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시대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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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ge of Innocence 순수의 시대


제1부



아처는 은방울꽃을 안고 있는 어린 처녀1)에게 시선을 다시 돌리면서 ‘사랑스러운 아가씨라고 ’ 생각했다. ‘그녀는 오페 라의 노래가 무엇인지조차도 짐작하지 못할 거야.’ 그는 소 유하는 자의 기쁨을 느끼면서 오페라에 푹 빠져 있는 어린 처녀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가 느낀 소유의 기쁨에는 남성 적 구애의 자긍심과 그 처녀가 지닌 헤아리기 어려운 순수 함에 대한 애정 어린 존중이 혼합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탈 리아의 호숫가에서 같이 ≪파우스트≫를 읽을 거야…’ 하 고 그는 장래의 신혼여행 장면과 고전 명작들을 함께 생각 했다. 고전 명작들은 그가 신부에게 보여줄 남자다운 특권 이 될 것이었다. 메이 웰랜드가 그를 ‘좋아한다는 ’ 것을 짐작 하게 만든 건 그날 오후였다. 그리고 이미 약혼반지와 혼인 의 키스와 로엔그린의 결혼행진곡을 떠올린 그는 유럽의 매 력적인 경치 속에서 자기 곁에 있는 그녀를 그려보고 있었 다. 그는 장래의 뉴랜드 부인이 숙맥이기를 전혀 원하지 않 았다. 이는 그녀가 ‘젊은 부인 그룹에서 ’ 가장 인기 있는 부 인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사교적인 재치와 위트 의 기질을 (자기의 가르침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젊은 부인들에게는, 농담으로는 남성들의 존경을 무시하는

1) 메이 웰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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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지만 남자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인정된 관습이었다. 그가 파헤쳐 본 그 자신의 허영심의 밑바닥에는, 그가 아무 도 모르게 방황했던 지난 2년 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매력적인 부인만큼이나, 자신의 부인이 세상 물정에 밝고 활달한 여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물론 자기 부인 에게는 그 불행한 여자의 인생을 거의 망쳐놓았고 지난겨울 내내 자신의 계획을 혼란스럽게 했던 의지박약의 기미는 없 어야 했다.

오페라글라스를 무대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던 로런스 레퍼츠는 갑자기 “아니, 놀라운 일인데!” 하고 소리쳤다. 뉴 랜드 아처는 레퍼츠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가 놀라는 게 맨 슨 밍곳 노부인의 박스에 있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 때문이 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메이 웰랜드보다 약간 키가 작고 관자놀이 주변의 짧은 곱슬머리를 가느다란 다이아몬 드 밴드로 고정시킨 젊고 날씬한 여자였다. 당시 ‘조세핀 룩’ 이라고 불리던 그 머리 스타일은 구식으로 가슴 아래를 과 장되게 묶은 검푸른 벨벳 드레스로 인해 더욱 두드러졌다. 이 특이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그 옷차림이 끌어 모으는 시선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맨 앞줄 오른편 코너에 있는 웰랜드 부인의 자리와 같은 줄에 앉는 게 적절한지 웰 랜드 부인과 상의하면서 오페라 박스 한가운데 잠시 서 있 22


었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띠고 반대편 코너에 자리 잡은 웰 랜드 부인의 올케인 러벌 밍곳 부인과 같은 줄에 앉았다. 실러턴 잭슨이 오페라글라스를 로런스 레퍼츠에게 돌려 주었다. 그는 잠시 동안 늙고 처진 눈꺼풀에 매달린 짙푸른 눈동자로 귀를 쫑긋거리는 그룹을 조용히 훑어보았다. 그 러고는 생각에 잠긴 듯이 콧수염을 쓰다듬고 나서 이렇게 간단하게 말했다. “밍곳 가문이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할지 전 혀 예상하지 못했어.”

뉴랜드 아처는 이 짧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이상하게 혼돈 상태에 빠져들었다. 뉴욕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끄 는 박스가 바로 자기 약혼자가 그녀 어머니 웰랜드 부인과 외숙모 러벌 밍곳 사이에 앉아 있는 박스라는 게 신경이 쓰 였다. 잠시 동안 그는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부 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그녀가 거기에 있는 것이 사교 계 인사들에게 왜 그렇게 흥미를 유발시키는지 상상하지 못 했다. 그 순간 희미하게 생각이 떠올랐고 잠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로 이건 아니었다. 누구도 밍곳 집안이 그렇게 대담할지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담했다. 분명히 대담했다. 왜냐하면 그 의 뒤에서 조용히 수군대는 이야기들은 그 젊은 부인이 메 이 웰랜드의 사촌, 즉 항상 그 가족들이 ‘불쌍한 엘렌 올렌스 23


카라고 ’ 지칭했던 사촌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처는 그녀가 하루나 이틀 전에 유럽에서 갑자기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메이 웰랜드에게서 (자기 기분을 거 스르지 않게) 할머니 밍곳 노부인의 집에 머물고 있는 불쌍 한 엘렌을 보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처는 가족의 결속 을 전적으로 찬성했다. 밍곳 가문에 대해 그가 존경하는 특 성 가운데 하나가 오점 하나 없는 가문이 만들어낸 몇 명의 말썽쟁이들을 단호하게 옹호하는 것이었다. 젊은 아처의 마음에는 비열함이나 편협함은 없었고 장래의 자기 아내가 잘못된 판단으로 불행한 사촌에게 친절을 베푸는 걸 금하지 않아 기뻤다. 하지만 가족 내에 올렌스카 백작부인을 받아 들이는 것과, 모든 장소 가운데서도 오페라 하우스의 많은 이들에게 그녀를 드러내 보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바로 그 박스 안에는 아처가 몇 주 후 약혼 발표를 하게 될 어린 처녀가 있었다. 이건 아니야 하고 실러턴 잭슨이 느꼈던 것 을 아처도 느꼈다. 그는 밍곳 가문이 그렇게 대담할지 예상 하지 못했다.

“어쨌든.” 아처는 자기 뒤의 어떤 젊은이가 말을 꺼내는 걸 듣고 있었다. “어쨌든 무슨 일이에요?” “흠, 그녀가 그를 떠났대.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아.” “그자가 형편없는 작자라지요, 그렇다지요?” 질문을 꺼 24


냈던 젊은이가 계속했다. 그는 올렌스카 백작부인을 옹호 하기로 마음먹은 게 분명한 솔리라는 이름의 정의파 젊은이 였다. “최악의 인간이래. 니스에서 그를 만났지.” 위엄 있게 로 런스 레퍼츠가 대답했다. “반신불수에다 창백하고 냉소적 인 작자인데, 핸섬한 얼굴에 속눈썹이 짙은 눈을 지녔지. 그 는 여자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도자기를 수집하는, 그런 작 자라더군. 도자기와 여자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지불 하는.” 모든 사람들이 웃는데 젊은 옹호자는 “그러고는요?” 하 고 물었다. “음, 그리고 그녀가 자기 비서하고 도망을 갔지.” “오, 그랬어요.” 그 젊은이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길게 가지 않았어. 내가 듣기로 그녀는 베니스에서 혼자 몇 달을 살았대. 러벌 밍곳이 그녀를 데리 러 거기에 간 걸로 알고 있어. 정말 그녀가 불행했다더군. 그런 것은 괜찮아. 하지만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녀를 시위 하듯 보여주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 “아마도 그녀를 집에 남겨두기에는 너무나 불쌍했겠지 요”라고 젊은 솔리가 감히 말을 꺼냈다. 이 말은 불손한 웃음을 만들어냈고 그 청년은 얼굴이 아 주 빨개졌다. 그러고서 그는 박식한 사람들이 ‘이중의 의미’ 25


라고 하는 걸 자신이 암시하려 했던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 했다. “그런데 어쨌든 간에 미스 웰랜드를 데리고 나온 것은 아 주 이상한 일이야” 하고 누군가가 아처를 곁눈질하면서 나 지막하게 속삭였다. “아, 그것은 일종의 시위야. 할머니의 명령일 거야, 틀림 없이” 하고 레퍼츠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노부인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그 일을 철저하게 해치우지.” 막이 끝나고 박스는 술렁거렸다. 갑자기 아처는 자기가 신속하게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밍곳 노부인의 박스에 들어가는 첫 번째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과 메 이 웰랜드와의 약혼을 고대하는 세상에 약혼을 발표하려는 바람, 그리고 사촌의 파격적인 상황으로 곤경에 처한 그녀 를 도와야겠다는 바람과 충동이 모든 망설임과 주저함을 압 도했다. 그는 서둘러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오페라 하우스 반대쪽으로 갔다. 박스에 들어갔을 때 그의 시선은 미스 웰랜드의 눈과 마 주쳤다. 그는 비록 두 집안이 높은 미덕으로 생각하는 가문 의 체면이 그녀로 하여금 직접 말로 표현하게 하지는 못했지 만, 즉각 그녀가 자기 마음을 알아차렸음을 보았다. 그들 세 계의 사람들은 어렴풋한 암시와 간접적이고 섬세한 짐작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그녀와 자기가 서로를 26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설명보다도 그들을 가깝게 만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 다. “당신은 엄마가 나를 왜 데리고 왔는지 알 거예요.” 그의 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결코 당신을 멀리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내 조카 올렌스카 백작부인 알지?” 하고 웰랜드 부인이 미래의 사위와 악수를 하면서 물었다. 아처는 숙녀에게 소 개될 때의 관습대로 손은 내밀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옅은 색 장갑을 낀 손은 독수리 털로 된 커다란 부채 위에 둔 채 엘렌 올렌스카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바스락거리는 새 틴 옷을 입은 커다란 몸집의 금발인 러벌 밍곳 부인에게 인 사를 한 뒤 그는 자기 약혼녀 곁에 앉아 나지막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우리가 약혼한 것을 마담 올렌스카에게 말하기 를 바랐는데요? 난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요.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오늘 무도회에서 발표하는 걸 당신이 허락 했으면 해요.” 미스 웰랜드의 얼굴은 새벽하늘처럼 장밋빛으로 변했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엄마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요. 하지만 이미 (몇 주 뒤에 발표하기로) 결정된 일을 바꿔야만 하지요?” 하고 말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 았지만 눈으로 말했다.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 다. “당신이 내 사촌에게 말하세요. 당신에게 허락하겠어요. 27


사촌은 어렸을 때 당신과 같이 놀았다고 하던데요.” “우린 같이 놀고는 했었지요, 그렇지 않던가요?” 하고 진 지한 눈길을 그에게 돌리면서 엘렌은 물었다. “당신은 아주 개구쟁이였어요. 한번은 문 뒤에서 내게 뽀뽀를 했었지요. 그런데 나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던 당신 사촌 밴디 뉴랜드 를 좋아했지요.” 그녀의 눈길은 말굽 모양의 곡선을 그리는 박스들을 죽 둘러보았다. “아, 이 모든 것들이 내게 돌아오 다니. 여기에서 니커보커 반바지와 팬틀렛2)을 입은 모든 이들을 보게 되네요.” 그녀는 시선을 그의 얼굴로 돌리면서 외국 악센트가 약간 있는 말투로 말했다. “네,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떠나 있었지요” 하고 그는 대 답했다. “정말 수백 년 동안,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가 죽어 땅 에 매장되었다고 확신했는데 이 친근한 고향은 천국이네 요”라고 하는 그녀의 말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처에게는 뉴욕 사교계에 대한 더욱더 경멸스러

2) 니커보커 반바지는 네덜란드의 민속의상으로 무릎까지 오는 자루 모양의 남자용 반바지다. 영국은 1652년에서 1672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네덜란드와 의 전쟁에서 승리해 유럽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신세계의 뉴암스 테르담을 차지하게 되어 그 명칭을 뉴욕으로 바꿨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뉴욕의 오래된 명문가 중에는 네덜란드계가 많았다. 이디스 워턴 역시 한쪽은 네덜란드 혈통이었다. 팬틀렛은 여자들이 입은 속옷이다. 이 대목은 엘렌이 속옷차림으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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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말로 들렸다.

아처와 메이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줄리어스 보퍼트 저택의 무도회 장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약혼을 발표한다.

춤추는 사람들과 합류하려는 메이 웰랜드는 한 손에 은 방울꽃을 들고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창백 했고 눈빛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설레며 빛나고 있었다. 일단 의 젊은이들과 처녀들이 그녀 주변에 모여 있었고 그곳의 젊은 남녀들은 서로 손을 붙잡고 웃으며 유쾌해했다. 웰랜 드 부인은 약간 비켜서서 그들의 유쾌함에 기분 좋게 응수 하는 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메이는 자신의 약혼을 발표하 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경우에 어울리 는, 어머니다운 내키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아처는 잠시 숨을 돌렸다. 약혼 발표는 그가 분명히 원하 는 것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곧 자기의 행복을 다른 이들에 게 알리기를 원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북적대는 연 회장의 열기와 소음 가운데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곳에 있어야 할 비밀스러운 예쁜 꽃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그의 기쁨은 표면의 얼룩이 본질을 손상시킬 수 없을 정도로 깊었지만, 그는 기쁨의 표면과 본질이 모두 순 수하게 지켜지기를 원했다. 메이 웰랜드가 이런 자신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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