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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자유 확장의 판결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급변하는 커뮤니케이션 환경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지식에 대한 욕구 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주제를 10개 항목으로 묶어서 달걀 꾸러미처럼 엮었습니다.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지식을 쉽게 알고자 하는 대중이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지식을 단시간에 알고자 하는 연구자, 실무자,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편집자 일러두기 ∙ 외래어 표기는 현행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다. ∙ 이 책에 실린 삽화는 이근명 화백이 그렸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표현 자유 확장의 판결 이승선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표현 자유 확장의 판결

지은이 이승선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펴낸날 2013년 2월 25일 커뮤니케이션북스(주) 출판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청원빌딩 3층 전화 (02) 7474 001, 팩스 (02) 736 5047 commbooks@commbooks.com www.commbooks.com CommunicationBooks, Inc. 3F Cheongwon Bldg., 571-17 Yeonnam-dong Mapo-gu, Seoul 121-869,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가 저작권자와 계약해 발행했습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승선, 2013 ISBN 978-89-6680-173-2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사건의 판결

‘미네르바 사건’과 ‘PD수첩’ 표현의 자유가 다른 기본권들보다 ‘절대 우월’하다는 주장 을 펴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잃기 싫어하 는 명예와 사람들에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가 동일한 무게 를 지녔으므로 맥락을 따져서 그 둘의 우열을 따져보자는 주장을 펴려는 것도 아니다. 시나브로 무엇인가를 알고 싶 어 하는 존재인 시민들이 스스로 노력해 알게 된 것을 가감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듣고 보아 서 깨우치게 된 의견과 사상을 처벌의 두려움 없이 솔직하 게 말할 수 있도록 시민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야 한다는 ‘하찮은 주장’을 하려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표현 자유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언론 학을 공부하는 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거나 표현의 자유는 다른 기본권들 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주장을 대체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조한다. 직업적 저널리스트를 배출하는 학과답게 강의 실 주위에선 ‘표현 자유의 우월적 지위’론이 가을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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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끼는 깃발처럼 무시로 들먹거려진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딱 거기까지다. 저널리즘 현장에서 표현의 자유 가 적용되는 과정, 다른 기본권들과 대립할 때 표현의 자 유를 지켜낼 수 있는 방식, 사람의 생명과도 같은 명예와 표현의 자유를 조화하는 균형감, 국가안보와 사회적 이익 이 표현의 자유와 충돌할 때 합리적인 해결방안은 무엇인 가 등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과 대화’는 대단히 빈곤하다. ‘표현 자유’를 주창하는 구호와 깃발은 거창하게 펄럭이지 만 정작 한국의 법원이 표현 자유와 다른 법익들의 충돌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조율해 왔는지, 생명수와 같은 시민들의 표현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한국의 저널리스트와 법관들이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 등에 대한 언론학 내부의 강의와 토론은 매우 부족하다. 뿐만 아니다. 언론학을 공부하는 대학에서 언론법 교과 목은 오래 전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이미 시대사 박물 관에 유폐된 곳도 여럿이다. 1000여 명이 넘는 언론학 분 야의 학회원 중 언론의 취재보도와 법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숫자 역시 미미하고 ‘언론법’을 강의하기 위해 대학 교원으로 채용된 학자도 거의 없다. ‘언론법제’ 분야 의 교원을 채용하겠다고 초빙공고를 낸 대학도 보지 못했 다. 그렇다고 언론 분야의 학회들이 언론법 연구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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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해 중장기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국의 ‘언론법제’는 대학은 물론 학회 차원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괜찮을까. 사람들의 판 단 결과는 다양할 것이다. 필자의 판단은 ‘괜찮지 않다’이 다. ‘큰일 났다’는 절박한 심정이 더 솔직한 표현이다. 왜 그런가. 지난 몇 해 동안 우리나라 표현의 자유 환경은 대단히 위축되었다. 언론사 차원의 취재보도 행위에 대한 공적 존재들의 압력 사태가 속출하면서 현직 언론인들 여럿이 민형사상 소송의 ‘피해자’가 되었다. 더러는 민사소송의 ‘피고’가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형사소추의 ‘피고인’이 되 어 법정에 서야 했다. 개인들의 표현 활동을 형사적으로 처벌하는 사례도 급증했다. 자신이 알고 배운 것을 토대 로 사회현상을 솔직하게 분석하고 글을 써서 발표한 젊은 이는 ‘공익을 해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 로 형사법정에 세워졌다. 일명 ‘미네르바’ 사건이다. 해당 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그 젊은이는 결국 풀려나긴 했지만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심각한 쟁 점이 제기됐다. 우선 권력기관이 사문화한 케케묵은 법 규정을 무기로 개별 시민의 표현 활동에 대해 주리를 틀려고 시도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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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심각하다. 처벌의 두려움 없이 앎을 삶의 현장에 서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헌법상의 표현 자유는 실질 적으로 보장된다. 여러 언론 매체는 그 젊은이가 ‘주류 대 학’을 다니지 못한 ‘전문대 졸업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멀 쩡한 직업’도 없는 이른바 ‘무직 종사자’라는 사실을 크게 부각했다. 학교 성적표 일부도 언론에 공개되었다. 그 젊 은이를 빙자한 ‘사이비’가 버젓이 기성 언론을 상대로 실 제인 양 인터뷰를 하고 오랜 전통에 빛나는 해당 언론사는 그 사실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보도했다. 희대의 사기 인 터뷰 오보를 낸 그 언론사는 얼마 후에 독자들에게 사과해 야만 했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사건을 접하면서 언 론은 시민을 처벌하려는 권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대신 오히려 처벌받는 자의 명예와 사생활을 조롱하는 보도를 일삼았다. 표현 자유의 위중함도, 시민 당사자의 인격권 도 주류 언론매체의 안중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아가 언론은 그 무렵 다른 사건에 즈음해 왜 언론인 들을 형사 처벌하지 않느냐고 부르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정책 문제를 다룬 ‘PD수첩’ 사건 때 일이다. 형사 법 정에 세워진 그 언론인들에게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 됐다. 법원이 무죄를 확정하고 언론인들을 자유롭게 해주 자 언론인들의 소속 언론사는 회사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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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론인들에게 징계의 벌을 내렸다. 최근 몇 년 동안 국 민소득 2만 달러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백주대낮에 빚어진 ‘희극적 비극’이다. 시민의 표현 자유가 침해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오히려 그의 명예를 조롱하고, 결국은 무죄 판 결을 받은 시사보도 프로그램 제작진을 형사 처벌하지 않 는다며 법원 재판부를 ‘공격’하는 언론, 무죄가 확정돼 명 예롭게 ‘무사귀환’한 자사의 제작진을 외려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자발적’으로 처벌하는 언론의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이른바 ‘언론법’ 학 자로서 표현 자유의 관점에서 이 문제들을 한번 짚어보고 싶었다.

‘표현의 자유’ 확장한 10가지 판례 이 책은 우리나라의 표현 자유를 확장하는데 기념비적 이 정표가 된, 혹은 기념비까지는 아니더라도 학술적 차원에 서 두루 살펴보고 깊이 천착해 볼 가치가 넘치는 10개의 판례를 소개하고 있다. 국가안보라는 법익과 표현의 자유 의 충돌, 성적인 표현과 상업적 표현의 헌법적 보호, 양심 에 반하는 표현 행위 강제의 위헌성, 집회 및 시위의 자유 와 권리의 제한, 검열 개념의 규정과 검열 장치의 제거, 명 예의 보호와 언론보도의 자유 그리고 ‘PD수첩’ 사건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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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된 판례를 살펴보았다. 1장은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국가보안법의 규정 해 석 문제를 다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정 권력은 수 시로 국가안보를 해친다거나 적을 이롭게 한다는 죄목을 붙여 정치적 반대자들의 표현을 억압했다. 실제 이적행위 를 해 합당한 처벌을 받은 자들도 많지만 적지 않은 무고 한 시민들이 처벌 규정의 희생양이 돼 왔다. 국제사회로 부터 ‘사법살인’이라 불린 인혁당 사건을 비롯해 권위주의 정권 시절 유죄로 처리된 숱한 사건들이 재심절차에 들어 갔다. 그리고 대부분 무죄판결을 받고 있다. 사상과 양심 과 감정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국가질서’에 대한 도전으 로 간주된 시기에 헌법규범의 ‘표현의 자유’는 ‘자기 안에 갇힌’ 죽은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헌법의 시대가 열리고 그 헌법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새로 문을 열면서 ‘국가보안법’과 ‘표현의 자유’ 충돌에 대한 헌법재판이 개시되었다. 헌법재판소가 개소하자마자 시민들은 국가보안법의 일부 조항이 표현 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재로 달려왔다. ‘찬양’, ‘동조’, ‘고 무’, ‘이롭게’, ‘기타 방법’,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지령을 받은 자’ 등과 같은 국가보안법 조항 개념이 포괄 적이고 모호하고 불명확하므로 죄형법정주의를 위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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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의 관련 조항 행위가 두 가지 상황 즉 첫째,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둘 째,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 을 경우에만” 축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한정합헌’ 결정을 내렸다. 반면 헌법 소원 청구자나 위헌심판을 제청하는 피고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또 합헌 판단에 반대하는 재판관의 견해도 차이 가 있다. 법률이 금지하고 있는 해악을 초래할 “명백하고 현실적인 위험”이 입증될 때에 한해 유죄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상적․양심적․학술적․예술적 가치와 행복 한 존재로서의 시민의 존엄을 고려할 때 ‘명백한 위험’보 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실질적으로 국가안 보의 법익을 보장하는 한편 표현의 자유가 가지는 가치를 극대화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본다. 2장은 ‘음란물’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2008년 대법원 판결을 다루고 있다. 미국의 연방대법원과 일본의 최고재 판소가 한꺼번에 담당하는 일을 우리나라는 대법원과 헌 법재판소가 각각 역할을 나누어 처리하고 있다. 그동안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적지 않게 다투고 대립해 왔다. 동일한 사안에 대한 관점의 차이도 있지만 헌법재판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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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 취지가 대법원에 반영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 되기도 한다. ‘음란물’ 판단 기준도 그중 하나다. 대법원은 그동안 일관되게 성욕을 자극해 성적인 흥분을 유발하고 성적 수치심을 해치는 것을 음란물 판단의 기준으로 채택 해 왔다. 그러다가 2008년 3월 13일 선고한 ‘2006도3558 판결’에서 ‘전적으로 또는 지배적으로’ 성적인 흥미에만 호소하고 ‘하등의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을 음란 물로 규정했다. 대법원이 새로 제시한 음란물 판단은 헌 법재판소가 1998년 4월 30일 선고한 ‘95헌가16 결정’의 취 지와 같다. 즉, 헌법재판소는 ‘오로지’ 성적인 흥미에만 호 소할 뿐 ‘전체적’으로 보아 ‘하등의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을 음란물로 정의한 바 있다. 음란 개념에 대한 헌 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견해가 하나로 모아지기까지 10년 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 기관의 음란 개 념이 ‘너무’ 빨랐거나 혹은 ‘너무’ 느렸다고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두 기관의 개념 간극이 있었던 시기에 헌법적으 로 음란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표현 행위자들, 혹은 표현물 의 소지·배포자들이 수없이 잡혀가고 벌금을 물고 징역 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처벌받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헌법적 무죄라고 확신케 하지나 말든지 아니면 좀 더 빠르 게 실정법상 무죄라고 판결해 신체적·경제적 자유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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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하게 해주었어야 옳았다. 3장은 일명 ‘미네르바’ 사건과 관련된 헌법재판소의 전 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에 대한 위헌 결정을 다루고 있다. 헌재는 ‘공익’이라는 개념이 ‘국가의 안전보장·질 서유지’, ‘공중도덕·사회윤리’와 동어반복일 정도로 의미 가 추상적이고 불명확하다면서 확정될 수 없는 막연한 ‘공 익’ 개념을 내세워 표현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명확성 의 원칙에 반한다고 결론내렸다. 보충의견은 ‘허위의 통 신’ 개념도 불명확해 죄형 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위반 된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설령 ‘허위의 통신’을 ‘허위 의 명의’ 도용이 아니라 ‘허위사실 표현’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때 ‘허위사실의 표현’ 역시 헌법 제21조의 언 론출판의 보호 영역으로 보호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표현 이 어떤 내용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애시당초 표현 자유의 보호 영역에서 배제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미네르바를 감옥에 가두려고 시도한 정부 당국과 학벌 과 직위를 낮춰 공격하며 그를 사이비 가짜로 매도하려 애 쓴 주류 언론 매체들이 잊은 것이 있다. 미네르바 박 씨의 부각과 대중적 수용 현상은 현실에서 정부의 오락가락한 경제정책이 신뢰를 잃은데다 오프라인 언론사들이 편향 적인 뉴스 정보를 전달한 데 따른 여파라는 점이다. 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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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바 사건은 온라인에서나마 제대로 된 경제정책의 방향 을 구하고 공정한 정보를 획득하려고 애쓴 결과물 즉 ‘미 네르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헌법 재판소의 위 결정은 정부정책이 신뢰를 잃고 언론이 공정 성을 준수하지 않을 때 ‘미네르바 현상’은 언제든지 재현 될 수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4장은 상업광고라고 하더라도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 자유의 보호를 받는다는 헌재 결정을 다루고 있다. 헌법 재판소는 1998년 2월 27일 96헌바2 결정을 통해 광고도 헌법 제21조 언론출판의 자유에 의한 보호의 대상이 된다 고 선고했다. 이 결정 이후 헌재는 여러 차례 광고가 표현 자유의 보호 영역인 것을 확인했다. 광고물도 사상과 지 식, 정보 등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하는 것이라고 규정했 다. 그리고 광고가 표현 자유의 보호를 받는 이상 헌법 제 37조 제2항의 규정, 즉 국가안전보장과 질서유지, 공공복 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고 해도 허가나 검열을 수단으로 해서 광고를 제한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물론 헌재는 상업광고가 사상이나 지식에 관한 정치적·시민적 표현 행위와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련의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상업광고는 표현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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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광고를 무기삼아 언론의 뉴 스와 프로그램 내용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비판이 무 성하다. 광고주 기업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특정 신문사에게 광고 집행을 뚝 끊어버린 광고주 들이 한둘이 아니다. 무한질주하는 광고 바퀴에 소비자와 독자와 시청자가 압사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눈을 밝히고 귀를 열어서 무한 경계를 해야 할 세상이다. 사과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법의 명령으로 사과를 강 제할 수 있는가? 1991년 4월 1일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 는 사죄광고의 강제는 양심도 아닌 것이 양심인 것처럼 표 현되는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라고 판단했다. 사과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법원이 사과를 강제하는 것은 겉과 속 이 다른 이중인격 형성을 강요하는 것이며 침묵의 자유의 파생인 양심에 반하는 행위의 강제금지에 저촉된다고 보 았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흐른 2012년 8월 23일 헌재는 방송법상 제재조치 중의 하나인 ‘시청자에 대한 사과’ 명 령 역시 법인의 사회적 신용과 명예를 훼손하는 등 인격권 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5장은 양심에 반하는 사과의 강제를 위헌 판단한 헌재의 89헌마160 결정을 다 루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시민들이 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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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할 표현 자유의 확장에 상당부분 기여했다. 물론 헌재 의 ‘기여’라고 해봤자 사실은 주어진 소임 중의 일부를 수 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헌법기관이 스스로 해 야 할 일을 곡진하게 해내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의 삶엔 온 기가 넘친다. 헌재의 그러한 기여 중의 하나가 바로 행정 기관들이 제멋대로 자행해 오던 검열 장치를 제거한 것이 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공연윤리위원회가 수행하던 영 화의 사전심의를 헌법이 금지한 ‘검열’에 해당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검열의 헌법적 심사 기준도 명료하게 제 시되었다. 이후 음반과 비디오, 게임을 비롯해 2008년에 는 드디어 방송광고에 대한 사전심의장치까지 검열절차 로 규정됐다. 6장은 영화에 대한 사전심의를 위헌 결정한 헌재 결정을 다뤘다. 최근 몇 년 동안 전개된 여러 언론사 들의 ‘강제 없는 자발적 심의’ 시스템의 작동 현장은 호랑이 물러가자 검열의 칼춤을 추는 여우를 떠올리게 한다. 7장은 야간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조항의 위헌성을 다 뤘다. 원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집회의 권리를 보 장하는 한편 공공의 안녕질서를 조화롭게 하겠다는 입법 목적을 가졌지만 오히려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억제하는 데 더 많이 활용돼 왔다. 해가 진 뒤에도 시민들의 일상은 왕성하게 전개되는데 반해 동법은 야간에 바깥에서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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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금지해 왔다. 집회를 금지당한 시민들은 문화 제란 이름을 내걸고 함께 모여서 평화롭게 의견을 나눴다. 공권력은 집시법 위반의 죄목을 걸어 시민들을 처벌하려 들었다. 헌재 결정 2008헌가25는 동법 관련 규정이 위헌 적이라며 이를 치유할 것을 요구했다. 특정기업과 특정기관에 불이익한 집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허용되지 아니하자 시민들은 ‘아주 기발한’ 시위 방법을 창안한다. 이른바 ‘1인 시위’다. 순수하게 혼자서 하는 ‘나홀로 1인 시위’도 많지만 현실에선 한 사람 이상이 도움을 주고받거나 릴레이로 시위를 하거나 여러 사람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줄을 서서 시위를 하는 양상이 자 주 벌어진다.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은 ‘다수의 1인 시위자들’로 ‘시끌벅적’ 하다. 집시법의 규율 대상이 최 소한 2명 이상의 ‘다수’이기 때문에 생겨난 ‘저항적 문화’다. 헌재 결정 2008헌가25은 9명에 불과한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이 동일한 사안에 대해 위헌, 합헌 등 매우 ‘다양’하 게 전개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정작 긴요한 것은 헌법 이 정한 시민들의 기본권이 현실의 일상에서 물 흐르듯이 실현되는 일이다. 정치적 소수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표 현할 수 있도록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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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훼손’은 우리나라 법령 체계에서 매우 곤혹스러운 주제다. 우선 헌법을 비롯한 여러 법령에 ‘명예훼손’에 대 한 처벌 및 구제 조항을 두고 있는데도 명예훼손 시비는 줄어들지 않는다. 더불어 법령에 정한 명예를 두텁게 보 호하게 되면 헌법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그리고 국민들 의 알권리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국민 들의 알권리는 대개 ‘매스 미디어’에 의해 실행되는 측면 이 강하기 때문에 명예의 보호를 이유로 알권리를 제한하 게 되면 당장 매스 미디어의 취재보도 활동이 움츠러들게 된다. 언론의 자기 검열 효과도 발생한다. 촌각을 다투는 언론의 취재보도 특성상 취재할 당시에는 ‘진실한 것’으로 확신했지만 보도·방송 이후에 결과적으로 진실하지 않 은 것으로 판명이 날 때 언론의 자유와 명예보호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른바 ‘진실오신의 상당성 법리’는 이 쟁점에 대한 고 민의 결과물이다. 1988년 10월 11일 선고한 대법원의 85 다카29판결에 처음 제시된 이 법리에 따르면 타인의 명예 를 훼손한 언론보도라도 그 사실이 공공성이 있고 진실하 거나 진실하다고 믿을 만한 상당성이 있을 때 민형사적 책 임을 면할 수 있다. 법원은 언론 매체에 적시된 사실의 내 용, 진실이라고 믿은 근거나 자료의 확실성과 신빙성,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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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확인의 용이성, 보도로 인한 피해자의 피해 정도 등의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언론인이 보도 내용의 진위 여부 를 확인하기 위해 적절하고 충분한 조사를 다했는지, 그 진실성이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자료나 근거에 의해 뒷 받침되는지 등을 기준으로 상당성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제 8장은 ‘진실오신의 상당성’ 법리의 시원이 된 해당 판결 을 다뤘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 경영진이나 소유주의 이권을 해 결하거나 언론사에 종사하는 자들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보도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힘없는 사 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보통 사람들의 사생활을 관음증 의 대상으로 삼는 취재보도 활동까지 언론의 자유라는 이 름으로 보호되어야 하는가. 공직자를 비롯한 소위 공적인 물들의 명예와 사생활도 소중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 나 공직자와 같은 공적인 인물들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자원을 배분하는데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다가 언론의 감시와 견제를 받겠다는 규범을 수용한 사람 들이다. 그렇다면 공적인 사람들과 일반의 보통사람, 공적 인 사안과 사적인 사안들의 보도로 인한 언론의 명예훼손 책임 문제를 다툴 때 동일한 잣대로 뭉뚱그려 재단해 버리 기보다는 각각의 특성을 감안해서 판단을 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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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은 대법원이 2002년 1월 22일 선고한 ‘2000다37524, 37531’판결을 다뤘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헌법재판소가 1999년 6월 24일 선고한 97헌마265 결정의 취지, 즉, ‘공 적 인물·공적 사안’ 의 법리를 정면으로 수용한 것이다. 공적 존재에 대한 공적 관심사안과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안 간에는 심사기준에 차이를 두어야 하는데 사적인 사 안의 경우 명예보호가 우선할 수 있으나 공공적·사회적 인 사안의 경우에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 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진실오신의 상당성’과 ‘공적 인물·공적 사안’의 법리 는 언론 보도로 인한 언론사·언론인의 명예훼손 책임을 완화하는데 획기적으로 기여했으나 공직자들의 언론소송 은 여전히 빗발치고 있다. 물론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언 론의 신중하지 못한 보도로 인해 빚어진 언론소송 사례도 결코 적지 않다. 또한 언론의 명예훼손 보도로 인한 피해 구제액의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다. 공직자·공인·공적 인물·유명인들이 제기한 최근 언론소송 중에서 가장 주 목할 만한 사례를 제10장에서 다뤘다. 한국 언론사의 ‘자율규제’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 한국의 명예훼손에 관한 법령 시스 템들이 공직자와 공인·공적 인물들에 의해 얼마나 ‘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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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활용되고 있는지, 한국의 언론사들이 ‘언론의 자유 와 책임’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성찰할 시간 이 필요하다. 표현의 자유를 확장하는데 기여해 왔다고 여겨지는 판례들을 되짚어 보는 것도 그 성찰의 한 부분이 라 여긴다. 특히 제10장에서 소개한 ‘PD수첩’ 관련 판결의 의미는 더욱 각별할 것이다. 한국의 대법원은 2002년 1월 이후 줄곧 언론보도로 인 해 정책결정이나 업무수행에 관여한 공직자의 사회적 평 가가 다소 저하될 수 있더라도 보도내용이 공직자 개인에 대해서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 당성을 잃은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 한 그 보도로 인해 곧바 로 공직자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된다고 할 수 없다는 입 장을 지켜왔다. 또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음란 표현과 허위 표현조차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바탕이라고 밝혀 왔으 며 행정기관에 의한 검열 장치들을 위헌성을 이유로 제거 해 왔다. 야간에 평화롭게 집회할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헌 법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양심에 반하는 표 현을 언론사에게 강제해서도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 다. 한국의 언론과 공직자·공인·공적 인물·유명인, 그 리고, 언론학계는 헌법상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언론 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얼마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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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사건의 판결

01

명백한 위험

02

음란 표현

11

03

허위 표현

21

04

광고 표현 보호

05

양심의 보호

06

영화 검열 폐지

07

야간 집회의 자유

08

진실오신 상당성

09

공적인물·공적사안

10

<PD수첩> 무죄

1

31 41 51 61 73

95

83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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