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방송의 거인들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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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세계 방송의 거인들 김우룡·김해영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방송의 금자탑을 쌓은 사람들

오늘날 방송이 있기까지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어느 한 사람이 발견하거나 발명한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로 유사한 실험이 반복되다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오늘날과 같은 방송의 모 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라디오 방송의 효시로 1920년 개국한 미국 의 KDKA를 든다. 그 이유로는 ① 전파를 이용했고 호출 부호(call letters)를 갖고 있었고 ② 정부의 허가를 얻은 데다 ③ 정규적인 방송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 니다. ④ 정규 편성을 하였고 ⑤ 청취대상이 일반 공중이 었다는 점 때문에 ‘최초의 방송’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 나 유럽의 여러 나라는 제 각각 자국이 세계 최초로 전파 를 쏘았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그 예다. 무 선전파를 세계 최초로 찾아낸 마르코니는 이탈리아 출신 이었고, 공영방송은 영국에서 꽃피웠다. 사실 방송이 어느 나라에서 시작했는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방송이 발전해 온 역사적인 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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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오늘의 방송을 이해하고, 방송의 발전 방향을 예측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방송이 가능한 것은 공기 중에, 대기 중에 ‘전자기파 (electromagnetic radiation)’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흔히 전파(airwave)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전파는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장이 일어나듯이 공 중에 일정한 사이클을 일으키면서 멀리 퍼져나간다. 이러한 전파의 대역을 일정한 길이로 잘라서 통신과 방 송에 이용한다. 파장이 1초에 얼마씩 일어나는가를 킬로 사이클(Kc)로 표시한다(1초에 1000번 파장이 일어날 때 1 킬로사이클이라고 함). 단파, 중파, VHF, UHF 등이 그 전 파 대역을 일정 길이로 잘라서 붙인 이름이다. 예를 들어 KBS 제1라디오의 주파수 97.3MHz는 1초에 전파의 포물 선이 9730만 번 일어난다는 뜻이다. 원래 주파수의 표시 단위인 사이클은 나중에 헤르츠(Hz)로 바뀌게 된다. 이 주파수의 존재를 알아낸 독일의 천재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를 기리기 위함이다.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으로 일컫는 미국 피츠버그 의 KDKA는 1920년 11월 2일 개국했다. 이때 개국 기념 프로그램의 하나는 워런 하딩(Warren Harding)과 제임스 콕스(James Cox)의 대통령 선거 결과 보도였다. 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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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뒷날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정치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 에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발명이 기술로, 기술이 혁명으로 방송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초기 라디오 녹음기의 등장 은 방송 매체의 진가를 높이는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다. 예컨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 실황을 녹 음한 뒤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자 청취자들은 큰 충격에 휩 싸였다. 전쟁 실황을 있는 그대로 안방에 전해지면서 전 쟁은 소위 ‘안방전쟁(living room war)’으로 바뀌었다. 방 송의 임장감(immediacy, 臨場感)을 여실히 보여 준 사건 이었다. 또한 라디오 방송의 사실감을 보여 준 역사적 사건의 하나는 1938년 방송된 공상과학 드라마 <세계들의 전쟁 (War of the Worlds)>의 한 편에서 화성인이 내습하는 내 용이 방영된 것이다. 오슨 웰스(Orson Welles)가 직접 각 색하고 출연했던 이 드라마는 화성인들이 지구를 침입했 다는 내용을 다루었는데, 많은 청취자들이 실제로 화성인 들이 침입한 것으로 착각하고 공포에 질려서 피난을 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뉴욕타임스≫는 ‘라디오 정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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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드라마를 진짜로 알고 공황에 빠지다’라는 톱기사를 실었다. 그 뒤 마이크에 필터를 사용한다거나 에코체임버(ecochamber)가 등장함으로써 라디오 드라마에는 큰 변혁이 일어났다. 에코체임버는 에코룸이라고도 하는데 라디오 에서 극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낼 때 이용하는 음향 장비다. 에코체임버에서 내보낸 음이 실내의 벽, 천 장, 마루 등에 반사되어 다시 마이크에 잡히면 반향음이 된다. 라디오 방송에서 녹음기가 혁명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텔레비전에는 녹화기(videotape recording)가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36년 BBC가 세계 최초의 TV 정규 방송을 시작한 이래 거의 20년간 TV는 생방송 아니면 필 름을 사용했다. 영상을 기록하는 가장 오래된 기술이 영 화(film)였기에, VTR(videotape recorder)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녹화한 영상을 영화적으로 만드는 ‘키네스코프 (kinescope recording)’ 기법이 한동안 이용되었다. 1970 년대까지만 해도 일부 유럽 텔레비전의 음악 프로그램과 축구경기 중계에는 키네스코프 녹화가 많았다. TV 브라 운관 앞에 영화 카메라를 놓고 TV 프로그램을 필름에 옮 기는 장치였다. 그러나 1957년 미국 암펙스(Ampex)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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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TR를 선보이자 텔레비전 방송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생방송이 사전 제작의 녹화방송으로 바뀌게 된 다. 프로그램이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완성도가 높아졌다. 물론 뉴스나 스포츠중계 그리고 일부 쇼 프로그램은 일부 러 생방송으로 내보내지만 사전 제작할 수 있는 녹화 장치 의 개발은 TV의 제1 혁명이었다. 더욱이 초기 녹화 장치는 편집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녹화 중에 NG(no good, 녹화가 잘못됨)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TBC(time base corrector)라고 불 리는 정밀한 편집 장치가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VTR의 개발을 텔레비전의 제1 혁명이라고 한다면 제2 혁명은 위성의 등장이다. 최초의 위성은 소련의 스푸트니 크(Sputnik) 1호였다. 1957년 10월 4일 발사된 사상 최초 의 인공위성은 우주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스푸트니 크의 성공적 발사는 미소 양국 간에 ‘우주전쟁’을 촉발하 게 되었다. 미국의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집 권하자 미국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을 설립했다.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이 집권하던 1950년대가 조용하고 보수적인 무관심의 시대라고 한다 면 뉴프런티어(new-frontier)를 내세운 젊은 케네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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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된 1960년대는 행동주의적 개혁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닉슨(Richard Nixon)에 비해서 정치적인 경륜이 매 우 부족했던 케네디는 TV 토론의 힘으로 당선되었다. 그 는 젊고 행정 경험이 미숙하다는 비판 속에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 위한 강력한 무기가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34세의 젊은 미노(Newton Norman Minow) 를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초기 실험 위성은 지구 상공 한 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 문에 지상과 동시 통신을 할 수 있는 시간은 20분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지 역과 송수신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위성이 커버하는 지상의 범위[footprint: 전파를 쏘아 올리 는 지점 곧, 업링크(up link)와 그 전파를 받을 수 있는 지 점 곧, 다운링크(down link)의 폭]를 계속 지키고 있지 못 하기 때문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궤도정지 위성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정지’된 위성이 아니라 지구와 같은 속 도로 ‘자전’하는 위성을 궤도정지 위성이라고 부른다. 지 상에서 보면 지구 상공 일정한 위치에 계속 위성이 정지 상태로 놓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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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다. 위성을 지구의 자전 속도와 똑같이 돌고 있도록 정지위 성의 아이디어를 세계 최초로 찾아낸 사람은 영국의 공상 과학 소설가이자 수학자인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 였다. 그는 1945년 ≪무선세계(Wireless World)≫에 기 고한 글에서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통신망을 갖추려면 인 도양, 대서양, 태평양 상공에 세 개의 위성을 쏘아올리고, 이 위성들이 지구와 같은 속도로 24시간 돌고 있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적중했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적도 상공 3만 6000킬로미터 상공의 궤도를 클라 크 띠(the Clarke Belt)라고 이름 했다. 클라크 띠에 위성 을 쏘아 올려 지구와 같은 속도로 돌게 만든 본격적인 궤 도정지 위성은 얼리버드(Early Bird)였다. 얼리버드는 1965년 4월 발사된 인텔샛(Intelsat) 1호의 애칭이다. 역사 적으로 보면 1964년 도쿄올림픽은 최초로 위성중계되었 으나 매우 제한적이었고, 전면적인 위성중계가 가능했던 올림픽은 1972년 뮌헨올림픽이었다. 제3의 TV 혁명은 ENG의 등장이었다. ENG는 소형 녹 화기를 가리킨다. 1970년대만 해도 텔레비전 중계차는 초 대형 버스에다 발전기까지 달고 다녔다. 번거롭고 불편하 기 말할 수 없었다. 1972년 일본 소니가 개발해 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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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였다. ENG가 ‘Electronic News Gathering(system)’ 의 약자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겠지만 사실 초기에는 뉴 스 취재 수단으로 개발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뉴스 취 재에는 주로 16mm 필름이 이용되고 있어서 촬영·인 화·편집 등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ENG는 값싸 고 신속하고 선명한 화면으로 취재의 혁신을 가져왔다. 비록 초기에는 카메라와 녹화기가 분리돼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일체형이 등장하고 계속해서 소형화를 이룩 했다. 비록 ENG가 뉴스 취재용으로 개발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뉴스뿐만 아니라 드라마, 쇼, 스포츠, 다큐멘터 리 등 모든 장르에 폭넓게 활용되면서 TV 제작의 표준 도 구가 되었다.

방송의 초석을 다진 사람들 이 책에서는 세계 방송사에 큰 족적을 남긴 10명의 위대한 인물을 다룬다. 오늘날 우리가 집에서 보고 있는 텔레비 전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노고가 있었 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 가되는 인물 10인을 뽑아 보았다. 사람에 따라서 선정 기 준은 크게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들은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다음의 10인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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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방송이 가능하도록 초석을 놓은 사람이 누구인 가? 라디오 이론의 개척자로 불리는 헤르츠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라디오는 원래 무선전파를 뜻한다. 즉, 무선 (wireless)의 동의어였다. 그것이 뒤에 라디오 방송의 뜻 으로 보통명사화되기까지 헤르츠의 초기 업적이 크게 기 여했다. 더구나 그의 이름 헤르츠가 주파수 단위를 가리 키는 용어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흔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합쳐서 방송 (broadcast)이라고 부른다. 방송은 곧 ‘넓다(broad)’와 ‘뿌 리다(cast)’의 합성어다. 농부가 들판에 씨를 뿌리듯이 사 상과 오락, 아이디어, 뉴스를 불특정 다수에게 보낸다는 의미다. 미 해군은 1912년 명령을 무선으로 한꺼번에 여 러 군함에 보낸다는 뜻으로 방송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 하기 시작했다. 둘째로 다룬 인물은 존 리스(John Reith)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나 BBC 혹은 공영방송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BBC가 상업회사로 출 발해 공영으로 전환한 뒤 총국장을 맡아서 BBC의 기틀을 놓았다. 총국장(Director General)은 우리로 치면 사장에 해당되는 직함이다. 리스는 제도는 사람이 만들지만 제도 의 정신은 위대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갈파했고, ‘BBC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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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아니라 정신’임을 실천했다. 리스는 6척 장신의 스코틀랜드 출신 엔지니어로서 취임 초기만 해도 방송의 문외한이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그를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의 소설 제 목에 빗대어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고 불 렀다고 한다. 리스는 라디오 방송이 대중매체로서 무한히 큰 가능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내다본 인물이었다. 그는 처 음 BBC가 상업회사일 때 사업가들에 의해 고용되었으나, 방송을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발상을 단호히 물리쳤다. 이 에 “오락만을 위해 이 위대한 발명품을 이용하는 것은 라디 오의 위력을 매춘하는 행위와 같으며, 청취자의 인격과 지 성을 모독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방송관에 대해 󰡔영국방송사(History of Broadcasting in the United Kingdom)󰡕를 저술한 브릭스(A. Briggs)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그는 방송의 정치적 유용성 을 깨닫고, 방송을 유권자를 계몽하는 민주주의 통합 요소 의 하나로 보았다. 둘째, 사회의 타락을 우려해 종교적인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다. 셋째, 교육을 방송의 주요 사 명으로 보았다. 넷째, 방송은 공중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 섯째, 그는 방송의 목적은 영리추구가 아니라 공공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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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어야 하며 이 목적을 위해 방송인들은 직업적인 사명 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셋째로 소개하는 인물은 에드윈 암스트롱(Edwin Armstrong)이다. 공군 통신대 소령 출신인 그는 FM의 발 명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AM을 표준방송이라고 하면 FM 은 음악방송이었다. 공전(空電) 현상이 없이 음질이 깨끗 한 FM의 발명은 라디오 발달사에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 었다. 기술 개발로 많은 특허를 획득했던 암스트롱은 백 만장자가 되었으나 수많은 소송에 휘말려 빈털터리가 되 고 마침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과학자였다. 1933년 암스트롱은 FM 연구 성과를 최대의 라디오 방 송사업자였던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에 공 개했으나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당시 RCA는 AM 방식 에 막대한 투자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들이 만든 송신기 와 수백만 대의 라디오 수신기가 판매돼, 사용 중이었고 투자비용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라디오는 일용품이 되었지만 구매의 중요한 선택 요소는 품질이 아 니라 가격이었다. RCA는 소비자들이 더 나은 음질에 관심 을 가지기보다는 더 싼 수신기를 구매한다고 내부 결론을 지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더 좋은 기술이 채택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의 시장을 경제적, 정치적 논리가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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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온 예는 수없이 많았다. 넷째로 데이비드 사노프(David Sarnoff)를 소개된다. 그는 사환에서 출발하여 RCA 회장까지 오르는 입지전적 인 인물이다. 전파를 이용해 음악을 보내는 라디오 방송 을 시작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한 것도 사노프였다. 그는 ‘미국 텔레비전의 아버지’라고 불 린다. 다섯째로 최초의 종군 기자 에드워드 머로(Edward Murrow)를 소개한다. 그는 미국인들의 안방에 전쟁의 현 장을 전한 CBS의 유럽 특파원이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보도 스타일을 확립한 진정한 언론인으로 꼽을 수 있다.

방송의 중흥기를 이끈 사람들 여섯째 인물은 ‘TV 저널리즘의 제왕’ 윌터 크롱카이트 (Walter Cronkite)다. 크롱카이트는 앵커맨(anchorman) 이란 칭호를 처음 쓰기 시작한 인물이다. 앵커맨이란 미 국 텔레비전의 최대 행사로 꼽히는 민주 – 공화 양당 전당 대회 중계를 위해 당시 CBS 보도국장이던 시그 미켈슨 (Sig Mickelson)이 만든 조어였다. 몇 시간씩 지속되는 행 사 현장의 중계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안가에 닻 (anchor)을 내린 배처럼 프로그램이 원만히 진행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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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역할을 하는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다. 크롱카이트는 매년 미국을 움직이는 인물 10인에 포함될 만큼 국민의 신 뢰와 사랑을 받았던 앵커였다. 존슨 대통령의 러닝메이트 로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끝까지 저널리즘 현장을 지킨 참 언론인이었다. 일곱째로 CBS 최장수 앵커맨 댄 래더(Dan Rather)를 소개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래더가 바로 그 런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공사장 잡역부였고 어머니는 여 급이었다. 이름 없는 지방대학 출신으로 지방지 기자, 지 방 방송국 기자 노릇을 하다가 태풍 ‘칼라호’ 취재를 맡아 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출세가도에 들어서게 된다. 래더는 75세가 되던 2006년, 44년간 봉직한 CBS를 떠 났다. 메인 뉴스의 앵커직에만 24년간 앉아 있었다. NBC 의 톰 브로코(Tom Brokaw), ABC의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와 함께 TV 뉴스의 앵커 시대를 열었던 래더는 연전에 아스펜연구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해 “전통적 인 언론이 포위상태에 처해 있다”고 지적, 독립적인 언론 없이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번창할 수 없다며 버락 오바마 (Barack Obama) 대통령에게 독립 보도와 공공미디어에 관한 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그는 언론산업의 기업화, 정치화, 그리고 뉴스의 진부함이 뉴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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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면서 이 세 가지 요인이 뉴스를 안이하고 저질스럽게 만들고 있으며 위대한 미국의 저널리즘을 쇠락시키고 있 다고 비판했다. 여덟째로 윌리엄 팰리(William Paley)를 다룬다. CBS 의 회장을 지낸 팰리는 민방의 선구자라고 할 만하다. 공 영방송 못지않게 민영방송도 중요하다. 민영방송은 공영 방송과 보완 관계에 있다. 자유로운 표현과 창의력 개발 에 앞장서고 있으며 산업을 촉진시킨다. 일부 학자들은 민영방송을 사영(私營)방송이라고 불러서 그 순기능을 폄하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방 송도 산업화하고 글로벌화하는 시대에 민방이 방송산업 을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민영방송의 이윤 추구는 경영 혁신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방송의 창의성을 높이고 매너 리즘을 타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아홉째 인물은 프레드 실버맨(Fred Silverman)이다. 편 성의 귀재라고 부른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ABC 부사장, CBS 사장, 그리고 NBC 사장을 지낸 이색적인 인물이다. 시트콤의 개발, 미니시리즈 <뿌리(Roots)> 등 새로운 포 맷의 창안 등 세계 방송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타고난 방송인이다. 끝으로 방송의 질 향상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로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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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Newton Minow)를 소개한다. 케네디가 집권하자 불 과 34세에 미연방통신위원회의 수장이 되었다. 재임 기간 은 불과 2년. 그러나 공익의 개념을 확립하고 UHF 방송의 확대, 통신방송 위성 시대를 연 인물로 기록된다. 미노가 방송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은 저 유명한 ‘황무지 연설’ 때문이다. 세계를 바꾼 명연설 50선 에 포함될 만큼 반향이 컸다. 방송계의 판도를 바꾼 그의 업적도 황무지 연설 하나로부터 시작됐다. 다큐멘터리, 어린이 프로그램, 문화 교육 프로그램의 증가, 그리고 꼴 지 ABC가 선두 주자와 나란히 경쟁하게끔 만든 것도 그의 정책이었다. 재임 기간은 가장 짧았으나 미국 방송에, 아 니 세계 방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미노였다. 시 카고 NAB 연차총회에서 황무지 연설을 발표한 지 50여 년이 지났으나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TV 황무지’가 상존 하고 있다. 당시 황무지 연설이 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은 TV의 등 장으로 위기를 느낀 신문업계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텔레 비전의 지나친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데 미노의 연설이 매 우 유용한 도구였던 것이다. 방송계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노는 시청률 지 상주의도 비판했다. 그는 “시청률이 방송인의 노예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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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주인이 됐다”며, “신문도 구독률을 조사하고 있지만 신문 1면은 여전히 뉴스로 채워지고 있으며, 사설을 만화 로 대체하거나 실연한 사람에게 보내는 충고 따위로 지면 을 채우지 않는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실제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외에도 방송 발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은 수없 이 많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루고 있는 10인을 우선 살펴 봄으로써 100년 가까운 방송의 역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서 오늘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총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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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주파수의 발견자: 하인리히 헤르츠

하인리히 헤르츠는 위대한 독일의 물리학자로 전자파를 통해서 전기적인 신호를 보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로써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레이더의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는 또한 공기 중에 전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서 최초로 입증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전파의 주파수 단위를 사이클에서 ‘헤르츠’로 바꾸었다. 전파가 빛의 속도로 전달된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는 28세에 대학교수가 되었으나 패혈증으로 36세에 요절했다.


라디오 이론의 개척자 “우리의 의식 너머에는 실제의 사물들로 구성된 냉정하고도 낯선 세계가 존재합니다. 우리와 바깥 세계 사이에는 감각이 라는 협소한 완충 지대가 있을 뿐입니다. 이 협소한 영역을 거 치지 않고서는 두 세계 사이의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자신과 바깥세상을 모두 잘 이해하려면 이 경계 지역을 철저 히 탐구해야만 하며,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1891년 베를린 왕궁에서 행한 헤르츠의 기조연설 중).

방송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세계 방송사에 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있다. 라디오를 들 어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이름, 라디오 주파수 의 단위로 더 익숙한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다. 헤르츠는 185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로 개종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 는 의사로 집안 형편은 매우 유복했다. 학창시절 언어와 과 학에 재능을 보인 헤르츠는 뮌헨대학교를 졸업하고, 1880 년 베를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 1885 년 불과 28세의 나이에 칼스루헤 공과대학의 교수로 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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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

됐으며, 1889년 본대학교로 옮길 무렵에 일생일대의 사건 인 ‘전자기파(electromagnetic radiation)’를 발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만남 사실 헤르츠 이전 19세기에도 무선으로 움직이는 전자적 신호나 파동, 즉 전자기파의 존재를 언급한 사람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 지만 기존과 다른 형태의 전자기파가 존재하며, 이것은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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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선, 자외선, 가시광선 등과 유사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 라고 주장했다. 전파가 당시 밝혀진 파장의 범위를 벗어 나는 것이기에 입증할 수 없지만, 언젠가 그 존재가 밝혀 질 것이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헤르츠는 1879년 그의 조언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 (Hermann von Helmholtz)가 맥스웰의 가설을 검증하는 실험을 제안함에 따라 역사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값비싼 기자재를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클러크 맥 스웰의 가설을 어떻게 검증해야 할지 연구된 바가 전혀 없 다는 것이 문제였다. 포기하지 않고 몇 년에 걸쳐 연구에 필요한 비용과 기자재를 확보한 헤르츠는 간단한 가설을 세운다.

“만약 맥스웰의 가설이 옳다면, 특정 전자기파를 발생시킬 수 있는 장비를 고안함으로써 그가 말한 파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헤르츠는 검증을 위한 실험 장비를 직접 제작했 다. 그가 제작한 기구는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었다. 두 개 의 번쩍이는 금속 구체(球體) 사이로 방전 불꽃이 튀는 발 신기가 하나다. 이 방전 불꽃의 전하들이 움직이는 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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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力場)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맥스웰이 예측한 파동을 만 들어 내리란 것이었다. 다른 부분은 반대로 발생한 파동 을 검출하는 기구인데, 사각형의 철제 고리 형태였다. 파 동의 도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고리 중간에 작게 틈을 내어, 파동이 감지될 경우 그 틈에서 불꽃 방전을 일으키 게 설계한 것이다. 이 안테나처럼 생긴 장치가 곧 최초의 무선 수신기다. 1887년 즈음 어떠한 전선 같은 연결고리 없이 강당의 양쪽 끝에 놓인 헤르츠의 발신기와 수신기에서 작은 불꽃 방전이 일어난다. 멕스웰이 언급한 ‘공중을 가로지르는 파 동’의 존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헤르츠는 이 파동을 ‘헤르츠파’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곧 전자기파다. 헤 르츠는 1889년 독일자연과학진흥협회의 기조연설에서 이 순간의 흥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수신기에서 감지된) 불꽃은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할 정도 로 작아, 겨우 백분의 일 밀리미터쯤 될까 말까 했습니다. 그나마 수명도 백만 분의 일 초 정도로 짧았습니다. 이것을 관찰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완벽히 어 두운 방에서, 눈이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지면 볼 수 있습니 다. 이 가느다란 불꽃의 존재에 우리 실험의 성패가 달려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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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습니다.”

최초의 발견 이후 헤르츠는 전자기파와 관련된 다양한 실험을 지속해 나가는데, 이는 향후 무선통신 발달의 기반 이 된다. 헤르츠는 전파가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굴절과 반사가 가능하며, 일정하게 진동하는 ‘파동’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맥 스웰의 가설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지만, 실험을 통해 그 존재를 확실히 입증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실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확인 가능한 세계로 만듦으로써, 오늘 날 전파에 대해 알려져 있는 대부분의 기초 상식을 명확히 했을 뿐만 아니라 전신과 라디오 발명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헤르츠는 당시 그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 지 깨닫지 못했다. 다만 맥스웰의 예측이 옳았다는 사실 을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겸손한 자세로 일관했다. 특히 전자기파의 물리적 응용 범위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 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위대한 맥스웰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 것뿐이지요. 전자기파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존재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가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실용과는 다소 동떨어 진 물리학자라는 배경과 겸손한 성품 탓도 있겠지만,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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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해도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연구 결과를 잘 믿지 않았 기 때문인 듯하다. 헤르츠는 전파의 존재 자체를 입증하 는 데 좀 더 많은 공을 들여야만 했다. 아쉽게도 헤르츠는 전파를 발견한 이후 병마에 시달리 다가 1894년 패혈증으로 죽고 만다. 1892년 여름 단순한 감기인 줄로 알았던 병세가 악화돼 수술에 이르게 되고, 2 년여 여러 가지 합병증 증세에 시달리다가 1894년 새해 첫날 사망한다. 그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마르코니와 사노프가 꽃피우다 그의 사망 이후 비로소 실용적인 발명가들이 그의 연구를 응용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훗날 노 벨상을 수상한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바로 이탈리아로 이주한 아이리시 위스키 양조장 가문에서 태어나, 이탈 리아인의 성을 물려받은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7)다. 전신의 발명자로 알려진 마르 코니는 1895년부터 실험을 시작했는데, 최초의 실험 도구 는 헤르츠가 발명한 불꽃 파동을 생성하는 발진기(發振 器)와 거의 유사하다. 이 기구를 통해 800미터 떨어진 곳

에서도 무선 신호를 수신할 수 있음을 확인한 마르코니는 런던왕립연구소의 후원으로 새로운 중계기를 발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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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대서양 너머로 무선 신호를 주고받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실험의 성공은 전파가 굴절되어 지구의 표면을 따라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었다. 헤르츠파를 활용한 마르코니의 실험 이후 전자기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전기장 혹은 자기장의 진동 을 통해 생겨난 보이지 않는 파동이 대서양을 건널 정도로 강력한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강력하게 ‘외부로 퍼져나가 는(radiated)’ 파동이라는 의미로 ‘라디오(radio)’라는 명 칭을 사용하게 됐다. 대신 1906년 창설된 국제전기기술위 원회(International Electronic Commission)는 이를 발견 한 헤르츠의 업적을 기리고자 전파의 초당 진동수, 즉 주 파수를 나타내는 단위를 헤르츠(Hz)로 지정해, 국제적 표 준 단위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후 마르코니는 무선전신 회사를 설립하는데, 마르코 니 회사의 미국 지사(아메리칸 마르코니)에 근무하던 러 시아 출신 전신 기술자에 의해 비로소 본격적인 방송의 시 대가 열리게 된다. 1912년 타이타닉호의 침몰 시 무선 전 신을 받던 데이비드 사노프(David Sarnoff)가 세계 방송 사에 등장하게 된다. 그는 AM, FM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상용화에 힘썼으며, 후일 미국 NBC를 운영하는 등 방송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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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금자탑 36세에 요절한 과학자 헤르츠는 정작 자신이 발견한 전자 기파가 실용화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방송 분야보 다는 물리학에서 기존의 뉴턴 역학을 수정한 헤르츠 역학 체계를 수립한 공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후일 아인슈타 인이 설명하게 되는 광전 효과를 최초로 발견하기도 했다. 광전 효과란 빛의 입자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금속 등 물체 에 주파수가 높은 빛을 비추었을 때, 물질의 표면에서 전 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헤르츠의 발견은 단순한 과학사적 업적을 넘어 서 20세기에 전파가 가져올 거대한 사회적 혁신을 예고하 는 것이었다. 그는 전자기파의 발견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기는 거대한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이전에는 눈치도 채 지 못했던 수많은 장소에서 이제 우리는 전기의 존재를 알 아보게 되었습니다.…전기의 영역은 이제 자연세계 전반으 로 확장되었습니다.” − 1889년 9월 20일, 독일자연과학진흥협회에서의 기조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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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눈에 보이 지 않는 거대한 왕국을 발견함으로써 방송과 통신의 놀라 운 신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사후에 발간된 논문집 서문은 헤르츠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페러데이가 최초로 힘의 곡선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물리 수학자들을 화나게 한 이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수많은 실 험가와 이론가들이 등장해 물리학의 정립에 기여했다.…그 리고 19세기 끝 무렵에 세상에 발표한 헤르츠의 전기에 대한 논문들은 그중에서도 영원한 금자탑으로 남을 것이다.”

한편 그의 조카 구스타프 루트비히 헤르츠(Gustav Ludwig Hertz, 1887∼1975)는 보어의 원자 모형을 증명 해 192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또 구스타프의 아 들 카를 헬무트 헤르츠는 초음파 검사를 발명한 것으로 널 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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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기태(2009). 󰡔물리학의 진로를 바꾼 40가지 위대한 실험󰡕. 서울: 하늘아래. Balchin, John(2003), 장정인 옮김. 󰡔3일 만에 읽는 세상을 바꾼 과학자 100󰡕. 서울: 서울문화사. Bodanis, David(2005). Electric Universe: The Shocking True

Story of Electricity. New York: Crown Publishers. Godfrey, Donald G., Craft, John E., & Leigh, Frederic(2000),

Electronic Media. Belmont: Wadsw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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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공영방송의 초석: 존 리스

영국 공영방송 BBC의 초대 총국장으로 공영방송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BBC의 권위와 신뢰를 구축했다. 엄격한 캘빈주의자로서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을 중용했으며, 라디오 방송에도 정장 차림을 요구할 정도였다. BBC는 제도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수준 높은 프로그램 편성을 견지했다. 오늘날 BBC가 공영방송의 표상이 된 것은 오롯이 리스의 업적이라고 하겠다.


엄격한 캘빈주의자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가장 훌륭한 방송의 표본으로 BBC를 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BBC야말로 가장 이상 적인 그리고 가장 완벽한 공영방송으로 꼽힌다. 영국 사 람들 스스로도 BBC의 존재 양식과 운영에 대해서는 큰 긍 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정작 BBC를 만든 존 리스(John C. W. Reith, 1889 ∼1971) 경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제도는 사람이 만들고 빼어난 정신은 위대한 인물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존 리스 경은 영국방송협회(British Broadcasting Corp., BBC)의 초대 총국장으로 영국 방송에 가장 큰 영향 력을 남겼다. 그의 큰 발자국은 오늘도 영국 방송에 살아남 아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캘빈주의자 리스 경은 방송을 단순 히 오락의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국민의 가치와 열망을 형 성해 주는 힘으로 보았다. 그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무 엇보다 정보를 전해주고 사람들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믿 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엄격한 캘빈주의자였던 리 스 경은 BBC에 대해 높은 수준과 철저한 책임감을 역설했 다. 초기에는 하나의 상업적 회사(company)였던 BBC를 공영제(corporation)로 전환시킨 주역이 바로 리스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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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스(John C. W. Reith, 1889∼1971)

며, 그의 BBC 재임 기간에 오늘날과 같은 공익 방송의 개 념이 확립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리스 경은 원래 기술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였다. 한 엔지니어가 위 대한 방송인으로 변신하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영 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구성 돼 있고 그 면적은 24만3610제곱킬로미터로 미국의 오리 건주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통합된 국가이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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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왕국은 전통적인 문화를 고수하고 있으며 정치적 내분 역시 오랜 세월을 두고 끊이지 않고 있다. 아일랜드와 분 쟁, 독특한 스코틀랜드 문화, 독자적인 게일어(Gaelic)를 쓰는 웨일스 등 지역적 특색이 강하다. 영국의 방송제도는 BBC와 IBA로 이원화해 있지만 처 음 시작한 것은 BBC이다. BBC는 기간방송이고 대외적으 로 영국을 대표한다. 1935년 ITA(뒤에 IBA로 변경됨)를 설립한다고 영국 정부가 발표했을 때 이미 ‘BBC가 영국의 기간방송이다’라고 언명했다. 물론 이 점에 대해 반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칙허장(Royal Charter)에 의해 공영 BBC는 1927년 1월 1일 발족했다. 곧 회사가 공사로 바뀌어 오늘과 같은 BBC 의 토대가 마련됐다. 영국 방송은 수신료로 운영되는 독 점제가 되었고 체제는 공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법이 바뀌고 조직이 달라지는 것만으로 방송의 권위가 세워지고 신뢰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설립 취 지를 살리고 그 정신을 구현하려는 노력과 투쟁이 있어야 하고 이를 추진해 나갈 인물이 있어야 한다.

신뢰와 권위 상업 BBC가 공영 BBC로 되면서 첫 총국장(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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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이 된 사람이 바로 리스다. 원래 리스는 직업이 엔지니어였기 때문에 라디오 수신기 메이커와 맺은 관계 로 상업 BBC의 상무이사가 되어 1922년에서 1926년까지 일했다. 그 뒤 영국 방송회사가 영국 방송공사로 바뀌자 공사의 행정을 모두 관장하는 총국장이 된 것이다. 그는 1938년까지 거의 12년간 BBC의 최고경영자로서 BBC의 권위와 전통을 수립했다. 사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면 BBC는 국가 독점적인 국영방송의 색채를 띠고 있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정부가 방송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도 BBC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주의는 불문율처럼 지켜진다. 정부의 어떤 간섭도 배제한 가운데 지켜나가는 엄정한 중 립, 절대적인 독립과 권위 그리고 철저하게 공정한 보도 태도 등은 세계 모든 사람들로부터 BBC에 대한 신뢰를 변 함없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불굴의 전통은 리스 경에서 비롯됐다. 스코틀랜드 목사의 아들이자 공학도였던 리스 경은 12 년 가까이 BBC 총국장으로 일한 뒤 은퇴 후 임페리얼 항 공회사의 회장에 취임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몇 가지 정부 고위직을 맡았으며, 1950년 식민개발공사의 회장이 됐다. 1927년 서(Sir, 영국에서 기사나 준 남작에게 부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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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존칭)의 칭호를 받았고 1940년 로드[Lord, 경(卿)으로 번역되며 귀족을 칭하는 말이다]가 되었다. 리스 경은 BBC 발전의 기틀을 다졌고, 정부와 방송의 관계를 분명히 했다. 동시에 높은 수준의 편성을 견지하 도록 만들었고, 비상업적인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의 모습을 뚜렷이 부각시켰다. 이에 그가 세운 공영방송 의 지표는 오늘날까지 큰 변화가 없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매우 진지하고 종교적이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엄격한 안식일 프로그램에서 잘 드러 났는데, 그 프로그램들 덕분에 ‘리스의 일요일’이라는 말 이 생겼을 정도다. 거의 매일 본격적인 토크 프로그램과 교육 프로그램을 방송했던 것도 그의 의지였다. 리스 경 의 자신만만하고 전제적인 퍼스낼리티는 국민과 BBC 직 원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결단하게 만들었다. 철저한 독점제로 BBC 라디오를 세계 제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리스는 무솔리니다” 1971년 그가 죽은 후 1975년에 출간된 일기는 그의 권위 주의적 측면을 잘 보여 준다. 1933년 3월 9일자 일기의 일 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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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치가 판을 휩쓸고 독일이 다시 유럽의 진짜 강국으 로 등장하리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무자비하나 가장 단호 하다.”

히틀러의 방식을 예찬해, 1934년 7월에는 그가 정말 필 요한 극적 조치를 한 것을 높이 사고 싶다고 썼으며, 1936 년 8월에는 “나는 독일이 하는 일들을 크게 예찬한다”고 했다. 독재자에 대한 이 불명예스러운 코멘트는 리스 경 의 영광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유사한 견해를 밝혔다. 1935년 에티오피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영국을 방문한 마르코니에게 리스 경은 “나는 무솔리니를 항상 존경해 마지 않는다. 그는 비록 비민주적이지만 불 가피한 수단으로 높은 민주적 목표를 잘 수행하고 있다” 고 말한 바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BBC는 1922년 처음 설립 당시에는 주식회사 형태로 되어 있다가 5년 후에 현재의 공영 체제 로 바뀌었다. BBC의 설립 근거인 칙허장은 최고 운영 기 구로서 경영위원회(Board of Governors)를 두도록 했다. 위원은 언론계, 노동조합, 교육계, 법조계 등을 대표하는 저명인사 가운데 12명을 추천하고 이에 따라 여왕이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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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록 했다. 경영위원회는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을 포함해 BBC의 업무 전반에 대한 방침을 정하고 최종적인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 또 경영위원회는 일상 운영을 총괄하 는 총국장을 선임하고, 총국장은 인사와 편성 등 실행을 총괄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리스 경의 재임 중 경영위원 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클레어든 경(Lord Claredon)은 리 스와 자주 마찰을 빚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리스는 무솔리니다.”

직원들은 리스가 엄격하고 강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했다. 그 자신도 스스로 독단적인 성격을 인 정한다. 후일 어떤 오찬석상에서 재임 기간을 회고하면 서 1970년 중반 당시 BBC 총국장이었던 휴 그린(Hugh Greene)의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휴와 나는 사고방식과 태도가 정반대다. 나는 이끄는데, 그 는 온갖 의견을 다 내놓는 군중을 따른다.”

리스 경의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은 정부의 간섭을 배제해 방송의 독립성을 확고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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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견상 독점 국영방송의 모습을 가진 BBC는 그 설립의 법 적 근거나 조직, 운영, 인사, 재정 등 어느 측면에서 보나 정부의 지시나 간섭을 벗어나기 어렵다. 사실 BBC를 세 계 방송의 이상적인 모델로 만든 것은 결코 법적 근거나 외적 제도가 아니다. 이러한 제도를 어떠한 사람이 운영 해 왔으며, 국민과 정부, 방송인들이 공적 기구에 대해 어 떤 태도를 갖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인이다.

BBC는 제도가 아니라 정신이다 그런 면에서 BBC는 제도가 아니라 ‘정신’이며, 이러한 정 신을 확립시킨 사람이 바로 초대 총국장인 리스 경이었다. 물론 BBC가 창설 이래 계속 정부의 간섭에서 완전하게 독 립해 엄정한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설립 당시 방송 의 주무 장관이었던 우정성 장관 톰슨(W. M. Thompson, 1877~1938) 경의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관계법의 여러 규 정에도 불구하고, 방송 내용과 운영은 BBC에 전적으로 일 임해야 하며 정부는 BBC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불개입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이후 역대 정부와 의회 역시 이 원 칙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정부가 이러한 자세를 갖게 만든 것은 역시 방 송 종사자들의 노력과 투쟁 정신이다. 리스 경이 BBC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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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으로 ‘권위’를 내세우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아 무렇게나 할 수 없다며 심지어 라디오 아나운서들에게도 정장을 요구한 태도는 이러한 열정을 대변한다. BBC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만 항상 정부를 비판하 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시비비를 엄정하게 가린다는 것 은, 곧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다. 1926년 리 스 경이 볼드윈(Baldwin) 수상에게 보낸 메모는 이 같은 뜻을 확고히 한다.

“BBC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고 정부도 국민을 위해서 존 재한다면, BBC는 위기에 처한 정부를 위해서도 존재해야 한다.”

참고문헌 김우룡(1987). 󰡔방송학강의󰡕. 서울: 나남. 방송문화진흥회(1990). 󰡔방송대사전󰡕. 서울: 나남. 한국방송학회(1992). 󰡔세계방송의 역사󰡕. 서울: 나남. Brown, Les(1977). The New York Times Encyclopedia of

Television. NYT Books. Reed, Robert M.(1992). The Encyclopedia of Television, C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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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Radio. New Jersey: Prentice-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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