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밭에서의 죽음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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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에서의 죽음



요사이 타이베이는 늘 비가 내린다. 창틀에 앉아 침대 밑에 우겨 둔 잡동사니를 뒤적이던 나는 2년 전에 쓴 낡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앞면에 쥐가 갉아먹은 흔적이 있는 노트 를 이리저리 뒤적여 보자니 여기저기 쥐똥이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역한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훅 하고 끼치는 냄새 에 나는 노트 뒤적이던 동작을 멈추고, 빗물이 말갛게 씻어 낸 유리창에 코를 갖다 댔다. 창밖에는 며칠째 는개가 피어 올라 겹겹이 아파트의 평평한 꼭대기 라인이 뿌옇게 보인 다. 형태를 드러낸 거라곤 TV 안테나가 얽혀 만들어 낸 십 자가뿐, 안테나는 잿빛 시멘트 건물에 들쭉날쭉 얽혀 버려 진 묘지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낸다…. 유쾌하지 못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머릿속에 뚜렷한 이미지를 이루기 전에 나는 급히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집 안은 혼자 사 는 남자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퀴퀴한 찌든 내가 그득하다… 순간, 잔디 깔린 남향 양옥집과 그 안의 여주인과 함께 살던 날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 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의 고 리인가!) 그렇게 결혼과 사업 실패로 인한 자책감이 또 한 번 악몽처럼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2년 전에 썼던 노트를 다시 뒤적이자 무성한 옥 수수밭이 눈앞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 던 선택의 순간, 그 순간의 기분이 또렷이 되살아났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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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요즘 내 생활을 이룬 일들은 몽땅 내 시야에서 사라지 고, 그해 여름에 발생했던 일들만이 (중요한 일들은 더욱) 어제 일처럼 또렷해졌다. 그해 여름, 워싱턴의 날씨는 예년에 비해 훨씬 무더워서 기온이 벌써 한두 주째 화씨 100도(섭씨 38도)를 웃돌고 있 었다. 당시 나는 모 일간지의 워싱턴 주재 특파원으로서 신 문 1면에 며칠 걸러 한 번씩 (‘특파원’ ○○○ 보도)라는 형 태로 내 이름의 기사를 실었다. ‘특파원’이라는 쟁쟁한 직함 만 두고 보면 왠지 그럴싸하게 지냈을 것 같지 않은가? 오지 랖 넓은 내 친구 하나는 특파원이란 말에 당장 ‘007’이니 ‘첩 보원’ 같은 단어가 떠올랐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각만 큼 신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무렵의 나는 주재원 삶에 상당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당시 국내 정세 가 어수선했던 탓에 나를 포함한 기자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유력자들의 눈치까 지 살펴야 했다. (예를 들어 우방의 새 권력자가 초고속으로 출세한 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기자의 인터뷰를 거절하 는 것이다. 내 직업에 대해 이보다 더한 모욕이 있겠는가!) 물론, 잡다한 인사들을 응대하는 것이 그보다 힘들기는 했 다. 그 무렵에는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관광차 온갖 어중이 떠중이들이 몰려들었고, 관광을 마친 후에는 하나같이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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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퉁이에라도 기사를 내서 젠체하려 들었다. 따라서 어떻게 안성맞춤의 기삿거리를 찾아내는가 하는 것 역시 당시 누구 에게 미룰 수도 없는 내 직무였다. 그렇게 오가는 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날들이 이어지 자 정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한두 해 동안 몇 번이고 국내 전근을 요청했지만, 결국 메이윈(美雲)의 결사 반대로 단념해 버렸다. (내 아내에게는 미국에서 보내는 삶 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다!) 여기 틀어박혀 하는 일이라야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어서 최근 수년 새 나는 나도 모르게 나태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내 이 천부적인 언어 구사력과 요 몇 년간 이 손바닥만 한 영역에 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점차 본사로부터 신임을 쌓아 가 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 종사자라는 신분을 가진 자로서 나 는, 뭐랄까 뭔가 독특한 방식으로 타락해 가고 있음을 스스 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내게는 일간지에 실린 부고란을 꼼꼼히 읽는 습관이 생겼다. 매일 윤전기를 갓 지나 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신문을 손에 들고서 한 글자 한 글자 헤드라인을 읽으며 텔렉스로 타이완에 송신할 기사를 뽑아내고 나면 남 는 게 시간이었다. 그럴 때면 사무실 한쪽 구석, 내 나름의 지정석에 쭈그리고 앉아 신문지상의 부고를 빠짐없이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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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갔다. 이런 요상한 습관이 생긴 까닭은 뭐라 말로 설명하기 어 려울 만큼 복잡하다. 우선은 이태 전 처남의 갑작스러운 죽 음에 돌연 인생무상을 느낀 탓일 것이며, 또 다른 이유로는 오랜 세월 건설되고 철거되는 건물을 물리도록 바라보며 도 대체 그 무엇이 진정한 평등을 가져올 수 있을까에 대해 생 각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전에 날고 기던 사람도 이 마지막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는 내심 묘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천시샨(陳溪山)이라는 이름이 부고란의 한쪽 귀퉁 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셋집 광고처럼 간단한 몇 줄이 내 용의 전부였다. 그의 생몰 연월일(마흔이 채 안 된 젊은 나 이였다)과 직장(주택도시개발부) 및 유가족으로는 아내와 딸 하나. 미망인의 이름은 챠오치(喬琪)였는데, 당시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무심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 후 나는 왜 이 화인(華人)의 부고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분량 많은 스포츠면을 다 읽은 후 왜 또 시선을 이 부고란 한쪽 구석으로 옮겨 오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당 시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지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무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었고, 현지 뉴스 담당인 샤오친(小秦)은 공교롭게도 취재차 뉴욕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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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터라 나는 시비 걸 상대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출장을 가기 전 샤오친은 내게 농담조로 자기 업무도 좀 봐 달라고 했다. “제대로 된 특종 한 방 터뜨려 봐요! 이참에 선배한테 한 수 배우게!” 그는 담배를 삐딱하게 빼물고, 진심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젊은 나이에 성 공해서 기세등등했을 고인의 모습을 그려 보며, 나는 주머 니에서 크로스(CROSS) 만년필을 꺼내 그 작은 부고란 사방 에 네모난 테두리를 박박 그려 뒀다. 그날, 나는 전화부에 적힌 번호로 전화 몇 통을 걸었다. 당사자들이 놀라지 않도록 우선 자초지종부터 파악해 볼 셈 이었다. 속으로는 그가 출중한 젊은 인재이기를, 가장 좋기 는 귀국해서 ‘국건회(國建會)’33) 활동에라도 참여하던 인물 이기를 바랐다. 그렇기만 하면 대대적인 뉴스거리는 못 돼 도 애도의 방식으로 멋들어진 기사 한 편을 보도할 수 있고, 그걸로 최소한 나라 밖 학자에 대한 정부의 마땅한 연민의 뜻을 반영한 셈이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천씨 성을 가진

33) 국건회(國建會): 워싱턴 국건연의회(華府國建聯誼會, ChineseAmerican Professionals Association of Metropolitan Washington, D. C.). 워싱턴 주재 타이완 지식인들의 모임. 1972년에 첫 토론회 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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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내 기대와는 한참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젊긴 하 지만 인재라 할 수는 없는, 더구나 비사회적인 인물이었다. 때문에 국내의 어떤 엘리트 코스에 닿은 연줄도 전혀 없었 다. 거의 포기하려 했을 때, 의도치 않게 단서 하나가 내 구 미를 확 끌어당겼다. 알고 보니 부고를 내기 전에 이 천씨 성 의 남자는 한 달간 실종 상태였는데, 시체를 찾자마자 타살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사건이 급히 종결되었던 것이다. 미 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내게 남아 있는 사회부 취재 기자의 직감이 발동해 이 일을 더 깊이 파 보자는 생각이 들 었고, 그러자면 최소한 그의 아내를 한 번 만나 봐야 했다. 하지만 이런 ‘화교 뉴스’ 건은 사실 샤오친의 소관이기 때 문에 자칫 잘못해서 정보가 새 나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것이다. 만약 핫뉴스로 부상한다 하더 라도 샤오친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캐고 다닐 테고 난 결국 녀석에게 항복하고 말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힘이 쑥 빠 지긴 했지만, 나는 뉴욕에서 막 돌아온 샤오친에게 일부러 이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날이 너무 무더웠기 때 문일 수도 있겠고, 어쨌든 난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 한 주 간, 워싱턴의 기온은 끊임없이 올라 안 그래도 무성한 교외 의 나무들이 어느 순간 전부 한데 얽혀 열대림을 이루었다. 그 후 주말이 되었지만 기온은 여전히 내려갈 기미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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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않았고, 무섭게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일요일 오 후, 나는 냉장고가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주방에 앉아 뒤뜰에서 어서 깎이길 기다리는 잔디밭을 넋을 빼고 바라 보고 있었다. 외출 준비를 끝낸 메이윈이 내 머리를 가리키 며 어서 가 잔디나 깎으라고 했다. 이웃집은 벌써 다 깎았더 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순간, 관용어 하 나가 퍼뜩 떠올랐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 다.’34) 하지만 그녀가 결혼한 이 위인은 황새와는 한참 동떨 어진 뱁새에 불과하다. 첫째, 나는 글 쓰는 게 직업이라 죽 었다 깨어나도 그녀를 ‘엔지니어’나 ‘건축가’, ‘변호사’ 또는 ‘회계사’ 사모님으로 만들어 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최근 몇 년 새 언론계에서 내 명망도 나름 높아져서 사모님 그룹에서 그녀의 지위 또한 살짝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런 얼간이! 자고로 남자가 어깨에 힘주고 살려면 결혼 따위는 하지 말아야 했다. 얼간이! 더구나 생각이란 게 있었다면 이 런 멍청한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아야 했다. 멍청한 여자는 이웃은 잔디를 다 깎았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문제는 잔디를 왜 꼭 깎아야 하는지 나는 도통 그 필요를 못 느낀다는 데 있다. “들쑥날쑥한 것도 그 자체로 아름답단 걸

34) 원문은 “Keep up with the Jone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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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지!” 나는 손사래를 치며 팩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메 이윈은 엉덩이를 씰룩이며 나간 뒤였다. 그녀가 요즘 가장 흥미를 느끼는 사교 단체인 합창단 모임에 참석하기 위한 외출이었는데, 합창단 구성원은 하나같이 워싱턴 화인 사회 유명 인사들의 부인이었다. 메이윈은 합창단의 메인 소프라 노였고, 이들은 공익 행사 등에 참여해 공연을 펼쳐 자선단 체라는 미명을 얻고 있었다. 정작 나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꺾고 햇빛 아래서 잔디를 깎아야 하지 않는가. 주방의 의자 를 하나하나 밀다 문득 그 챠오치라는 여자를 한 번 만나 봐 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씨의 아내를 만난 건 그로부터 또 한 주가 지난 후의 일 이다. 그 한 주 동안, 전화로 만날 약속을 잡으면서 나는 상 당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 호기심으로 인해 약속에 대한 기 대감도 동반 상승했고, 이 일은 내 무료한 삶 속에 지극히 강 렬한 자극제가 되었다. 때문에 나는 여전히 샤오친에게 이 일에 대해 함구했다. 만나기로 한 그날이 되었다. ‘포시즌 레스토랑’의 통로 쪽 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혹시 그 여자 마음이 바뀐 건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전화로는 한 번에 응했지만, 마지막 1분 을 못 넘기고 변덕을 부리는 게 여자 마음 아니던가. 걱정이 초조함으로 이어져 나는 1초가 멀다 하고 식당 입구를 살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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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입구에는 활엽수 화분이 겹겹이 놓여 있어서, 나는 마치 밀림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밀림의 식물은 문어발처럼 이리저리 걸쳐 있어 도무지 헤쳐 나갈 수 없게 나를 짓눌렀 고, 숨 쉬는 것마저 내겐 벅찬 일로 느껴졌다. 빽빽한 밀림 속에는 공기가 희박하니까. 하지만 어쩌면 집 앞의 깎지 않 은 잔디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메이윈은 차가운 얼 굴로 딱 잘라 말했다. 만약 잔디를 저렇게 제멋대로 자라게 둔다면 저대로 숲이 되고 말 거라고. 하지만 제멋대로 두면 뭐 어때? 나도 정말이지 내 멋대로 살고픈 맘뿐이다. 만약 이 자리에 앉아 챠오치라는 여자를 기다리는 일이 없었다면 결국엔 잔디를 깎아야 했겠지….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마침내 그녀가 나타났다. 종려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지나 내가 앉은 테이블 앞으로 오고 있는 그녀는 키 크고 마른 체 형을 가진 서른 살의 여자로, 머리는 숱이 많고 새카맸으며, 골격은 튼튼해 보였고, 살짝 돌출된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 다. 광대뼈 언저리에는 옅은 기미가 얹혀 있었고, 눈빛은 자 그마한 불꽃이 일 듯 반짝여 상당한 에너지를 가진 여자라 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내 기억에 그녀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핸드백에서 모 무역회사가 찍힌 명함을 꺼내며 광둥 억양이 실린 영어로 재빨리 말했다. “당신과 같은 기자들의 속셈을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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