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진리와 커뮤니케이션 방정배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진리, 학문, 그리고 소통(疏通)
진리에의 접근과 과학 이론 진리를 탐구하거나 추구하는 사람들을 학자나 구도자라 고 한다. 진리는 그러니까 지성인이나 도(道)를 닦는 수도 승이나 도인(道人) 같은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meeting) 그런 것인가라고 묻게 된다. 진리의 빛이란 어휘에서는 그것이 광채를 발산하는 어떤 신비한 존재로 읽히기도 한 다. 한영사전에서 진리를 트루스(truth)로 번역하고 있음 을 볼 때, 우리가 쓰는 ‘진실 게임’이니 혹은 ‘실체적 진실 규명’이니 하는 말에서 진실은 허위나 거짓과 반대되는 그 런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리의 대립어(對 立語)는 ‘거짓(말)’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리가 빛을 내고 혹은 비추는 그런 것일 진 대 그 대립 언어는 어둠이라야 할 것 아닌가. 왜냐하면 진 리는 밝은 것(明)을 속성으로 가진다고 동양철학이 수천 년 동안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학자가 추구하는 그 진리와 수도승이나 도인이 추구하는 진리는 같은 진리 인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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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진리 개념의 혼동 속에서 우리는,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그 소재지를 묻는 질문에 난감해한다.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그 소재지를 물어보면 학자는 물론 그 누구 도 대답을 못한다. 학문과 진리의 동산이라는 대학교에서 탐구하는 과학자들과 커뮤니케이션 학자들도 진리의 소 재지에 대해 답변이 궁해지는 것이 그 실례다. 그 이유는, 진리가 무엇인지 규명되지도 않았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체를 모르는데 그것의 거주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도인(道人)이나 수도승은 진리의 거주지를 안 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학자와는 달리 진리가 무엇인지도 알고 그것이 소재하고 있는 장소도 안다는 말 이다. 진리 거주지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변은, “없는 데 가 없이 모든 곳에 있다”(omni praesenz)라고 하며, 진리 는 기왓장 밑에도 있고 인간의 마음속에도 있다고 대답한 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해하고 인식하는 진리는 학자들 의 인식론을 벗어나 있는 어떤 신비적이고 구체성이 결여 된,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 전통에서 이해하는 도(道)로서 의 진리 개념이다. 그래서 글자 ‘진리’는 같은 것이로되 그 개념적 내용과 성격은 서양 사상적 진리 개념과 완전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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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서양 사상 전통에서 이해하는 진리 개념의 범주에서 이 동양적 진리관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서양 경험실 증과학에서 문제 삼고 있는 진리는 개념적으로 인식되고 이론적으로 증명되는 객관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서양 과학 사상적 관점과 맥락에서 진리 문제에 접근한다. 과학적이고 이론적 진리의 내용과 성격을 규명 하되 그 진리가 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관계에서 만 포착되고 인식될 수 있는지 설명해 나갈 것이다. 여기서 이 ‘왜’가 밝혀지면, 서양 과학적 의미의 진리 소재지(所在 地)가 바로 언어이고, 그 진리를 생성하고 만들어 내는 모
태(매개체)가 커뮤니케이션 행위와 그 담론(Diskurs)임이 밝혀질 수 있다. 즉, 진리는 커뮤니케이션 진리가 되는 것 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 대응 이론에서 최근의 위르겐 하버마스의 진리 합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진리 연구의 전 통은 서양 과학 사상, 이를테면 경험실증주의, 합리주의, 언어철학, 과학철학,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 등을 자양 분으로 삼아 수립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진리 규명이나 과학적인 커뮤니케이 션 진리 추적 작업은 서양 과학 이론과 철학적 접근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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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존한다. 그 말은, 저자가 서양 과학 사대주의자거나 과학 숭배자라기보다는, 동양 사상과 학문(과학)은 학문 패러다임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서양 과학만 을 과학으로 부지불식간에 채택하였다는 말이다. 환언하면, 동양의 전통적 학문들인 도학(道學), 유학, 법학(불교학) 등은 선학(仙學), 주자학, 성리학, 이학(理 學), 기학(氣學), 심학(心學) 등 형이상학으로 심화 발전
한 결과 객관성과 경험성, 정확성과 실증성을 상실한 지식 체계로 변질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떠났다는 말이다.
진리는 하나뿐인가 상아탑이나 진리의 전당이라 일컫는 곳이 대학교다. 그렇 다면 대학교가 진리의 소재지인가. 대학교에서 진리가 찾 아지고 진리를 대면할 수 있는가. 한국 대학교의 대표인 서울대학교 상징물인 배지와 교표에는 진리의 라틴말인 “veritas”가 새겨져 있다. 이것을 미루어 봐도 대학교 혹은 대학인과 진리는 밀접하게 연계되어 이해됨을 알 수 있다. 학자와 연구자들이 대학인이므로 진리는 동시에 학문 혹 은 과학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회, 청와대, 기업 등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는가. 나아가 저널리즘에는 진리가 없는가. 편집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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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윤리 코드에서 진실(veritas) 보도라는 저널리즘 명 제는 무엇을 의미하나. 이때 진리나 진실이 사실(fact)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면, 진리는 거짓(허위)의 대립 개념으로 간주된다. 서기 33년,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로마 총독 관저에서 하나의 역사적 재판이 있었다. 재판관은 빌라도 총독이고 피의자는 유대 청년 예수였다. 빌라도는 로마인이니까 로 마어(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심문한다. “Qui est veritas (진리가 무엇이냐)?” 이 질문에 예수는 즉답을 안 했지만, 예수 자신이 진리임을 공관 복음서(共觀福音書) 텍스트 들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이때 예수 곧 진리나, 부처 곧 진리란 이해는 종교에서 통용될 수 있는 종교적 진리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직각삼각형의 밑변 제곱과 높이 제곱을 합하면 빗변 제곱의 값이 항상(불변 적) 같다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내놨다. 그의 정리는 진리 란 것이다. 이때 진리는 수학적이고 과학적 관점에서 보 는 진리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과학적 관점의 진리와 종교적 관점의 진 리가 내용과 성격을 달리함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렇다면, 관점을 초월한 어떤 보편적 진리는 없는가. 그리 고 고대로부터 수천 년을 경과하면서 진리라고 파악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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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오늘날도 여전히 진리로 유효한 그런 보편 진리는 없 는가. 고대에는 진리였던 천동설이 시대 경과 과정에서 거짓 이 되었다. 그렇다면 정리(定理)나 불변의 법칙만이 진리인가. 삼 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수학적 공리나 법칙은 진리 이고 하나뿐이다. 180도 하나만 진리이고 다른 각도들은 모두 거짓이다. 유일한 법칙적 수학적 진리 그것만이 진 리로 간주되었다.
지동설과 종교적 진리의 결별 근대적 의미에서, 진리 개념에 폭탄선언을 한 사람은 중세 의 끝자락에 등장한 폴란드의 가톨릭 신부 코페르니쿠스 다. 그는 1400년 동안 만고의 진리로 군림해 온 천동설을 뒤집었다. 기존 천동설은 진리가 아니란 것이다. 그는 천 체의 궤도운동에 대하여(1543)란 책 서문에서, 프톨레마 이오스의 천동설은 허위이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 한다는 지동설이 진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천동설 (비진리)을 떠날 것을 촉구했다. 그가 내세운 진리의 내용은 이것이다. 우주 안에 자리 하고 있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를 포함한 6개의 행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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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다른 둥근 궤도를 따라 공전한다. 토성, 화성, 금성, 지구 등이 30년, 2년, 9달, 1년의 주기로 궤도를 돌고 있다 고 주장하면서 그는 수학적으로 계산한 수치를 증거로 제 시한다. 다시 말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 궤도를 따 라 한 바퀴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365일이란 것이다. 이 지동설이 진리이려면, 기존의 가톨릭 세계관인 천동설 은 거짓이어야 하고, 후자가 진리이려면 지동설이 허위여 야 한다. 이 진리 게임에서 지동설이 당분간 천동설에 패 퇴한다. 지배 이데올로기적 권위와 폭력에 의해 지동설이 천동 설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지동설 논문이 완성된 지 30년이 경과하여, 그의 사망(1543) 직후 타국인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책으로 인쇄, 발행된 것도 신변 위협과 탄 압 때문이었다. 문제는, 동시대의 가톨릭에 저항하며 종교개혁을 주장 한 루터 신부마저 코페르니쿠스의 진리(지동설) 주장을 ‘바보 천치(Narr)의 헛소리(거짓말)’로 매도했다는 데 있 다. 루터는 반박의 근거로, 천동설이 성경에 의해 진리로 증빙된다고 하였다. 그는 성경 텍스트 여호수아 문건을 인용하여 천동설이 불변의 진리라고 한 것이다. “야훼 신 (神)이 가는 해를 멈추게 했다. 태양아, 가던 길을 기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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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멈추어라. 달아, 너도 그 자리에 멈춰서라 하였더니 하루 동안 해와 달이 멈춰 섰다”(여호수아 10:12∼14). 이 것이 루터가 인용한 성경 텍스트다. 그렇다면 지동설 텍스트엔 진리가 담겨 있고, 종교적 텍스트는 거짓말을 담지하고 있단 말인가. 반드시 그렇다 고 우리가 단정할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가 종교 경전인 성경을 거부하고 신부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이 담지하는(tragen) 종교적 진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과학적 진리가 아닌 것은 모 두 거짓으로 치부하여 거부할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진 리 개념 곧 종교적 진리를 따로 설정할 수 있겠다. 과학적 진리는 논문 텍스트를 통해 고유한 성격이 드러 난다. 예컨대 “지구는 행성이고 궤도를 따라 공전한다. 그 궤도는 붙박이 천체인 태양을 중심에 두고 거대한 둥근 모 양으로 배치돼 있다. 지구가 그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정 확히 1년이 걸린다. 1년에 한 바퀴 회전하는 것은 규칙적 이고 법칙적이다” 등이다. 객관성, 경험성, 정확성, 법칙 성, 계측과 계산성 등이 과학적 진리의 특성이다. 이렇게 볼 때 코페르니쿠스적인 진리는 객관적, 법칙적 진리이며 그것은 곧 과학적 진리와 동의어라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종교적 텍스트는 어떤가. 인간(여호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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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신(야훼)이 대화하고, 신이 태양과 달에 명령하니까 해 와 달이 그 명령에 복종하여 가던 길을 멈춰 선다. 신은 보 이거나 만져지는 경험적 존재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계측 이나 증명이 되지도 않는다. 신과 인간의 대화는 초월적 신비이고 환상이다. 해와 달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혹 은 달리고 혹은 정지하는 사건은 객관적 경험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신비와 초월적인 계시의 세계에서 막연하고 몽롱하게 진행되는 사건과 기적은 객관적으로 관측하거나 합리적 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신비적 사건은 참(진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단순 히 거짓이냐 하면 반드시 거짓이라고만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신비와 계시의 초월 세계와 초경험적 사건은 종교적 안목으로만 접근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진리는 신 비할지언정 가짜일 필연성은 없다. 성경, 불경, 코란 등의 종교적 경전 텍스트 자체는 그 언 술 방식이 대부분 알레고리(비유)나 메타포(은유)로 구성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초월적 신비의 세계와 묵시적 대 상들을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정확한 언술로써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 부활, 지옥, 천국, 구원 등의 초경험 세계와 신비한 계시 사건은 그래서 알레고리화하여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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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언술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8만 4000이란 많은 어휘 로 불교 진리를 설법한 석가는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 았다”고 했다. 그래서 8만 4000의 언술은 卍으로 상징되 고 알레고리화했다. 예수도 노자도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아니면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와 메타포는 종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지, 경험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되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의 천동설 주장은 종교 적 경전의 알레고리를 경험적이고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려 했기 때문에 빚어진 뼈아 픈 실수다. 그래서 알레고리는 알레고리로 간주해야지 ‘거 짓’으로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 진리는 이와 같 이 알레고리를 통하여 인간에게 신비적으로(비객관적으 로) 체험되고, 마음으로 깨달아지는(minding) 진리인 것 이다. 이런 류의 진리는 합리적 사고(thinking)에 의해 논 리적이거나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과학적 진리와는 다른 것이다.
진리 패러다임의 현대적 변동 객관적인 불변의 과학적 진리 개념에 하나의 충격파를 던진 20세기의 경험실증주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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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고 불안한(흔들리는) 과학적 진리 명제를 제시하 였다. 그는 객관적인 이론적 진리가 불변의 고정적 진리 가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라 확정한다. 그러면서 그 진리 는 반증(反證)이 나오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머무는 가설 (hypothese) 형태로 존재한다는 진리 반증의 법칙을 제 기한다. 그가 예시한 과학적 가설이 왜 잠정적인 진리인 가는 다음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스완(swan)은 희다”는 과학적(생물학적) 진리는, 반증이 나타나면 허위로 판명될 수 있는 가설에 불과하다 는 것이다. 즉, “모든 스완은 희다”는 언술은 과학적 진리 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가설로 지칭할 수 있는 잠정적 진리 에 해당한다는 논리 실증적 주장을 한 것이다. ‘swan’은 우리말로 흔히 백조로 번역되는 새 이름이다. 이 새의 깃 털 색깔이 흰빛이라는 사실이 참인 것은 잠정적 참(진리) 이란 것이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고정된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언제라도 거짓이 될 수도 있는 잠정적 진리라는 주장 이다. 그 언제라는 시점은 희지 않은(검거나 푸르거나) 스 완이 출현할 때까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뉴질랜드 어느 섬에서 한 마리의 검 은 스완이 관찰됨으로써, 스완이 희다는 가설이 반증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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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무너졌다. 그 가설이 거짓(참 아님)이어서 진리에서 탈 락한 것이다. 이것을 ‘진리 반증의 논리’라고 이름 붙인다. 칼 포퍼가 말하는 과학적 진리는, 그러니까 만고불변의 진 리 테제를 거부한다. 그의 진리는, 언제 거짓으로 들통 날 지 모르는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불안한(unsicher)’ 진리 를 의미한다. 삼각 도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법칙이나 피타고라 스 수학 법칙의 불변적 진리도 포퍼 식으로 풀이하면 불안 한 진리인 것은 마찬가지다. 뉴턴의 과학적 진리인 만유인 력의 법칙이나 낙하의 운동 법칙 같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불안한 진리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세기 후반의 독일 수학자 리만(Riemann)에 의해 내각의 합이 270도가 되는 삼각형이 그려지고 이론적으로 실증되었다. 뉴턴의 물리학 법칙들도 고차원의 상대성이론이 유효 한 공간과 시간에서 법칙성을 상실하고 무효로 판정되는 사태가 도래함으로서 포퍼(K. Popper)의 불안한 잠정적 진리 명제는 설득력이 입증되었다. 포퍼에 의하면, 영원 한 고정불변의 과학적 진리는 없으며 이론적인 객관적 진 리도 변하는 불안한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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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언어 행위 진리와 언어의 맥락에서 진리 연구는 지금 생존하고 있 는 20세기 최고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의 진리 이론 (Wahrheitstheorie)과 보편화용론(Universalpragmatik) 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진리 인식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인식론과 언어학에 토대를 둔 그의 진리 이론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진리가 존재하고 있는 진리가 아니고, 생성되고 만들어지는 진리인 것이 며 (존재론적 진리관에서 형성론적 진리관으로), 둘째는 그 진리를 만들어 내는 생성 모태가 합리적인(이성적) 커 뮤니케이션 운용 곧 담론(Diskurs)이란 것이다. 존재적 (sein) 진리에서 형성적(bilden) 진리로 옮겨 간 진리 패러 다임 변동은 오랜 진리 연구 전통에서 획기적 사건이다. 거기 더하여 진리 생성 모태로 커뮤니케이션 운용이 란 프라그마틱(Pragmatik)을 지목한 것도 하버마스를 커 뮤니케이션 이론가의 반열에 올려놓게 한다. 프라그마 틱은 의미론, 문장론, 문법(그라마틱) 등과 더불어 합리 적 커뮤니케이션 운용법인 화용론(話用論)이기 때문이 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통적 진리관은 대응 이론적 (korrespondenztheoretisch) 진리 이해를 의미하였다. 즉, 기존의 대응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진리는 언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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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술에 내재(內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말이다. 우리 가 개념적 어휘를 동원하여 하나의 문장을 제시했을 때 그 언어적 문장 진술이 현실 사태(Sachverhalt)와 정확히 대 응하면(korrespondieren), 그 언어적 진술은 베리타스란 것이다. 예컨대 A라는 언어 진술이 여기 제시되어 있다.
A: 저 앞뜰의 감나무에 익은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현실 사태 B는 이렇다.
B: 감나무가 뜰에 있다. 여러 개의 익은 감이 가지에 매 달려 있다. 익은 감의 색깔이 붉다.
이와 같이 언어 진술 A가 현실 사태 B와 100% 대응할 때 A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버마스의 진리 합의 이론(Konsensustheorie) 은 언어 진술과 현실이 대응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진리와 허위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진 이성적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 행위를 영위함으로써 진리 를 합의하고 형성해 낸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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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하는 상호 주관적(intersubjektive) 진리 곧 여론 영역 (public sphere)에 접근한다.
참고문헌 Popper, Karl E.(1972). Objective Knowledge: An evolutionary
approach. Oxford University Press. 이한구 옮김(2013). 객관적 지식. 철학과 현실사. Gadamer, Hans(1960). Wahrheit und Methode. J.C.B. Mohr, 이길우 등 옮김(2000). 진리와 방법. 문학동네. Buber, Martin(1966). Ich und Du. Jakob Hegner. 김천배 옮김(2012). 나와 너. 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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