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삼아연애하지마소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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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삼아 연애하지 마소 −3막 희극



나오는 사람들

남작 페르디캉: 그의 아들 블라쥐스 사부(師父): 페르디캉의 사부 브리댄느 사부: 주임 사제 카미유: 남작의 조카딸 플뤼슈 부인: 그녀의 가정교사 로제트: 카미유 유모의 딸 농부들, 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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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막



제1장 성관(城館) 저택 앞마당

(블라쥐스 사부, 플뤼슈 부인, 코러스)

코러스 새 양복 갈아입고, 필통 옆구리에 낀 블라쥐스 사부

님이 깡총거리는 노새 타고 가볍게 몸 들썩이며 수 레국화 화단으로 들어오시네. 베개 베고 누운 아기 처럼 불룩한 배를 흔들며, 두 눈 반쯤 감고 삼중 턱을 들썩이며 주기도문을 중얼거리시네. 어서 오세요, 블라쥐스 사부님, 포도 따는 시기에 유물 단지 나타 나듯 찾아오시는군요. 블라쥐스 자네들, 중대한 소식을 듣고 싶으면 어서 가서 시

원한 포도주 한잔 가져오게나. 코러스 여기 가장 큰 술잔에 가득 따라 왔어요. 어서 드세요,

블라쥐스 사부님, 술맛이 일품이죠. 말씀은 천천히 하세요. 블라쥐스 이보게, 우리 남작 나리의 외동아들, 페르디캉 도

련님이 파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오늘 이 성(城)에 당도할 예정이네. 말솜씨가 워낙 뛰어나고 훌륭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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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응답하기도 벅차지. 그분은 황금 서적처럼 고결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을 지녔고, 들에 핀 풀잎 하나만 보아도 라틴어 학명이 뭔지 척척 알려 준다 네. 게다가 언제 바람이 불고 비가 올지와 그 이유도 명확히 알려 준다네. 자네들은 그분이 형형색색 물 감을 들인 양피지 두루마리에서 잠자코 한 장을 꺼 내 마는 것을 보면, 저기 대문이 활짝 열리듯 두 눈을 번쩍 뜨고 말걸세.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나는 보석 이야. 자, 남작 나리에게 이 소식을 알리러 왔다네. 그 아드님이 네 살 때부터 내 가르침을 받았다는 건 나로서도 명예로운 일이지. 그러니 이보게, 가서 의 자를 가져오게. 잠시 노새에서 내려앉아야 살 것 같 겠네. 짐승 부리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야. 들어가기 전에 포도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여야 진정이 되겠네. 코러스 어서 마시세요, 블라쥐스 사부님, 숨을 돌리세요. 우

리도 페르디캉 도련님의 어린 시절을 지켜봤어요. 그분이 오시면 길게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순수한 마 음을 지닌 도련님을 다시 보게 되다니! 블라쥐스 이거 술잔이 비었군. 벌써 다 마셨어. 또 만나세.

남작 나리에게 들려드릴 문장 몇 구절을 준비해 왔 다네. 종을 울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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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쥐스 사부 퇴장한다.)

코러스 숨 가쁜 당나귀 타고 기우뚱대며 플뤼슈 부인이 언

덕을 넘어가네. 겁에 질린 마부가 채찍을 힘껏 휘두 를 때마다, 지친 짐승은 입가에 엉겅퀴 풀을 문 채 머 리를 뒤흔드네. 길쭉한 두 다리를 화들짝 제쳐 구르 면, 부인은 앙상한 두 손으로 묵주를 움켜쥐네. 안녕 하세요, 플뤼슈 부인, 바람으로 숲이 노랗게 물들어 가듯, 번개처럼 나타나시네요. 플뤼슈 부인 이보게, 물 한잔 주게, 식초 몇 방울 떨어트린 물

한잔 갖다 주게. 코러스 어디서 오시나요, 플뤼슈 부인? 머리에 쓰신 가발이

먼지투성이가 되었네요. 귀여운 앞머리 장식을 하 고, 원피스 치마는 양말 대님 위로 걷어 올리셨군요. 플뤼슈 부인 잘 들으시게. 남작 나리의 조카딸, 카미유 아가

씨가 오늘 이 성에 당도한다네. 어머니 유산을 물려 받을 때가 다 되어, 나리 분부를 듣고 수도원에서 나 와 이리 오고 계시네. 하느님 은덕에 수도원 교육도 잘 받은 우리 아가씨는 예지와 겸양의 꽃향기를 한 껏 풍긴다네. 하늘이 인도하고 계신 우리 사랑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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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수녀님은 한 마리 양처럼, 한 마리 비둘기처럼 그 무엇보다 순수하고 선량하다네. 자, 저리 좀 비켜서 게. 두 다리가 부어올랐군. 코러스 걱정 마세요, 플뤼슈 부인, 하느님께 비나 뿌려 달라

고 빌어 주세요. 들판에 호밀이 아주머니 정강이처 럼 빼빼 말랐어요. 플뤼슈 부인 음식 냄새가 밴 대접에 물을 담아 왔군. 그 손 좀

잡고 내려야겠소. 거칠고 상스러운 사람들 같으니.

(플뤼슈 퇴장한다.)

코러스 예복으로 갈아입자. 남작 나리의 분부를 기다리자.

오늘 즐거운 잔치가 열릴 거야.

(코러스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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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저택 거실

(남작, 브리댄느 신부, 블라쥐스 사부 등장한다.)

남작

브리댄느 신부, 친구인 자네에게 내 아들 교육을 맡 아 온 블라쥐스 사부를 소개하네. 내 아들은 어제 오 전 12시 8분을 기해 스물한 살이 되었지 게다가 네 과목 최고 등급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네. 블라쥐 스 사부, 당신에게 본당 사제, 브리댄느 신부를 소개 하오. 내 친구요.

블라쥐스 (인사하며) 최고 등급을 받은 네 과목은 문학, 철

학, 로마법, 교회법입니다. 남작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오, 블라쥐스 사부, 아들놈이 곧 도착할 거요. 옷을 갈아입고 좀 쉬시오. 종이 울 리면 그때 다시 봅시다. (블라쥐스 사부는 퇴장한 다.)

브리댄느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나리? 아드님 사부

라는 저 사람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는군요. 남작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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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댄느 분명합니다. 방금 전 나한테 큰 소리로 말하는데,

포도주 냄새가 나서 깜짝 놀랐어요. 남작

그만하게나, 그럴 리가 없다니까.

(플뤼슈 부인 등장한다.)

저런, 마음씨 고운 플뤼슈 부인 아니시오? 우리 조카 딸하고 같이 오셨소? 플뤼슈 부인 아가씨도 곧 오실 거예요, 나리. 제가 조금 일찍

도착했어요. 남작

내 친구 브리댄느 신부, 내 조카딸을 돌보고 있는 플 뤼슈 부인을 소개하네. 조카딸은 어젯밤 7시를 기해 열여덟 살이 되었다네. 그 아인 프랑스 최고의 수도 원에서 교육을 받았지. 플뤼슈 부인, 이 사람은 본당 사제, 브리댄느 신부올시다. 내 친구죠.

플뤼슈 부인 (인사하며) 프랑스 최고 수도원에다가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수도원의 제일가는 신자였답니다. 남작

자, 플뤼슈 부인, 어서 들어가서 흐트러진 옷매무새 를 고치시오. 조카딸은 곧 올 테니까, 저녁 만찬 자리 에서 다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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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뤼슈 부인 퇴장한다.)

브리댄느 저 부인은 아주 우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네요. 남작

우아하고 의젓하지. 브리댄느 신부, 덕성이 훌륭한 분이라네.

브리댄느 그런데 사부님한테서 술 냄새가 났어요. 틀림없어

요. 남작

브리댄느 신부! 가끔 자넨 이상한 소리를 한단 말이 야. 일부러 그러는 건가?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게. 내 아들과 우리 조카딸을 혼인시킬 예정이네. 천생 배필이 될 아이들이지. 두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6천 에퀴1)나 들었네.

브리댄느 결혼 허가서2)를 받아야겠네요. 남작

받아 놨지. 이 사람아, 내 서재 책상에 올려놨네. 오, 브리댄느, 이 기쁨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외롭게 지냈는지 자네도 알고 있지? 맡은 직분에 따라 엄숙한 의복을 입고 겨울과 여름 내내 이 성에 갇혀서 보냈지 뭔가. 이따금 하인에게

1) écu. 프랑스의 옛 금(은)화. 유로화 통합 이전 5프랑짜리 은화에 해당한다. 2) dispense. 당시 사촌간의 혼인은 교회법령으로 금지했으므로, 카미유와 페 르디캉의 결혼을 위해 허가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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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집에 들이지 말라고 호된 지시를 내리지 않 고서는 백성과 신하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없네. 나라 의 관리가 칩거해 있는 것은 아주 고되고 힘든 일이 야! 그런데 두 아이들이 모여 함께 있어 준다면, 국왕 폐하께서 나를 세리(稅吏)로 임명하신 뒤 사로잡혔 던 이 우울함을 가시게 해 줄 테니 얼마나 기쁜 일인 가! 브리댄느 결혼식을 여기서 올리실 겁니까? 아니면 파리에

서? 남작

바로 그걸세, 브리댄느, 그걸 물어볼 줄 알았어. 이보 게! 친구, 그 두 손으로 내 소중한 꿈들을 위해 견진성 사(堅振聖事)3)를 올려 축복해 줘야 할 게 아닌가?

브리댄느 남작님 은덕에 제가 할 말을 잊었사옵니다. 남작

창문 너머를 보게. 마을 사람들이 성문 입구로 모여 드는 게 보이지 않나? 두 아이들이 동시에 도착할 거 야. 더없이 즐거운 조화로다. 내가 모든 걸 예견하고 준비해 뒀지. 우리 조카딸은 왼쪽 문으로, 아들은 오 른쪽 문으로 입장할 걸세. 어떤가? 두 애들이 서로

3) confirmation. 기독교의 일곱 가지 성사의 하나. 영세한 신자에게 은총을 더 하기 위해 주교가 신자의 이마에 성유를 바르고 성신과 그 칠은(七恩)을 받 도록 하는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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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가 이야기 나누는 걸 보면 얼마나 기쁘 겠나! 6천 에퀴가 적은 돈은 아니지, 그렇고말고. 게 다가 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서로 끔찍이 좋아지 내던 사이였어. 브리댄느, 좋은 생각이 났네. 브리댄느 뭔데요? 남작

술잔도 비우고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은밀하게, 알겠나? 이 친구, 브리댄느, 자네 라틴어 할 줄 아나?

브리댄느 “이타 이데폴.”4) 알다뿐입니까! 남작

자네가 슬그머니 내 아들놈을 조카딸에게 데려가 말 을 붙이도록 하면 좋을 것 같아. 그때 슬쩍 라틴어를 쓰게. 꼭 식사 도중이 아니라도 괜찮네. 지루해질 수 도 있을 테니까. 난 하나도 못 알아들어. 후식 시간 도 좋고. 내 말 알겠나?

브리댄느 나리께서 하나도 못 알아들으시면 조카따님도 못

알아들을 텐데요. 남작

그러니까 더 좋다는 거야. 여자는 자기가 아는 것에 는 감탄하지 않지. 안 그런가? 자네 어디 다른 나라 에서 왔나? 이런 가엾은 사람을 보게!

4) ‘Ita edepol’은 ‘맹세코’, ‘정말’이란 뜻의 라틴어로, 플루타우스와 테렌티우 스 희극에서 남자 인물들이 주로 쓰는 라틴어 서약 문구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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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댄느 저는 여자들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감탄하기란 어려운 일이죠. 남작

내가 알아, 브리댄느. 매혹적이며 알쏭달쏭한 그 존 재들을 내가 알아. 여자들은 눈속임당하는 걸 좋아 하네. 누가 자기들을 쳐다보면, 눈을 더 크게 뜨고 좋 아한다네.

(페르디캉이 한쪽에서 등장하고 카미유는 다른 쪽에서 등 장한다.)

어서 오너라, 얘들아. 잘 있었느냐? 조카딸 카미유, 내 아들 페르디캉! 페르디캉 안녕하세요? 아버지, 사랑하는 내 누이동생! 이렇

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뻐요. 카미유 외삼촌, 사촌 오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페르디캉 몰라보게 자랐구나, 카미유! 눈부시게 아름다워

졌어. 남작

언제 파리를 떠났느냐, 페르디캉?

페르디캉 수요일인가 화요일에요. 이젠 숙녀가 다 되었구

나! 그럼 난 신사가 다 된 건가? 널 마지막으로 본 게 어제 같은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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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오느라 피곤하겠구나. 길이 멀고 날이 더워서.

페르디캉 오! 아니에요. 아버님, 카미유가 얼마나 예뻐졌는

지 좀 보세요! 남작

자, 카미유, 오라버니 볼에 입 맞춰 주렴.

카미유 죄송합니다. 남작

칭찬에는 포옹이 따르는 법. 페르디캉, 네가 입 맞춰 주렴.

페르디캉 내가 손을 내밀었는데 누이동생이 뒷걸음치면, 나

도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거야. 사랑은 입술을 훔쳐 갈 수 있어도 우정은 그렇지 않아. 카미유 우정도 사랑도 돌려줄 수 있는 것만 받아야죠. 남작

(브리댄느 신부에게) 이거 시작부터 불길한 전조로 군, 아닌가?

브리댄느 (남작에게) 너무 정숙하면 흠이 되죠. 결혼이 양심

의 가책을 일으키고 말아요. 남작

(브리댄느 신부에게) 큰일 났군. “죄송합니다”라니! 비위에 거슬리는 대답이야. 저 애가 성호를 그으면 서 짓는 표정 보았나? 이리 오게. 할 말이 있네.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격이지. 즐거운 순간을 완전히 망 쳐 버렸어. 화가 나네. 불쾌해. 제기랄! 이거 큰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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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댄느 가서 말 좀 건네세요. 두 사람이 등을 돌리고 있잖

아요. 남작

자! 얘들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거기서 뭘 하고 있니, 카미유, 타피스리 앞에서?

카미유 (벽에 걸린 타피스리 작품을 바라보며) 정말 아름다

운 초상화예요, 외삼촌. 종조모(從祖母)님이시죠? 남작

그래, 너한텐 증조할머니시다. 어쩌면 증조할머니의 언니일 게다. 이분은 내가 알기로 기도만 올리시고 자손을 잇지 않으셨어. 맞아, 성녀셨단다.

카미유 오! 그래요, 성녀셨어요! 이자벨 종조모님이세요. 예

복이 무척 잘 어울리시네요! 남작

페르디캉, 넌 거기 화병 앞에서 뭘 하고 있니?

페르디캉 여기 무척 아름다운 꽃이 있네요, 아버님. 해바라

기예요. 남작

날 놀리는 거냐? 파리처럼 퉁퉁하잖아.

페르디캉 파리처럼 퉁퉁하고 작은 꽃도 제값을 하죠. 브리댄느 그럼요! 박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드님에게 암

꽃술인지 수꽃술인지, 품종이 뭔지, 성분이 뭔지, 수 액(樹液)과 색채는 어디서 나오는지 물어보십시오. 뿌리부터 꽃망울까지 풀잎의 생태를 상세히 알게 되 면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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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캉 그렇게 자세히는 모릅니다, 신부님. 그냥 꽃향기

가 좋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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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성문 앞

(코러스가 등장한다.)

코러스 여러 가지로 재미있고 이상한 일이 다 있네. 이보게,

친구들, 어서 와서 호두나무 그늘에 앉게나. 지금 이 성에 대단한 식객 두 분이 와 계시네. 브리댄느 신부 와 블라쥐스 사부, 그분들이 누군지 아나? 둘 다 뚱 뚱하고 멍청한 데다 똑같이 교활하고, 탐욕스럽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인데, 어쩌다 만났으니 서로 치켜 주고 헐뜯고 해야지. 극과 극은 서로 끌리 는 이치에 따라, 마르고 커다란 사람은 작고 통통한 사람을 좋아하고 금발은 갈색머리를 찾는다더니, 사 부와 신부 사이에 암투가 벌어질 모양이네. 둘 다 아 주 뻔뻔스럽고 먹성이 뛰어나, 대식가요 미식가일 세. 식사를 하면서 서로 맛있는 걸 더 많이 먹으려고 다투더라니까. 생선이 작으니 어쩌면 좋은가? 잉어 혓바닥을 가를 수도 없고, 혀 둘 가진 잉어도 없으니 말일세. 게다가 둘 다 어찌 그리 말이 많은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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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 말은 듣지도 않고 떠들기만 한다네. 브리댄 느 신부가 페르디캉 도련님에게 어려운 질문을 하니 까, 사부는 미간을 찡그렸어.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자기 학생을 시험하는 게 못마땅해서지. 게다가 둘 다 무식하고 위세를 떨며, 하나는 자기 성직을 뽐내 고, 다른 하나는 교직을 내세우더군. 블라쥐스 사부 는 아들의 고백을 듣고, 브리댄느 신부는 아버지의 고해를 들어 주더군. 두 사람이 식탁에 팔꿈치를 올 려놓고, 두 뺨을 벌겋게 달구며, 두 눈을 치켜뜨고, 아귀다툼을 해 가며 삼중 턱을 흔드는 걸 봤어. 머리 부터 발끝까지 서로 훑어보며 가벼운 입씨름을 주고 받다가 곧장 설전이 터지지.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 놓으며 유식한 척하지. 게다가 더 가관인 것은 두 술 꾼 사이에 플뤼슈 부인이 끼어들어 양쪽 팔꿈치로 이쪽저쪽 밀어내는 거야. 이제 성문이 열리는 걸 보 니 만찬이 끝난 모양이군. 일행이 나오니 우린 비켜 서야지.

(코러스 퇴장한다.)

(남작과 플뤼슈 부인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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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경애하는 플뤼슈 부인, 걱정입니다.

플뤼슈 부인 정말이세요, 남작님? 남작

그렇소, 플뤼슈 부인. 오래전부터 수첩에 적어 가며 오늘이 내 인생 최고의 날이 될 거라고 기대해 왔어 요, 그럼요, 최고의 날. 아들과 조카딸을 결혼시키려 는 내 계획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다 정해진 일이었죠. 브리댄느 신부에게 부탁도 해 놨어요. 그런데 아이들 이 저렇게 냉랭하게 서로 말 한마디 안 하고 있으니.

플뤼슈 부인 저기 오는군요, 나리. 아이들도 나리의 계획을

알고 있나요? 남작

애들에게 따로 몇 마디 해 두었죠. 서로 가까이 다가 가는군요. 우린 저기 나무 그늘로 비켜 가 잠시 자리 를 비우는 게 좋겠소. (플뤼슈 부인과 자리에서 물러 선다.)

(카미유와 페르디캉 등장한다.)

페르디캉 카미유, 아까 내 포옹을 거절한 건 잘한 일이 아니

었어, 그렇지? 카미유 난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내 방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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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캉 우리 팔짱 끼고 마을 한 바퀴 산책이나 할까? 카미유 아뇨, 재미없어요. 페르디캉 마을 들판을 다시 보게 되어 기쁘지 않니? 옛날에

뱃놀이했던 거 기억나지? 이리 와, 저기 풍차 마을까 지 걸어 내려가자. 내가 노를 저을 테니 네가 키를 잡 아. 카미유 전혀 내키지 않아요. 페르디캉 무정한 소리만 하는구나. 뭐라고! 카미유, 기억나

지 않아? 즐겁고 순진한 장난기로 가득 찼던 우리의 어린 시절과 그리운 지난날들이 가슴에 울리지 않 아? 함께 걸었던 농장으로 난 오솔길을 보고 싶지 않 아? 카미유 아뇨, 오늘 저녁엔 가기 싫어요. 페르디캉 오늘 저녁엔 가기 싫다고! 그럼 언제 갈까? 우린 지

금 여기 있는데. 카미유 난 인형을 가지고 놀 만큼 어리지도 않고, 지난날을

그리워할 만큼 늙지도 않았어요. 페르디캉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카미유 어린 시절 추억은 내 관심사가 아니라고요. 페르디캉 따분하단 말이니? 카미유 네, 따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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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캉 가엾어라! 정말 안됐구나.

(각자 다른 방향으로 퇴장한다.)

남작

(플뤼슈 부인과 되돌아오며) 보셨죠, 들으셨죠, 플뤼 슈 부인. 가장 부드러운 조화를 기대했는데, 플룻이 <앙리 4세 만세>5)를 불어 대면 바이올린이 <내 가슴은 한숨짓네>6)를 연주하는, 그런 음악회에 온 느낌이오. 이런 조합으로 일어날 끔찍한 불협화음을 상상해 보시오. 내 마음을 스쳐 가는 생각이 그렇소.

플뤼슈 부인 솔직히 말씀드리면, 카미유 탓만은 아니라고 생

각해요. 제가 보기엔, 뱃놀이보다 더 불량한 어감은 없었으니까요. 남작

자세히 말해 보시오.

플뤼슈 부인 나리, 온전한 처녀라면 물놀이처럼 위험천만한

짓은 하지 않죠. 남작

하지만 플뤼슈 뷰인, 그 애들은 사촌지간으로, 결혼

5) 샤를 콜레의 희극, <앙리 4세의 샤냥 놀이>에 나오는 권주가로 왕정복고 (1814∼1830) 시기에 왕당파의 찬가로 부르기도 했다. 6)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1786) 2막 3장에서 케루비노가 부 르는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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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사이잖소, 그래서…. 플뤼슈 부인 그렇더라도 지켜야 할 예법이 있는 건데, 남자

와 단둘이 물가로 나서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신이 죠. 남작

그러니까…. 내 말은….

플뤼슈 부인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남작

정신이 나간 거요? 솔직히 말해서…. 거슬리는…. 괘씸한…. 표현들이잖소…. 할 수 없지…. 솔직히 털어놓자면…. 부인은 맹추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렇소.

(남작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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