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꽃이그려진부채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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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



서문

1937년 초겨울, 중일전쟁 전선이 남하하면서 상하이(上海) 가 함락되었을 때, 나는 울분에 차 불과 한 달여 만에 전기 (傳奇)1)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를 경극으로 각색했 다. 그러나 단 두 차례 공연 후에 바로 공연 금지를 당하고 말았다. 그때 내 경극본은 공상임(孔尙任)의 원작이 가진 이야기 윤곽 중 뼈대만 가져오고 주로 내 생각과 감상을 펼 치는 쪽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원작에 충실한 각 색이라고 하기는 곤란할 것 같다. 난 아무런 거리낌도, 원작 에 얽매임도 없이 거의 단숨에 각색을 마쳤고, 연습한 지 불 과 3일 만에 무대에 올렸다. 그러니 역사극으로서, 아니 그 에 앞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당시 공연은 여러모로 부 족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 공연도 많이 거칠었다. 그런데도 당시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었다.

1) 전기(傳奇): 중국 전통 연극의 한 종류. 주로 명대와 청대에 남방계 음악을 바탕으로 했던 장편의 전통 연극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송대와 원대에 걸 쳐 남희(南戱)가 성장·발전한 산물로 여겨지며 전기의 대본은 훗날 경극이 빠르게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복숭아꽃 이 그려진 부채(桃花扇)≫, ≪장생전(長生殿)≫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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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회하의 가기(歌妓)인 이향군(李香君), 악공 유경 정(柳敬亭) 등을 높은 절개를 지닌 인물로 그려 냈다. 반면 나라를 팔아 일신의 영화를 구했던 표리부동한 매국노들에 대해서는 극히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마음으로 묘사했다. 그 무렵에는 정말로 그런 지식인들이 많았다.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며 이쪽에도 저쪽에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처 세 철학으로 그들은 참 많이도 비틀거리고 흔들렸다. 작중 양문총(楊文聰)은 복사2)의 젊은 선비들과도 친분을 유지하 면서 동시에 완대성(阮大鋮)이나 마사영(馬士英) 같은 인 물을 추종했다. 나는 당시 그런 지식인들의 모습을 양문총 을 통해 풍자하려 했다. 복왕(福王)은 멍청한 허수아비 군 주로, 유택청(劉澤淸) 같은 무인들은 군대를 자신을 보호하 기 위한 도구로만 여길 뿐 적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라곤 찾 아볼 수 없는 반면 두려움만 가득한 인물로 표현했다. 완대 성, 마사영 등 위충현(魏忠賢)의 잔당들에 대해서는 더 설 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인물들을 그 시대의 무대 위에 올려놓고 보니 확 실히 효과적이었다. 이런 작품을 그 시대에 공연하니 당시

2) 복사(復社): 동림당을 계승한 명나라 말기의 결사. 환관 세력을 비롯해 이 들과 결탁한 관료들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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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이 거울처럼 비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여기 에 일부 장면들이 과장되다 보니 전체적으로 보면 작품의 통일성은 부족함을 피하기 어려웠다. 1939년에 나는 다시 이 작품을 계극(桂劇)3)으로 옮겨 구이린(桂林)4)에서 공연 했다. 이때도 내 생각을 바탕으로 작품을 일부 수정했는데, 특히 지식인의 나약함과 내부에서 분열이나 일으키고 외적 과 내통하는 악질적인 자들에 대한 풍자를 강화했다. 구이 린 공연의 반응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고, 나중에는 역시 공 연을 금지당했다. 1946년 12월, 나는 신중국극사(新中國劇社)와 함께 타 이완(臺灣)에 가서 ≪정성공(鄭成功)≫, ≪견우와 직녀(牛 郞織女)≫, ≪일출(日出)≫ 등 세 작품을 공연했다. 그런

데 이 세 작품 공연을 마친 뒤 레퍼토리가 마땅치 않자 모두 들 역사극을 하나쯤 공연하면 좋겠다며 내게 바로 이 <복 숭아꽃이 그려진 부채>를 화극으로 각색해 달라고 했다. 난 어느 온천에 있는 여관방에 틀어박혀 열흘 만에 각색 작 업을 마쳤고, 7일간 연습한 뒤 4차례 공연했다. 난 이 각색 을 통해 국민당과 장제스(蔣介石)에 대한 반감을 은연중에 3) 계극(桂劇): 중국 광시(廣西) 지역을 대표하는 지방 전통 연극. 4) 구이린(桂林): 광시의 유명 도시. 특히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구이린의 산 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桂林山水甲天下)”는 말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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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려 했다. 물론 경극으로 했을 때만큼 노골적일 수는 없었지만.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역사극으로서는 여전히 부 족한 점이 많았다. 지금 이 대본은 초고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 수정 작업을 거친 결과다. 폭로와 풍자로 가득했던 대화들은, 비록 당시 에는 꼭 필요한 것이라 여겼지만, 이 대본에서는 가급적 정 리하려 애썼다. 이제는 그런 대화가 예전처럼 그렇게 꼭 필 요한 것도 아니고, 또 작품 분량이 너무 길어져 아무래도 정 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본은 전반적으로 리듬이 빨라져 길어도 세 시간 반 안에는 공연을 마칠 정도 의 분량이다. 대개 한 공연은 길어도 세 시간 안에 끝나야 좋 다고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까지 줄이기는 어렵다는 생 각이다. 처음 생각은 제3막 제2장을 통째로 없앨 작정이었 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해 보았더니 내용 전개가 너무 빨 라져 보는 이가 이해하기에도, 감상하기에도 좋지 않아 다 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또 완대성이 후조종을 함정에 빠 트리려고 모의하는 장면도 사실은 완대성의 집에서 진행해 야 앞뒤가 맞고, 내가 처음 각색했을 때도 별도로 장을 하나 삽입해 처리했었다. 그러나 공연용 대본으로 만들 때는 소 련 연극인 레슬리5) 선생의 의견을 수용해 이 장면이 문묘 앞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고쳤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단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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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화극으로는 이렇게 해도 별 문제 가 없었다. 작중인물들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겨우 17∼18세인 소녀 이향군은 진회하의 가기들 중 빼어난 용모로 유명한 인물이다. 당시 황실, 귀족, 부유한 상인 집안 도련님들 중 에 그녀를 원하는 이가 물론 많았을 것이나, 그 모친이 딸을 소중히 여겼고, 그녀 자신도 자존심이 높았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그녀는 아마도 평서(評書)6)나 고사(鼓詞),7) 소설 (小說) 속의 충효를 다룬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터이다. 명말(明末)은 간신배, 탐관오리들이 활개 치고 충 신들은 모함과 죽음을, 일반 백성은 고통을 피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니, 이에 대한 인민의 분노, 특히 가난한 하층 민중 의 분노는 뜨거웠을 것이다. 그 시절에 여성은 억압 아래 있 었고, 기생들은 더욱 천대당했다. 똑똑하고 착했던 향군이

5) 레슬리 블라디미로비치(Lesli P. Vladimirovich, 1905∼1972): 러시아 연극 인. 스타니슬랍스키의 제자로 1954년부터 1955년까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중앙희극대학(中央戱劇學院)에서 근무하며 중국 화극이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학습·수용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6) 평서(評書): 설서(說書), 강서(講書)라고도 한다. 중국 전통적인 설창(說 唱) 예술의 하나다.

7) 고사(鼓詞): 북이나 딱따기 등을 이용하는 중국 전통적인 설창(說唱) 예술 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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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소녀가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은 그녀를 절망에 빠트 렸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두 스승 유경정과 소곤생(蘇昆 生)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간신배의 식객으로 살지 않겠

다고 했을 정도로 정의감 가득한 인물이었으니 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이향군이 가진 간신배들 에 대한 적개심, 충의의 절개 등이 형성된다. 나이가 나이니 만치 작품 앞부분에서는 다소 멋대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이 런저런 경험들을 통해 의지는 갈수록 견고해진다. 후조종이 쫓겨 달아난 뒤 전앙(田仰)에게 강제로 시집가야 했던 상황 은 그녀에게 절망감과 함께 죽음에 대한 각오를 주었을 것 이다. “상심정매연(賞心亭罵筵)” 장면에서 그녀가 권력자 들을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목숨을 내놓았기에 가능 했으리라. 그래도 기생일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높은 절개를 가질 수 있는지, 아무래도 지나친 과장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기생도 사람이다. 억압당하는 여성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천성적으로 천박한 기질을 가졌 으리라는, 기생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권리마저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 기 위해 자신을 가두던 한계를 넘어 인간답게 대우받으려는 노력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녀와 공감하고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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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기생이니까 어느 정도 천시당 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녀를 부정적으로 보려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이향군은 보편적이라기보다 꽤 특별한 인물이기는 하다. 명조의 유신(遺臣)들 중에는 이향군의 모습을 수놓아 집에 걸어 놓고 존경했던 이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 각한다. 이향군과 후조종의 사랑도 흔히 말하는 첫눈에 빠지는 사랑과는 조금 다르다. 그 시대에 기생은 물건이나 다를 바 없어서,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 언제든 부 유하고 늙은 상인이나 관리 등에게 팔리듯 첩으로 시집가게 될 수도, 평생 기루를 벗어나지 못하고 늙어 가게 될 수도 있 음을 이향군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후 조종을 만나게 된다. 후조종은 잘생긴 외모에 재능 있고, 이 미 문명(文名)도 꽤 알려진 데다가 큰 뜻도 품고 있고, 또 그 뜻을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젊은이다. 그런 그가 그녀를 진심 으로 사랑한다니, 이만하면 기쁘게 몸과 마음을 내어 줄 만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녀는 그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 심한 다음부터 사랑에 빠진 여인답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후조종이 어려움에 빠지면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우 려 하고, 누구든 그를 해치려 한다면 죽음으로 맞서 싸울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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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다. 그렇게 이향군에게 후조종은 사랑인 동시에 긍지였 고, 희망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그녀를 실망시킨다면 그녀 에게 남는 것은 죽음 외에는 없을 일이었다. 후조종은 재능 있는 귀공자다. 그가 남경(南京)에 올 무 렵은 나이 겨우 20여 세밖에 안 됐을 때였다. 그 무렵 그의 아버지 후순(侯恂)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 러니 후조종의 가슴속은 썩어 가는 세상에 대한 의분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조국과 가문을 위해 뭔가 해내겠다는 포부도 컸으리라. 그러나 열정은 컸을지 몰라도 그 역시 곱게 자란 귀공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 다. 그는 단련되어 있지 않았고, 나약했으며, 결국 완대성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다행히 이향군, 진정생, 오차미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완대성과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을 뿐이 다. 이 일 이후로도 그는 계속해서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그는 끝내 현실을 이겨 내지 못하고 청조(淸朝) 성립 이후에 는 가문과 부친의 안전을 위해 향시에 응시하고 만다. 그로 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인들 아프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일찍부터 남다른 재능으로 주목받던 그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간신히 부방에 붙은 일은 어쩌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에게 계속해서 시련을 주기 위해 그렇 게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후조종이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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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도 있고, 무척 착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두 왕조의 과거에 응시해 인망을 잃었던 일에 대해서는 장선산(張船 山)8)도 “두 왕조 과거에 응시했던 후 공자, 차마 복숭아꽃

앞에서 이향군을 말할 수 있으랴(兩朝應擧侯公子, 忍對桃 花說李香)”라는 시구로 안타까움을 표한 바 있다.

이향군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녀가 만나 볼 수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후조종은 단연 최고 였을 것이다. 나중에 그에게 실망하고 그를 책망하는 것도 모두 그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크고 깊었기 때문이었던 것 이라 생각한다. 이향군의 슬픈 운명은 후조종에게도 똑같이 슬픈 일이다. 후조종도 근심과 슬픔 속에 나이 38세도 다 살 지 못하고 죽었다. 경극본과 계극본에서 양문총에 대한 묘사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었다. 일본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두 얼굴을 가진 자들을 풍자하려 했지만 시간이 없어 충분히 다듬지를 못했 다. 화극본으로 고치면서 겨우 이 인물에 대해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명사(明史)≫의 <양문총전(楊 文聰傳)> 등 사료들을 통해 이 인물의 성격을 결코 단순하

8) 장문도(張問陶, 1764∼1814): 청대 시인이자 화가. 선산(船山)은 그의 자 호(自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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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표현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시와 그림에 능하 고, 또 말과 행동에 품위가 있어 그야말로 풍류의 명사(名 士)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현관(縣官) 자리에 오른 일이 있

으나 재물을 탐하고 업무에 태만하다는 투서 때문에 남경으 로 피난한 뒤로는 시와 그림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는 후조 종, 오차미 등 복사의 젊은 선비들은 물론 당대의 유명 문인 들과 교유했고, 그와 동시에 위충현 세력이었던 완대성과도 가깝게 지냈다. 숭정(崇禎) 황제가 자살한 뒤, 그 처형인 마 사영이 복왕을 옹립하자 그는 완대성과 함께 중용되어 요직 을 맡았다. 순식간에 조정의 권력이 그와 완대성, 마사영 등 세 사람의 손안에 들어갔던 것이다. 청 군대가 대거 장강(長 江)을 건너 짧았던 평화 상태가 깨졌을 때 백성들이 가장 먼

저 불태웠던 것도 이들 세 사람의 집이었다. 사료에 의하면 마사영이 대개 양문총의 손을 빌려 매관매직을 했다고 하 니, 백성들이 그를 완대성, 마사영과 같은 부류의 인물로 볼 만도 했던 셈이다. 남경 함락 후 그는 절강(浙江)을 따라 복 건(福建)으로 갔다. 그의 아들은 당왕(唐王)9)과 어려서부 터 친구 사이였는데, 당왕은 제위에 오르자 양문총을 병부 9) 당왕(唐王, 1602∼1646): 명말 유왕(遺王)의 한 사람. 이름은 율건(聿鍵). 정예룡(鄭藝龍), 정성공(鄭成功) 부자의 병력에 의존하여 청에 저항, 명나 라를 다시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붙잡혀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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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兵部侍郞)10)으로 삼았다. 청 군대가 계속해서 밀어붙 이자 그는 손릉(孫陵)의 군을 이끌고 철수를 시도했지만 도 중에 적군을 만나 피살당했다. ≪명야사(明野史)≫의 부록 <노감국재략(魯監國載 略)>에 의하면 병부시랑 양문총은 을유년(1645년) 소주

(蘇州)에 돌아와서 전앙과 함께 국고 20만을 거산도(居山 島)에 숨겼다가 군사 400명과 재물을 청의 패륵(貝勒)11)에

게 보냈다. 그러나 패륵이 보내 준 군사를 모두 죽여 버려 일 이 틀어지자 전앙은 양문총을 배신했고, 결국 양문총은 청 군대에 포위당해 죽었다고 한다. 이 기록과 ≪명계패사초 편(明季稗史初編)≫ 기록은 대체로 비슷하다. 다른 설에 의하면 양문총이 청에 사로잡혔지만 항복하지 않아 아들과 함께 참수당했다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남영(藍英)과 비견할 만한 화가였다는 평가부터 조국을 위해 순국했으니 이전에 저지른 잘못은 용 서해 주어야 한다는 평가, 그가 복왕을 옹립한 것은 나라에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완대 성, 마사영과 쌓은 친분 때문은 아니었다는 평가 등이 있는 10) 병부시랑(兵部侍郞): 명대에는 정3품, 청대에는 종3품의 벼슬이다. 오늘 날 국방부 차관 정도에 해당한다. 11) 패륵(貝勒): 청나라의 왕족에게 주던 작위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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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하면, 또 그의 사람됨이야말로 누구든 가까이하지도 멀 리하지도 않고,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중국 사대부의 처세 철학을 제대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양문총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느 쪽에도 잘못하지 않 겠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바람이 동쪽에서 불든 서 쪽에서 불든 가만히 있으면서 주변과 관계만 원만하면 걱정 없다는 식인데, 이야말로 이기적인 잇속을 추구하는 태도라 는 점에서 완대성, 마사영 등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겉으 로는 복사의 젊은 선비들과 어울리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그 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완대성과 결탁한다. 완대성은 그를 관직에 복귀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이니, 그와 가까이 지내면 관직에 나아가기가 쉬 워진다. 따라서 그는 늘 완대성을 돕는다. 이것이 바로 양문 총을 바라보는 내 평가다. 공상임의 원작에서도 이향군과 후조종을 맺어 주는 역할 은 양문총 몫이다. 후조종이 쓴 ≪이희전(李姬傳)≫에 의 하면 완대성을 대신해 그에게 돈을 전해 준 이는 왕(王) 장 군이라고 하는데, 그런 인물이 정말로 있었는지, 이 기록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양문총이 두 사람 을 맺어 준 일과 완대성이 후조종에게 돈을 보낸 일은 별개 의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를 근거로 공상임의 원작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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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겠다. 양문총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절개를 꺾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대성에게 협조했던 일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정려는 사실 원작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후조종의 ≪이희전≫에 의하면 그녀는 도박에 서 단숨에 천금을 잃어도 연연해하지 않았다고 하니 아주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 녀를 뭔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하기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예전에는 내 작품에서 그녀에게 별다른 성격을 부여하지 않 았는데, 최근에 와서는 그녀를 세상 물정을 잘 알고, 또 자애 롭기도 한 어머니로 처리했다. 정타랑이라는 인물은 꾸며 낸 면이 상당히 많았다. 극 중 에서 그녀에게 여러 역할을 많이 부여했는데, 주로 두드러 진 성격과 재미있는 말투로 당시의 일부 사람들을 풍자하도 록 했다. 유경정과 소곤생이라는 악공은 둘 다 주견이 뚜렷 하고 기개와 정의감, 선량함 등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인물이 성격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소곤생은 상대 적으로 좀 더 순박하고, 생각도 좀 단순하다. 반면 유경정은 시원시원한 성격에 생각도 깊다. 특히 문제점을 포착해 내 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다. 소곤생이 유머러스하면서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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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적이라면 유경정은 대사와 노래를 통해 속물적인 인간들 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드러낸다. 이상이 지금까지 언급한 인물들에 대한 내 생각이다. 이 밖에 나는 두 가지 정도 문제점을 더 고민했다. 하나는 역사 와 역사극의 관계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전을 어떻게 현 대적인 작품으로 변모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 두 문제 는 상론하면 너무 길어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내 의 견만 밝혀 두려 한다. 역사극은 어디까지나 연극이지, 역사가 아니다. 역사 속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경제, 정치, 인민의 생활상, 사회적 계 급 등 각종 사료(史料)를 통해 여러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료는 정사, 패사나 소설, 수필 등을 막론 하고 어느 것이 100퍼센트 진실이라고 확정하기 어렵다. 특 히 인물에 대한 기록은 사료마다 차이가 크기 마련이다. 한 예로, ≪사외(史外)≫라는 자료에 따르면 후조종은 남경으 로 피난할 때 돈을 매우 많이 갖고 왔다고 하지만 난 이 기록 이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본다. 이처럼 신뢰도 낮은 자 료는 예나 지금이나 넘치도록 많다. 따라서 역사 속 인물을 작중에서 다룰 때에는 그의 사상과 견해, 삶을 대하는 태도, 사회적인 관계 등이 그가 살았던 시대와 부합하도록 처리해 야 역사에 심하게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실제 묘사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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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낼 것인지 하는 문제는 작가 가 정할 일이다. 더욱이 세부적인 부분은 온전히 작가 재량 이다. 역사 속에서 유명한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중요한 역사 적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의 시대 정신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도 역사극의 중요한 성질 중 하 나다. 화극본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는 주로 보통 사 람들을 다룬 작품으로, 이 평범한 인물들을 통해 나는 남명 시대 인민의 정서를 반영하고, 나아가 내 생각까지 담아 내 고자 했다. 그러나 연극은 연극이다. 연극적 필요에 따라 어 떤 인물이 어떤 사건을 언급하게 할 수는 있지만, 작중에서 그 인물의 평생을 보여 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이 작품 의 경극본을 쓸 때까지만 해도 역사극에 대한 고민은 별로 하지 않았다. 화극본을 쓸 때까지도 그런 고민은 없었고, 그 저 어떠어떠한 내용을 어떻게 쓸 것인지만 생각했다. 만약 그때 내가 역사극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면 아마도 생각이 너무 많아 집필조차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소한 그렇게 단기간에 완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썼던 것은 그저 극본일 뿐이었다. 경극본을 쓸 때는 공상임의 원작을 늘 손 닿는 곳에 두고 자주 펼쳐 보았다. 그러나 경극본을 완성하고 나서 다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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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원작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원작 을 소개하는 식으로 각색에 임했다면 그것은 옛 작가에 대 한 무례가 되었을 것이다. 화극본도 역시 원작과는 많이 다 르다. 그래서 원작의 각색본이라기보다 내 작품이라는 생각 이 든다. 작품에 미흡함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내 책임이다. 나는 잡극(雜劇)이나 전기(傳奇) 같은 중국 전통 연극 중 에 대단히 뛰어난 명작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명 작들을 오늘날 무대에 올리는 일은 정리와 개편, 각색 등 작 업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원작이 가진 정신만큼은 반드시 잘 보존해 주어야 그 재현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작업은 무척 중요하다. 이 말이 원작 내용을 고치 는 일과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극작가에게는 선택할 자유 가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1957년 6월 26일 우시(無錫)의 다지(大箕) 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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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후조종: 향군을 만날 때 나이 27세 오차미: 30세 전후 진정생: 30세 전후 완대성: 50여 세 수재(秀才)12) 갑, 을 등 양문총: 40여 세 유경정: 50세 전후 이정려: 약 30세. 그러나 모습은 20여 세로 보임 소곤생: 50세 전후 정타랑: 20여 세 구백문: 20여 세 변옥경: 20여 세 소홍(小紅): 여자 몸종 이향군: 17∼18세 재상부 하인 갑, 을, 병

12) 수재(秀才): 명청대(明淸代)에 가장 낮은 등급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 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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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대여섯 명 완씨 댁 하인 완승(阮升), 소오(小五) 병사 대여섯 명 마사영: 57∼58세 중군관 마사영의 수종 갑, 을 머리를 깎고 변발을 늘어트린 백성 갑, 을 이발사 청나라 병사 2명 후조종의 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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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 해설

이향군(李香君, 1627∼1653) 명말청초에 살았던 진회하의 기생. 본명은 양향(楊香)이다. 명나라 대신이던 아버지 양지호(楊之浩)가 모함을 받아 가 문 전체가 멸족 위기에 놓였을 때 간신히 살아남아 후에 성 을 이(李)씨로 바꾸고, 가난으로 인해 기생으로 팔리게 된 다. 이후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진회하에 서 기생으로 유명해지고, 후방역(侯方域)과 사랑에 빠진다. 후방역이 완대성에게 쫓겨 피신한 후 완대성에 의해 첩으로 팔릴 상황에 놓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절개를 지킨다. 후방 역이 변절한 뒤에는 출가해 서하산(栖霞山) 보정암(葆貞 庵)에서 여승으로 살다가 요절했다. 후방역이 쓴 ≪이희전

(李姬傳)≫에 그녀의 생애가 남아 있다. 현재 서하산에는 이향군의 묘지와 도화선 정자(桃花扇亭)가 있는데, 이 정 자가 세워진 곳이 보정암의 옛터라고 한다.

후방역(侯方域, 1618∼1655) 자는 조종(朝宗), 지금의 하남(河南) 성 상구(商丘) 출신이 다. 명말청초의 산문가이며 흔히 “명말 사공자(明末四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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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조부와 부친 후순(侯恂)까지 모

두 동림당(東林黨) 일원으로 환관의 권력에 반대하다가 축 출당했다. 복사(復社)의 성원이 된 뒤 뛰어난 문장으로 당 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청나라 과거에 응시해 부공생(副貢 生)에 합격한 일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며 살았다. 저서로

≪장회당문집(壯悔堂文集)≫이 있다. 그는 ≪이희전≫을 통해 명말 진회하의 기생 이향군의 높은 품덕을 기리고 동 시에 완대성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

완대성(阮大鋮, 1587∼1646) 자는 집지(集之), 호는 원해(圓海) 등이다. 안휘(安徽) 성 동성(桐城) 현 출신이다. 명말 정치가이며 극작가다. 처음 에는 동림당에 의지하다가 나중에는 환관 위충현(魏忠賢) 에게 가담해 끝내 관직을 박탈당한다. 남명 시기에 다시 병 부상서(兵部上書), 부도어사(副都御使) 등 관직을 맡아 마 사영(馬士英) 등과 결탁해 동림당과 복사 등의 문인들을 박 해했다. 후에 청나라에 항복한 뒤 병사했다. 일설에는 마사 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고도 한다.

오응기(吳應箕, 1594∼1645) 자는 차미(次尾), 호는 누산(樓山)이다. 명말 문학가다.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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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 청에 함락된 뒤에도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었다. 저서 로 ≪독서지관록(讀書止觀錄)≫이 있다.

진정혜(陳貞慧, 1604∼1656) 자는 정생(定生), 지금의 강소(江蘇) 성 의흥(宜興) 출신이 다. 명말 산문가로 부친 진우정(陳于廷) 때부터 동림당의 일원이었다. 남명 시기에는 완대성의 미움을 사 투옥되기 도 했다. 청나라가 들어서자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해 생을 마쳤다.

양문총(楊文聰, 1596∼1646) 자는 산자(山子), 용우(龍友), 호는 진룡(陳龍) 등이다. 귀 주(貴州) 귀양(貴陽) 출신으로 명말 화가이자 청나라에 저 항했던 관원이다.

유경정(柳敬亭, 1587∼1670) 호는 봉춘(逢春)이며 명말청초의 평화(評話) 예인이다.

소곤생(蘇昆生, 1600∼1679) 명말 예인으로 “남곡의 천하제일(南曲天下第一)”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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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영(馬士英, 1591∼1646) 자는 요초(瑤草)다. 명말 봉양(鳳陽) 총독을 지냈고, 남명 시기에는 내각수보(內閣首輔)에 올랐다.

이정려(李貞麗, 1615∼?) 명말 진회하의 기생이며 이향군의 의모다.

정타랑(鄭妥娘, 생몰년 미상) 이름은 여영(如英), 자는 무미(無美), 소자(小字)는 타랑이 다. 구백문, 변옥경, 이향군 등과 함께 “진회하의 기생 중 가 장 아름다운 8명(秦淮八艶)”으로 불렀고, 마수정(馬守貞), 조채희(趙彩姬) 등과 함께 “진회하의 4대 미인(秦淮四美 人)”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진회사미인선고(秦淮四美 人選稿)≫ 등에 시가 약간 남아 있다.

구백문(寇白門, 1624∼?) 이름은 미(湄), 자는 백문이다. 명말 진회하의 기생이다. 명 말의 공신 주국필(朱國弼), 청초의 학자 전겸익(錢謙益) 등 과 얽힌 일화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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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옥경(卞玉京, 1623∼1665) 이름은 새(賽), 혹은 새새(賽賽)다. 옥경이라는 이름은 만 년의 호 “옥경도인(玉京道人)”에서 유래했다. 명말 진회하 의 기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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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막



제1장

인물: 후조종, 오차미, 진정생, 수재들, 완대성, 양문총, 유 경정 시간: 명나라 숭정(崇禎) 말년(1644년) 봄 장소: 남경 문묘(文廟)의 한 모퉁이

(문묘 벽에 진정생이 “적에 맞서 도성을 지키자”라고 쓴 벽 보가 붙어 있다.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있는데 진정생 과 오차미, 후조종 세 사람이 천천히 걸어온다. 그들은 여러 수재들에게 벽보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려 한다.)

수재 갑 (벽보를 읽는다.) “태감 위충현(魏忠賢)이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 완대성은 그의 문하에 들어가 양아 들이 되었다. 선비라는 자가 권력에 아부하면서도 부끄러움조차 없다니, 그 추태만으로도 그가 어떤 자인지 충분히 알 만하다….” (여기까지 읽고 고개 를 돌려 옆 사람을 본다.) 수재 을 (이어 읽는다.) “아첨으로 관직을 얻더니 이제 권력

의 개가 되어 곳곳에서 사람을 물어 대고 충신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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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하여…” 진정생 후 선생, 저기 붙어 있소! 후조종 잘됐네요. 오차미 저 사람들 의견이 어떤지 좀 들어 봅시다. 수재 갑 그렇지! 잘 썼구먼. 속이 다 시원하네! 수재 병 완대성을 비판하는 내용이군. 수재 갑 완대성 같은 놈은 욕을 먹어도 싸지! 진정생 여러분! 이 글은 완대성 개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

니다. 바로 위충현 일당의 음모를 폭로하는 글입니 다. 그자 때문에 겪은 고통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자는 자기 멋대로 대가연하면서 시를 쓰든, 글을 쓰 든 누구라도 그를 따르지 않고 반대하는 것 같으면 황제께 반기를 든 역적입네, 사악한 이단입네, 대역 무도합네 하면서 사람을 중죄인으로 몰아 결국 자신 에게 고개를 숙이게 했습니다. 이제 그가 의지하던 위충현이 죽자 그는 다시 선비인 척하며 우리 앞에 서 알랑방귀를 뀌고 있습니다. 오차미 이제 다시 관직에 오르면 또 악행을 일삼겠지요. 후조종 그자가 오늘 이곳에 와 우리의 지성선사13)께 제사를

13)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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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려 한답니다. 진정생 이곳은 문묘입니다. 그따위 후안무치한 자가 오다

니, 좌시할 수 없습니다! 수재 을 그자가 오면 우리 다 함께 비웃어 줍시다. 아주 망신

을 줘서 보내 버리자고요! 후조종 그 얼굴 두꺼운 자가 비웃음을 두려워할까요? 수재 갑 그럼 우리 욕이나 왕창 해 줍시다. 오차미 어차피 욕먹는 일에는 이골이 났을 겁니다. 욕먹거

나 비웃음 사는 일이 두려웠다면 내시의 양아들 따 위는 되지도 않았겠죠. 진정생 완대성 같은 자들의 최고 무기는 두꺼운 얼굴과 음

흉한 속입니다. 그런 자를 이대로 둘 수 없습니다. 오차미 그자가 또다시 벼슬에 오르게 둬서는 안 됩니다. 후조종 이, 이보시오! 저기 보시오. 저기 나타난 자가 바로

완대성 아닙니까? 진정생 자! 우리 일단 좀 흩어집시다. 그랬다가 저자가 오면

아주 매운맛을 보여 줍시다!

[모두 흩어진다. 어떤 이는 앉고 어떤 이는 서서 완대성이 오기를 기다린다. 완대성. 자는 원해(圓海)이며 환관 위충현의 일당이었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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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사람됨이 음험하고 시기가 많으며 윗사람은 아첨 으로, 아랫사람은 교만으로 대하는, 탐욕스러운 소인배의 전형이다. 노예적 지식인인 그는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종 종 갈등을 빚었다. 그에게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던 권력자 위충현이 실권하고 죽자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그 가 이날 문묘에 나타난 것은 공자 제사를 핑계로 선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위해서다. 그가 나타나자 모두 그를 무시한다.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안 그는 짐짓 웃는 얼굴로 공수(拱手)하여 인사한다.]

완대성 여러 선생님들, 모두 안녕하십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다.)

모두 제사 지내러 오셨지요?

(역시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후조종을 보자 다가가 인사한다.) 아, 후조종 선생 아니십니까? 후조종 (인사하지 않고 대뜸) 누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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