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서, 미디어 현상학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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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플루서, 미디어 현상학 김성재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플루서, 미디어 현상학

지은이 김성재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펴낸날 2013년 2월 25일 커뮤니케이션북스(주) 출판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청원빌딩 3층 전화 (02) 7474 001, 팩스 (02) 736 5047 commbooks@commbooks.com www.commbooks.com CommunicationBooks, Inc. 3F Cheongwon Bldg., 571-17 Yeonnam-dong Mapo-gu, Seoul 121-869,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가 저작권자와 계약해 발행했습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김성재, 2013 ISBN 978-89-6680-843-4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상징 체계

이 책은 인류문화사를 미디어에 의해 운반되는 코드의 발 전 역사로 파악하는 커뮤니케이션 철학자 빌렘 플루서 (Vilém Flusser)의 미디어 현상학을 다룬다. 곧, 미디어에 서 무엇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이 책의 핵심 주제다. 여기서 현상학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이 얘 기한 것처럼,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 그것을 어떤 것이 라고 보기 때문에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플루서는 미디어의 개념을 상징 체계인 코드가 그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라고 정의한다. 인간 커뮤니케이션은 두 사람 이상의 상대가 미디어에 의해 운반되는 메시지, 곧 코드화 되어 상호 인지 가능한 의미를 교환하는 기교적 행위다. 이 책에서는 먼저 플루서가 ‘코무니콜로기(Kommunikologie)’ 라고 부르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핵심 개념을 이루고 있는 대화와 담론, 정보, 상징 체계인 코드가 다루어진다. 그런 다음 코드 중 오늘날 지배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술적 형상, 특히 디지털 코드가 탄생시킨 텔레마틱 사회 의 특징과 미래 전망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청각 코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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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코드의 예술적 결정체인 음악과 디자인의 철학을 조 명한다. 디지털 사상가로서 추앙받는 플루서는 알파벳 문자가 디지털 코드에 의해 추방되는 현상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역사시대가 시작될 때 알파벳(자모) 문자가 그림에 대항했던 것처럼, 오늘날 디지털 코드는 알파벳 문자를 추 월하기 위해 대항하고 있다고 본다. 곧, 역사시대의 알파 벳 문자에 기초한 사고가 전역사시대의 그림에 기초한 마 술적 사고에 도전했다면, 20세기 말 디지털 코드에 기초 한 사고는 알파벳 코드의 구조적·체계 분석적·전체적 사고방식인 과정적·발전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있다 는 것이다. 플루서는 알파벳이 계몽의 코드로서 문자 발 명 이후 문자텍스트를 통해 계몽에 성공하기까지 30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지만, 디지털 코드는 21세기의 새로운 계몽에 성공하는 데 몇 십 년이면 충분할 것처럼 보인다고 전망한다.

인간 커뮤니케이션: 대화와 담론 플루서의 코무니콜로기에서 인간 커뮤니케이션은 담론 (discourse)과 대화(dialogue)로 구성된다. 담론은 정보 를 분배·저장하는 커뮤니케이션 형식이고, 대화는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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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정보를 합성해 새로운 정보를 창조하는 커뮤니케 이션 형식이다. 양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가 존재하지 않으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둘 중 어떤 것 이 더 우위에 놓여 있다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먼저 담론은 자연의 엔트로피적 작용을 거스르는 부정 의 엔트로피다. 곧, 담론은 한 번 송신된 정보가 상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보를 분배해 저장하는 방법이다. 이 방 법은 네 가지의 상이한 담론구조들, 곧 극장형 담론, 피라 미드형 담론, 나무형 담론 그리고 원형극장형 담론에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하나는 담론의 송신자가 정보를 분배할 때 잡음이 침투해 정보가 변형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담론은 정보를 전달해 수신자의 기억 속에 저장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래 정 보의 ‘충실함’을 보존해야 성공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담 론의 송신자는 정보를 분배할 때 수신자들이 전달받은 정 보를 계속해서 송신할 수 있도록 이들을 미래의 송신자로 만들어야 한다. 곧, 이 담론은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왜 냐하면 담론은 사용 가능한 ‘정보의 흐름’을 보장해야 성 공하기 때문이다. 담론의 두 가지 측면, 곧 정보의 ‘충실함’ 과 정보의 ‘발전’은 어느 정도 모순되기 때문에 서로 일치 하기가 어렵다. 결국 두 가지 요건을 가능하면 조화시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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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성공적인 담론을 완성시키는 일이 중요한 문제다. 다음으로 대화는 담론에 의해 분배되어 사용 가능한 정 보를 새로운 정보로 합성하는 방법이다. 대화에는 원형 대화와 망형 대화라는 두 가지 형식이 존재한다. 원형 대 화는 원탁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위원회, 실험실, 회의, 의회 등에서 확인된다. 원형 대화에 참여자들은 기억 속 에 저장된 모든 정보의 ‘공통분모’를 발견하려고 하지만 참가자들의 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 사용하는 코드, 의식 수준 등에 따라 대화의 성패가 엇갈릴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화는 의견의 일치보다는 갈등에서 유래하 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려운 커뮤니케이션 형식이다. 또한 원형 대화는 폐쇄회로이기 때문에 참가자 수의 제한이 불 가피한 엘리트적 커뮤니케이션 형식이다. 그러나 원형 대 화가 성공한다면,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커뮤니케 이션 형식이다. 한편 망형 대화는 인간이 완성시킨 모든 정보를 수용하 는 기본 망을 형성한다. 이 대화에는 가시거리 내에서 일 어나는 잡담, 수다, 욕설, 소문 등을 확산시키는 원초적인 형식이 존재하지만, 먼 거리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우편, 전화, 인터넷 등을 이용한 발전된 형식도 있다. 이 망형 대 화에서 창조된 새로운 정보는 오늘날 ‘여론’이라고 불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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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기관 등을 통해 측정할 수 있다. 또한 망형 대화 는 열린 회로이기 때문에 민주적이고 언제나 성공률이 높 고, 새로운 정보를 창조한다. 무엇보다도 전 지구적인 컴 퓨터망의 확산으로 망형 대화는 ‘인터넷’이라는 이름으로 텔레마틱 사회의 출현을 가능케 한다.

인류의 세 가지 질적 비약 : 그림, 문자, 기술적 형상 플루서는 상징 체계인 코드(code)를 토대로 인류문화사 와 커뮤니케이션 철학을 기술한다. 인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크게 세 가지 코드를 사용해 왔다. 선사시대 의 그림(전통적인 그림), 역사시대의 텍스트 그리고 탈역 사(탈문자)시대의 테크노 코드인 기술적 형상(새로운 그 림)이 그것이다. 그가 던진 현상학적 질문은 위의 두 가지 서로 다른 그림이 텍스트와 어떤 상관관계 속에서 창조되 고 해독될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미디어는 앞에서 언급 한 것처럼 그 내부에서 코드가 작동하는 구조다. 예컨대 책이라는 미디어 내부에서는 텍스트 코드가 작동한다. 인류의 첫 번째 질적 비약으로서 선사시대에 탄생한 코 드인 전통적인 그림은 인간이 주체로서 객체를 관조함으 로써 생긴 주변세계(환경)와 틈을 메우기 위해 창조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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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은 움직이는 물체의 4차원적 관계들을 상상의 도 움으로 2차원적 관계들로 축소함으로써 상징들로 덮인 평 면이다. 상상은 4차원적 시공간의 관계들을 2차원적 관계 들로 축소시키는 능력이자, 그러한 2차원적 축소를 4차원 으로 환원시키는(그림을 해석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그 림은 정보의 동시화이고, 이 그림의 해독은 정보의 통시화 (通時化)다. 선사시대의 그림에 표현된 사물들 간의 관계는 신과 영 혼의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죽지 않는, 곧 시간이 순환하는 마술적 의식에 의해 규정된다. 시간이 순환하는 그림 속 의 요소들은 정당하고, 숭고하며 올바른 자리(상·하· 좌·우 등)를 차지하면서 요소들 간 불변성을 견지한다. 그러나 실제적 세계의 가변적인 현상들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은 움직임을 의미하고, 이 움직임은 올바른 장소 의 이탈이자 규칙 위반이기 때문에 보복을 동반한다. 보 복에 노출된 인생은 두렵기 때문에 그림이 기도의 대상이 되면서 인간은 우상숭배라고 불리는 집단광기(환상)에 사 로잡힌다. 그림의 집단적 광기에 사로잡힌 지옥과 같은 분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시도된 선형 문서(텍스트)의 발명은 구제로 느껴진다. 위협적인 환상의 광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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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인간은 두 번째 질적 비약, 곧 그림에서 텍스트로 비약 을 하게 된다. 1차원적 선형 문서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 은 선형 텍스트(문자)의 미디어를 사용해 세상을 관조하 고 상상한다. 이 단계는 인간이 미디어를 이용해 개념을 파악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역사시대로 진입하는 것 을 의미하고, 상상의 관계들을 개념적 관계들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이는 구상이 상상을 대체함으로써 역사적 의식 이 마술적 의식을 추월했음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그림이 신화와 마술의 의미를 담았다면, 텍스트는 이성에 기초한 계몽과 역사(이야기)를 강조함으로써 발전의 이데올로기 (근대성)를 촉진시킨다. 그러나 15세기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 이후 19세기 말 까지 절정에 이르렀던 선형 코드의 역동성은 이성 중심적 과학언어 및 추상적 개념들의 범람을 초래함으로써 텍스 트를 과거의 그림처럼 환상적으로 만든다. 이는 인간이 침투할 수 없는 책이라는 벽 안에 갇혀 사는 광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장애 요인이 된다. 텍스 트의 불투명성은 역사적 의식의 몰락을 예고하는 징후이 며, 텍스트에서 벗어난 기술적 형상이라는 새로운 그림 매 체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탈문자시대(1900년 이후)로 접어들면서 인간의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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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 질적 비약이 시작된다. 인간은 선형 코드가 형성시킨 ‘발전’이라는 역사의식에서 무의미함을 느끼며, 텍스트의 세계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기술적 형상’ 이라는 새로운 평면 코드(그림)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간다. 선형 코드는 사진,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등 기구 를 이용해 다시 모아야 할 0차원적 점의 요소들로 붕괴된 다. 그러나 이 새로운 그림은 장면의 모사가 아니라 텍스 트에서 나온 프로그램이다. 곧, 역사(이야기)가 프로그램 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무엇보다도 1차원적 선형 코드 에서 붕괴된 점들(비츠)을 계산을 통해 집합시키는 컴퓨 터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새로운 평면 코드인 기술적 형상 (모니터 상의 텍스트 자체도 비츠의 조합인 새로운 그림) 이 오늘날 지배적인 코드의 위상을 차지한다.

텔레마틱 사회의 신 혁명가들 개별적이고 고독한 미디어 이용자로서 인간은 자신의 두 뇌를 훨씬 초월하는 신속성과 저장 가능성으로 무장한 컴 퓨터를 통제할 수 없지만 전체로서 사회는 이 기구를 통제 할 수 있다. 이 통제는 새로운 이미지 창조자, 사진사, 영 화 제작자, 비디오 제작자, 컴퓨터 사용자들과 같은 ‘조용 한 신 혁명가들’의 참여가 있어야 가능하다. 전체로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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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는 전체로서 기구를 프로그램화해야 하고 원하는 상황 에서 이 기구를 멈추게 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서 사회는 대중매체의 일방적인(담론적인) 송신자 회로를 쌍방향적(대화적) 커뮤니케이션 회로로 재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재구축은 텔레커뮤니케이션(telecommunica tion)과 인포마틱(informatique)의 합성어로서 텔레마틱 (telematique)이라는 기술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텔레마 틱은 스스로 움직여(automat)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가 져다주는(tele) 기술이라고 해석될 수 있으며 일반적·전 지구적인 담론과 대화를 허용한다. 오늘날 인터넷으로 대 표되는 이 기술은 모든 사람들의 동참이 가능한 민주적인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수행하도록 전환될 수 있다. 이러한 송신자 회로도의 재구축은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 치적인 문제로서 미래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기술 적 형상의 창조자와 네티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 다. 텔레마틱 사회에서 ‘조용한 신 혁명가들’은 자신을 대 중매체가 제공하는 오락에 내맡기지 않고 대화를 즐긴다. 오늘날 기술적 형상은, 과거 문인들이 상호교신을 위해 선형 텍스트를 가지고 유희했던 것처럼, 네티즌들이 모니 터 위에서 정보를 창조하고 서로 대화를 하는 새로운 평면 코드로서 모니터 위에서 송·수신된다. 특히 텔레마틱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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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에서 테크노 코드(기술적 형상)를 이용한 대화는 선형 코드를 이용한 역사적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예술을 탄생 시킬 수 있다. 더 나아가 텔레마틱 사회는 아직 예상하지 못했고 예상 할 수 없는 상황을 대화적으로 그림 속에 옮겨 놓기 때문 에 수많은 사람들과 게임을 즐기도록 할 것이다. 이는 ‘일 하는 인간(homo faber)’이 ‘노는 인간(homo ludens)’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유희 속에서 항상 새로운 정 보가 창조되고 새로운 도전이 체험될 수 있다. 이는 바로 조용한 혁명가들의 참여에 의해 대화와 담론이 균형을 이 루는 이상적인 사회의 실현이다. 이처럼 텔레마틱 사회는 인간이 실제로 창조한 사회 중 최초의 자유로운 사회다. 그래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텔레마틱을 통해 타인을 위한 축제적인 존재, 곧 타인과 관계에서 목적 없는 게임을 통 해 ‘인간이기’를 실현한다.

그림의 혁명과 기술적 상상 19세기 사진 기술 발명 이후 그림은 예술가의 손을 떠나기 시작했고, 20세기 텔레비전 화상시대와 컴퓨터 애니메이 션시대의 그림은 세상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개념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그림들은 도구나 기계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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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해 창조된 ‘기술적 형상’으로서 커뮤니케이션혁명,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림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림의 혁명은 전통적인 그림이 수행해 왔던 모방적 재현을 넘어 시각적 인 현실창조(영상설계)를 통해 문자 텍스트에 의해 추동 된 ‘근대(modern)의 프로젝트’를 마감한다. 이는 현실의 설계가 존재하는 현실이나 현실의 반영보다 더 중요한 의 미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혁명이 야기한 정신적 충격을 완화시키고, 이 혁명 에서 유래된 의식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미디어 이용자 는 기술적 형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능력의 토대는 수용자가 문자를 초월한 ‘초언어적 코 드’, 곧 사진, 영화, TV, 비디오, 컴퓨터 애니메이션 등을 창조할 수 있고, 반대로 이 새로운 그림을 문자 텍스트로 해독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갖추는 데 있다. 왜냐하면 기술 적 형상은 문자 텍스트의 개념들을 기반으로해 설계한 것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안된 기술적 상상(technoimagi nation)은 개념에서 그림을 만든 후 그러한 그림들을 개념 의 상징으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다. 기술적 상상에는 세 가지 차원이 존재한다. 입장들, 시간 체험, 그리고 공간 체험이 그것이다. 먼저 입장들과 관련, 기술적 상상에서 선형 텍스트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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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 객관적인 입장은 단 하나의 기준이 허용되지 않기 때 문에 황당무계한 것이다. 모든 현상은 끝없이 많은 입장들 의 한 단면이다. 객관적인 입장이 기술적 상상에서 잘못된 문제라는 사실은 사진, 영화, 비디오 그리고 모든 기술적 형상의 조작에서 확인된다. 객관적 입장의 문제는 바로 하 나의 개념을 상상하려는 시각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기술 적 상상에서는 입장의 등가성(等價性)이 인정된다. 오늘날 과학의 객관성이 일종의 주관성(예술 형식으로 서 과학)으로 인식되고, 이에 반해 예술의 주관성이 일종 의 객관성(과학 형식으로서 예술)으로서 인식될 때, 과학 과 예술의 관계는 ‘간주관성(間主觀性)’이라는 개념에 의 해 대체된다. 곧, 객관적인 입장이 기술적 상상을 통해 효 력을 상실하는 순간, 진리에 대한 질문은 새로 제기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술적 상상을 통해 객관적 진리의 개념으 로부터 하나의 그림을 만들려고 하면, 인식자의 인식 대상 과 동화하는 과정은 한 입장이 다른 입장으로 바뀌는 일련 의 입장 전환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진리 찾기는 한 문 제의 주위를 맴도는 것과 같다. 하나의 진술은 말로 된 입 장들의 숫자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이 입장들을 취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입장들의 숫자가 크면 클수록 진리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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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리의 기준은 ‘객관성’이 아니라, ‘간주관성’ 을 따른다. 그렇다면 진리 찾기는 더 이상 발견의 노력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데 타인들과 합의를 보려는 시도다. 결국 기술적 상상의 차원에서 모든 세계에 대한 입장들은 동등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입장들로부터 개념에 대한 그림들이 설계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모든 입장을 배 제시키는 가운데 한 입장을 취하는 것과 방어하는 이데올 로기의 지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입장의 등가 성은 ‘가치중립’이나 모든 입장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모든 입장은 그 특별한 가치를 투영하고,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시간 체험을 살펴보면, 문자 텍스트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의식 속에서 시간은 과거 → 현재 → 미래 의 방향을 따라 흐르면서 강물처럼 체험된다. 이는 ‘역사 적’ 시간으로서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일회성의 시간이 며, 인과관계의 사슬에 따라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이와 같은 시간 체험은 기술적 상상에서 황당무계하다. 우리가 역사적 시간의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시 간은 현재를 향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곧, 역사적 의식의 차원에서 현재는 시간을 통과하는 시간선(時間線) 위의 한 점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재는 실제적이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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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더러, 현재가 존재하는 순간, 이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 지 않는다. 모든 실제적인 것은 오직 되는 것(Werden)이 기 때문이다. 기술적 상상에서 실제적인 것은 현재뿐이 다. 현재는 오직 가능한 것으로서 미래만이 현실화되기 위해 도착하는 장소로 간주된다. 기술적 상상이 허용하는 간 체험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곧, 현재와 관련되어 있으며, 현재는 내가 있는 곳이다. 나는 항상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 자신과 시간 체 험의 관계는 시간의 정치화를 통해 타인들과 공존을 가능 케 한다. 곧, 타인들이 현재 속에서 나와 함께 존재할 수 있도록 현재를 확장시키도록 유도한다. 마지막으로 공간 체험과 관련, 선형(문자 텍스트)으로 프로그램화된 역사적 의식에서 ‘공간’과 ‘시간’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에 반해 기술적 상상에서는 시간을 공 간 없이 혹은 공간을 시간 없이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 다. 우리는 공간을 시간의 동시화로 체험하고 시간을 공 간의 통시화로 체험한다. 두 가지 입장은 ‘공간은 흘러간 시간이다’와 ‘시간은 용해된 공간이다’라는 차원에서만 이 해될 수 있다. 그래서 공간은 우리에게 상대적이다. 또한 한 대상의 거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나라는 존 재에 의해 상대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한 대상은 나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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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가깝다. 이 대상은 나를 그리고 내가 이 대상을 더 많이 간섭하면 할수록 더 가깝다. 따라 서 시간-공간 체험의 척도는 내 관심이다. 더 나아가 나는 ‘여기-지금’의 편에서 세계의 제한성을 다른 인간들을 편 입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곧, 여기 그리고 지금 내 곁 에 인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안에 내가 존재하는 세 계는 더 커진다.

음악 청취와 디자인의 철학 플루서는 음악 청취의 제스처를 언어적 음성 청취의 제스 처와 구별한다. 언어를 청취할 때 상대방의 입술을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음악 청취의 제스처는 그렇지 않다. 읽듯이 해독한다는 것은 파악하면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음악적 메시지 청취는 ‘의미론적 읽기’와 다 르다는 것이다. 음악 청취의 제스처는 다양한 음악 장르 (성악, 기악, 실내악, 영화음악 등)마다 다르지만, 그 공통 점은 인간이 듣는 음악의 메시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의 미에서 음악 청취의 제스처는 수신된 메시지에 적응하고, 그 형식은 메시지에 따라 바뀐다. 플루서에 따르면 음악 청취자는 다가오는 음파를 자신 의 내적인 것에 집중시킴으로써 이러한 내적인 긴장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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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신체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신체가 된다. 따라서 음악 청취의 제스처는 음악을 구체화하는 체위로서 음악의 메 시지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제스처라고 할 수 있다. 다 시 말해서 음악 청취자 자신은 음악을 들을 때 청취된 음 악이기 때문에, 곧 그 자신이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 청취 의 제스처는 음악에 적응하고 스스로 음악이 되는 것을 의 미한다. 음악의 수용은 뱃속, 가슴속, 뇌 속 등 진동할 수 있는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일어나는 열정인 감정이입이다. 음 파가 청각신경을 통과해 인간이 인지할 때까지의 과정은 ‘느끼다’, ‘소망하다’, ‘꿈꾸다’, ‘사고하다’와 같은 동사로 표 현되고, 명사로서는 ‘행복’, ‘사랑’, ‘동경’, ‘아름다움’, ‘질서’ 등으로 명명된다. 그러한 음악 청취의 과정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최고 형식의 정신, 영혼 그리고 지성이 수용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음악 청취의 제스처는 ‘청각적인 마사지’를 통해 신체가 정신이 되는 동작을 의미하고, 이 제스처 속에서 청취자의 고유한 정신과 메시지 송신자의 정신이 일치된다. 음악 청취 시 인간과 세계의 분리는 사 라지고 인간은 자신의 피부를 극복한다. 혹은 반대로 피 부가 인간을 극복한다. 음악 청취 시 오장육부, ‘내면’으로 중개되는 피부의 수학적인 진동은 황홀경이고 ‘신비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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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체험’이다. 한편 시각예술의 한 장르인 ‘디자인’의 기본 구상은 무 형의 물질에 형식을 부여하는 예술가 또는 기술자에서 시 작된다. 이는 목수가 목재로 책상을 만드는 것과 같다. 플 라톤이 예술과 기술에 제기한 근본적인 이의는 예술가와 기술자가 이론적으로 판단한 형식인 이데아(Idea)를 물질 에 적용할 때 누설하고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가와 기술자는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교활하게 인간을 왜곡된 이데아로 유혹하기 때문에 이데아의 배신자이며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에서 디자인은 모든 문화의 기본으로서 기술을 이용해 자 연을 속이는 것이고, 모든 문화의 뒤에서 자연적으로 제약 을 받는 젖먹이동물인 우리 인간을 교활하게 자유로운 예 술가로 만드는 것이다.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디자이너의 시각은 미래보다는 영원함을 향해 있다. 예컨대 유프라테스 강의 관개시설 (灌漑施設)은 단순히 미래의 물 흐름이 아니라 모든 물 흐 름의 형식을 설계한 것이다. 그것은 삼각형 세 각의 합은 180도라는 공식처럼 영원불변의 이론적인 기하학을 이용 한 설계도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영원함은 분석적인 기하학 덕택에 수학 방정식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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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원한 형식들을 방정식들로 표현할 수 있고, 숫자 코드로 이루어진 방정식들은 컴퓨터 코드에 적용하여 입 력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컴퓨터는 이 알고리즘을 선, 평 면, 그리고 입체 형상으로 모니터 위에서 또는 홀로그램으 로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컴퓨터를 사용해 영원성 을 주시하고, 로봇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디지털시대의 디자이너인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인간이 환경에서 느끼 고, 인지하며, 소망하는 인생 프로그램인 중추신경계에 상응하는 형식을 창조한다. 그 결과 인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지, 감정, 소원 그리고 사고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 다. 그리고 우리는 사이버 세상과 같은 다른 세상에서 살 고 여러 차례 존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큰 문제 가 되고 있는 산업디자인의 윤리는 시민들의 규범적·도 덕적 검증을 받는 공론장의 부재와 조직적·총체적 무책 임성으로 특징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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