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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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서문

우리가 들려주고자 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다(비록 그가 호감이 가는 젊은이이기는 하 지만 지극히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독자가 알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당히 들려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그러나 이 이야 기가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이며,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를 위해서도 말해두지 않을 수 없 긴 하다).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이야기라, 말 하자면 벌써 역사의 녹이 잔뜩 끼어 있어 아주 멀고 먼 과거 의 시칭으로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야기 그 자체를 위해 불리한 것이라기보다 오 히려 유리한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역사로서 이야기란 지나간 과거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속성상 과거의 것일수록 더 나으며, 이야기를 과거 시제로 나지막이 속삭이는 작가에게도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인 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를 금방 끝내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일주일의 7일도 부족할 것이고 7개월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작가인 43


내가 이 이야기에 휩쓸려 가는 동안 지상의 시간이 얼마나 지나가는지를 미리 예정하지 않는 것이리라. 설마 7년은 걸 리지 않겠지! 그러면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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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어떤 단순한 젊은이가 한여름에, 고향인 함부르크를 떠나 그라우뷘덴 주에 있는 다보스 플라츠(요양원)1)를 향해 여 행길에 올랐다. 그는 3주일 예정으로 누군가를 방문하러 가 는 길이었다. 함부르크에서 그곳까지는 참으로 긴 여정이 다. 3주일이라는 짧게 머물 기간에 비하면 사실 너무 먼 거 리다. 여행을 떠나 이틀만 지나면 인간은−삶에 아직 굳건히 뿌리를 박지 않은 젊은이가 특히 그러하듯−자신의 의무, 이해관계, 근심, 전망이라고 부르던 모든 것, 즉 일상생활로 부터 아련히 멀어지고 만다. 여행자와 고향 사이를 돌고 날 면서 퍼져가는 공간에는 보통 시간만이 갖고 있다고 믿어지 는 힘이 깃들어 있다. 공간은 시시각각 내적 변화를 일으킨 다. 그리고 그 변화는 시간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와 매우 비 슷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시간을 훨씬 능가한다. 공간도 시 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의 힘을 갖고 있다. 더구나 공간은 인

1) 다보스 플라츠(요양원): 결핵 요양원으로 유명하고, 겨울 스포츠 센터로도 이름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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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을 갖가지 관계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롭고 근원적인 상태 로 옮겨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공간은 고루(固陋)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인간으로 만 들어버린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 기도 그러한 종류의 음료수인 것이다. 그리고 그 효력은 시 간의 흐름만큼 철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대신 더 신속하게 나타난다. 어제까지만 해도 카스토르프는 일상의 생각에 완전히 사 로잡혀 있었다. 최근에 합격한 졸업시험과 눈앞에 다가온 툰더 빌름스 회사(조선, 기계 제조, 보일러 제조 회사)에 실 습차 입사하는 일 등으로 정신이 꽉 매여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기질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조바심을 지닌 채 이제 다가오는 3주일은 그저 적당히 지나쳐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이, 잘 왔구나. 자, 내리지.” 느긋한 함부르크 지방의 목소리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요아힘이 갈색 외투를 입고 모자는 쓰지 않은 채, 더할 수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플랫폼 에 서 있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도착과 재회의 기쁨에 흥분해서 웃다 가, 당황했다가 하면서 요아힘에게 손가방, 겨울 외투, 여행 용 담요와 지팡이, 우산,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양 기선(大 46


洋汽船)≫이라는 책까지도 내주었다. 이런저런 안부를 주

고받으며 여장을 푸는 동안 “이 위에 사는 우리들”이라든지 “저 아래의 생각”이라는 사촌의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여독 으로 카스토르프는 일찍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복도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얼굴을 찡그 리고 눈을 크게 뜬 채 사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기 침 소리였다. 틀림없이 남자의 기침 소리였다. 그러나 그 기 침은 이때까지 들은 어떤 기침과도 같지 않았다. 이 기침에 비교한다면, 이때까지 들은 기침들은 모두 건강하고 멋진 생명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런 욕구나 애정도 느낄 수 없는 기침으로, 정상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고 분 해된 유기체의 끈적끈적한 죽 속을 무섭도록 힘없이 휘젓는 것처럼 울리는 소리였다. “네가 와주어서 정말 기뻐!” 요아힘이 말했다. 그의 차분 한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에게는 정말 하나의 사건이 라고 말할 수 있겠어. 기분 전환인 셈이지. 그건 영원하고 무한한 단조로움 가운데 하나의 분기점이자 단락이란 뜻이 지.” “그런데 이곳의 시간은 무척 빨리 지나가겠지?” 한스 카 스토르프가 물었다. “빠르다고 할 수도, 느리다고도 할 수도 있지.” 요아힘은 47


대답했다. “시간이 도대체 흘러가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싶 군. 이건 전혀 시간이 아니야. 삶도 아니고…. 그렇지, 삶이 라고 할 수는 없어” 하고 요아힘은 머리를 흔들면서 다시 술 잔을 잡았다. 카스토르프는 이곳 요양원의 세계가 이전까지 그가 지 내왔던 일상의 세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기 시 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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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신의 집안에 관해서는 흐릿한 기억밖 에 없었다.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한 기억도 거의 없었다. 그 의 부모는 그가 다섯 살과 일곱 살이 되던 해 짧은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죽음이 어린 한스 카스토르프의 정신과 감각에− 특히 감각에−작용한 것은, 짧은 사이에, 그리고 이렇게 어 린 그에게 이것이 세 번째2)였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모습 도, 인상도 소년에게는 이제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서 완전 히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다. 처음 두 번은 그도 어린아이였 기에 당연히 슬픔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침착하고 훌륭한 태도로 신뢰가 가게 행동하면서 결코 마음 약한 모 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인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더 욱 의젓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상을 풀어서 말로 표현한다면 대 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 되었다. 죽음은 경건하고 명상적이

2) 세 번째 죽음이란, 이 책에서는 설명이 생략되어 있으나 아버지, 어머니에 이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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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슬프고 아름다운, 즉 종교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만, 그러 나 또 이것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성질, 지극히 육체적이 고 물질적인 성질, 아름답지도 명상적이지도 경건하지도 아 니한, 사실은 슬프다고도 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 이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천재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었다. 우 리들이 그를 표현하는 데 ‘평범하다’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면, 그것은 그의 지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의 단순한 사 람됨과도 거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어떤 초개별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그의 운명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토르프는 개인적으로는 일에 금방 피로를 느꼈지만, 일에 대해서 최대한 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사실은 일보다도 자유로운 시간을 훨씬 더 사랑한다고 아주 솔직히 인정했다. 즉, 그는 수고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시간, 이를 악물고 극복해야 하는 장 애물 없이 자신 앞에 널리 펼쳐져 있는 시간을 훨씬 더 사랑 했다. 일에 대한 그의 이러한 모순되는 태도는 엄밀히 말하 면 해결을 필요로 했다. 그는 군 복무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의 내적인 기질이 군 복무에는 맞지 않았고,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알 50


고 있었다. 하르베스테후더 거리에 있는 티나펠 영사의 집 을 드나들던 군의관 에버딩 박사가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영사로부터 카스토르프 청년이 군대에 가게 되면 지금 밖에 서 막 시작한 공부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청년을 만났을 당시, 그가 여행길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그 무렵 그는 단치히 공과대학에 서 4학기의 학업을 끝냈고, 다시 4학기를 브라운슈바이크와 카를스루에 공과대학에서 보냈다. 사촌 요아힘 침센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것도 한스 카스 토르프의 경우와는 달리 정말 걱정이 될 정도로 나빴다. 사 촌은 가족의 희망에 따라 두세 학기 동안 법률을 공부했지 만, 억제할 수 없는 충동 때문에 도중에 지망을 바꾸어 사관 후보생을 지원해 이미 합격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현 재는 국제요양원인 ‘베르크호프’−원장은 의사 베렌스 고문 관−에 벌써 5개월 이상 있으면서, 엽서에 의하면 죽도록 지루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스 카스토르프가 툰더 빌름 스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휴양하는 것이라면, 다보스 에 올라가서 불쌍한 사촌의 말벗을 해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두 사람 모두에게도 가장 이로운 결정이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여행하기로 결정한 때는 한여름이었 51


다. 7월도 벌써 막바지에 접어든 때였다. 이리하여 한스 카 스토르프는 3주일 예정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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