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작품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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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도


바비도는 一四一○年 異端으로 指目되어 焚刑109) 을 받은 裁縫 職工이다. 當時의 王은 헨리 四世. 太子는 헨리, 後日

의 헨리 五世다.

일찌기 위대하던 것들은 이제 부패하였다. 사제는 토끼 사냥에 바쁘고 사교는 회개와 순례를 팔아 별장을 샀다. 살찐 수도사에게 외면하고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를 몰 래 읽는 백성들은 성서의 진리를 성직자의 독점에서 뺏고 독 단과 위선의 껍대기를 벳기니 교회의 종소리는 헛되이 울리 고 김빠진 찬송가는 몬지 낀 공기의 진동에 불과하였다. 불 신과 냉소의 집중 공격으로 송두리 채 뒤흔들리는 교회를 지 킬 유일한 방패는 이단분형령(異端焚刑令)과 스미스피일 드110)의 사형장뿐이었다. 영역 복음서 비밀 독회에서 돌아온 재봉 직공(裁縫職工) ‘바비도는 ’ 일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희미 한 등불은 연실 깜박인다. 가끔 무서운 소름이 온 몸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하면 할수록 못된 세상에 태여난 것만 같다. 순회재판소(巡廻裁判所)는 교구(敎區)마다 돌아다니면서

109) 焚刑(분형): 사람을 불살라 죽이는 형벌. 110) 스미스피일드: 스미스필드(Smithfield). 영국 런던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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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차례로 이단을 숙청하고 있다. 내일은 이 교구가 걸려들 판이다. 성경만이 진리요, 그 밖의 모든 것은 성직자들의 허 구(虛構)라고 열변을 토하던 경애하는 지도자들도 대개 재 판정에서는 영역을 읽는 것이 잘못이요, 성찬의 빵과 포도주 는 틀림없이 크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시인하고 전비(前 非)111)를 눈물로써 회개하였다. 자기와 나란히 앉아 같은 지

도자의 혁신적 성서 강의를 듣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것 을 목숨으로써 지키기를 맹세하던 같은 재봉 직공이나 가죽 직공들도 모두 맹세를 깨뜨리고 회개함으로서 목숨을 구하 였다. 온 영국을 휩쓸고 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구차한 생 명들이 풀잎같이 떨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권력 보지에 양심과 양식이 마비되어 이 폭풍에 장단을 맞추고 힘없는 백 성들은 생명의 보전이라는 동물의 본능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 어저께까지 옳았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리 보아도 틀 림없이 옳던 것이 하루아침에 정반대인 극악(極惡)으로 변 하는 법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비위에 맞으면 옳고 비위에 거슬리면 긇단 말이냐? 가난한 자 괴로워하는 자를 구하는 것이 크리스도의 본의 일진대, 선천적으로 결정된 운명의 밧줄에 묶여서, 래틴말을

111) 전비: 이전에 저지른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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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한 그들이 쉬운 자기 말로 복음의 혜택을 받는 것 이 어째서 사형을 받아야만 하는 극악무도한 짓이란 말이냐?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크리스도의 분신이니 신성하다지마 는 아무리 보아도 빵이요 먹어도 빵이다. 포도주 역시 다를 것이 없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거짓이 아니고야 어찌 인정할 도리가 있을 것이냐? 무슨 까닭에 벽을 문이라고 내미는 것 이냐? 절대적으로 보면 같은 수평선상에 서 있는 사람이 제 멋대로 꾸며낸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이냐? 바비도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위로 로오마 교황부터 아래는 사제에 이르기까지 거창한 조직체가 자기를 억누르고 목을 졸라매 는 위압을 느꼈다. 전체 로오마 교회와 일개 재봉직공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대조였다. 선택의 자유는 있을 수 없었 다. 죽음이냐 굴복이냐 두 갈래 길밖에는 없다. 죽음… 소름 이 끼친다. 등불에 비친 손을 어루만지고 다시 손으로 얼굴 을 만져보았다. 이 손, 이 얼굴이 타서 재가 되어버린다! 이 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 자체가 없어진다! 아무 것도 없이, 생 각이라는 것도 없어진다! 그는 공포에 떨었다. 그래도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의 똑바른 마음을 속이지 않 을 권리가 이 천하의 어느 한 구석에 있을 것만 같았다. 163 바비도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현실에서는 망상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도 흑백을 똑바로 말해야 하느냐? 그럼으로 서 재가 되고 영원한 시간의 흐름의 이 일점(一點)에 단 한 번 존재하는 이 주체가 없어져야만 하느냐?’ 전신의 힘이 일시에 풀렸다. ‘나같이 천한 놈이 양심을 안 속였다고 별 수 있을 것도 아 닌데… 되는대로 대답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상책이 아 닐가?’ 이렇게 변명하면 할수록 마음속은 더욱더 께름직하고 가 슴이 답답하였다. 맥이 풀린 손에서는 일감이 저절로 떨어 졌다. 일이 손에 붙지 않아서 그냥 자리에 들어누었다. 얼빠진 사람같이 등불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형의 선풍이 전국을 휩 쓸자 거짓 회개와 거짓 눈물을 방패로 앙달방달 이것을 막아 내는 짓밟힌 백성들의 눈물겨운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하루 살이가 등불에 튀어들어 씩 하고 죽는다. ‘불행의 시초는 도대체 인간 세상에 태여났다는 사실에 있다. 누가 이 세상에 나고 싶다고 했더냐? 이놈은 이 소리 하고 저놈은 저 소리 하다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도끼질 할 권리는 어디서 얻었단 말이냐? 너희들은 자기가 옳다는 것, 아니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을 창을 들고 남에게 강요할 권리가 있고, 나는 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 자신만 164


행할 권리, 가슴에 간직할 권리조차 없단 말이냐?’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다. ‘힘이다! 너희들이 가진 것도 힘이요, 내게 없는 것도 힘 이다. 옳고 글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고 약한 것이 문제다. 힘은 진리를 창조하고 변경하고 이것을 자기 집 문지기 개로 이용한다. 힘이여 저주를 받아라!’ 바비도는 가래침을 뱉았다. 흉칙한 힘의 낯짝에 검푸른 가래침을 뱉아 짓밟힌 자의 불붙는 증오심을 내뿜고 싶었다. 자리에서 핑 돌아 누었다. 가물거리는 등불과 더불어 그림자가 깜박인다. 주먹으로 힘껏 벽을 두드렸다. 쿵 소리와 함께 약간 울리고는 도루 잠 잠해진다. 벽에다 또 가래침을 뱉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정 의 자체인 양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힘이란 불의의 주 구였다. ‘가래침아 너는 영원히 남아서 바비도의 모멸을 기념하여 라!’ 쳐다보니 일전에 주문을 받아 어저께 완성한 무에라고 허 는 귀족의 옷이 걸려 있다. 그 놈의 옷이 공연히 사람의 부 화112)를 돋군다. 번개같이 일어나서 잡아채었다. 힘껏 마룻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짓밟았다. 그래도 시언치 않다. 옷을

112) 부화: ‘부아의 ’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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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누고 오줌을 쌌다. 이번에는 구석에 있는 궤짝이 밉쌀스럽다. 발길로 젱겨 찼다. 문짝이 부서졌다. 잡아서 모로 쓸어뜨리고 두 발로 힘 껏 구르고 문질러서 쪼각쪼각 부셔버렸다. 사람이 꾸며낸 것 은 무엇이든지 눈에 불이 나듯 원수 같았다. 닥치는 대로 찢 고 물어뜯고 짓밟았다. 깜박이는 등불이 얄밉다. 문을 열어 제끼고 힘 자라는 대로 멀리 냇다던졌다. 숨을 허덕이면서 자리에 쓸어졌다. 사람 허울을 쓴 놈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단번에 모가지를 비틀어서 쑥 잡아 빼어버리고 싶었다. 큼직한 빗자루가 있으면 영국에 사는 놈 을 모조리 쓸어다가 테임즈 강에 처박고 침을 뱉아주고 싶었 다. 이러구 저러구 꾸미구 죽이구 뽐내구 눈물을 짜구 애걸 하구 손을 비비는 인간의 연극이여 저주를 받아라.

−뒷짐을 묶인 바비도는 종교재판정에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사교는 가슴에 십자를 그리고 엄숙하게 개정을 선언하였다. “네가 재봉직공 바비도냐?” “그렇습니다.” “밤이면 몰래 모여들어서 영역 복음서를 읽었다지?” “그렇습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글다고 생각하느냐?” 166


“옳다고도 글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옳으면 옳구 글으면 글지 그런 법이 어딧단 말이냐 똑바 루 말해−” “전에는 옳다구 생각했읍니다.” “그럼 그렇지, 지금은 글다구 생각한다는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사교는 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단 말이냐?” “다 흥미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흥미가 없어지다니 신성한 교회에 흥미가 없단 말이냐?” “교회뿐만 아니라 온 인간 세상 나 자신에 대해서까지 흥 미가 없어졌읍니다.” “오오 이 무슨 독신113)인고!” 사교는 눈을 감고 웨쳤다. “내가 이렇게 재판을 연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너를 구하 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서 회개 하고 바른대로 대답해라.” “그렇게 간절하걸랑 아무치도 않은 사람을 구한다고 수 다를 떨지 말고 내버려 두시죠.” 사교는 온 낯이 샛빨개지면서 북바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

113) 독신(瀆神): 신을 모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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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있었다. “아무치도 않다니?” “보시는 바와 같이 말짱한 사람을 미치괭이 취급을 해서 구하느니 마느니 들볶는 그 심뽀가 틀렸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능난한 사교는 성난 얼굴에서 곧 미소로 변하 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묻기루 하자, 무슨 마귀의 장난으로 영어 복음 서를 읽구 듣구 했지?” “마귀의 장난이라뇨? 천만에. 우리 말루 읽는 것이 왜 그 렇게까지 옳지 못하다는 말입니까?” “교회에서 금하니까 옳지 못허지.” “교회에서 하는 일은 무어든지 다 옳습니까?” “암 그렇구 말구 교회는 성 폐테로114)에 시작되고 폐테로 는 직접 크리스도의 위임을 맡으셨으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옳단 말씀이죠?” “그렇지. 교회의 명령은 교황의 명령이요 교황의 명령은 성 폐테로의 명령, 성 폐테로의 명령은 크리스토의 명령이시

114) 성 폐테로: 성 베드로(Petrus). 십이 사도의 한 사람. 그중의 일인자로서 시몬으로도 불리었으며, 예수의 승천 후 예루살렘 교회의 기초를 굳히고 복음 선교에 전력했으며, 나중에 로마에서 네로의 박해로 순교했다고 한다. 후대의 가톨릭교회는 베드로를 사도직(使徒職)의 대표자로 간주하고 로마 교황을 베 드로 이래 사도권의 계승자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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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사실 당신과 이러니저러니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마는 기왕 말이 났으니 한 가지 더 묻지요, 간통죄를 용서하고 대 신 돈 받는 것도 크리스토의 명령인가요?” “독신두 유분수지 그런 법이 어딧단 말이냐!” 사교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허어 저의 옆엣집 프랑시스코의 처가 당장 당신한테서 지난 봄에 그런 판결을 받지 않았읍니까?” 사교는 안색이 홱 변했다. “아ᐨㅁ, 더 고칠 수 없는 마귀에 걸려들었구나.” 사교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침착을 보 이려고 애썼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건 너와 교리를 다투자는 건 아니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으니 사실만 물어보기루 한다. 그래 네 소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게도 저렇게도 생각지 않습니다.” “회개한단 말이냐, 안 한단 말이냐?” “잘못이 없는데 무슨 회갭니까?” “으ᐨㅁ, 알았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빵은 빵, 포도주는 포도주죠.” “너는 그 신성함을 모르느냐?” “신성이라는 그 자체가 인간의 조작이죠. 하여튼 크리스 169 바비도


도가 이 자리에 계시다면 당신과 나는 자리를 바꿔야 할 것 입니다.” 나졸들이 달려들어 바비도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였으나 사교는 손짓으로 말린다. “바비도, 한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 없느냐?” 사교는 애걸하는 어조였다. “당신은 내게 강요하는 것을 모두 옳다구 확신하십니까?” “그렇다.” 사교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양심입니까?” 사교는 안색이 변하면서 입을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저으 면서 웨쳤다. “나는 조직, 교회라는 조직에 복종하는 사람이다. 내게는 교회의 명령이 있을 뿐이요 양심은 문제가 안 된다.” “사람을 위한 교횐가요, 교회를 위한 사람인가요?” “사람은 하느님의 교회에 모든 것을 바쳐야지. 교회 앞에 서는 죄 많은 사람은 보잘것없는 물건이야.” “그럼 사람은 교회의 도구에 불과하군요.” “도구라도 하느님의 도구니 얼마나 영광이냐?” 사교는 미소를 띠우면서 바비도를 내려다보았다. “…잘 알았읍니다.” “그럼 회개한단 말이지?”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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