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모르는 여자의 마음_맛보기

Page 1

여행을 떠나기 전에

23


24


-

어린 시절 가장 인상에 남는 동화는 각자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모 두들 안데르센 동화에 매료되어 울고 웃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그중 가장 유명한 인어공주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인어공주가 풍기는 여성으로서의 성적 매력에 눈을 뜨게 되면서 왠지 모르게 인어공주의 캐릭터에 더욱 끌리게 됩 니다. 동화에서 알몸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좀처럼 없기 때문이죠. 인어공주는 국내에서 여러 차례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었 고, 1989년에는 디즈니사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세계적 으로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글을 읽는 분 중에는 이 애 니메이션을 보았기 때문에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좀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오히려 안데르센의 원작과 혼동되는 부 분도 있으실 겁니다. 노파심에서 잠깐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요약해서 말 씀드리겠습니다.

깊은 바닷속에 바다 왕의 궁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여섯 명의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예쁜 막내 공주는 언니들처럼 발이 없 고 물고기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내는 조용하고 신중하며 똑똑 한 공주였습니다. 막내 공주는 위쪽 인간세계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고,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25


인어들은 가질 수 없는 영혼을 지닌 인간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인어 는 인간과 진정한 사랑을 해야만 영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공주들은 열다섯 살이 되면 뭍으로 나가 인간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막내 공주는 언니들이 뭍에서 본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바다 위로 올라가 고 싶은 마음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드디어 막내 공주도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바다 위에는 큰 배가 떠 있었고, 배에는 아름다 운 왕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폭풍 때문에 배는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 았습니다. 막내 공주는 왕자를 구해내어 모래밭에 눕혔지만, 한 여자가 왕자를 발견하는 바람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자는 정신을 차렸지 만, 막내 공주가 자기를 구한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막내 공주는 더욱 말이 없어졌고, 매일 왕자를 그리워 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마녀를 찾아가 서 인간의 다리와 인간이 지닌 불멸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마녀는 인어공 주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신이 가지는 조건으로 소원을 들어주면서 공 주의 혀를 자릅니다. 인어공주가 정신이 들었을 때 앞에는 왕자가 서 있었습니다. 왕자는 그녀 가 누구이고, 어떻게 여기 왔는지를 물었지만, 인어공주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왕자는 인어공주를 궁전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지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왕자는 인어공주를 사랑했지만, 왕비로 맞을 생각 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구해준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왕자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바다의 물거품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간절하게 결혼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인어공주의 귀에, 왕자가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왕자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인어공주도 같이 배를 탔습니다. 이윽고 이웃 나라의 아름다운 공주가 나타났습니다. 왕자는 그녀가 바로

26


자신이 찾고 있던 사람이란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결혼식 날 밤, 왕자와 결혼하지 못한 인어공주에게는 물거품이 되기 전의 마지막 밤입니다. 가슴속으로 아파하는 인어공주를 언니들이 찾아왔습 니다. 언니들은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마녀에게 주고 칼을 얻어 왔습니다. 그 칼로 해가 떠오르기 전에 왕자를 죽이고 피에 발을 적시면 다시 꼬리가 자라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어공주는 방으로 들어가 왕자를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칼을 멀리 바닷 속으로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어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졌습 니다.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지 않고 공기의 딸이 되어 300년 동안 착하 게 살면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인어공주는 하얀 두 팔을 해님을 향해 뻗었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를 위해 꼭 기억해 주십사 하는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인 인어공주는 인간의 다리가 아닌 물고 기의 꼬리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요구한 것은 마 녀였고 이를 위해 마녀는 인어공주의 혀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마지 막으로 언니들이 인어공주가 다시 바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칼을 주 었습니다. 이 세 부분은 독립적이지만 사실은 인어공주 이야기의 줄 기를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우선 왜 마녀는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가지고 싶어 했을까요? 그리고 인간의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에게 과연 목소리는 어떤 의미 를 지니고 있었던 걸까요? 또 목소리만이 인어공주 이야기를 완성 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과 같이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27


마녀가 주도한 거래 옛날이야기나 동화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런 이 야기에서는 반드시 소원을 말하는 사람과 그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 이 등장합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은 요정일 수도 있고, 해님일 수도 있고, 산신령일 수도 있고, 사슴일 수도 있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자신이 뭔가 신세를 졌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 경우입니 다. 한마디로 은혜를 갚는 것이죠. 이 경우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는 따로 없습니다.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이나 나무꾼의 사슴이 그런 예 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소원을 비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바쳐야 하는 경우입니다.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 가 자신의 장미를 꺾은 사람을 용서하는 대신, 딸을 자신에게 달라 고 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사 람은 소원을 비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합니다. 굳이 조 금 어려운 이름을 붙인다면, 전자는 소원을 들어주는 데 아무런 보 상이 없는 ‘소원의 비(非)보상적 시혜’이고, 후자는 소원을 들어주면 서 보상을 요구하는 ‘소원의 보상적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어공주가 마녀와 거래를 하는 것은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우위에 있는 상태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소원의 보상적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이런 거래에서 소원을 비는 사람이 내놓는 것은 자신의 목숨, 가족, 영혼, 미모 등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 들입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소원을 이루려면 그만큼 커다란

28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야 기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래를 주도하는 경우에는 소원을 비는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거래를 해야 합니다. 인어공주도 이런 패턴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인어공주가 마녀 를 찾아가는 길의 묘사에서 이미 목숨을 내놓은 거래가 시작되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마녀의 집은 이상한 숲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그곳에 가려면 부글부글 끓 어오르는 진창을 지나야 했습니다. 숲의 나무와 덤불은 두족류(頭足類) 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은 마치 흙에서 솟아나 자라는, 수백 개의 머리 가 달린 뱀같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지는 긴 팔과 같았고, 몸통이 따로따로 움직이기도 해서, 한 번 붙잡은 것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중 략) 마녀의 집으로 가는 숲에는 인간들의 하얀 해골과 두족류들이 목 졸 라 죽인 여자 인어가 보였습니다. 그 광경은 인어공주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소원을 빌러 온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꼭 필요한 무엇인가를 대가로 가져가는 동 화는 사실 매우 드뭅니다. 그저 소원을 비는 사람에게 제일 소중한 것을 가져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자 신에게 필요한 것을 대가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비는 사 람이 목숨을 걸 만큼 희생할 의사가 있는가를 확인하는 이야기가 대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소원을 비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 을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활용한다는 스토리를 옛날이야기나 동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29


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인어공주의 마녀는 어떤 종류의 소원을 들어주는 사 람일까요? 마녀는 표면적으로는 인어공주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아 니라, 자신이 가장 필요한 것을 요구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일단 마녀는 다른 동화나 옛날이야기에서처럼 소원을 들어주면서 목숨 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어공주의 소원은 다리를 얻는 것이니(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되어 영혼을 얻는 것이지만)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

입니다. 인어들은 영혼이 없으니 악마가 파우스트한테 영혼을 달라 고 한 것처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목숨 이외의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인어공주의 영혼이나 생명은 마녀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굳이 인어공주를 시기 질투해서 죽여버리고 싶다는 원한 이 없는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어공주에게 소중한 무엇이 라는 의미로 목소리가 거래된 것이 아니라, 마녀가 절대적으로 필요 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요구했다고 해석해야만 합니다. 그럼 왜 마녀 는 인어공주의 목소리가 필요했던 것일까요? 우선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어공주가 아름다운 목소 리를 가졌기 때문에 그저 그 목소리를 가지고 싶어 했을 거란 추측 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너무 순진한 발상입니다. 이 왕 인어공주가 지닌 아름다움을 가지려 했던 것이라면 그저 ‘미모’ 라는 한 단어로 아름다움 전체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 니면 외형적인 아름다움 중의 하나인 눈, 코, 머리카락 등을 요구하 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더 나아가 금은보화를 요구하는

30


편이 마녀다운 발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녀는 목소리를 요구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마녀는 어디까지나 ‘마녀’일 뿐 결코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녀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 왕따 당한 마법사 마법사와 마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두 사람 모두 마법을 이용한 다는 점에서 같지만, 일반적으로 마녀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 용됩니다. 예를 들어 사전을 찾아보아도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 는 사람”이라고 정말 단순 명료하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미지로 서술되어 있지만, 마녀는 “주문(呪文)과 마술을 써서 사람에게 불행이 나 해악을 가져다주는, 악마처럼 성질이 악한 여자”로 매우 강한 부 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녀는 마법사의 부분집 합으로, 나쁜 마법을 쓰는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녀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요구한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녀의 심리를, 나아가 마녀를 표현하는 작가의 심리를 이해해야 합 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듣고 보던 많은 이야기에는 세상을 지 배하려는 마법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남성입 니다. 하지만 마녀는 그런 글로벌한 스케일의 일은 좀처럼 벌이지 않습니다. 그저 좁은 범위에서 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하거나, 고작 해야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히는 정도에 그칩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 주에게 마녀가 저주를 건 것은 초대를 안 해줬기 때문이고, 백설공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31


주에 나오는 왕비인 마녀가 백설공주를 괴롭히는 것은 미모를 질투 해서입니다. 어찌 보면 그런 일로 마법을 쓰나 할 정도로 유치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마녀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심리적 동기는 모두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나도 다른 요정이나 마법사와 같은 능력을 지녔는데 그 걸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불만, 나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그걸 인정 받고 싶은 욕심, 바로 이런 것들이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動因) 입니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로 보자면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나타나는 사회적 욕구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그저 배부르고, 등 따습고, 편하다고 끝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소속감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럼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을 통해 성과를 내거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수긍할 수 있 도록 이해시켜야 합니다. 바로 설득이라는 노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어떤 방식이든, 우리는 설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정을 이끌어냅니 다. 만일 그 설득이 실패로 끝날 경우, 즉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상 대방을 이해시키지 못할 때에는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어공주뿐만 아니라 동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마녀는 사람들 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마법사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마법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성과와 마법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보여주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 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마법이 충분히 쓸모가 있다는 점

32


을 설득하지 못한 마법사들인 셈이죠. 마녀에게 성과란, 마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 어공주에 나오는 마녀는 꼬리를 다리로 바꾸는 능력을 지닐 정도이 므로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는 마녀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어떤 의 뢰가 들어와도 마녀는 충분히 마법을 이용해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녀는 성과보다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녀가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산다는 설정도, 사실은 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외 롭게 지내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녀는 항상 성과를 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과의 접촉조차 필요 없었다면 굳이 인어공주의 의뢰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어공주로부터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수단, 즉 목소리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목소리는 단지 물리적인 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 리는 인간들이 대화하는 물리적 매체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 하고 공감을 만들어냅니다.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 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대화 능력이 필요합니 다. 바로 마녀는 이런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추고 싶었던 것입니 다. 사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아름다운’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녀가 원했던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음성보다는, 바로 인어공주가 지닌 ‘대중에 대한 친화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녀가 마법사가 되어 사회적인 위상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33


바로 마녀의 바람이 아니었을까요? 이를 위해 인어공주로부터 뺏고 싶었던 것은 금은보화나 미모가 아니라 목소리였던 것입니다.

언어를 잃어버리고 바보가 되어야 하는 인어공주 그런데 잠깐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마녀가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한 이유는 설명되지만, 스토리 전개상 인어공주가 목 소리를 잃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조금 씩 그 이유를 살펴보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녀가 원한다는 설 정 때문이 아니라, 사실 인어공주라는 스토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가 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잃어버려야 했습 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다’는 설정은 사실 ‘말(언어)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화에서도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어, 어’라는 동물적인 발성 이외에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게 됩니다. 즉 엄밀하게 말하자면 혀가 잘림으로써 목소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 인 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일 목소리만을 잃어버렸다 면 말로 표현하는 능력을 잃었다는 것이지, 글로 표현하는 능력까지 잃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동화에는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내 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말과 글을 이해하는 인어 공주가, 왕자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글로 전달했다는 내용은 동 화 속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픈 마음을 그러안고 눈물을 흘릴 뿐

34


입니다. 그러므로 인어공주는 마녀와 거래를 한 후부터는 글과 말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언어 자체를 구사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인어공주는 마녀와의 거래를 통해 자연스레 언어가 지니는 능 력을 마녀에게 건네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인어공주가 가 지고 있던 언어의 힘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마녀의 것이 됩 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거래입니다. 거래란 내가 가진 것을 상대 방에게 주고, 상대방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마녀는 목소리=언어를 얻어서 설득력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가 능해집니다. 하지만 목소리=언어를 잃어버린 인어공주는 그 후 누 구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거나 또는 상황의 진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뭍으로 나오고 나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인어 공주는 뭍으로 나온 순간부터 그저 아름다운 마네킹에 지나지 않습 니다. 동화를 읽어보아도 왕자와 지내기 시작한 인어공주가 자신의 의사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글로 표현하는 예도 없습니다. 인어공주는 어찌 보면 맹목적인 사랑에 빠 진 사람이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하지 못하고, 마치 바보가 된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부터 왜 이렇게 인어공주는 바보가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 하기 위해 잠깐 ‘언어’와 ‘지식’ 또는 ‘앎[知]’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35


언어 = 구분하는 힘 = 앎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를 대표로 하는 구조주의적 언어학에서는, 언어는 ‘불리는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외의 것과 구분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대상 A에 ‘A’ 라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이 B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끔 하는 기 능을 갖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죠. 만일 언어가 없었다면 산은 그저 높이 솟아 있는, 지대가 높은 지형을 의미할 뿐입니다. 하 지만 그 산에 ‘설악산’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설악산은 오 대산이나 월악산, 치악산과는 다른 특정한 산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외부의 대상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지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구분되어 있지 않은 외부 대상들을 각각 다른 것으로 구분해 인식하게 해주는 도구, 즉 언어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언어는 각각의 대상을 구분해 주는 동시에, 말을 하는 주체인 ‘나’와 ‘대상’도 구분해 줍니다. 언어를 통해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명확히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발달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동발 달심리학을 대표하는 피아제(Jean Piaget)에 의하면, 갓난아이는 외부 사물과 자신에 대해 구분하지 못하다가 행동과 감각을 통해 자신이 외부 사물과 구별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환경에 대한 지식을 습득 하고 기본적인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처음에 는 의자의 팔걸이와 자신의 팔을 구별하지 못하지만 점차 감각적 정 보를 통해 팔걸이와 팔을 구분하면서 외부와 자신에 대한 지식을 쌓

36


아가게 되는 식입니다. 이런 외부 환경에 있는 대상에 대한 구분은 언어를 통해 대상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면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이 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대상에 붙은 이름을 통해 그 대 상이 자기의 일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나와 다른 ‘그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의 대상과 다른 대상을 구별하는 것, 또는 나와 대상을 구 분하는 것은 그럼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대상을 구분한다는 것은 지식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것을 ‘안다’고 하는 것 은 그것이 다른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시작됩니다. 밝음과 어둠의 차이를 안다는 것은 밝음과 어둠을 구분한다는 의미입니다. 너와 나의 차이, 미국과 일본의 차이를 안다는 것은 너와 나를 구분 할 수 있고, 미국과 일본을 구분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실 현대 의 과학적 지식은 이런 끊임없는 구분의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아보고자 하는 대상을 잘게 쪼개서 속성과 특징을 찾아내는 지식 습득 과정은 비단 물리학이나 생물학뿐만 아니라 사 회학, 심리학, 경영학 등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모든 학문의 기본 적인 방법론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상을 잘게 쪼개는 분석을 통해 우리가 지식을 습득한 다는 사실은, 지식과 관련된 어원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영어나 프랑스어 등 서구 언어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인도-유럽어에 서 ‘알다’를 나타내는 말은 라틴어로 ‘스키오(scio)’입니다. 이 ‘scio’의 뿌리는 ‘skei’로, ‘자르다, 분리하다, 가르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는 ‘알다’라는 말은, 대상을 ‘가르고, 잘라서’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37


본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상을 자르고 분리하는 과정 을 통해 지식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science)가 대상 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지식을 얻고, 바지(scissors)도 두 갈래로 나누어 진 의복인 점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대목입니다. 일본어에서도 단 순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는 ‘시루(知る)’라고 하지만 의미나 내 용을 파악해 안다는 뜻으로는 한자의 ‘나눌 분(分)’이 들어가는 ‘와카 루(分かる)’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면 ‘시루’에 해당하고, 수업 내용을 이해한다면 ‘와카루’가 되는 셈이죠. 성경을 잠깐 들여다보아도 구분한다는 것이 ‘앎=지식=지혜’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었음에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벌거벗은 상태와 옷을 입은 상태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부끄러움과 그 렇지 않은 상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뱀이 유혹합니다. “너희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 그러자 이브는 “지 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세기 3:6)”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권합니다. 둘은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부끄러움을 느낍 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 부끄러움과 부끄럽지 않은 상태를 구분 할 수 있는 능력, 즉 분별력과 지혜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통해 너와 나의 구분, 부끄러운 상황과 그렇지 않 은 상황의 구분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지식과 앎은 ‘구분하다, 가르다’라는 행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구분의 결정체가 바로 언어라 할 수 있

38


습니다. 우리는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나와 대상을 알고 지식을 쌓 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언어를 습득하기 전의 상태, 즉 구분하는 능력이 없고 판단이 서지 않는 혼돈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어공주 이야기의 도입 부분을 보면 인어공주는 무척 현명하고 똑똑한 공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런 현명한 공주가 사랑에 빠져 너무나 맹목적이고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태생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마녀와의 거래를 통해 언 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혀가 잘림으로써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내용은 그저 단순한 사 건의 연결이 아니라, 사실 혀가 잘리는 것은 지식의 도구인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 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쉬운 말로 인어공주는 사랑에 빠져 바보가 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셈입니다.1 안데르센의 스토리 창작의 천재성을 이 부분에서 엿볼 수 있습 니다. ‘마녀는 목소리를 요구한다 → 그래서 혀를 자른다 → 마녀의 요구에 따른 인어공주는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흐름은 극히 자연스

과연 인어공주의 비극이 왕자에 대한 연모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1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어공주가 처음 인간을 동경하게 된 것은 인어들은 300년을 살지만 영원한 영혼이 없는 반면, 인간은 영원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다 시 말해 인어공주는 인간이 지닌 영혼을 얻고 싶어서 인간이 되고자 한 것이므로, 영혼을 얻는 수 단으로 인간과의 사랑을 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인어공주 이야기는 인어공주 의 사랑 획득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획득 스토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디즈 니의 애니메이션인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는 영혼의 문제를 배제하고 인어공주인 에 리얼의 러브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39


러워 보이지만, 목소리와 혀와 언어의 연결은 착각을 통해 완성됩니 다. 혀가 없어도 발성은 가능하며, 언어는 문자로도 표현이 가능하 기 때문에 위의 도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는 이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인어공주는 어쩔 수 없는 거래로 인해 언어를 잃어버린, 다시 말해 앎(知)의 도구를 잃어버린 바보가 될 운 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 의해 지식 과 앎의 방식을 잃어버리고 바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안데르센이 마녀와의 거래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전반부의 중요한 테마입니다.

순수함을 되돌리기 위한 무언 (無言) 여기서 잠깐만 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왜냐하면 혀를 잃 어버린다는 것은 단지 바보가 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깨끗함과 순 수함으로의 회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순수함으로의 회귀는 인어공주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감각기관으로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는 것을 꼽으라면 남성은 눈, 여성은 입이라고 합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이 어떤 자극을 통해 더 쾌락을 느끼는가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사회적 상징으로서 남성 과 여성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사회에 수용되는가를 보려면 우리 주변의 광고를 보면 더욱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치약 광고. 어렸을 때 언

40


제나 치약 광고를 보면 치약은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하는 것인데도 유독 여성의 입이 강조되어 나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 습니까? 에로티시즘 상업화의 대표적인 사례라 자주 지적되는 광고 입니다. 여성의 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이 지닌 에로티시즘을 직 접적으로 표현하는 이미지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아주 직접적으로 는 여성의 입을 제2의 성기로 여기는 사회 인식이 있고, 오럴 섹스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입은 이렇게 외설 적인 이미지와 함께 수다스러움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도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동화나 옛날이야기에는 여성의 지닌 성 적인 부분의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입이나 혀에 대한 형벌 이 등장합니다. 거세가 남성에게 부여되는 남성성에 대한 가장 큰 형벌이라면, 혀를 자르거나 말을 못하게 만드는 것은 여성성에 대한 가장 무거운 형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를 보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몰 래 해모수와 정을 통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유화부인의 아버지인 하 백은 유화부인의 입술을 길게 잡아당겨 오리처럼 비죽 나오게 해서 우발수라는 곳으로 쫓아냅니다. 유화부인은 늘어난 입술 때문에 말 을 하지 못해 도움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정을 통한 것과 입술 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말을 못하게 만드는 것은 유화부인의 조신 하지 못한 행위에 대한 형벌이었던 셈입니다. 독일 로텐부르크에 있는 중세범죄박물관에 가면 지나치게 수 다스러운 여성에게 창피를 주기 위한 벌로 씌웠다는, 혀가 길게 나온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41


독일 로텐부르크 중세범죄박물관의 가면

42


가면이 있습니다. 이 가면은 직접적으로 혀를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 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의 혀를 자르는 것은 여성 성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 즉 수다스러움, 변덕스러움, 지나친 가벼 움 등에 대한 응징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순수하고 깨끗한 여성 본원의 모습으로의 회귀를 뜻하기도 합니다. 동화의 세계에서도 여성은 될 수 있으면 말을 하지 않을수록 좋 다는 이미지가 보편적입니다. 안데르센 동화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그림 형제나 페로의 동화를 보면 직접적인 대화 장면이 많이 등장하 는 여성은 대부분 마녀나 악녀들입니다. 그녀들은 말도 많고 거친 단어를 써가며 주인공을 괴롭힙니다. 가련한 여주인공들이 직접 말 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다시 말해 “ ”(따옴표) 안에 들어가는 대화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행동으로 자신의 처지 를 대신하거나, 심정을 표현하는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오랫 동안 수동적인 여성을 바람직한 여성으로 여겼던 시대 배경 때문이 라고 보입니다. 인간의 언어 행위, 즉 말을 하는 것은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기표현의 수단이라 할 수 있으므로, 가능한 한 자기표현을 적게 하고 남성의 의견이나 지시를 잘 따르는 여성이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자리 잡았던 시대에 안데르센은 살고 있었던 것이죠. 말을 하지 않고 참는 것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고된 형벌이란 할 수 있습니다. 인어공주가 말을 못하는 것도 여성의 부 정적인 특성을 없애기 위한 일종의 형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43


지도 모릅니다. 안데르센의 유명한 동화 중 하나인 <백조왕자>에도 말을 하지 못하는 고난이 등장합니다. 이 동화에서 막내 공주는 마법에 걸린 오빠들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쐐기풀로 옷을 짓는 동안 어떤 말 을 해서도 안 된다는 선녀의 말을 듣고 열한 벌의 옷을 짭니다. 공주 에게는 옷을 짜는 어려움보다는, 말을 못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이 더욱 큽니다. 수다를 떨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결국, 막내 공주는 마녀로 오해받아 화형대에 서게 되고 마지막 순간에 쐐기풀 옷을 오 빠들에게 던져주어 마법이 풀리면서 살아나게 됩니다. 이 동화에서 선녀는 수다를 떨면 작업이 늦어질까 봐 그런 것이 아니라, 세속적 인 때를 씻어버리기 위한 고행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선녀가 내건 조건은 바로 세속의 때가 묻은 여성이 가장 순수한 인 간성을 지닌 여성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언어, 즉 세속적인 지식과 의 단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어공주나 백조왕자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어쩌면 안 데르센은 여성에게는 다른 어떤 고통보다도 말을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입 과 혀는 여성에게 관능적 성기이자 영혼의 구원 요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자신의 작가적인 능력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 다. 입과 혀는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이를 제거하는 것은 순수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영혼의 구원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44


그러므로 여성의 혀와 입으로 만들어지는 여성의 목소리, 언어, 노랫소리는 매우 중요한 이미지의 매개물들이 됩니다. 여성의 노랫 소리는 그 노래가 천사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는 초월적인 지대를 향 하는 구원의 극점에 놓이지만,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새인 그 리스 신화의 세이렌(Seiren 또는 Siren)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는 생명을 빼앗는 독약과 같은 유혹이 됩니다.

인어공주의 거래는 순수성으로의 회귀 다시 인어공주로 돌아와서 생각해 봅시다. 말을 못 하게 하는 행위 는 여성성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리고 인어공주와 백조왕자의 막내 공주도 모두 동일한 처지에 처하 게 된다는 것도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 다. 백조왕자의 막내 공주는 주어진 기간이 지나면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지만, 인어공주는 혀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순수한 여성성으 로의 회귀라고 한다면, 막내 공주는 다시 세속적인 여성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인어공주는 절대로 세속적인 여성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백조왕자가 해피엔드로 끝나고, 인어공주는 비극 적이면서 왠지 종교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복선이 바로 여기에서 시 작됩니다. 인어공주에서 순수성으로의 회귀는 혀를 잘라 말을 못하게 한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45


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혀와 목소리를 주고 인어공주가 얻은 것이 사실은 가장 큰 순수성의 회귀를 상징합니다. 바로 인간의 다 리입니다. 그러므로 ‘혀(목소리)의 존재 → 혀(목소리)의 부재’와 ‘물고기 꼬리의 존재 → 물고기 꼬리의 부재’는 동일한 상징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혀와 물고기 꼬리, 목소리와 인간 다 리가 거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결국 혀와 물고 기 꼬리가 지닌 순수하지 못한 면이 사라지고 순수성을 얻는 것이 마녀와의 거래가 지닌 진정한 의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아름다운 인어가 물고기 꼬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순수성으로의 회 귀라는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같이 살펴보도록 합시다.

팜므 파탈로서의 인어공주 여섯 자매의 막내인 인어공주는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하반신이 다 리가 아닌 물고기 꼬리를 지닌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전형적인 인어의 모습입니다. 인어는 오래전부터 세계의 해양국 국민 사이에 널리 알려진,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물고 기인 상상의 동물로, 영국에서는 머메이드(mermaid)와 머맨(merman)이 라는 남녀별 호칭을 가지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실렌, 이탈리아에서 는 실레나라고 하는데, 인어와 얽힌 이야기와 이미지는 모두 앞에서 말한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세이렌은 아름 다운 목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킨 후, 선원들을 잡아먹

46


는 괴물입니다. 반인반조(半人半鳥)였던 세이렌이 반인반어(半人半魚)의 모습을 지 니게 된 것은 후대의 화가들이 그리스 신화의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이렌을 인어의 모습으로 그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 지만 안데르센이 인어공주를 처음 출간한 것이 1837년임을 고려하 면 오히려 화가들이 안데르센의 창작력에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가설이 100% 맞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인어를 괴물로 보느냐 요정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합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보면 ‘Fairyology’란 단어 가 있습니다. 그 뜻은 ‘요정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번역을 하자면 ‘요정학(妖精學)’이라고 할까요? 요정학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 보다 영국에 요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 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부터 <반지의 제왕>과 <나 니아 연대기>에 이르기까지 요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풍부한 것도 아마 이런 영향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요정학에서는 인어를 요정의 하나로 분류합니다. 우리 가 흔히 아는 인어는 영국의 콘월 지방의 머메이드입니다. 상반신은 아름다운 처녀이며 하반신은 물고기인 바다의 요정 머메이드는 고 대 민간신앙에서는 어부들에게 풍어의 신으로 추앙받았고 거울이 나 나침반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고 합니다. 머메이드 는 폭풍우나 재난을 알려주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며, 노래로 남성을 유혹합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47


48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는 <세이렌(The Seiren)>(1900)에서 두 발에 지느러미가 달린 세이렌을 그렸고, 드레이퍼(Herber James Draper)는 <오디세우스와 세이렌들(Odysseus and Siren)>(1909)에서 세이렌의 하반신을 물고기로 묘사했다.

이에 반해 아일랜드 지방의 인어인 메로(Merrow)의 경우, 남성은 흉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여성은 하얀 피부와 검은 눈동자로 인간을 유혹하는 요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메로는 빨간 깃털의 모자를 써야 바다 깊숙이 잠수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어공주가 세이렌의 후손이든 머메이드 또는 메로의 후손이 든 바다에서 재앙을 만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인간을 유혹하는 존 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는 듯합니다. 이런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동화에도 등장합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49


인어공주들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 는 폭풍우가 다가올 때, 배 가까이 다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 러서 폭풍이 몰아친다는 것을 선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선원 들은 인어공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오히려 인어공주들의 노래 를 들으면 폭풍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선원 들은 배가 침몰하면 모두 죽은 상태로 바닷속 궁전에 오기 때문에 바닷속 의 장관을 보지 못했습니다.

화가들이 표현했던 인어는 남성을 유혹해 죽음이나 고통 등 극 한의 상황으로 치닫게 하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팜므 파탈은 남성을 압도하는 아름다움을 내세운 섬뜩한 매력과, 때로는 청순하고 가련한 강인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팜므 파탈은 남성 우위 사회에서 보자면 위험한 존재이면서, 순수한 여성성에 대비되는 속성을 지닙니다. 남성 우위 사회에서 순수한 여 성성은 남성에게 의존적이고, 복종적이며, 사회의 관념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여성이라는 특성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안데르센이 동화를 집필하던 19세기 유럽 사회는 18세기 후반 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남성 중심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러므로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지닌 인어는, 이성(理性)을 사회 발전 의 기반으로 생각하던 당시로서는 순수하지 못한 여성성의 극단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안데르센 개인의 입장에서도 인어 공주를 보다 순수한, 다시 말해 사회 통념상 정숙하며 종교적으로 순결한 여인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50


냐하면 안데르센은 평생 연속되는 사랑의 실패로 연애다운 연애를 해보지 못해 여성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서, 동시대의 여성들에게 겉모습이나 권력, 돈 따위에 마음을 뺏기지 않 는 보다 순수한 여성으로 돌아와 줄 것을 인어공주에 빗대어 호소하 고 싶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하 , 인어공주도 결국 잡종 괴물이었군요 ! 하지만 사회적 영향과 작가 개인의 이런 심리적인 부분만이 인어공 주가 꼬리를 버리고 다리를 얻게 되는 이야기로 이끈 것은 아닙니 다. 순수성으로의 회귀에서 더 중요한 점은 바로 잡종에서 순종으로 의 변화라는 생물학적인 상징이 동화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과 물고기라는 잡종에서 순종인 인간으로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흔히 잡종이라는 단어를 나쁜 의미로, 순종은 좋은 의 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뭔가 섞여서는 안 되는 것이 섞여 서 순수성을 사라지게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잡종인 개를 똥개로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순혈주의를 외치거나 단일 민족에 자긍심을 느끼는 것도 비슷합니다. 물론 유전공학이 발달한 오늘날, 이종(異種) 간 교배에 따라 새로운 야채나 과일, 곡물 등을 탄 생시키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는 인간의 지극한 이기적 필요의 발로 라 할 수 있습니다. 종이 다른 두 동물을 결합한 상상의 동물은 오래전부터 신화나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51


설화 속에 존재했습니다. 이런 동물은 존재하는 생물이 결합해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가능성 또는 현실세계로부터의 자유를 암시하기 도 하지만 여러 요소가 복합된 괴물로서 원초적인 혼돈이나 무서운 자연의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 결합 생물체는 신격화 되거나 아니면 영웅에 의해 퇴치되는 괴물로 극단적인 자리에 위치 하곤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인 켄타우로 스나 날개가 달린 말인 페가수스나, 황소의 몸통, 사자의 다리, 독수 리의 날개와 인간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 등은 전자에 가까운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후자에 가까운 예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몸 통은 숫양, 꼬리는 용, 머리와 갈기, 다리는 사자인 키마이라나 여자 의 얼굴에 머리털이 뱀인 고르곤, 새의 머리와 날개를 지니고 몸은 인간인 일본의 텐구(天狗)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결합 생물체 중 하나인 인어가 비록 지금에 와서는 바다의 요정 으로 재인식되고 있지만, 신격화되지 못한 상황으로 보아 괴물에 가 까운 자리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데 르센이 인어공주를 발표했을 당시, 일부에서는 인어를 주인공으로 하여 동화를 썼다는 그 자체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캐릭터를 비련의 주인공으로 삼아 아이들이 읽는 동화를 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인어공주를 안데르센의 대표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단순히 한 여성의 순수한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 고, 사랑의 결말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을 그리려 했 다면 굳이 그 주인공이 인어가 아니더라도 안데르센 정도의 필력이

52


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데르센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동화에 채택하기 어려운 인어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순수성으로의 회귀 에는 내면적인 순수함으로의 회귀와 외면적인 순수함으로의 회귀, 이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완벽한 순수함으로의 회귀가 달성되기 때 문입니다. 언어를 잃어버림으로써 내면적 회귀가, 꼬리를 잃어버림 으로써 외면적 회귀가 이루어져 비로소 인어공주는 순수함을 지닌 여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외면적 순수성의 회귀에 필요했던 다리 안데르센의 본명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입 니다. 이름에 크리스티안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짐작되듯이, 독실 한 신자였던 어머니로부터 루터교 신앙을 교육받아 신앙심이 두터 운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2 안데르센의 연구자 대부분이 안데르센 의 동화에 기독교적인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고 한 것은 아마도 이런 유년 시절로부터 시작된 신앙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2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 동화󰡕의 저자인 기류 미사오(桐生 操)에 의하면, 안데르센의 어머니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결혼 전에 남편 될 사람이 아닌 다른 남자 의 아이를 낳았으며, 안데르센의 친아버지조차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년에 결국 알코올에 중독되어 병원에서 사망했는데, 이런 어머니에 대한 반발로 안데르센은 청순하 고 헌신적인 여성상을 그리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53


1995년 기독교 한국루터회가 안데르센을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 인’으로 선정할 정도이므로 그의 신앙심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갑자기 인어 이야기를 하다가 왜 종교 이야기를 하냐고요? 앞 에서 결합 생명체가 신격화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괴물이 아닌 요정 의 반열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주로 그리스 신화, 힌두 신화 등의 신 화나 이집트나 아라비아, 이란, 일본, 중국 등 기독교의 영향이 크지 않은 지역의 민화나 설화에서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 론 결합 생물체가 괴물로 등장하는 것은 종교나 지역에 상관없이 쉽 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결합 생물체가 신격화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간 혹 천사가 날개를 달고 있으니 이는 마치 세이렌과 같이 반인반조의 결합 생물체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천사가 실제 날개를 달 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기독교 내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의견 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천사의 날개가 진실이든 아니든, 기독교 에 대한 지식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조차도 천사에게 날개가 달렸 다고 믿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날개를 천사의 상징으로 그 려낸 화가들이 전파시킨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상상 의 결합 생물체란 것은 논의에서 제외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동물을 기독교의 하나님(야훼)이 창조하셨다면 상상의 동 물인 결합 생물체도 기독교의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 나 결합 생물체란, 기존의 동물을 결합시킨 상상의 동물이므로 이는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피조물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의 손에 의해 만

54


들어진 괴물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자면 악마 또는 악마의 하수인 이겠죠.3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사상에서 보자면 인어와 같은 상상 의 결합 생물체는 대부분 창조의 순수한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은, 말하자면 순수성이 결여된 잡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요정학의 이야기를 잠시 빌려보면 요정은 지역의 고대신앙에 의해 신격화된 상상의 생명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전파 되면서 이들 요정은 이교도(異敎徒)들의 신들로 버림을 받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악마와 동일시되면서 추방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결국 사원의 조각이나 그림 등에 남아 있는 고대 요정들의 모습은 부정적인 괴물의 상징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안데르센은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다고 했습니다. 안데르 센이 인어공주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순수성을 회복하고 이를 통 해 종교적인 구원으로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므 로 처음부터 이야기의 주인공은 순수성을 잃어버린 모습, 다시 말해 존재 그 자체가 순수성의 결여를 상징해야만 이야기의 힘을 극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 시골 마을 처녀가 자신과 신분 이 너무 차이 나는 왕자님에 대해 지순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가, 이를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면 이야기가 너무 맥 빠지는 것

3

성경에도 상상의 동물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욥기에는 비히모스(Behemoth)와 리바이 어던(Leviathan)이 등장하는데, 비히모스는 땅의 힘을 뜻하며 하마를 상징하고, 리바이어던은 바다의 힘을 뜻하며 날랜 뱀이나 거대한 물고기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또한 유대교 경전에 는 이들 외에 하늘의 힘을 뜻하는 지즈(Ziz)라는 거대한 새가 나옵니다. 이들 모두 결합 생물체라 기보다는 땅, 바다, 하늘에서 힘을 발휘하는 거대한 단일 생물에 가깝습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55


같지 않습니까? 안데르센이 순수성의 결여를 상징하는 캐릭터로 인어를 선택 했다면, 자연스럽게 순수성으로의 회귀라는 과정을 이야기에 넣어 서 결합되어 있는 인간과 물고기 중 어느 한쪽을 떼어내어 완전한 인간, 또는 완전한 물고기를 만들어야 했을 겁니다. 당연히 물고기 가 종교적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생각했을 리는 없고, 그러니 인간 의 다리를 얻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 다리를 얻는 과정이 바로 마녀와의 거래였던 거지요. 그러므로 사실 마녀와의 거래에서 목소리를 잃는, 다시 말해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식을 잃어버린다는 사실보다는, 다리를 얻어 인간으로서의 외적인 순수성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한 조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지닌 여성, 그리고 거기에 더해 쓸데없이 수다를 떨지 않고, 지식에 의존해 세 상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세속적인 계산에 밝지 않은 여성이야말로 안데르센이 그리고자 한 순수한 여성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앎 ’은 여전히 뿌리치기 힘든 유혹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잃어야만 했던 것은 언어가 지닌 분별력을 버 려야 인간에게 가장 순수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 습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을 통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데르 센은 이 희생을 통한 사랑이 그저 다리와 목소리를 바꾸는 거래만으

56


로는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 고 분별력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큰 유혹인지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마지막 작전을 수행합니다. 바로 신부와 잠 들어 있는 왕자를 칼로 찌르라는 언니들의 유혹입니다. 이웃나라의 공주와 왕자가 배 위에서 결혼을 하자 언니들이 찾 아와 자신들의 아름다운 머리와 바꾼 칼로 왕자를 찔러 그 피를 발 등에 묻히면 다시 인어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어공주는 방으로 들어가 왕자를 찌르려고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칼 을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마치 끊임없는 자기희생 에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만일 여러분이 저의 삐딱함에 동의하신다면 여기서도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입니다. 왜 마녀는 칼로 왕자를 죽이라고 했을까? 마녀 라면 오히려 독을 써서 죽이는 게 더 마녀답지 않을까? 하지만 안데 르센이 마지막에 칼을 등장시킨 것은 목소리를 빼앗아야만 하는 이 유와 같습니다. 바로 분별력을 가지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순수 성의 회귀를 마지막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왕자를 찌르는 데 실패한 이 스토리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느 신화에선가 읽은 기억은 혹시 없으십니까? 있다고 답하신 분은 그리스 신화를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입니다. 바로 ‘에 로스와 프시케’라고 알려진 스토리입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인 <미 녀와 야수>의 모티프가 된 신화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은 이 스토리의 앞부분이므로 잠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57


옛날 어느 나라에 세 공주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막내딸 프시케는 너무 도 아름다워 사람들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와 비교를 할 정도였습니 다. 이에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의 능력을 빌려, 프시케가 자 신의 뛰어난 미모를 알 수 없도록 만듭니다. 프시케는 미모에 대한 자신 감 결여로 인해 결혼하지 못하고 외롭게 살게 됩니다. 왕이 아폴론의 신 탁을 통해 프시케는 인간이 아닌 괴물과 결혼할 운명이라는 말을 듣자, 프 시케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자신의 운명을 기다립니다. 이때 바람이 그녀 를 어느 아름다운 궁전으로 데려갑니다. 그녀의 남편은 어두운 밤에 돌아 와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떠났기 때문에 누구인지 보지 못했습니다. 남편에 게 얼굴을 보여달라고 사정해도 자기를 볼 생각은 포기하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들을 궁전으로 초대했습니다. 언니들은 프시케의 행 복한 생활을 질투해, 등잔과 예리한 칼을 남편 몰래 덮개를 씌워 감춰두 었다가 남편이 잠들었을 때 등잔을 켜고 칼로 찌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언니들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얼굴을 확인한 프시케는 그의 잘생긴 외모에 놀라 그만 등잔 기름을 떨어뜨려 들키고 맙니다. 에 로스는 프시케에게 의심이 있는 곳에 사랑은 있을 수 없다며, 절규하는 프시케를 남겨둔 채 날아가 버립니다. 그 뒤 프시케는 먹지도 자지도 않 고 남편을 찾아 헤매었고,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어려운 과제들을 내 줍니다.

프시케는 언니들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 해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위치와 상황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결정도 할 수 없습니다.4 그때 언니들이

4

58

이 이야기에서도 프시케는 자신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그저 수용적인 바보 같은 인간으로,


찾아와서 이런 무지몽매한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충고를 해줍니다. 그리고 이때 도구로서 등잔과 칼이 등장합니다. 등잔은 어두운 밤을 밝혀 에로스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칼은 에로스가 괴물일 경우 찔 러 죽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등잔불은 어둠, 즉 혼돈과 혼란, 무지, 무분별 등을 밝혀 인간에 게 분별력을 갖추게 하고 지혜로 이끄는 도구입니다. 서울대학교의 정장(正章)에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쓰여 있고 등불과 펜이 그려져 있는 것도 어둠을 밝히는 것이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모든 종교의 시작이 천지창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될 때 밝음이 만들 어지면서 처음으로 구분되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밝음을 상징하 는 불은, 최초의 구분을 상징하는 셈이죠. 자, 그럼 칼은 어떨까요? 언어가 분별력을 의미하는 앎(지식)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언어가 지닌 구분하는 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에서 어떤 것을 떼어내어 구분하는 힘은 비단 언어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성은 아닙니다. 사실 언어보다 더 강력한 구분력을 지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칼입니다.

언니들은 항상 분별력을 지니고 판단을 하려고 하는 세속적인 인간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똑 똑해지려는, 즉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고 분별력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여성들은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동생의 행복한 생활을 시기 질투하는 나쁜 언니들처럼 말이죠.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59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한 도구로서의 칼 우리는 칼을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떼어내거나, 대상을 잘게 자르거 나 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칼이 찌르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을 죽 일 때 말고는 별로 없습니다. 칼은 본래 자르는 도구로서 탄생한 것 이므로, 이 세상 무엇보다도 구분을 하는 힘이 제일 강합니다. 이런 까닭에 칼은 분별력을 의미하는 앎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 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칼을 무지(無知)의 근원으로부터 단절하는 식별력의 상징으로 봅니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오른손에 지혜의 칼이 들려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프시케의 언니들은 등잔과 칼을 이용해 프시케에게 상황 판단을 위한 분별력과 지혜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단지 언니들이 질투심에서 프시케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 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이자 덕목인 지혜와 분별력을 잃어 버린 프시케를 안타깝게 여겨 한 행동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 까요? 프시케의 칼과 인어공주의 칼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 니다. 언니들은 너무나 바보같이 판단력을 잃어버린 동생을 위해 정 확하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싶었 습니다. 그래서 그 힘의 상징으로 칼을 마녀로부터 받아온 것입니 다. 마녀는 인어공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사랑에서 벗어 나 분별력 있는 정확한 상황 판단과 결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 니다. 그러므로 왕자를 죽이면 문제는 해결되지만, 그 도구로는 독

60


약보다 칼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스스로 칼을 버림으로써 분별력과 지혜를 거부하게 됩니다. 더 정확하게는 세속적인 행복을 위한 분별력과 지 혜라고 해야겠지요. 인간이 아무리 지고한 이념과 철학에 따라 살아 간다고 해도 정말 자신의 목숨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결국 세 속적인 안위를 위해 머리를 쓰게 됩니다. 안데르센이 경계한 것은 바로 이런 세속적인 계산과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인어공주를 종교 적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찾아온 이 ‘앎’에 대한 유혹 을 뿌리치도록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혀를 잘라내는 희생을 완성하기 위해서 칼은 꼭 필요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니들이 나온 장면에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언니들은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마녀에게 주고 칼을 받아 옵니다. 아마도 마녀는 아름다운 인어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어 했 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어공주에게도 목소리가 아닌 머리카락을 요구했어야 합니다. 이 부분만 보아도 인어공주와 마녀는 단순히 서 로 원하는 것을 형식적으로 거래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상 필요 한 상징적 복선이 깔린 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 앎의 배제 =신에게로 다가가는 것 앎의 상실 또는 소거는 인어공주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 다. 이야기의 전반부에 인어공주는 마녀에 의해 수동적인 입장에서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61


앎을 상실하게 됩니다. 순수함으로의 회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 지가 아닌 마녀의 의지에 의해 달성됩니다. 하지만 후반부의 순수함 의 회귀는 능동적인 앎의 소거입니다. 인어공주는 칼을 거부함으로 써 비로소 자신의 의지로 순수함으로 회귀할 수 있게 됩니다. 안데 르센이 표현하고자 했던 순수성으로의 회귀는 이처럼 수동적이고 타인에 의한 앎의 상실과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앎의 소거를 통해, 세속적인 앎의 완전한 배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앞서 안데르센의 깊은 신앙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안데르 센은 앎, 즉 분별력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인 간이 분별력을 얻고, 지식을 쌓고, 점차 똑똑해지는 ‘앎의 과정’은 신 에게 다가가는 ‘순수함으로의 회귀 과정’과 양립할 수 없다고 느꼈 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앎을 배제해야만 신에게, 순수 영 혼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인어공주의 마지막을 보면 이런 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 니다. 바다에 몸을 던져 공기처럼 되어버린 그녀에게 공기의 요정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네가 착하게 산다면 300년이 지나면 영원한 영혼을 얻을 수 있을 거 야. (중략) 하지만 300년이 지나지 않아도 우린 그곳에 갈 수 있단다. 지금 우리는 어린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가고 있는데,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 고 사랑을 많이 받는 착한 아이를 찾아내면 신은 우리가 영혼을 얻을 수 있는 시험 기간을 단축해 주신단다.”

62


불멸의 영혼은 인어공주가 얻고자 했던 인간의 영혼 이상의 더 욱 완벽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이 영혼을 얻는 과정은 신에게 다가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게 지식과 앎의 방식을 지워버려야 진정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인간이 분별력을 지니고 똑똑해지는 것은 신의 입장에서 보자 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들은 이런 인간들에게 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분별력을 얻게 되자 형벌을 내리고, 분별력을 제공한 뱀이 악마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바벨탑(Tower of Babel)은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 간 후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바빌로니아) 땅에 정착해 도시를 건설하고 세우기 시작한,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입니다. 성경에는 세계에 서 가장 큰 규모의 탑을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떨치고 하나의 집단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야훼는 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동시켜 멀리 흩어지게 함 으로써 탑 건축이 중단되게 됩니다. 바벨탑 사건은 다(多)언어의 발생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합 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언어가 바벨탑 사건을 촉발시켰 고 결국 언어로 결말이 났다는 점입니다. 언어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앎을 체계화하게 되었고, 주변 세계를 개념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야말로 인간이 똑똑해진 것이죠. 자연스레 생활 집단도 거대해졌고, 국가의 개념에 가까운 제도도 발달하고, 하늘에 닿을 만큼 탑을 쌓을 수 있는 건축술도 익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모두 ‘앎(지식)’을 기반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63


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훼는 사람들이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 하도록 여러 가지 언어를 부여해 똑똑해지는 인간을 징벌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자)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사건도 신이 인간이 똑똑해지길 거부하는 과정에서 발생 합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지상에 거주하고 있던 거신족(巨神族) 인 티탄족의 신이었던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뒤늦게 깨닫는 자)와

함께 인간을 만들거나, 인간과 그 밖의 다른 동물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주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에피메테우스가 일을 하고, 프로메테우스는 일의 완성도를 감독하 기로 합니다. 그런데 에피메테우스가 각각의 동물들에게 용기, 힘, 속도뿐만 아니라 날개, 발톱 등 여러 가지 선물을 주고 나니 정작 인 간에게 줄 것이 없었습니다. 역시 생각 없이 행동이 앞서는 사람답 게 말입니다. 할 수 없이 감독관인 프로메테우스는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 태양의 불 수레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줍니 다. 이 선물 덕택으로 인간은 무기와 화폐를 비롯한 다양한 도구를 만들었고, 토지를 경작하고 따뜻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다른 동물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불을 훔쳤다는 사실에 격노 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독수리한테 간을 쪼이는 벌을, 인 간에게는 판도라라는 여인을 통해 고통을 주는 벌을 내립니다. 프로메테우스는 흔히 인간에게 지혜와 저항 의식을 심어준 신 으로 추앙받습니다.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문명의 여러 가지 기예와 기술들을 가르쳐줌으로써, 인간을 야만 상태로부 터 잠재 능력을 지닌 의식적 존재로 향상시켜 놓았다고도 합니다.

64


그러므로 프로메테우스가 전해준 것은 단순한 물리적 속성을 지닌 불이 아니라, ‘문명의 불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인 헤시오도스(Hēsiodos)가 저술한 󰡔신통 기(일명 ‘신들의 탄생’)󰡕에서는 판도라가 등장하기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 들은 신들처럼 살고 있었고, 인간들의 연회에 올림포스 신들이 어울 려 참석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앞서 프시케의 이야기에서 등잔 불이 분별력과 지혜의 상징인 것처럼, 프로메테우스가 전해준 불을 지혜 또는 앎의 상징이라고 본다면, 인간이 지(知)의 능력을 갖추면 서 신들은 인간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앎의 원천은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 도라가 상자를 열어본 것도 결국은 호기심이 원인이었습니다. 이브 가 선악과를 먹게 되는 것도 뱀의 유혹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입니 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싶다’고 느끼는 것도 결 국 호기심의 발로이고, 이 덕분에 지식이 하나하나 쌓여나가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5 사실 지혜와 지식은 신과 같은 절대 권력자에게는 참으로 애물

그리스 신화에서 신과 인간이 멀어지는 현상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관점이 존재합니다. 5 예를 들어 해리스와 플래츠너는 ‘여성과 요리에서의 불’을 소재로 해석을 합니다. 우선 유대-기 독교적인 전통에서는 인류의 몰락을 재촉한 촉매자인 이브나 판도라와 같은 여성이 우주 운행 의 신성한 원리인 남성 원리의 존재성에 해악을 끼쳤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남성들의 세계였던 이전의 질서가 카오스 상태로 무너진 것은 최초의 여성이 창조되는 것과 시점이 일치 한다고 보는 것이죠. 또 날고기를 요리하기 위해 쓰인 불이 인간과 자연의 유대를 단절시켰다고 봅니다. 신들은 자연에 가까운 존재인 반면에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불에 구운 살코기를 먹게 되면서 자연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65


단지임에 틀림없습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인간이 현재 상황에 대해 ‘왜?’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이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해가면서 똑똑해지면 권력의 당위성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독재자들 이 권력을 잡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지식인과 지식 매체에 대한 탄압입니다. 옛날에는 책을 불태웠지만, 지금은 정보 매체를 장악 합니다. 독재자 밑에서 견디지 못한 많은 지식인은 망명을 선택합니 다. 단지 신과 독재자의 차이점은, 신은 인간이 똑똑해지면 신도 인 간도 불행해진다고 생각하지만 독재자는 단지 자신의 권력 유지가 어려워진다고 보는 점입니다. 로봇의 지능이 진화해서 인간과 같은 분별력을 지니게 된다면 인간을 더 이상 자신들의 주인이 아니라 지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생 물로 인식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SF영화에나 나오는 기우 가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의 말을 거스르며 자기 생각을 주장할 때, 부모들이 ‘그래 너 참 똑똑하구나!’라고 말하는 것도 비슷한 심정일 것입니다. 똑똑해지면서, 그 전까지는 잘 따르던 사람이나 원리 등 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저항을 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안데르센은 지혜와 지식의 끝없는 진보가 인간이 추구하는 진 정한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봅니다. 앎의 발달이 행복과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 가 아닌가 합니다.

66


슬프지만 행복한 베스트 스토리 이제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끝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목소리와 다리, 그리고 칼, 이 세 가지는 모두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 그러니까 이브 가 뱀의 유혹에 굴복하기 이전의 순수성으로 회귀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안데르센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적절하게 이야기에 담 아낸 정말 천재적인 글쟁이였습니다. 인어공주의 목소리에서 출발한 여행을 끝마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지만, 왠지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더 똑똑해지려고 노 력하는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 바보가 된 인어공주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인어공주가 부럽 기도 합니다. 동정도 가면서 부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면서 기쁘기 도 한, 미묘하고도 모순된 양가감정(兩價感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아, 훌륭한 스토리에는 이런 양가감정을 유발하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었구나!’ 하고 요. 그래서 인어공주를 바보라고 버릴 수도 없고, 또 완전히 자신과 동화(同化)시킬 수도 없습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인간의 다리를 지닌 인어공주를 바라볼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스토리를 경험하는 시 간일 것입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팔았을까?

67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