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크 시선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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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 А. Блок. Избранная лирика 블로크 시선


РОДИНА 조국 (1907∼1916)



네가 떠나고, 난 황무지에 남아 네가 떠나고, 난 황무지에 남아 뜨거운 모래에 드러누웠네. 이제부터 혀는 오만한 말을 내뱉을 수 없네. 있었던 것을 한탄하지 않으며 나는 네 높이를 이해했네. 그래. 나 부활하지 않은 그리스도에게 너는 갈릴리 고향. 다른 이가 너를 어루만지게 하라. 난잡한 소문이 무성하게 하라. 그의 머리를 어디에 놓을지 인간의 아들은 모르네.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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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펼쳐졌다. 굼뜨게 흐르며 슬퍼한다88)

강이 펼쳐졌다. 굼뜨게 흐르며 슬퍼한다. 강변을 적신다. 노란 절벽의 빈약한 흙 위에서, 스텝에서 건초 더미들이 슬퍼한다.

오, 나의 루시! 나의 아내! 고통스럽도록 긴 여정이 우리에게 선명하다! 우리의 길은 고대의 타타르의 자유의 화살로 우리의 가슴을 꿰뚫었다.

우리의 길은 초원의 길. 우리의 길은 한없는 애수에 잠긴 길. 오, 루시! 너의 애수에 잠긴 길. 심지어 어둠도, 한밤의 국경 밖의 어둠도 나는 두렵지 않아.

밤이 오게 하라. 단숨에 달려가자. 스텝 저 멀리

88) 소 사이클 <쿨리코보 벌판에서(На поле куликовом)>의 첫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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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을 타오르게 하자. 스텝의 연기 속에서 신성한 깃발과 칸의 검의 강철이 번뜩일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전투! 평안은 오직 피와 먼지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꿈꾸어진다…. 질주한다, 스텝의 말이 질주한다. 나래새를 짓밟는다….

그리고 끝이 없다! 이정표들이 비탈들이 어른거린다…. 멈춰! 간다, 놀란 먹구름들이 간다, 피에 젖은 노을!

피에 젖은 노을! 심장에서 피가 물결쳐 흐른다! 울어라, 심장아, 울어라…. 평안은 없다! 스텝의 말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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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황금 세기처럼 다시 닳고 닳은 세 개의 말 가슴걸이가 펄럭인다. 채색된 바퀴살들이 헐거운 홈에 끼워져 있다….

러시아, 궁핍한 러시아. 내게 네 잿빛 이즈바는 내게 네 바람의 노래는 첫사랑의 눈물 같구나!

나는 널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제 십자가를 소중히 나른다…. 어떤 마법사든 네 마음에 들면 약탈의 미를 내주어라!

꾀어내어 속이게 해라. 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근심이 212


네 아름다운 모습에 어둠을 드리울 뿐….

그래 뭐? 근심 하나로 더 아프고, 눈물 한 방울로 강은 더 소란스럽다. 하지만 넌 여전하다. 숲과 들판, 눈썹까지 두른 무늬 스카프.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 긴 길이 가볍다. 길 저 멀리 스카프 아래에서 순간적인 시선이 번뜩일 때, 마부의 황량한 노래가 감옥의 애수가 되어 울릴 때!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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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한낮

겸손한 내 벗, 너와 함께 그루터기 남은 밭을 따라 서두름 없이 걷는다. 어두운 시골 교회 안인 듯 영혼이 흘러넘친다.

가을 한낮은 높고 고요하다. 제 동료들을 부르는 메마른 까마귀 울음과 노인의 기침 소리만 들릴 뿐.

헛간이 낮은 연기를 퍼뜨리고 헛간 아래에서 오래도록 우리는 집요한 시선으로 학들의 비행을 좇는다….

난다, 사각으로 난다. 우두머리가 소리 내어 운다…. 무엇에 관해 말하는가, 무엇에 관해, 무엇에 관해? 214


가을의 울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라하고 궁핍한 마을들은 셀 수도 눈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어둑해진 대낮에 먼 초원에서 모닥불이 빛난다….

오, 궁핍한 내 나라, 너는 심장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 불쌍한 내 아내, 너는 무엇을 통곡하는가?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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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연기가 푸른 물결이 되어89) 떠나지 마. 내게 머물러줘. 그토록 오래전부터 널 사랑하잖아.90)

모닥불 연기가 푸른 물결이 되어 황혼 속으로, 하루의 황혼 속으로 흘러가네. 오직 붉은 벨벳이 붉은 장미가 되어 오직 노을빛이 나를 덮었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기만. 잿빛 안개가 되어 음울한 곳들의 슬픔이 기어가네. 전나무가 십자가가 되어, 진홍색 십자가가 되어 저 멀리 공중의 십자가를 놓네….

여인아. 저녁 주연에

89) 사이클 ≪조국≫의 내밀한 개인적 원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 역사 적 사건과 시인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의 상응을 구현. 그래서 시인이 쓴 모 든 시는 러시아에 관한, 조국에 관한 시인 것. 90) 유명한 로망스 <떠나지 마. 버리지 마(Не уходи, не покидай)>의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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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머물러. 나와 함께 있어. 잊어, 무서운 세상은 잊어. 하늘의 깊이로 숨 쉬어.

슬픈 위안과 함께 바라봐. 노을빛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연기를. 울타리가 되어 널 지킬게. 손가락에서 뺀 반지로, 강철 반지로 널 지킬게.

울타리가 되어 널 지킬게. 살아 있는 반지로, 손가락에서 뺀 반지로. 우린 연기처럼 흘러야 해. 잿빛 안개가 되어 붉은 원 속으로 흘러가야 해.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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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먹은 시절에 태어난 자들은 기피우스에게91)

귀먹은 시절에 태어난 자들은 제 갈 길을 기억 못한다. 우리는 러시아의 무서운 시절의 자식들. 그 무엇도 잊을 힘이 없다.

잿더미의 시절! 그대들 속에 깃든 것은 광기의 소식인가, 희망의 소식인가? 전쟁의 나날의, 자유의 나날의92) 핏빛 잔영이 얼굴에 비친다.

침묵이 자리한다. 우르르 하는 경종 소리가 입을 막게 했다.

91) 지나이다 기피우스(Зинаида Н. Гиппиус, 1869∼1945): 1세대 러시아 상 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블로크를 문단에 데뷔시킨 드미트리 메레즈콥스키 (Д. С. Мережковский)의 아내다. 92) 1904∼1905년의 러일전쟁과 1905∼1907년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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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환희로 차올랐던 심장에는 숙명적인 공허가 자리한다.

우리의 죽음의 침상 위로 울부짖으며 까마귀 떼가 날아오르게 하라. 신이여, 신이여, 합당한 자들은 당신의 왕국을 볼지어다!93)

1914

93) 성서의 인유. <마태복음> 5장 8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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