않게 해주마. 그러니 제발 사랑하는 내 아들들의 피는 마시지 말아다오.
(루셔스 칼을 뽑아들고 등장)
타이터스
오, 존경하는 호민관 여러분! 오, 친절하신 원로 여러분!
92
내 아들들을 풀어주고 죽음의 운명을 되돌려 주시오. 그리하여 결코 울어본 적이 없는 나로 하여금 내 눈물이 웅변보다 더 감동적이라고 말하게 해주시오. 루셔스
오, 고매한 아버지, 당신은 지금 헛되이 울고 계십니다. 호민관들도 그 울음소리를 듣지 않고 아버지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돌에다 대고 슬픔을 되뇌고 계십니다. 타이터스
아, 루셔스. 네 동생들을 위해 탄원하게 해다오. 고결한 호민관들이여, 다시 한 번 이렇게 간청 드리니− 루셔스
아버지, 아버지 말씀을 듣고 있는 호민관은 아무도 없습니다. 타이터스
상관없다, 얘야. 내 말을 듣고도 모른 체하거나 알아듣고도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간청해야 한다. 하염없이 간청해야 한다. 그래서 이 돌들에게라도 내 슬픔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돌들이 내 탄원에 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호민관들보다는 낫다. 적어도 그것들은 내 말을 막으려고 하지는 않으니까.
93
내가 울면 돌들은 겸손히 내 발아래서 내 눈물을 받아주고 나와 함께 울어주는 것만 같다. 이 돌들에게 점잖은 옷만 입힌다면 로마에 이만큼 훌륭한 호민관은 없을 것 같다. 돌은 밀랍처럼 부드러운데 호민관들은 돌보다 더 강퍅하구나. 돌은 말없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데 호민관들은 입술을 열어 죽음을 선고하는구나. 그런데 너는 왜 칼을 들고 서 있는 거니? 루셔스
동생들을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재판관들은 저에게 로마로부터의 영원한 추방을 선고했습니다. 타이터스
오, 너는 참 행운아다! 그들이 네게는 친절을 베풀었구나. 어리석은 아들아, 너는 로마가 호랑이가 득실대는 황야라는 것을 몰랐단 말이냐? 호랑이는 먹이를 필요로 하는 법. 지금 로마의 먹잇감은 너와 나밖에 없단 말이다. 그런 야수들의 굴혈로부터 추방을 당하다니 너는 참으로 행복한 존재다!
94
그런데 저기 마커스와 함께 오는 사람은 누구냐?
(마커스, 러비니아를 데리고 등장)
마커스
타이터스 형님, 늙은 형님의 두 눈으로 눈물을 뿌릴 채비를 하세요. 그렇지 않으시면 형님의 고결한 심장은 터져버릴 겁니다. 저는 늙은 형님께 죽음에 이르는 슬픔을 가지고 왔습니다. 타이터스
슬픔이 나를 죽일 거라고? 그게 뭔지 내게 보여다오. 마커스
이 아이는 형님의 딸이었습니다. 타이터스
무슨 소리냐, 마커스? 아직도 그 애는 내 딸이다. 루셔스
아, 보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구나! 타이터스
이 약해 빠진 놈! 일어나라, 일어나서 얘를 잘 보아라. 말해라, 러비니아. 어떤 저주받은 손이 이 아비의 눈앞에 너를 두 손이 잘린 채 서게 했느냐?
95
어떤 놈이 저 넒은 대양에 물을 끼얹고 불타는 트로이에 장작을 던져 넣는단 말인가? 내 슬픔은 이미 네가 오기 전에 절정에 달해 있었거늘 이제는 범람하는 나일 강처럼 경계를 넘어섰다. 칼을 다오, 내 손도 잘라버리겠다. 이 손들은 로마를 위해 싸웠으나 모든 것이 헛된 싸움이었다. 이 손으로 먹고 생명을 부지해 왔으니 오늘의 슬픔을 키운 것도 바로 이 손이다. 이 두 손을 들고 간절히 기도도 했으나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다. 이제 이 손들이 할 일이란 서로를 자르는 것밖에 없다. 러비니아, 두 손을 잃어버린 건 잘한 일이다. 로마를 섬기는 손이란 헛되고 헛된 것일 뿐이니까. 루셔스
누이야, 말해보렴. 누가 너를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었니? 마커스
오, 달콤한 새들의 노랫소리 같이 머릿속 생각을 아름다운 선율로 빚어내며 듣는 귀를 매혹하던 네 혀가 그 울림 깊은 모태로부터 찢겨져 나갔구나.
96
루셔스
그러니 숙부께서 대신 말씀해 보세요.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마커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한 마리 사슴같이 이미 이런 몰골이 되어 제 몸을 숨기려고 이리저리 숲을 헤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단다. 타이터스
이 아이는 내 사랑, 내 사슴이었다. 널 이렇게 만든 자는 죽음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내게 입혔구나. 나는 마치 광야 같은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바위 위에 올라서 있는 것 같구나. 한 뼘 한 뼘 차오르는 물결을 지켜보면서 거친 파도가 흉포한 바다의 창자 속으로 나를 집어삼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구나. 불쌍한 아들놈들은 죽음의 길로 갔고 또 다른 아들놈은 여기 추방자의 몸으로 내 곁에 서 있다. 내 아우는 형의 고난에 눈물을 삼키며 곁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내 영혼의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러비니아, 내 영혼보다 귀중한 내 딸이다. 이렇게 참혹한 네 모습을 그림으로 본다 해도 미치고 말 텐데
97
이렇게 산몸으로 내 앞에 섰으니 난 어떡하란 말이냐? 그 눈물을 닦을 손조차 너는 없구나. 누구 짓인지 내게 말해줄 혀도 없고. 네 남편도 죽고 그로 인해 네 오빠들도 사형에 처해졌다. 오, 마커스! 오, 루셔스, 이 아이를 보아라! 오빠들 얘기에 새 눈물이 솟아 뺨을 적시고 있어. 다 시든 백합 꽃잎에 이슬이 내린 것 같구나. 마커스
오빠들이 남편을 죽였다기에 우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오빠들의 무죄함을 알기에 우는 것일는지도. 타이터스
정녕 오빠들이 네 남편을 죽였다면 기뻐해라. 네 오빠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아니다, 아니야. 그 애들이 그런 흉악한 짓을 저질렀을 리 없다. 오, 슬픔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저 아이를 보아라. 사랑하는 내 딸아, 네 입술에 입 맞추게 해다오. 아니면 내가 어떻게 해야 네 슬픔을 달랠 수 있을지 무슨 몸짓이라도 해보렴. 여기 있는 네 숙부와 오빠, 그리고 너와 내가 함께 어느 샘물가에 둘러앉아
98
홍수가 남기고 간 진흙 자국으로 더럽혀진 거친 풀밭 같은 우리 뺨을 그 샘물에 비춰라도 볼까? 그러고는 그 샘물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서 그 샘물이 짠 바닷물로 변할 때까지 우리의 쓰라린 눈물을 떨어뜨려나 볼까? 아니면 우리 손도 네 손같이 잘라버릴까? 우리 혀도 네 혀같이 깨물어 잘라버려 이 한 많은 인생의 남은 나날을 대사 없는 무언극의 벙어리 배우로 살아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직 혀가 붙어 있는 우리가 더 비참한 극본을 생각해 내보자. 다가올 세대도 경악을 금치 못할 잔인한 극본을 말이다. 루셔스
아버지, 제발 눈물을 거두세요. 아버지의 통곡에 불쌍한 누이는 저렇게 말없이 온몸으로 흐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마커스
(러비니아에게) 진정해라, 얘야. 형님, 이걸로 눈물을 닦으세요.
99
타이터스
아, 마커스, 내 동생아! 이 손수건은 내 눈물 한 방울도 닦아주지 못한다. 이미 네 눈물로 흠뻑 젖어 있지 않으냐. 루셔스
아, 러비니아, 내 동생아. 네 젖은 뺨은 내가 닦아주마. 타이터스
저걸 봐, 마커스, 저걸 좀 봐! 저 애의 몸짓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말할 수 있는 혀가 있다면 바로 내가 네게 한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거야. “오빠의 손수건은 이미 오빠의 눈물로 흠뻑 젖어 있어 슬픔에 젖은 내 뺨을 닦아주지 못해요”라고 말이야. 오, 우리는 슬픔의 합창을 부르며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연옥의 경계를 서성이고 있구나.
(에런 등장)
에런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장군, 내 주인이신 황제 폐하께서 이 말을 당신께 전하라 하셨소.
100
장군이 장군의 아들들을 사랑한다면 마커스 호민관이나 장남 루셔스, 또는 장군 당신의 손을 잘라 폐하께 보내라 하셨소. 그 손을 받으시면 폐하께서는 장군의 두 아들을 살려 돌려보내시겠다고 하셨소. 그것이 반역자들의 몸값이오. 타이터스
오, 은혜로우신 폐하! 오, 친절한 에런이여! 지금이 아니면 그 언제 까마귀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소식을 전해주는 종달새의 달콤한 목소리로 노래한 적이 있단 말인가? 기꺼이 내 손을 폐하께 보내리라. 친절한 에런이여, 나를 도와 이 손을 붙들어 주게. 루셔스
멈추세요, 아버지. 무수한 적을 쓰러뜨린 아버지의 고귀한 손을 자르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 손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손을 잘라 흘릴 피도 아버지보다는 젊은 제가 더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손으로 내 형제를 구하게 해주십시오. 마커스
두 사람의 어느 손이 로마를 지키지 않았소?
101
어느 손이 피로 물든 도끼와 칼을 높이 치켜들고 적군의 성벽에 공포의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았소? 오, 이들은 세운 공이 많은 손이었소. 내 손은 한 일이 없소. 이 손으로 조카들의 목숨 값을 치르겠소. 그러면 나 또한 내 손의 값어치를 얻게 될 것이오. 에런
다투지 말고 누구의 손이 될지 어서 정하시오. 서둘지 않으면 폐하의 사면이 떨어지기 전에 두 아들의 목숨은 끊어질 것이오. 마커스
내 손으로 할 것이다. 루셔스
결코 그렇게는 안 됩니다. 타이터스
더 이상 다투지 마라. 시들어가는 잡초 같은 이 손이야말로 뽑히기에 마땅한 것. 그러니 내 손이다. 루셔스
아버지, 저를 아들로 생각하신다면 제가 형제들의 목숨 값을 치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102
마커스
형님,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위해서라도 내가 형제의 도리를 다하도록 해주세요. 타이터스
그럼 두 사람이 정하라. 내 손은 거두마. 루셔스
그럼 가서 도끼를 가져오겠습니다. 마커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자는 내가 될 것이다.
(두 사람 퇴장)
타이터스
에런, 이리 오게. 내가 저들을 기만했네. 좀 도와주게, 내 손을 잘라주겠네. 에런
(방백) 그게 기만이라면 난 그야말로 정직한 사람이군. 나라면 사는 동안 그런 기만일랑 저지르지 않을걸. 하지만 다른 종류의 기만은 마다하지 않겠어. 그 하나는 곧 알게 되겠지만 말이야.
103
(타이터스의 손을 자른다. 루셔스와 마커스 돌아온다)
타이터스
이제 다툴 일 없다. 잘라야 할 것은 이미 잘랐으니까. 친절한 에런, 폐하께 내 손을 가져다 드리게. 수천 번의 위험으로부터 그분을 지켜드린 손이라 말해주게. 그러니 잘 묻어달라고. 그 이상의 공도 있으나 그것까지 알아달라고 하진 않겠다. 이 손으로 내 아들들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을 싼값으로 보석을 산 것과 같이 여긴다고 말씀드리게. 하지만 비싸기도 하지, 원래 내 것인 것을 값을 치르고 되찾으니 말이야. 에런
그럼 가보겠소, 앤드로니커스 장군. 이 손 덕분에 아들들은 곧 돌아올 것이오. (방백) 그들의 머리통만 말이다. 오, 생각만 해도 즐거워지는군! 바보들은 선행을 하고 흰 얼굴을 가진 놈들은 신의 은총 따위나 구해라.
104
에런은 제 얼굴빛에 어울리는 검은 영혼을 가지리라.
(에런 퇴장)
타이터스
오, 여기 남은 한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폐허가 된 이 몸을 땅에 꿇으리라. 이 비참한 눈물을 동정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을 부르리라. 아, 러비니아, 너도 나와 함께 무릎을 꿇는 거냐? 그래, 우리 같이 무릎을 꿇자꾸나. 하늘은 우리 기도를 들을 거다. 그렇지 않다면 깊은 한숨이라도 내뿜어 짙은 안개처럼 태양을 가려버리자. 태양을 제 가슴에 끌어안아 녹아버리고 마는 구름처럼 말이다. 마커스
오, 형님, 제발 희망을 가지세요. 그렇게 끝도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들지 마세요. 타이터스
내 슬픔은 바닥을 모르도록 깊다.
105
그러니 비탄의 탄식도 그만큼 깊을 수밖에. 마커스
이성으로 슬픔을 다스리세요. 타이터스
이 비참한 운명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내 슬픔의 한계도 생각으로 정할 수 있겠지. 하늘이 눈물을 뿌리면 땅에는 홍수가 나지 않더냐? 바람이 울부짖으면 바다는 미친 듯 춤추지 않더냐? 바위에 부딪혀 솟구치는 물기둥이 하늘을 때리지 않더냐? 그런데 이 말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더러 이성을 되찾으라고? 나는 바다다. 바람처럼 몰아치는 저 애의 탄식 소릴 들어보라. 저 아이는 울부짖는 하늘이고 나는 땅이다. 저 아이의 거친 한숨에 내 바다는 온몸을 뒤틀고 저 아이의 하염없는 눈물에 내 땅은 홍수에 휩쓸려 가라앉고 만다. 저 아이의 슬픔이 내 창자를 저미고 들어오는데 끝을 본 주정뱅이처럼 토해내지 않고 내가 어떻게 버티랴.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어라. 혹독한 말로라도 이 쓰라린 창자를 달랠 수 있도록 나를 제발 내버려 다오.
106
(참수당한 머리 두 개와 잘린 손 하나를 들고 전령 등장)
전령
불쌍한 앤드로니커스 장군님! 폐하께 보내셨던 장군의 훌륭한 손은 제값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기 장군의 고귀한 아들들의 머리가 있습니다. 장군의 손 또한 조롱거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장군의 슬픔은 저들의 즐거움이 되고 장군의 결단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당신께 닥친 이 불행을 보자니 제 부친을 잃었을 때보다 더 큰 슬픔이 몰려옵니다.
(전령 퇴장)
마커스
시실리 섬의 에트나 화산은 식어버리고 내 가슴은 불타오르는 지옥이 되어버려라! 이 비참함을 더 이상 참을 길이 없구나. 함께 울어주는 이가 있으면 슬픔도 달랠 수 있지만
107
웃음거리가 된 슬픔은 두 번 죽음을 당한 것과 같다. 루셔스
아, 이 광경이 깊고 깊은 상처를 입혔건만 이 질긴 목숨은 끊어지질 않는구나. 이 몸에는 그저 숨만 들고 나고 있을 뿐이건만 죽음은 왜 이 생명을 거두어가지 않는 것인가?
(러비니아, 타이터스에게 키스한다)
마커스
불쌍한 러비니아, 네 입맞춤은 굶주린 뱀에게 주는 얼어붙은 물 한 모금이로구나. 타이터스
이 끔찍한 꿈에서 언제 깨어날까? 마커스
이제 위로의 말일랑 그만두자. 형님, 죽으시오. 형님은 지금 잠든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의 참수된 머리를 보시오. 형님의 용맹했던 손을 보시오. 갈기갈기 찢긴 형님의 딸아이를 보시라고요.
108
이 멋진 광경에 넋을 잃고 핏기를 잃고 서 있는 추방자 신세가 된 저 아들을 보시고 돌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 동생도 보시오. 아, 이제 슬픔을 참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형님의 흰 머리를 쥐어뜯고 하나 남은 손마저 그 이빨로 물어뜯으시오. 이 처참한 광경을 더 이상 보지 않도록 우리 눈을 당장 뽑아버립시다. 폭풍이 몰아쳐야 할 이때 왜 형님은 이리도 잠잠하십니까? 타이터스
하, 하, 하! 마커스
어찌 웃으신단 말이오?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오. 타이터스
왜 웃느냐고? 더 이상 쏟을 눈물이 없기 때문이지. 슬픔은 이제 나의 적이다. 내 눈을 눈물로 젖게 하고 그 눈물로 나를 눈멀게 하는 나의 적이다. 두 눈이 멀어서야 복수의 신이 웅크리고 있는 동굴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109
저 두 개의 머리가 내게 말을 걸며 위협하고 있다. 이런 짓을 저지른 놈들의 머리를 똑같이 잘라버릴 때까지 나는 어떤 평안도 맛볼 수 없으리라고. 자, 내가 이제부터 할 일을 생각해 보자. 너희들 슬픔에 짓눌린 사람들아, 나를 둘러싸라. 너희들 얼굴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너희가 당한 일 하나하나를 반드시 갚겠노라고 내 영혼에 대고 맹세하겠다. (러비니아, 루셔스, 마커스를 차례로 바라보며 맹세의 말을 되뇐다) 서약은 이루어졌다. 자, 아우야, 이 머리 하나를 들어라. 다른 하나는 내 남은 한 손으로 들겠다. 러비니아야, 이 손을 네 이빨 사이에 물어라. 아들아, 너는 어서 떠나라. 추방자가 되었으니 여기 머물 순 없다. 고트족에게 가라, 가서 그곳에서 군대를 일으켜라. 나를 사랑한다면 이 아비에게 입 맞추고 어서 떠나라. 우리에겐 할 일이 많다.
(타이터스, 마커스, 러비니아 퇴장)
110
루셔스
고귀하신 아버지 앤드로니커스 장군이시여, 그럼 안녕히. 당신은 로마가 낳은 가장 슬픈 사람이 되셨습니다. 오만한 로마여, 잘 있어라. 루셔스는 반드시 돌아온다. 지금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죽어서라도 돌아온다. 잘 있어라, 소중한 내 누이 러비니아야. 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제 루셔스도 러비니아도 세상의 눈을 등지고 슬픔과 증오 속에서 살아가야 하리라. 이 오빠가 반드시 살아서 네 복수를 해주마. 오만한 황제와 황후가 성문 앞에 꿇어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게 만들겠다. 자, 고트족의 땅으로 가자. 가서 군대를 일으켜 로마와 새터나이너스에게 참혹한 복수를 가져오리라.
(퇴장)
111
2장
앤드로니커스 저택 타이터스, 마커스, 러비니아, 어린 루셔스 등장 식탁이 마련되어 있다.
타이터스
자, 자, 다들 앉자꾸나. 이 음식을 먹되 쓰라린 슬픔의 복수를 할 힘을 얻기 위한 만큼 이상은 먹지 말자. 마커스, 그렇게 두 손을 슬픔으로 쥐어짜지 마라. 불쌍한 짐승이 된 네 조카와 나는 그 열 배의 슬픔도 마땅히 표현할 손이 없어 이렇게 묵묵히 두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않니. 내 이 오른손은 이 가슴에 폭정을 베풀기 위해 남아 있나 보 다. 내 심장이 이 육신의 텅 빈 감옥 안에서 미쳐 날뛸 때면 이 손으로 이렇게 쳐서라도 내리눌러야 하니 말이다. 러비니아야, 몸짓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너는 슬픔의 모든 길이 그려진 지도 같구나.
112
연약한 네 심장이 미쳐 날뛸 때에도 너는 이렇게라도 쳐서 가라앉힐 손 하나마저도 없구나. 그러니 얘야, 날카로운 한숨을 토해 심장에 상처를 입히든지 처절한 신음 소리로 그놈을 죽여버려라. 아니면 이 칼을 네 이빨로 물고 네 심장에다 구멍을 내어라. 네 가련한 눈에서 흐르는 모든 눈물이 그 구멍으로 흘러들어 소금기 많은 눈물의 바다에 울고 있는 그 바보 광대를 익사시키도록 말이다. 마커스
형님, 이 무슨 짓입니까! 불쌍한 아이에게 자신의 목숨에 그런 잔인한 손길을 대도록 가르치시다니! 타이터스
그게 무슨 소린가! 슬픔으로 인해 너마저 정신을 잃었느냐? 미친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해. 자기 목숨에 들이댈 잔인한 손이 그 애에게 어디 있니? 아, 왜 굳이 손 이야기를 하느냐? 늙은 왕비 헤카베에게 트로이는 불타고 그녀는 나락에 떨어졌음을 다시 일깨우려 하느냐? 오, 제발 손 이야기는 하지 마라.
113
잘려나간 우리의 손을 기억나게 하지 마라. 아, 내가 무슨 미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마커스가 손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손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건가! 자, 다시 앉자. 얘야, 이걸 좀 먹어라. 마실 건 없나? 마커스, 이 애가 하는 말을 좀 들어봐! 찢어진 몸으로 이 애가 하는 말을 난 다 알아들을 수 있어. 슬픔의 누룩으로 빚어낸 눈물 외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겠다고 하는군. 말없이 울고 있는 내 딸아 네 생각을 읽는 법을 나는 배우겠다. 은둔의 수도자가 모든 기도를 완벽하게 외듯이 네 벙어리 몸짓을 정확히 알아맞힐 거다. 네가 한숨을 짓고 손목이 잘려나간 팔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눈을 깜빡거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거나 어떤 몸짓을 보여도 나는 그것들의 철자법을 읽어내고 꾸준한 연습으로 네가 말하는 모든 것을 알아듣도록 배우고 또 배울 것이다. 어린 루셔스
할아버지, 괴롭고 슬픈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114
재미있는 이야기로 고모를 위로해 주세요. 마커스
이 사랑스러운 아이마저도 제 할아버지의 무거운 슬픔에 그 어린 마음이 울음을 참지 못하는구나. 타이터스
울지 마라, 아가야. 그렇게 울면 눈물이 너를 집어삼키고 말 거다.
(마커스, 식탁 나이프로 접시를 내리친다)
타이터스
마커스, 그 칼로 무얼 친 거냐? 마커스
파리예요, 형님. 파리를 잡았어요. 타이터스
물러가라, 이 살인자! 넌 내 심장을 찔렀다. 내 눈은 잔학한 행위를 보기에 이제 지쳤다. 아무 잘못도 없는 생명을 죽이는 것은 타이터스의 동생이 할 일이 아니다. 물러가라, 넌 나와 식탁을 함께할 수 없다.
115
마커스
제발, 형님! 그저 파리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이에요. 타이터스
‘그저’라고? 그 파리에게 부모가 있으면 어떡할 테냐? 그들은 금빛 나는 가녀린 날개를 애처로이 비벼대며 공중을 떠돌며 윙윙대며 슬퍼하지 않겠느냐! 불쌍한 파리 녀석. 붕붕대는 예쁜 선율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려고 날아왔건만! 그런데 네놈이 그걸 죽여버렸어. 마커스
용서해 주세요, 형님. 하지만 그건 황후의 검은 노예처럼 시커멓고 기분 나쁜 파리였어요. 그래서 죽인 겁니다. 타이터스
오, 오, 오! 그렇다면 널 꾸짖은 나를 용서해라. 그렇다면 넌 착한 일을 한 거야. 그 칼을 이리 다오. 나를 독살하러 온 그 녀석을 다시 찔러야겠다. 받아라, 이놈! 자, 이건 태모라의 몫이다! 그래, 우리에겐 아직 힘이 남아 있어. 파리의 모습을 하고 날아온 석탄같이 시커먼 무어 놈을
116
이렇게 죽여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마커스
오, 불쌍한 형님! 슬픔이 지나쳐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실상으로 보는구나. 타이터스
자, 이걸 치워라. 러비니아야, 나와 함께 가자. 네 방으로 가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들을 읽어주마. 루셔스야, 너도 함께 가자꾸나. 어린 너는 눈이 밝으니 내 눈이 침침해지면 네가 대신 읽어다오.
(모두 퇴장)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