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오브 마인드 매개된 행위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제임스 V. 워치 지음 박동섭 옮김
대한민국, 서울, 학이시습, 2014
차례
저자 서문
서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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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왜 ‘행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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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매개된 행위’인가? 왜 ‘목소리’인가? 왜 ‘다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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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인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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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문화적’인가? 비고츠키와 바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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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매개된 행위’를 강조하는 사회문화적 접근의 3가지 기본 주제
비고츠키와 워프의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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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츠키를 넘어 : 바흐친의 공헌 바흐친의 공헌 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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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다성성 ‘유리된 자기 이미지’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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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단성 기능과 대화 기능 권위성과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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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 의미’의 역할 : 의미에 대한 바흐친의 접근
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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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이종혼교성 166
이종혼교성
도구상자 유비와 바흐친 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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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적 상황, 사회적 언어, 매개된 행위 매개된 행위와 사회문화적 상황의 결합 208
특권화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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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찾아보기
역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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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다양한 심리 현상에 사람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이때, 모순적이 게도 심리학은 인간의 마인드(mind)1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능력을 점 점 더 잃어버리는 것 같다. 우리는 고립된 정신과정과 기술(skill)에 대 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정신기능(mental functioning)의 전체상을 그려 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인위적으로 통제된 실험실에서 발견한 인 간 심리의 규칙성2은 실험실 밖의 자연적 상황,3 즉 현실 생활이라는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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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는 통상 ‘마음’ 혹은 ‘정신’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원어 발음 그대로 ‘마인드’로 표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다. ‘마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통 사람들이
떠올리는 심상은 피부를 경계로 개인의 내부에 ‘실체’처럼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마치 ‘금고’ 혹은 ‘상자’로 보는 마음관은 심리학에서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 다. 그런데 비고츠키의 사상과 바흐친의 생각, 그리고 양자의 통합을 시도한 저자(제임스 워치)가 추구하는 사회문화적 심리학은 이러한 마음관에 철저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저 자는 마음을 금고나 상자처럼 닫혀 있는 자기완결적 혹은 고정적 실체로 보지 않고, 마음 이 도구나 타자(他者),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발생해 변화하 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즉, 주류 심리학이나 보통 사람들이 가진 마음관과 달리, 마음을 열려 있고 불완전한, 나아가서 무엇인가를 항상 지향하는 행위(action)의 산물로 새롭게 볼 것을 제안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에서 ‘mind’를 번역하기보다는 원어 그대로 사용 하는 것이 혼란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대로 사용한다. 단, 본문에서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mental functioning’은 ‘정신기능’이라고 번역한다.-역자 주 2
예컨대,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단기 기억 테스트 같은 심리 실험을 예로 들 수 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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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대해에서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이는 심리학자의 개인적 자질이나 노력이 부족해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이전과 비교해 많은 연구자와 실 천가, 학술잡지, 전문기관 그리고 컴퓨터까지 심리학의 발전에 힘을 보 태고 있다. 그러나 만약 한발 물러나 심리학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 엇을 가르쳐 주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점점 덜 만족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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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이라는 자연적 상황을 생각해 보자. 부엌에는 조리기구, 식자재나 요리의 주재료 등
우리 삶에 유용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부엌이라는 장소도 그렇지만 여러 도구나 재료도 우리를 위해 어떤 형태로든 각자 역할을 수행한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런 환경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가장 ‘알맞은 역할’이 정해진다. 그리고 너무 당연해 보통은 의식조차 하지 않는 것인데, 부엌은 미리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조리기구, 식자재는 각각 어울리 는 장소에 놓여 있을 것이다. 요리 재료를 예로 들어보자. 야채는 냉장고 야채 보관실에, 고기는 냉동실에 저장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조리가 끝난 뒤 다양한 도구와 재료를 원래 있던 곳에 정리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부엌이라는 일상 환경은 조리기구, 요리의 주재료와 양념 같은 이른바 ‘기능적 자원(functional resource)’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기능적 자원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체계를 갖춘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딱 들어맞는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 에서 우리의 인지 과정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라는 물음이 당연히 발생한다. 전통적 인지심리학의 주된 연구 대상인 ‘재생(recall)’이라는 활동을 이러한 일상 상황에서 생각 해 보자. 우리가 무언가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주어진 환경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면, 식 칼을 찾을 때에는 망설임 없이 식칼이나 가위같이 비슷한 용도의 것들이 놓여 있는 장소 를 찾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심리학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기억 과제와는 대 조적이다.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대상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구조는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 이미 주어져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스스로 ‘부엌’이라는 환경을 사전 에 그렇게 구성해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것’은 머릿 속 구성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환경의 구성 방식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체는 심리 학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기억(오로지 개인이 갖고 있는 기억력에만 의존하는 것) 과제 가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을 구성한다. 혹은, 그 상황에서 기억 과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환 경을 구성한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과제를 바꿔 나가면서 우리의 ‘인지적 역할’도 바뀌어 간다. 즉, 실험실에서는 ‘생각을 해 내는 사람’으로 살다가 부엌이라는 환 경에서는 ‘보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맞게 개인의 인지 과정도 바뀐다.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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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몇 년 사이 우리는 뇌의 기능을 훨씬 많이 알게 되었다. 유아의 사회적, 인지적 기능도 훨씬 풍부하게 기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새롭고 다양한 심리치료법으로 그동안 도 움을 주지 못했던 곳에 손길을 뻗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적 달 성, 실천적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앞서 밝힌 개요만으로도 이들 학문 영역의 근본적인 약점이 드러난다. 즉, 우리는 마인드에 관해 고립되고 애매한 퍼즐 조각들은 많이 갖고 있지만 수미 일관적이고 통합된 전체상은 아직 갖지 못한다. 예컨대, 뉴런 활동이나 신생아의 반사 신경에 관한 세세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른 사회에서는 어 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브루너 (Bruner, 1976)는 하나로 고정된 ‘인간 이미지’를 만드는 심리학의 문제 를 논평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이 약점의 가장 두드러진 징후 중 하나가 오늘날 심리학이 주요한 사회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전망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은 특정한 임상증후군(clinical syndrome)이나 뇌의 기능장애에 대해선 뭔가 정보를 제공하지만, 교육 실패나 교육개혁 등 더 큰 사회적, 문화 적 문제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심리학이 사회문제에 침묵해 왔다는 것은 1990년대 초반 동유럽과 소련에서 발생한 혁명적 사건을 통해 명백해졌다. 이 큰 사건들을 이해 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시민과 전문 평론가들이 동유럽과 소련 국민이 경험한 심리적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심리학자에게 문의하거나 심리학 이론을 조사하는 건 유익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지를 구명(究明)하기 전에, 정치 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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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해 사회적 변화는 일종의 심리학적 분석을 거쳐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렇다고 모든 심리학자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다른 많은 실천적 관심에서 훌륭한 연구가 비롯되기도 하고, 순수하게 이론적 동기에 기 초한 연구가 정말로 사회문제를 이해하는 데 더 크게 공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논하고 싶은 점은 현대의 심리학 연구 대부 분이 스스로 실천적 시사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의 심리학 연구는 인간의 정신기능, 즉 마인드를 마치 문화적, 제도적, 역사적 상 황과 동떨어져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다룬다. 특히 미국의 주 류 심리학 연구가 이러한 경향을 띤다. 미국의 주류 심리학 연구는 개 인이나 개인 정신기능의 특정 영역만을 분리해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 나아가서 이러한 연구 관행이 장려되기도 한다. 이렇 게 생각하는 사람들4은 구체적인 연구를 수행할 때 문제를 단순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를 단순화한 뒤에 문화적, 역사적, 제도적 ‘변수’ 가 어떻게 그 전체상에 편성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들의 접근 방 식을 정당화한다. 이런 비판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런 비판은 적어도 존 듀이 (John Dewey)의 시대 이후 미국의 심리학에서 계속 제기되었다. 듀이 는 “심리학과 사회 실천(Psychology and Social Practice)”이라는 제목 으로 미국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에서 회장 연 설을 했다. 듀이는 만약 심리학이 오로지 개체에만 계속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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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변인들을 단순히 외부에 있는 독립변수로 보며, 이것이 어 떻게 예컨대 개인의 마인드에 영향을 주는지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이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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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고찰을 필요로 하는 많은 현상을 다룰 수 없게 된다고 진술했다 (Dewey, 1901). 심리학이 정신기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 이 어떻게 문화적, 역사적, 제도적 상황과 관계를 맺는지 살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러나 시모어 새러손(Seymour Sarason)의 지적처럼, 듀이의 생 각은 최소한 미국 심리학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지금까지 미국심 리학회의 회장 연설들은 “100년 전 심리학의 여명기부터 쭉 미국 심리 학은 전형적인 개체 심리학이었다”라는 사실을 반영한다(Sarason, 1981:827). 심리학의 개체주의적 경향은 이 책에서 특히 흥미 있게 다 루는 아동 발달 연구에서도 당연히 존재한다. 바버라 로고프가 밝혔듯, “개인에 대한 강조는 아이의 지적 지표인 IQ(지능지수), 기억 전략, 문 법적 기능을 연구하는 미국 심리학 연구자들이 수십 년 간 발표한 연구 물들의 특징이었다. 개인을 강조하는 경향은 피아제 이론이 현대의 미 국 심리학 연구에 편입될 때 나타난 특징이기도 하다”(Rogoff, 1990:4). 고립된 개인 내지 “진공 속의”(Rommetveit, 1979) 정신과정을 탐 구하는 쪽으로 치우친 연구 경향은 심리학이 다른 학문 영역이나 일반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게 방해해 왔다. 심리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마인 드와 행위를 일관된 이론으로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관 여한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흥미를 갖기 어려운 난해한 논쟁에 휩쓸리 곤 했다. 이것은 사회과학이나 다른 일반 학문 연구에서 슬퍼해야 할 사태로,5 특히 심리학에 불행한 사태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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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학회(여기서는 심리학회)에 속한 사람끼리만 말이 통하는 학문을 계속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우치다 타츠루(内田 樹)의 다음 지적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 “슬픈 일입니다만 제가 있었던 불문학계가 그 전형입니다. 지금까지 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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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학문만이 아니다. 현대 심리학의 제도적 구조에도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학문 영역이 복잡해졌기 때문에 세분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미국심 리학회의 분야 전반은 물론 특정 분과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거 의 불가능하다. 또한 다른 학문 영역과 함께 발전해 가려는 시도는 완 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새로운 과학기술과 연구 결과가 급증했고, 하위 학문 영역이 새롭 게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현대 심리학자들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각 연구 영역의 분절을 없애는 새로운 연구 과제의 설정이 가능하다고 강하게 믿는다. 바로 (종종 매우 특수한 성격의) 연구와 좀 더 일반적인 전체 그림을 연결하 고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과제로 이끌어 가는 전략을 통해서다. 물론 단순히 부가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이것을 실행하지는 못한다. 또한 차세대 심리학자가 심리학과 똑같이 사회학, 문학, 물리
연구자로서 현대 사회문제에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발언해 온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매체를 통해 ‘우리는 이런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어필하는 노력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2000명에 이르던 불문학자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세월 을 보내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일본 대학 대부분에서 자기 학과가 없어져 버렸습 니다. 머지않아 불문학 교수 자리도 없어져 버리겠죠. 내부 사람끼리만 통하는 은어로 내 부 사람만 웃을 수 있는 개그를 아이들에게 과시하면서 ‘우리 멤버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 게 소외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물론 이 수에 걸려들어 전문 가가 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만, 학계에 ‘그런 사람’만 있으면 모임은 점점 폐쇄적으로 변 하고 내부 사람의 은어가 점점 암호화되어, 결국 거기에서 뭘 하고 있는지 바깥에서는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역시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게 되겠죠. 여러 학문이 인기가 없어지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이유의 태반은 ‘내부 파티’에만 매달려 중고생들의 욕 구를 환기시키는 데 태만히 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内田 樹(2012), 박동섭 옮김, 교사 를 춤추게 하라, 97∼99쪽, 민들레 출판사].-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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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등 다른 학문 영역에서도 높은 수준의 식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 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도리어 새로운 형태에 치우친 하위 전문화를 만드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오히려 학문 영역이나 하부 학문 영역의 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적절한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각 영역 이 스스로 질문들을 재설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새로운 이론적 틀이 필 요하다. 즉, 현재 산재해 있는 학문 영역의 관점에서 연구자들이 이해 하고 확장할 수 있는 형태의 이론적 틀을 개발해야 한다. 이때, 다양한 학문 영역의 연구자들이 배제되지 않는 방법론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 하다. 블라디미르 진첸코와 다른 몇몇 연구자들이 시사하듯, 이 과정의 핵심은 학문 영역의 세분화와 고립화에 대항하는 ‘분석단위’를 만드는 것이다(Zinchenko, 1985). 그러나 우리는 종종 스스로 선택한 분석단 위 때문에 무조건적인 책무에 갇혀 버리곤 한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 면 이런 책무는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앞으 로 이 책에서 설명할 ‘매개된 행위(mediated action)’라는 개념은 이 도 전에 응답하려는 시도다. 내가 수행하려는 과제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연구자가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론적, 실증적 정보를 모으는 연구만으로는 이러한 모델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임무는 집단적 노력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예를 최근 수 십 년 동안 발견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이 관점의 차이를 극복한 예가 있다. 비판이론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자들은 20세기 유럽에 불어 닥친 비극적인 정치적, 문화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 사회학, 미 학, 심리학, 역사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또 다른 예도 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1930년대 중반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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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숙청까지, 그 시기 소련 연구자들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이들이 수행한 일은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한 것과 같이 심리학에서 얻은 아이디 어에만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통합하 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소련의 연구자들은 사회주의 최초로 위대한 실 험을 돕고자 학문 영역을 넘어 실천적 문제에 응답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명확히 개별화된 여러 학문 영역에 걸쳐 다양한 개념을 결합할 수 있었다. 학문 영역, 이론과 실천의 혼합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거물인 L. S. 비고츠키의 일상 중 어느 하루를 그려 보자. 그날은 농아교육을 담당하 는 교사를 위해 세미나가 열렸다. 언어학자인 N. 야. 마(N. Ya. Marr), 발달심리학자인 (나중에는 신경심리학자가 된) A. R. 루리아(A. R. Luria), 그리고 영화감독인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Eisenstein) 등이 참가해 교사들에게 임상 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기호학에 대한 심 리신경학 연구 모임에서 강연했다. 마지막으로, K. S. 스타니슬랍스키 (K. S. Stanislavskii)의 방법론이 연극에서 내적 언어(inner speech)에 던지는 시사점을 주제로 원고를 집필했다.6 비고츠키는 많은 주제를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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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가 묘사한 비고츠키의 어느 하루는 전문가가 어떤 존재인지를 자세히 보여 준다. 우 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전문가는 다른 전문가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전문가 에 대한 올바른 정의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처럼 ‘팀으로 일하 는’ 이야기에는 폭탄이나 컴퓨터, 변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옵니 다. 그들이 저마다 자신의 특기를 갖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는 큰일 을 해냅니다. 다른 전문가와 협력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전문가에 대한 올바른 정의입니 다. 다른 전문가와 협력하려면 자신은 어떤 영역의 전문가이고 그 능력이 다른 영역과 협 력을 통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비전문가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서 전 문 영역은 ‘은어로 이야기가 통하는 세계’를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전문가 는 사실 다른 전문가와 공동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혼자 무엇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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략적으로 다뤘다. 그러나 종합화와 학문 영역 간 협동활동적 노력에 기 초한 일련의 문제를 설정한다는 시도는 학제적 연구의 성격을 띤다. 이 는 비고츠키가 죽은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의 다양한 문제 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계발시킨다. ‘마인드’에 대한 나의 접근 방식에는 진공 상태의 개인이나 특정한 정신과정에만 초점을 맞추는 심리학 연구의 함정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 접근 방식은 당연히 학문 영역 간의 활발한 협동으로 이루어 졌다. 특히 발달심리학과 기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제안으로 이루 어졌다는 점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 때문에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역사 문제, 사회이론이나 그 밖의 주제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이루 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심리학과 기호학의 목소리가 다른 학문 영 역의 목소리와 생산적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최초의 틀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희망하는 바다.
가능한 전문가’는 모순입니다. 혼자서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도 잡을 수 있고 벼농사를 짓 거나 대장장이 일도, 목수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전문가라 부르지 않습니다. 전 문가는 자신의 전문 영역 일밖에 할 수 없지만 다른 전문가와 ‘합체’하면 폭발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内田樹(2012), 박동섭 옮김, 교사를 춤추게 하라, 90쪽, 민들레 출판사].-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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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마인드에 대한 사회문화적(sociocultural) 접근 방식은 인간의 심리적 과정을 밝히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는다. 또한 이 과정이 문화적, 역사 적, 제도적 상황과 본질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 밝히고자 한다. 이 러한 접근 방식은 학문적 담론에만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 대화 속 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적, 일본적, 그리고 러시아적 사고방식을 대화 주제로 삼거나, 20세기와 18세기의 시대정신을 대비 시켜 말하거나, 관료주의적 합리성과 특유한 사고방식을 말할 때, 우리 는 자연스럽게 마인드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방식과 정신기능을 관 련짓는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히 심리학적 문제에 관련된 주제라도 심리학에 서는 그에 대해 거의 예외 없이 별로 거론하지 않았다.7 이 책의 목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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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 교육심리학회 심포지엄에서 사회자의 발언을 듣고 무척 놀랐던 적이 있다. 사회자는 “우리는 마음이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데, 몸이 마음에 영향을 준다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마음과 몸의 관계를 자로 잰 듯 딱 이등분하는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의 전형’이라 볼 수 있다. 그 이후의 토 론 시간에 나는 당돌하게 ‘마음의 사회적 기원’에 관해 핏대를 올려 피력했다. 그곳에 있 던 백발이 성성한 어느 교육심리학자가 ‘우리는 심리학 연구자여서 사회라든지 문화, 또 제도 같은 부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나를 나무라듯 말했다. 그 모습이, 비록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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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관련될 수 있는 문제들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다. 특히 문제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발달심리학적 관점을 가져오 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현재 이용할 수 있는 이론을 단지 문제에 끼 워 맞추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서론에서도 밝혔듯, 이 책에서는 새로 운 ‘이론 구성’을 목표로 한다. 이 새로운 이론 구성이 얼마나 유효한지 를 밝히기 위해 이 책에서는 몇몇 구체적 사회문화적 상황만을 검토하 는 데 그칠 것이지만, 이러한 시도가 좀 더 연구를 확장시키고 다양한 연구 주제를 불러일으켰으면 한다. 특정한 이론적 접근 방식은 특정한 암묵적 가정들을 전제로 삼는 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가정들은 연구자가 설명하고 기술 하려는 것과 관계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연구 접근 방 식이 다르면 저절로 그 연구 내용도 매우 다르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 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정신기능의 보편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오늘날 서구 심리학 연구에서는 몰역사적(ahistorical),8 보편적 정신
은 했던 것이지만 무척 인상적이었다.-역자 주 8
비고츠키는 주류 심리학의 몰역사적 연구 경향성을 그 학문 분야가 오랫동안 분석단위 로 삼아 온 사회문화역사와 하등 관계를 갖지 않는 ‘불멸의 아이’에 빗대어 비판했다. “현대의 아동심리학이 추구해야 할 과제는 ‘불멸의 아이(Eternal Child)’가 아니라 ‘역
사적인 아이(Historical Child)’, 혹은 괴테의 시적 표현을 빌려 말해 본다면 ‘순간순간 을 사는 아이(Transitory Child)’를 밝히는 것이다. 집 짓는 이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돌 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집 짓는 이가 버린 그 돌이 집 모퉁이의 주춧돌이 될 것이 다”[L. S. Vygotsky(1933/1998), edited by R. W. Rieber, The Collected Works of L. S. Vygotsky, p. 109, New York: Plenum]. 철학자 김영민은 심리학이 분석단위 혹은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불멸의 아이’를 ‘휴먼빙(Human being)’이라는 메타포로, 비고츠키가 말한 ‘역사적인 아이’ 혹은 ‘순간순간을 사는 아이’를 ‘빙휴먼(Being Human)’이라는 메타 포로 설명한다. “살아가는 모습의 구체성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움직임을 잡 아 둔 명사의 상자(human-being)를 볼 것이 아니다. 형용사를 던지는 현재분사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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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강조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의 관심은 마음의 사회문화적 구성이나 형성에 있다. 나의 관점은 존 베리, 마이클 콜, 더글러스 프 라이스윌리엄스, 리처드 셰더가 밑그림을 그려준 ‘문화심리학(Cultural Psychology)’과 일치한다(Berry, 1985; Cole, 1991; Price-Williams, 1980; Shweder, 1990). 스티븐 톨민의 말대로, 문화심리학의 뿌리는 적어도 빌헬름 분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Wundt, 1916; Toulmin, 1980). 최근에는 다양한 요인이 중첩되면서 문화심리학에 대한 관심 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Cole, 1991). 이러한 새롭고 다양한 관심은 다 음과 같은 가정을 공유한다. “문화적 전통과 사회적 관습이 사람의 정 신(psyche)을 어떻게 조정하고, 나타나게 하고, 변경하는지 탐구한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 자아, 정서 영역에서 보편성보다 민족적 차이가 크다는 것이 강조되었다”(Shweder, 1990:1). 보편성과 사회문화적 상황성(sociocultural situatedness) 중 어 느 쪽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흥미를 가지는 현상이나 주목하는 대 상 같은 기본 전제와 가정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이나 가 정이 함의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한다. 그 결과, 잘못된 해 석을 계속하거나 논의가 허구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의 정신기능에는 보편성과 사회문화적 특수성이 함께 존재 한다.9 정신기능 연구에서 보편성과 사회문화적 특수성이라는 문제
(b·e·i·n·g·h·u·m·a·n) 속에서 마땅히 인간을 볼 일이다. ‘휴먼빙은 빙휴먼이다’라는 명제는 ‘부단한 투기(投己)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존재 방식이 없’는 인간
이라는 사르트르의 주장을 포섭할 수 있으리라 본다. ‘만들어지고 있는 존재’라는 뜻의 인 간 이해는 사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으며, 사상사의 구석구석을 뒤집어엎어 보면 유사한 전 례를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논의의 관건은 변화와 무상이라는 삶의 범박한 공통 경험을 매개로 인간을 이해하지 않고 유리관 속에 표백된 박제로 보려는 강박을 드러내는 일이다”[김영민(1992), 컨텍스트로, 패턴으로, 136~137쪽, 문학과지성사].-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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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기능의 보편성과 사회문화적 상황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구 조주의적 관점을 차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느끼는 방식은 실은 꽤 공동적으로 규제된다. 그래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의 지평’에 수렴 되지 않는 이른바 이물질은 애당초 지각도 되지 않고 사고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어떤 개 인이 자신만만하게 ‘개성적으로 현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세대에 통째로 공유되고 있는 일종의 끈 혹은 모기장이라는 사실을 동세대와 같은 실천공동체의 구성원 들과 연대만 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동세대의 공통사항을 제거하고 난 뒤에 남는 것, 그것이 일단 ‘나의 개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주기와 반성 적 실천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개성’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실은 어떤 시대와 어떤 지역 문화가 만들어 온 ‘민사(民史)적 편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좀처럼 자각할 수 없다. 내가 갖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야 비로소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리하여 반드시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바로 그 ‘민사적 편견’이라는 말을 나는 구조주의자들로부터 배웠다. 구조주의라는 것은 1950~1960년대 프랑스를 발신원으로 하는 몇몇 학술 분야(레비 스트 로스의 구조인류학, 롤랑 바르트의 기호론, 푸코의 사회사, 라캉의 정신분석 등)에 공통적 으로 내재한 일종의 지적 멘탈리티다. 이 멘탈리티는 한마디로, ‘자기 판단의 객관성을 과 대평가하지 않는’ 태도다. 이렇게 말하면 곧 바로 ‘뭐라고 그런… 지적 절도는 1960년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고래(古來) 현자는 모두 그런 존재였다. 실제로 내가 그렇다’라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 있기에 서둘러 첨언하자면 ‘자기 판단의 객관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단순한 윤리적 멘탈리티와 자계(自戒)의 태도가 아니다. 좀 더 기술적이고 쿨한 절차를 가리킨다. 말을 바꾸면, 자신은 색안경을 끼고 있다 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색안경을 끼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시각상을 왜곡시키고 뿌옇게 한 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세계는 그처럼 보인다’라는 것과 ‘세계는 실제로 그렇게 존재한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면 색안경을 벗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쉽 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라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을 것이다. ‘색안경’이라는 것은 점막에 붙어 있어서 역설적으로 그것 없이는 세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신체화된 우리의 세계 인식의 형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색안경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누구의 색안경이 선명도가 높은지, 굴절률이 높은지 견 주어 봐도 별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색안경을 눈에서 떼어 낼 수 없다고 모든 인간이 각자가 만들어 낸 허상을 보고 세 계 경험에 공통의 기반은 있을 수 없는 게 아닌가 하고 허무에 빠지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우리가 보는 세계에 대한 상이 왜곡되고 흐릿할지라도 세계가 불가지(不可知)한 대상은 아 니다. ‘나의 색안경을 통해 보이는 세계’와 ‘당신의 색안경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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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맞닥뜨릴 때,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처리해서는 안 된다. 연구에서는 양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가능한 한 양쪽을 통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서술과 설명 방식으로 무엇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기본 가정도 다르다. 보편성과 사회문화적 특수성 중 어디에 초점을 맞 출지 합의한 경우라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종종 불일치가 일어난다. 가
하고 차이를 검증함으로써 직접적으로는 아무도 볼 수 없는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은(논리 적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유형의 ‘색안경’을 통해 높은 빈도로 동일한 상이 출현할 경우 이것은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상은 아닐까 하고 추론할 수 있다. 각 기 다른 사회집단의 차이를 넘어서 인류 전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시야의 왜곡’은 (인 간 세계 지역 한정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서 다룰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사회집단에 따라 보는 방식이 다른 것은 ‘지역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화폐’는 꽤 범용성이 높은 보편적 제도다. 재화의 교환에서 그 가치를 계량하 는 공통 도량형을 갖지 않는 사회집단은 우리가 아는 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화’는 다르다. 어떤 나라의 통화는 다른 나라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어음과 인터넷뱅
킹 같은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 사회의 사람들에게 숫자가 쓰인 종이와 카드가 화폐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사용하 는 ‘화폐’에는 ‘넓게는 인간 일반에 타당한 인류학적 가치’와 ‘특정한 공동체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민족지적 가치’가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각자 색안경을 통해 바라보 는 세계의 상 중에는 ‘모두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과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 첩되어 있다. 우리가 자기 경험의 객관성을 무심코 과대평가하는 것은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 과 ‘모두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의 상당 부분이 ‘겹쳐져 있는 것’과 동시에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야구와 축구와 럭비는 전혀 다른 스포츠다. 하지만 이것을 ‘공을 갖 고 하는 게임’으로서 본 경우에는 종별을 넘어서 ‘반복 동일의 상’이 출현하는 수준이 있 다. 예를 들면, ‘공은 페어(살아 있다)인지 파울(죽었는지) 둘 중 하나다’. ‘공을 상대가 관 리하는 구역에 보냄으로써 <좋은 일>(점수)이 생긴다.’ ‘공을 직접 자기 팀의 선수에게 보 내서는 안 된다’(반드시 상대에게 간섭을 받고 뺏기는 찬스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등의 규칙이 모든 종목에 공통적으로 있다. 하지만 선수의 수, 운동장의 형태와 크기 등은 종목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국소적 혹은 민족지적 수준에 둘 수 있다. 즉, 구조주의적 관점은 우리의 일상적 현상 중 보편적 수준과 민족지적(사회문화적 상황성) 수준에 있는 것을 식별하는 지적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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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큰 논점은 바로 연구의 ‘분석단위(unit of analysis)’를 둘러싼 문제다. 진첸코는 심리학의 주요 학파들 사이에 분석단위 선택에서 큰 차이가 있 다고 말한다(Zinchenko, 1985). 행동주의자들은 ‘자극-반응의 연합’을 분석단위로 선택하고,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형태(gestalt)’에 착안하 고, 피아제학파의 학자들은 ‘스키마(schema)’를 분석단위로 삼는다. 마 음대로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가 분석단위로 무엇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기술하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 해 우선 밝히고자 한다. 또한 이 책의 제목에 깔려 있는 몇 가지 가정도 보여 주고자 한다. 내가 분석단위로 무엇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명 확히 해두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분석단위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 과 그 분석단위를 뒷받침하는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행위, 목소리라는 개념과 기호적 매개의 형태, 정신과정에서 단일성보다도 다양성에 강 조점을 둔 정신 행위(mental action)를 포착하는 방식, 그리고 매개된 행위의 문화적, 제도적, 역사적 상황이다.
왜 ‘행위’인가? 마인드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방식은 인간의 ‘행위(action)’를 기술하 고 설명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 내가 전개하려는 주장에 방향을 제시하 는 분석단위도 이 ‘행위’에 기초를 둔다. 이때 ‘행위’란 소련 심리학의 다 양한 활동이론(theory of activity)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Leont’ev, 1959; 1975; 1981; Rubinshtein, 1957). 물론 그 외의 이론들에서도 영 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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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가 인간을 분석할 때 행위를 우선한다는 것은 인간을 행위 를 통해 환경과 접촉하고 무엇을 창조하는 존재로 본다는 의미다. 행위 라는 분석단위는 인간과 환경을 따로 떨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과 환경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분석할 때도 함께 고려한다.10 이것은 인간 을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로 생각하는 입장 이나 개체에만 주목해 환경을 이차적인 것으로 다루며 환경을 단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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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위’라는 낯설고 난해한 개념을 알기 쉽게 풀기 위해 박동섭은 ‘사회문화적 사이보
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뭔가를 수행할 때 빈손이 아니다. 즉, 외부 세계의 도구에 의존하고 있고, 의존하기 위한 도구 혹은 인공물(artifact)를 만들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의 주체성(agency), 자율성을 음미할 때 반드시 고려 대상으로 삼아야 할 사안이 다. ‘주체’는 ‘행위를 수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책의 특정한 페이지를 펼치는 ‘행위’를-책갈피와 함께-수행하는 경우, 주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책갈피가 없
는 경우 이 행위가 똑같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때, 책을 어디까지 읽었는지에 대해 말을 바꾸면 ‘행위를 수행하는 자’, 즉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처럼 우리 ‘행위’는 모두 도구 혹은 인공물과 일체화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 다. 도구 혹은 인공물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위의 일부분이다. 비고츠 키와 레온티예프 그리고 워치는 ‘행위’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인간과 환경을 따로 떨어 진 것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해 하나의 단위로 보는 길을 열었다”[박동섭 (2012), “사회문화적 사이보그인 나”, 민들레 81호, 32~41쪽, 민들레 출판사]. 인간과
사회를 각각 분리된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묶을 수 있는 전략으로 비고츠키와 비 고츠키 연구자들은 ‘행위’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행위’에 대한 좀 더 확장된 논의를 김영 민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과 환경을 각각 분리하는 실체주의를 ‘명사적 사고’라 고 부르며 내치고, 이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전략을 ‘동사적 사고’에서 구한다. “사랑은- 자애(自愛)를 포함해서-언제나 타동사로만 살아 있고, 영상도 망막과 만나는 활동을 통 해 살아 있다. 의식의 지향적 구조도 비슷하게 설명될 수 있다. 어쩌면 ‘의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의식이란 단어만 동떨어진 채 자기완결적 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인정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이라는 명사적 상태는 언어적·문법적 가상에 불과하다. 이 문법적 명사를 실체인 양 보는 태도는 화이트 헤드가 말한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에 해당한 다. 의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을 의식한다’는 동사적·관계적 구조뿐이 다”[김영민(1992), 컨텍스트로, 패턴으로, 52쪽, 문학과지성사].-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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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발달 과정을 자극하는 역할11로 생각하는 입장과 대비된다. ‘행위’를 분석단위로 삼는 것과 확연히 다른 관점도 있다. 로크와 데카르트에서 각각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Locke, 1852; Descartes, 1908). 두 철학자의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현대 심리학 이론 역시 암묵 적으로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 있다. 행동주의자와 신행동주의자의 이 론은 인간의 지성이 환경의 영향을 통해 형성된다는 로크의 주장에 근 거를 둔다. 노암 촘스키처럼 이성에 대한 데카르트파의 주장을 추종한 다고 공언한 이론가들도 있다(Chomsky, 1966). 이들은 인간의 마인드 를 보편적이고 내적인 범주와 구조12라는 관점에서 본다. 반면, 환경을 태어날 때부터 갖춰진 인간 지성의 틀을 검증하기 위한 소재로 보며, 지 성의 발달 과정에 영향을 주는 일련의 재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 역할 을 다하는 것으로 본다. ‘행위’를 설명하는 관점은 철학과 심리학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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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나 교육학에서 단골처럼 사용하는 ‘독립변수’와 같은 역할로만 보는 것이다. -역자 주 12
‘내적인 범주와 구조’로 본다는 의미는 ‘어디에 쌓아 둔다’는 발상과 대동소이하다. 김영
민은 ‘마음’을 어떤 공간에 ‘축적’되어 있다는 메타포로 설명하는 것에 어떤 오류가 있는 지 지적한다. “‘어디에 쌓아 둔다’는 발상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을, 특히 정신을 장소적·공 간적 개념으로 오인한 데 있다. 데카르트가 정신의 본성을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s)’ 라는 말로 파악하려 했다는 고전적인 인용을 재론하지 않더라도 실상 ‘무엇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상자’ 같은 것으로 마음을 영상화·공간화시키는 태도-이것은 내가 ‘시각적 낭만 주의(Visual Romanticism)’라 부르는 정신의 혼동을 확실하게 예시한다-는 일반인이 마음에 가지는 기초적 상상력을 지배한다. 그러나 마음을 상자같이 꽉 막힌 어떤 것 (something)으로 보는 소위 ‘명사적 사고(Nounal mode of Thinking)’는 실험과 검증을
거쳐 밝혀낸 생리학적 탐구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유비관계(analogy)가 빚은 시각적인 오류에 가깝다”[김영민(1996), 철학과 상상력, 84쪽, 시공과공간].-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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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미국 프래그머티스트(pragmatist)의 저작들에서 기본적으로 채용한 것이다(Mead, 1934). 또한 장 피아제(Jean Piaget)의 막강한 영향으로 그가 주창한 발생론적 인식론이 관심을 끌게 되자 발달심리학 분야에서 도 행위라는 개념과 주체-대상 간 상호작용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따라서 ‘행위’의 중요성도 부각되었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스키마나 행 위의 유형에 역할을 크게 부여하는데, 이와 똑같은 경향이 최근 인지과 학 같은 학문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는 환경과 개인을 분리한 상태로 개인의 ‘정신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 다. 즉, ‘행위’와 ‘상호작용’을 기본적인 분석의 범주로 본다. 그리고 인간 의 정신기능이 환경과 유기체, 즉 둘의 총화에서 발현된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접근 방법이 행위에 대한 특정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 는다고 한다면 여전히 많은 것을 놓쳐 버리고 만다. 행위는 몇 가지 유형 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따라서 어떠한 행위 유형을 상정할 것인지 확실 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사회학적 입장에서 이 문 제를 어떻게 다뤘는지 고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Habermas, 1984). 하버마스는 행위자와 환경의 관계에 기초해 세 가지 행위 유형을 만들 었다. 하버마스는 환경(혹은 세계)의 유형을 칼 포퍼(Karl Popper)의 ‘세 가지 세계의 이론(three-world theory)’에서 가져왔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세계 혹은 우주를 구별할 수 있다. 첫째, 물질적 대상 혹은 물질 적 상태의 세계, 둘째, 의식 상태나 정신 상태 혹은 행위로 향하는 행동 경향의 세계, 셋째, 객관적 사고 내용의 세계, 특히 과학적·시적 사상 과 예술 작품의 세계다”(Popper, 1972). 이러한 포퍼의 ‘세 가지 세계의 이론’을 I. C. 자비에가 행위이론적 인 것으로 변환했다(Jarvie, 1972). 이에 기초해 하버마스는 행위에 접근 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하버마스는 행위자(actor)와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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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대상 혹은 물질적 상태라는 첫째 세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 다. “목적론적(teleological) 행위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적 행위 이론의 중심이 되었다. 행위자는 주어진 상황에서 성공할 수 있는 수단 을 선택한다. 그리고 적절한 방식으로 수단을 적용함으로써 목적을 실 현하거나 바람직한 상태를 이끌어 낸다. 이때 중심 개념이 되는 것은 목 적을 실현하는 지향성을 가지면서 금언(maxim)에 이끌리는 것과, 상황 해석에 기초하면서 몇 가지 행위의 선택지 중 한 가지를 결정하는 것이 다”(Habermas, 1984:85). 하버마스는 경제학, 사회학, 사회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의 결정이론이나 게임이론 같은 접근 방식이 행위의 목적론적 모델을 “전략적 모델”의 형태로 확장한 것이라 말한다. 전략적 모델은 “목적지향적인 행위자가 적어도 한 명 더 있으면 그는 행위자가 성공을 계산해 결단을 예측하는 것조차 자신의 염두에 둔다”(Habermas, 1984: 85). 하버마스는 목적론적 모델을 전략적 모델로 확장해 논의하는 과정 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략적으로 행위하는 주체는 인지를 갖춘 존재 다. 이들에게 세계는 객관적 대상일뿐 아니라 의사결정의 시스템으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따라서 행위자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에 대해 자 신의 개념 장치를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Habermas, 1984:85). 그런 데 하버마스는 존재론적 전제로서 애당초 이것이 어떠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모델은 “하나의 세계, 즉 객관적 세계”를 전 제로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Habermas, 1984:87). 행위의 목적론적 모델과 전략적 모델에서 행위자와 세계의 관계는 진리와 유효성이라는 기준으로 판단된다. 목적지향적 행위자는 “그것 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제대로 성공할지 실패할지, 어느 한쪽으로 목표 지향적 행동을 취한다. 즉, 이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효과가 달성되는 지 실패하는지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Habermas, 1984:87).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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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는 목적론적 모델과 전략적 모델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이 적절한가에 대한 물음에 객관적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는 단독의 행 위자에 맞춰야 한다고 대답한다. 하버마스가 그린 행위의 둘째 개념은 행위자와 포퍼의 둘째 세계 (“의식 상태와 정신 상태, 혹은 아마도… 행동 경향”)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드라마투르기 행위(dramaturgical action)”라는 개념 으로, 어빙 고프먼의 “드라마투르기 메타포”(Goffman, 1959)에 기초한 것이다. 이 범주에서 행위는 다음과 같다. “행위자는 목적을 가지고 자 신의 주체성을 밝히며,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의 특정한 이미지와 인상 을 대중 앞에 불러낸다. 각 행위자는 자기 자신만이 접근할 수 있는 의 도, 사상, 태도, 바람, 감정 같은 체계에 대중이 접근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presentation of self)’은 순전히 자발적 표현 행동이 아니다. 청중과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인습에 맞도록 조정해 표현하는 것이다”(Habermas, 1984:86). 하버마스에 따르면, 드라마투르기 행위와 목적론적 행위 사이에 는 중요한 연결점이 있다. 고프먼의 용어로 말하자면, 행위자는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를 전략적 목표로 염두에 두면서 특정 행위를 수행한다. 목적론적 행위에서는 인지와 신념 그리고 의도가 기 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드라마투르기 행위에서는 “바람이나 감정 이 기본적 위치를 차지한다”(Haberamas, 1984:91). 게다가 목적론적 행위에서는 진리와 유효성에 기초해 판단을 내리지만, 드라마투르기 행위에서는 성실함이나 정직함, 진정성에 따라 판단이 이뤄진다. 하버마스는 포퍼의 셋째 세계(“객관적 사고 내용의 세계”)를 행위 론적으로 새롭게 해석해 “규범적으로 규제된 행위(normatively regulated action)”라는 것을 만들었다. 하버마스는 이행위 개념을 다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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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설명한다. “환경에 자신 외에 다른 행위자가 존재한다. 따라서 고 립된 행위자의 행동이 아니라 공통 가치에 기초해 행위를 정하는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을 염두에 둔다.… 각각의 행위자는 어떤 일정한 상황 에서 규범이 적용되는 조건이 있으면 그 규범을 따른다.(혹은 그 규범 을 어긴다.) 여기서 규범은 하나의 사회집단 안에 존재하는 어떤 합의 를 의미한다. 어떤 집단의 모든 구성원에게는 일정한 규범이 있고, 그 규범에는 타당성이 있다. 구성원은 일정한 상황에서 타인이 그 공동체 가 정한 규범에 따라 행위를 실행하는지(혹은 그만두는지)를 예상할 수 있다. 규범에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Habermas, 1984:85). 행위에서 ‘규범’이란 개념은 사회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역 할이론’을 기초로 한다. 규범 개념에서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은 진리와 유효성도 아니고 성실함이나 정직함, 진정성도 아니다. 규범 준수의 여 부에 따라 행위를 판단한다. 다시 말해, 구성원들은 “예상한 사건이 일어 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인지적 감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행동 을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는 규범적 감각을 가진다”(Habermas, 1984:85). 하버마스는 오직 세 가지 행위 유형만을 기술했지만, 넷째 유형인 “의사소통적 행위”야말로 큰 중요성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의사소통 적 행위는 대인 관계에 놓여 있다. 또한, 언어나 언어 외 수단을 사용해 발화(發話)와 행위가 가능한 두 사람 이상의 주체 간 상호작용을 가리 킨다. 행위자들은 타인에게서 동의를 얻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조정한 다. 이때 행위자는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과 자신의 행위 계획에 먼저 이해를 얻고자 한다.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핵심 개념은 합의를 얻을 수 있는 상황 정의(definition of situation)13에 관한 협상을 의미 한다”(Habermas, 1984:86). 처음 세 가지 행위 유형-기본적으로 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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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안한 세 가지 세계에 각각 대응한다-과는 대조적으로 의사소통 적 행위는 세 가지 세계와 동시에 연결점을 지닌다. 또한 세 가지 행위 유형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기준과 달리 의사소통적 행위는 이해에 도 달하는가라는 기준에 따라 판단이 이루어진다. 하버마스는 사회적 행위 유형을 분석하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논점 을 사용했다. 내가 그의 복잡하고 다양한 논점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 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앞서 짧은 개관에서 명백해진 것이 있다. 행위를 어떻게 기술하고 설명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가정이 있고, 이것 으로부터 다른 행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가정은 ‘분석 방법’과 ‘분석단위’로 무엇이 적절한지와도 연결된다. 한 가지 분명한 가르침은 무엇을 행위로 보는지(행위 유형에 관한 전제)를 명확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해야 하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해 중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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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정의’는 공동 인지 활동에 관여한 각각의 참가자가 만들어 내는 능동적 장면 해석
과정과 해석의 산물을 의미한다(Park & Moro, 2006). “교수회의를 예로 들어보자. 일반 적으로 교수회의는 대학교에서 발생하는 문제 해결과 의사결정의 장면이라 해석할 수 있 다. 그런데 일부 참가자에게는 휴식의 장이 될 수도 있고,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는 ‘일의 장’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교수회의뿐 아니라 현실의 어떤 활동 장면도 복수 의, 때로는 양립할 수 없는 상황 정의가 드물지 않게 이루어진다”[D. S. Park & Y. Moro(2006), Dynamics of situation definition, Mind, Culture, and Activity, 13(2), pp. 101~129].-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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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매개된 행위’인가? 이 책에서 나는 사회문화적 접근 방식을 제안할 것이다. 사회문화적 접 근 방식은 하버마스가 목적론적 행위라고 표명한 것과 몇 가지 연결점 을 지니는 행위의 형식을 다룬다. A. N. 레온티예프가 주창한 활동이론 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는 목표지향적이다(Leont’ev, 1975; 1981). 따라 서 목적론과 관련된다. 그런데 레온티예프의 ‘행위’는 하버마스의 목적 론적 행위와는 다르다. 레온티예프의 접근 방식은 ‘사회·문화·제도 적 상황으로부터 고립되어 행위하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 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14 또한 목표와 수단 사이에 확실한 구분이 있다는 것 역시 상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이 책의 부제인 ‘매개된(mediated)’이라는 수식어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인간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도구와 언어 같 은 ‘매개 수단’을 이용해 성립한다. 이러한 매개 수단은 개인의 행위 형 성에 본질적으로 관여한다.15 이 생각에 따르면, 행위와 매개 수단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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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행위’라는 개념에는 늘 특정한 공동체 구성원의 과거 모습과 현재 모습, 앞으로 모습, 그리고 이전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 있을 사회·문화·역사적 인공물 혹은 도구가 상정 되어 있기 때문이다.-역자 주 15
우리의 의식이 매개 수단을 통해 형성된다는 생각은,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대자적 존재’인 인간을 분석단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즉자적으로 충만해 있 는 폐쇄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결핍’으로 나타나며, 의식이 필연적으로 사물을 지시 한다는 사실에서 이 결핍의 형식이 정해진다. 그러므로 대자적 존재로서 인간 본질인 의 식은 스스로를 벗어나는 탈자성(脫自性) 때문에 존재의 폐쇄적 충만성을 포기한 채 영원 한 결핍태로 머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김영민(1992), 컨텍스트로, 패턴으로, 134쪽, 문학과지성사].-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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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적으로 구별이 가능하고 그 구별은 유익하다.16 그런데 행위와 매개 수단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 최소한의 분석단위다. 따라서 행위자를 “개 인(individuals)”이라고 하기보다 “매개-수단을-갖고-행위하는- 개인[individual(s)-acting-with-mediational-means]”이라고 말하는 것 이 더 적절하다. 즉, ‘누가 행위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매개 수단을 이용하고 있는 개인’이 된다.17
왜 ‘목소리’인가? ‘목소리(voice)’는 러시아의 문학 연구자이자 기호학자, 철학자인 미하 일 바흐친이 만든 개념이다(Bakhtin, 1981; 1984; 1986). 목소리는 시 각적 신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바흐친에 따르면, 목소리는 “인격으 로서 목소리”, “의식으로서 목소리”라는 말이 내포하듯 아주 광범위한 현상을 포함한다(Holquist & Emerson, 1981). 내가 이 개념을 사용하 는 데에는 비고츠키와 바흐친 사이에 공유한 세 가지 기본 생각이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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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분석적으로 구별이 가능하다 해서 우리의 실제 행위가 매개 수단과 분리해 일어 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역자 주 17
‘매개 수단을 이용하는 개인’은 ‘사회문화적 사이보그’라 바꿔 말할 수 있다. 홀로 피아노
를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주자의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이라는 도구 위를 달리고, 눈은 악보라는 기보(記譜) 시스템의 정보를 입력한다. 음악은 ‘지금 여기’에서 연주자 홀 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듣는 음악은 작곡가와 피아노, 피아노 제작자와 조율사, 그리고 연주자와 악보, 연주 기술 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집합체’의 한 단면이다. 즉, 피아노 연주자의 주체성은 사회적·문화적·역사적 생태학의 지평 위에서 펼쳐진다. 이 런 의미에서 매개 수단을 이용하는 연주자는 ‘사회문화적 사이보그’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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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다. 첫째, 인간의 정신활동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행위를 매개하 는 기호 장치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Wertsch, 1985c). 둘째, 인간의 정신기능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설령 단 한 명만 있고 그 개인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과정이라도, ‘목소리’ 라는 개념을 사용해 그 개인의 내적 심리 과정 안에 커뮤니케이션 활동 을 포함하는18 것으로 포착할 수 있다. 셋째, 인간의 정신기능은 발생적 혹은 발달적 분석에 의해서만 제 대로 이해할 수 있다. 비고츠키와 바흐친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나 실 천이 개인 내부의 정신기능을 파생시킨다고 믿었다. 이 둘의 생각은 미 국의 프래그머티스트인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생각(Mead, 1934)과 동일 하다. 두 사람은 미드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기원은 사회적이고, 시간 적으로도 개인보다 선행한다. 즉, 의식의 개인적 차원은 파생적이고 이 차적인 것”이라 확신했다(Vygotsky, 1979:30).19 이런 맥락에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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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과정을 사회적 지평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활동과 연관 짓는 바흐친과 비고츠키의 관점을 철학자 김영민은 ‘물듦’이라 표현한다. 김영민은 심리적 과정과 사회적 지평의 역동성을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표현한다. “학인들의 고질 인 지적 허영과 냉소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도 타인이 얼마나 깊고 넓게 자신의 존 재에 구성적으로 관여하는지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나’의 태초에 ‘너’ 가 있었다! 무릇 공부를 하는 자, 물듦을 피할 수 없다. 독창(獨創)의 조건일지라도 그것은 ‘독립’이지 ‘고립’이 아니다. 물듦을 피할 수 없다면 바로 그 한계를 조건으로 승화시켜야
하며, 물듦의 조건을 슬기롭게 헤아려 근기 있는 실천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김영민 (2010), 김영민의 공부론, 47~48쪽, 샘터].-역자 주 19
‘의식의 기원은 사회적이다’라는 비고츠키의 명제는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활
동’하는 것이라 풀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명제는 개인적 차원(예컨대, 존재)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사회적 차원(활동)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식인들의 습벽과 대치된다. 이러 한 상식인의 습벽을 뒤집는 김영민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 보자. “무엇이 ‘활동’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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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비록 정신기능이 개인 안에서 일어나지만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활 동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속 상기시켜 준다. 목소리 대신 하버마스의 드라마투르기 행위에서 살펴본 ‘역할 (role)’이란 개념을 사용할 수도 있다. 결국 ‘인격으로서 목소리’는 어떤 특정한 관점이나 입장을 가진 특정한 문화적, 사회적 범주에 속하는 사 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역할이라는 개념 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버마스의 주장대로, 역할은 인간 행위의 성질에 관한 어떤 특별한 가정과 연결되어 있다. 이 행위에 대한 분석적 접근 방식은 이 책의 기본 생각과는 다르다. 따라서 양자 간 혼동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매개된 행위’에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과정과 개인의 심리 과정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가정이 깔 려 있다.20 이러한 생각에는 목소리 개념이 큰 도움이 된다. 끝으로, 나
서는 우선 그 무엇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발상은 과학적 실재론과 인과율에 젖어 있는 상 식인들의 습벽이라 볼 때, 의식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채 그 ‘활동’을 말하는 것은 모순 인 듯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느낌은 사안을 전도(顚倒)한 탓에 생긴 것이다.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인 양 의식의 존재를 말해 온 것은, 의식의 실제 활동을 접한 상식인들이 물리적 일상 경험을 바탕으로 ‘활동→존재’의 방향으로 역추론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활동의 유무가 곧 존재론적 위상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무엇인가가 ‘존재’한 뒤 이것이 나중에 ‘활동’한다는 논리는 물리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것이지만, 현실을 구성하는 유일한 논리는 아니다. 가령, 화면 위 영상을 생각해 보자. 영사기로 영사(映寫)하는 동안 영상은 한때 우리가 활동사진이라 불렀듯이 ‘살아(活) 움직인다(動)’. 하지만 영사가 중단되는 순간 영상은 자동적으로 소멸된다. TV
는 꺼져도 수상기는 남아 있고, 영상은 사라져도 스크린은 남아 있다. 하지만 영상의 ‘활 동’이 중단되면 영상도 자동적으로 소멸되어 그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 즉, 영상은 먼저 존재한 뒤, 존재하는 그 ‘무엇’이 나중에 활동하는 식의 현실 구조를 갖지 않는 것이다. 당 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존재하지만 그 사랑은 ‘활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듯, ‘활동’이 끝난 영상이 어딘가에서 말없이 쉬며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
는다. 사랑이나 영상은 순수한 활동이며, 또 활동뿐이기 때문이다”[김영민(1992), 컨텍 스트로, 패턴으로, 51∼52쪽, 문학과지성사].-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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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바흐친의 생각에 기초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과정과 심리 과정이 ‘목소리들의 대화성’으로 포착된다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이때 ‘대화성 (dalogicality)’이란 화자가 말을 발화할 때 적어도 우리가 두 가지 목소 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할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대화성, 다성성(多聲性, multivoicedness)을 담아내는 데 충분하지 않다.
왜 ‘다성’인가? 하나의 목소리보다 여러 목소리(voices), 즉 ‘다성(多聲)’을 선택한 것은 문제에 접근할 때 현실 세계를 표현하는 복수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흐친이 대화성에 주목한 것은 한 가지 이상의 목소리를 상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 활동에서 “이종혼교성(異種混交性, heterogeneity)”(Tulviste, 1986; 1987; 1988)이라는 개념은 어떤 상황에서 일 어나는 사태와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고 그것을 최선의 방법이라 간주하는 민족중심주의적 관점과는 다르다. 이종혼교성은 왜 특정한 종류의 말21과 사고 활동(다성) 형식이 다른 말과 사고 활동 에 우선해 특정한 상황에서 나타나는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소유 메타 포에 기초해, 즉 개인이 개념과 기능을 사용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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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사회를 쉽게 이분법적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역자 주 21
“지금 몇 시입니까?” “11시 50분입니다.” “참 잘했어요.” 교실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
는 대화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누군가에게 시간을 물어봤다면 아마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갈 것이다. “지금 몇 시입니까?” “11시 50분입니다.” “고맙습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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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데에 초점을 둘 때 왜 이 문제에 답을 제공하지 못하는지도 알려 준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목소리가 어떻게, 왜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 게 되었는지, 즉 왜 그것이 어떤 특정한 사태에서 “특별 취급(특권 화)”(Wertsch, 1987)을 받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왜 ‘마인드’인가? 이 책에서는 심리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인지(cognition)’가 아니라 ‘마 인드(mind)’를 사용한다. 넓은 범위의 심리적 현상을 통합하고 싶은 나 의 바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고츠키와 바흐친처럼, 나 역시 마인드의 과정을 분석할 때 그것을 몇 가지 측면으로 분리하는 것이 전 체 의미나 성질을 잃어버리게 만든다고 믿는다. 실제로 내가 언급해야 할 관심 주제 중 많은 부분은 보통 인지나 인지 발달이라는 이름으로 고 려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자기(self)’나 ‘정서(emotion)’ 같은 인간의 정 신생활 중 다른 측면에도 관심을 둠으로써 논의가 적절하게 흘러가기 를 희망한다. 마인드와 매개된 행위를 생각하는 것은 진공 상태에서 행위하는 개인과 결코 연결될 수 없다. 그레고리 베이트슨(Bateson, 1972)과 클 리퍼드 기어츠(Geertz, 1973)의 관점을 빌리자면, 적어도 두 가지 의미 에서 마음은 “피부를 넘어 확장한다”. 첫째, 마인드가 사회로 확장된다 는 의미다. 둘째, 마인드가 매개라는 개념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첫째 의미를 살펴보자. ‘마인드’와 ‘정신 행위(mental action)’라는 용어는 개개인은 물론 2자 관계(dyad), 더 큰 집단을 논의할 때에도 사 용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회심리학에서 이미 한물 지나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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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억과 추론 활동 같은 정신 활동이 사회적으로 분산된 (distributed) 것이라는 비고츠키, 브루너, 허친스 같은 연구자들의 통찰 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다(Vygotsky, 1978; 1987; Bruner, 1986; Hutchins, 1993; LCHC, 1983).22 둘째 의미를 살펴보자. 정신기능은 우리가 평소 과제 수행에 이용 하는 매개 수단에 따라 형성되거나 규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여기 자동차 엔지니어가 한 명 있다. 그는 자동차 차체를 설계할 때 필 요한 옵션을 몇 가지 만들었으며, 그중 어느 것을 사용할지 결정하기 위 해 컴퓨터를 사용한다. 엔지니어의 정신 행위를 그 행위를 매개하는 기 계 장치에서 분리해 버린다면 의미가 있을까? 그 행위가 매개 수단과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물론 정 신 행위 하나하나에 개별적 순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최종 관심도 이 행위를 수행하는 개인의 심리적 과정에 있다. 그러나 이 심리적 과정에 대해 설명할 때조차 매개의 어떤 형태(예를 들면,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항상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을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은 대부분 이러한 마인드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한 설명으로 채 워질 것이다. 내가 마인드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첫째로 이것이 사회 적으로 분산되어 있다는 생각과 둘째로 이것이 매개 수단과 밀접한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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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HC는 마이클 콜(Michael Cole)과 그의 동료들이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
퍼스에 만든 ‘Laboratory of Comparative Human Cognition(비교인간인지연구소)’의 약어다. 비고츠키학파의 논문을 발간했으며, 현재 ≪Mind, Culture and Activity≫를 발 행하고 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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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마 인드라는 개념과, 마인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것 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 두기 위해서다.23 마인드가 단지 개인이 갖고 있 는 뇌와 같은 실체가 아니라, 마인드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사회적, 매 개적 성질을 정의하려는 것이다. 설령 개별적 개인의 정신 행위(예를 들어, 기억)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사회적이다. 컴퓨터와 언어 혹 은 수 체계 같은 도구에 도움을 받으면서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마인드에 접근하면 개개인의 심리적 과정과 사회문 화적 상황을 연결 짓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심리학 이 론에서 사용하는 분석과 방법 체계는 내가 제시한 것과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이론적인 제약이 있다고 해서 이 책에서 진술한 관점이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피아제가 말하는 스키마의 형성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 지는 동화(assimilation)와 조절(accommodation)을 살펴봐도 사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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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의 ‘마인드’에 대한 관점은 마인드를 실체(substance) 혹은 그 일종으로 이해하는 서 구의 실체주의적 사고로 소급해 해명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김영민은 서구의 주류 심리학이 마음을 닫힌 공간에 있는 어떤 실체로 보는 관념을 비판했다. 실로 타당하다. “구태여 서구의 근대 자연과학적 물체관이 심리학에 미친 영향을 세세하게 고려하지 않
더라도 마음을 명사로, 대상으로, 그리고 상자로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명사는 소유 개념의 근간이며 경제 개념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별 로 경제적이지 못한 동양인의 사유 체계에서는 마음을 무슨 금고나 창고로 이해하는 경 우가 드물다. 혜가(慧可)가 달마를 졸랐다. ‘제 마음이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하 건대 제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 이에 달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 너의 마음 이라는 것을 내놓아 봐라. 그러면 내 그 마음을 편하게 해 주겠다.’ 사면의 벽이 열려 버리 면 축적해 둘 장소라는 개념은 별안간 사라지고 만다. 벽이 허물어지는 경험과 명사가 동 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경험, 그리고 나와 세계를 이간질하던 껍질이 벗겨지는 탈각 의 경험은 마음을 축적과 소유의 등기부쯤으로 치부하던 익숙한 관습을 낯설게 만든다” [김영민(1996), 철학과 상상력, 76쪽, 시간과공간].-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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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론적 고유성 같은 것은 존재하 지 않는다. 물론 피아제는 스키마를 개인이 물리적 현실과 상호작용하 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피아제 학파가 논리-수 학적 지식 구조와 과정(예를 들면, 가역성)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이 지 식 구조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범주에서 벗어난 것은 무시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말이다.
왜 ‘사회문화적’인가? 이 책에서는 ‘사회문화적(sociocultural)’이란 용어를 정신 행위가 어떻 게 문화적, 역사적, 제도적 지평 위에서 독특하게 발생하는지를 이해하 기 위해 사용한다. 문화적(cultural)이나 사회역사적(sociohistorical) 같은 다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개된 행위 연구에 중요하게 공헌한 영역과 학파가 있음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다. 또한 비고츠키와 그 학파의 공헌을 인식하자는 취지도 있다.(그들은 ‘사회문화적’보다 ‘사회역사적’이라는 용어를 통상적으로 사용한다.) 다 른 한편, 문화를 연구한 최근 몇몇 학파의 공헌도 인정하고 싶다.(내가 상정한 많은 학파는 자신들의 연구 영역에서 ‘역사적’이란 용어를 사용 하지 않는다.) ‘사회역사적-문화적(socio-historical-cultural)’이라는 용어가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이 용어는 너무 길다. 사회문화적이란 용어를 사용하면 자칫 역사적 차원을 대수롭지 않 게 여길 위험성이 있다. 비고츠키의 머릿속에는 ‘사회문화적’이란 용어 가 없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자신들이 비고츠키 아이 디어를 계승하는 후계자임을 자청하는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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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할 때 ‘문화적’이란 용어를 넣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 같다. 잘못하면 문화적 차이를 역사적 차이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비고츠키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고츠키는 헤겔, 마르크스, 뤼시앵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의 생각을 기초로 이론을 구축했는데, 지 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비교문화적 차이를 ‘비교역사적’24 차이로 다루었 다. 이 점이 비고츠키의 생각과 프란츠 보아즈(Franz Boas),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 그리고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 등 미국 문화인류학 전통에 기반을 둔 생각과 차이라 할 수 있다(Lucy & Wertsch, 1987).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단순히 사회과학 영역의 역사 연구자들만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콜과 스크라이브너 등 다른 연구자들이 주장 하듯, 심리학에서도 문화적 차이, 특히 서구 사회와 개발도상국 사회 간 차이를 역사적 발전 단계의 차이로 보는 해석이 널리 퍼져 있다(Cole & Scribner, 1974). 종종 서구 사회 속 아이의 추론 과정과 원시사회 속 성인의 추론 과정을 그대로 비교해 버린다는 것은 이런 가정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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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골자는 ‘역사주의’다. 시간적으로 나중에 나온 것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 역사주의적 생각이다. 따라서 비고츠키에게 가장 진보한 사고는 당시 유럽 지식인들이 수행한 이성적 사고였을 것이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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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츠키와 바흐친 이 책에서 내가 제안하는 접근 방식은 많은 이론가들의 노력에 빚진 것 이다. 특히 두 가지 이론이 중요한데, 비고츠키와 바흐친의 이론이다. 두 사람 모두 소련에서 살았다. 이들은 동시대에 살았지만 개인적 교류 는 없었던 것 같다(Clark & Holquist, 1984). 레오니드 라지홉스키는 비 고츠키가 바흐친의 논문을 읽었다고 주장한다(Radzikhovskii, 1982). 그러나 비고츠키가 바흐친에게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지적 환경에서 생활했고 연구했다. 따 라서 현상을 보는 방식이나 생각에서 아주 유사한 몇 가지 점이 자연스 럽게 나타난다. 나는 두 사람의 생각을 각각 특정한 관심 영역을 넘어 하나의 이론 틀 안에서 연결 지으려 한다. 이 책의 기본 전략은 다음과 같다. 비고츠키의 저작을 통해 사회 문화적 지평에서 개인 ‘마인드’의 발생을 살피는 사회문화적 접근 방식 을 검토한다. 덧붙여, 기호를 매개로 삼아야만 성립 가능한 인간의 행 위에 관한 비고츠키의 주장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바흐친의 개념들을 포함시킨다. 특히, 발화(utterance), 목소리(voice), 사회적 언어(social language), 대화(dialogue)에 주목해서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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