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생존 프레임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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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생존 프레임, 대화·생태·전략 김사승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저널리즘 생존 프레임, 대화·생태·전략

지은이 김사승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펴낸날 2012년 8월 4일 커뮤니케이션북스(주) 출판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청원빌딩 3층 전화 (02) 7474 001, 팩스 (02) 736 5047 commbooks@commbooks.com www.commbooks.com CommunicationBooks, Inc. 3F Cheongwon Bldg., 571-17 Yeonnam-dong Mapo-gu, Seoul 121-869,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가 저작권자와 계약하여 발행했습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책은 뉴스통신진흥자금으로 저술 · 출간하였습니다. ⓒ 김사승, 2012 ISBN 978-89-6680-050-6 책값은 뒤표지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내 어머니 박옥순 여사께 바친다. 이제야 그 이름이 크게 들린다.


머리말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보자고 생각했던 것은 2009년 여름이었다. 방학 때 잠시 들른 몬트리올의 맥길대학교 서점에 서 두 권의 책을 샀다. 하나는 알바란(A. B. Albarran), 찬 옴스테드(S. M. Chan-Olmsted), 워드(M. O. Wirth)의 편저 󰡔미디어 경영 및 경제학 핸 드북󰡕이었고, 다른 하나는 맥길대학교 경영학과의 소위 맥길학파를 만 든 민츠버그(H. Mintzberg) 교수의 󰡔전략 사파리󰡕였다. 󰡔미디어 경영 및 경제학 핸드북󰡕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 왔던 저널리즘 사회학의 이슈들을 조직이론을 비롯한 경영학은 어떻게 다루 는지 보여 주었다. 뉴스 조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 들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미디어 상품의 속성이나 상품 구성 의 역동성, 미디어 조직 구성의 논리, 미디어 인력이 갖는 독특한 노동 행태와 이에 대한 미디어 조직의 관리, 그리고 테크놀로지와 전략적 접 근 등 많은 논의들을 읽었다. 낡은 엔진으로 병목 지점에 이른 저널리 즘을 다음 지점으로 움직여 나가는 데 필요한 접근이라는 결론을 내리 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민츠버그 교수의 󰡔전략 사파리󰡕는 조직의 특성과 전략의 속성을 연결시켜 분해한 책이다. 경영학의 세례가 전혀 없었던 필자지만 읽어 나가는 데 무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페이지를 넘길수록 다음 장의 이 야기가 기대됐다. 소설처럼 책장이 쉽게 넘어갈 정도로 책의 흐름에 빠 져들었다. 맥길학파 특유의 구성주의적 전략에 관한 마지막 장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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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 전략이란 것이 다양하고 복잡한 미지의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향 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저널리즘과 전략.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 사이의 관계를 그려 볼 수 있을까. 필자의 세 번째 단독 저서인 이 책은 몬트리올 첫 여행에서 얻었던 막연한 상상과 기대에서 시작됐다. 저널리즘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 다는 점을 나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들을 구체화하기 위해 2011년 여름부터 2012년 여름까지 연구년을 맞아 맥길대학교에 초빙 교수로 다시 몬트리올을 찾았다. 이미 오래전 일이었던 맥길학파의 사 람들은 찾을 길 없었지만 그들이 남긴 많은 연구들을 손쉽게 읽을 수 있 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리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몬트리올 반년의 눈겨울을 나면서, 몽로얄 언덕으로의 상쾌하기 그지없는 산책길을 나 서면서, 마음 내킬 때 언제나 걸어 다닐 수 있는 다운타운의 셔브룩, 크 레센트, 생 카트린 길들의 역동성을 느끼면서, 또 하지의 축제들을 즐 기면서 늘 한 가지 생각을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컸다. 다른 곳 으로 여행도 가기 싫을 정도로 붙어 있었던 몬트리올에서의 한 해. 귀 찮게만 하는 나를 다 받아준 아내와 딸이 옆에 있었기에 이 책을 쓸 수 있었다.

2012년 7월 루 심슨 아파트 #507에서 김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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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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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2

저널리즘 생존 프레임의 필요성

2

대화 프레임 저널리즘 독립의 이해

10

저널리즘 독립의 혼돈

26

저널리즘 독립과 프로페셔널리즘 46

저널리즘 대화의 가능성 저널리즘 대화의 논리

55

저널리즘 대화의 실천 모델 77

대화 프레임의 조건

3

66

생태 프레임 위기의 저널리즘

82

저널리즘 중심 구조의 붕괴 생태학 논의의 의미 생태계의 관계 방식들

110 123

미디어 생태학의 관계 방식 역동적 생태계와 제도적 관성 생태 프레임의 구성

96

172

144 157

33


4

전략 프레임 198

테크놀로지의 이해 213

전략의 이해

조직에 대한 이해 전략들의 특성 전략 계획의 구성

223 238 258

뉴스 조직 전략 계획의 핵심

279

콘텐츠-배포 중심의 전략 프레임 구성

5

결론 저널리즘 리프레이밍 최악의 시나리오

참고문헌

335

찾아보기

355

329

310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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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저널리즘 생존 프레임의 필요성

저널리즘의 생존 프레임을 찾아보는 이 연구의 대상은 전통 저널리즘 이다. 특히 전통 저널리즘의 생산 주체인 뉴스 조직의 생존 방식을 설 명하는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냥 생존 방법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프레임이라는 말을 동원하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생존 방법이라고 하면 그것만이 유효하고 유일한 길이라고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정론적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 어적 접근이다. 프레임은 그냥 틀일 뿐이다. 틀 속에 각기 다른 요소들 을 투입하면 그때마다 다른 것들이 나온다. 프레임을 복수로 만들면 얻 을 수 있는 답은 더욱 많아진다. 프레임은 열려 있고 과정적이며 구성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상황 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정보들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없고 더욱이 세상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때 누구나 자신의 프 레임에 따라 움직인다. 프레임은 세상을 향해 나 있는 창일 수도 있고, 세상의 지형을 보여 주는 지도일 수도 있고, 세상을 이해하는 인식일 수 도 있다. 마음의 눈일 수도 있고 의식의 구조일 수도 있다. 또는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기대치일 수도 있고 일이 어떻게 되어 갈 것이라 는 자기만의 가설일 수도 있다. 프레임을 갖고 있으면 프레임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를 안전하게 대하고 다룰 수 있다. 프레임은 세계에 관한 수많은 데이터들을 하나의 일관성 있는 패 턴에 따라 입력하고 처리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요소들을 걸러 주고, 위치를 정해 주며, 보다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 주며, 어떤 경우 더 자세하게 확대해서 사물을 인지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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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해 준다. 프레임은 세상의 문제를 진단해 주는 진단 체계와 같다. 프 레임은 일종의 인식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매 번 방법을 새롭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 없이 일을 해 낼 수 있다. 따라서 일을 아주 빨리 처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총체적인 일 처리가 가능하다. 모두 긴밀한 의미들로 구 성된 프레임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프레임은 수많은 상황 요인들을 연결시키는 잘 짜인 인식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프레임이 보여 주는 세계는 선험적인 결정체나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다만 인식을 통해 이해한 유동적 세상일 뿐이다. 프레임은 세상을 보는 도구 다. 복잡한 세계를 다룰 때 다양한 프레임들은 각기 다른 세상의 모습 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프레임은 누구나 가질 수 있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기술로 세상의 일들을 범주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카테고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연구의 초점은 저널리즘의 생존 방식에 관한 프레임을 구성하 는 데 있다. 두 가지 논의가 필요하다. 저널리즘의 구체적 생존 방식을 논의하는 것과 함께 저널리즘이 무엇인가도 논의해야 한다. 저널리즘 의 존재 방식과 존재 의미 모두 이야기해야 한다고 본다. 존재 의미는 존재 방식의 전제다. 물론 저널리즘이라는 사회적 의미 체계는 정태적 인 의미 구조로 설명하기 어렵다. 저널리즘의 의미는 유기적으로 구성 된다. 보는 사람들마다 저널리즘에 대한 설명은 다를 수 있다. 입장이 다르므로 저널리즘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연구는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겠지만 하나의 결론을 끌어내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저널리즘을 대하는 세상 의 태도들은 달라진다. 따라서 서로 다른 태도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저널리즘을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본다. 태도 역시 프레임 이라고 할 수 있다.

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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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다 무게를 두는 것은 역시 존재 방식, 더 정확히 말해 생 존 방식에 관한 논의다. 저널리즘의 존재 방식이 그 존재 의미를 설명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저널리즘에 본질 적인 충격을 안겨 주고 있는 지금, 저널리즘의 의미에 대한 천착이 얼마 나 논의로서의 실효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 온 저널리즘의 의미들이 작금의 상황에서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도 크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더 큰 의문은 저널리즘의 생산 주체인 뉴 스 조직의 생존 가능성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생존하는 것이 가능할까. 의미로서의 저널리즘, 다시 말해 저널리즘의 사회적 의미 구성 기능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지만, 뉴스 조직도 그럴 수 있는지 확언할 수 없다. 포털을 비롯해 수많은 디지털 플랫폼들을 통해 뉴스는 여전히 왕성하게 살아 돌아다니는데 그 생산 주체인 뉴스 조직 의 형세는 나날이 위축되고 있다. 저널리즘의 의미는 여전한데 사그라 드는 의미와 현실의 실체 사이에서 뉴스 조직은 괴리를 겪고 있다. 저 널리즘 의미의 생존과 함께 생산 주체인 뉴스 조직의 생존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연구는 전통 저널리즘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디지털 시대에 저널리즘에 관한 논의를 하면서 구체제에 관해서만 이 야기하겠다는 의도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다양한 유형의 저널리즘적(的) 현상들이 생성 되고 그에 대한 논의들도 많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전통 주 류 저널리즘으로부터 뉴스 소비의 많은 비중을 양도받아 간 것은 분명 하지만 완전히 대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디지털 저널리즘의 의 미를 전통 저널리즘과 동일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도 아 니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전통 저널리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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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갈 것이라고 본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한 미디어의 발전은 일괄적 대체로 나타나 는 것이 아니라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통해 이루어진다. 공진 화의 맥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기존의 테크놀로지와 새로운 테크놀로 지 사이의 진화가 같이 이루어짐으로써 전체 미디어 시스템의 진화가 이루어진다(Fidler, 1997). 새로운 발전이 의미를 갖는 것은 기존의 존 재가 변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데 있다. 이전의 것과 그다음에 오는 것 들 사이에 항상 갈등과 충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 반드시 기존의 것을 대체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다. 공진화는 양자의 공존을 강조한다. 모든 미디어 형식들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구축해 온 커뮤니 케이션 시스템 안에서 긴밀하게 얽혀 있다. 전통 저널리즘과 디지털 저 널리즘이 존재하는 공간은 서로 다른 공간이 아니다. 하나의 문화 안에 서 존재한다. 저널리즘의 문제는 테크놀로지의 문제만으로 이해해서 는 안 된다. 저널리즘의 독특한 미디어 형식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저널리즘의 형식도 다른 미디어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라이프사 이클을 갖고 있다. 1830년대에 탄생한 근대적 대중 저널리즘이 1970년 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현재 서서히 기울고 있는 이런 과정이 라 이프사이클이다. 근대적 형식의 저널리즘이 궁극적으로 소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형식의 특징적인 속성은 다른 저널리즘 형식들 을 통해 이어질 것이다. 언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코드에 의해 지속되 고 또 그 속에 내재되어 이어져 간다. 아날로그의 언어들은 사라지지 않고 디지털의 언어 속에 스며들어가 있다. 공진화의 논리는 미디어 재매개의 개념에서도 확인된다. 문화 현 상으로서 미디어는 다른 미디어들과 경쟁하지만 때로는 우호적 관계를 형성해야 할 때도 있다. 고립된 상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미디어는 다른 미디어들의 기술, 형식, 사회적 중요성 등을 자기에게 맞

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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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활용하고 개조하고 경쟁관계를 형성한다(Bolter & Grusin, 2000). 구체제와 신체제 미디어들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그러나 단순히 구체 제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시장에 맞추어 더 넓게 자기 상 품을 배포하는 것을 목적으로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새로운 미디어 는 올드미디어의 재매개를 통해 자신에 맞는 의미를 추출해 내 독자적 인 의미를 갖출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해 나간다. 미디어 공진화나 미 디어 재매개의 논의는 디지털 저널리즘이 구체제의 전통 저널리즘의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전통 저널 리즘 속에 내재된 속성들 모두가 새로운 상황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보 는 것은 어리석다. 오히려 새로운 저널리즘적 현상들을 제대로 이해하 기 위해서는 전통 저널리즘이 갖고 있는 속성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 다. 전통 저널리즘이나 뉴스 조직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는 이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서론과 결론 이외에 본론을 3부로 나누어 저널리즘 생존의 프레임을 제시한다. 2부는 대화 프레임이다. 저널리즘의 의미에 대한 고찰로서 어떤 속성의 저널리즘 의미가 생존 가능한가를 짚어 본다. 객 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뉴스 구성 태도가 저널리즘 의미 구성의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에 무게를 두고 접근한다. 탐사보도의 뉴스 구성 방식은 이 런 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주관과 객관의 갈등과 논쟁 은 뉴스 조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저널리즘 대화는 그 한계의 극복을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취재원은 물론 수용자, 그리고 사회와의 대화를 통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이해한다. 이를 위해 저널리즘 대화를 구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한다. 2부가 저널리즘의 의미에 관한 논의라면 3부와 4부는 저널리즘의 생산 주체인 뉴스 조직의 생존 방식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접근이다. 3부 는 생태 프레임이다. 2부의 대화 프레임은 저널리즘 황금 시기에 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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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즈니스 모델의 붕괴와 같은 물적 기반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 서는 저널리즘 생존의 초점은 달라진다. 뉴스 조직을 둘러싼 환경의 변 화가 뉴스 조직의 생존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임을 살펴본다. 생태학 적 논의들은 환경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논의들을 제공한다. 상황이론, 집단생태학, 조직생태학 등의 논의들을 통해 환경의 의미를 파악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뉴스 조직에 미치는 악순환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환경에 대한 적합도를 높임으로써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집단생태학의 논의가 보다 현실적 의미가 있음을 지적한다. 뉴스 조직 의 생존은 환경에 적응해 환경의 선택을 받음으로써 가능하다고 본다. 4부는 전략 프레임이다. 3부의 환경에 대한 논의가 단선적이라는 비판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뉴스 조직을 둘러싼 환경의 핵심은 디 지털 테크놀로지다. 테크놀로지는 결코 단선적인 발전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테크놀로지의 다 의적 의미는 환경에 대해 뉴스 조직이 능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여지 를 제공한다. 전략의 개념은 이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략 은 뉴스 조직의 내부 조건과 외부 환경 사이의 최적의 조합을 만드는 것 이다. 뉴스 조직의 생산 역량과 비즈니스 모델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통해 뉴스 조직은 자신의 생존 방식을 다양하게 구성해 낼 수 있다. 특히 뉴스 조직의 콘텐츠 생산 역량과 배포 플랫폼 사이의 관계를 적절하게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5부는 결론이다. 본론에서 도출해 낸 세 가지의 생존 프레임들의 적용 가능성을 짚어 보는 것으로 연구의 결론을 내린다. 소셜 미디어에 기반을 둔 소셜 저널리즘과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는가를 살펴본다. 소 셜 저널리즘이 갖고 있는 다양한 속성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화 프레임, 생태 프레임, 전략 프레임들의 관련성을 분석한다. 소셜 저널 리즘을 일종의 외부 환경의 변화로 본다면 생존 프레임들은 이를 받아

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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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일 수 있는 뉴스 조직의 생산 조건이자 생산 역량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본론의 세 프레임에 관한 부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순서대로 읽는 것을 권한다. 그러나 각 프레임들은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므로 따 로 읽어도 무방하다. 결론인 5부부터 읽는 것도 이 책의 핵심을 짚어 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대학 학부 고학년이나 대학원 초년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깊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일반 교양 독자들이 라도 읽어 내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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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프레임


저널리즘 독립의 이해

저널리즘 독립의 가치

저널리즘은 대화라고 정의한다. 적어도 저널리즘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 들은 이렇게 주장한다(Carey, 1987/ 1995/ 1997; Kovach & Rosenstiel, 2001). 저널리즘에서의 대화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증진시켜 주는 것 을 의미하는데 이는 저널리즘의 본질적인 의미다(Carey, 1987/ 1995/ 1997). 이를 통해 숙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공론장의 기본 원 리도 결국 대화라고 할 수 있다(Kovach & Rosenstiel, 2001). 그러나 대 화가 과연 민주주의의 효율적 방안인가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합의 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인 커뮤니케이션에 나타나는 대화를 사교 모델 과 문제해결 모델로 나눈 슈드슨(Schudson, 1997)은 대화가 민주주의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협력적 대화를 위해 대화의 규칙이 필요한데 즉각적이고 자유롭게 이뤄지는 실제 대화에서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쿠넬리우스(Kunelius, 2001)는 두 모델을 대화 참여자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중심으로 재분류 하면서 이질적 대화 참여자의 문제 해결 지향적 대화는 진정한 민주주 의의 의미를 창출한다고 보았다. 아카데미즘의 문을 벗어나면 그러나 대화론은 적지 않은 반론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누가 저널리즘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겠 나. 보통 사람들은 저널리즘은 그냥 기자의 직설토로이거나 잘해야 옮겨 적기, 말 전하기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제기하는 반론을 보듬는 것은 쉽 지 않다. 사실 현재 목도하는 있는 그대로의 저널리즘은 결코 대화라고 볼 수 없다. 저들만의 리그가 만들어 내는 저들만의 주장들만 있다는 비 판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교대로 세상을 차지하려는 지배 세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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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를 유지 존속하기 위한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는다(McNair, 1996). 지배 세력들의 현상 유지를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메커니즘 이라고 보는 것이 저널리즘 비판적 패러다임의 논의다. 비판적 패러다 임은 이것이 현재 있는 그대로의 저널리즘이라고 주장한다. 있는 그대 로의 저널리즘 문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그대로 들어온다. 뉴스 는 지배 세력 저들만의 노력과 기쁨과 아쉬움의 진열일 뿐 그냥 사는 일 이 전부인 사람들이 하루하루 겪는 일상의 불편과 그로 인한 속앓이는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이런 현실들을 교묘하게 비틀어 놓은 왜곡까지 일어난다. 그래도 저널리즘을 대화로 정의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있는 그 대로의 저널리즘 현실을 외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만 살아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애써 잊어버리고자 함이 아니라 감춰진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다. 누구나 하루를 살면 서 겪는 간난의 이야기가 기사 어느 한 구석에서나마 전해지기를 기대 한다. 그러나 기대하는 만큼 남의 이야기도 무던하게 들어야 하는 기다 림의 원칙을 받아들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화가 이 혼탁한 세상을 그나마 정돈할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방법이고 저널리즘이 가장 잘해 낼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이 대화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한발 물러나 생각해 보자. 과연 저널리즘이 대화를 한 적이 있었는가. 역사적으로 대화의 가능성 을 보여 준 적이 있었는가. 과연 저널리즘은 대화할 수 있는가. 저널리 즘 대화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대화란 본래 신변잡기를 늘어놓거나 문 제를 오도하고, 오해의 위험이 높으며, 논의를 비약하고, 아니면 아예 침묵해 버리기도 한다(Schudson, 1997). 저널리즘 대화에 이런 것들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런 대화를 저널리즘이 수행해야 할 이유 가 있는가. 반(反)대화의 기억만 묻어 있는 저널리즘의 역사들은 대화

2 대화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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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관련된 수많은 저널리즘의 담론들을 모두 의심하게 만든다. 대화를 묻기 전에 반대화의 저널리즘을 먼저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논 란들이 개입되어 있어 복잡하고 때로 짜증나기까지 하지만 지긋이 진행 할 수밖에 없다. 저널리즘 대화가 왜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이유를 찾 아내기란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윤전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은 ‘페니 프레스(penny press)’ 를 창출했다. 신문 한 부 값이 비싸 아무나 사 볼 수 없었던 상황을 끝내 는 획기적 비용절감이 가능했다. 페니 프레스는 ‘싸구려 신문’이라는 뜻 이 아니라 누구나 사 볼 수 있는 신문을 의미한다. 아무나 못 보는 상황 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상황으로의 변화는 엄청난 인식의 변화를 가져 왔다. 뉴스는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상품이라는 자각이다. 근대 저널리 즘이 줄기차게 붙들고 매진해 온 불변의 목적인 자본주의적 상업적 저 널리즘은 뉴스가 상품이라는 인식에 근거를 둔 것이다. 적어도 근대 신 문의 틀을 만든 미국의 저널리즘이나 이를 모방하면서 성장해 온 지금 의 저널리즘은 이런 자본주의 전략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오늘날 까지 저널리즘을 지탱해 온 원동력은 뉴스의 자본주의적 발견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상업적 저널리즘은 저널리즘의 대화적 본질을 훼손해 온 주범으로 지목되어 왔으며 그럴 만한 이유도 충분히 제시되었다. 이윤은 자본이 가져가는 것이므로 저 널리즘의 논리는 언제나 돈이 있는 곳으로만 흘렀다. 이를 거부할 만한 증거보다는 이를 확인시켜 주는 증거들이 훨씬 많다. 대화보다는 이윤 추구에 매몰되었다는 혐의는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저널리즘의 상업 성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먼 훗날까지도 본질의 변화 없이 이어질 것이다. 상업성은 지금의 저널리즘을 만들었지만, 저널리즘의 모습이 지금과 달라질 미래에도 여전할 것이다. 저널리즘의 대화가 가능 해지는 듯한 디지털 환경에서도 상업주의는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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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시장을 지배하는 포털과 소셜 미디어 서비스들이 자본주의가 아 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페이스북의 주식시장 상장은 자본주의의 전형 적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상업성은 대화의 논리와 무관 하게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상업화가 대화를 가 로막는 하나의 요인임은 틀림없지만 모든 책임을 상업성에만 뒤집어씌 우는 것은 문제다. 그것만이 문제의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본다. 저널 리즘이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한 또 다른 논거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상업성보다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반(反)대화의 요인은 저널리즘 과 정치의 관계다. 근대 저널리즘의 명분은 분명하다. 근대국가를 형성 하는 관료사회, 산업, 국가체제 등 사회의 권력구조를 감시한다는 것이 다. 설명하기 어려운 많은 저널리즘의 행태들은 권력 감시의 커다란 명 분에 기대어 정당성을 부여받았다(Deuze, 2006). 입법, 사법, 행정의 권력자들에게 말을 하라고 윽박지를 수 있는 권리에서부터 중요한 공적 문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권리, 주요 기관에 출입처를 만들어 정보 의 병목을 지키는 지위는 저널리즘이 아닌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 다. 저널리즘은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3권 분립 체제의 불안함을 감당 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등에 업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존재 방식 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저널리즘을 당당히 제4부라고 칭했던 것은 미 덥지 못한 권력체제에 대한 방어 수단이 그만큼의 권위를 가지기를 바 랐기 때문이다. 그래야 지배 권력의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도권 권력의 감시라는 명분은 보다 세밀한 논리체계를 갖추고 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신탁한 시민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는지를 감 시한다는 것은 사회의 다양한 이해 세력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 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McNair, 1998). 서로 다른 생각들 을 갖고 있는 모든 세력들을 살피는 것이 감시견 기능의 실질적 행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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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본 것이다. 이는 저널리즘은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통합시키 는 사회적 접착제(social glue)의 기능을 한다는 연장된 해석을 끌어냈 다. 이 해석은 저널리즘이 접착제 노릇을 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유지하 는 역할을 한다는 논리로 더 연장되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기자가 아 버지 같은 장관에게 대들 수 있는 것은 감시견의 기능이 이런 논리와 연 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감시견 기능은 근대 저널리즘의 존재 방식 그 자체인 것이다. 북미와 서유럽 국가들이 틀을 닦은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무엇보다 이런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요컨대 저널리즘이 반대화적 태도를 가지는 대신 내세운 것이 감 시견 기능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화의 감시견 기능은 저널 리즘이 추구해 온 또 다른 핵심적 가치라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감시 견 기능을 통해 저널리즘이 사회의 모든 목소리들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고 했는데 중요한 것은 다양한 목소리들 사이의 관계다. 서로 다른 성질의 목소리들은 필연적으로 경쟁하게 된다. 자기 소리를 더 크게 울 리고자 경쟁한다. 경쟁은 때로 갈등으로 진행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경쟁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저널리즘은 경쟁을 위한 자원을 제공하기 도 하고 경쟁자들을 대표하기도 한다.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차별성들이 서로 잘 화해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공적 토론의 장을 제공하는 것은 이런 일들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핵심적인 방법이다(McNair, 1998). 한국 사회가 그렇게 도 해결하지 못하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언론사들이 대리전을 벌이 듯이 하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경쟁하는 목 소리들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므로 갈등 그 자체는 문제는 아니다. 저널리즘은 정치나 문화의 서로 다른 목소리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서로 다름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당연한 기능이다. 보수와 진보 언론이 보여 주는 편집이나 뉴스 스타일의 명확한 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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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지적 자유의 구현이며 이의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게임 의 룰도 없이 이전투구하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뉴스를 만드는 기본 중의 기본 룰인 팩트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멀쩡하게 눈앞에 드러난 팩트조차 못 본 체하거나 제 논에 물대기식으로 필요한 것만 가져다 쓰는 태도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질의 문제도 아니다. 단순한 규칙 파괴의 문제이고 기본기의 무시일 뿐이다. 문제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 서로가 모르니까, 문제가 아닌 것이 문제로 보이고 문제인 것이 문제로 보이지 않는 기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기현상으로 인해 저 널리즘은 제4부의 권위를 누리는 데 치명적인 어려움을 안게 되었다. 제4부는 어느 하나의 언론사만 누리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언론사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4부는 집단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저널리즘 공동체 전체의 정기능들이 모여서 형성되는 권위다. 저널리즘 전체가 권력을 감시하고 분석할 때 이런 권위는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제4부는 집단적 권위라는 점을 현재 한국의 저널리즘은 까맣게 잊어버 리고 있다. 아무튼 저널리즘의 감시견 기능의 정당성은 실제 취재 현장에서 강력하게 작동한다. 어떤 뉴스 조직이든 최고의 핵심 부서는 정치, 경 제, 사회부다. 이른바 경성 3부서가 뉴스 조직의 근간이다. 이들이 담당 하는 영역이 바로 권력들이기 때문이다. 경성 3부는 근대사회의 핵심적 권력 체제들을 감시한다. 권력에 대한 감시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주권 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저널리즘이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가 없다면 저널리즘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겠지만, 저널리즘이 작동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온전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근대 저널리즘에 대한 평가는 여기서 더욱 커진다. 저널리즘이 감시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뉴스 조직의 생산 행위의 효율성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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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본다. 근대사회가 갖고 있는 3권 분립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 다는 사회적 필요성에서 생겨난 정당한 사회적 결과물일 뿐이라고 본 다(Carey, 1995).

탐사보도의 저널리즘 독립

감시견 기능을 정점으로 끌어올리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 탐사 저널 리즘이다. 탐사 저널리즘은 뉴스 내용이나 생산 방법에서 다른 장르와 확연히 구분된다. 내용적 특성을 보면 강력한 감시의 의지를 단박에 눈 치 챌 수 있다. 탐사 저널리즘은 “누군가 숨기려고 하는 그 무엇을 끊임 없이 파헤치는 것(De Burgh, 2000, 15)”이라고 정의된다. 여기서 ‘그 무 엇’은 ‘부정’이며 ‘누군가’는 개인이 아니라 제도나 권위, 구조 등이다. 지배 권력이나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파헤치고자 한다. 사람들 에 대한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강한 권력구조를 주 공략 대상으로 삼는다. 초기 미국의 탐사 저널리즘이 주로 자본가의 노동 착취, 보험 회사의 부정적 자금 운용, 육류 유통의 독점 구조, 매춘시장의 인신매 매와 같은 사회 부조리와 부정 등을 다룬 것은 탐사 저널리즘의 본령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준다. 다루는 대상이 권력들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이들을 향해 달려드는 탐사 저널리즘 태도 또한 권력에 대한 감시의 기 세를 드러낸다. 도덕적 규범을 위반한 부끄러운 관행을 확인하는 것 (identifying), 권력 남용을 밝혀내는 것(revealing), 중요한 주장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questioning), 부패를 드러내는 것(showing), 공 식적인 이유들에 도전하는 것(challenging), 법의 함정을 증명하는 것 (demonstrating), 명분과 실제의 괴리를 폭로하는 것(exposing), 감추 어진 것을 끄집어내는 것(disclosing) 등이 탐사 저널리즘의 과제라고 본다(De Burgh, 2000). 숨겨진 것들을 밝은 곳에 내다놓고 확인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적시하며, 문제 있는 것들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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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저널리즘의 태도다. 요컨대 공격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공격적 태도로 권력들을 향해 파고드는가. 변화를 노리 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고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준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가 어떤 것들이고 이게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결정하려고 한 다. 의제를 만들려는 것이 탐사 저널리즘의 진정한 목적이다. 이는 중 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제의 변화는 사회의 지배 세력이 의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입장에서 사건이나 이슈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Jones, 1999). 탐사 저널리즘이 누구의 간섭이 나 영향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회의 진실을 적시하려고 한다는 것 이다. 탐사 저널리즘은 저널리즘의 감시견 기능의 의미를 다른 차원으 로 끌어올린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다. 감시견 기능은 탐사 저널리즘 에 비하면 수동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지적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다. 탐사 저널리즘은 단순히 지켜보고 고발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는 것 이다. 진실이 뭔지 파악해 사회가 고민해야 할 의제와 해결책을 제시함 으로써 권력과 이로 인한 구조적 문제들을 견제하고 도전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가 변할 수 있도록 하는 변화의 단초를 만들고자 한다(Protess et al., 1991).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오 랫동안 탐사 저널리즘을 해결 저널리즘(solution journalism)이라고 주 장해 왔다. 취재한 사안은 칼럼을 통해 자신의 분석과 해석을 덧붙이 고 이를 바탕으로 주관적 판단을 제시하라고 기자들에게 요구해 왔다. ≪마이애미 헤럴드 트리뷴≫은 탐사보도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공공문제 의 해결을 위한 처방(prescription)을 내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Ureneck, 1994). 프로테스 등(Protess et al., 1991)이 탐사 저널리즘의 세 가지 조 건으로 악역, 피해자, 공익 등을 내세운 것 역시 탐사 저널리즘이 궁극 적으로 문제의 고발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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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영국 탐사보도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영국의 정치와 정부의 부패, 무능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의회의원과 공무원, 지역 정치인들이 공모해 정부 계약 부정 사건인 ‘폴슨 스캔들’을 비롯해 끊임없는 부패 스캔들이 터져 나오자 정부는 경찰, 의회, 행정부 등에 대해 조사를 진 행했는데 당시 야당이었던 노동당의 헤럴드 윌슨 당수는 전면적이고 공개적인 조사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Doig, 1997). 모든 언론 들은 이 문제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탐사보도는 영국 언론의 가장 중요 한 활동으로 인식됐다. 이를 통해 정부 공공 서비스의 문제를 조사하고 밝힐 수 있는 정당성이 언론에 부여되기도 했다(Dynes, 1995). 또 탐사 저널리즘은 정치적으로 야당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1982년 채널4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특파원(Dispatches)>이 시작됐을 무렵 야당은 대 처정부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던 때였다. 이때 <특파원>은 야당의 역 할을 대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Lloyd, 1998). 탐사 저널리즘은 모든 것들이 더렵혀진 상황에서, 누구도 그 더러움을 닦아내지 못하는 상황 에서 야당으로서 지배 권력들을 견제하고 도전하고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탐사 저널리즘이 이런 공격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에 걸맞 은 뉴스 생산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서술 중심으로 전개되는 대부분 뉴스 스토리와 뉴스 스토리의 기술 방법이 다르다. 주어진 정보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권위자들이 정의하는 대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통상적인 뉴스 스토리의 구성 방식이다. 이는 사 회 현실을 뉴스의 규격에 맞게 형태만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러나 탐사 저널리즘은 가능한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재구성하 고 재해석하는 것을 규칙 1호로 여긴다(De Burgh, 2000). 규칙 1호의 핵심은 이를 수행하는 주체인 저널리스트다. 주어진 정보나 권위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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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부차적인 요소다. 저널리스트는 자신의 의도에 맞는 정보를 선 별하고 그에 적합한 방법과 기준에 따라 정보의 중요성을 평가한다. 철 저히 저널리스트 중심이다. 이것이 탐사 저널리즘의 핵심적 차별성이 자 가치다. 저널리스트의 주관적 자기인식이나 태도가 없다면 탐사 저 널리즘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Mayo & Leshner, 2000). 이것은 독자적 인 데이터 분석에서 얻은 자기만의 증거들에 의지한다. 취재원으로부 터 얻는 정보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정보를 찾아 나간다. 뉴스 생산의 독립성은 다시 말해 저널리 스트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탐사 저널리즘을 몰입 저널리즘(immersion journalism)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토대로 뉴스 이슈에 철저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누구에 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 뉴스 생산 행위가 보장되어야 한다. 저널리스트 중심의 뉴스 생산은 저널리스트의 독자성, 독립성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탐사 저널리즘이 저널리스트의 재량권이 없으 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널리스트의 독자적 조사에 따른 독 립적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탐사 저널리즘이 스트레이트 기사 중심의 일상적인 뉴스 생산 시스템에서 벗어나 예외적으로 이루 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탐사 저널리즘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탐사 저널리즘이 뉴스 조직의 체계적 통제가 불가피한 일일 뉴스 생산 흐름과 관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뉴스가 뉴스 조직 생산 활동의 결과 라는 맥네어(McNair, 1998)의 지적이 무색할 정도로 탐사 저널리즘은 예외적 재량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만한 재량권을 갖자면 탐사 저널리스트의 역량 또한 그에 맞게 차별화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르네크(Ureneck, 1994)는 탐사 저널리즘을 한마디로 전문가 저널리즘(expert journalism)이라고 정의 했다. 저널리스트들이 폭넓은 재량권을 갖고 조사하고 분석하고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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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만큼 탐사 저널리스 트는 전문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성은 주관적 인식의 증 거를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한다. 당연히 증거에 맞추어 논의를 전개해야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취재원을 비롯해 정보를 공급 하거나 정보를 통제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들 정보의 의미와 데이터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탐사 저널 리스트의 전문성이다(De Burgh, 2000). 이런 점에서 탐사 저널리스트 의 전문성은 마치 법의학적 범죄 수사를 수행하는 과학수사관과 같다 고 하겠다. 또 가설에서부터 연구방법론, 특히 검증 가능한 데이터의 분석으로 연결되는 사회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을 뉴스 생산 과정에 적용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자와 같은 역량을 필요로 한다 (Meyer, 1991; Jurgensen & Meyer, 1992; Stocking & LaMarca, 1990). 대부분 저널리스트들은 자신의 가설을 가지고 취재에 임하지만 체계적 인 가설을 갖기보다는 추측에 의존한다. 메이어(Meyer, 1991)가 탐사 저널리즘을 정밀 저널리즘(precision journalism)이라고 이름 붙인 것 은 탐사 저널리즘이 사회과학적 조사를 통해 뉴스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널리스트는 자신의 가설을 비롯해 조사방법론과 수 집한 증거들을 공개하여 외부의 철저한 검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주관적 뉴스 생산 방식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생산 과정을 투명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CAR(Computer-Assisted Reporting)와 같은 취재 보도 방법을 말한다. CAR는 탐사 저널리즘의 과학적 접근과 객관성의 강화 에 큰 기여를 했다. 탐사 저널리즘을 CAR와 동일시하기도 할 정도로 대표적인 탐사 저널리즘의 생산 방식으로 통용되어 왔다. 미국 탐사 저 널리즘의 전형적인 예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발레트와 스틸 (Barlett & Steele)이 1991년 작성한 “America: What Went Wrong?”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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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를 이용해 70년간의 소득세 데이터를 독자적으로 분석하면서 탐사 저널리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CAR는 원자료를 스프레드시트나 데 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이용해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매핑 프로그램을 통해 현상들에 감추어져 있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패턴을 찾아낸다. 이를 이용해 탐사 저널리스트는 자신의 가설에 따라 데이터를 얼마든 지 독자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해석을 거친 통계나 기 존의 정설들에 의존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데이터들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외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뉴스 생산 을 할 수 있음과 동시에 과학적 분석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객관성의 시 비를 잠식시킬 수 있었다(Friend, 1994; Reisner, 1995). 제4부로서 권력에 대한 감시견으로서의 저널리즘 존재 방식은 탐 사 저널리즘이 과학적 뉴스 생산 방법을 동원하면서 저널리즘의 의미 를 또 다른 수준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수준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대화가 아니다. 뉴스 생산에 대화는 저널리 스트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탐사 저널리즘의 과학적이 고 독립적인 뉴스 생산은 외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저널리스트 독자적 역량을 통해 얻어낸 뉴스 생산 방식의 독립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를 저널리즘의 본질이라고 했지만 이처럼 감시견 기능은 저널리즘 의 또 다른 본질을 구성해 냈다고 볼 수 있다. 저널리즘의 기능은 이를 수행하는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사회 감시견 기능과 탐사 저 널리즘의 과학적 접근 방식의 관계에서 보듯이 사회적 기능과 뉴스 구 성 태도는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적어도 감시견 기능의 원활한 수행 을 위해서는 저널리스트의 독자성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 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생산 행위가 가능한 독립성을 통해 감시견 기능 을 완수할 수 있다. 탐사 저널리즘의 생산 과정은 외부의 어떤 영향에서도 벗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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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저널리즘 독립성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 준다. 이 의지는 뉴스 생산의 내재화를 한층 강화한다. 내재화 과정은 저널리스트 개인과 뉴 스 조직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1차적인 과정은 물론 저널리스트 개 인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저널리스트는 대단히 수줍은 유형의 인간이 다. 탐사 저널리스트의 저돌적인 공세는 감시견 기능을 위한 극단적 선 택이지만 본래 저널리스트는 엄격하게 자신을 다루고자 한다. 저널리 스트들이 찾아 헤매는 뉴스거리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다. 지배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중앙의 통제가 한계를 드러내는 통제 임계점을 벗어나 일어나는 변화들을 찾아 헤맨다. 변화가 일어나기 직 전에 도처에 나타나는 징후들도 포착해 내야 한다. 미세한 섭동이나 요 동을 감지하는 것은 저널리스트 누구나 가져야 하는 감각 역량이다. 그 러나 현실적으로 저널리스트들은 주변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출입처나 취재원들의 지원 없이는 뉴스를 정기적으로 생산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혼돈스러운 변화의 와중에 외부에서 끊임없이 공급되 는 뉴스거리 더미들 속에서 저널리스트가 취해야 하는 유일한 자세는 의심이다. 출입처나 PR 기관이 제공하는 지배 질서의 현상 유지를 강화하려 는 이야기들을 그냥 뉴스로 받아들이는 저널리스트는 없다. 취재원들 은 자신들이 던져 주는 내용을 저널리스트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라지만(adaptability), 저널리스트는 그것들이 수용자들에게 얼마나 적합한 내용인지를(suitability) 따진다(Gans, 1979). 모든 것을 의심하 고 뒤집어 보면서 지배 체계가 감히 영향을 미치려고 엄두를 내지 못할 진실을 찾아내려고 한다. 의심은 가장 효과적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저 널리스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퍼붓고 스스로 답을 찾아낸 다. 취재 과정 전체에 걸쳐 모든 의심들에 대해 하나하나 판단하는 의 사결정을 내려 나간다(Burns, 2002). 제보가 들어오거나 취재의 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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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잡았을 때 기자들은 ‘사실관계가 제대로 된 것인가’를 의심하고, ‘이 미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라면 과연 지금 다시 검증할 자신이 있는가’라 면서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한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알려 줄 사람은 누구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하나하나 대상자들을 지워 나간 다. 취재원이 제공해 주는 정보의 사실관계 확인은 당연하다. 나아가 ‘내가 알고자 하는 정보를 제시해 주는가’를 따져 보고, 이어 ‘이 중에 내 가 검증할 수 없는 정보들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내고자 하고, ‘이들이 대답하지 않은 질문들은 도대체 어떤 것들이었나’를 되새기기도 한다. 저널리스트들의 의심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의사결정의 대상은 뉴 스 이슈나 취재원은 물론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적이다. 취재 란 비판적 의심의 제기와 이의 해소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다. 의심과 의심의 해소를 통해 지배 체제의 안정적 현실에 대해 저항 할 수 있는 결론을 얻고자 한다. 그것이 지배 체제의 예측을 벗어나는 창발적 현상들이라면 더욱 바람직하다. 혼란스러운 정보들을 의심하 고 의심을 해소하는 행위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변화와 이를 둘러싼 움직임들을 찾아내려는 몸부림이라고 하겠다. 뉴스 생산의 내재화는 개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뉴스는 뉴스 조직의 내부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맥네어가 뉴스는 뉴스 조 직의 조직적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McNair, 1998). 2차적인 내재화 과정은 개별 저널리스트와 뉴스 조직 사이의 긴 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뉴스 생산 과정을 ‘자기 생성적 의미(self-deriving meaning)의 객관화 과정’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었던 것도 뉴스 생산 의 내재화에 대한 큰 자신감을 보여 준다(Lau, 2004). 저널리스트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성질의 뉴스 생산 과정을 가진다. 하나는 저널리스트가 철저히 자신만의 주관적 인식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세상의 의미는 누가 뭐래도 우선 저널리스트 자신만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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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을 거쳐야 한다. 자기 생성적 의미라는 말은 주관적 인식을 통해 취 재 대상 사건의 의미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제시할 수 있는 공통된 뉴스밸류가 있지만 이의 적용과 해석과 판단은 철저히 저널리스트의 몫이다(Tunstall, 1971). 싫든 좋든 그 판단은 현장을 관 할하는 저널리스트의 통제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의미의 자기 생성을 과 감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저널리스트만이 그 위치에 있다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때문이다. 또 다른 과정은 자기 생성적 의미의 판단 그 이후에 이루어진다. 현 장 저널리스트의 판단만으로 최종적인 뉴스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뉴스 생산은 조직적 생산 활동이라고 했듯이 조직의 개입이 이어진다. 간부를 비롯해 뉴스 생산과 관련된 조직적 관행들이 저널리스트의 주관 적 판단에 달려들어 가능한 객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주관적 자기 생성 의 의미 구성을 주장하는 현장과 주관성을 객관적 진실로 단련시키려는 뉴스룸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뉴스룸 내 부의 객관화 과정이 철저하다고 해도 이 역시 완전한 객관은 아니다. 단 지 보다 많은 수의 주관들이 완전한 주관성을 무디게 만드는 간주관성 (間主觀性)을 만들어 낼 뿐이다. 조직적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뉴스룸 내부의 간주관화 작업은 어찌 보면 현장의 자기 생성적 의미 구성보다 더 치열하게 이루어진다. 수많은 계획과 회의와 다양한 수준의 간부들의 개 입을 통해 최종적인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 같은 시간에 같은 규모의 뉴 스를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뉴스 조직의 조직적 활동 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조직 구성도 이를 효율적으 로 수행하기 위해 이뤄진다. 위계질서를 가진 관료주의적 조직구성도 이 런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Negrine, 1996). 개별 저널리스트들의 취재는 주관적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기 어렵 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조직적 노력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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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뉴스 조직이 제공하는 과학적 장비와 훈련, 팀워크를 통한 조직적 접근으로 간주관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탐사 저널리즘이 그렇다. 탐사 저널리즘의 사회과학적 접근은 개별 저널리 스트의 노력으로는 다가가기 어렵다. 뉴스 조직의 돈이 더 많이 투입되 고 충분한 역량을 보유한 저널리스트들이 참여해야 한다. 저널리스트 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은 뉴스 조직의 개입과 투자와 계획을 통 해 간주관적 수준으로 객관화할 수 있다. 탐사 저널리즘이 대부분 태스 크포스팀 단위로 수행되며 뉴스 조직의 전략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 은 뉴스 생산의 간주관적 객관화의 태도라는 것을 보여 준다. 저널리즘이 대화의 본질을 거부하고 제4부의 감시견 기능을 택했 을 때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전혀 다른 차원으 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저널리즘의 독립, 저널리스트의 재량권, 과학 적 접근, 그리고 뉴스 조직의 전략적 뉴스 생산 방식 등이 모두 동원되 어야 한다. 그러나 각각의 요소들은 서로 균형점을 찾아내야 한다. 개 별 저널리스트의 독립과 주관적 접근과 재량권이 보장되어야 하지만, 뉴스 조직의 개입을 통해 견제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미묘한 긴장 과 균형은 결코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지도 확신하기 어렵 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와 그렇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적 한계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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