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의문화적기원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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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Origines Culturell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


제1장 계몽사상과 혁명, 혁명과 계몽사상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을 고찰하자면 이 분야의 고전인 다니엘 모르네의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 1715∼1787≫ 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4) 사실상 이 책은 우리가 작업해야 할

4) Daniel Mornet, ≪Les Origines intellectuell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1715∼1787≫(Paris: Armand Colin, 1933, 1967). 모르네는 소르본대 학의 문학부 교수인 랑송의 신임받는 제자로서, 교수 경력 절정기에 이 책을 썼다. 1차 세계대전 전에 다음 저작들을 출간했다. ≪Le Sentiment de la nature en France. De Jean-Jacques Rousseau à Bernardin de Saint-Pierre≫(Paris: Hachette, 1907), <Les enseignements des bibliothèques privées(1750∼1780)>, ≪Revue d'Histoire Littéraire de la France≫(July-September 1910), 449∼496쪽, ≪Les Sciences de la nature en France au XVIIIe siècle≫(Paris: Armand Colin, 1911). 모르네가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에서 강하게 주 장했던 세 가지 필요조건−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위대한 저자와 텍 스트에 국한하지 않고 한 시대의 문학작품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 텍스트뿐만 아니라 문학협회, 작품의 유통, (모르네로 하여금 1910년 논문에서 도서목록에 선구자적인 관심을 갖도록 했던) 독자 를 조사하라는 것, 확산의 정도를 알기 위한 숫자와 퍼센티지 이용 (“숫자만큼 중요한 것은 비율이다.” 같은 책, 457쪽)−은 그의 접근 방식의 기초가 되었고, 미학적인 경향과 비역사적인 문학비평으로 부터 거리를 두게 했다. 말기 작품들, 예를 들면 ≪Histoire de la littérature française classique, 1600∼1700, ses caractères véretables 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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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식을 필연적으로 제시해 준다. 18세기의 새로운 사상 (idées)의 발전과 혁명적 사건의 발발 사이의 명백한 관계에 대한 추론은 이 문제의식을 토대로 한다. 모르네는 이른바 계몽사상과 동일시될 수 있는−그가 “일반여론(opinion publique générale)”이라고 부른−독창적인 사상이 침투하 는 데는 세 가지 법칙이 있다고 보았다. 첫째, 계몽사상은 사 회계서제의 위에서 아래로, 다시 말해 “매우 계몽된 계층으 로부터 부르주아지를 거쳐 소부르주아지, 그리고 민중으 로”5) 전달되었다. 둘째, 중앙(파리)에서 주변부(지방)로 전 파되었다. 셋째, 계몽사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가속 화되었는데, 1750년대 이전에는 소수에게만 침투했고, 결정 적인 갈등과 동원의 18세기 중반을 거쳐 1770년 이후 새로 운 신념이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에서 모르네는 이 책

ses aspects inconnus≫(Paris: Armand Colin, 1940)에서 모르네는 랑 송의 관점을 따르지 않게 되는데, 이로써 뤼시앵 페브르의 논문 <De Lanson à Daniel Mornet. Un renoncement?>, ≪Annales d'Histoire Sociale≫ 3[1941, 이후 ≪Combats pour l'histoire≫(Paris: Armand Colin, 1953)라는 페브르의 에세이 모음집에 다시 실림]에서 혹독한 비 판을 받았다. 5) Mornet, ≪Les Origines intellectuell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1715 ∼1787≫,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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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에 흐르는 명제,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사상이 프랑스 혁명을 결정지었다6)”는 명제를 도출했다. 비록 정치적 원인 의 중요성과 우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모르네는 비판 적인 동시에 개혁적인 계몽사상을 군주정의 궁극적인 위기 가 혁명으로 전환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으로 간주했다. “정 치적 원인이 혁명을 결정지었다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한 것 이 많다. 혁명이라는 결과를 산출하고 조직해 낸 것은 지성 이었다.”7) 모르네는 매우 신중하고 회의적이었지만[예를 들어 “한 편으로는(pour une part)”, “아마도(sans doute)”, “적어도 (du moins)” 등의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계몽사상과 혁명 의 관계를 필요한 것으로 인식했다. 물론 혁명의 모든 원인 이 계몽철학(Philosophie)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지성 (intelligence)”에 의거해 “대중의 생각(pensée publique)”을 변형시키지 않았다면, 혁명이라는 사건은 적절한 순간에 진 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난 50년 동안 18세기 를 연구하는 데서, 문화사회학과 마찬가지로 지성사를 사로 잡아 온 작업가설이다.

6) 같은 책, 3쪽. 7) 같은 책, 4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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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의 망령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체적으로 잡다하고 산 발적으로 흩어진 사상과 사실 덩어리를 한 사건의 원인이나 기원으로 구성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원을 찾는 일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 하지 않다. 한편으로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역사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원형이라고 생각되는 사건들만을 선별하는 카드놀이(tri)와 같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원을 찾는 작업은 서로 상이하고, 성격상 이질적이고, 그 성과가 지속적이지 못한 사상과 행위들에− 가상의 ‘기원’으로서−통일성을 부여하는 회고적 재구성 작 업을 요구한다. 푸코는 니체에 의존해서 이제껏 인식되어 온 기원의 개 념을 통렬하게 비판했다.8) 역사 과정을 절대적인 직선적 계

8) Michel Foucault,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Hommage à Jean Hyppolite≫(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71),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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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 전제하고, 기원에 대한 끝없는 탐색을 정당화하고, 사건 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한 사건들의 독창성을 완전히 포 기하는 식의 작업은, 서로 다른 계열의 담론과 관행을 분리시 키는 돌발사태의 급격한 단절과 환원될 수 없는 부조화를 무 시하게 된다. 역사가 “기원의 망령(chimère de l'origine)”에 굴복할 때, 역사는 항상 분명한 인식 없이 여러 다양한 가정 들을 늘어놓으며 허풍을 떨게 된다. 역사의 매순간은, 각 사 건마다 매우 중요하고 유일한 이상으로 나타나는 동질적인 전체다. 역사의 미래는 필연적인 연속성으로 이루어진다. 역 사적 사실들은 막힘이 없는 흐름으로 전체가 서로 엮어져서, 하나의 사실이 다른 사실의 “원인(cause)”이라고 결정하게 한다. 푸코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고전적 개념들(전체성, 계 속성, 인과관계)이야말로 계보학적(généalogique) 혹은 고고 학적(archéologique) 분석에서−갈등과 단절들을 적절히 설 명하기 위해서−당연히 회피해야 할 개념들이다. 니체의 ‘유효한 역사(wirkliche Historie)’처럼, 이러한 분석은 “사건 의 발생과 지속적인 필요성 사이에 이루어진 정상적인 관계

∼172쪽, 영어판은 <Nietzsche, Genealogy, History>,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Selected Essays and Interviews≫(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77), 139∼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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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역전을 시도한다. 지금까지 신학적인 또는 합리주의적 인 역사 전통은 단일한 사건을 이상적인 연속성 안에, 다시 말해 목적론적인 움직임이나 자연적인 연쇄 과정 안에 용 해시키고자 했다. ‘유효한 역사’는 사건을 가장 독특한 성격 을 가지며 첨예한 표상을 갖는 것으로만 취급해 왔다”.9) 만 약 역사가 기원의 탐구로부터 “불연속의 조직적인 이용 (mise en jeu systèmatique du discontinu)”10)으로 바뀐다면,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은 그만큼 타당성을 상 실하게 된다. 더구나 기원이라는 개념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한다. 오 직 강요된 종말인 혁명으로부터 18세기를 이해하도록 만들 며 이러한 필연적 결말에 이르게 하는 것, 다시 말해 계몽사 상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목적론적 해석을 제안하는 것은 위 험하다. 바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사건이 완성되었을 때, 그리고 우리가 과거를 사실상 반드시 그 미래가 되지 않

9) Foucault,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161쪽, 영어판은 154쪽. 10) Foucault, <réponse au Cercle d'Epistémologie>, ≪Cahiers pour l'Analyse 9, Généalogie des Sciences≫(Eté 1968), 9∼40쪽, 인용문 은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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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도 있었던 도착 시점에서 바라볼 때, 사건의 전조들을 읽어 내도록 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회고적인 움직임 (mouvement à repousse-poil)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유한 회 고적인 환상11)”이다. 계몽사상이 혁명을 일으켰다고 확신하 는 고전적 해석들은 논리의 순서를 뒤집은 것은 아닐까? 오 히려 혁명이−과거 행태와의 단절을 준비하면서 서로의 차 이점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룬−일단의 텍스트와 작가들에 서 자신의 정당성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계몽사상을 발명해 냈 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12)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 만, 볼테르와 루소, 마블리(Mably)와 뷔퐁(Buffon), 엘베시우 스(Helvétius)와 레이날(Raynal)을 판테온에 불러 모음으로

11) Jean Marie Goulemot, <Pouvoires et savoirs provinciaux au XVIIIe siècie>, ≪Critique≫ 397∼398(1980), 603∼613쪽. 12) Thomas Schleich, ≪Aufklärung und Revolution. Die Wirkungsgeschichte Gabriel Bonnot de Mablys in Frankreich(1740∼1914)≫ (Stuttgart: Klett-Cotta, 1981), 210쪽, Hans Ulrich Gumbrecht and Rolf

Reichardt,

<Philosophe,

Philosophie>,

≪Handbuch

politisch-sozialer Grundbegriffe in Frankreich 1680∼1820≫, 10 vols., ed. Rolf Reichardt and Eberhard Schmitt(Munich: R. Oldenbourg Verlag, 1985∼), 3권 7∼88쪽. 또한 다음을 보라. <recent Western German Work on the French Revolution>, ≪Journal of Modern History≫ 59(December 1987), 737∼7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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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그리고 이 계몽철학자들에게 매우 급진적인 비판가의 기 능을 부여함으로써, 혁명가들은 무엇보다도 정당화와 부자 관계의 탐구 과정(recherche de paternité)이었던 역사의 연 속성을 확립했다. 혁명의 기원을 당대의 사상에서 찾는 것− 바로 모르네의 작업−은 혁명 담당자들의 행위를 무의식중 에 반복하는 것이며,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 선언된 사상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지적 기원’의 범주를 ‘문화적 기원’의 범주로 대체한다고 해서,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을까? 이러한 대체는 이해의 가 능성을 한층 높일 것이 분명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변화는 문화적 제도가 제도권 밖에서 만들어진 사상들을 단순히 받 아들이는 집합소(réceptacle)가 아님을 시사한다. 따라서 문 화적 기원은−모르네식 분석에서는 오직 이데올로기적 측 면에서만 고려했던−사회유대성(sociabilité)의 형태나 의사 소통의 매체 또는 교육 과정에서 적절한 원동력을 찾아내도 록 한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사회학적 차원의 접근은 다양 한 관행들−명확하고 정교화된 사상들뿐만 아니라 즉시적 이고 혼합된 표상들, 자발적이고 논리적인 참여, 기계적이고 강요된 종속−을 고려할 것을 제의한다. 따라서 혁명적 사 건들은 퀴네(Quinet)가 기질(tempérament)이라고 명명한 것의 장기지속적 변화 속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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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성격(personnalités)의 구조 혹은 (엘리아스의 표현에 따르 면) 심리적 구조의 다양성13)에 대해 깊이 사색하면서,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의 융통성 없는 기질과 18세기 혁명가들의 유 약한 기질을 비교했다.14) 그러나 이러한 확대가 과연 목적론 적 독서 행위의 함정을 막아 내기에 충분할까? ‘실제로 일어 난 것’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가정은 역사학의 인식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회고적인 환상이다. 이러한 가정은 과 거를 하나의 가능성의 영역, 다시 말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사후에는 그 과거 사실에 대한 유일한 미래로 인식되는 그러 한 영역으로 본다. 프랑수아 퓌레는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13) Norvert Elias, ≪Ü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 Soziogenetische und psychogenetische Untersuchungen≫(1939, Frankfurt-am-Main: Suhrkamp, 1969). 프랑스어판은 ≪La Civilisation des moeurs≫ (Paris: Calmann-Lévy, 1973)와 ≪La Dynmique de l'Occident≫ (Paris: Calmann-Lévy, 1975), 영어판은 ≪The civilizing Process: Sociogenetic and Psychogenetic Investigations≫(Oxford: Basil Blackwell, 1978, 1982, New York: Pantheon Books, 1982). 14) Edgar Quinet, ≪La Révolution≫(Paris: A. Lacroix, Verboeckhoven et cie, 1865; reprint, Paris: Belin, Littérature politique, 1987), <Timidité d'esprit des hommes de la Révolution>, 185∼190쪽, <Du Tempérament des hommes de la Révolution et de celui des hommes des révolutions religieuses>, 513∼5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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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식은 어떤 기원들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꼭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는 귀납적인 재구성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보 초를 세워 경계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5) 그러나 위험은 피할 수 있는가? 반사실적(反事實的) 역 사(counter-factual history)에 고무되어, 마치 1780년대가 어 떻게 끝이 났는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혁명을 괄호 속에 넣고서 마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여기에 내기를 한다면, 돈을 좀 벌 수 있겠다. 그러 나 이 경우에 어떠한 질문들과 지적 원리들을 가지고, 18세 기 프랑스 문화라고 부르는 것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꾸미는 수많은 담론들과 관행들을 조직해 낼 수 있을까? 모든 목적 론적 시도를 완전히 차단하고 나면, 역사는 또 다른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역사란 적절한 강령을 제안하는 가설들을 삭제함에 따라, 서로 연결되지 않고 일관성이 결여된 사실들 의 끝없는 목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좋든 싫든, 모 르네(그리고 그 전에는 혁명가들 자신)가 추적했던 공간 안

15) François Furet, ≪Penser la Re'volution francaise≫(Paris: Gallimard, 1978), 35쪽. ≪Interpreting the French Revolution≫(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aris: Editions de la Maison des sciences de l'homme, 1981), 19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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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작업해야 한다. 결국 사학사의 담론이 만들어 낸 담론 밖에서는 역사의 문제에 접근하는 가능한 방법은 없다는 것 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에 서 제기된 문제−계몽사상이 형성하고 배포한 사상들과 혁 명기 사건들의 관계의 문제−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한편 바 꾸어야 할 문제이며, 또한 유산으로 물려받는 한편 회의해 보아야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텐: 고전적 이성에서 혁명정신까지 모르네가 선배 역사가들과 맺은 관계도 우리가 모르네와 맺 는 관계와 똑같았다. 모르네의 저서에는 근본적인 참고문헌 이 둘 있다. 하나는 모르네가 반복하고 논쟁하고 반박한, 1876년에 출간된 히폴리트 텐(Hippolyte Taine)의 ≪앙시앵 레짐≫이다. 다른 하나는 모르네가 잠시 언급한, 1856년에 출간된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이다. 여기서 잠시 혁명사 연구에서 가 장 중심적인 두 저서에 대해 생각해 보자. 텐에 대해서 모르 네는 두 가지 비판을 가했다. 먼저 그는 텐이 너무나 유명하 고 양적으로 상당히 빈약하고 더욱이 잘못 해석한 텍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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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근거해서, “혁명정신(esprit révolutionnaire)”이 일찍이 나타났다고 일반화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모르네에게 새로운 사상의 발전을 재구성하는 것이란, 문학 이나 철학 분야 밖에서 얻는 개인적 회고록이나 인쇄된 신문 들, 강좌들, 학술원과 프리메이슨 지부의 토론이나 진정서 등 가능한 한 많은 수집 사료들을 통해 새로운 사상이 어떻 게 침투했는지를 측량하는 것을 의미했다. 확실히 모르네의 저술을 보면, 연구 결과는 종종 서투르거나 미완성이고, 양 적인 분석보다는 나열식이며, 파편적이며 미완의 증거들을 용납했다. 그러나 1900년대에 랑송(Lanson)이 만들어 낸 계 획에 전반적으로 충실하면서,16) 모르네가 표출하고자 한 바 는 향후 20년 혹은 25년 동안 더욱 방대한 사료와 계열적 분 석(les traitements sériels)을 마련하고, 보통 사람들에게 관심 을 불러일으켜 프랑스 문화사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새 로운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텐에 대한 둘째 비판은 다음과 같다. 텐은 ‘혁명정신’이

16) Gustave Lanson, <Programme d'études sur l'histoire provinciale de la vie littéraire en France>, ≪Revue d'Histoire Moderne et Contemporaine≫(1903), 445∼453쪽, <L'Histoire littéraire et la sociologie>,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1904), 621 ∼6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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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전 사회에서 이미 완전히 형성되어 있었으며, 계몽철 학자들에 의해 더욱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인 혁명의 음모설, 다시 말해 미리 계 획된 혁명이라는 이론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모르네는 이 러한 생각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분명히 혁명을 원했다. 그들은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을 완 수했으며, 혁명을 지도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그와 비슷한 일은 전혀 없었다. 혁명의 기원들과 혁명의 역사는 전혀 별 개의 문제다.”17) 이러한 지적은 매우 귀중한 것이며, 다양한 시각들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장기지속적 과정에서 혁명을 일으킨 원인들의 촘촘한 결합의 결과로 혁명을 바라 보는 시각,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을 가능하게 한 조건으로 환원하지 않고 혁명을 그 자체의 원동력으로 새로운 정치· 사회 체제(configuration)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는 시각이 다.18) 혁명이 지적이건 문화적이건 혹은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혁명 자체의 역사는 여기에 제한될 수

17) Mornet, ≪Les Origines intellectuell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1715∼1787≫, 471쪽. 18) Furet, ≪Penser la Revolution≫, 38∼39쪽, 영어판은 ≪Interpreting the French Revolution≫, 1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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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르네의 비판은 텐의 저서가 갖고 있는 역설적인 독창성−‘혁명정신’을 프랑스 고전주의까지 소급 해서 올라간 계보학−을 간과하고 있다. 1874년에 부미 (Boutmy)에게 쓴 편지에서, 텐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밝혔다.

이 책은 부알로(Boileau), 데카르트, 르메스트르 드 사시 (Lemaistre de Sacy), 코르네유, 라신, 플레시에(Fléchier) 등이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밝 히는 것이다. 그들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군주정의 신조 와 종교적 교의가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기 때문이 다. 이러한 교의가 만용으로 낡아지고, 뉴턴의 새로운 과 학적 세계관으로 인해 뒤집어진 후에는, 고전정신은 운 명적으로 추상적인 자연인과 사회계약이론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19)

19) Hippolyte Taine, ≪Les Origines de la France contemporaine≫ (1876; Paris: Robert Laffont, 1986), 1권, L'Ancien Régime. 1874년 7 월 31일 부미에게 보낸 편지는 프랑수아 레제(François Léger)가 <Taine et ≪les Origines de la France contemporaine≫>, 서론에 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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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뿌리는 계몽사상을 넘어서 바로 고전주의의 이론 적인 이성(raison raisonnante)의 승리에 있었다. 복잡하고도 풍부한 현실을 추상적 세계로 대체하고, 자연과 역사 속에 존재하는 실제적 개인(individu réel)을 보편적 인간(homme en général)으로 대체함으로써, 고전정신은 계몽사상에 개념 틀을 제공했으며 동시에 군주제의 관습적·역사적 기반들 을 전복시켰다. 고전주의 중심에 있는 현실의 부정은, 혁명가들이 원했 던 다른 문화의 뿌리 뽑기(déracinement acculturant)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국가가 대표하고 해석하는 이성의 이름으로, 혁명가들은 이성, 오직 이성에만 합치하게, 모든 관습(usage), 축제, 의식, 의복, 시대, 달력, 무게, 계절·달·주일·날의 이 름들, 장소와 기념물, 성명과 세례명, 공손한 언어, 연설 의 어조, 인사하고 말하고 쓰는 방식 등을 해체하고 다시 만들고자 했다. 예전 청교도들이나 퀘이커교도들처럼 내 적 존재까지도 완전히 새로워진 프랑스인은 이러한 방식 으로 자신의 행위와 외모의 가장 사소한 것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새롭게 만든 만능의 원리와 불변의 논리가 지 배한다는 것을 과시했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 이성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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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막 작품이며 완벽한 승리가 될 것이다.20)

이 글을 필연적이고 파괴적이며 증오할 만한 결과라는 관점에서, 국민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하는 반혁명적 사상의 만용 혹은 현기증(vertige)으로만 간주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거나 혹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텐은 혁명정신을 개혁적인 계몽사상뿐만 아니라 국왕과 하나님의 권위를 가 장 존중했던 전통과 관련지었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의 영 웅들을 찾는 과정에서, 단지 데카르트(판테온으로 시신을 옮기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통과되지는 않았다)만을 계몽사 상가들의 옆자리에 위치시킨 혁명의 설계도(topos)를 변경 했다. 텐은 권리를 인정받고 찬양받은 일련의 사상적 계보 보다는, 행위자의 의식에까지 노출되지는 않으며 선포된 이 데올로기 아래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 유사성을 결합시킨 이 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측면에서 텐은 모르네 이 전이나 이후에 고려되었던 시각보다 좀 더 장기적인 시각에 서, 혁명이 전개된 문화적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 었다. 더욱이 고전주의를 현실의 부정과 사회세계(monde

20) 같은 책, 187쪽. 영어판 ≪The Ancient Regime≫(New York: H. Holt, 1896), 191, 250∼251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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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의 부정으로 특징지음으로써, 텐은 이러한 ‘탈현실화 (déréalisation)’를 17∼18세기 프랑스 문학의 독특한 특징으 로 분류해서 후대를 위한 분석의 기본 틀을 제공했다. “프 랑스의 고전적 비극은 일상생활과 비교해 볼 때, 비극의 소 원함이나 (현실과) 문체의 분리 정도가 지나치다. 유럽 문 학은 적어도 프랑스 문학만큼 급진적이지는 않다.”21) 에리 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의 주장은 텐을 연상케 한 다. 아우어바흐에 따르면 (계몽주의 문학을 지배하고 비극 이란 단지 예시에 불과한) 모든 고전적 미학은 구체적 현실, 실제 정치, 개별 존재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신비한 인 간성으로 대체했다. 텐보다 20년 전에, 토크빌은 좀 더 짧은 기간을 고려하면서 텐처럼 “이성의 추상적 세계(monde abstrait)”와 “풍부하고 복잡한 현실세계(le plénitude et la complexité des choses réelles)” 사이의 대립을 지적했지만, “문필 정치(politique littéraire)”와 “공사(公事)의 경험(usage

21) Erich Auerbach, ≪Mimesis. Dargestelte Wirklicht in der abendlãrdischen literatur≫(Bern: Francke AG Verlag, 1946), 15장. 프랑스 어판, ≪Mimésis. La représentation de la réalité de la littérature occidentale≫(Paris: Gallimard, 1968), 365∼394쪽. 인용문은 388쪽, 영어판은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3). 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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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 affaires)”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대립 가설을 상정했다.

토크빌: 문필 정치와 공사 경험의 대립 토크빌은 혁명이 어떻게 매우 긴 기간 동안의 진화의 결과이 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급격한 단절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 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대혁명은 결코 우연한 돌발 사건이 아니었다. 대혁명이 불시에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랫 동안 계속되어 온 작업의 완성이었으며 적어도 열 세대 에 걸친 사람들의 노고로 이루어진 작업의 갑작스럽고도 격렬한 결말이었다. 대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낡은 사회 구조는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을 뿐 어느 곳에서나 붕괴되었을 것이다. 단지 차이라고는 한꺼번에 붕괴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씩 와해되었을 것이라는 점뿐이다. 대혁명은 스스로 조금씩 마무리되어 갈 것을 폭발적이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통해 어떤 중간 과정도 경고도 거리 낌도 없이 한순간에 완성해 버린 것이다. 혁명이 이룩한 업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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