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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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ic Foundations of Quantum Mechanics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


머리말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은 현대물리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두 이론이다. 상대성 이론은 전체적으로 볼 때 오직 한 사람 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뛰어난 업적에 특수상대성 이론의 기초에 매우 근접했던 핸드릭 안톤 로렌츠(Hendrik Anton Lorentz)나 상대성 이론의 기하학적 형식을 결정한 헤르만 민코프스키 (Herman Minkowski)의 공헌이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 지만 양자 이론의 경우는 다르다. 양자 이론은 여러 물리학 자들의 협력을 통해서 발전했으며, 물리학자들 각각은 이 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데 기여했고, 자신들의 작업 속에서 다른 물리학자들의 성과를 사용했다. 이와 같은 협력 작업의 필요성은 양자 이론의 핵심 사안 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첫째, 양자 이론의 발전은 관 측 결과와 그 값의 정확도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 스펙트럼 선을 촬영하거나, 매우 독창적인 장치들을 사용해서 기본 입자들의 행태를 관찰했던 많은 실험물리학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양자 이론은 그 기초가 수립된 이후에도 지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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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이론체계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양자 이론의 기초는 그 논리적 형식에서 상대성 이론과는 매우 다르다. 양자 이론이 완성된 이후에도 그 기초를 통합하는 단일한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 이론의 기초는 여러 원리들 로 이루어져 있다. 이 원리들은 수학적 형식에서는 우아할 지 모르겠으나, 상대성 원리처럼 우리를 첫눈에 확신시키 는 설득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양자 이론의 기 초는 상대성 이론이 시간과 공간 개념에 대해 고전물리학을 비판하고 극복한 것보다 더 심한 정도로 고전물리학의 원리 들로부터 벗어나 있다. 양자 이론의 기초는 인과 법칙에서 확률 법칙으로 이행한 것뿐만 아니라, 관측되지 않은 대상 들의 존재 및 논리학의 원리들에 대한 기존의 철학적 관점 들에 수정이 필요함을 함축한다. 이는 인식론의 가장 근본 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양자물리학의 이론적 형식의 발전은 크게 네 단계로 구 분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Niels Bohr)와 관 계된다. 1900년에 플랑크가 양자의 개념을 도입했고, 아인 슈타인은 1905년에 이 개념을 선 방사(needle radiation)로 까지 확장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진보는 양자 개념을 원자 구조의 분석에 적용한 보어의 1913년 업적을 통해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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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으며, 그의 연구는 물리적 발견의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 다. 1925년부터 시작하는 둘째 단계에는 플랑크, 아인슈타 인, 보어로부터 물리학을 배웠고 선배 물리학자들이 멈추 었던 곳에서 연구를 시작했던 젊은 세대의 물리학자들이 등 장한다. 이 단계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물리학자들이 스 스로 정확히 어떤 작업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양자역학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는 입자들에 수반하는 파동 개념을 도입했으며, 에 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edinger)는 파동광학과의 수학 적 유비를 근거로 양자역학의 근본적인 미분방정식 두 개를 발견했다. 막스 보른(Max Born)·베르너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 파스쿠알 요르단(Pascual Jordan) 과, 이 집단과는 독립적으로 연구했던 폴 디랙(Paul Dirac) 은 그 어떤 파동 해석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렬역학 을 구성해 냈다. 이 시기에 물리학자들은 논리적 원리들보 다는 물리적 직감의 인도를 받으며 고도의 수학적 기법을 적용해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물리학자들은 모든 관 측 자료를 포괄할 수 있는 이론을 발견했으며, 이 작업은 매 우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1926년에는 새로운 양자 이론 의 수학적 형태가 명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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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이론의 셋째 단계는 둘째 단계 이후 곧바로 찾아왔 다. 이 단계에서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성과를 물리적 으로 해석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슈뢰딩거는 파동역학과 행 렬역학이 동일함을 보여 주었다. 보른은 파동의 확률 해석을 제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이론의 수학적 메커니즘이 측정을 통한 대상의 교란과 극복할 수 없는 예측의 불확실성 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셋째 단계에서 다시 등 장한 보어는, 양자 이론으로 자연을 기술할 경우 어쩔 수 없 는 모호함(ambiguity)이 발생함을 보여 주었으며, 보어는 이 를 그의 상보성 원리(complementary principle)로 공식화했 다. 양자 이론의 넷째 단계는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이 단 계에서는 전 단계에서 얻은 성과들을 꾸준히 확장하며 새 로운 실험 결과들에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확장과 더불어 양자 이론은 수학적으로 더 정교해지고 있다. 특히, 물리 학자들은 양자 이론이 상대성의 공준(公準)들과 부합하도 록 이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교화의 문제들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 면 우리의 탐구는 이 이론의 논리적 기초와 관련되기 때문 이다. 양자 이론의 셋째 단계인 물리적 해석의 시기에 양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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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논리적 형식이 갖는 혁명적인 성격이 드러났다. 양자 이론은 지식과 실재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과는 상반되는 개 념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인 지를 규명하는 작업, 즉 그 이론에 대한 철학적 해석으로 나 아가는 작업은 쉽지가 않았다. 양자역학에 대한 물리적 해 석을 근거로, 물리학자들은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 자역학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양자역학의 철학에서 어떤 학자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어 떤 학자는 그 뜻이 모호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세계의 상’이 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다른 학자는 관측 예측이 정확하 게 이루어졌을 경우 충족되는 ‘조작주의’를 언급했고, 심지 어 어떤 학자는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이 불필요하다며 해석 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이상과 같이 물리학자들에 의해 발 전된 양자역학의 철학은 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할 때 유용하게 사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물리학자 본인도 과연 자신의 연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 식적으로 돌이켜보고자 할 경우, 위와 같은 철학으로는 어 딘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 리학자는 자신이 수면이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고 있으며 언제라도 호수 아래로 가라앉아 버릴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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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양자역학의 기초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불편함 때문이다. 철학이란 물리적 결과를 구 성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며, 물리학자들이 그러한 물리적 결과를 발견하는 것을 방해하지도 말아야 함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거나 부당 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물리학에 대한 논리적 분석이 가 능하다고 믿는다. 물리학의 철학은 물리학 그 자체만큼이 나 간결하고 명료해야 한다. 물리학의 철학은 오늘날과 같 은 경험주의 시대에는 구식이 된 사변철학의 개념으로 도피 하지 말아야 하며, 해석의 논리에 관한 문제로부터 벗어나 기 위해 경험주의의 조작주의적 형식을 사용해서도 안 된 다. 위와 같은 점을 명심하면서, 필자는 이 책에서 형이상학 으로부터 자유롭고 양자역학적 진술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물리적 세계와 동등한 정도로 실재하는 원자 세계에 대한 진술들이라고 여길 수 있게끔 해 주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와 같은 철학적 분석은 물리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대 한 마음속 깊은 존경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물리적 탐구 의 방법을 방해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이 책의 유일 한 목적은 개념들을 명료화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 어디에서도 독자들은 물리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기대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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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을 것이다. 물리학은 물리적 세계를 분석하는 반면, 철 학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분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첫 부분에서는 양자역학의 바탕이 되는 일반적 인 개념들에 대해서 다룬다. 따라서 책의 첫 부분은 양자역 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개관하고 이 해석의 결과들을 요 약한다. 수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고 양자물리학의 방법 에 대해서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이 부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둘째 부분에서는 양자역학의 수학적 방법을 개관한다. 미적분학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을 다 루는 훌륭한 교과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 불필 요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충 분히 연구할 시간이 없거나, 이미 많은 개별 문제들을 해결 할 때 사용했던 양자역학의 수학적 방법을 간략하게 복습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부분은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로 나아가는 지름길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 책의 서 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의 셋째 부분에서 는 양자역학의 다양한 해석들을 다룬다. 이 부분에서 우리 는 책의 첫째 부분에서 등장한 철학적 개념들과 책의 둘째 부분에서 등장한 수학 공식들을 사용할 것이다. 서로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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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들의 특징들을 논의할 것이며, 삼가논리(三價論理, threeᐨvalued logic)의 용어로 구성된 해석이 양자역학의 적절한 논리적 형식임을 보일 것이다. 필자는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의 발렌틴 바르그만 (Valentin Bargmann) 박사로부터 수학과 물리 문제들에 대 해 많은 조언을 얻었으며, 이에 감사드린다. 바르그만 박사 의 덕택으로 책의 내용, 특히 책의 둘째 부분의 여러 내용들 을 수정할 수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의 노 먼 달키 박사와, 예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다가 지금은 시카고대학에 있는 에르네스트 허튼 박사에게도 감사드린 다. 필자는 두 분과 함께 양자역학의 논리적 본성에 관한 문 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문체와 용어 사용의 문제에서도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대학 출 판부의 직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들은 주의를 기울 여 책 내용을 편집해 주었으며, 이미 통용되고 있는 것과는 다소 어긋나는 구두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필자의 뜻을 너그 럽게 따라주었다. 책의 32절에서 도입한 삼가논리의 체계를 비롯한 이 책 에 담긴 철학적 견해는, 필자가 1941년 9월 5일 시카고대학 에서 열린 통합 과학 모임에서 발표한 것임을 알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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