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지한국희곡선집 해설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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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지한국희곡선집 해설모음

선집 각권에 실린 해설을 모았습니다. 차례는 작품 발표 연도순입니다.



<難破>는

봉건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려 는 시인의 자의식을 그린 작품이다. 인습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자유의지와 창작에 대한 열망이 생명력 추구로 나타나 고 있다. 표지에 ‘Ein Expressionistische Spiel in drei Acten(3막의 표현주의 작품)’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한 국 표현주의 문학의 선구가 되는 작품으로 김우진이 1926 년 5월에 탈고한 그의 유고다. 1막에서 시인은 전통을 반대하고 현실과 싸우라는 모 (母)와 충효 사상을 계승할 것을 강요하는 부(父)와 대립하 면서 스스로 이름을 찾아 나선다. 2막에서 배경이 되는 ‘삼 림 속’과 ‘카페’는 시인이 자기 이름을 찾는 과정을 보여 주는 공간이다. 시인이 이름을 찾는 것은 아버지나 신주가 요구 하는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상과 정체성을 찾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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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는 자아를 탐색하는 과정을 무의식과 추상화한 내면 이미지를 통해 드러낸 자전적 작품이다. 표현주의 희 곡답게 분명한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물들 도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통일성 있는 플롯으로 전개되지 않고, 죽은 자로 등장하는 가족들이나 백의녀, 비의녀 등 환상적인 인물들과 시인이 갈등하며 겪는 내면 혼란이 극을 이끌어 간다. <난파>에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비롯해 버나드 쇼, 호세 에체가라이, 하젠클레버 등 김우진이 섭렵 한 다양한 작가의 작품이 등장한다. <리골레토>에 등장 하는 음악인 ‘카로노메’와 함께 극을 고조시키고, 버나드 쇼 의 <워렌 부인의 직업>에 나오는 비비를 등장시켜 서구 적 개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등 김우진이 차용한 다양한 작가와 작품은 극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의 예술관을 드러내는 데 일조한다. 3막에서 시인은 추구하던 바를 성취하지 못하지만 세계 와 타협하거나 절연하는 대신 자유의지로 영원한 투쟁과 고 통을 선택하며 행복한 난파를 맞이한다. 김우진은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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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인 결말과 표현주의 기법을 통해 억압적인 질서에 대 한 저항과 자유의지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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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돼지>는

주인공 최원봉의 방황과 내면 갈등을 통해 식민지 시기에 지식인이 겪어야 하는 좌절과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는 3막 작품이다. 동학을 주요 모티프로 차용했고 자유의지와 생명력에 대한 갈망을 표현주의 기법을 통해 무 대화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막에서 원봉은 자신을 포함한 청년들이 생명력 넘치는 산돼지가 아니라 우리에 갇힌 집돼지처럼 무기력하게 살아 가는 현실을 증오한다. 하지만 원봉에게는 이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부족하다. 2막에서 원봉이 잠들자 무대 시 공간은 동학혁명이 일어난 과거로 이동하는데, 표현주의 기 법을 활용한 이 몽환 장면에서 원봉의 아버지 박정식은 원 봉에게서 산돼지 탈이 벗겨지지 않도록 못질을 한다. 김우 진은 2막에서 동학도로서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 는 박정식과 사회적 책무를 인식하면서도 무능하고 나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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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으로 등장하는 원봉을 대비해 생명력 넘치는 삶을 추구 하지만 집돼지처럼 갇혀 지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원봉의 내면 갈등을 부각했다. 3막에서 원봉이 아버지가 준 산돼지 탈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에 따라 방황과 내면 갈 등은 해소된다. 원봉은 연인이었던 정숙과 함께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를 낭송한다. 이 작품은 김우진이 쓴 희곡 다섯 편 중 마지막 작품으로, 1926년 11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조선지광≫에 발표했 다. 생명력 추구와 지식인이 담당해야 하는 사회적 책무 인 식이라는 작가 의식이 상징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되고 있 어 이전 작품에 비해 성숙성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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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舞臺의 崩壞>는

김옥균의 최후를 극화한 희곡으로 전체 3막 6장이다. 그의 사상과 포부를 통해 김옥균의 혁명가적 면모를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 으며 동경에 머물던 김옥균이 서방동점(西方東漸)의 위기 를 타파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청국행을 감행하나 홍종 우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작가는 홍종우가 자객이 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재기를 아끼며 곁에 두고, 적국인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을 만나고자 하는 김옥균을 통해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했다. 극 중 공간은 김옥균의 여정에 따라 도쿄(1막), 오사카(2 막), 상해(3막) 여관으로 바뀌는데, 이 극 중 공간에서 김옥 균은 동지들과 대화하며 극동에서 벌어지는 세계 각국의 역 학관계를 조선 민족의 자존과 결부해 바라보면서 조선과 일 본, 청나라가 공조해서 서양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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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다. 김진구는 이를 통해 조선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조선과 일본 정부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며, 김옥균의 이상이 실현되었더라면 동양 전체를 아우르는 대무대가 펼 쳐졌을 거라고 피력하고 있다. 3막에서 상해에 도착한 김옥균은 결국 이홍장을 만나지 못하고 홍종우에게 암살당한다. 결국 그의 이상은 현실화하 지 못하고 좌초된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김옥균의 이상이 좌절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 상해에 온 일본 청 년이 홀로 남겨지는 것으로 김옥균의 죽음이 유발하는 비극 성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김옥균을 추종하는 광 인을 등장시켜 김옥균의 청국행이 실패로 끝날 것임을 암시 하고 있으나 이 인물이 분명한 성격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는 점에서 구성상의 한계를 보인다. <대무대의 붕괴>는 조선시대극연구회가 1928년 8월 공연했으며, 이후 1929년 5월부터 8월까지 ≪학생≫에 연 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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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은

계순네와 덕조네 두 농가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 주는 작품 이다. 1933년 11월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다. 일제 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을 그렸다는 점에서 1932년 발표한 <土幕>, 1934년 발표한 <빈민가>, <소> 등 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1920∼1930년대에 밑바닥 생활을 하는 계순네와 덕조 네 두 농가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룬다. 무대 오 른쪽에 계순네 집, 왼쪽에 산으로 이어지는 언덕, 중앙에 서 낭당(산신당)과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계순네와 덕조네는 모두 빈궁한 농촌 현실에 허덕이는 것으 로 그려진다. 덕조 어머니는 약초를 캐러 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된 아들을 찾아다닌다. 계순네는 소 한 마리 값도 안되 는 25원에 계순을 팔아야 한다. 정작 계순은 도토리묵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가난에서 벗어나 서울로 간다는 동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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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풀어 아이러니한 상황을 부각한다. 이처럼 가난한 농가 현실은 노동 현장에서 사고로 죽은 계순 아버지 사건을 환 기하며 자본 때문에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는 식민지 노농 계층 일반의 비참한 삶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계순네와 덕조네의 비극을 병렬로 배치해 결말에서 이 둘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비극성을 강화했다. 덕조 어머니가 ‘짚신 한 짝’을 들고 계순의 집으로 내려오는 것은 덕조의 죽 음을 암시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곧 계순을 떠나보내야 하는 계순네의 슬픔과 결합하면서 비극적인 효과를 극대화 한다. 이 작품은 가난 때문에 자식을 잃어야 하는 어머니들의 상실감과 그 비극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파괴되는 양상을 현실감 있게 그림으로써 식민지 현실과 가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외 국극 연구와 번역극 레퍼토리에 치중했던 극예술연구회에 창작극 대본을 제공하며, 1933년 극예술연구회 5회 공연에 서 유치진이 직접 연출을 맡아 상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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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身術>은

반민족적인 자본가를 풍자한 단막극이다. 1931년 9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시대공론≫에 발표되었다. 연극은 김상룡의 집 거실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공장을 여럿 가지고 있는 악덕 자본가 김상룡이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비해 가족들과 함께 호신술을 배운다는 희극적 설 정을 기반으로 한다. 안전을 위해 의사까지 미리 배치해 가 며 온 가족을 동원해 호신술을 배우려는 김상룡의 시도는, 인물의 미련한 성격이 슬랩스틱 요소와 결합하면서 우스꽝 스럽게 그려진다. 또한 하인 춘보는 충성스럽게 그려지지만 웃음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결말에서는 집 밖에 노동자들이 집합한 광경을 실감나게 전하는 이중적인 코드 를 담당한다. 일신의 안전을 도모했던 김상룡과 그의 가족 들은 파업 노동자들이 집으로 몰려 오는 결말에 이르러 냉 정을 잃고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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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당시 노동운동 자체를 직접 다루지 않고도 자본 가를 희화화함으로써 관객들의 비판적인 인식을 의도했다. 연극에서 갈등의 중추가 되는 노동자 계급은 무대에 등장하 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의 갈등 구조는 약화되어 있지만 오 히려 웃음 끝에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와 비판적인 인식 가능성은 높였다. 무대 밖에서 노동자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결말 부분은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통해 반민족 자본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전망을 암시하며 관객의 상상을 자극한 다. 일제 강점기에 강화된 검열 때문에 노동극이 현실적으로 무대에 오르기 힘들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護身術> 이 반민족 자본가를 풍자하는 방식으로 검열을 피하면서도 효과적인 극적 성취를 거둘 수 있었던 점은 작가가 도달한 뛰어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극단 메가폰이 제1 회 공연으로 1932년 6월에 공연해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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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任 理事長>은

다소 모자란 인물로 그려진 신임 이사장과 얽힌 일화를 통 해 자본가의 허상을 풍자한 1막 희곡이다. 1934년 3월 ≪형 상≫ 2호에 발표했다. 연극은 한 삼림회사에 새로 부임한 이사장이 지역 유지 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극화했 다. 신임 이사장은 다소 모자란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본래 ‘영감’으로 불리는 구시대적인 인물이다. 어울리지 않는 양 복 차림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웃음을 사고 문학청년인 삼천 이 써 준 연설문을 채 외우지 못해 쩔쩔맨다. 삼천과 이사장 이 이해되지 않는 연설문 내용을 서로 질문하고 응답하면서 이사장은 스스로 삼림회사가 만들어지면서 겪어야 했던 우 여곡절을 공표하는 주체가 된다. 둘이 대화를 통해 수사적 으로 완성한 연설문 이면을 통해 회사를 설립할 때 발생한 소동들이 드러난다. 더 나아가 긴장한 신임 이사장은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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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에서 준비한 연설문을 암기하지 않고 갑자기 모든 사건 의 실상을 발표한다. 비판 대상이 본인이 속한 계층을 전반 적으로 폭로하는 형상이 된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호 신술>과 마찬가지로 자본가 계급을 풍자함으로써 관객에 게 쾌감을 주는 동시에 자본가의 허상을 비판적으로 자각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이 극은 세부 요소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일본인 산업과장인 아오기 상이 조선말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는 장면은 식민지 조선을 통제하는 일제에 대한 희화화를 의도 한 것이다. 또한 초반에 무대 한켠에 놓이는 ‘화분’이 결말 부분에서 극적으로 활용됨으로써 재미를 더한다. 한편 노동 자 계층이 무대 바깥에서 소리로만 존재했던 <호신술>과 는 달리 마누라를 잃어 실성한 용진이 갑자기 나타남으로써 무대 위에 노동자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 특징이 다. 용진은 화분을 부인으로 착각해 말을 걸다가 돌연 소리 를 지르며 광증을 더한다. 이는 신임 이사장이 대변하는 자 본가들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극단 신건설 제2회 공연 각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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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공연이 되었는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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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1935년에 극예술연구회 공연 극본으로 발표된 유치진의 초 기작 중 하나로, <토막>(1931), <버드나무 선 동네 풍 경>(1933)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 삶의 터전과 희망을 상실 한 채 몰락해 가는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1935 년 도쿄 축지소극장에서 도쿄학생예술좌가 초연했다. 그해 11월로 예정돼 있던 국내 공연은 일제 검열로 불발했고, 대 신 1937년에 <풍년기>라는 개작본을 부민관에서 상연했 다. 주인공 국서는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선량한 농민이다. 그에게는 좋은 혈통을 타고난 소가 한 마리 있는 데, 작품은 이 소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갈등을 다뤘다. 맏아 들 말똥이는 귀찬이네 농사 빚을 갚아 주고 그녀와 결혼하 고 싶어 하고, 개똥이는 소를 팔아 만주로 갈 여비를 마련하 길 원한다. 정작 국서는 소를 지키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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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서로 팽팽하게 대립한다. 소는 결국 밀린 도지 대신 으로 마름에게 끌려가 버린다. 소를 팔아 귀찬이네 빚을 갚 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귀찬이 일본으로 팔려 간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말똥이는 지주네 곳간에 불을 지 르고 만다. 소를 두고 벌어지는 이들 부자의 갈등은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계급 갈등으로 확대되면서 식민지 농촌의 구조적 모 순을 보여 준다. 지주에게 소를 빼앗긴 국서, 연인을 잃은 말똥이, 가난해서 딸을 팔아야 하는 귀찬이 아버지와 팔려 가는 귀찬이 모두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당대 농민들의 모 습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소>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모순에 대한 저항까지 형 상화했다. 희비극 기법을 사용해 비극성을 고조하는 한편 검열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 글쓰기를 통해 뛰어난 극작술과 냉철한 작가 의식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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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기생 홍도와 광호의 신분을 초월한 자유연애, 인습으로 인 한 갈등을 그린 4막 6장 작품이다. 오빠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는 철수의 친구인 광호와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광호가 북 경으로 유학을 떠난 사이 시어머니와 시누이, 그리고 광호 의 약혼자였던 혜숙이 꾸민 음모로 홍도는 간통했다는 누명 을 쓰고 시댁에서 쫓겨난다. 쫓겨나서도 광호가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오히려 광호는 홍도에 대한 오해를 풀지 못한 채 혜숙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홍도는 울분을 참 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혜숙을 죽인다. 결국 그녀는 형사부 장이 된 오빠 철수의 손에 체포된다. 기생의 사랑과 결혼 좌절이라는 신파극 전형인 화류 비 극 구성을 답습했다. 작품 전반에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 기 위한 구도와 극적 요소를 활용했다. 홍도와 철수가 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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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라는 설정, 홍도의 뒷바라지로 형사가 된 오빠가 자기 손으로 홍도를 체포하는 아이러니, 홍도가 살인을 저지른 뒤에야 흉계와 진실이 폭로되는 구성 등으로 비극성을 강화 했다. 주변 인물들 역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욕망을 드러낸 다. 홍도와 광호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혜숙, 봉옥과 결혼하 기 위해 음모에 동참하는 월초, 그리고 철수를 좋아하는 기 생 춘홍까지 각 인물들의 욕망이 더해져 사건은 얽히고설키 지만 이들 중 누구도 원하던 걸 얻지 못한다. 동양극장 전속 극단인 청춘좌가 1936년 7월 23일부터 31 일까지 공연했다. 이 공연으로 임선규가 동양극장 대표 작 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동명의 영화(1939)로도 제작되었 고, 대중가요 음반(1940)으로도 판매되는 등 대중적인 레퍼 토리로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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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물질적 행복과 모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통해 당대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 단막극이 다. 1936년 1월 ≪조광≫에 발표되었으며, 같은 해 4월 유 치진 연출로 부민관에서 공연되었다. 남편이 공금을 횡령하고 집을 나간 후 보험회사 외판원 을 하며 아들 정길을 기르는 숙자는 마을 여인들에게 행실 이 바르지 않다는 의심과 비난을 받는다. 숙자는 고등교육 을 받은 신여성이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 희롱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어 당대 사회구조에 서 여성이 처한 삶의 조건이 열악했음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행복과 모성 사이에서 번민하는 여성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여성이 계급 적 위치를 자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작가의 이념적 지향이 엿보인다. 이는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첩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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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 하는 숙자의 결심이 아들을 버리려 하기 때문이 아니 라 시대가 여성에게 주는 굴욕을 재생산한다는 이유로 그녀 가 동생 준일에게 비판받는 것에서 드러난다. 또한 숙자의 남편이 소부르주아적 삶에 절망하며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길을 택한 사회주의자로 형상화해 있고, 준일이 물질적 행 복을 추구하는 숙자의 태도를 비판하며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신념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도 계급문학적 성격 을 보여 준다. <어머니>에서 숙자는 맹목적인 모성에 의문을 표하며 이를 거부하고 있어 어머니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권리에 대 한 인식을 보여 준다. 하지만 숙자가 어머니의 책임과 권리 는 사회주의 일꾼을 키워 내는 것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으 로 극을 마무리해 여성의 자아실현과 권리가 아니라 양육 차원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한계를 지닌다. 또한 숙자가 자신의 계급적 위치에 대해 뚜렷한 자각을 보여 주 지 못해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밝히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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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목>은

이웃에서 가게를 하는 두 과부가 가난에 시달리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을 통해 일제 치하 궁핍한 현실상을 그린 단막 극으로 1938년 9월 ≪조광≫에 발표되었다. 서로 싸우는 두 과부와 무대 밖에서 공장 설립으로 동리가 헐릴지 모른 다는 불안을 병치함으로써 삶의 터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는 내부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 다. 이 작품은 일제 치하의 빈곤과 삶의 질곡이라는 평범한 소재를 취급하면서도 중심인물인 두 과부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형상화하고, 생생한 방언을 사용해 극적 리얼리 티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웃집에 사는 두 과부가 가 난에 시달리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과 그녀들이 화해하는 장 면, 두 과부의 아들딸이 서로 친하게 어울리는 장면을 병치 해 근본은 순박하면서도 현실의 빈궁에 쫓겨 각박하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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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당대 민중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모니카를 잘 부는 날 라리 아재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민중으로 등장하고 있고, 그들의 집을 허물어 공장을 세우려는 세력과 삶의 터전을 뺏기지 않으려는 마을 사람들 간 대립도 무대 이면에 설정 되어 있다. 말을 더듬는 텁석부리 영감이 극 초반에 등장해 중요한 말을 하고 싶어 하다가 결말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주어진 밧줄과 철사, 쇠줄은 없다”고 외치는 장면은 이 작품의 계급 문학적인 성격을 잘 암시하고 있다. 다만 철거를 둘러싼 대 립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과부나 그들을 몰아내려는 세력에 분명한 계급적 성격을 부여하지 못한 점 등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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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金山>은

2막 희곡으로 1936년 11월 ≪조선문학≫에 발표되었다. 조 직적인 계급 운동을 지향했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 아예술동맹)가 해산한 뒤 발표된 것으로 작가가 이전에 발 표한 작품에 비해 계급적인 인식이 뒤로 물러나 있다. 연극은 실업가인 이문호가 막내딸 경순을 모자란 사람에 게 시집보내려 하는 과정을 그렸다. 문호는 큰딸과 둘째 딸 의 결혼이 실패라고 생각한다. 학식을 보고 선택한 큰사위 는 운동가가 되어 외국으로 망명했고, 돈을 보고 선택한 둘 째 사위는 사기꾼으로 복역 중이다. 이런 이유로 막내 딸 경 순은 무식한 남자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문호가 선택한 사 람은 고리대금업자의 아들 ‘황금산’다. 그런데 실제로 만나 보니 ‘황금산’은 한글도 제대로 깨치지 못한 바보였다. 문호 의 어리석은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송영은 자기 입장을 분명히 표명할 줄 아는 막내 딸 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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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을 통해 이문호의 욕심을 비판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 하고자 했다. 이전 작품에 비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해결하 는 방식이 개인 차원에 그치고 조롱과 풍자 대상이 모호해 졌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보 사위를 선택하는 게 오히려 속이 편하다는 문호의 입장은 왜곡된 식민지 현실을 반어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속임수와 오해라는 전형적인 흭극 기법을 효 과적으로 사용해 관객의 웃음을 적절히 유도하는 극작술을 보여 준다. 집단적인 감응을 조절하는 작가의 남다른 감각 은 다른 프로 극작가들과는 달리 상업극단에서 성공을 거두 는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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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은

송영이 1945년 12월, ≪예술운동≫ 1호에 발표한 단막극이 다. 친일파였던 사업가 이 사장이 해방 이후 처세를 위해 지 난 행적을 변명하고 부인하는 것을 풍자·비판한 작품이다. 해방 전후 수도 경성이 배경이다. 이 사장은 해방이 되자 시골 도회의원 강병호와 함께 연합군 편에 선다. 미군정에 아부해 다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사장의 의 지는 딸 진주의 가출과 통역 학생의 항의 때문에 좌절된다. 결국 그는 광복군의 아내이자 처와는 이종사촌 간 ‘옥천 마 님’을 서울로 초대해 처세를 위한 도구로 쓰고자 한다. 하지 만 ‘옥천 마님’은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시대가 바뀌니 금세 새로운 정치 권력에 야합하고자 하는 이 사장의 행태 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연극 마지막 장면에 언급한 황혼은 이 사장의 몰락을 암시한다.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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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당대 민중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모니카를 잘 부는 날 라리 아재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민중으로 등장하고 있고, 그들의 집을 허물어 공장을 세우려는 세력과 삶의 터전을 뺏기지 않으려는 마을 사람들 간 대립도 무대 이면에 설정 되어 있다. 말을 더듬는 텁석부리 영감이 극 초반에 등장해 중요한 말을 하고 싶어 하다가 결말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주어진 밧줄과 철사, 쇠줄은 없다”고 외치는 장면은 이 작품의 계급 문학적인 성격을 잘 암시하고 있다. 다만 철거를 둘러싼 대 립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과부나 그들을 몰아내려는 세력에 분명한 계급적 성격을 부여하지 못한 점 등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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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饗날>은

구한말에서 일제 치하로 이어지는 민족 수난사에 대한 투쟁 을 한 집안의 내력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3막 7장 작품으로 1937년 11월 ≪조광≫에 발표되었다. 43년에 걸친 시간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로 할머니 최씨가 남편 김성배 제삿날 외손자 영오에게 집안의 비극사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하고 최씨의 이야기에 따라 무대에서 과거 사건이 펼쳐지는 형식 으로 구성했다. 1막은 43년 전 김성배가 동학군 접주로 활약하다가 실패 한 뒤 죽임을 당한 일을 다루고 있으며, 2막은 18년 전 최씨 의 아들 영수가 자라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상해로 피신 한 다음 소식이 끊긴 사건을 다루고 있다. 3막에서는 영수의 아들 상인이 영오에게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이야기해 주고 영오가 최씨에게 상인이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면서 극이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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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동학농민운동, 3·1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가 담한 성배−영수−상인 3대의 삶을 겹쳐 놓음으로써 저항 과 투쟁의 계보를 설정하고 이것이 후대까지 계승될 것임을 암시한다. 특히 3막에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 우스 신화는 식민지 현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역사 속에 서 실천이 갖는 의미를 강조하는 상징으로 쓰였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시간 구조는 역사에서 저항과 실천이 갖는 의미를 현재 시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무대 와 관객 사이에 비판적 거리를 마련해 준다는 의의를 지닌 다. 또한 최씨 이야기에 따라 과거를 재현할 때 사용한 잦은 장면 전환은 채만식이 영화 기법을 의도한 것으로, 당시 무 대 환경에서는 공연되지 못했지만 현대극적인 기법을 수용 했다는 점에서 형식상 오히려 주목할 만한 요소라 할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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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僧>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미승을 주인공으로 해 인간적인 욕 망과 사랑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단막극이다. 원제는 ‘도 념’이었으며, 함세덕이 1947년에 출간한 희곡집에서 ‘동승’ 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사냥꾼과 비구니 사이에서 태어나 주지스님에게 키워진 도념은 어머니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속세를 동경한다. 아들을 잃고 불공을 드리러 온 미망인은 도념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끼고 그를 수양아들로 삼으려 하고, 도념도 그녀 를 따라가고 싶어 한다. 이를 말리던 주지스님이 겨우 허락 할 즈음 도념이 토끼를 살생한 일이 발각되어 미망인과 도 념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도념은 눈 오는 어느 날 몰래 절을 떠난다. 이 작품은 세속적인 인정(人情)의 길과 종교적 초월의 길 사이의 갈등을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시적 언어와 뛰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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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술로 다루고 있다. 텍스트의 표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어린아이의 그리움이 표출되고 있지만 심층에는 이 그리움 과 욕망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화두로 고 양되고 있으며, 부모의 업보를 보속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주지와 도념 간 갈등과 정심, 초부 등 도념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구도의 자세까지 문제 삼고 있다. <동승>은 깊은 산 속에 위치한 절을 배경으로 그리움 과 고독의 이미지를 적절히 배치해 도념이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마음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토끼 덫을 친 사실 이 작품 초반에 제시되면서 이 사실이 발각되기까지의 긴장 감을 높힌다. 또한 토끼 살생이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도념의 하산이 좌절되는 결말의 비극성을 고조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극연좌가 1939년 3월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유치진(柳致眞) 연출로 공연했으 며 이후 1991년 극단 연우무대가 재공연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해 작품성과 대중성 측면에서 두루 성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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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衣島 紀行>은

고기잡이 배를 타지 않으려는 천명과 그를 바다로 내보내려 는 공주학의 갈등을 통해 어른들의 욕망에 희생당하는 한 어린아이의 비극을 드러내고 있는 2막 작품으로, 1941년 4 월 ≪인문평론≫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보통학교를 첫째로 졸업한 천명을 데릴사위 삼아 의사로 만들겠다는 한의사 구 주부와 그를 뱃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외숙부 공주학의 갈등을 주된 축으로 하고,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가난 때문에 결국 천명을 바다 에 내보내는 부모와 그 때문에 죽음을 맞는 천명의 비극을 보여 준다.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천명은 배를 타지 않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결국 바다에서 죽음을 맞는 운명에 굴복한다. 이러한 천명의 운명을 통해 함세덕은 자 연 또는 운명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할 수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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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없는 인간의 비극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어민들의 생존 을 위협하는 바다를 파도소리와 발동선 소리 등 청각적인 기호로 표현해 운명의 위압적인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으 며, 천명을 가르쳤던 젊은 소학교 교원이 천명의 죽음과 다 른 동사들의 죽음이라는 후일담을 담담하게 낭독하는 형식 을 취함으로써 비극성의 과잉을 피하고 사실성을 강화했다. <무의도 기행>은 천명의 두 형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 었고 누이도 청국에 팔려 갔다는 전사와 고깃배를 타는 어 민들의 모습을 통해 어민들의 곤궁한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 하면서 어민들이 겪는 비극성을 식민지 시대의 궁핍 속에서 형상화한다. 특히 낙경 부부의 전사를 통해 생업을 버리고 전업할 수밖에 없었던 화전민들의 궁핍한 실상, 일본인 중 선의 개입으로 인한 식민지 조선의 딱한 어업 현실을 형상 화해 천명의 가족이 겪는 비극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식민 치하 어민 모두가 겪는 궁핍한 삶의 형상으로 확 대되고 있으며 그 원인이 일제의 경제 수탈에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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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氏 一家>는

1939년 7월 ≪문장≫에 발표된 단막극이다. 송영이 상업 극단 작가로 활동할 때 발표한 것이지만 그 취향에만 함몰 되지 않으려던 노력이 깃들어 있다. 극은 오십대 노동자 윤희중의 집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는 20년 동안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학력이 낮다는 이유로 감독으로 진급하지 못했고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간 다. 윤씨가 다니는 공장 사장은 감독 승진을 미끼로 윤씨의 딸 세숙을 첩으로 줄 것을 제안한다. 윤씨는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강직한 성품을 가졌지만 가난한 현실이 그의 마음을 흔들고, 결국 사장 제의를 수락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큰 아들 세현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집을 떠난다. 세현이 남 긴 편지를 읽고 윤씨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해고를 무릅쓰고 혼담을 거절한다. 이 작품은 가난하지만 바르게 살아가려는 윤씨 일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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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어렵고 혼탁한 현실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1930년대 풍자를 통해 비판을 유도 했던 작가의 주된 극작술에서 벗어나 희극적인 요소가 배제 된 채 노동자 집안의 일상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윤씨 일가의 가난한 삶은 노동자의 힘겨운 생활 과 그들이 처해 있었던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특히 윤 씨가 감독으로 승진하는 것과 해고 사이에서 겪는 고통은 윤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전체의 삶이라는 집단 차원의 고민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1930년대 후반에도 작가 의 진보적 세계관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 극은 세현의 가출이라는 결말이 극 전체의 통일 성을 깨뜨린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이 라는 장치를 자주 활용하던 당대 상업극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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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巖>은

백제 멸망사를 통해 식민지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며 망 국의 비애를 담아 낸 작품이다. 한 나그네가 금강과 반월성 의 폐허를 바라보며 이광수의 시 <사자수>를 나무에 새 기는 프롤로그로 시작해 의자왕 재위 말년, 위기에 처한 백 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기까지 그 과정을 4막 으로 그려 내고 있다. 함세덕은 <落花巖>에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의자왕과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신라의 밀정과 내통하는 임자, 역모를 꿈꾸는 둘째 왕자 태를 통해 백제 멸 망 원인이 향락에 빠진 무능력한 왕과 백제 내부 분열에 있 는 것으로 형상화했다. 성충, 흥수 등 충신과 의자왕의 셋째 아들 융(륭)이 백제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데도 결국 백 제는 멸망한다. 이를 통해 내부 분열을 경계하고 망국한 현 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서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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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4막에서 의자왕 일행이 초라하게 피난을 가는 장면 과 고구려로 원군을 청하러 간 융(륭)이 신라군에게 잡혀 수 모를 당하는 장면, 궁녀들이 신라군에게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통곡하며 낙화암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망국민이 당 하는 수모를 전면에 내세운 것으로 이 작품의 비극성을 고 조하고 비분의 감정을 극대화한다. 또한 백제의 궁궐을 재현하는 등 무대를 압도하는 스펙 터클, 시나라 왕비가 융(륭)을 독살하려다가 실패한 뒤 자살 하는 장면과 융(륭)과 연희가 신라군에게 십자가형을 당하 는 장면 등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장면, 애상적인 정조가 흐 르는 음악, 고전적인 언어의 아름다움, 충신과 간신들 사이 의 중심 갈등 속에 왕자 융(륭)을 둘러싼 애정 갈등을 용해 한 극작술로 대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망국민의 설움을 드 러내고 있다. 1940년 1월부터 4월까지 ≪조광≫ 에 실렸으 며, 1944년 6월 현대극장에서 3막 4장으로 개작되어 안영일 연출로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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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燈盞불>은

1940년 2월 ≪문장≫에 발표되어 1942년 1월 극단 성군이 동양극장에서 공연했다. 1941년 10월 연극보국주간 공연 작품으로 극단 고협이 무대에 올린 작품과는 제목이 같으나 별개 작품으로 간주한다. 총 3막인데, 뚜렷한 중심 사건 없이 다양한 에피소드가 전개되는 게 특징이다. 1막에서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 하고 가난 속에서 방황하는 간도 이주민들의 모습을 소개하 는데, 이를 통해 조선 민중이 처한 피폐한 현실을 알 수 있 다. 2막과 3막에서는 본격적으로 인물을 둘러싼 여러 갈등 이 전개된다. 최가와 선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함흥 집이 다른 남자에게 선부를 팔려고 하므로 둘의 사랑은 장 애에 부딪친다. 누군가가 뽕나무 군수의 돈을 훔쳐 가는 사 건이 일어나는 한편, 박가는 사랑을 약속했던 금분이에게 배신당하고 절망에 빠진다. 그러던 중 선부는 소설가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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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에게 소 구루마꾼 여럿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최가가 죽은 것으로 오해해 자살한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 황이 벌어지는 속에서도 몽술 아버지는 아들을 얻어 기뻐하 고, 채표광은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아갈 길을 찾았다며 편 지를 보내온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우리 공연 예술에 대해 탄압을 강화 했던 시기에 쓰인 작품인 만큼 소설가 이우촌과 신문 지국 장의 대화, 채표광의 편지 내용 등에서 일제 정책을 적극적 으로 지지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 에서도 ‘등잔불’처럼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밝히며 살아가는 조선 민중의 삶과 정서를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1940년대 희곡 중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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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黨>은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민중 혁명과 계급을 초월한 사랑의 좌절을 함께 그린 작품이다. 전체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단 아랑이 1941년 5월 2일부터 3일 동안 부민관에서 초연 했으며 이후 아랑의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김성현을 비롯해 부패한 양반들은 향교에 불을 지른 범 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박달을 심문한다. 한편 이들에게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은 농민 수만은 김성현의 아들 상수와 우정을 나누고 상수의 여동생 윤주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차에 전봉준 밑에 있던 수만의 형 수영이 돌아와 봉 기를 일으키고, 동학군은 김성현을 잡아들인다. 윤주에 대 한 사랑 때문에 번민하던 수만은 동료들의 눈을 피해 김성 현 일가를 놓아주고 이 일로 수영과 수만 형제는 갈등한다. 박달의 도움으로 동학군에서 빠져나온 수만은 김성현 일가 와 도망쳐 산골에서 생활하는데, 패배해 쫓겨 올라온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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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에게 은신처를 발각당한다. 수영은 수만에게 총상을 입 히고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채 무리와 함 께 떠난다. 동학군이 떠나자 김성현은 부상당한 수만을 버 려 두고 윤주, 상수만 데리고 돌아간다. 수만은 동료들을 배 신하고 김성현을 살려 준 것을 후회하며 뒤늦게 잘못을 뉘 우친다. 천민들의 정절은 불가하다고 말하는 양반들과 계급 여하 를 막론하고 절개를 지닐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낙네가 대 립하는 첫 장면, 수만과 상수가 신분을 바꿔 <춘향전> 역 할놀이를 하는 장면을 통해 계급 문제를 전면에 부각하고 신분 질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보여 준다. 또한 양반의 딸 과 농민의 아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설정은 동 학농민운동에 내재한 평등 이념, 동학혁명의 정당성을 전달 하는 데 기여한다. 이 극은 ‘동학’을 소재로 한 동시에 이를 상민 수만과 양 반 윤주의 애정 갈등 뒤에 놓이게 함으로써 상업성을 획득 하고 검열을 피하는 이중의 효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또 한 박달과 수영이라는 주변 인물을 통해 사건 전개 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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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동학 이념과 혁명의 정당성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도록 배 려했다. 혁명에 대한 민중의 각성을 극 말미에 비로소 강조 하는 것은 검열을 의식한 고심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전하는 대본은 1947년 낙랑극회 공연 대본이며 함세 덕의 손질을 거친 것이다. 이재명이 발굴해 처음 지면에 소 개한 ≪현대문학≫(1993. 12)에는 함세덕이 손질한 부분이 별도로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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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氷花>는

1935년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까지 연해주를 배경 으로 조선인 이주민의 현실을 극화한 작품이다. 극단 고협 이 전창근 연출로 1942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부민 관에서 공연했다. 영철은 애인 순영과 함께 연해주로 건너가 소련 국경수 비대인 76연대 대원이 된다. 하지만 소련의 조선인 강제 이 주 정책에 반대하다 투옥된다. 감옥에서 탈출한 영철이 순 영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쫓기는 사이 순영은 소련 관리의 첩이 된다. 순영은 영철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다른 남자의 첩이 되어 그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 때문에 죄 책감을 느껴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철은 나중에야 모 든 사실을 알고 순영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영철도 모든 게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지키기 위한 순영의 희생이었다 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강제 이주 위기에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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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이웃들을 일본인 선장 배에 태워 조선으로 돌려보내려던 순영은 영철도 아이와 함께 떠나 살아 주기를 바란다. 순영 이 영철을 설득하는 사이 소련 관리가 들이닥치고, 그가 영 철을 향해 쏜 총에 순영이 맞아 숨진다. 제1회 연극경연대회 참가작이었던 이 작품은 소련의 위 선과 허위를 비판하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방상칠과 자신에게 냉담했던 박영 철을 구해 조선으로 데려가는 은인 무라카미(村上) 선장 등 이 등장해 친일극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큰 일’을 하겠다며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조씨와 그런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아들임을 숨기는 강 포수가 만들어 내는 멜로드라마 구조, 연해주에서 척박한 땅을 일 구며 힘겹게 살아가던 조선인들이 강제로 내쫓기는 현실은 친일 색채를 약화하는 대신 조선적 정체성을 강화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조선 정서를 환기하는 음악이 빈번 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인이라는 공동체 감각을 불러일으키 고 있다. 무대에 울려 퍼지는 강 포수의 퉁소 소리, 방 첨지 의 자장가, 약상인이 손풍금을 연주하며 부르는 조선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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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강제 이주에 따른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와 비애를 표 현하고 이주민들의 비극성을 고조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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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木>은

1944년 ≪국민문학≫에 발표한 단막극 <마을은 쾌청> 을 개작해 1947년 4월 ≪문학≫에 발표한 3막 극이다. 마을 지주인 박거복의 고목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해방 직후 미 군정기에 벌어지는 계급 갈등 및 지주와 정치 세력의 결탁 을 형상화했다. 장마와 폭우로 마을 가옥이 침수된 어느 날 오 각하가 마 을을 방문하자 마을 사람들은 오 각하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렌다. 지주인 박거복도 삼대째 내려오는 오백 년 된 행자 나무로 바둑판과 화로를 만들어 오 각하에게 바쳐 미군정 아래에서 자기 지위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생계를 꾸릴 밑천으로 삼기 위해 나무를 팔라는 처남 영팔의 부탁 과 수해 복구를 위해 나무를 기부해 달라는 청년 지도자 하 동정의 청을 거절한다. 함세덕은 이 작품에서 해방 직후 상황을 수해 복구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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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비유해 형상화했다. 수해 복구 작업 주체는 좌파 단체 청 년단으로 설정했는데, 하동정, 진이와 같은 청년 세대는 박 거복, 곽 목사, 윤 군수 등 과거 일본에 협력했던 전력을 지 니고도 이에 대한 반성 없이 해방 후 정치권력과 결탁해 기 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물들과 대립한다. 이들 청년 세 대에게 거복의 집에 있는 5백 년 된 행자나무는 뿌리가 썩고 벌레가 가득한 나무로, 뿌리째 뽑아내야 할 봉건 잔재이자 일제 잔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오 각하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데 오 각하를 만나 고 온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을 복구할 만한 역량 있는 인물이 아니라 부패한 정치인으로 형상화된다. 이에 3막에서 오 각하에게 실망한 인물들이 하 동정과 힘을 합해 거복과 대치한다. 이들이 고목을 청년단 에 기부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고목은 잘린다. 이러한 결말 은 봉건 의식과 일제 잔재를 타파하고 새로운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함세덕의 이념 지향을 드러낸다. <고목>은 한정된 시간 내에 벌어지는 갈등과 전개의 치밀한 짜임새, 고목의 상징성, 거복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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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경제·세대 갈등, 고목이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도 다른 사람들의 기쁨과 거복의 아쉬움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는 적절한 힘의 배분 등 뛰어난 극작술을 보여 주는 작 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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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 봉사>는

고전소설 ≪심청전≫을 각색한 작품으로, 1936년에 집필한 것과 이를 개작해 1947년에 ≪전북공론≫에 발표한 것 두 종류가 있다. 두 작품 모두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을 대가로 인당수에 빠진다는 ≪심청 전≫의 기본 플롯을 차용했다. 하지만 원작의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거부하고 배경을 현실 세계로 한정하면서 비극적 결말을 택하고 있어 주목된다. 7막 19장으로 구성된 1936년 <沈 봉사>에서 심청은 인당수에 빠진 뒤 환생하지 못하고, 대신 장 승상 부인에게 심청의 효성을 전해 들은 왕후가 맹인 잔치를 연다. 심 봉사 가 잔치에 오자 왕후는 궁녀에게 심청 행세를 하도록 시키 는데, 심 봉사는 딸을 만났다는 기쁨에 눈을 뜨지만 곧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고 자신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이 딸을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눈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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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6장으로 구성된 1947년 <沈 봉사>는 심 봉사가 ≪맹자≫를 읽는 장면으로 시작해 그가 지닌 출세에 대한 욕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맹자≫에 등장하는 ‘조장’ 의 우화를 통해 그의 어리석음을 풍자했다. 이 작품에서는 ≪심청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심청을 사랑하는 송달과 송달을 짝사랑하는 주모 홍녀가 등장하는데, 심청이 죽은 뒤 심 봉사를 위로하고자 두 사람이 꾸민 거짓 연극에 눈뜬 심 봉사가 다시 스스로 눈을 찌르는 결말이다. 심청이 되살아나지 못하는 <沈 봉사>의 현실적인 세 계관에서 심청은 효의 상징이 아니라 희생양으로 탈바꿈한 며, 그녀의 효성보다 심 봉사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강조된 다. 또한 눈을 뜨게 된 심 봉사가 자신의 이기심을 깨닫고 다 시 스스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된다는 아이러니와 심청이 죽 은 뒤 심 봉사 주변 인물들이 그를 돕기 위해 심청 행세를 하 지만 그 거짓이 더 큰 비극을 초래하는 상황은 이 작품의 비 극성을 강화한다. 1936년 <沈 봉사>에는 <제향날> 등 앞선 작품에서 시도했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장면을 사용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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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할 만하다. 왕후가 선인 중 한 사람이었던 장 봉사에게 심청을 인당수에 빠뜨린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서 무대는 과 거로 이동, 극 중 현재와 과거 장면이 교차하는데, 이를 위해 이중무대를 사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채만식이 무대에서 어떻게 영화적 기법을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 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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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脈>은

3막 4장으로 구성된 사실주의 희곡이다. 광복 직후인 1947 년 서울 성북동 방공호를 배경으로 도시 빈민들의 삶을 그 렸다. 털보 영감은 복덕방을 운영하며 어느 정도 돈을 벌었지 만 시치미를 뗀 채, 땅굴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아들 거북이 를 미군 부대로 보내야 한다고 성화다. 깡통의 후처 옥매 역 시 전처 소생인 복순이를 기생으로 보내 땅굴 생활을 청산 하고 싶어 한다. 한편 원팔은 담배를 팔아 가족들 생계를 책 임지고 있다. 아내 한씨는 폐병으로 몸져 누워 있고 어머니 가 살뜰한 보살핌과 기도로 그녀를 지킨다. 대학 교육까지 받고도 변변한 직장 없이 방황하는 이상주의자 동생 원칠과 는 매사 갈등을 빚는다. 이들과 함께 댄스걸 옥희, 이발사, 우동집 주인 등이 등장해 당대 빈민들의 삶을 보여 준다. 방공호 세 채를 병치한 무대 연출은 각각의 공간에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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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시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로 관객의 시선을 분산한 다. 그와 함께 1막에서는 깡통네, 털보네, 원팔네 이야기가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펼쳐지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 중심 사건이나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혈 맥>은 극을 끌어 가는 중심 인물들을 분산하고 막에 따라 이들을 중심으로 한 사건을 교차하다가 결말에서 세 가족의 이야기를 한데 묶으며 주제 통일성을 잃지 않는다. 중심 사 건들의 유기적 통일성과 단일성을 거부한 이런 구성은 작가 의 주관이 조정자나 개입자가 아니라 관찰자로서만 기능하 도록 한다. 1948년 1월 4일 박진 연출로 극단 신청년이 초연했으며 같은 해 6월 문교부 주최 제1회 전극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해 작품상, 연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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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랑>은

유치진이 국립극장 초대 극장장을 맡아 1950년 국립극장 개관 공연을 위해 쓴 작품이다. 상연 당시 대단한 흥행 성적 을 기록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나오는 원술 이야 기를 소재로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는 한편 진달래와 사랑 이야기를 더해 대중성을 높였다. 원술은 분란을 일으켜 신라를 차지하려는 당나라의 야욕 에 맞서 싸움터에 나갔다가 패한다. 겨우 목숨을 건져 집으 로 돌아오지만, 화랑의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어겼다 는 이유로 김유신에게 크게 혼나고 쫓겨난다. 우연히 알게 된 시골 처녀 진달래와 떠돌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원술은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집에 찾아가지만 외면당 한다. 아버지의 시신조차 보지 못하고 다시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원술은 우연히 전쟁에 참가할 기회를 얻어 위기에 놓인 신라를 구한다. 왕은 원술에게 상을 내리지만 그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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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히 거절하고 진달래와 함께 길을 떠난다. 작품이 쓰인 1950년 무렵이 좌우 이념 대립과 외세 개입 으로 혼란했던 시기였던 것을 고려할 때 나당전쟁을 배경으 로 한 이 작품은 당시 정세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우리 민족을 이념적으로 분열시킨 외세를, 외세에 맞서 통일을 이룬 신라는 남한 사회를 상징한다. 이때 주인 공 원술은 국가와 아버지를 실망시켰던 자신을 반성하고 나 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긍정적인 민족 주체로 그려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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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은

해방과 6·25를 거치며 붕괴되어 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세대 갈등을 극화한 3막 4장 장막극이다. ‘현재− 과거−현재’라는 회상 구조를 띠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 간 대립과 몰락을 그려 당대 한국 사회가 겪었던 변화를 날카 롭게 포착해 냈다. 극은 아버지 박기철이 갑자기 사망하고, 아버지가 살인 을 했을 리 없다는 아들 종달의 절규로 시작한다. 해방 전 사 업으로 막대한 재력을 자랑하던 기철은 종달과 종수, 애리 삼 남매를 누구보다 편안하게 키우고자 한다. 특히 장남 종 달에게는 자기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못하게 하고, 편안 히 가업을 물려받으라고 강요한다. 종달은 이런 아버지에게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 아버지를 이해하는 애증을 드러낸다. 해방 후 기철이 정치에 뛰어들면서 가세는 급격 히 기울고 전쟁 통에 둘째 아들 종수가 죽는다. 이후 기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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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업자 임봉우에게 빚 독촉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임봉우가 술집 계단에서 굴러 사망하는 사 건이 발생하고, 형사는 이를 단순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 고 의심해 임봉우와 채무 관계로 얽혀 있는 기철을 조사한 다. 하지만 이 일이 종달에 의한 우발적 범행이었다는 사실 이 드러나고, 종달에게 모든 사실을 들은 기철은 충격으로 쓰러져 죽는다. 박기철 가족의 몰락에는 해방과 6·25라는 역사적 사실 과 함께 다양한 욕망이 얽혀 있다. 집안 사정은 고려하지 않 고 미국 유학을 고집하는 애리, 무리하게 그녀를 돕는 어머 니 덕실, 일하지 않는 남편 대신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인주, 이들은 당시 빠르게 변하는 가치로 인한 사회 혼란을 잘 보여 준다. <가족>의 무대 공간은 아버지와 아들, 딸의 공간과 그 외의 공간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인물들의 말에 따라 해당 공간을 조명으로 부각하면서 설명과 회상을 이어 나간다. 플래시백과 같은 장면 전환은 감각적인 무대 연출을 가능하 게 한다. 또한 이 작품은 극의 처음과 끝에 같은 장면을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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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극적 효과를 높였다. 기철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 은 그 죽음이 살인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암시를 주고 바 로 회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기철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종달의 회상이 이어지다 다시 기철의 죽음으로 회귀하는 구성은 기철이 겪어 왔던 풍파와 기철에 게 떳떳이 맞서지 못한 종달의 고뇌,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해 등을 포함하면서 세대 갈등은 물론 화해까지 담아낸 다. 이 작품은 1957년 국립극장 장막 희곡 공모 당선작으로 이듬해 4월 이원경 연출로 국립극단이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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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毛地>는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최 노인 일가의 비극을 통해 전후(戰後) 한국 사회의 어둡고 불안한 시대상을 그려 냈 다.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7년 9월 ≪문학예술≫에 발표되었으며, 1958년 7월 김경옥 연출로 제작극회가 공연 했다. 전통 혼구를 대여해 생계를 꾸리던 최 노인은 결혼식 문화 가 신식으로 바뀌면서 가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급 변하는 사회에 맞춰 가자는 자식들 요구에도 아버지가 지어 준 낡은 기와집에 집착하는 최 노인의 완고함, 제대 후 고학 력 실업자로 방황하는 경수의 무력함, 부와 명예를 얻기 위 해 영화배우를 꿈꾸는 경애의 허황된 욕망이 사건을 이끌어 간다. 결국 경수는 권총으로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체포되 고 경애는 신입 배우 모집 심사 위원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하자 자살한다. 아들이 체포되어 떠난 뒤 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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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를 발견한 최 노인의 비통한 절규와 함께 막이 내린다. 종로의 번화한 빌딩 상가 사이에 위치한 낡은 기와집이라는 무대 공간과 전통 혼구와 신식 면사포의 대조, 무대에 들려 오는 재즈 음악은 서구 문화와 전통이 충돌했던 전후 사회 의 모순을 압축적으로 형상화한다. 또한 햇빛을 가리는 빌 딩 때문에 생명력을 잃어 가는 화초, 빌딩에서 내보내는 폐 수 때문에 뿌리가 썩어 가는 나무는 어둡고 불안한 현실에 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최 노인 일가를 은유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구세대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세대를 비극으로 몰아 가며 1950 년대 한국 사회의 현실을 형상화한 세태 고발적인 작품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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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江은 흐른다>는

전쟁 중 폐허가 된 서울에 남은 사람들의 비참하고 피폐한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 준 작품이다. 막과 장 구분 없이 22경 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너져 가는 가옥,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포성, 남루한 인물의 모습 등을 통해 전쟁 중의 불안 함을 잘 그려 냈다. 전쟁 전 약혼식을 올렸던 희숙과 철은 6.25가 터지자마 자 헤어졌다가 서울에서 재회한다. 희숙과 철은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결혼식을 올리려 하지만 주변 상황은 녹록 지 않다. 철은 한때 인민군으로서 납북된 희숙의 오빠, 안 화백을 밀고한 당사자였던 것이다. 이 일로 안 화백의 아내 이자 희숙의 올케인 정애에게 냉대를 받는다. 한편 희숙은 전쟁 중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폭탄이 터질 때 파편을 맞 고 한쪽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다. 정애의 반대와 가슴의 상 처 때문에 희숙은 철을 밀어내고, 이런 사정을 모르는 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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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거부하는 희숙에게 분노해 동네 협잡꾼 클레오파트 라와 미꾸리와 함께 다니며 폭력을 일삼는다. 그러나 삼룡 을 통해 희숙이 여전히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것을 안 철은 지난날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정애 역시 철을 용서하기로 한다. 철은 희숙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희숙은 가슴에 난 상처를 차마 철에게 말하지 못하 고 함께 떠나기로 한 날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漢江은 흐른다>는 전쟁 중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 은 희숙과 철을 포함해, 전쟁을 기회로 돈 벌기에 혈안이 된 소장,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클레 오파트라, 그리고 그녀에게 기생하는 미꾸리, 댄스홀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는 로오즈매리 등 다양한 인간 군 상을 보여 준다. 이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 도덕적 가 치가 무너져 버린 서울을 그렸다. 댄스홀을 배경으로 춤을 주는 장면이나, 클레오파트라가 철을 유혹하는 장면, 로오 즈매리가 마음을 주었던 소장에게 배신당하고 절망하는 장 면은 퇴폐적이고 냉소적인 절망감을 부각한다. 이 작품은 큰길을 중심으로 희숙과 정애가 살고 있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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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벽돌 건물과 클레오파트라와 미꾸리가 함께 사는 양식 목조건물, 소장이 돈 벌기 위해 마련한 전재민 구호소가 있 는 한식 목조건물 등을 움직임 없이 무대에 고정하고, 스포 트라이트를 통해 장면을 전환한다. 페이드인(F.I), 페이드 아웃(F.O) 같은 시나리오 용어를 사용해 마치 영화에서 신 을 구분하듯이 경을 구분했다. 이런 장면 전환은 대형 무대 장치가 필요한 이 작품에 효율성을 더한 방식으로, 사실주 의 희곡의 독특한 양식 실험을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치진이 1956년 미국 등 해외 연극계를 시찰하고 돌아 와 쓴 첫 작품이자, 작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사상계≫ (1958. 9)에 발표되었다. 극단 신협의 제51회 상연 대본으 로, 국립극장에서 이해랑이 연출을 맡아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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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불>은

전쟁 때문에 고립된 채 여자들만 남은 마을을 배경으로 그 녀들의 성적 욕망 좌절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드러낸 작 품이다. 1962년 12월 25일부터 29일까지 이진순 연출로 국 립극단이 국립극장에서 공연했으며, 1963년 5월부터 7월까 지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다. 마을을 감싼 험준한 천왕봉 아래 양씨와 최씨의 집이 대 칭으로 서 있다. 그녀들은 좌익과 우익에게 각각 아들과 사 위를 잃었다. 이런 구도는 산을 장악하는 세력이 바뀔 때마 다 희생당하는 민중의 삶을 형상화한다.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마을을 점령하는데 그때마다 남자들은 죽거나 끌려 간다. 마을에 남은 유일한 남성이 치매에 걸린 김 노인이라 는 점과 공습에 놀라 정신을 놓게 된 귀덕이라는 인물은 이 마을의 비정상성을 강화한다. 항상 ‘밥’을 찾는 김 노인과 아 이들과 성적인 놀림을 주고받는 귀덕은 이 마을의 경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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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결핍을 환기한다. 고립된 마을과 달리 마을 밖은 가난 과 성적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 자아를 실현 할 수 있는 세계로서 의미를 지니며, 이 때문에 젊은 여성들 은 마을을 떠나고자 한다. 산에서 탈출해 마을로 숨어 들어온 규복을 점례가 대밭 에 숨겨 주고 사월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점례와 사월에 게 은폐되어 있던 욕망이 표면적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로 이어진다. 산을 장악한 세력이 다시 바뀌 고 사월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국군이 대밭을 태우며 기관총을 난사해 규복을 사살한다. 이때 곧 사월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무대에 전달된다. 규복과 사월의 죽음으 로 점례는 규복과 관계를 숨길 수 있게 되었지만 심각한 정 신적 파괴를 겪는다. 작품은 계절 순환과 애욕, 임신, 죽음으로 이어지는 긴장 감 있는 서사 전개가 맞물리며 커다란 비극적 효과를 거둔 다. 마지막 장면에서 들려오는 기관총 소리와 폭탄 터지는 소리, 그리고 대나무 밭에 불붙는 소리 등 대밭을 비롯해 마 을이 파괴되는 소음과 대밭을 태우는 산불은 점례의 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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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와 맞물린다. 이는 개인의 원초적인 욕망조차 억압하는 전쟁의 잔혹함과 이데올로기의 공허함이라는 주제를 효과 적으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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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 있사옵니다>는

한 청년의 출세기를 통해 배금주의 풍조를 아이러니하게 그 려 낸 작품이다. ‘국물도 없다’는 표현을 반어적으로 활용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향해 전진하는 인간상을 서사극 적 요소로 다룸으로써 풍자 효과를 내는 작품이다. 주인공 김상범의 변화는 개발이라는 집단적인 열망 속에 빠르게 변화하던 1960년대 시대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는 처음에는 소심하고 어리숙한 젊은이로 등 장한다. 하지만 우연히 출세하는 법을 깨달은 뒤로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 된다. 특히 그의 처 세술은 양심과 도덕 규범을 쉽게 위반하게 만든다. 결국 김 상범은 상대방 약점을 이용해 회사 중역 자리까지 오르지만 내면은 이를 데 없이 공허한 인물로 전락한다. 이근삼 특유의 희극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서사극 요소가 두드러지면서 연극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독백이나 설명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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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해설을 통해 사건 중간 과정과 인물의 심리를 보조 설명 한 것은 전 시대의 리얼리즘 극 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방식 이다. 이렇게 <국물 있사옵니다>는 서사극, 소극, 우화극 요소를 두루 활용해 개방적이고 익살스러운 사회 풍자극을 완성한다. 1966년 5월 극단 민중극단이 양광남 연출로 초연했다. 1998년 이근삼희극제에서 정진수 연출로 명보아트홀에서 재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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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부결(人間否決)>은

4막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연극은 한빈 교수의 사택을 배경 으로 그 가족을 통해 당대 만연했던 허영과 비리, 출세주의 를 풍자한다. 청렴하고 올곧은 심성으로 알려진 교수 한빈 의 가정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당시 사회 풍조를 통해 보여 준다. 재산을 불리고자 하는 큰아들 철과 성품이 경박한 처남 사달, 부인 김 여사는 한빈 교수의 지위를 이용해 돈을 받고 부정 입학을 중개한다. 집을 양실로 꾸미겠다는 김 여사의 속물근성과 부정 입학을 해서라도 명문대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학생의 시도는 산업화가 본격화하던 시기 윤리 규범을 벗어나 다양하게 분출되던 욕망이 만들어 낸 그림자다. 사회 비판적이며 풍자적이면서도 희극적인 구성을 통해 재미를 더했다. 김 여사와 사달 등의 인물들은 부정을 저지 르지만 다소 모자란 인물로 희화화했으며, 한빈 교수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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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올곧은 성품 때문에 오히려 어리석은 인물처럼 비 친다. 하지만 다양한 사건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은 비 극적인 색채가 짙다. 한빈 교수는 부인이 기획한 비리 건 때 문에 불명예를 안게 되며, 부잣집에 시집을 가기로 한 막내 딸 미정은 미국 유학에서 실성한 상태로 돌아온다. 이처럼 초반에는 평화롭던 한빈의 가정이 파탄 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속물근성을 폭로하고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창출 한다. 1966년 국립극장에서 극단 광장이 이진순 연출로 공 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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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薔薇의 城>은

윤병희의 병적 심리와 가족 간 갈등을 통해 여성의 성적 욕망 과 동성애 담론을 다룬 작품이다.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명한 여류 조각가 윤병희는 외부와 접촉하지 않고 장 미원을 가꾸며 시어머니와 딸 상애와 살아간다. 윤병희가 외부와 단절된 폐쇄적인 장미의 성을 구축한 것은 남편의 동성애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다. 남편의 비밀을 알고 윤병 희는 심한 모멸감을 느끼며 남편을 쫓아내는데, 그 뒤로 그 녀는 병적인 성적 욕망을 갖게 된다. 그녀는 남편을 닮은 영 택을 딸 가정교사로 채용해 그로부터 남편 부재를 보상받으 려 한다. 그러나 딸이 영택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둘을 떼어 놓기 위해 영택을 해고한다. 이 사실에 분노한 딸은 윤 병희의 위선을 폭로하고 비난하면서 그녀가 아끼던 수캐를 쏘아 죽인다. 이 작품의 공간은 응접실, 화실, 무대 뒤쪽 장미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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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은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수난사를 한 여인의 삶으로 집약하고, 그녀를 통해 수난에도 좌절하지 않는 의지를 형 상화한 3막 4장 희곡이다. 토속적인 전라도 방언으로 사실 적인 대사를 구사하고 있으며 간난 노파라는 완고하고 강인 한 인물형을 생생하게 창조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달집>은 민족 수난사를 남성이 당하는 상해와 죽음, 여성이 당하는 치욕으로 형상화했다. 간난 노파는 제대를 앞둔 큰손자 원식과 빨치산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은손자 만 식을 기다리지만 원식은 실명해서 돌아오고 만식은 소식이 없다. 게다가 원식의 아내 순덕은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에 게 겁간당한 뒤 자살한다. 극 중 인물의 대화를 통해 간난 노 파의 남편은 3·1 만세 운동으로 투옥되고 큰아들은 북해도 탄광으로 징용 갔다가 죽었으며, 간난 노파는 남편 면회를 갔다가 일본 헌병에게 가슴을 헤쳐 보여야 했던 전사가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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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난다. 둘째 아들 창보의 아내 역시 해방 후 남하하다가 맞 닥뜨린 러시아군에게 겁간을 당한 사실이 밝혀진다. 간난 노파는 남편과 아들이 부재한 가운데 억척스럽게 집안을 지키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데, 그녀의 극성스러 운 성미와 강인한 생명력은 숱한 수난에도 집안을 유지하는 힘인 동시에 겁간당한 창보의 아내와 순덕을 자살하게 만드 는 원인이기도 하다. 과거의 치욕을 부정하려는 간난 노파 의 태도는 아내와 순덕을 포용하려는 창보의 태도와 대별되 며 과거 수난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던 지고 있다. 작품의 시간 배경인 정월 대보름과 대보름 풍속 중 하나 인 ‘달집’은 이 작품의 비극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2막 에서 간난 노파는 증손자에게 연을 달집 꼭대기에 높게 매 달아 훨훨 태울 것을 당부하는데, 보름달이 풍요의 상징이 고 불이 모든 부정을 살라 버리는 정화의 상징이라 할 때 이 는 수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난 노파의 바람을 피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극은 손자며느리의 자살로 마무리되면서 민중이 겪는 좌절의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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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극대화한다. 원식과 순덕이 해로하고 만식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는 점괘를 믿으며 간난 노파가 갖는 희망과 기대가 극이 진행되면서 반전되는 기법도 비극적 결말의 아 이러니를 심화한다. 1971년 ≪연극평론≫ 봄 호에 실린 뒤 같은 해 9월 임영 웅 연출로 국립극단이 공연했다. 제8회 한국연극영화예술 상 작품상과 희곡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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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된다. 화실은 윤병희의 유명한 여류 조각가로서 면모가 드러나는 공간이다. 반면 응접실은 그녀와 다른 가족들 간 갈등을, 장미원은 윤병희의 내적 욕망을 드러내는 장소로 기능한다. 특히 장미원은 윤병희가 수캐를 직접 목욕시키면 서 병적인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 공간이며, 외부와 격리되 어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심리를 상징화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동성애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소재로 당대에 소외되었던 이들과 이들을 배제하는 현실 사이의 충돌을 그 려 냈다. 결국 배영도(남편)의 욕망도, 윤병희의 욕망도 현 실에서는 좌절된다. 상애가 윤병희의 수캐를 향해 총을 쏘 는 소리 등 청각적인 극 장치와 윤병희의 조각품 ‘능욕’ 등 시각적인 오브제는 타자의 좌절과 비극을 암시하고 강조하 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극단 산하가 표재순 연출로 1968년 10월 10∼14일 동안 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1968년 11월부터 1969년 2월까지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1969년는 이봉래 감독이 영 화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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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浪 劇團>은

해방 전 신파 유랑 극단의 삶을 형상화해 근대극 발달 과정 을 조명하는 동시에 예술과 인생의 의미를 그린 작품이다. 막 구분이 없으며 극 중 인물들이 유랑 극단 배우라는 설정 을 활용해 사실주의극과 가면극 등 다양한 극 양식을 선보 인다. 극작가 오소공은 연극과 삶,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균형 잡 힌 인식을 표출하고 극을 끌어가는 중심인물이다. 그가 유 랑 극단 단원이라는 설정은 이 극이 스스로 연극임을 드러 내는 기제가 되며 인생의 희로애락, 예술과 연극에 대한 사 유를 가능하게 한다. 특히 극중극 상황에서 일제 하수인 ‘길 형사’가 연극을 저지하는 장면은 극 중 상황과 실제 상황을 의도적으로 혼동시킨 예다. 일제 강점기와 유랑이라는 힘든 여건 속에서도 연극이 끊임없이 무대에 올라가듯, 인생 또 한 계속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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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인물들은 각자 특징을 대변하는 이름을 쓰고 있다. 또한 이동하며 공연해야 하는 유랑 극단 성격에 맞게 극은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온갖 극 형식을 시도한다. 시공 간 변화는 회전 조명의 일종인 사이클로라마(cyclorama)를 사용해 표현했다. 기차 밖 풍경과 손수레를 끌고 이동하는 단원들의 모습, 사계절 변화를 담아내기에 알맞은 방식이 다. 일제 강점이라는 현실을 비판하고 비정한 사회와 인간 관계 문제를 다루면서도 ‘연극’을 통해 삶에 대한 애정 어리 고 낙관적인 인식을 반영했다. 1971년 극단 가교가 국립극장에서 초연했다. 1998년 제1 회 이근삼희극제에서 극단 뿌리가 김도훈 연출로 재공연하 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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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5막으로 구성된 장막극이다. 병자호란을 다룬 작품으로 작 가가 최초로 쓴 본격적인 역사극이다. 인조 14년 병자년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에게 포위된 후 삼전도에서 항복하기까지 치욕적인 역사를 다루었다. 주 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3학사 간 대립이 중심 갈등을 이룬다.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왕과 대신들의 무능함과 부패를 대비 시켰다. 5막에서는 강화도가 함락된 뒤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항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비극적 클라이맥스 를 부각했다. 작가는 이후 그 연작이라 할 만한 <북벌> (1978)에서 삼전도의 치욕을 씻으려는 효종의 북벌 계획과 좌절을 다루기도 했다. 김의경의 역사극은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객관적 사료에 바탕을 둔다. 때문에 병자호란과 일제 침략기 등 수치스러 운 과거를 재조명하면서 역사에 대한 냉정한 성찰을 확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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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한산성>은 1975년 이진순 연출 로 국립극단에서 제작했으며, 초연 당시 백상예술대상 대 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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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문서>는

고려시대 충주성 방호별감이었던 김윤후 대사와 관련한 역 사적 사건을 신분 갈등이라는 시각에서 새롭게 극화한 작품 이다. 노비들을 혹독하게 부리며 충주성 개축 공사를 진행하던 어느 날 몽고군이 침입해 온다. 군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 어진 상황에서 노승은 노비군 조직을 제안하고, 속량을 약 속받은 노비들은 열심히 싸워 몽고군을 물리친다. 그러나 부사와 판관은 이후 노비 속량에 반대하며 다시 노비들을 잡아들일 계획을 세운다. 상부의 조치에 분노한 노비들은 무력으로 항거하는데, 두 세력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노승을 비롯한 여러 희생자가 나온다. 결국 노비 해방의 꿈은 좌절 되고, 극은 비극적인 분위기에서 막을 내린다. 1970년대 권 력층의 허위의식과 폭력성, 그리고 자유를 억압하는 계급사 회의 모순 등을 고려 시대라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우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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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굿 아구>는

기생 관광을 풍자한 작품이다. 이종구, 김지하, 김민기가 공 동 창작했으며, 1974년 3월 이종구 작곡 발표회에서 가무극 형식으로 처음 소개했다. 이후 1980년대 대학 마당이나 소 극장에서 마당놀이 양식으로 변모해 연행(演行)되었다. 남사당 덧뵈기(탈놀이) 가운데 넷째 마당인 ‘먹중 마당’ 을 기본 골격으로 했다. ‘먹중’은 여기서 ‘마라데쓰 사장’으 로, ‘피조리’는 ‘여공’과 ‘여대생’으로, ‘취발이’는 ‘아구’로 대 체했다. 7차에 걸친 한일회담으로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이 조인되고 양국 국교가 재개되자 한국에 대한일본 자본의 정 치·경제적 침투가 본격화하고 그에 따른 사회·문화적 예 속도 심화되었다. <소리굿 아구>는 이런 배경에서 특히 기생 관광에 초점을 맞춰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한다. 극장에서 공연한 최초 마당극으로서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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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불빛>은

1970년대 한국 노동운동 초기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 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했다. 노래굿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도입해 카세트테이프로 녹음, 배포한 것도 특징이다. 작가가 1977년 제대 후 공장 노동과 야학 활동을 병행한 체험을 바탕으로 노조 설립을 독려하는 내용의 노래극 대본 과 음악을 쓴 것이다. 제도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형태로 공연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당시 판단에 따라 노래극 음원을 녹음해 대중에 배포했다. 특히 당시 녹음 테이프에는 노래 를 입히지 않은 반주만 따로 실은 부분이 있어 노동자, 대중 이 이를 창조적으로 활용, 공연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일 회성과 반복성, 창조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노래굿은 마당굿의 한 양태라고 볼 수 있다. 서정적인 노래, 브리지 음악, 극적인 음향효과가 극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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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 가며, 동시에 서사적인 노래가 상황을 묘사하고 인물 성격을 창조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방식은 관객이 극에 완 전히 감정이입하기보다 음악을 통해 사태를 객관적으로 인 식하게 함으로써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도록 한다. 1970년 대 후반 공연물들이 대개 역사적인 사건이나 알레고리를 통 해 간접적으로 현실 문제를 다룬 데 비해 동일방직 사건이 라는 당대 사례에 입각해 본격적으로 노동문제를 다룬 작품 이다. 특히 카세트테이프라는 대중 확산력이 강한 매체를 활용한 방식은 이후 여러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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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비판했다. 이 작품은 노승과 취발이를 등장시키거나 탈춤의 재담을 활용하는 등 전통극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민중적인 정서를 드러내려 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또한 코러스가 극 진행과 무관하게 등장해 극적 상황을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 는데, 이는 관객이 극중 상황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을 막 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1973년 극단 산하가 표재순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초연 했고, 이듬해 현대문학상 희곡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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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기>는

1967년 충청남도 청양 구봉금광에서 김창선이라는 광부가 매몰되어 20여 일 동안 사투 끝에 극적으로 구조된 실화를 극화한 작품이다. 작가는 당시 MBC 방송국에서 근무하면 서 매스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접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작품을 창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매몰 광부인 김창호가 구출되기 전까지 사건을 담고 있 는 전반부와 이후 주인공의 편력을 다룬 후반부로 나뉜다. 죽은 줄 알았던 주인공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김 창호 구출 계획’은 이벤트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생명의 존엄보다 발굴 비용에 더 민감한 광업소 직원, 사고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는 매몰 기록 수립에 더 관심이 많은 신문기자, 직업적 권위를 인정받으 려는 의사, 전국에서 몰려든 구경꾼, 잡다한 행상들, 호경기 가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술집 마담을 등장시키며 인간의 존 엄보다 자기과시, 명예, 호기심, 이익 등에 치중해 있는 현대 인의 태도와 심리를 보여 주었다. 구출된 김창호는 곧바로 서울로 옮겨져 기자회견,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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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초대연 등에 동원된다. 그사이 광산 회사는 김창호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은 채 부도를 내고 잠적하고, 가족의 생 존을 위해 주인공은 다시 서울로 간다. 매스컴에 얼굴을 비 치면서 그는 곧 영웅으로 부상해 단시일 내에 많은 돈을 모 으고 대중에게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사건을 따라다니는 매스컴의 속성때문에 김창호는 곧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빈털터리로 전락한다. 현대인의 허욕과 매스컴의 횡포를 풍자하는 작가의 비판 적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1974년 드라마센터에서 초 연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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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은

지식 독점과 불안 조장을 통해 사회 구성원의 일상을 통제 하는 권력의 작동 방식을 형상화했다. 알레고리와 상징을 통해 1970년대 정치 현실을 풍자하는 이강백 초기 희곡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974년 8월 ≪현대문학≫에 발표 되었고 1975년 3월 현대극회가 초연했다. 이리 떼의 습격을 두려워하는 한 마을이 배경이다. 지금 까지 파수꾼 ‘가’는 망루에서 이리 떼를 감시하며 “이리 떼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치고, 늙은 파수꾼 ‘나’는 양철 북을 두드 려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해 왔다. 이리 떼를 두 려워하던 소년 파수꾼 ‘다’는 우연히 망루 위에 올라갔다가 그 너머에는 이리 떼 대신 아름다운 흰 구름뿐이라는 진실 을 알게 된다. 이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만 촌장은 질서 유지를 위해 가상의 적인 이리 떼가 필요하다고 오히 려 소년을 설득한다. 진실을 알아 버린 소년은 결국 촌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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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마을에 내려오는 것을 금지당한다. 이 작품은 권력이 안보를 이용해 체제를 유지하는 작동 방식을 풍자하고 있다. 촌장은 가상의 이리 떼를 설정하고 망루를 세워 마을 사람들이 끊임없이 불안과 위기감에 시달 리게 만든다. 망루 너머의 정보는 파수꾼 ‘가’가 독점하고 있 어 마을 사람들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 채 공포와 불안에 빠져 있다. 촌장은 이리 떼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통해 마을 질서와 안정을 유지한다고 주장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 속에서 죽거나 다치는 등 피해를 입고 있다. 혹은 그 러한 공포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공포심을 조장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권력자와 진실을 적극적으 로 알려고 하지 않는 군중의 상관관계 속에서 진실이 은폐 되는 양상을 조명하고 군중과는 구별되는 희생양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당대 한국이 처해 있었던 정치적 현실을 꼬집 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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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과 여인>은

사랑을 위해 완전한 보석을 만들고자 하는 보석 세공인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진실 추구를 다룬 단막극이다. 보석 세공 인은 평생을 바쳐 완벽한 보석을 만들었지만 그 보석을 줄 대상이 없음에 허무함을 느낀다. 그런 보석 세공인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다시는 완벽한 보석을 만들지 않겠다는 맹세 를 조건으로 젊음을 되찾아 주겠다고 제안한다. 보석 세공 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남자의 도움으로 한 여인을 만 나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다시 보 석을 깎기 시작하고, 완벽한 보석을 남긴 채 죽음을 맞는다. 불완전한 돌을 깎아 아름다운 보석을 만드는 보석 세공 인은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 다. 그러나 세상과 절연하고 평생 보석을 깎은 보석 세공인 이 완벽한 보석을 완성한 뒤 그것을 홀로 간직하는 것에 만 족하지 못하듯이, 대상을 상실한 진실은 의미가 없다. 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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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사랑하면서 삶의 의미를 알게 된 보석 세공인은 보석 을 다듬어야 할 이유, 즉 불완전한 삶에서 진실을 드러내야 할 이유를 얻게 된다. 불완전한 삶일지라도 사랑을 유지하 는 길과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고 죽음에 이르는 길에서 보 석 세공인은 죽음을 선택한다. 이 선택을 통해 작품은 보이 지 않는 진실 추구라는 주제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보석과 여인>은 예술적 완성을 이룬 노인에게 젊음 을 되돌려 준다는 비현실적인 설정, 세상의 다양한 풍경과 경험을 은유하는 ‘그림책’과 그것을 넘기는 ‘손’ 등 우화적인 장치, ‘그이’, ‘그’, ‘그녀’라는 인물의 익명 처리를 통해 보편 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서 주제를 다룬다. 또한 보석 세공 인에게 젊음을 되돌려 준 ‘그’가 차표원, 호텔 보이 등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연기하게 하고, 무대를 보석 세공인의 집, 기차 안, 호텔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시킨 방식은 ‘그’의 계획으로 보석 세공인과 여인의 만남이 진행되는 극적 상황 과 연극성을 강화해 준다. 1975년 9월 한국극작워크숍의 ≪단막극 선집≫ 3집에 발표되었다. 1975년 카페 떼아뜨르에서 공연하기로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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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으나 카페 떼아뜨르가 문을 닫으면서 계획이 무산되고, 1979년 2월, 이강백의 다른 작품인 <결혼>과 함께 강영 걸 연출로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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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의 활 동을 다룬 작품으로 5막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해랑 연 출로 국립극단이 1976년 6월 10일부터 13일까지 국립극장 에서 공연했다. 1막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손탁호텔에서 브리네르, 모오스, 웨벨, 겐조오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서구 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삼림 채벌권, 철도 부설권 같은 조 선의 이권을 탈취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이런 상황은 ≪독 립신문≫을 발간해 민중에게 조선 현실을 알려 주고자 하는 서재필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작품에서 1, 3, 5막 무대는 손탁호텔 내부이며 2, 4막 은 고종의 어소에서 펼쳐진다. 막이 전환할 때마다 무대 공 간이 바뀐다. 이런 무대 구성은 국난 상황에서 조선 자립과 자주를 모색하는 서재필의 활동과 조선 왕실의 무능함을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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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게 대조해 보여 준다. 한편 임철규와 현주실 등 젊은 세 대가 처음에는 서재필을 비판하다가 점차 그의 소신을 깨닫 게 되는 설정과 ‘손탁’이라는 외국인 여성이 서재필의 활동 을 지지한다는 내용은 서재필의 선각자로서 면모를 부각한 다. 이 작품의 주된 갈등은 독립협회를 이끄는 서재필과 이 를 방해하는 홍종우 사이에서 빚어진다. 홍종우는 황국협회 를 만들어 독립협회와 대치할 뿐만 아니라 고종을 압박해 미국 시민권자인 서재필의 강제 송환을 추진하고 이를 성사 시킴으로써 결정적으로 서재필의 꿈을 좌절시킨다. 서재필 은 추방되면서 젊은 세대인 임철규, 현주실에게 단합의 필 요성을 역설한다. 서재필의 이상이 좌절되는 것은 서구 제 국주의 세력이 아니라 홍종우의 방해와 이를 방조한 고종 때문이다. 이는 국난을 극복할 과제로 분열을 경계하고 단 합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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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도리동>은

서장과 12장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판소리와 가곡, 탈춤 등 전통 연희 요소를 활용해 경북 안동 하회동 별신굿 탈 제작 자로 알려진 허도령 설화를 극화했다. 극은 별신굿 기간을 알리는 산주가 별신굿 전설을 전해 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이 노래와 굿을 재현하 는 가운데 각시가 죽은 총각의 원혼을 풀어 주기 위한 희생 양으로 등장한다. 이때 허도령이 각시를 구하려고 하면서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전통 의례에서 이는 불길한 것 이다. 마을에 역병이 돌자 산주는 허도령이 만든 탈로 탈놀 이를 벌여 별신굿을 해서 재앙을 물리치라는 서낭신의 계시 를 받는다. 허도령과 각시는 금기를 깨고 사랑을 키워 가지 만 탈이 완성되는 날 도령은 부정을 물리치기 위한 희생양 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바친다. 각시는 도령이 죽자 죄 많은 자신을 죽여 달라고 절규한다. 마을을 위해 탈을 제작한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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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령을 기리며 막이 내린다. 이 작품은 전설을 가무극 형식으로 재현했다. 씻김굿과 타령조 노래를 통해 인물들의 마음을 전하고, 전통 의례를 재현한다. 당시 허규는 전통 계승과 현대화에 주목했으며, 작품의 원천이 되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허도령 전설 또 한 현지 조사를 거쳐 재구성, 재창조 끝에 완성했다. 허도령 과 각시의 비극적인 사랑은 보수적인 관례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전통적 인식의 숙명론을 보여 준다. 하지만 허도령이 꿈에서 서낭님과 삶과 죽음, 고통과 자유에 관한 대화를 나 누는 장면에서 보듯 이 작품은 전통 연희의 연극적 기능을 분석하고 실험하면서 세계와 인간의 삶에 관한 잔잔한 감동 을 제공한다. 또한 마을 단위를 배경으로 하면서 전통적인 삶과 인식 층위에서 가능했던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삶에 대한 선한 태도, 종교와 삶이 결합한 상태 등이 시적 언어, 노래, 춤과 몸짓으로 표현되었다. 1977년 허규 연출로 극단 민예가 초연했다. 그해 제1회 서울연극제에서 최고상(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86년에 ‘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연극제’에 참가했다. 전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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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소리, 몸짓, 색채들이 비로소 하나의 연극으로 총체화 하기 시작했다는 평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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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덴자>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소재로 정치 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과 역사에 대해 책임을 묻는 작품이다. 4경으로 구성되 어 있다. 역사에서 소재를 취하면서도 극을 시작할 때 객석 에서 ‘여자 관객’을 무대로 불러올려 등장인물 역할을 수행 하도록 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착종시키고 허구와 현실 경 계를 모호하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이 작품은 배우이자 관객이며 등장인물 역할을 수행하는 ‘여자 관객’에게 여러 가지 고문을 가하는 폭력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관객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준다. 망나니들은 세조 지시에 따라 선비와 여자 관객을 고문하며 죄를 털어놓으라 고 강요한다. 여자 관객의 허벅지를 인두로 지지고, 발을 전 기밥솥에 집어넣고, 그녀에게 지푸라기와 오물을 쏟아붓는 등 잔인한 고문 장면과 경과 경 사이에 반복되는 군졸들의 발소리, 층계를 내려오는 구둣발 소리, 육중한 철문 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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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문제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강도를 더해 가며 반복되는 폭력에 여자 관객 이 “내가 내 죄를 알겠소”라고 죄를 시인하며 올가미에 목을 매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여자 관객을 비추던 조명이 관 객을 비추고, 동시에 “당신 죄인이지?”라고 반복하는 녹음 기 소리가 들린다. 이로써 폭력에 대한 책임의식과 죄의식 을 환기하고 역사의 방관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유도하는 것이다. 제2회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으로, 1978년 9월 22∼27 일까지 정진수 연출로 극단 민중극장이 쎄실극장에서 초연 했다. 이현화는 이 작품으로 제1회 서울극평가그룹상을 수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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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씻김>은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정화해 주는 씻김굿을 차용해 폭력 때문에 분열된 개인이 결국 권력에 복종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극은 서서히 암전이 진행되고 암전 시간을 길게 지속 함으로써 관객에게 의혹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시 작한다. 암전 가운데 들려오는 차바퀴의 날카로운 마찰음은 자동차 사고를 암시하는데, 사고를 당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속도로 사무실로 들어온 여자는 한 여인과 두 소녀 에 의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당한 채 폭 력에 노출된다. 소녀와 여인은 여자의 사지를 결박하고 입 에 거즈 뭉치를 물려 여자가 움직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게 한다. 여인과 소녀는 청진기, 쇠망치, 수술 가위, 체 온계, 줄자 등을 꺼내 놓고 무가를 읊조리면서 여자를 제물 (祭物)처럼 다루며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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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김굿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정화하는 의식이라면 <산씻김>은 산 사람을 씻김으로써 정화를 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씻김은 여자의 옷을 가위로 자르고 이마에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몸에 바퀴벌레를 풀어놓는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행해진다. 일상적인 시공간과 단절된 채 이유도 모르고 폭력을 당한 여자는 이전과 다른 존재로 변 화한다. ‘씻김’을 당한 뒤 여자가 광기에 가득 차 자신이 당 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인을 내려치고 물어뜯는 등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2층 철문이 열리면서 빛과 함께 무대를 덮치는 거대한 그림자는 이 작품에서 ‘산씻김’이 진 정한 정화라기보다 합리적인 이성과 비판적 의식이 마비되 고 폭력에 의해 세뇌당해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과정 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구성 과 방울 소리, 칼춤 등 제의적 요소, 여인이 여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기괴한 이미지는 관객에게 공 포와 충격을 주는 동시에 사회, 역사적 차원의 집단적 광기 와 폭력의 문제를 환기해 준다. 1981년 9월 ≪현대문학≫에 <산씻김, 하나의 오보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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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A>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후 전집에 수록될 때에는 부제가 빠졌다. 1981년 10월 9일∼11월 8일 유덕형 연출로 드라마센터 소극장에서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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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라기>는

전라남도 진도에 전승되고 있는 상여 놀이 ‘다시래기’를 바 탕으로 생명 순환에 대해 인식하고 죽음의 공포를 극복, 새 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염원을 담은 작품이다. <물도리 동>에 이어 전통 소재를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1979년 제4 회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으로 허규가 직접 연출을 맡아 연 출상을 수상했다. ‘다시래기’는 부모상을 당한 상주와 유족의 슬픔을 덜어 주고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상여 놀이다. 허규는 진도 다시 래기에서 틀을 가져오면서도 구성과 등장인물에 변화를 주 어 좀 더 풍부한 구성을 꾀했다. 다시래기에는 많은 놀이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봉사[盲人], 부인, 중[僧]의 삼각관 계를 연출하는 놀이가 중심을 차지한다. <다시라기>에서 는 원래 ‘다시래기’에 나오는 중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저승 사자가 등장한다. 저승사자로부터 만삭인 마누라와 태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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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려는 봉사의 투쟁과 이를 돕는 마을 사람들을 통해 죽 음과 대결, 이를 넘어선 새로운 생명 탄생을 부각했다. 저승 노래를 부르며 마누라를 홀리는 대목, 가상주를 잡아가려는 저승사자를 사람들이 가두거나 쫓아 버리는 대목에서 죽음 의 공포를 넘어서려는 염원을 볼 수 있다. 또한 봉사가 죽고 아기가 태어나는 사건이 맞물려 생명 순환이라는 주제를 형 상화했다. 사실성을 배제한 무대장치, 해설자 역할을 함께 수행하 며 자신이 배우임을 밝히는 등장인물을 통해 이 작품이 연 극이자 놀이임을 강조했다. 또한 관객이 적극적으로 참여하 는 전통극 특징을 수용해 등장인물이 관객에게 말을 건네기 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조문객 역할을 맡은 관객이 곳곳에 서 추임새를 넣거나 대사를 맞받아치게 했다. 관객은 가상 주의 요구에 따라 저승사자를 물리치기도 하고 가상주에게 물건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런 장치는 일반 관객까지 자연 스럽게 극에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놀이성을 극대화하 며, ‘다시래기’가 지닌 축제 성격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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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토(The Land)>는

삼대째 소작농 신분을 이어 오고 있는 돌쇠의 삶을 통해 지 주의 횡포와 무너져 가는 농촌의 모습을 예리하게 묘사한 장막 희곡이다. 풍부한 충청도 방언 표현으로 순박하고 우 직한 돌쇠의 성격을 부각하고 농촌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 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간간히 남포 소리를 삽입해 마을을 수몰시킬 댐 공사가 진행 중임을 상기하며 동네 사람들의 불안과 스러져 가는 농촌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냈다. 돌쇠는 댐 건설과 함께 곧 수몰될 동네에 살고 있는 소작 농이다. 동네 사람들과 며느리는 살터를 잃을까 걱정하지만 돌쇠는 주인어른이 땅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어떤 상 황에서도 살뜰히 곡식을 가꾸는 것이 농사꾼의 소임이라 생 각하며 일손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은 돌쇠 모르게 며 느리를 탐하고 자기 이익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파 기한다. 어느 날 돌산에 올라갔던 돌쇠의 손녀 점순이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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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에 터진 남포 파편에 맞아 죽는다. 뜻밖에도 남포는 댐 공 사가 아니라 돌쇠에게 주기로 한 땅에 주인이 별장을 짓기 위해 터뜨린 것이었다. 이에 동네 사람들은 분노를 터뜨리 지만 돌쇠는 동요하지 않고 새로운 농토를 일구겠다는 결심 을 다질 뿐이다. 돌쇠의 처지는 선대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할아버지 덤 쇠는 동학농민운동 때 땅을 줄 테니 도와 달라는 더큰어른 의 목숨을 구한다. 이후 더큰어른은 괜한 트집을 잡아 오히 려 덤쇠를 괴롭힌다. 그는 주인집 아들을 대신해 두 아들을 전쟁터에 보냈다가 아들 하나를 잃기도 한다. 이때 살아남 은 한쇠 역시 소작농이 된다. 한쇠는 해방 직후 친일파로 몰 린 큰어른을 도와 주지만 경찰 제복을 입고 나타난 큰어른 은 자신을 밀고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에게 준 땅을 도로 빼 앗는다. 돌쇠는 6·25가 터지자 어른을 대신해 군대도 가고 빈집도 지켰지만, 역시 약속한 땅은 받지 못한다. 일제시대, 해방, 전쟁이라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스러져 간 약 자들의 모습이 덤쇠와 한쇠의 과거사를 통해 그려진다. 돌 쇠 삼대는 결국 내 것이라 할 만한 땅 한 평도 갖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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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에 맞서 제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한편 이런 삶이 싫어 도시로 떠난 손주들마저 몸과 마음에 상처만 입는다는 설정 은 근대화를 모토로 등장한 새로운 시대에도 선대의 고통이 대물림됨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소작농이 지주의 횡포에 저항한다는 도식적인 결말을 따르지 않는다. 점순이가 죽은 뒤 동네 사람들이 농 기구를 들고 분노에 차 흥분하는 가운데서도 돌쇠는 다시 자신의 땅을 일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체념하거나 포기 하지 않고 땅을 갖겠다는 꿋꿋한 일념, 어떤 시련이 와도 자 신의 터를 지키겠다는 돌쇠의 신념이 엿보인다. 1981년 극단 에저또가 방태수 연출로 초연했다. 제5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작품상과 연기상, 18회 동아연극상 희 곡상, 제4회 서울극평가그룹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1982년 제18회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에서 단체 대상, 작품상, 희 곡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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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챙이 곡마단>은

황산벌 전투와 백제 패망을 배경으로 이데올로기가 대립하 는 가운데 수많은 인명이 죽어 가는 상황을 풍자한 작품이 다. 서장과 10장으로 구성되었다. 1982년 9월 2일부터 7일 까지 극단 현대극장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백제 멸망과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기존의 역사적 시각을 비튼다. 향락에 빠진 의자왕의 무능함과 계 백의 영웅적인 면모, 황산벌 전투와 삼천궁녀의 낙화암 설 화가 주는 비극성, 삼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김춘추 와 김유신의 공적과 집념 등은 이 작품에서 부정되거나 비 판된다. 의자왕은 백제 멸망 또한 수많은 국가가 겪어 온 흥 망성쇠의 반복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계백과 관 창, 김춘추는 목표를 위해 고집스럽게 돌진하는 어리석은 인물로 형상화했다. 이와 함께 비키니를 입은 궁녀, 야구 포 수 마스크를 쓴 장군 등 역사적 인물과 현대적 소품이 뒤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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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상황 설정은 백제 패망에 대한 비 애나 조국애를 희화화한다. 동시에 <언챙이 곡마단>은 마당놀이 형식을 차용해 시공을 자유자재로 변형하고, 무대에 널빤지를 설치해 광대 들이 그 위에 인형을 늘어뜨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무대를 확장, 놀이성을 강화했다. 또한 배우가 퇴장하지 않고 무대 한쪽에 남아 관객 역할을 하면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무 너뜨리고, 해설자(노파)를 등장시키는 서사극 수법을 사용 해 관객이 비판적 관점에서 극을 관람하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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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사>는

집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그의 안전을 기원하는 여인의 심 정을 노래한 백제가요 <정읍사>에 연극적 상상력을 더해 12장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해 멸 망한 직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정읍을 배경으로 전쟁 을 겪는 민중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북 장수는 황산벌 전투에 고적대로 출정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탈영한다. 그는 곧 산적에게 붙잡혀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이들을 위해 북을 치게 되고, 탈출을 시도했 다가 죽음을 맞는다. 한편 집에 남은 아내와 아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 북 장수를 기다린다. <정읍사>는 전쟁 때문에 행복했던 한 가정이 깨지고 불안과 기약 없는 기다림만 남은 상황을 형상화함으로써 역 사적 질곡에서 민중이 겪는 고통과 희생을 강조했다. 전쟁 에 참여했다 탈영한 북 장수와 주변 인물을 통해 민중이 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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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망국의 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비겁함에 대한 인간 적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으며, 약초꾼과 아이가 다정하게 노는 그림자를 바라보거나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단장 하는 아내의 행동, 아내가 남편의 환영을 보는 장면 등을 통 해 기다림의 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했다. 산마루에서 남 편을 기다리거나 시장에서 남편을 찾아 헤매는 아내, 산적 에게 잡혔다가 탈출을 시도하는 남편의 상황을 교차로 보여 주는 한편, 아내를 연모하는 약초꾼과 남편에게 호감을 가 지고 있는 주막집 여인을 등장시켜 부부가 만날 수 있을 것 인가에 대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작품을 시작할 때와 끝낼 때 아내가 산에서 남편을 기다 리는 장면에 <정읍사> 노래를 삽입함으로써 극 구조를 안정시키고 통일성을 준다. 1장의 서툰 가락은 12장의 원숙 한 가락과 대비되는데, 1장에서 <정읍사>가 남편을 기다 린다는 아내의 상황을 설정하는 프롤로그 기능을 한다면, 12장에서 들려오는 원숙한 가락은 전쟁을 겪은 민중의 애환 이 녹아 있어 극을 마무리하는 기능을 한다. 1982년 6월에 극단 민예극장 제작, 정현 연출로 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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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르코)대극장에서 초연했으며, 제19회 한국백상예술대 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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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동녀(童女) 풍속이라는 설화와 생명이 움트는 봄의 이미지 를 바탕으로 늙음과 젊음, 부성과 모성, 소유와 박탈, 죽음 과 생명의 갈등,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빈부와 노소 갈등을 계절 변화, 인색한 아버지와 배고픈 자식들이라는 알레고 리를 통해 보여 준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왔지만 자식들은 봄의 생명력과 활기를 누리지 못한다. 아버지가 자식들의 노동력을 착취하 며 어떤 것도 나누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또 백운 사 중이 맡긴 ‘동녀’를 회춘에 이용하는 등 늙지 않으려고 안 간힘을 쓴다. 이런 그의 노력이 자식들에게 위협이 되면서 아들들과 아버지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결국 다섯 아들은 아버지를 속여 눈을 멀게 하고 돈을 훔쳐 달아나 돌 아오지 않는다.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보살피던 장남과 병약한 막내만이 동녀와 함께 아버지 곁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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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가고 배경은 여름으로 바뀐다. 막내와 혼인한 동녀는 아이를 가졌다. 아버지는 늙음을 인정하고 자식들과 의 갈등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였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식들을 그리워한다. 자식들 또한 집 나간 아들을 찾는 신문 기사를 낭독함으로써 아버지와 화해를 암시한다. 늙음에서 젊음으로 교체는 자연스럽게 이 루어진다. 장과 장 사이에 봄을 소재로 한 시와 소설, 그림, 나무에 관한 신화적 해설을 담은 글 등을 배치했다. 코러스를 겸한 아들들이 무대 전면에서 인용문을 낭독하고 해설하거나 논 평한다. 이러한 막간 장치는 설화적 분위기와 봄날의 이미 지를 강화해 서정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긴장 의 완급을 조절해 작품이 리듬감을 확보하고 극을 다층화하 는 데 기여한다. 이로써 알레고리적 형상화가 가져올 수 있 는 단순화를 피하고 극을 탄력적으로 전개했다. 이전 작품 에서 고도의 상징성과 알레고리를 통해 냉정한 현실 인식을 보여 주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봄날>은 1984년 봄에 창작되어 극단 성좌가 같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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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권 오일 연출, 오현경, 박웅, 이승철 등 출연)했다. 극단 성좌는 이 작품으로 제8회 대한민국연극제에 참가해 대상, 연출상, 미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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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빵 경연대회 심사위원들의 부당한 권력 행사를 풍자한 작품 이다. 1984년 극단76이 초연했다. 이때는 서울연극제가 8 회를 맞이한 해로, 연이어 연극제에 낙선한 작가와 작품 속 빵집 주인이 처한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 그 때문에 서울연 극제 경연 심사를 빗댄 것이라고 주류 연극계와 마찰을 빚 기도 했다. 빵집 주인은 벌써 7년째 제대로 영업을 하지 못하고 있 다. 같이 일하는 제빵인의 빵이 ‘전국 빵 경연제’에서 번번이 떨어져 식빵 판매 허가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사 람들은 다른 제빵인의 빵을 출품하거나 심사위원 입맛에 맞 는 빵을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빵집 주인과 제빵인 은 신념을 꺾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떨어지는 자신들의 작품이 소외 문제를 드러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다음으로 심사위원들이 빵을 심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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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국민 다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권력 집단의 시선으 로 재단되고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장면이다. 심사 위원들은 빵집 주인과 제빵인의 빵을 마주하고 역사 왜곡 내지 우롱이라며 긴장하고, 빵에 대한 논의가 엉뚱하게 ‘떡’ 과 전통 문제로까지 이어지면서 격렬한 다툼이 벌어진다. 이처럼 작품은 희극적인 터치로 빵을 둘러싼 권력의 행 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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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는

8장으로 구성된 재판극 형식의 역사극이다. 식민지 시대 일 본에 거주했던 실제 인물 박열의 천황 암살 음모를 취조하 는 재판 과정을 다루었다. 작품은 관동대지진을 배경으로 체포된 조선인 중 천황 암살 미수범으로 체포된 박열을 취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민족의 차이를 뛰어넘어 박열을 지지했던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변호사, 분열된 독립운동의 모습과 무정부주 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당대 지식인들의 모습 이 일본의 구조적 억압과 대비되며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특이한 소재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조명, 객관적 사료 에 토대를 둔 재판극 형식으로 감상적 역사주의를 넘어섰다 는 평가를 받았다. 1985년 문예회관대극장에서 정진수 연 출, 극단 민중극장 제작으로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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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별들>은

1985년 발표했으며 <꿈꾸는 별들>(1986), <불타는 별 들>(1989)과 함께 청소년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룬 작품이 다. 윤대성은 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서울예전에서 열린 학교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청소 년 문제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한다. 이때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방황하는 별들>을 창작할 수 있었고, 이는 동 랑청소년극단 창단으로 이어져 1980년대 후반 청소년 연극 활성화에 기여했다. 극이 시작되면 한 노인이 손자 이름을 부르며 무대 근처 를 헤맨다. 곧이어 경찰이 나타나서 노인을 경범죄로 붙잡 아 경찰서로 데려간다. 노인이 안내된 곳은 방황하는 아이 들을 하룻밤 수용하는 경찰서 보호실이고, 이곳에는 이미 단속에 걸려 끌려온 다양한 아이들이 있다. 비디오를 틀어 주는 다방에서 끌려온 중학생, 술집에서 일하다 잡혀 온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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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 출신 미성년, 디스코장에서 적발된 고교생, 여인숙에 서 혼숙을 하다 붙잡힌 고등학교 중퇴의 여고생, 아버지와 의견 차이로 괴로워하다 가출해 방황하던 고등학생 등 저마 다 갖가지 사연을 가진 이들은 경찰서 보호실에서도 말다툼 을 일삼고 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 등을 토로한다. 이 를 통해 청소년 눈에 비친 어른 세계의 문제점을 적나라하 게 전시한다. 날이 밝아 오자 아이들의 보호자가 찾아오고, 이들은 서로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한다. 보호자와 화 해한 아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방황하는 별들>은 교훈적인 어조를 띤 청소년 연극 에서 벗어나, 청소년들이 밝힌 실제 고민을 음악극(뮤지컬) 형식을 취해 풀어냈다. 1985년 청소년공연예술제의 하나로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초연했을 당시 흥행에 성공하며 청소 년 연극에 새 지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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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알>은

기국서 연출로 1985년 11월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초연되었 다. 1977년과 1980년에도 각각 ‘제작극회’와 ‘극단 에저또’ 가 무대화를 시도했으나 정치 풍자극이라는 이유로 공연이 무산되었다. 작품이 쓰인 지 8년 만에 ‘극단76’이 ‘난조유사 (卵朝遺事)’에서 ‘임금 알’로 제목을 바꿔 공연했다. 총 8장 으로 구성돼 있으며,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어리석 은 학자와 그 가족 이야기를 통해 당대 정치 상황을 풍자한 다. 평생 글만 읽어 온 학갑 선생은 어느 날 아내에게 자식을 왕으로 만들 비법을 터득했다고 말한다. 비법은 바로 신화 속 왕들처럼 알에서 자식을 부화시키는 것. 이 황당한 가설 을 실행하기 위해 학갑 선생은 알을 낳아야 한다며 부인을 닭처럼 행동하게 만들지만 당연히 부인은 알을 낳지 못한 다. 이에 학갑 선생은 플라스틱 바가지로 가짜 알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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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그 안에 집어넣고 동네 사람들 앞에서 마치 아이가 알에서 태어난 것처럼 꾸민다. 그리고 10년 동안 아이 주변 을 맴돌며 몰래 일을 진행해 나간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알 동)는 왕이 되지만, 곧 임금이 가짜 알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퍼진다. 자신도 알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여기저 기서 등장하면서 그의 권위는 급속도로 추락한다. 결국 가 짜 임금 알동이 백성들로부터 달걀 세례를 받으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이처럼 작품은 정치권력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난생설 화를 정치적 메타포로 재치 있게 활용하면서 한바탕 놀이처 럼 가벼운 터치로 그려 냈다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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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비상이에요>는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전통적인 판놀음 방식을 차 용해 종교의 본질에서 멀어진 채 배금주의에 물들고 각종 비리에 얽힌 1980년대 교회 실상을 비판함과 동시에 인정 없는 세태를 풍자한다. 4개 장은 각각 독립성을 이룬다. 아내가 다니는 교회 목 사를 의심해 그를 때린 뒤로 중풍에 걸려 버린 남자, 여전히 종교의 힘을 믿는 여집사, 기도원 자리를 찾기 위해 땅을 사 러 온 목사 내외 등 연극에는 산골 교회와 기도원을 배경으 로 여러 목회자와 성도가 등장한다. 방언과 헌금, 목사의 설 교와 부흥 집회 등 종교적 모티프들은 외설적이고 우스꽝스 러운 형태로 제시됨으로써 풍자 대상이 된다. 한편 연극이 비판하는 것은 단순한 교회 제도가 아니다. 급속한 산업 발 전에서 소외되고 낙오된 인물들을 돌아보고, 인간에 대한 진솔한 이해와 사랑이 고갈된 세태를 함께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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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한 극적 갈등 발전이나 성격 변화에 따라 장을 점층 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놀이판으로 조직해 유 연하게 극을 구성했다. 이를 통해 사회 비판을 의도하는 동 시에 극의 놀이성을 강화했다. 배우들은 고정된 한 가지 역 할만 맡는 것이 아니라 각 장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대사뿐 아니라 풍자적인 독창과 합창, 그림자극, 꼭두각시 극 등을 활용함으로써 극을 속도감 있게 전개하고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4장에서는 옹고집전 모티프를 활용해 헌신적인 희생으로 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자와 그렇지 못 한 자를 구분할 수 없는 현실을 풍자하고 종교의 사회적 역 할과 본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원작은 <어떤 목사님>을 개작해 1985년 극단 완자무 늬가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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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만큼 먼 나라>는

1983년에 열린 KBS의 <남북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을 소재로 세대 갈등을 통해 이산가족 문제를 조명한 작품이 다. 3막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 중 헤어진 부부는 40 년 만에 재회한다. 하지만 기뻐하는 노부부와는 달리 자식 들이 이 만남을 반기지 않으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서로의 식성이나 버릇을 기억해 내고 다정하게 만두와 김밥을 먹는 장면이나 이북에서 먹던 냉면을 회상하는 장면, 아내가 남편의 담배를 챙겨 주거나 눈에 들어간 담뱃재를 불어 주는 장면 등은 재회한 부부가 느끼는 기쁨과 설렘을 잔잔하게 표현해 감동을 준다. 부부가 모두 서울에 살고 있어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한 극적 상황은 이들이 재회하는 공간을 다양화하는 동시에 이 산가족이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더 첨예하게 드 러내 준다. 황 사장은 자기 어머니에게 다른 자식이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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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용납하지 못하는데, 전쟁과 분단을 경험한 노부부와 고모는 이산 문제를 인정하고 서로의 존재를 수용하는 반면 이산된 상태에서 성장한 자식들이 경험한 가정의 정체성을 흔드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 배타적이다. 어머니가 죽은 뒤 무덤에서 만난 두 가족이 멀찌감치 떨어져 선 것을 보며 이 런 태도를 비판하는 고모의 대사가 작가의 메시지를 대변한 다. 무대를 분할해 두 가족을 병렬적으로 보여 주는 무대 구 성은 분단된 세월이 만들어 낸 거리와 자식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연극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배경막에 비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중계방송 장면은 방송에서 보여 주는 감격적인 재회와 실제 노부부의 만남이 자식들에 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극적 상황을 대비하는 장치로 활용된 다. 이 작품은 임영웅 연출로 극단 산울림이 1985년 9월 문 예회관(아르코) 대극장에서 초연했으며, 제9회 대한민국연 극제 대상, 연출상, 남녀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KBS <TV 문학관>에서도 TV드라마로 각색, 방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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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연대기>는

한영덕이라는 소시민을 중심으로, 개인이 역사적 사건에 의해 희생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한 작품이다. 김일성대학 의학부 산부인과 교수인 한영덕은 6·25전 쟁 당시 특병동 담당 의사이면서 일반 병동 환자를 치료하 는 데 몰두한다. 이 때문에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 월남한다. 박가의 제 안으로 생계를 위해 의사 면허를 빌려 주고 불법 낙태 수술 을 돕던 한영덕은 가책에 시달린다. 무면허 의사 박가는 한 영덕을 배신하고 간첩 누명을 씌워 당국에 고발한다. 한영 덕은 기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겪은 후 어렵게 간첩 누 명을 벗지만, 불법 낙태 수술을 한 혐의를 받아 실형을 산 다. 형을 살던 중에 월남해 재혼한 아내로부터 휴전이 되었 다는 소식에 절망한다. 만기 출소한 한영덕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집을 나가 떠돌다가 지방 소도시에서 장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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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파란 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한영덕의 개인사 사이사이에, 사회 정치적 상 황을 보여 주는 막간극(다큐멘터리)을 삽입해 한국 현대사 의 소용돌이에서 몰락해 가는 한 개인의 삶과 시대를 서사 극 양식으로 풀어냈다. 한영덕의 일대기는 우리 민족의 수 난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개인적인 비극에서 더 나아가 정 치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사회적 비극으로 그려진다. 아울 러 브레히트의 서사극 양식 수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황석영 소설가가 직접 각색한 <한씨연대기> 첫 각색 본은 원래 광주 극회 <광대>가 제2회 정기 공연으로 준 비하다가 1980년 5월 18일을 맞아 연습을 중단했던 것이 었다. 그 뒤, 이 작품은 ‘연우무대’가 1984년 제8회 대한민 국연극제에 출품해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극단이 다른 공 연으로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걸려 극단 활동 정지 6개 월 처분을 받는 바람에 무대에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듬 해 ‘연우무대’는 오랜 워크숍과 창작에 가까운 각색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서사극 양식으로 공연을 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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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문제를 현실 문제로 절실하게 다루는 데 성공한 공 연으로,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며 흥행 에도 성공했다. 이후 연우무대는 연우소극장을 열고 사회 성이 짙은 창작극을 연이어 무대에 올리면서 1980년대 번 역극 위주였던 한국 연극계에 참신한 실험 정신을 불어넣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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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수와 만수>는

1986년 5월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초연했다. 대만 소설가 황 춘밍(黃春明)의 단편소설집 ≪사요나라 짜이젠≫에 실린 <두 페인트공>을 바탕으로 오종우와 이상우가 초고를 만 들고, 이후 오랜 시간 리허설을 진행하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대본을 완성했다고 한다. 초연 당시 400여 회 공연, 서울 관 객 5만여 명이라는 흥행 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1986년 동아연극상 연출상과 백상예술대상 대상, 연출상을 수상하 며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이후 항상 당대 현실에 응답하는 각색으로 현재까지 수차례 재공연되며 관객들의 공감을 얻 고 있다. 주인공은 곤돌라를 타고 고층빌딩 벽면에 광고를 그리는 칠수와 만수다. 칠수는 장난기 많은 성격인 반면 만수는 조 용한 성격으로 성향이 매우 다르지만, 밑바닥 인생을 사는 가난한 청년이라는 점에서 통하는 점이 많다. 작업 중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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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누는 이야기에는 기득권에 속하지 못한 자로서 겪어야 했던 부조리와 모순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그렇게 이 야기를 나누던 중 세상을 향해 욕을 하다 흥이 난 만수가 깡 통을 차서 차 유리가 박살 나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것이 엉 뚱하게 자살 소동으로 번지면서 사건이 복잡하게 꼬여 간 다. 두 사람이 자살할 거라고 오해한 기자와 구조대원들이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하는 칠수와 만수를 만류하면서 우스 운 장면이 연출되던 극은 결국 상황에 내몰린 칠수와 만수 가 뛰어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익살스러운 대화와 과장된 상황 설정으로 유쾌하게 사회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에는 관 객들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씁쓸함이 있다. 특히 칠수와 만수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옥상에서 뛰어내려야만 했던 마 지막 장면은 떠밀리듯 살아온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연상시 킨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상황에서 꺾여 버린 청년 들의 안타까운 젊음을 잘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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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하늘>은

1905년부터 1930년까지 신채호가 상경하고 중국으로 망명 해 활동하다가 만주 대련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여순 감옥 에 수감되기까지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신채호 서거 50 주년 추모 사업 일환으로 1986년에 창작하고 청주에서 공 연한 <식민지의 아침>을 개작했다. 1987년 국립극단에 서 김석만 연출로 공연했다. <꿈 하늘>은 신채호가 임종한 시점부터 시간을 역행 하며 그의 일대기를 보여 준 다음 다시 죽음에 이르는 ‘현재 −과거−현재’ 플롯을 취했다. 이와 함께 신채호라는 한 인 물을 신채호 1, 신채호 2, 신채호 3과 같이 세 분신으로 나누 고, 서로가 분신임을 알아보게 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이들 은 각각 신채호의 청년, 장년, 중년기 자아인 동시에 신채호 의 내면을 구성하는 다양한 면모를 상징한다. 또 신채호의 활동 중에서 무대화하지 않은 사건을 요약해 관객에게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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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해설자 역할을 함으로써 불연속적인 장면을 연결하고 장면 사이의 개연성을 마련해 주는 기능을 한다. 1장에서 임종 직전인 신채호 3의 회상에 따라 젊은 시절 신채호 1이 무대에 등장한다. 이후 사건이 전개되다가 이어 서 등장한 신채호 2가 무대에 혼자 남아 독립운동의 암담함 을 탄식한다. 이 모습을 신채호 3이 지켜본다. 이처럼 한 무 대에 신채호의 여러 내면을 상징하는 다수의 분신이 한꺼번 에 등장하면서 신채호의 내적 갈등을 가시화했다. 세 분신 은 신채호의 회의와 고민 등을 드러내 인물의 내면을 좀 더 입체적으로 부각하는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토론하는 장을 통해 신채호의 삶과 사상을 관객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기능한다. 이는 관객에게 역사적 시각을 마련해 주 기 위한 극적 장치다. 또한 세 인물이 아나키스트 활동을 위 한 마지막 결단으로 합일하면서 신채호의 내적 고민과 갈등 이 해소됨을 보여 준다. 이후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삶을 마감하는 신채호의 투쟁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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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 탄 동기 동창>은

교외 한 별장에서 살고 있는 ‘대부’의 집에 동창 ‘오달’이 함 께 살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했다. 노인들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극이다. 갑작스레 동거하게 된 두 사람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가정과 사회에서 겪은 삶과 그 질곡을 풀어냈다. 도시에서 떨어져 시골에서 혼자 사는 대부 집에 자신을 동창이라고 밝힌 오달이 찾아온다.그는 여러 동기 동창들 소식을 대부에게 전한다. 오달의 방문은 외부와 접촉이 거 의 없는 대부의 일상을 흔드는 계기가 된다. 격변기 한국을 살아 낸 두 노년의 쓸쓸한 삶은 세태를 반영하며 가족과 사 회적 성공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다 른 동창들의 성공과 이혼, 간암 소식이 전해지면서 노년이 라는 삶의 단계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특별한 갈등을 만들기보다 둘의 소소한 대화에서 발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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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긴장을 통해 노년에 느끼는 허탈과 소외감을 잘 주조해 보여 주는 구성이 특징이다. 대부는 자신이 고수해 온 삶의 방식을 흩트리는 오달이 달갑지만은 않다. 두 사람은 텔레 비전 수리비같이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을 한다. 극 중간에 는 인근에 사는 여자 무당을 둘러싸고 치졸한 감정 싸움을 하기도 한다. 한편 연극은 오달이라는 인물을 통해 노년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작가는 오달을 대부의 적막한 삶에 균열을 일으키면서도 생기를 불어넣는 인물로 형상화했다. 오달은 멀리까지 텔레비전을 지고 나가 고쳐 오고, 밭농사를 짓겠다며 씨를 구해 온다. 이미 죽은 사람처 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노년이 아니라 여전히 사소한 문제 로 티격태격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삶을 비전으로 제시 한다. 1991년 6월 극단 춘추가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초연했다.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 <새끼 새들 둥지를 떠나 다> 등의 작업을 통해 노년기 일상을 무대화한 이근삼이 노년의 삶에 대한 문제 인식과 비전을 제시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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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아침 이슬>은

탄광 매몰로 막장에 갇힌 다섯 광부들 이야기다. 관심 밖으 로 밀려나 있던 탄광촌 사람들의 삶과 생활의 고뇌를 조명 했다. 시커멓게 날리는 탄가루와 매캐한 가스가 주는 답답 함, 어두운 탄광 갱도 등 무대에 재현한 매몰된 갱 내부는 암울한 탄광촌 현실을 연상시킨다. 좋은 탄질에 흥이 나서 일하던 다섯 광부 만석, 진호, 덕 수, 태철, 병국은 무너져 내린 갱도에 갇힌다. 밖으로 나갈 길을 찾아 보지만, 다른 막장에 매몰되어 있던 시체만 확인 할 수 있을 뿐이다. 다섯 광부는 한 자리에 모여 최소한의 물 과 공기통, 도시락으로 연명하며 구조를 기다리지만 구조대 는 오지 않고,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다섯 광부가 갇혀 있는 탄광 막장은 깊이 1000미터, 갱도 거리 2700미터라는 까마득한 지하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 는 이 공간은 한 점 빛도 찾을 수 없는 절망을 완벽히 구현한 다. 광부들이 살아 나가기 위해 발버둥치면서도 한편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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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쥐여 주고 자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는 것도 이 절망적인 깊이에서 비롯된 다. 즉, 광부들이 갇힌 갱도의 깊이는 물리적 거리를 의미할 뿐 아니라 탄광촌 광부들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절망과 좌 절의 정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광부들은 어떻게든 탄광촌을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만석은 꼭 이곳을 떠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듣고도 탄광촌 을 떠나지 못했다. 덕수는 뱃일을 하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인과 함께 탄광촌으로 들어왔으며, 진호는 자신이 데려온 덕수에게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빈농의 아들인 태철은 도시에서 막일을 하다 삶이 힘들어지자 이곳으로 들 어왔으며, 병국은 탄광촌에 들어온 서무계 직원이다. 이처 럼 <모닥불 아침 이슬>의 주인공들은 자의든 타의든 탄 광촌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며, 밖으로 나가려던 노력은 늘 수포로 돌아간다.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탄광촌은 그들이 갇혀 있는 깊은 갱만큼이나 벗어날 수 없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모닥불 아침 이슬>은 갱에 갇힌 광부들의 모습을 사 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조명 효과와 헬멧 탈착을 통해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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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현실 경계를 넘나든다. 무너진 갱 한쪽으로 스포트라이 트가 들어오거나, 광부들이 헬멧을 벗으면 그곳은 갱에서 벗어나는 환상이거나 회상 장면이 된다. 이곳에서 그들은 자신을 부르는 산달의 부인을 만나거나, 밖에서 자신을 기 다리는 약혼녀를 만나기도 하고,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린 아 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 같은 공간 분할은 무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갱을 빠져나갈 수 없는 이들의 간 절함을 적절히 구현한다. 특히, <모닥불 아침 이슬>은 한병국이라는 인물을 통 해 광부들의 노동 환경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병국은 대학 을 졸업하고 광산 회사 사무계 직원으로 들어오는데, 회사 에 있는 이들은 빨리 이곳을 뜨라고 종용하거나, 적당히 협 조해서 돈을 벌라거나, 파업을 막으라는 말만 하는 속물이 다. 결국 병국은 광부들의 삶에 직접 뛰어들기로 하고 갱에 들어갔다가 다리를 다쳐 죽음을 맞는다. 광부들 처우 개선 을 위해 문제를 제기하던 인물의 비극적인 죽음은 비단 광 부뿐만이 아닌 노동자들의 고통과 소외 문제를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1984년 제8회 대한민국연극제에 참가, 극단 여인극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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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강유정 연출로 초연해 희곡상과 연기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에는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에서 단체 대상, 작품상, 희곡상, 연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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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불가>는

역사적 사실(史實)로 시대를 환기하고자 한 작품이다. 병자 호란과 무신정변, 을사늑약 등 치욕스러운 사건 앞에서 지 도자들이 벌이는 갑론을박을 황산벌 전투를 앞두고 고뇌하 는 계백장군과 교차·대비하면서 비판한다. 역사적 굴곡 앞에서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대신 들에게 결정권을 전가하는 무능한 왕과 이해관계에 따라 결 정을 내리려는 대신들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낸다. 그중에는 ‘부득이 찬성 할 수밖에 없다(不可不 可)’는 것인지 ‘절대 반 대 한다(不可 不可)’는 것인지 모호하게 ‘不可不可’라 대답 한 대신도 있다. 그는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죽겠다 며 자신의 목을 베고 전장에 나가라는 계백의 부인, 이를 안 타깝게 바라보는 계백과 극명히 대비되면서 부정성이 명확 해진다. 특히 조명과 음향을 통해 무대에서 더욱 명확히 대 비되는 효과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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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희의 오월>은

진보 연극 운동에 앞장섰던 박효선의 작품으로, 1988년 제1 회 민족극 한마당에서 공연된 이후 지방에서 순회공연되었 다. 박효선은 5·18 때 광주 시민군 홍보부장으로 일한 경 험이 있으며, 이후 ‘토박이’란 지역 극단을 이끌면서 광주항 쟁을 다룬 작품들을 여러 편 발표했다. <금희의 오월> 역 시 그러한 작품 중 하나로 1980년 5월 계엄군 진입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다가 전사한 이정연 열사의 실화를 여동생 금 희 시각에서 극적으로 재현했다. 작품은 5.18 유가족인 금희가 과거의 일을 관객에게 알 려 주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이후 1980년 5월 18일부터 31 일까지의 사건이 정연과 그의 가족, 그리고 시장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시위하는 학생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시 작되었던 공수부대의 폭력은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으 로 이어진다.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정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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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집을 뛰쳐나가 시위 대열에 합류한다.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의 단합으로 잠시 계엄군이 후퇴하기도 하지만, 결국 계엄군의 총공격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정연 역시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정연의 영정 을 든 금희가 오빠를 잊지 않고 이날의 정신을 잇겠다고 다 짐하면서 막이 내린다. 작품은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광주 민중의 행동 과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리얼리티를 획득했다. 한편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 기법과 마당극 기법을 적절 히 접목해 기존의 사실주의극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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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불가>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 는 작가 의식이 내용과 형식의 탁월한 결합으로 완성된 작 품이다. 막과 장을 구분하지 않고 한 극단의 연극 연습 상황 을 무대 위에서 그대로 보여 주는 극중극 형식을 따른다. 연 극이 상연되는 시점을 포괄 구조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 는 과거를 내적 구조로 설정함으로써 과거를 현재 상황 속 에 포함시킨다. 이 같은 구조는 <불가불가>가 다룬 역사 적 상황이 당대 현실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 주면 서 관객이 연극을 보고 있는 그 시점과 극적 상황을 연결해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형식적 특징은 작품을 초연 했던 시대 상황뿐만 아니라 작품이 읽히는 현재 상황까지 고려해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연출가가 던지 는 마지막 한 마디는 작품을 보고 있던 관객과 독자 모두에 게 던지는 질문이 된다. 1987년 극단 세실에서 채윤일 연출로 초연했다. 같은 해 에 서울연극제 희곡상, 이듬해에 한국백상예술대상을 수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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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극단 연우무대가 황지우 시를 연극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서사극 기법을 활용해 1980년대 현실을 비판했다. 분단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를 시각적 이미지와 다양한 놀이 형 식을 통해 드러낸 점이 특징이다. 서장을 포함해 총 11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각 장면 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불심검문과 고문, 이 산가족 찾기, 광주민주화운동 등 1980년대 현실의 단면을 환기하는 모티프로 일관되어 있다. 애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새들이 날아오르는 장면을 슬라이드로 비추며 시작한다. 이 어서 무대에 흩어진 팔다리를 줍는 말뚝이의 탄식, 언론이 이산가족과 탈북자를 다루는 방식, 화장실 낙서 등을 통해 진실이 은폐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억압당하는 한국 사 회의 암울한 현실을 지적한다. 또한 버라이어티 쇼, 고무줄 놀이, 말놀이 등 다양한 놀이 형식을 활용하고 1980년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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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알레고리로 형상화해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무력함을 풍자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유도한다. 주인석 각색, 김석만 연출로 연우소극장에서 1988년 2월 1일∼3월 31일까지 공연했으며 1997년 서울연극제 참가작 으로 자유소극장에서 재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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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깽>은

구한말에 멕시코 애니깽 농장 노동자로 이민을 갔던 조선인 들이 겪은 비참한 현실을 통해 민족 수난사를 무대화한 작 품이다. 김상열은 직접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있는 도시 메리다 를 방문해 농장을 답사하고, 멕시코 이민 2세대들을 만나 노 동자들의 탈출, 귀환기를 들었다. 여기에 당대 신문 기사를 추가해 애니깽 노동자의 삶을 형상화했다. 조선인들이 인천항을 떠났다가 귀환할 때까지 30년간을 배경으로 시공간의 변화, 조선의 궁중과 멕시코 애니깽 농 장 등 지리적 거리 등을 무대화하기 위해 장면을 분할하고 서사적 목소리를 활용했다. 특히 서사적 목소리는 사건의 경과를 알려 주고 그 실체를 객관화해 관객에게 사실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애니깽>에서는 노동자들의 이민−수난−귀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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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플롯과 고종의 무기력한 일상−죽음의 플롯이 병치된다. 노동자들이 겪는 비참한 현실을 고종의 무력하고도 권태로 운 일상과 대조해 보여 줌으로써 그 비극성을 더욱 강조했 다. 애니깽 노동자들이 조선에 돌아온 뒤 윤치호를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병치되던 두 사건은 하나로 합쳐진다. 힘 겹게 조국을 찾아온 애니깽 노동자들이 멕시코 국적을 가진 밀입국자로 몰려 수감되자 임금에게 자신들의 현실을 알려 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던 이들의 목적과 의지가 패망한 조국, 임금 부재라는 현실 앞에서 허무하게 스러지 는 결말은 비극적 효과를 강화한다. 극단 신시 창단 공연으로 1988년 10월 20일부터 11월 20 일까지 대학로극장에서 초연했으며 1998년 6월에는 뮤지컬 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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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XI, TAXI>는

택시 기사와 한 소녀를 통해 비인간화한 도시의 가치 도착 을 그린 작품이다. 한 소녀가 아버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 해 보상금을 노리고 ‘차치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실을 ‘준 전쟁’ 상황으로 처리한 이 극은 전체적으로 어두 운 분위기에서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등장인물 독백, 사건 교차, 현재와 과거의 중복, 어긋난 시점 등 도시와 전쟁을 연상시키는 사건과 오브제들이 충돌 하는 몽타주 기법을 사용했다. 현대인을 둘러싼 무수한 형 상들을 놓고 그 정체에 대한 관객의 질문이 시작된다. 이런 의도에 따라 초연 당시 무대에서 사용한 택시는 보닛과 지 붕을 뜯어내고 엔진과 시트, 내장 기관을 모두 드러내 ‘도시 적 흉물스러움’을 상징하도록 했다. 해체되어 이미지화한 이야기 단편들의 부딪침, 극적인 장면 전환과 포탄 파편같 이 무대에 박히는 조명 등은 ‘전쟁’과 ‘도시’라는 큰 이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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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한다. 한국전쟁을 체험했고 월남전에 참전했던 택시 기사와 출 세주의, 물신주의의 포로가 된 여자의 대화가 작품의 한 축 을 이루며, 비인간화한 도시에서 삶이 뿌리 뽑힌 채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소녀(여공)의 내레이션이 다른 축을 이룬 다. 작품은 두 축을 중심으로, 간간이 이를 파고드는 택시 기사의 회상을 통해 전쟁과 도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다 가선다. 1988년 10월 25일부터 산울림소극장에서 김상수 연출로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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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근도둑 이야기>는

두 늙은 도둑의 입을 빌려 우리 사회의 비도덕, 허위, 금기 의 실체를 희화적으로 그려 낸 풍자 희극이다. 막 가출소한 ‘더늘근도둑’과 ‘덜늘근도둑’이 권력의 실세인 ‘그분’ 댁 별실 에 잠입하면서 극이 시작한다. 이들이 있지도 않은 금고를 털려는 과정에서 온갖 해프닝이 벌어진다. 늙은 도둑들이 어느 실력자가 소유한 현대미술관에 숨어 들어간다. 처음부터 금고는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훔치지 못하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다. ‘현대 추상 미술품들이 가득한 현대미술관’이라는 가상 공 간과 ‘아무것도 없는 늙은 도둑들’을 대비해 극에 희극적 재 미를 더했다. 이 극은 경제적 편의와 함의 논리 때문에 왜곡 되는 가치 기준을 다루며 사회정의와 진실 실종, 같은 세상 에 살지만 소통하지 못하는 계층 간 갈등에 대해서도 이야 기한다. 한편 도둑들의 입을 통해 ‘그분’의 신상이 관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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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되는데, 그들이 잠입했던 방 벽에 걸린 역대 대통령 사 진, 대통령에게 받은 훈장, 공작 정치에 필요한 위조 서류, 호신용 권총 같은 것들을 근거로 관객은 ‘그분’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현대사를 소재로 뒤틀린 역사와 그 주역들 을 비웃고 야유하며 관객의 웃음을 유발한다. 1989년 이상우 연출로 동숭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초연했 다. 제1회 동숭연극제와 제2회 민족극한마당 출품작으로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끌어냈으며 최근까지 꾸준히 재공연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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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K>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을 토대로 1980년대 우리 나라 상황을 조명하고자 재창작한 작품이다. 짧은 부제가 달린 여섯 장면과 프롤로그,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폐 간된 신문사 기자인 시민 K가 의도와 상관없이 시류에 휘말 리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시민 K>에서는 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맡아 하나의 인격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기보다 다양한 지식인의 모습을 나타내도록 했다. 이는 사회운동을 실천하는 지식인, 보수 적 지식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지식인, 폭력적인 권력자 등 1980년대를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을 형상화하면서 그 안 에서 고뇌하는 시민 K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이 들 집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시민 K는 자신이 1980년대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뇌한다. 그는 자신을 다그 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조금씩 자기 모습을 잃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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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조사를 받고 고문당한다. 그러다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 했을 때는 결국 살해당한다. 그가 아무런 힘이 없는 지식인 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 작품은 시민 K가 처한 힘겨운 상황이 1980년대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명확히 보여 주고자 한다. 뉴스 헤드라인으로 구성한 자막은 1980년 상황을 축약하며 극의 시작을 알리고, 당시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에 따라 폐간된 ≪국제신문≫의 폐간사가 연극 맨 처음 등장하는 시민 K의 입을 통해 전달 된다. 이 밖에도 고문 가해자와 피해자의 실명을 거론하고 그들의 발언을 인용하는 등 <시민 K>는 연극과 현실 경 계를 모호하게 오간다. 또한 서사극 기법으로 관객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지속 적으로 방해함으로써 무대 위 상황이 단지 연극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상기했다. 인물이 해설자처럼 관객에게 상황을 설명하거나, 극의 진행과 상관 없는 대화를 나누던 배우들이 극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직접 발화하는 장면들은 <시민 K>의 연극적 의도를 충분 히 반영한다. 1988년 부산 가마골소극장에서 초연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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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제1회 동숭연극제에서 이윤택 연출로 극단 연희단 거리패가 공연해 널리 알려졌다. 같은 해 영희연극상을 수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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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명>은

노동운동에 투신한 정우과 그의 연인 현이, 현이의 정혼자 이자 정우의 이웃 형인 광식을 중심으로 학생운동과 노동운 동, 의문사와 성고문 등 1980년대에 있었던 민감한 문제를 상징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정우가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은 인물이라면, 고 문을 당한 뒤 정우를 주동자로 밀고하고 동료들에게는 밀고 자로 다시 광식을 지목한 현이와, 정우의 신념에 동조하면 서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이와 결혼함으로써 중산층 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광식은 허위의식과 양면성을 보여 주는 인물이다. 현이와 광식은 정우가 실종된 것과 달리 살 아남았다는 사실에 스스로 모멸감을 느끼고 정우에게 죄책 감을 가진다. <실비명>은 현이의 집과 과거 사건이 일어 나는 공간, 인물들이 내면을 표출하는 공간으로 무대를 분 할하고 환상적인 음악과 조명, 그림자를 활용해 등장인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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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과거를 대비한다. 이는 과거 사건 때문에 인물들이 겪는 내적 갈등을 시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또한 사라진 정우를 찾는 정우의 어머니 순영과 현이의 어머니 은옥을 통해 하층민 여성과 중산층 여성들이 겪는 삶과 회한을 다루는 동시에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그려 냈 다. 순영은 아들 정우가 실종된 연유를 밝히기 위해 현이의 집에 방문하지만, 은옥은 이를 냉담하게 거절하며 정우와 현이를 연결 짓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며 점차 정우와 광식이 가졌던 고뇌, 고문 이후 신념을 저버리고 연 인을 밀고했다는 죄책감에 미쳐 가는 현이의 모습이 그려지 며 마침내 두 여인은 시대의 희생양이 된 자식을 둔 어머니 로서 화해하게 된다. 1989년 9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윤호진 연출로 극단 실험극장이 문예회관소극장에서 초연해 서울연극제 대상 과 연출상, 연기상, 신인상, 미술상을 받았으며 작가는 백상 예술대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초연한 뒤 ≪한국연극≫ 1989년 11월호에 ‘모욕’이라는 부제를 달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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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 죽음의 형식>은

죽음을 앞둔 노모가 자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벌이는 굿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천도하기 위한 오구굿은 이 작품에서 살아 있는 노모가 죽음을 준비 하기 위한 ‘산오구굿’으로 바뀌었다. 한국적 연극의 원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죽음의 형식’이라는 부제처럼 노모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총 5장으로 구성해 사람이 죽은 뒤의 절차를 차례로 보 여 준다. 박수무당 석출이 노모의 부탁대로 산오구굿을 주 재하고, 노모는 곧 죽은 척을 한다. 염(殮)을 마친 노모의 몸 이 관 속에 자리 잡고, 아들들은 석출의 말대로 상복을 입고 상주가 되어 문상객을 받는다. 노모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저승사자 셋이 등장하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모호해지 고, 무대는 거대한 굿판과 노래로 뒤덮인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일상적이면서도 흥겹게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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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돈 때문에 굿을 하지 않으려는 아들이나, 곡을 하니까 배가 고프다며 투정하는 맏며느리, 재산 싸움을 하는 아들들 모습은 씁쓸함을 자아내기도 하지 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노모가 꿈에서 염라대왕을 만났다고 호들갑을 떨며 아들에게 산오구굿을 해 달라고 조 르는 것이나, 초상집에서 화투판이 벌어지고 거기에 저승사 자까지 가세하는 상황은 웃음을 유발하는데, 이는 죽음을 슬픈 것으로만 치환하지 않는 작품의 특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오구>는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는 것을 보여 준다. 석출이 직접 관객을 향해 말하면서 관객 이 굿판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부분이나, 죽은 척 하던 노모가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항의하자 이건 실제 상황이 아니니 대충하자고 하는 대사는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깨뜨리면서 죽음과 삶 역시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의 생각이 날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 는 저승사자의 대사는 인간에게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1989년 가을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으로 극단 쎄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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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일 연출로 초연했다. 이윤택은 이 작품으로 한국평론가 협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예술가상(연극 부문)을 수상했 다. 2003년에는 이윤택이 직접 연출을 맡아 영화로도 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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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는

도법 스님의 세속적 번뇌와 깨달음 과정을 극화한 불교극이 다. 전직 미대 교수이자 조각가였던 도법은 법을 구하기 위 한 수행에만 전념해 오던 중 3년 시한으로 봉국사 불상 제작 을 의뢰받는다. 도법은 마지막 힘을 다해 불상을 만들겠다 고 다짐하지만 불상을 제작하는 일은 쉽게 진척되지 않는 다.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에 대한 집착과 번뇌 때문이 다. 사건은 어느 날 도법 앞에 망령이 등장하면서 급변하기 시작한다. 도법의 자의식인 망령은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 었던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내적 갈등을 끄집어낸다. 결국 그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조각칼로 자기 두 눈을 찌 르고 만다. 이는 도법이 미추는 눈으로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마음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의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작가는 도법의 깨달 음을 통해 인간은 하나의 완성체이며 결국 부처는 멀리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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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법열 사이에서 실존적 번뇌를 통해 각성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철학적 명제를 긴밀한 구성으로 구체화해 해명하고 있다. 무게감 있고 철 학적인 주제를 지루하지 않게 표현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진지한 탐구, 놀이로서의 연극적 재미를 획득한 이 작품은 삼성도의문화저작상(1989), 서울연극제 희곡상(1990), 백 상예술대상 희곡상(1991)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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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만리>는

1991년을 전후해서 통일 음악제, 남북 영화제, 남북한 문인 들의 공동 세미나, 남북 학술제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남북 간 교류가 매우 활발해졌다. 그 교류가 더욱 가속화하고 다 각도로 펼쳐질 전망 속에서 다른 문화 예술 분야의 발 빠른 움직임에 비해 연극 부문은 그 행보가 매우 더디게 흘러가 고 있었다. 이 무렵 공연된 <격정만리>는 <불감증>, <점아 점 아 콩점아>, <아버지의 해방 일기> 등을 통해 극단 아리 랑이 추구해 왔던 분단의 상처와 그 모순 극복을 위한 예술 적 작업을 한층 심화한 작품이다. <격정만리>는 192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우 리 연극사에서 격정에 찬 연극배우들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 다. 식민 지배와 분단으로 인한 역사의 비극이 예술가들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그려 내 격동의 세월 속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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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져 간 광대들의 삶과 예술이 오늘날 우리 연극사에 거대 한 뿌리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한국 연극사에 서 중요한 작품들이 극중극으로 재현되고 있어 그 흐름과 변천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소개되는 극중극은 일본 대중소설인 <곤지키야샤>를 번역·각색한 신파극 <장한몽>, 한국적 신파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 주는 일제하 민족 수난을 그린 박승희의 <아 리랑 고개>, 송영의 카프 연극 <호신술>, 후에 ‘홍도야 우지 마라’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악곡화해 알려진 임선규 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북한의 혁명 가극 <피바 다>의 원전으로 추측되는 <혈해지창>, 선동극인 신고송 의 <서울 갔던 아버지>, 그 외에 <검찰관>, <대추나 무> 등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한국 연극사가 극중극으로 복원된다. 극단 아리랑 창단 5주년 기념 공연으로 준비한 이 작품 은 그해 서울 연극제에 자유 참가작으로 선정되었으나 집행 위원회의 일방적인 취소 결정을 통보받게 되었다. 9월 27일 부터 10월 14일까지 학전소극장에서 1차 공연한 이후 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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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씨가 맡았던 홍종민 역을 작가가 직접 맡는 등 배우를 교 체하고 무대를 좀 더 입체화해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11월 2일부터 17일까지 연장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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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나는 가족>은

한평생 끈질기게 소를 그리며 민족 미술을 지향했던 화가 이중섭의 삶을 극화한 작품이다. 예술가로서 순도적(殉道 的)인 자세를 견지했던 이중섭의 모습을 그렸다. 제목인 ‘길

떠나는 가족’은 그가 1954년에 그린 그림 제목이기도 하다. 본래 뮤지컬로 기획했으나 무산되고, 1991년 이윤택이 연 출을 맡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정극(正劇)으로 초연했다.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1936년 동경으로 간 이중섭은 작 품전에서 입선하는 성과를 거두는 한편 마사코와 사랑에 빠 져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룬다. 그러는 동안 조선은 해방 을 맞지만, 해방 후 이념 갈등과 한국전쟁이라는 혼란스러 운 상황에서 그의 예술 정신은 끊임없이 좌절한다. 전쟁 중 가난 때문에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근근이 생활하던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전시회를 열고 그림을 팔아 생활해 보려고 하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친다.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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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열과 거식증으로 고통 받던 그는 결국 1956년 서울 적 십자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가족과 함 께 이상향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린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이 재현된다. 그림은 끊임없이 좌절해야 했던 그의 삶과 대비되며 애상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주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심을 가져온 작가 김의 경은 이 작품에서 시대의 희생자였던 화가 이중섭의 삶을 통해 과거를 조명한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 인 욕구와 현실의 갈등을 심도 있게 그린 이 작품은 이중섭 개인의 삶을 넘어 오늘날의 예술가들, 그리고 우리의 삶까 지 이어진다. 1991년 제15회 서울연극제에서 작품상, 희곡상, 연기상 을 수상했으며, 이듬해 미국 라마마극장과 LA포스터극장에 서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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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지고 피고 지고>는

이만희는 노인의 삶 자체를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노인들 의 말과 행동에는 그들이 살아온 삶이 축약되어 있기 때문 이다. 그는 삶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를 “노인 동화”처럼 써 서, “노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정서를 담아 보고 싶 었다”고 한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는 일종의 ‘철학적 노인 동화’인 셈이다. 주인공은 왕년에 도박, 사기, 절도, 밀수 등 각종 범죄로 한가락 했던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 셋이다. 이들은 혜 초 여사의 제안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좇아 신라 고승의 것 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도굴하고 있다. 도굴은 3년째 진행되 고 있으며, 이들은 매일같이 지하 갱도를 파 내려가며 보물 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극 중에서 세 노인은 도굴지를 돈황 사라 부르고 자신들의 이름을 왕오, 천축, 국전이라 바꿔 부 른다. 이는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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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 주는 설정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살아가고 있 다. 천축이 무대 한쪽에 써 내려가고 있는 자성비문과 지하 갱도의 음습함은 이들에게 죽음만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매일 지하 갱도로 들어가는 인물들의 행동 자체가 일종의 수행인 셈이다. 이만희는 왕오, 천축, 국전이라는 세 인물의 앙상블을 통해 작품의 철학적 주제를 노련하게 유머로 이끌 어 간다. 1993년 국립극단이 공연했으며, 1997년 ‘다시 보고 싶은 연극 시리즈 제1탄’으로 재공연할 당시 국립극단 최초로 연 장 공연을 가져 화제가 되었다. 연출은 강영걸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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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의 둘레>는

시각장애인에게 낭독 봉사를 하는 명인을 중심으로 성, 가 족, 종교의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다. 여성적 정체성에 대해 서도 고민했다. 5장 구성에 앞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낭독 봉사를 하던 명인은 현수를 위 한 낭독자로 고용된다. 현수는 명인이 수녀가 된 누이 현진 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고용하지만 그 사실을 숨 긴 채 자신이 원하는 책이나 문구를 낭독하게 한다. 현수가 낭독하게 하는 책들은 현수의 고통과 연관되며, 결국 현수 는 명인에게 사춘기 시절 누이와 사소한 근친상간적 충동이 어머니에게 파행적으로 해석되고 족쇄로 작용했다는 진실 을 알려 준다. 한편 명인은 애정 없는 부부 생활을 묵묵히 견디던 중, 현수의 낭독자로 고용되면서 혼란을 느낀다. 그녀는 현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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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진실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적 고통 역시 직시 하게 되며, 배 속의 아이를 낙태하게 된다. 그날 남편은 명 인을 구타하고 봉쇄 수도원에 갇혀 지내던 친구 현진은 수 도원을 나와 명인을 찾는다. <구멍의 둘레>는 인간의 의무와 고통, 파계와 구원이 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천착했다. 또 이 작품은 레몽 장의 ≪책 읽어 주는 여자≫, 엔도 슈사쿠의 ≪침묵≫ 등 다양 한 외부 텍스트들을 인용하고 낭독하면서 이질적인 텍스트 들의 상호작용을 추구했다. 1994년 삼성문예상 희곡상에 입선했고 같은 해 극단 산울림 제작, 채승훈 연출로 산울림 소극장에서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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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팔뜨기 선문답>은

1994년 발표된 윤영선의 작가, 연출가 등단작이다. 극단 연 우가 공연했다. 이 작품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이 미지 1, 2, 3, 4, 5, 6이 장면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작가의 분열된 의식, 내면의 목소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유 형화된 이 이미지들은 작가 개인의 의식 차원을 넘어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로도 연결된다. 여섯 개의 이미지 유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미 지 5’다. 이미지 5는 부권, 권력, 이성 중심의 사고를 대변하 면서 다른 이미지들을 억압한다. 지배자의 억압 속에서 희 생된 자가 바로 ‘이미지 3’이다. ‘이미지 1’과 ‘이미지 2’는 기 회주의자로서 지배자인 이미지 5의 횡포가 부당하다고 느 끼면서도 어느새 이미지 3을 희생자로 만드는 일에 동참한 다. 그 옆에는 어머니 형상을 하고 희생자를 안타깝게 바라 보는 ‘이미지 4’가 있다. 또한 현상을 바라보며 회의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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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래>는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남편과 자식을 지키려던 한 여인의 과 거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작업실에 혼자 앉아 재봉틀을 돌리며 한복을 짓던 영옥 은 환청에 시달리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녀는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던 부친이 인민군에게 살해당한 과거를 갖고 있 다. 남들처럼 잘살아 보겠다고 수재로 소문난 인수와 결혼 했다. 남편을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영옥의 바람 과 달리 인수는 선생 노릇에 만족하며 정치 전반에는 비판 적이다. 그러던 중 인수가 정부 조작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 자 영옥은 검사의 회유에 속아 남편을 고정간첩단 정책 참 모로 고발한다. 하지만 검사는 그녀와 약속을 저버리고 인 수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사건 관련자들은 재판 사흘 만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 일로 인수의 어머니까지 자살하자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아들 경훈과 함께 마을에서 쫓아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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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느덧 경훈도 자라 대학원까지 졸업한다. 하지만 경훈 역시 아버지처럼 영옥의 바람대로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기 를 거부한다. 대신 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조를 결성하고 노 동운동에 투신한다. 이를 말리던 영옥은 경훈을 노조에서 빼내기 위해 노조원 집회 장소를 경찰에 밀고하고, 어머니 가 밀고자라는 사실을 안 경훈은 분신자살로 생을 마친다. 영옥은 경훈의 시체를 거두어 옆에 두고 방 문을 걸어 잠근 채 환상 속에서 인수, 경훈과 재회한다. 문밖에서는 노조원 과 회사 간부가 서로 경훈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아우성이 다. 인수가 휘말린 간첩단 조작 사건은 인혁당 사건을 모티 프로 했다. 하지만 작품에서 사건이 있었던 연대와 그 명칭 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1980년대 후반, 공연윤 리위원회에 사전 심의를 신청했다가 반려된 뒤로 수년 만인 1994년에 심재찬이 연출을 맡아 극단 전망이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에서 초연했다. 그해 제18회 서울연극제 희곡상을 수상했다. 이후 2008년 서울연극제 30주년 기념 공연으로 박근형이 연출을 맡아 극단 골목길이 재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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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적이지는 않은, 지식인 형상을 한 ‘이미지 6’이 있다. 이 여섯 이미지들은 각 장에서 작가의 과거를 형상화하기도 하 고, 연극 놀이를 통해 인간 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작품은 이처럼 우리 사회의 구조화된 권력 체계와 속물적인 인간 본성이 공모해 만들어 내는 폭력을 폭로한다. 그러나 여러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팔뜨기처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분열된 주체는 한편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가 능성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비굴함에 괴로워하는 목소리, 망령처럼 떠돌며 끊임없이 지배자를 괴롭히는 희생자의 존 재는 그러한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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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부동산>은

복지원을 배경으로 물신주의 세태를 풍자하고 소외된 노년 의 삶에 대한 이해를 담아낸 작품이다. 극중극 기법을 활용 해, 삶에서 비롯한 고통을 연극이라는 환상적 통로로써 극 복하고자 하는 한 노인을 형상화한다. 연극은 천지복지원이라는 기도원에 오봉이 새로운 원장 으로 오면서 시작한다. 폭력이 난무하는 등 복지원의 잘못 된 운영을 개선하고자 한다. 그러던 중 거액의 기부금을 내 고 복지원에 머물며 자신을 태조 이성계라 믿는 인물 이병 칠을 만난다. 극이 진행되면서 이병칠이 재산을 탐내는 후 처와 자식들의 모략을 피해 친구이자 천지복지원 원장이었 던 권 장로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는 현실의 고 통을 잊기 위해 스스로 이성계를 자처하며 연극 놀이에 빠 져 있다. 여기에서 물신주의, 종교 재단 비리 등 사회에 대 한 이근삼 특유의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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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통해 이병칠을 고친다는 설정은 연극의 놀이적인 속성과 치료 효과를 적절히 보여 준다. 인물들이 태조와 조 정 신료들을 연기하며 펼치는 극중극, 이병칠과 죽은 권 장 로가 만나는 장면 등은 이병칠이 처한 현실과 심리를 간접 적으로 드러낸다.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이성계인 척하는 인물이 점차 그 환상에 적극적으로 빠져들면서 속내를 드러 내고, 처음에는 미친 짓이라며 연극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던 인물들이 노인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1994년 김도훈 연출로 국립극단이 국립극장에서 초연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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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다거>는

제19회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으로, 만해 한용운의 삶을 다뤘다. 그러나 보통의 일대기적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 은 한용운의 삶을 독특한 상징체계를 통해 그려 낸다.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라는 뜻의 ‘끽다거(喫茶去)’는 중 국 조주 선사의 여러 화두 중 하나로, 어떤 인연에도 구속됨 없이 자신의 삶 자체를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 가는 이 ‘끽다거’의 의미를 만해 한용운의 삶과 연결하면서 관객에게 생(生)과 사(死)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작품은 죽음을 앞둔 한용운의 내면세계를 그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에 가까운 ‘만해 有’는 죽음에 가까운 ‘만 해 無’와 만난다. 그러나 ‘만해 有’는 ‘만해 無’를 거부한다. 이에 ‘만해 無’는 ‘만해 有’에게 그동안 살아온 길을 되짚어 보며 다시금 삶을 깨달아 보라고 제안한다. 19세에 출가한 일부터 민족운동에 투신한 일, <님의 침묵>을 집필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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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尋牛莊)에서 생활한 일 등 그의 삶의 궤적이 회상 형식으로 무대에 펼쳐진다. 환갑잔치 장면을 끝으로 마지막 곡차를 비운 한용운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열반에 들어가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승려이자 민족 운동가이며 시인으로 살았던 한용운의 삶을 불교적 시각을 바탕으로 조명한 것이 다. 즉 작품 전체가 고집멸도(苦集滅道) 과정을 상징화하고 있다. 또한 <끽다거>는 시, 노래, 춤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 해 극장주의 연극을 위한 대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 은 형식은 최현묵이 민족 시인 3인을 소재로 쓴 <想華와 尙火>, <윤동주와 헤어져> 등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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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간, 연산>은

폭군으로 알려져 있던 연산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해 어 미를 잃은 아들, 제의를 주재하는 무당으로서 연산을 전면 에 내세운 작품이다. 연산군이 현재와 같은 평가에 이르게 된 이유를 개인의 성향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하들, 성왕의 그늘에 가려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던 왕으로서 문제가 겹친 고뇌에서 찾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작품에서 연산은 잠들면 자신의 아명(兒名)을 부르는 폐비 윤씨의 목소리와 환영에 시달리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깨면 어린아이처럼 녹수에게 위로를 받는 감상적이면서도 나약한 인물이다.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리던 연산은 억울하 게 죽은 어머니를 위해 제를 지내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신하 들은 연산의 말을 무시하고, 결국 연산은 궁궐 내에서 어머 니를 죽게 만든 이들을 살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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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의 행위가 정당하게 비춰지는 것은 그를 둘러싼 고 통과 좌절을 집중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마다 찾아오 는 어머니의 혼령, 자신의 말보다 선왕과 공자 말씀을 더 따 르는 신하들,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의 뻔뻔함이 모두 연산이 폭군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제시된 다. 조선의 왕이고자 했지만 선대 법도와 공자의 그늘, 신하 들의 반대에 가려 좌절하는 연산의 모습은 개인적 비극 이 상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적일 수 없었던 연산의 비극은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었던 한국 현대사와 겹 치면서 역사적 비극으로 확장한다. <문제적 인간, 연산>은 잘 짜인 극(well made play)이 아니라 놀이를 통한 해체주의적 무대를 꾀하는데, 이때 부 각되는 것이 제의 형식의 무대화다. 폐비 윤씨의 제를 지내 기 위해 연산 곁을 지키는 숭재, 처선, 자원 등이 벌이는 굿 판, 폐비 윤씨의 넋이 씐 녹수, 연산이 직접 주재하는 제의 등은 희곡 <문제적 인간, 연산>이 지향하는 독특한 연극 성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무대 뒤쪽 푸른 대밭이라는 극적 공간은 혼령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어 죽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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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인 성종, 인수대비, 폐비 윤씨, 그리고 연산이 죽인 신하들 까지 살아 있는 인물들과 겹쳐지는 효과를 낸다. 삶과 죽음 의 경계에 놓인 대밭은 환상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 내며 연산이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서 괴로워 했던 인간임을 잘 보여 준다. 1995년 이윤택 연출로 극단 ‘유’의 창단 공연으로 초연해 같은 해 동아연극상 대상, 희곡상, 남자연기상, 무대미술상 과 대산문학상 희곡 부문,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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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행 일기>는

500년 전과 현재 시공간을 중첩함으로써 억압으로부터 자 유를 회구하는 인간의 갈망을 심도 있게 극화한 작품이다. 고서적 수집가인 조당전은 인사동에 있는 단골 서점에서 ≪영월행 일기≫를 입수한다. 그런데 어느 날 김시향이 찾 아와 남편 몰래 판 거라며 책을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이 책 은 500년 전 신숙주를 모시던 하인이 한글로 쓴 일기로, 영 월에 유폐된 노산군(단종)의 표정을 살피고 오라는 세조의 명령을 받고 세조의 여종과 함께 영월을 오간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에는 권력의 억압과 자유 사이의 갈등을 형식과 내 용,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립으로 그려 낸다. 극 중극을 통해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 역사와 허구의 간극 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연극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다. ≪영월행 일기≫라는 책과 나무로 만든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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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는 극중 인물과 관객에게 연극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 며 현재와 과거, 실제와 상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기능 한다. 또 이 작품은 극중극과 역할 놀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순환하도록 했는데, 과거의 단종, 남녀 종이 추구하는 자유 가 현재의 조당전과 김시향이 추구하는 자유와 겹침으로써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편적인 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영 월을 찾아가는 세 차례 여정에서 단종의 표정이 두려움에 질린 무표정에서 통제와 억압의 상태를 인식한 슬픈 표정으 로, 다시 탈속을 통해 정신적 자유를 획득한 웃는 표정으로 변하는 과정은 자유에 대한 남종의 인식 변화와 맞물린다. 내면 자유를 통해 현실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이를 억압하려는 권력의 힘을 형상화해 권력과 자유의 속성, 본 질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1995년 극단 세실이 제19회 서울연극제에서 공연해 희 곡상을 수상했다. 그해 10월 3일부터 10월 15일까지 채윤일 연출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김학철이 조당전 역 을, 이화영이 김시향 역을 맡았으며 그 밖에 김종칠, 장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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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웅이 고서적 동우 회원을 연기했다. 1996년 제4회 대산 문학상 희곡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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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할머니: 그 여자의 소설>은

‘그 여자의 소설’이라는 부제가 달린 8장 희곡이다. 축첩이 허용되던 환경에서 씨받이로 들어온 ‘작은댁’의 삶을 연대 기로 제시해 한국 근현대사 중턱에서 여성이자 어머니로서 삶이 어떠했는지 보여 주며 그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극은 1942년 봄, ‘작은댁’이 ‘큰댁’과 처음 만나는 장면으 로 시작한다. 이후 ‘작은댁’에게 아이가 들어선 1943년, 그 녀가 ‘큰댁’, 남편, 아이와 함께 창경원으로 소풍을 간 1945 년부터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그리고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1975년에 이르기까지 ‘작은댁’의 삶을 시간 경과에 따 라 엮었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의 고통을 그렸 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와 축첩이라는 구습과 일제강점 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겹치는 복합적인 상황에서 여 성이기에 감내해야 했던 삶을 조명한다. 아들을 낳지 못해 구박당하는 ‘큰댁’도, 아들을 낳으면 본집으로 돌아갈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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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희망과 달리 결국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첩으로 살아 야 하는 ‘작은댁’도 모두 가부장적인 남편의 일방적 폭력에 시달린다. ‘작은댁’은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난 남편을 대 신해 남의 집 첩살이를 하며 가정과 딸을 지켜 낸다. 한편 ‘큰댁’은 전쟁통에 강간을 당해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이처럼 작품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은 이중적인 고통 속에서 남편 혹은 아버지가 없는 가정을 지킨다. 하지만 <작은할머니: 그 여자의 소설>의 미학은 비극 적 상황에서도 따뜻하며 올곧은 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 물들의 끈끈한 연대를 보여 주고 삶의 지속성을 긍정하는 데 있다. 축첩제도라는 설정에서 ‘큰댁’과 ‘작은댁’의 갈등을 예상하기 쉽지만 예측과 달리 이들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 인 남편을 함께 견디면서 서로 끈끈한 연대를 느낀다. 이들 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는 ‘귀분네’ 또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결말에서 그때까지 인고하던 ‘작은댁’이 풍에 걸린 남편을 때리고 딸에게 편지를 남기는 장면은 한 인물의 성장을 보 여 준다. ‘작은댁’에겐 작지만 큰 변화였던 것이다. 1995년 극단 민예가 강영걸 연출로 문예회관소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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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했다. 작가가 가족 관계에서 직접 체험하고 전해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한 이 극은 여러 지역을 순회공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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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보러 와요>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진실의 모호함이라는 인식론 적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1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대는 태안 지서 형사계 내부다. 서울에서 자원한 김 반장, 서울대 영문과 출신이자 시인 지망생인 김 형사, 태 안 토박이 박 형사, 무술 9단인 조 형사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수사를 벌이고 범인 추적과 수사 과정을 취재하는 박 기자와 김 형사를 짝사랑하는 다방 종업원 미스 김이 등장 한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세 용의자가 등장하는데, 첫째 용의 자는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정신질환자이고 둘째 용의자 는 꿈속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진술 외에 다른 혐의점이 없다. 라디오에서 <레퀴엠>이 나올 때마다 범행이 일어 났다는 사실을 밝혀 낸 김 형사의 추적으로 셋째 용의자가 잡히지만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DNA가 용의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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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과 다른 것으로 판명된다. 김 반장은 그 충격으로 쓰러지 고, 수사팀은 해체된다. 이 작품은 세 용의자를 모두 같은 배우가 연기하도록 함 으로써 모두 범인인 것 같으면서도 범인이 아닌 것 같은 상 황을 연출해 진실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연극적으 로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빛 속에 실루엣만 보이는 범 인의 모습은 어디엔가 진실이 있으나 알 수 없다는 이 작품 의 주제를 압축해서 보여 준다. 강간 살인 사건에 대한 실제 수사 기록과 현지 취재, 끔 찍한 슬라이드 자료들이 사실성을 부여하며, 잔혹한 소재가 범인 탐색이라는 추리 서사 구성과 맞물려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형사들의 입담과 범인의 주변 인물 들이 보이는 반응은 웃음을 유발하고 미스 김의 짝사랑 등 이 살인사건 수사와 맞물리면서 긴장을 이완하며 다양하고 복합적인 인간 군상을 보여 주는 데 기여한다. 김광림 연출로 1996년 2월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해, 제20회 서울연극제에서 작품상, 연기상, 인기상을 수상했 다. 1997년에 세계연극제 공식초청작으로 선정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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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는 제16회 전국연극제에서 장려상, 제33회 백상예 술대상 희곡상과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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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충동: 주먹 쥔 아들들의 폭력 충동>은

프롤로그와 2막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가가 ‘주먹 쥔 아 들들의 폭력 충동’이라는 부제를 붙인 데서 보듯 한국적 가 부장제 안에서 발현되는 남자들의 폭력 충동을 생생한 전라 도 사투리와 연극성으로 그려 냈다. 1990년대 목포가 배경이다. 주인공 장정은 영화 <대 부>의 알 파치노처럼 자기 패밀리인 가족과 깡패 조직을 지키려 혈안이 된 인물이다. 이런 장정의 노력은 아이러니 하게도 아버지의 손목을 자르고 다른 깡패 조직의 보스를 습격하며 파괴적 충동으로 증폭되어 나간다. 급기야 장정도 달래가 휘두른 일본도에 찔려 죽는다. 작품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주의의 모순을 생동감 있는 언어와 인물 군상으로 표현했고, 근친 상해나 과도한 폭력성 등 금기되었던 억압을 표층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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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연극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정치적 담론이나 엄숙함으로부터 노골적으로 벗어난 이 작품은 이후 연극계 에 386세대 연극인들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초연은 환퍼포먼스 제작으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작가가 직접 연출했고, 2004년도에 재공연되었 다. 초연 당시 서울연극제 희곡상,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 출상,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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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극락 같은>은

불상 제작을 둘러싼 두 인물의 갈등을 통해 형식과 내용이 라는 예술관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불상 제작자인 함묘진의 두 제자 동연과 서연은 불상 제 작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동연이 완벽한 부 처 형태에 부처의 마음도 깃들 수 있다고 믿는 데 반해 서연 은 불상의 외형보다는 불상이 담고 있어야 할 부처의 마음 을 중시한다. 서연은 진정한 부처의 마음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고, 동연은 함묘진의 후계자가 되어 함묘진의 딸인 함 이정과 결혼하고 세속적인 성공도 거둔다. 그러나 함묘진이 세상을 떠나자 함이정은 동연을 떠나 서연을 찾아가고, 그 녀는 서연과 함께 돌부처를 만들며 들판을 헤매다가 서연의 임종을 지킨다. 이 작품에서 동연과 서연이 형식과 내용, 형태와 정신의 대립 쌍으로 기능한다면, 함묘진, 함이정, 조숭인은 양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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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매개하는 기능을 한다. 육신의 아버지인 동연과 정신적 아버지인 서연 사이에서 번민하던 조숭인은 서연의 장례식 장에서 어머니 함이정과 함께 과거를 되짚어 가며 두 사람 의 가치관을 통합하고자 한다. 시간 역행을 통해 현재와 과 거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진행을 통해 현재와 과거는 동시성 을 가진다. 특히 20대 청년 모습으로 유아기부터 청년기까 지 연기하는 조숭인을 비롯해 각자 정해진 연령으로 수십 년 시간 흐름을 연기하는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얽 힌 듯한 동시성과 ‘느낌’의 순간을 강조하는 데 기여한다. 1998년 5월 ≪한국연극≫에 발표했으며, 같은 해 5월 22 일부터 6월 14일까지 제22회 서울연극제에 출품, 이윤택 연 출로 토월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공연으로 서울연극제 대상 과 희곡상, 연출상, 신인여자연기상, 무대예술상을 수상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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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익스프레스>는

오태영의 ‘통일 연극 시리즈’ 첫 작품으로,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통일 문제를 새로운 상상력으로 코믹하게 다루고 있 다. 1999년 이상우 연출로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초연되 었다. 이야기는 휴전선 근처 한 냉면집에서 전개된다. 평범한 냉면집처럼 보이는 이곳은 사실 남북한 왕래를 비밀스럽게 돕는 곳이다. 가게 주인인 우보는 휴전선을 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긴다. 그의 목적은 오 직 이 사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남북통일 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잘나가던 그의 사업은 남북 정부가 공식적인 남북 왕래 통로를 개설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이에 우보는 통일을 달 가워하지 않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데, 우보뿐만 아니라 그의 고객이었던 평원, 수원, 보영 역시 제각각 개인의 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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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해 통일 반대에 뜻을 모은다. 순수하게 통일을 열망하 는 종업원 옥화는 오히려 어리석고 무력해 보인다. 당시 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북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러한 상황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작품은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정부의 미숙한 정책 운영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한편,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을 풍자하면 서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한다. 이데올로기 문제 로만 생각하던 통일 문제를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연관해 풀 어내면서 분단 상황에 놓인 우리 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돌아보게 해 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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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안붓다>는

프롤로그와 3부 16장, 에필로그로 구성된 작품이다. 25세 기 폐허가 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 복제에 따른 문제 를 불교적 세계관에 비추어 성찰했다. 프롤로그에서는 죽음의 신 칼리가 유전자 복제로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응징하고자 하며, 또 다른 신들은 붓 다의 환생을 통해 깨우침을 주고자 한다. 이후 본 극에서는 인간과 복제 인간이 생체 기계 전생수를 사이에 두고 싸움 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인간 시원과 복제 인간인 철안족 안 회의 정신(아트만)과 몸이 뒤바뀌는데, 안회는 깨달음을 추 구하며 철안붓다가 되고 인류의 미래는 복제 인간과 공존하 기를 거부했던 파괴적인 인간 대신 복제 인간들이 맡게 된 다. 유전자 복제라는 과학적 소재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작품 이다. 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체성과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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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SF적 상상력과 신화의 결합 속에서 다루었다. 이 작품은 1999년 조광화 연출로 극단 ‘유시어터’에서 제작했다. 붕괴 된 성수대교 잔해 속에서 공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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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예찬>은

결코 예찬할 수만은 없는 청춘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워 삶 에 대한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형상화한 작품이다. 거칠고 폭력적이면서도 끊임없이 애정과 희망을 갈구하는 인물들 을 그렸다. 청년은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학교도 잘 나가지 않는 고 등학생이다. 입만 열면 욕을 하고 술과 담배를 하며 거짓말 을 밥 먹듯 하는 친구들과 어울린다. 아버지는 일을 전혀 하 지 않고 집에서 술만 마신다. 자신 때문에 눈이 멀어 안마사 로 일하고 있는 이혼한 부인에게 돈을 받아 생활한다. 어느 날 청년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간질 걸린 여인을 집에 데 려와 함께 살겠다고 선언한다. <청춘예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인 부부, 부 자, 친구, 사제 관계를 깨뜨린다. 그러면서도 연민을 불러일 으킨다. 아버지에게 욕을 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는 교복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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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들, 이혼한 아내를 찾아가 돈을 받아 오고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면서 아들에게 관심을 끌려는 아버지의 모습 은 어딘지 불편하면서도 슬프고 불쌍하다. 욕설 가운데 숨 겨진 따뜻함, 무심한 듯하지만 상대를 향한 걱정이 행동으 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청년은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간질’이 함께 살자며 매달 릴 때, 심한 말을 하면서도 차마 밀쳐 내지 못하고 집에 데려 온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 아들이 낯선 여 자와 함께 살겠다고 했을 때, 비아냥거리면서도 연신 술잔 을 기울이며 걱정하는 마음을 내비친다. 아들 친구 용필이 자기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번다며 허풍을 떨 때, 청년의 아버 지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용히 받아 주고 아버지 면회는 꼭 가라며 한마디로 용필을 위로한다. 이처럼 <청 춘예찬>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어루만지는 인 물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무대 분위기는 인물들이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조촐하게 차린 술상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아버지, 하마처럼 보이는 비대한 간질, 술 담배를 하는 것은 물론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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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어 가득한 대화를 나누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은 이들의 무 력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이 우울함은 인물들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오히려 부각하기도 한다. 청년은 아버지에게 피차 피 곤하니 나가라면서도 늘 아버지가 술을 먹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내를 찾아가 곧 태어날 손주를 위해 천장에 별을 붙였다고 이야기하며 ‘당신도 함께 보면 좋겠 다’고 말한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고,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99년 4월 극단 골목길에서 박근형 연출로 초연한 뒤 2000년 거창국제연극제와 2004년 연극열전시리즈에 초청 되었다. 1999년 초연 당시 백상예술상 희곡상, 남자신인연 기상, 제3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남자연기상, 희곡상 등을 수상했고, 같은 해 한국 평론가협회 올해의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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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의 여자 나혜석>은

13장으로 구성되었다. 근대 여성 1세대로 식민지 시대를 살 았던 신여성 나혜석의 인생을 결혼 무렵부터 죽음까지 연대 기적으로 다루었다. 여성의 전통적인 삶에 안주하지 않았 던 나혜석은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작가이며 화가다.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과 떠난 최초의 부부 동반 유럽 여행, 선구적인 여성 의식을 담은 많은 글과 그림 등으로 당 대 신여성 중 가장 주목받았으나 완고한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비참하게 몰락했다. 작품은 ≪인형의 집≫의 노라에 기대 여성의 구속과 자 유를 읊는 나혜석 시에서 출발해 그 시구를 언급하며 어머 니의 삶을 이해하고 어머니로 인해 좀 더 나아진 여성의 삶 을 살아가는 딸 나열의 독백으로 마감한다. 그 사이에 김우 영과 결혼하지만 평범한 조선 여성의 삶과 타협할 수 없었 던 예술가 나혜석의 고뇌, 구미만유에서 만난 최린과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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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 그로 인한 이혼과 최린을 상대로 한 위자료 청구 소송, 이후 몰락 과정이 찬찬히 그려진다. 이 작품은 <위기의 여자>를 비롯해 1980년대 이후 적 극적으로 나타난 여성주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2000 년 채윤일 연출로 극단 산울림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 공연 은 ‘올해의 한국 연극 베스트 5’에 선정되었고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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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돐날>은

2막과 에필로그로 구성된 작품이다. 열정과 패기로 20대를 보낸 386세대가 사회에 진출해서는 비루하게 살아가는 현 실을 사실적으로 조명했다. 돌날 잔칫상을 준비하는 여인네들의 왁자한 수다로 1막 이 시작된다. 그녀들이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사이 손님들 이 도착한다. 그들은 대학에서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로 이제는 사업가, 하청업자, 판매상이 되어 있다. 모두 386세 대를 표상하는 인물들이다. 지호에게 논문 대필을 청탁하는 성기, 초상화를 그려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가는 경주, 경주를 겁탈하려는 지호에게서 꿈 많고 이상도 높았던 청춘의 흔적 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작품은 386세대가 기성세대로 자리 잡은 모습을 현실감 있게 재현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최후 보 루인 정의, 평등, 자유마저 저버리는 실상을 날카롭게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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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386세대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 건 아닌지 반 문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연극 경향의 주류가 거대 담론식 구조에서 일상생활을 반영한 사실주의로 선회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2002년 제10회 대산문학상 희곡 부문 수상작이며 그해 한국연극협회에서 발간한 ≪한국 대표 희곡선≫에 수록됐 다. 2001년 극단 작은신화 제작, 최용훈 연출로 동숭아트센 터 소극장에서 초연했다. 이 공연은 2001년 한국연극평론 가협회의 ‘공연베스트3’에 선정되었고, 제38회 동아연극상 에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 3개 부문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검증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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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선비 조남명>은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 조남명(조식)이 진정으로 글을 읽는 것, 학문을 닦는 것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 한 작품이다. 우직하게 글을 읽어 나가는 조남명(조식)의 모습을 중심에 두고, 벼슬길에 올라서도 바른말을 하지 못 하는 신하들, 편을 갈라 싸우는 왕실 모습과 대조함으로써 권력을 가진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 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조남명이라 는 인물을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을사사화와 조식이 보낸 상소문에 대한 왕실 반응을 보여 준다. 조남명은 청백리(淸 白吏)라는 이유로 숙청당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

짐했으면서도, 옷차림으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소문만으로 인재가 벼슬길로 나아가는 현실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제 기한다. 결국 벼슬길에 오른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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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따를 수 없는 곳이라 판단하고 한미한 관직마저 거절한 다. 같은 시기, 궁에서는 명종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문정 왕후가 동생 윤원형과 함께 반대파를 숙청한 을사사화가 일 어난다. 이 사실을 안 조식은 죽음을 각오하고 문정왕후와 왕을 직접 겨냥해 상소를 올리고, 이에 왕실은 크게 분노한 다.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은 죽어 가면서 부디 자식 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코러스는 그리 스 비극에서와 마찬가지로 합창을 통해 글을 아는 이들이 만든 처참한 상황을 알린다. 옛 선비들의 말, 시조와 창, 택견 등 양반들의 유희를 곳 곳에 배치해 작품 의도를 더욱 명확히 드러낸다. 시조뿐 아 니라 김지하나 이윤택의 시도 가창 형식으로 배치했는데 이 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역사적 사건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좁혀 준다. 2001년 남명 탄생 500주년 기념 공연으로 산청 야외무대 에서 초연한 뒤 서울을 비롯해 진주, 창령, 거제를 순회하며 공연했다. 이듬해 베이징에서 열린 베세토연극제에 한국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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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작품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2001년 서울공연예술제 대 상, 연출상, 남자연기상, 음악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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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는

아파트 405호에 사는 미스터리한 여성에 대한 의문을 추리 극 형식으로 구성했다. 이와 함께 순행과 역행이 뒤엉킨 시 간 구성과 한 무대를 각기 다른 아파트로 사용하는 무대 연 출로 색다른 형식 실험을 시도했다. 극은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한 이야기는 무 대가 장미촌 아파트 204동이다. 이 아파트 505호에는 결혼 9년 만에 집을 장만한 유지호·심은희 부부가, 305호에는 아이를 잃어버린 아주머니가 살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107동 505호에 이사 온 사진작가 문진수를 중심으로 구성 된다. 그는 204동 각 층을 시간대별로 찍는 작업을 하며 이 들을 대상으로 사진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두 서사가 교차 하는 과정에서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오직 405호에 혼 자 사는 여성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405호 여자를 실제로 봤다고 기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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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그렇게 믿고 있지만 사실은 불확실하고 조작된 기억에 불과하다. 게다가 진수가 405호 여자의 시신을 찍은 날짜가 지호가 술에 취해 405호에 들어갔던 날보다 앞선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405호 여자의 정체는 결국 미궁에 빠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405호 여성의 부재는 오히려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다양한 욕망과 소통하지 못하는 그들의 불 확실한 관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작가는 ‘친숙 한 주거 공간’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아파트의 폐쇄 구조 에 초점을 맞춰, 고립된 현대사회 인간상을 보여 주고 그 단 절된 틈 속에 존재하는 은밀한 욕망과 인간의 감각에 대한 연민을 그려 낸다. 2002년 김동현 연출로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으며 2004년 제12회 대산문학상 희곡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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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대왕>은

고조선을 배경으로 총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전래 무속 설 화인 ‘바리데기’ 설화를 바탕으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과 그리스 비극에서 모티프를 차용해, 남아 선호와 가 부장제, 분단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에비대왕은 일곱째 딸이 태어나자 그 딸을 버리고, 버림받은 바리데기는 황천강 뱃 사공 부부에게 길러진다. 이후 바리데기는 노부부를 공양하 기 위해 장성한 아들 일곱을 둔 팔도꾼에게 시집간다. 한편 에비대왕은 저승사자가 찾아오자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대 를 이을 아들을 얻을 때까지 죽음을 연기한다. 왕권을 차지 하려는 딸들의 싸움으로 국토는 분열되고 민심은 흉흉해지 며, 대왕은 자신에게 신탁이 지목한 대로 아들을 낳아 줄 여 자를 찾아낸다. 그녀가 과거 자신이 버렸던 바리데기였음이 밝혀지면서 에비대왕은 딸과 해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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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동서의 신화적 원형을 천착해 부권 이데올로 기에 대해 고민했고, 스케일이 큰 서사와 연극성으로 주목 받았다. 2002년 극단 인혁 제작, 이기도 연출로 문예회관 소극장 에서 초연했다. 그해 서울공연예술제 작품상과 희곡상, 연 기상, 미술상(의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부천 ‘극단 믈뫼’가 공연했고 2004년에 ‘한일 희곡 낭독 공연’을 통해 일본에 번 역·소개되었다. 이후 일본 극단 ‘RUP Official(연출 오카모토 준이치)’과 ‘신주쿠 양산박(연출 김수진)’이 각각 다른 버전으로 동경, 오사카에서 공연했는데 ‘신주쿠 양산박’은 루마니아, 서울, 거창, 브라질 등에서도 공연했다. 2010년에 ‘북경중앙희극학원’의 연극연출과 졸업 공연 (연출 박정희)으로 중국어판이 소개되었다. 이 책에 실린 것 은 초연 대본을 부분 수정한 2010년 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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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화차>는

11장으로 구성된 기억극 형식의 희곡이다. 동성애를 소재 로 현대인, 특히 마이너리티의 불안정함과 병적 애착을, 불 멸에 대해 집착했던 진시황의 욕망과 병치해 조명했다. 화교 출신인 주인공 상곤은 자신이 사랑했던 찬승을 살 해한 뒤 서안 진시황릉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과거를 회상 한다. 어머니의 불륜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던 상곤은 부 유하고 남성적인 매력이 있는 찬승에게 사로잡히고 집착하 지만, 냉혹한 기질의 찬승은 그를 이용하고 조롱할 뿐이다. 상곤은 성인이 된 뒤 다시 찬승을 만나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그를 살해하고 자신이 만들던 조각상 안에 찬승의 시체를 가둔 뒤 서안으로 향한다. <서안화차>는 인간의 집착과 소유욕을 섬세하게 표현 했고, 동성애를 비롯해 현대와 진시황릉을 가로지르는 이색 적인 소재와 스케일로 호평받았다. 특히 오랫동안 인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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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의 어두운 환부를 조명했던 연출가 한태숙이 직접 희곡을 쓰고 연출한 작품으로, 2003년 정미소 소극장에서 극단 물 리 제작으로 공연되었다.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 한국연극협회 선정 ‘올해의공연베스트7’과 한국연 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연극베스트3’ 등을 수상했고, 2005년 베세토연극제의 한국 측 참가작으로 공연되기도 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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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라 무덤아>는

2막 희곡이다. 사실주의와 상징주의를 교직한 작품으로 현 대사회의 물신화한 풍경 속에서 죽음을 성찰했다. 가난한 달동네를 배경으로 허리춤에 자신의 장례비 백만 원을 지니고 살아가던 독거노인 강옥자의 죽음을 다룬다. 1 막에서는 이웃들에게 음식과 정을 나눠 주며 살던 강옥자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고, 2막에서는 범인으로 지목된 이웃들이 노파의 죽음에 어떻게 연루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죽음의 세계로 떠난 노파는 죽기 전 꿈속에서 보았 던 탑 쌓는 소년을 만나 길가에 하얀 꽃으로 피어난다. 일상적 디테일을 제거하고 간결한 구성과 전형적인 캐릭 터, 또 잠언적인 대사를 통해 삶과 죽음을 성찰했다는 평가 다. 2003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극단 청우 제작, 김광보 연 출로 공연했다. 초연 당시 ‘올해의예술상’ 연극 부문 우수상 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 재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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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초등학교 동창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중년 남성들의 1박 2일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사실주의 작품은 통일된 주 제 의식을 나타내기 위해 플롯을 질서 있게 짜지만, 이 작품 은 장마다 느슨하게 이어지는 두서없는 대화를 통해 일상을 산만하고 즉흥적으로 묘사한다. 양훈, 대철, 태우, 만식, 상수는 모두 후산리에서 어린 시 절을 함께 보낸 동창으로, 친구 경주가 간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가기 위해 모인다. 서울역−기차 안 −장례식장−화장터−관광버스 안−터미널로 이어지는 공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들의 치열 한 삶과 함께 죽음이 문득문득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경주 의 화장 장면을 목격한 뒤 죽음은 그들에게 좀 더 가깝고 현 실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태우, 만식, 양훈, 상수는 서울로 올라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일상의 수면 위로 떠오른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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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에 괴로워하며 광란의 놀이판을 벌이기도 한다. 이렇게 그들은 비일상적인 사건 체험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허무를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면서 죽음이라는 경험을 반복되는 일상으로 포섭한다. 삶 과 죽음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음을 보여 주는 지점이다. 실 종되어 죽은 줄 알았던 동창 기택의 등장은 삶과 죽음의 묘 한 맞물림을 더욱 부각한다. 이처럼 <여행>은 우리에게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2005년 이성열 연출로 공연되어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 정 ‘올해의연극베스트3’에 이름을 올렸고, 이듬해 제27회 서 울연극제 공식 참가작으로 재공연되어 우수상, 희곡상, 연 기상, 무대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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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1990년대 학번들의 대학 시절을 둘러싼 자전적 이야기다. 사회과학 서점 ‘오늘의 책’에서 만난 주인공들이 ‘민족해방 (National Liberation)’과 ‘민중민주(People Democracy)’, ‘국제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m)’ 진영으로 나눠 싸 웠던 시절을 회고하며 1990년대 학생운동권 후일담을 들려 준다. 실제로 서울 신촌에 있었던 사회과학 서점인 ‘오늘의 책’ 을 배경으로 극이 펼쳐진다. 교수와 불화 때문에 박사과정 을 포기한 뒤 냉소적인 소설가로 변모한 현식, 독립영화 감 독 재하, 일간지 문화부 기자 광석, 그리고 이들 모두가 사랑 했던 유정은 91학번 동기 사이다. 대학 선배 지원과 결혼했 던 유정은 지원이 죽은 뒤 사회과학 서점을 열기로 하고 개 업 전에 동기들을 부른다. 현식과 재하, 광석이 차례로 서점 에 모여 들고, 대학 시절 읽었던 책을 뒤적이며 과거를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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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만보(熱河日記 漫步)>는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그의 저서, 특히 <열하일기>에서 소재를 취한 우화적 작품이다. 모래 폭풍이 부는 ‘열하’라는 마을에서 말[言]을 하는 네발 달린 동물 미중(연암)의 시선 으로 인간 세상을 풍자했다. 호기심 때문에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연암 박지원 처럼, 미중 역시 코끝 가려움증이 원인이 되어 잠을 설치다 생각을 하고 말을 하게 된다. 시야를 가리는 모래 폭풍으로 줄을 잡아야만 길을 다닐 수 있는 ‘열하’ 마을 장로들은 짐승 이면서 짐승의 경계를 넘어선 미중의 말하기를 금지한다. 그러나 기이한 것을 채집하러 다니는 제국의 어사가 등장하 자 마을을 지키기 위해 다시 미중에게 말할 것을 요구한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미중이 들려주는 너른 세상에 대한 이 야기에 감화되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저마다 이해 관계 때문에 끝내 떠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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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970년대 이후 다시 부상한 알레고리 계열의 희곡이다. 인문학적 깊이와 사유를 갖춘 작품으로 주목받았 다. 2007년 손진책 연출, 극단 미추 제작으로 예술의전당 토 월극장에서 초연했다. 2007년 대산문학상 희곡상, 동아연 극상 대상과 희곡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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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철학의 기초 이론≫, ≪역사적 유물론≫, ≪정치경제학 원론≫ 등 당대 필독서들이 대거 등장하고, 기형도와 김소진, 브레히트, 김 귀정, 강경대 등 지금은 아득하게 잊힌 이름들이 주인공들 대화에서 다시 화제가 된다. “80년대 선배들 눈에 우리는 학 생운동 흉내 내는 어설픈 후배”였다는 자괴감과 “이제 고작 서른 넘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옛날 책들에 파묻 혀서, 옛날 생각이나 하고 살겠다는 거냐”는 냉소가 겹치면 서 ‘386 이후 세대’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들은 선배들에게 는 어설프게 학생운동 흉내 내는 것처럼, 후배들에겐 낡은 정신에 매달려 폭력이나 일삼는 것처럼 비쳐진 중간 세대였 다. 연극은 이들 세대가 겪어야 했던 갈등과 그로 인한 상처 를 섬세하게 조명했다. 2006년 김재엽이 연출을 맡아 극단 드림플레이가 혜화 동일번지에서 초연했다. 당시 4700여 권의 인문사회과학 서적으로 빼곡한 헌책방 ‘오늘의 책’을 무대에 재현해 화제 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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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형사 홍윤식>은

소화 8년(1933년) 봄, 경성 죽첨정(현재 충정로) 금화장 고 갯길에서 갓난아기의 잘린 머리가 발견된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연극이다. 2부 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봉관이 쓴 ≪경성기담≫에 실린 “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 에서 소 재를 취했다. 극은 마리아가 사건 당시를 회상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 한다. 금화장 고갯길에서 어린아이의 잘린 머리가 발견되자 장안이 발칵 뒤집힌다. 경찰부장은 과학 수사를 통해 사건 을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내리고, ‘사건 발생 열 시간 이내, 피해자는 만 1세 내외 남아’라는 법의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수사를 지시한다. 이에 서대문경찰서 사법계의 이노우에 주 임 이하 노마, 홍윤식, 임정구 등 형사들이 수사에 착수한다. 일본에서 막 부임해 온 조선의 셜록 홈즈(극 중 샤아록 호움 즈) 홍윤식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통해 사건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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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단서를 찾아간다. 반면 임정구는 심문을 통해 용의자 자 백을 받아내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수사가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의 머리통을 쌌던 ‘하트롱’ 봉투를 단서로 수사를 진행하던 홍윤식이 피해자 가족일지도 모를 한창우, 한영이 남매를 찾는다. 그러자 이노우에 주임은 한 창우의 죽은 딸 기옥이의 무덤을 파헤치도록 지시한다. 우 여곡절 끝에 찾아낸 기옥이의 무덤에서는 머리통이 잘려 나 간 채 몸뚱아리만 남은 아기 시체가 발견된다. 기옥이의 고 모인 한영이가 간질병 앓는 손주를 위해 어린아이 뇌수를 구하고 있던 어느 부잣집 영감에게 기옥이의 머리통을 팔아 넘긴 것이다. 이로써 사건은 급히 종결되지만, 홍윤식은 처 음 발견한 아이의 머리가 기옥이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미 심쩍어한다. 사건 종결 이후 이노우에는 공을 인정받아 내 지로 발령받고, 임정구는 만주로 떠난다. 홍윤식 역시 홀연 경찰서를 떠난다. <조선 형사 홍윤식>은 서대문경찰서 수사반원 4인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추리극으로 1930년대 경성을 무대에 재현하며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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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 혈액형 등 당시 막 도입된 ‘첨단 과학 수사’ 방식이 흥미를 유발한다. 2007년 4월에 김재엽 연출, 극단 드림플레이 제작으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초연했다. 관객 호응에 힘입 어 7월부터 9월까지 문화공간 이다 2관에서 재공연했다. 2010년 7월 부산문화회관 소극장에서 부산시립극단 제38 회 정기공연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는 작가가 직접 연출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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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향>은

전쟁 중 월북했다가 56년 만에 귀향한 주인공 강수를 통해 좌우 이념 갈등과 분단으로 인한 상처, 화해를 그려 낸 작품 이다. 프롤로그를 포함해 11장으로 구성했다. 좌익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강수는 56년 만에 딸 영순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온다. 형 강득과 누이 수원이 강수를 반 기지만 아들을 기다리던 노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에 지쳐 아내 애숙은 정신을 놓아 버렸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빨갱이 자식’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야 했던 영범은 강수와 이복 누이 영순을 반기 지 않는다. 강수와 죽마고우였지만 그에게 아버지를 잃고 복수할 날만 기다려 온 택성은 낫을 들고 강수를 찾는다.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각 인물에게 한과 응어리가 맺히게 된 이유를 제시하는 동시에 청년 시절과 노인이 된 현재 모습을 대비해 56년이라는 시각적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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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 준다. 또한 강수가 어머니 무릎을 베고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드는 장면, 강수와 택성이 씨름을 하며 느린 동작 으로 무대를 가로지르는 장면과 함께 정지 동작과 움직이는 인물의 대비를 통해 과거 기억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서정 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침향>은 뚜렷한 극적 갈등 대신 짧은 재회 동안 인물 들 각자가 겪는 심경 변화와 한이 풀리는 과정에 초점을 맞 추고 있다. 죽은 뒤에도 귀신이 되어 장독대에서 아들을 기 다리던 노모는 무덤에서 아들의 절을 받는 것으로, 애숙은 신혼 시절 추억이 깃든 장소인 생강굴에서 강수가 떠날 때 맡겼던 비밀문서를 그에게 쥐여 주는 것으로 기다림의 한을 풀어낸다. 강수는 56년 만에 겨우 택성에게 미안하다는 말 을 전하고, 이 장면에서 과거 택성이 일부러 풍물을 크게 울 려 강수에게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다. 둘은 함께 씨름하던 것을 추억하며 오래된 원한을 씻는 다. ‘침향제’는 천 년 동안 묻어 놓은 나무가 내는 향으로 묵 은 한을 씻는 의식이다. 이념 대립과 분단이 가져온 갈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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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를 풀고 화해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2007년 차범석희곡상 1회 수상작으로, 2008년 6월 11∼ 29일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심재찬 연출로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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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海霧)>는

프롤로그와 총 16장으로 구성되었다. ‘전진호’라는 배를 공 간 삼아 조선족 밀항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천승세 작 <만 선>의 계보를 잇는 해양 사실주의 희곡이다. ‘전진호’ 선장 강성진은 공미리(학꽁치) 잡이가 시원치 않자 큰돈을 받기로 하고 조선족 밀항을 돕는데, 해경과 태 풍을 피하려던 과정에서 어창에 숨어 있던 조선족이 모두 질식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선장과 선원들은 공포와 절망감 속에서 시신을 수장하려 한다. 곧 시신이 물 위로 떠오르자 상어를 유인해 이를 처리할 생각 으로 시신을 훼손하는 일도 감행한다. 극한 환경에 처한 인 간의 절박함과 광기가 보인다. 이 작품은 플롯과 인물 구축, 뱃사람들의 말투와 사투리 구사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극작술을 보여 주며, 2000년대 에 보기 드문 사실주의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2007년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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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연출, 연우무대 제작으로 연우소극장에서 초연했고 이후 수차례 재공연했다. 초연 당시 ‘한국연극베스트 7’에 선정되 었고, 2009년 창작팩토리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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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지놀이>는

전통 연희인 <꼭두각시놀음>(일명 <홍동지놀음>)과 김광림의 <홍동지는 살어 있다>(1992)를 토대로 창작한 작품으로 12거리로 구성되었다. <꼭두각시놀음>이 지닌 인형극의 특성과 축제적이고 제의적인 특성, 기득권층을 풍자하는 시선을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연극으로 되살렸다. ‘절 짓는 거리’로 시작해 ‘절 허무는 거리’로 끝나는데, <꼭두각시놀음>에서 절을 짓는 것이 축원의 의미를 지닌 다면, 김광림의 <홍동지놀이>에서는 연극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해 극의 구조에 안정감을 준다. 이 작품은 <꼭두각 시놀음>에 등장하는 팔도강산 유람 거리, 이시미 거리, 매 사냥 거리, 꼭두각시 거리, 영노 거리, 상여 거리 등의 장면 을 차용하면서 <꼭두각시놀음>에 등장하는 파계승 대신 어리석고 유아적인 왕과 왕비, 유약하고 지식이 없는 박사 를 등장시켜 기득권층과 지식인의 무능함을 풍자했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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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첨지의 축첩과 처첩 간 갈등, 꼭두각시의 죽음 등을 통해 여성의 고통과 좌절을 드러내면서 가부장적인 사회를 비판 하고, 굿이라는 형식을 통해 꼭두각시의 고통을 위로한다. 한편 <꼭두각시놀음>이 인형극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반면 <홍동지놀이>는 배우가 연기하는 방식과 인형극을 혼합함으로써 인형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박첨지와 홍동지, 왕 등은 장면에 따라 배우가 연기하기도 하고 인형극으로 꾸며지기도 하는데, 이때 배우는 인형의 움직임을, 인형은 배우의 움직임을 모방하도록 해 새로운 양식을 실험했다. 무대와 객석이 연결되고 연극적 약속에 따라 공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전통 연희 방식, 해학적 인 표현과 말장난이 주는 웃음, 노래와 춤의 난장 또한 이 작 품의 축제성과 놀이성을 강화하는 요소다. 2007년 6월 김광림 연출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중극장에 서 초연했으며, 같은 해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세계국 립극장페스티벌 참가작으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 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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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꿈>은

여성주의 관점에서 역사 속 인물들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작가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보희, 문희 자매의 매몽(賣 夢) 설화를 남성 중심의 관습적 서사에서 벗어나 새롭게 재

창조했다. 매몽 설화는 흔히 알려져 있기로, 가야 후손인 김 유신이 삼국 통일의 대업을 꿈꾸는 김춘추에게 여동생 문희 를 접근시켜 장차 신라 왕이 될 문무왕을 낳게 했다는 내용 이다. 김유신이 대표하는 남성 인물들의 정치적 욕망이 전 면에 등장하는 반면 여성 인물들은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수 동적인 존재에 그친다. 하지만 <꿈속의 꿈>은 여성인 보 희와 문희가 주요 인물이다. 문희의 언니이자 유신의 동생 인 보희는 남성 인물에게 순종적인 인물이 아니라 능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춘추와의 사랑 앞에서도 당당한 여성이 다. 그녀는 정치적 욕망에 찬 유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 의 꿈은 자신이 꾸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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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작가는 남성주의적 거대 담론을 걷어 내고 그 안 에 가려져 있던, 여성의 비극적 운명과 고통을 극화함으로 써 새로운 여성적 서사 세계를 성취했다. 2008년 극단 작은신화가 신동인 연출로 초연해 그해 서 울연극제 대상, 희곡상, 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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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유서(原典由書)>는

3막 희곡이다. 2008년 초연 당시 공연 시간만 4시간에 달했 을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다. 쓰레기 매립지에서 주소도 없 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제도 밖으로 방기된 삶의 논리 와 그 신화적 초극을 꿈꾼 작품이다. 작품의 중심은 남편에게 귀신이 들린 뒤 쓰레기 산을 지 배하는 우출에게 학대받는 어진네 가족이다. 이외에도 버림 받은 치매 노인들, 지식인 남전, 입심 좋은 점방네 등 다양한 군상이 그려진다. 쓰레기 산에 묻힌 전자 부품에서 금이 추 출되고 국가로부터 토지 권리를 승인받게 되면서 이 달동네 엔 폭력과 약탈이 들끓는다. 어진네 두 아이는 결국 우출에 게 매 맞아 죽지만 어진네는 폭력적인 상황을 묵묵히 견딘 다. 그 묵묵함에 압도된 우출은 집을 나가고, 죽은 아이들은 나무로 환생하며 남편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원전유서>는 가벼움과 미시적 일상성이 주조를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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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2000년대 한국 연극계에 신화적 스케일, 장광설과 시 적인 대사로 연극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 다. 2008년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에서 이윤택 연출, 연희 단거리패 제작으로 초연했고, 2009년 재공연되었다. 2008 년 동아연극상 대상 및 희곡상,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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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놀라지 마라>는

평범해 보이는 한 가정의 해체를 무덤덤하면서도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려 냄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관계와 소통 부재, 고독을 성찰하도록 유도한 작품이다. 그로테스크한 장면들 이 불편함을 자아내면서도 곧 무너질 것 같은 한 가정에 연 민이 느껴지도록 했다. 등장인물들은 아버지, 아들, 며느리, 형 등 어느 가정에 서나 흔히 쓰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른다. 평범하게 살아가 는 듯 보이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나 서로를 대하는 방식 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아버지는 면도를 하다 갑작스레 아 들에게 자살을 예고하고, 아들은 이 말을 듣고도 태연하다.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며느리는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 아오며, 시아버지 앞에서 실언을 하고도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다.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매달린 채로 간간 히 자신을 살려 달라 말하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만성 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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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시달리는 둘째 아들은 용변을 보기 위해 변기에 쪼그리 고 앉아 인상을 구기는 것이 일상의 전부이며, 혼자서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집에 들른 형은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는 데는 별 관심 이 없다. 아내와 함께 있던 남자에게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 줘서 고맙다고 말하기도 한다. 방과 화장실, 거실로 나뉜 보통 가정집처럼 사실적인 무 대는 가족들의 대화를 더욱 거슬리게 만든다. 근친상간, 불 륜, 시체 전시와 같은 비일상적 상황이 일상 공간에서 벌어 지는데도 인물들은 이를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인다. 만성 변 비에 시달리는 둘째가 끊임없이 집안에 퍼진 악취에 대해 호소하며 극 전체에 깔린 불편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 낸다. 환풍기가 고장 난 화장실 냄새, 그 안에 묶여 있는 아 버지의 시체가 썩어 들어가는 냄새, 늘 만취상태인 며느리 에게서 나는 술 냄새 등 극적 공간은 환기되지 않는 악취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인물들은 그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간신히 삶을 이어 간다. <너무 놀라지 마라>는 끔찍하고 놀라운 상황을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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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지 않게 받아들이라는 제목처럼 냉소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현실에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인물들은 어렸 을 때 기억이나 SF영화 같은 환상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 다. 곳곳에 희비극적 요소를 배치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 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 준다. 2009년 산울림 소극장에서 박근형 연출로 초연했다. 2009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과 여자연기상을, 제4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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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극>은

14장으로 구성되었다. 작품 한 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현 실과 허구를 중첩하는 극중극 형식을 통해 표현한 메타픽션 특성을 가진 작품이다. 작품은 작가 도연과 술집에 나가는 그의 아내 장미로 출 발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인물은 한 연출가가 쓰고 있 는 작품 속 인물로 밝혀진다. 연출가에게 빚을 받으러 온 사 채업자 학수는 받을 돈을 작품에 투자하는 형식으로 창작에 개입한다. 이런 과정에서 사채업자 학수는 자신과 닮은 등 장인물을 만들어 내고 점차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허 구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는데, 이 모든 과정 역시 또 다른 작가가 창조한 작품 속 허구일 뿐이다. 이 극은 분열에 처한 현대인의 혼란을 보여 주며 동시에 허구와 현실의 상관관계를 구조화한 지적인 작품이다. 2010 년 대학로예술극장소극장에서 이성열 연출, 극단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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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으로 초연했고 2012년에 재공연했다. 창작팩토리최우 수작품상과 대산문학상희곡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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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6: 삼양동 국화 옆에서>는

‘햄릿 연작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으로 작가가 1990년 <햄 릿 5>를 발표한 이후 22년 만에 발표했다. 배경은 서울 삼양동 오래된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카페 ‘국화 옆에서’다. 이곳에 머무는 햄릿은 공장에서 해고된 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다. 애인 오필녀(오필리어) 와 함께 연출가(호레이쇼) 지휘 아래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기관 하수인이 햄릿을 감시하기 위해 카페를 불 시에 방문하면서 그의 불안 증세가 심해지기 시작한다. 급 기야 꿈에 아버지의 유령과 망령들이 나타나 수시로 그를 괴롭힌다. 이들은 동학 혁명 한가운데서 죽어 간 병장, 성폭 행으로 죽은 여자, 용산 참사 희생자, 광주민주화항쟁의 화 마 속에 죽어 간 넋들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 속 망령들이다. 망령은 자신들에 대한 햄릿의 무관심을 질책하지만 햄릿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정작 그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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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현실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다. 햄릿은 유령처럼 혼돈의 역사를 고통스럽게 떠돌 수밖에 없다. 기국서는 ‘햄릿 연작 시리즈’로 원전을 해체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 히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문제들과 여전히 고통스러운 오늘 날 정치 현실을 원전에 대입함으로써 과감한 실험 정신과 치열한 정치의식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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