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미디어 출현과 수용 1880∼1980 김영희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주), 2009
4장
일제 강점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새로운 매체, 라디오의 출현 20세기 초에 등장한 새로운 매체, 라디오는 1920년을 전후하여 미국 여러 곳에서 시험방송이 실시되고,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KDKA국에서 세계 최초의 라디오 정규방송이 개시된 이래, 급속히 보급되었다. 미국에 서 정규방송이 시작될 무렵 라디오 수신기는 1000여 대 정도 보급되었는 데, 그 이듬해 5만 대로 증가하였고, 1922년에는 60만 대, 1923년 말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591개, 청취자수 100만 명을 돌파하여 당시 라디오 관련 업무를 관장했던 미 상무장관 후버(Hoover)가 무선열풍(wireless fever) 시대라고 평가할 정도였다(Douglas, 1987).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여 러 나라에도 라디오 정기 방송이 차례로 개시되어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서구사회에서 라디오는 점차 오락 그리고 보도 기능을 수행하는 이 시기의 주도적인 매체로 발전해 갔다. 일본에서도 1925년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서 정기 방송이 시작되어 점차 보급되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본의 방송 개시 시기와 비슷하게 조선 114
총독부가 주도하여 라디오 방송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926년 경 성방송국이 설립되고 1927년 정규방송이 개시되었지만, 이들 나라와 비교 할 때 라디오의 보급은 매우 부진하였다. 일제 지배라는 특수한 시기에 우 리 사회에 출현하면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조선인의 필요에 의해 우리의 실 정에 맞는 방식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처음부터 일제 식민당국의 통제 속에 생성되면서 그 전개 과정이 여러 면에서 왜곡되었던 것이다(노정팔, 1986; 박기성, 1991; 김민남 외, 1993; 박용규, 2000). 일제 총독부의 지원 아래 일 본인이 주도하여 설립한 경성방송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정보와 문화 욕구에 부응하고, 일본의 식민지체제에 조선인을 순응하게 하기 위한 교화의 수단이었다. 1933년 조선어방송인 제2방송이 개설되어 비교적 독 립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활기를 띠었으나, 1937년 일본이 중일전 쟁을 일으키면서 국민정신 총동원 계획에 의해 라디오 방송도 비상시국을 인식시키는 철저한 총독 당국의 대변인 노릇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을 확대하면서 라디오 프로그램은 보도 제1주 의로 동경방송의 중계를 강화했고, 군국주의를 고취하고 황국신민화를 위 한 내용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 라디오가 전시 통제체제를 유지해 나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라디오 방송의 성격과 그 커뮤니케이션사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정적 역할을 전제하면서 다른 측면에서의 영 향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Robinson, 1999). 일제 강점기 라디오 방송의 역기능적인 영향이 매우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라디 오가 우리 사회에 수용되고 점차 정착되면서 라디오 청취자로서 조선인의 수용 양식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가 우리 사회에 소개되고, 보급이 늘면서 라 디오가 출현하기 이전 사회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라디오라는 매체를 매개로 한 대중문화의 초기 현상도 나타났다. 이에 따라 그 사회적 영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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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확대된 것이다. 당시는 특히 공동으로 청취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고려하면 새로운 매체로서의 신기함과 매력이 강력했던 라디오의 사회적 영향은 여러 면에서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제 강점기 라디오 방송의 수용 현상과 관련해서 논의되어 야 할 것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의 방송에 대해서 는 식민당국의 방송 정책, 경성방송의 성격, 경영 및 편성 등이 주로 논의되 어 왔다. 라디오의 사회적 수용이나 청취자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 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것이다(정진석, 1992). 라디오 방송의 수용 문제에 대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였다. 그러나 방송 수용자인 라 디오 청취자의 청취행위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방송 현상을 올바로 이해하 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청되는 연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이 장에서는 일제 강점기 라디오의 등장 과정과 라 디오 출현으로 새롭게 형성된 미디어 수용자인 라디오 청취자의 성격 및 라 디오 수용의 커뮤니케이션 현상에 대해 살펴본다.
라디오 소개 과정 라디오와 관련한 최초의 신문기사는 1920년 무선으로 음악을 전할 수 있 는 선진국의 첨단기술을 소개하는 간단한 외신기사였다(≪조선일보≫, 1920년 7월 23일). 그 후 1924년 총독부 체신국의 시험방송이 실시되기 직 전 “편리한 무선전화”라는 제목의 한 신문기사는 라디오를 무선전화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최근 구미 각국과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다고 보도하였다.
방송무선전화는 …전파가 사면팔방으로 퍼지는 성질을 이용하야 엇더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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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말을 보내게 되면 그 말이 전하여 갈 수 있는 거기에서는 그 수신기를 가진 이는 천 사람이고 만 사람이고 일제히 같은 시간에 들을 수 잇습니다. 그리하야 말 보내는 곳을 방송국이라 하고, 말 듯는 자를 청취자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편리한 것이 날마다 발달되야 오늘에는 수신기만 가지면 자기의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모든 것 음악이며 연설이며 신문이며 설교 같은 것을 어디가든지 들을 수 잇습니다. 혹은 자동차 위에 수신기를 달고 달려가는 차 안에서도 들을 수 잇으며 혹은 산보하러 나갈 때 양산에다 수신기를 달고 걸 어가면서도 음악가의 노래와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잇습니다. 혹은 들에 나가 밭을 갈 때에든지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일 때에라도 그 곁에다 수신기 만 하나 놓으면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모든 것을 굉이로 땅을 파며 톱으로 나 무를 켜면서 자미스럽게 들을 수 잇습니다(≪조선일보≫, 1924년 10월 6일).
방송무선전화, 방송국, 청취자 같은 새로운 용어들을 소개하고, 수신기 의 기능을 이해하기 쉽게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일제 시기 라디오 방송이 개국되기 이전부터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기능을 이해시키는 데에 기존 매체인 신문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이 주 목된다. 당시 신문은 “순전히 우리 조선사람의 손으로 방송국을 경영 못하는 것은 유감이나, 이러한 신기한 과학의 발전이 우리의 가정에 습려하는 이때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고 또 배워야 하겠다.”(≪조선일보≫, 1927년 1월 2일) 는 적극적인 수용 자세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신문들이 자사 의 라디오 시연회뿐만 아니라 각종 단체의 라디오 시험 방송에 대해 꾸준히 보도하고, 라디오가 무엇인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에 게 라디오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라디오 방송 설립이 추진되면서 이에 관심을 갖 고 총독부 체신국에 무선실험실을 설치하여 1924년 11월 무선시험방송을 시작하고, 1925년 6월부터 출력 20w로 매주 4회 정기적인 시험방송을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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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총독부의 무선시험방송이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라디오에 대한 공 개방송 행사를 개최한 곳은 ≪조선일보≫였다. 당시는 ≪조선일보≫가 창 간 이래 친일적 인사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24년 9월 민족주의 진영 인사 들이 경영권을 인수하여 사장에 이상재가 추대되고, 주필에 안재홍이 취임 하여 국민의 호응을 받기 시작했던 무렵이었다. ≪조선일보≫는 시연회 개최 전날인 1924년 12월 17일 “생활의 현대화 와 조선인”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문명과 과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적극 적으로 가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라디오 시연회의 의의를 설명하였 다(≪조선일보≫, 1924년 12월 17일). ≪조선일보≫는 12월 18일부터 3일 간 독자와 학생,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무선전화방송 시연회를 모 두 7차례에 걸쳐 개최하여 7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기 사를 보면 새로운 문명의 이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양복신사, 가정부인, 노 동자, 노인네 등 경성시민 각 계급을 망라한 사람들이 오후 7시에 시작하는 행사였음에도 6시부터 모여들어 경성공회당이 터질 지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해주는 소리에 신기함을 느끼며 감탄했다 는 것이다(≪조선일보≫, 1924년 12월 19일). 그 후 1925년과 1926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지방지국을 중심으로 주요 도시에서 라디오를 소개하는 대회를 개최하였다. 라디오 시 연회는 도쿄, 오사카, 상하이 등지의 방송을 청취하는 형식이었는데 전국 각지의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큰 호응 속에 진행되었다. 1926 년 4월 18일 ≪조선일보≫의 제14회 부인견학단은 체신국의 무선시험방송 실을 견학하여 직접 방송시설을 살펴보고, 수신기 소리를 청취하면서, “신 나는 유성기의 밴드 소리가 나올 때마다 가늘은 공중선을 쳐다보며 또는 체 신국 뜰 가득히 쾅 쾅 울려 퍼지는 수신기를 둘러싸고 그만 감탄만 연발하 는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꼭 요술 같다니까’”하였다는 것이다 (최은희, 한국방송공사, 1977,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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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여러 행사를 통해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가 우리 사회에 조금 씩 알려지게 되었다. 경성방송 개국 전후에는 방송국의 여러 시설과 방송국 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역할을 소개하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각 신문에 여 러 차례 게재되어 라디오 방송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조선에 처음 출현한 아나운서라는 방송국 내의 직업이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하는 기사도 있었 다(≪조선일보≫, 1927년 1월 8일). 일제 강점기 신문들의 이러한 라디오 소개 행사는 일본에서 1925년 동경방송 개국 이전 일본신문의 라디오를 소 개하는 기사와 행사를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미 구미 각국에서 라 디오 방송이 시작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며 보급되는 현실에 주목하고 라디 오를 소개하는 데 적극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 이러한 활동의 결과 경성방송 개국 무렵에는 보다 전문적인 라디오 강습 회가 개최되어 라디오 청취와 함께 라디오의 원리와 고장 수리 방법 등이 소개되었다. 경성방송도 개국 이후 라디오 청취회를 개최하여 라디오를 적 극 소개했고, 라디오 강습회도 개최하여 라디오의 원리와 수신기 고장 수리 방법 등을 강습하였다(≪조선일보≫ 1927년 6월 2일). 1933년 조선어방송 이 독립되어 이중방송이 시작된 이후에는 지방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지방 도시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으로 1년 반 이상 계속 현지 중계방송을 하 면서 일반 국민들에게 라디오 매체를 소개하고 지방 청취자를 확대해 갔다. 라디오가 우리 사회에 소개되는 데는 라디오 수신기에 대한 광고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라디오 광고는 드물었다. 라디 오 방송이 시작될 무렵은 수신기 가격이 매우 비싼 고가의 제품이어서 대중 적인 광고의 필요성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중방송이
1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에 대한 신문의 이와 같은 기사와 활동은 라디오가 도입되던 시기의 미국의 경 우와 비교가 된다. 더글러스(Douglas, 1987)에 의하면 1915년에서 1922년 이전까지 미국의 신문과 잡지들 은 라디오에 대해 무시하고 관심을 갖지 않다가 1922년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라디오에 대한 사람들의 폭발적 반응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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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27년 2월 21일
사진 4-1. 1927년 경성방송 개국 무렵의 라디오 광고
시작되고 보급품의 수신기가 출현하였던 시기에도 광고는 적었다. 보통 사 람들이 구입하기에는 여전히 쉽지 않은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라디오가 우 리 사회에 처음으로 출현할 당시 라디오 광고는 무엇을 어떻게 알리려고 하 였는지 그 중요한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표 4-1과 같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 의 라디오 광고는 ≪조선일보≫가 라디오 시연회를 개최하기 하루 전날인 1924년 12월 17일 ≪조선일보≫ 광고 면에 게재된 것이었다. ≪조선일보≫ 의 시연회를 주관한 일본의 일화무선전화전신기제조소가 “고급무선전화 사용기계급부분품”이라는 제목으로 그 이름과 가격을 설명하고, 사진으로 제품의 모양을 소개한 것이었다. 그 후 1927년 경성방송 개국 무렵 출현한 합명회사 DK라듸오상회는 방송이 개시되자 “라듸오는 크로슬레”, “대가와 유지비지렴, 고장절무한 실용라듸오”라는 문구와 함께 사진을 담은 신문광 고를 1회 게재하였다. 이 광고도 사진이 있어 라디오 모양을 이해하기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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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 후에는 라디오 광고가 거의 발견되지 않다가, 1933년 이중방송이 개 시된 이후 “10킬로이중방송개시기념”의 제목으로 라디오 광고가 게재되었 다. 일본의 내셔널회사에서 제조한 수신기 사진과 함께 “품질우량가격저렴 -우리의 청각신경을 만족케하는 진육성을 발휘하는 라디오 수신기…풍부 재고하오니 물실차기하시고 속속하명하심을 기도합니다”라는 내용의 광 고였다. 이처럼 초기 라디오 광고는 주로 라디오 수신기의 실제 모양을 제 시하고, 가격이나 성능 등에 대해 소개하였다. 광고의 기본 목표가 새롭게 출현한 매체 자체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 제공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때부터 라디오 수신기가 광고를 통해 판매하는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고
표 4-1. 라디오 수신기 관련 주요 광고 게재일 1924. 12. 17
게재신문
광고주
일화무선전신기제조소 조선일보 (일본회사)
주요 내용 무선전화사용기계 및 부품의 사진과 이름, 가격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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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컴패니(〃)
전지 사진과 설명, 수신기 및 진공관 근일착하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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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본양행활동사진부(〃)
무선전화 및 학술활동 사진 판매, 임대, 제작, 교환 안내
1927. 2. 21
조선일보 합명회DK라듸오상회
“라듸오는 크로슬레-우수세계제일위”의 문구와 사진, 정가표 근정 안내
1933. 4. 11
동아일보 광운상회 종로지점
“십킬로이중방송개시기념, 우량라디오 수신기대 특매” 문구와 사진 및 설명
광운상회본점, 종로지점
건전지계왕자 사진 및 설명, 취급품목에 各種ラデオ製作 포함
193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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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5. 4
조선일보
1937. 1. 6
〃
동일전기상회
영업 안내에 高級ラデオ 포함
1937.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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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전기상회
전기구, ラデオ상 개점, ナショナル제품 전문도 매 안내 및 사진
1937. 3. 28
〃
반도전기사
“라듸오 ·電器具 仕入은 반도전기사로” 문구와 사진
1937.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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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전기공업사
영업 안내에 ラデオ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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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37년 경성방송의 조선어방송인 제2방송의 출력이 50kw로 증강된 무 렵 라디오를 주 제품으로 광고하는 사례는 없었지만, 축음기, 축전지, 전기 기구 등을 제작 또는 수입 판매하는 회사의 취급 제품 안내에 각종 라디오 도 포함된 광고 사례는 꾸준히 게재되었다. 그 경우 라디오를 일본어로 표기 한 경우가 많았고, 사진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제 라디오의 기능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음을 말해주며, 광고주가 다양한 것은 라디오 수입 판매상이 많이 증가했음을 시사한다.
라디오 접촉의 사회적 조건
일본어 해독 상황 일제 강점기 라디오 방송은 개국 당시부터 일본어방송이 그 중심이었고, 1933년 4월부터 1943년 6월까지 조선어 전용 방송이 제2방송으로 독립되 어 운영되었어도 일본어방송 청취가 가능한 사람들은 제1방송을 많이 청 취하였다. 1935년부터 방송시설 확충을 위해 설립된 지방방송국의 경우도 일본어 단일 방송으로 운영된 곳이 더 많았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시기 방 송 청취의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이 어느 정도 일본어를 해독할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성방송국이 개국한 1927년 일본어 해독인구는 표 4-2에서 알 수 있듯 이 전체 인구의 6.33%였다. 일본이 통감부 시기부터 일본어 교육을 적극 유 도했던 것을 고려하면 높은 수치라고 하기는 어렵다. 개국 이후 일본어방송 을 위주로 편성된 경성방송이 경영난에 빠졌던 것은 비싼 수신기 가격과 함 께 당시 일본어 해독인구가 많지 않았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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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4-2.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률 추이 1927 약간 해독 일본어 해독자
753716 (4.05)
총인구
단위: %
1933
1937
1941
보통 회화 보통 회화 보통 회화 보통 회화 약간 해독 약간 해독 약간 해독 가능 가능 가능 가능 424530 (2.28)
817984 (4.05)
760137 1201046 1196350 1884733 2087361 (3.76) (5.54) (5.52) (7.88) (8.73)
1178246 (6.33)
1578121 (7.81)
2397396 (11.06)
3972094 (16.61)
18631494
20205591
21682855
23913063
출처: 조선총독부시정연보 및 조선총독부통계연보 해당 연도판.
1931년 일본이 자본시장 확대를 위해 만주 침략을 단행하면서 식민지 조선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전시체제로 개편되었다. 이와 함께 노골적인 민족말살정책으로 상시적인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고, 보통학교에 부설된 간이학교와 일본어 야학회, 일본어 강습회 등을 통해 일본어 교육을 강화했 다(이명화, 1995). 모든 공문서와 관공서 업무에서 일본어만을 사용하게 하 였고, 관리나 교원으로 일본어 상용의 비협조자는 인사상의 불이익이나 처 벌을 당하였다. 그러나 조선어방송이 시작된 1933년에도 일본어 해독자는 7.81%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성방송의 경영을 정상화시키고 총 독부의 홍보매체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방송 위주로는 한계를 느끼 면서 내선일체를 강요하여 조선어를 말살하려는 식민지 통치 정책에도 불 구하고 이율배반적으로 조선어방송의 독립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본어 상용의 강요가 효과를 보아 경성중앙방송의 제2방송의 출력이 50kw로 증강되고, 개국한 지 10주년이 되었던 1937년에는 전체 조선인의 11.06%가 일본어 해독이 가능했다. 그 후에도 꾸준히 증가하여 1941년 16.61%에 달했고, 그 후의 통계는 기록으 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증가 추세로 보아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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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치는 식민지 후기에 일본어 교육과 일본 어 사용이 강력하게 추진된 데 비하면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만, 일본어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조선인으로서 일 본어방송 청취자도 늘 수 있었던 것이다.
라디오 수신기 가격과 소득수준 어느 정도의 소득수준인 사람이 라디오 수신기를 소유할 수 있었는지 살펴 보기 위해 먼저 수신기 가격과 청취료 등 관련 가격의 변화 양상을 살펴본 다. 경성방송 개국 이전에 혼자서 들을 수 있는 라디오 가격이 10∼15원 정 도이고, 10명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 100원 정도, 5000명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 400원 이상, 1000원 정도였다(≪조선일보≫, 1926년 4월 20일). 개국 당시 라디오의 값은 광석식으로 안테나를 포함해 6원에서 15원이었고, 진 공관식으로 확성기를 이용해서 듣는 세트는 40∼50원에서 100원이었다. 전지식 진공관 수신기는 100∼500원 정도로 부자가 아니면 가설하기 어려 웠고, 가장 좋은 것이 1000원 정도의 슈퍼헤텔로다인수신기였다고 한다 (최겸철, 한국방송공사, 1977). 이렇게 가격이 비싼 데다가 전지와 그 밖의 소모비가 월 2원 정도였고(律川泉, 1993), 여기에 청취료가 월 2원이었으 니 매달 라디오 수신을 위해 들여야 하는 비용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에서도 청취료가 월 1원이었는데, 그보다 소득수준이 훨씬 낮았던 식민지 조선에서 청취료가 2원인 것은 너무 비싸다는 여론이 일고, 청취자수의 확 대를 위해 1927년 10월 1일부터 청취료가 월 1원으로 인하되었다(≪조선 일보≫, 1927년 10월 1일). 1928년 미국에서 교류전기식 수신기가 발명되어 사용이 간편하고 가격 이 저렴한 수신기 보급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1930년 서울 시내 라디오 조 합은 라미에타 4구 세트 구입자는 부속품 포함하여 50원에 공급하면서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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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분 청취권을 증정하는 방식으로 라디오 구매를 유도하였다. 1933년 이중 방송을 실시하면서 경성방송에서 주로 보급하던 수신기는 교류식 수신기 로 점차 전지식 수신기를 대체했다고 한다(한국방송공사, 1977). 조선방송 협회는 수신기 보급을 늘리기 위해 자동차 라디오 선전대, 시장 라디오 선 전대를 조직하여 판매 촉진 활동을 벌였다. 지방 무료 순회 진료반을 파견 하여 고장 난 수신기를 수리해 주는 서비스 제도도 더욱 확대하였다. 1935년 부산방송을 시작으로 지방방송이 출현하고, 1937년 4월 제2방 송이 50kw로 출력이 강화되면서 전국에 걸쳐 난청 지역이 거의 없어지고, 야간에는 20원가량의 간이 수신기로도 청취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무렵에는 전기 상점뿐 아니라 악기 상점에서도 라디오를 판매하였는데, 가 격이 가장 비싼 것이 185원, 싼 것이 78원이었다(律川泉, 1993). 청취자배가 운동 등 수신기 보급을 확대하는 노력이 계속되었고, 1938년 4월 라디오 청 취료가 월 1원에서 75전으로 인하되었다. 1940년대부터 슈퍼수신기가 대 중화하였고, 성능이 개선된 무변압기 수신기도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과연 어느 정도의 소득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가격의 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었는지 당시의 직업구조와 임금상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928 년 노동자 유형 조사에 의하면 노동자는 약 114만 명인데 이들의 40.8%가 보통 인부나 날품팔이 미숙련노동자였고, 비생산적 가사사용인이 28%, 공 장 노동자는 3.3%였다(이홍락, 1994). 그런데 경성방송의 개국 초기 고용 인 50인 이상의 대기업에서 일하는 조선인 남자 성년공의 일일 평균 임금은 계속 줄어들어 1929년 1원에서 1930년 93전, 1934년이 90전이었다(이여 성·김세용, 1934). 1934년 이들이 월 25일을 일하면 월소득이 22원 50전 이다. 이 무렵 쌀 한 가마는 4∼5원이었다. 1930년 보급형 수신기가 50원 정 도였으므로 라디오를 구입하는 것은 대기업 노동자들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면서 이들보다 임금수준이 훨씬 낮았던 영세 한 중소기업 노동자나 일용 날품팔이들의 경우 라디오 구입은 생각도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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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을 것이다. 1928년의 조사에서 노동자의 28%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 던 가사사용인인 식모는 먹고 자고 월 6원을 받았고, 인력거꾼은 잘하면 하 루 50전, 소년 인쇄공이 하루 25전, 여직공이 하루 46전, 여점원이 월 21원 정도 수입이었다(≪제1선≫, 1932). 농민층의 경우를 보면, 1932년 함경북도 경원군의 가계수지 조사에서 상농으로 분류된 한 농가의 연 수입은 314원 43전이었는데 지출 항목에 신 문 구독료, 라디오 청취료 등 문화비는 들어 있지 않았는데도 9원 62전이 적 자였다. 중농으로 분류된 사례의 연수입은 187원 58전으로 연 58원이 적자 였다. 소작농으로 보이는 하농은 연수입이 69원 88전이었다. 연수입 435원 으로 대지주로 분류된 농가만이 연 115원 57전의 순소득이 있었으나, 지출 항목에 문화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조사월보≫, 1932년 12월호, 오 성철(2000), 166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사례들을 일반화하는 데는 문제가 있겠지만, 농민 가운데서 주로 대지주들만이 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는 실정 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는 경제수준이 되어도 이들 모두 라디오를 구입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사무직과 전문직의 경우를 보면, 1920년 창간 이래 ≪동아일보≫ 기자 의 봉급은 대부분 60원이고, 간부급은 70∼80원이었다(동아일보사사 권 1, 1975). 1932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로 가장 인원이 많았던 판임관 대우의 평균 봉급이 38원 66전이었고, 공립보통학교 교사의 평균월급은 1924년 이래 거의 비슷하여 남자 54원, 여자 48원이었다(조선총독부통계 연보, 1932년판). 1932년 은행원 월수입이 70원, 의사가 75원 정도였으며 (≪제1선≫, 1932), 은행원, 의사, 귀금속 시계상, 신문기자, 교수, 관리, 회 사원 등의 직업을 가진 상류층에 해당하는 신가정에 대한 한 설문조사는 평 균 생활비가 90원으로 조사되었다(≪신동아≫, 1932). 이러한 소득수준으 로 볼 때 대체로 상류층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득수준의 사람들은 매우 적은 수였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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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우리 사회에 새롭게 출현한 라디오는 이 시기 소유자의 사회경 제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최첨단의 고급 뉴미디어였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라디오 청취자 규모와 성격
라디오 수신기 보급 상황 경성방송국의 개국 이전에 총독부 체신국의 시험방송이 실시된 1925년 무 렵 사설 무선전화 설치 허가를 얻은 사람이 70여 명 있었고, 허가 없이 설 치한 곳도 수백 곳이었다고 한다(한국방송공사, 1977). 총독부 당국은 외 국방송 청취를 제한하고자 총독당국이 허가한 무선방송청취용 수신기가 아니면 방송수신기 설치와 사용을 금지하였다. 체신국은 1주일에 두 번 주 간에 하던 시험방송을 그해 6월부터 1주일에 네 번 오후 7시 30분에서 9시 까지 늘려 방송하였는데, 매주 목요일은 조선어로 시험방송을 하면서 사람 들의 관심을 끌었고, 1926년 7월에는 무료 공개 라디오 시연회도 개최하였 다(≪동아일보≫, 1926년 7월 15일).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무렵에는 신 문사들이 적극적으로 라디오를 소개하는 행사를 전국 각 지역에서 개최하 여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이해를 높였던 기간이었다. 그리하여 1926년 11월 현재 라디오 청취 인가를 받은 사람은 체신국 시험방송 수신 허가를 받은 사람이 944명, 일본방송 수신 허가를 받은 사람이 286명으로 늘었다. 적은 수였지만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시 험방송 청취가 가능한 서울과 서울 근교 거주자들로 대부분 일본인들이었 을 것이다. 1926년 12월 24일 경성방송국이 준공되고, 방송 개국 직후인 1927년 2월
4장_ 일제 강점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127
표 4-3. 라디오 등록대수와 가구당 보급률 연도 1926 1927 1928 1929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4
단위: %
조선인
일본인
등록대수
보급률
등록대수
보급률
336 949 1353 1573 1448 1754 2738 6401 9584 14537 22777 40107 48966 75909 116935 144912 149653 168884
0.01 0.03 0.04 0.05 0.04 0.05 0.07 0.17 0.25 0.37 0.56 0.99 1.19 1.84 2.76 3.31 3.26 3.7
1481 4161 7102 8558 9410 12493 17641 25444 30660 37958 49349 71168 78433 90425 109694 125882 126047 131348
1.27 3.50 5.79 6.72 7.45 9.58 13.58 18.75 21.68 26.21 32.28 44.93 49.38 56.23 66.28 73.35 70.28 71.8
출처: 조선총독부통계연보 해당 연도판. 가구수도 같은 연보에 의함. 1944년은 宮田節子(1985). 이영낭 역(1997).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 3쪽.
당시 전체 라디오 등록대수는 1440대였다. 개국 1개월이 지났어도 등록된 청취자수는 별로 늘지 않아 1972명이었다(≪동아일보≫, 1927년 4월 1일). 출력이 1kw에 불과하여 가청지역이 경성과 그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일본어방송이 3:1의 비율로 방송되었으므로 수신기 증가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실제 청취자수는 6000∼7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律川 泉, 1993). 도청과 미등록 청취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개국 전에는 서울에
라디오상이 몇 군데 되지 않았으나 이 무렵에는 라디오상이 20군데 넘게 번 창했다. 당시 허가 없이 라디오를 시설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수신기만 구입하고 체신국에 라디 오 시설 원서를 제출하는 사람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표 4-3과 같이 128
라디오 등록대수가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당시 전체 인구에 비하면 매우 미 미한 수준이었다. 1928년 일본 본토의 방송출력이 증강되어 조선에서도 청취가 가능해지 면서 경성방송은 일본방송을 중계하기 시작하였다(한국방송공사, 1977). 이에 따라 조선어방송은 밤 9시 40분에서 11시까지만 방송하였다. 1929년 에 들어서서 경성방송은 경비 절감과 청취자 확대를 위해 일본방송 중계시 간을 늘리고 조선어방송 시간은 더 단축하였다. 일본 현지의 방송 청취가 가능해지면서 일본인 청취자들이 증가하여 1929년 11월 등록된 수신기가 1만 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이후 전쟁과 관련한 신속한 뉴스 보도에 대한 수요가 늘어 전체 라디오 등록대수가 다소 늘어났다. 그러나 경성방송의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점차 일본방송을 중계하는 형태로 운영 되면서 조선인의 수신기 등록대수는 표 4-3에서 알 수 있듯이 경성방송 개 국 이후 1932년까지 거의 늘지 않았다. 이렇게 라디오 등록대수가 적어 경 성방송 개국 이래 계속되었던 경영난이 개선되지 않자, 그 근본적인 타개책 으로 1932년 경성방송의 출력을 10kw로 증강하고, 1933년 조선어 전용방 송이 제2방송으로 독립된 이후에야 조선인의 가구당 라디오 수신기 보급률 이 1000가구에 1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1935년부터 지방방송이 설치되기 시작하고, 1937년 4월 제2방송의 출 력이 50kw로 증강되어 전국적으로 방송 청취가 가능해지면서 비로소 100 가구에 1대 이상이 보급되었다. 이것은 특히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 발하고 식민지 조선을 전시체제로 몰아가면서 국민생활 전반에 대한 일제 총독부의 간섭과 통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비록 식민당국의 통제 아래 제 공되는 정보이긴 하지만 전쟁과 관련한 보다 신속한 정보에 대한 수요가 커 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도 매체였던 신문이 1930년대 후반 이후 보급이 크게 증가한 경향과 유사
4장_ 일제 강점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129
하다(김영희, 2001). 거기에 수신기 구입을 권유하는 조선방송협회의 청취 자배가운동이 지속되었고, 1938년 4월부터 청취료가 월 1원에서 75전으로 인하되고, 라디오 수신용 전기요금도 수신기 한 대당 전등요금의 70%를 부 과하던 데서 60% 부과로 인하되면서 라디오 보급이 촉진될 수 있었을 것이 다(≪조선일보≫, 1938년 5월 22일). 그리하여 1941년 말 현재 100가구에 3 대 이상이 보급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태평양 전역으로 전쟁을 확대하면서 1942년 봄부터 전파통제를 실시하고 방송출력을 저하시키는 조치를 단행 하였다. 출력 저하로 전국적으로 난청 지역이 늘면서 1942년에는 수신기 보급이 둔화되고, 보급률도 1941년보다 더 낮아졌다가, 1944년에는 다소 늘어났다. 1945년 해방 당시 수신기 등록대수는 조선인 19만 2931대, 일본 인 13만 1758대, 외국인 1655대로 모두 32만 6343대였다고 한다(유병은, 1998). 그러나 이와 같이 라디오 등록대수가 더디나마 증가했던 것은 주로 도시 를 중심으로 한 현상이었고, 중소도시와 농촌은 1930년대 말에도 구경조차 못한 곳이 대부분이었다(≪동아일보≫, 1939년 5월 20일). 1941년 총독부 일본인 관리가 “나는 농촌 사람 상대의 지방행정 일선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신문은 고사하고 라디오, 영화는 꿈같은 이야기이다”고 지적한 것 처럼 당시 보통 한국 사람들이 라디오를 소유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 다(田邊正朝, 1941, 律川泉(1993), 105쪽에서 재인용). 특히 지방은 전기 보 급이 매우 빈약한 데다, 라디오 수신기가 품귀를 빚으면서 가격이 자꾸 올 랐던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동아일보≫, 1939년 8월 30일). 하지만 당시 라디오 청취는 개인 또는 가족 단위의 청취만이 아니라 이웃 사람들과 함께 청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방송에서 라디오 수신기의 보급과 수리를 담당하던 한 직원은 “수신기에서 방송 소리 가 잘 울려 나오면 그 동네 여러 유지란 분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신비로운 방송을 들으며 축배를 들었고”라고 회고하였다(최겸철, 한국방송공사,
130
1977, 66∼67쪽). “쌀 열 가마니보다 더 비싼 라디오를 사들인 시골 부잣집 사랑방에는 저녁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공짜’로 라디오 청취를 즐기던” 시절이었던 것이다(이내수, 2001, 88쪽). 총독부 체신국에서도 중 일전쟁 이후 내외정세를 좀 더 신속하게 알리고자 조선방송협회가 400개의 라디오 수신기를 구입해서 농촌 지역에 무료로 보급케 하여 집단 청취할 수 있게 하였다(≪동아일보≫, 1939년 1월 4일). 또한 등록하지 않고 도청하 는 경우가 등록 청취자의 4배로 추산할 정도로 상당수에 달했다는 것을 보 면(≪조선일보≫, 1937년 11월 27일), 실제 라디오 청취자수는 등록대수의 몇 배 또는 그 이상으로 훨씬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국내 거주하는 일본인의 라디오 보급률은 이중방송이 개시되기 이 전인 1932년에도 100가구당 13.58대가 보급되었고, 1940년대에 들어서면 서 가구당 보급률이 70%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일본의 라디오 보급률이 1930년 8.3%, 1941년 45.8%였던 것과 비교할 때(山本文雄 外, 1981),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라디오 소유가 매우 급속하게 이 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40년대 들어 조선인의 수신기 등록대수가 더 많았지만, 보급률을 보면 그 격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컸다. 내 선일체, 황국신민화라는 식민당국의 정책적 구호와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 제 식민지 피지배민족으로서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차별적인 경제정책에 따른 소득수준의 차이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
청취자의 성격과 청취 경향 이처럼 라디오 보급이 저조한 실정이었지만 그래도 미미하나마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표 4-4의 청취자 직업별 분포에서 알 수 있듯이 공무원, 상공 업자, 전문직 등에 의해 꾸준하게 라디오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었 다. 표 4-4를 보면 이중방송 개시 이전 조선인 라디오 청취자는 상공업자가
4장_ 일제 강점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131
표 4-4. 라디오 등록 청취자 직업별 분포2 1932년 말 공무원 은행·회사원 상공업 농업 수산업 관공서·학교
1935년 말
1938년 3월
238 (8.32)
2665 (17.85)
12605 (29.04)
363 (12.69)
2675 (17.92)
8694 (20.03)
1482 (51.82)
5929 (39.71)
11171 (25.74)
235 (8.22)
1145 (7.67)
2307 (5.31)
6 (0.21)
52 (0.35)
72 (0.17)
48 (1.68)
271 (1.81)
486 (1.12)
은행·회사
32 (1.12)
140 (0.94)
328 (0.75)
요리점·여관
62 (2.17)
458 (3.07)
1144 (2.63)
의사·간호사
1688 (3.89)
121 (4.23)
483 (3.23)
학생
47 (1.64)
138 (0.92)
512 (1.18)
교육·종교·법률가
68 (2.38)
534 (3.58)
1184 (2.73)
조합구락부
10 (0.35)
92 (0.62)
136 (0.31)
무직
85 (2.97)
295 (1.98)
2808 (6.47)
기타
63 (2.20)
52 (0.35)
272 (0.63)
합계
2860 (100%)
14929 (100%)
43407 (100%)
출처: 조선연감(1934, 339쪽; 1937, 334쪽; 1939, 720쪽).
절반을 넘고 있다. 초기 가입자는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었 음을 알 수 있다. 일본어로만 방송되었던 주식과 미두시세를 증권거래소 현장에서 보도하는 주식기미(株式期米)와 같은 경제정보를 신문보다 훨씬 빠르게 제공해 주는 라디오의 속보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후 공무원과 회사원들의 비중이 점차 늘어 비슷한 비율을 보이고 있다. 경제적 여유 계층에 이어 식민지 시기 지식인들로서 대부분 일본어를 알아 일본어방송인 제1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라디오 소유가 증가한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관공서, 학교, 은행의 공공기관과 요리점,
2 조사기관과 조사시점이 달라 이 표의 수치와 표 4-3의 1932년, 1935년 라디오 등록대수 전체 수치 는 차이가 있다.
132
여관 등에서의 라디오 설비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그 만큼 증가했을 것이다. 이처럼 1930년대 이후 특히 조선어방송이 독립되어 실시된 후 라디오는 다양한 사회계층의 관심을 끌면서 새로운 매체로 자리 잡아 갔다. “조선에도 라듸오가 일반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야 서울만 해도 왼만치 밥술이나 먹는 집이나 심지어 저급직공의 집에까지도 라듸오가 장 치되였고 지방만 하여도 인테리 가정, 주식추인, 미두노리에 귀를 쓰는 사 람, 문학청소년의 집 같은 데까지 라듸오가 장치”(안테나생, 1936, 274쪽) 되었다는 지적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점차 라디오 보급이 늘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4-5의 라디오 수신기의 각 도별 등록대수는 조선인의 라디오 청취의 또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이미 언급했듯이 경성방송의 개국 당시 출력은 1kw로 가청범위가 서울과 그 근교에 불과했다. 1933년 출력이 10kw로 강 화된 이후에도 전국이 가청범위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지방방송 설립 지역 을 보면 경기도, 황해도, 충청남도, 강원도 일부 지역이 경성방송 청취가 가 능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중방송이 실시된 1933년에도 경기도 지역의 라 디오 등록대수가 3529대로 전체의 55%를 차지하여, 라디오의 소유가 경성 을 중심으로 매우 한정된 지역에서의 현상이었던 것은 소득수준과 함께 이 러한 청취 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앞에서 살펴본 직업별 분포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공업자, 공무원, 전문직 종사자들이 경성지방에 많이 거주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후 1937년에는 1만 8530대로 46.2%, 1942년에는 5만 9205대로 39.6%와 같이 점차 낮아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경성을 포함한 경기도 지역 주민들의 소유가 4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였다. 1937년 이후 평안남도의 증가율이 두드러진 것은 평양방송이 1936년 개국과 함께 조선어방송인 제2 방송이 실시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1942년의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경우도 함흥, 청진방송에서 조선어방송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시행되면서
4장_ 일제 강점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133
표 4-5. 각 도별 등록 라디오 대수 1933
1935
1937
1939
1942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경기도 충청북도
11588
3529 16960
7613 27937 18530 32227 35496 39920 59205
368
115
568
355
1029
721
1127
1049
1428
1339
충청남도
992
227
1426
557
2455
1427
2913
2094
4280
3469
전라북도
1126
186
1515
476
2736
1390
3808
2415
5447
5041
전라남도
1208
195
1558
454
2949
1571
3625
2212
5414
5274
경상북도
1413
313
1785
498
3223
1211
4057
2584
6661
6423
경상남도
3042
331
5619
850
9595
2101 12599
3681 15883
8160
황해도
629
168
1111
859
2037
1784
2749
3092
4126
6866
평안남도
748
299
1678
720
5539
3970
7024
7722
9737 16223
평안북도
696
230
1117
550
2604
2061
3553
3982
4819
6950
강원도
1166
369
968
533
1775
1515
2273
2388
3511
5158
함경남도
1311
195
1527
591
3958
2351
7085
5779 11522 14703
244
2126
481
5331
1466
7385
3415 13299 10842
함경북도 합계
1157 25444
6401 37958 14537 71168 40107 90425 75909 126047 149653
32014(169)
52853(358)
111838(563)
167049(715)
277281(1581)
* ( )의 숫자는 외국인 등록 청취자수 * 출처: 조선총독부통계연보 해당 연도판
인구에 비해 라디오 등록대수가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디오 수신기 보급에 조선어방송의 시행 여부가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방송협회는 가청범위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방 청취자들을 확보하 기 위해 1, 2차 전조선 방송망 확충계획을 수립하고, 1935년 부산방송을 시 작으로 표 4-6과 같이 지방방송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표 4-5 의 1933년 조선인 라디오 등록대수에서 크게 보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남도 지역의 청취자들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청취자들은 경성방송을 수 신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방송이나 다른 나라의 방송을 수신한 것으로 볼 수
134
표 4-6. 지방방송 설치 상황 부산
평양
청진
이리
함흥
대구
광주
개국일
1935.9
1936.4
1937.6 1938.10 1938.10 1940.10 1942.3
조선어 방송
1941.8
1936.4
1941.8
원산
신의주
마산
개국일
1943.7
1943.8
1943.4
1942.4
1939.4
1041.4
해주
성진
강릉
목포
대전
1942.3
1943.7
1942.3 시행 안됨 1944.11
춘천
청주
1943.8 1943.11 1943.11 1944.12 1945.6
조선어 1943.11 시행 안됨 시행 안됨 1943.11 시행 안됨 시행 안됨 시행 안됨 시행 안됨 방송 * 강릉은 이동방송중계소의 형태로 운영되다가 방송국이 됨. * 출처: 한국방송사(1977), 102∼113쪽.
있을 것이다. 1933년 조선인 소유 등록 라디오 대수의 32.9% 이상이 이에 해당된다. 1935년 부산방송이 설립되었지만 1941년 8월 조선어방송인 제2 방송 설비가 확충되기 이전은 일본어로만 방송되었으므로 이때에도 경성 방송의 제2방송 가청범위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청취자들은 일본방송 을 수신한 것이고, 부산지역은 일본어방송인 부산방송 또는 일본방송을 수 신한 것이었다. 1935년 조선인 소유 등록 라디오의 34.2% 이상이 이에 해 당된다고 할 수 있다. 1936년 4월 개국한 평양방송의 경우는 개국 다음날부터 이중방송을 하 였다. 경성중앙방송의 가청지역이 아닌 지방에서 조선어방송 수신이 처음 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조선어방송 수신이 가능해진 것은 1937년 4월 경성중앙방송의 제2방송의 출력이 50kw로 증강된 이후 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성방송 개국 1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 다. 그러나 제2방송의 출력을 당시 일본의 동경방송보다 더 증강한 것은 중 국, 러시아 등에서 전송하는 조선어방송 수신을 막기 위한 조치였는데, 증강 된 출력으로의 방송 전송은 밤에만 시행했다고 한다(한국방송공사, 1977). 이러한 실정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라디오 청취의 많은 부분이 조선 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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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방송이나 일본 현지의 방송 수신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지 식인 계층은 제1방송을 주로 듣고, 제2방송은 보조적으로 청취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김관, 1937).
라디오 수용의 커뮤니케이션 현상 경성방송이 개국하기 이전 총독부 체신국이 시험방송을 실시하고 라디오 청취회 등을 개최하면서 라디오 방송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형성되어 갔던 무렵, 새로운 매체에 대한 호기심과 감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라듸오-현대과학 문명의 극치-지금 우리의 귀에는 세계의 움지김! 지구가 도 라가는 소리-정치가의 가라구리, 상인의 사기! 부르주아의 배불리는 소리! 노동자의 노호하는-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니이것마는 들을 수 잇것마는 7, 80원짜리 수화기가 없어서 못 듣고 잇다. …라디오는 사실상 신문을 정복하 고 있다. 그것은 재언도 소용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돈 없는 동무 여!…낮에는 신문이고 밤에는 유성기인 라디오…우리의 생활과는 아직도 멀다…문명이 운다. 설어워한다. 라듸오가 운다. 조선의 라듸오! 그것은 우 리의 것이 아니다. 조선의 라디오-문명-그것은 정복자의 전유물이다.…잇는 사람의 작난거리가 되고 말아버린 문명의 산물(승일, 1926, 104∼105쪽).
라디오의 기능과 역할, 영향에 대해 이해하면서 라디오 방송국을 조선 인이 주도하여 설립하지 못하는 정치 현실과 값비싼 수신기 구입이 어려운 경제 사정 등 식민지 조선의 실정을 우울하게 바라본 비관적인 인식도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를 빠르게 수용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먼저 출현한 것은 라디오를 영업활동에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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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상점이나 구미양행에서 확성기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라듸오를 들려 주는 것은 라듸오기계 판매업이니까 말할 것 없으나 박덕유양화점에서 일백 십여 원짜리, 조선축음기상회에서 백여 원짜리 확성기를 점두에 놓고 손님 에게 들려주기 시작하니까 남대문통의 백상회에서도 사백여 원짜리 라디오 를 놓았다.…이발소, 목욕탕, 식당 같은 데에서 사오십 원짜리로도 훌륭하니 라듸오를 손님에게 들려준다면 정해놓고 손이 많이 꼬일 것이요, 술 파는 집에 서 그렇게 하면…확실히 술이 더 팔릴 것이다(경성탐보군, 1927, 106∼107쪽).
경성방송이 개국하자 경성 중심가의 상점들은 라디오를 가게 앞에 설치 하고 그 소리를 들려주어 손님을 유인하는 상술을 개발한 것이다. 라디오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도시의 풍경이었다. 또한 라디오 안테나는 점차 가정에서 그 용도를 찾아 유성기와 함께 상류층의 문화생활 의 필수요소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경성방송 개국 직후인 1927년 3월 청취 희망 조사 결과에 의하면 뉴스 프로그램, 관현악단 연주, 영화 해설, 비파, 피아노 연주, 방송극, 취미 강좌, 수양 강좌, 퉁소, 니나와부시, 바이올린 연주 등이 상위를 차지하였다(律川 泉, 1993). 개국 이후 보도방송은 조선 거주 일본인들을 위해 주로 주식기미
(株式期米) 방송을 위주로 하여 호응이 높아, 제1회 청취자여론조사에서 42 개 종목 가운데 뉴스가 4.8%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방송 초기부터 라디오 뉴스에 대한 선호가 높았다는 것은 방송의 속보성을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 라디오 방송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타난 반응들도 있었 다. 경성방송 개국 초기에 방송하러 온 사람들 가운데는 청취자 중에 자기 보다 높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마이크에 대고, 인사한 후 방송을 시 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유병은, 1998). 다음은 라디오라는 새로 운 매체를 통해 대중예술인으로 전환해 간 기생들이 라디오의 속성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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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방송사료보존회 편(1994). 제3집
사진 4-2. 경성방송의 국악 프로그램 연주 모습
하고, 적응해 간 과정을 잘 보여준다.
방송이 차츰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소리 잘하는 기생이면 의 례 방송을 해야 되고 거기에 끼이지 못하면 창피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아무리 잘났다는 기생들도 방송실에만 들어오면 절에 간 색시모양 아 나운서의 눈치만 보고 마이크 앞에 가서는 다리가 떨리고 말문이 막히는 모 양이었다. …발성이 잘못되면 무슨 잘못을 저지른 듯이… 아나운서를 보고 “선생님 미안해요”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판에 …청취자들은 뜻밖에 이 소리 를 듣게 되기도 했다. …차차 방송에 익숙해진 기생들은 …삼복더위가 심할 때는…남자 아나운서의 등을 밀어 내쫓고 여자끼리만 앉아서 적삼을 벗고 치마도 벗고 나중에는 버선까지 벗어던지고 멋들어지게 방송하고 가는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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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나타나게 되었다(조병인, 한국방송공사, 1977, 28∼29쪽).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창과 판소리를 부르고, 가야금, 대금 등의 국악연주 를 하던 기생이라는 신분의 여성과 광대로 취급되던 사람들이 방송을 통해 대중예술인으로 전환해 갔다.3 1934년 1월 8일 경성방송의 프로그램이 일 본에 중계되었는데, 그 프로그램의 하나로 평양기생 출신 왕수복이 유행가 를 부른 것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이었다. 그 이전 사회에는 없었던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는 이러한 수용 과정의 모습들을 보이며 차차 우리 사회의 중요한 미디어의 하나로 자리 잡아갔다. 그리하여 조선어방송이 제2방송으로 독립한 1933년에는 라디오가 카페의 고객흡수 광고나 이발소의 심심파적과 광고축음기를 대신하는 역할보다는 가정에서의 계몽, 취미 및 오락매체로서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 인식되 었다(윤백남a, 1933). 전통적으로 하우스는 있으나 홈은 없는 조선의 가정 에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온 가족이 단란하게 하룻밤을 유효하고 재미있 게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윤백남b, 1933) “라디오가 금일과 같 이 발달한 결과, 론돈에서나 제네바에서거나 강연이라도 제집에 앉아서 들 을 수 있게 되었지마는, 이것을 불가사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만치 지금은 되어 있다”(≪동아일보≫, 1933년 11월 5일)고 평가될 정도로 이제 라디오는 익숙한 한 매체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무렵에는 음악 보급과 레코드 판매 과정의 관계와 라디오의 영향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해되었다. “라디오가 음악을 보급시키고 라디오에 의하 야 여러 사람들의 귀는 길리어지고 그 뒤로 레코드가 팔려가는 것”(≪동아 일보≫, 1933년 11월 2일)으로 보았다. 라디오를 통한 음악의 소개와 보급
3 당시 기생은 노예매매제의 유물, 가정파괴자, 국민 원력의 소모자들, 축첩의 원인 제공자들로 비판 되면서도 한편으로 유성기 음반, 라디오와 같은 새로 등장한 대중적 공간과 미디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 는 대중문화의 스타로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순적인 대상이었다(김진송,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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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레코드 판매가 촉진되면서 라디오의 대중적 파급 효과와 영향력이 평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행가나 서양의 고전음악은 같은 시기에 인기를 끌며 보급되었던 유성기 음반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는데(이상길, 2001), 유 성기와 더불어 라디오 방송에서 직접 연주를 들려주거나, 음반을 틀어주면 서 그 접촉의 기회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문화지 배의 산물로 민족음악의 성격과 방향을 왜곡시킨 것이었으나(이창현, 1989), 대중음악인 유행가와 서양의 고전음악의 대중화에는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국악 역 시 일제가 한국의 문화자주성을 인정하여 편성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라 디오에 대한 동기 유발을 위하여 시도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지만 (박기성, 1991), 한편으로는 비록 그러한 의도로 편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결 과적으로는 그 이전의 시기에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궁중아악 과 창, 판소리 등 우리 전통음악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라디오가 출현하기 이전 시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음악 감상 방법이었고, 오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 이 개시된 이후 음악회의 좋은 자리를 살 수 있는 특권층이 향유하고 독점 했던 고급문화의 혜택을 대중에게도 가져다준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과 같 은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Douglas, 1987). 이제 라디오는 “광의로 해석한다면 음악 혹은 극 등 귀로 들을 수 있는 예 술과 신문 혹은 기상 같은 보도 또는 교육방송 같은 모든 가장 신속하고 정확 하고 또 염가로 광범위에 골고로 수집하야 배급하는 문화기관”(한덕봉, 1936, 178쪽)으로서 고상한 취미와 교양을 간접적으로 길러주는 광범한 문 화적 의의를 갖는다고 인식되었다(물망인, 1938). “현대인의 총애를 한 몸으 로 받고 있는 세기의 인기아”(≪동아일보≫, 1939년 6월 1일) 라디오가 발전 하면 할수록 문화생활이 더 윤택해질 것이라는 것이다(백목아,≪조선일보 ≫, 1937년 10월 21일).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번 라듸오를 논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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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말하자면 인이 박히어 하로도 못 드르면 궁금할 만치 된 모양…동양 의 조그만 반도에도 문명의 리기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라듸오로 오는 전파 에 희로애락을 맛기고 있는 셈”(안테나생, 1936, 274쪽)으로 표현되는 라디 오 청취라는 새로운 생활습관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에도 상점 앞에서 떠들어대는 라디오 확성기의 아우성이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으로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하면서 레코드가 타격을 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청취자가 차츰 증가하면서 청취자의 대부분은 인텔리 층 이 아닌 일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은 드라 마와 유행가 등의 연예 프로그램이었다(특파기자, 1938). 라디오 방송극은 경성방송 개국 이전 시험방송을 할 때부터 등장하였는데, 1933년 이중방송 이 실시되어 조선어방송이 활성화되면서 극장무대에서 공연한 것을 방송 으로 그대로 옮기는 형식에서 벗어난 순수한 라디오 드라마가 출현하기 시 작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에 따라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된 것과 같은 제목 의 연극이 공연되면 항상 만원사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김원용·김광 옥·노영서, 1991). 제2방송은 1936년 라디오 소설을 처음으로 현상 모집 하였는데 응모 작품이 100여 편에 달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그 이후에도 제2방송은 꾸준히 라디오 드라마를 현상 모집하여 새로운 장르의 대중문학 을 선도하였다. 그리하여 라디오 드라마는 점차 연극이나 영화와 같은 하나 의 새로운 예술의 장르로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조선일보≫, 1937년 7 월 16일). 라디오에 대한 기대와 관심으로 청취자들은 “방송 프로에 대해 관심을 가 지는 것은 문화인으로서의 권리”로 여기고, 프로 편성 책임자들은 문화역군 으로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보았다(≪조선일보≫, 1937년 10월 21일). 방 송 프로그램이 너무 빈약하고 진부하다고 비판하면서, 새롭고 다양하게 해 달라고 청취자들이 보낸 탄원서가 매일 쌓였다는 것은(≪조선일보≫, 1937 년 7월 16일, 1937년 10월 21일, ≪동아일보≫, 1939년 5월 20일, 194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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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그만큼 방송에 대한 청취자들의 관심이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 한 적극적인 반응을 바탕으로 라디오가 없었던 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 던 라디오 방송인들이 등장하고, 라디오의 보급이 늘면서 이들이 대중의 관 심과 사랑을 받아 화제에 오르고, 이들의 공연행사도 출현하였다. 새로운 형태의 대중오락이 라디오를 매개로 생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경성중앙방 송 제2방송에서 특히 인기를 끌던 남녀 방송예술가들이 총동원된 <방송예 술가 실연의 밤>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오락행사가 개최되었다(≪조선일 보≫, 1940년 3월 26일), 이것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매개로 식민지 조선사회에 방송예술가라는 이름의 대중 스타가 처음 출현하였으며, 이들 이 주체가 된 대중문화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방송 독립 이후에도 지식인 계층은 제1방송을 주로 들어, 제2방송은 일종의 지방주의적 염가판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김관, 1937). 지식 인들은 라디오를 주로 오락용으로만 생각하여 이에 무관심하거나 경시하 여 문제점이 있어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디오의 사회적 중 요성과 국제화를 주제로 조선어방송인 제2방송의 사명과 방송 내용에 대해 관련 인사들이 모여 장시간 토의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던 것을 보면(≪동아 일보≫, 1939년 1월 27일), 점차 라디오 방송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인식도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이제 라디오는 일상생활에 많이 활용되는 필수품으로서(이혜구, 1939),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디오 문화가 오늘 의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중대하다는 것은 지금에 있어서는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던 것이다(≪조선일보≫, 1940년 1월 11일). 비록 3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린이 대상의 전용 프로그램이 있어 어린이 관련 소식을 전하고, 어린이극, 방송아동극, 방송동화 등이 제 작, 방송되었던 것도 주목된다. 그 이전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으로 서 사회적으로 어린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존중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성-평양 축구전, 전국 도시 대항 축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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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일보≫ 1940년 3월 26일
사진 4-3. <방송예술가 실연의 밤> 행사를 알리는 신문기사
연희전문 대 보성전문의 축구경기, 전국 야구선수권 대회, 권투, 농구 등 각 종 스포츠 행사를 중계 방송한 것은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스포츠를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운동으로서만이 아니라 듣고, 즐기는 오락으로서 등장하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담당했던 문학, 사상, 역사, 종교, 민속, 음악 등 각 분야에 대한 교양강좌나 위생 강연, 주부 대상 계몽강좌, 공공시설 소개 프로그램 등도 그 이전의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 았던 새로운 유형의 대중적인 사회교육으로서 긍정적 측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제2방송 독립 이후 3년간 계속되었던 ‘조선어강좌’는 우리말 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자극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 방송공사, 1977). 라디오의 보도 기능에 대해서도 이미 방송 개시 이전부터 신문을 능가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방송이 시작된 후 경제시황을 현장에서 전하는 뉴스가 인기를 끌었다. 새로 출현한 전파매체인 라디오가 그 신속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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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주목받은 것이다(이석훈, 1937). 그리하여 방송 시작 10년이 지나면서 “오늘의 문화전선에 있어서 장차로 모든 저널리즘의 근원지대가 라디오의 세계로 독점되리라는 것을 예상”(소양인, 1938)할 수 있다고 간주될 정도였다. 특히 일본이 전쟁을 점차 확대하면서 라디오의 뉴 스 보도 매체로서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져, 태평양전쟁이 전개되던 1940년 대의 전시체제에서 라디오는 “국민필청의 보도기관”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다(노정팔, 1968, 500쪽). 식민지 조선의 라디오는 전쟁 관련 보도 내용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 있었으면서도 전시 상황과 각종 통제조치에 대해 윌리 엄스(Williams, 1974)가 설명한 바와는 다른 의미에서 달리 접근할 수 없는 뉴스를 제공한 매체였던 셈이다.4
일제 강점기 라디오 매체 출현의 의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첨단 뉴미디어였던 라디오는 일제 강점기 라는 특수한 시기에 우리 사회에 출현하면서 그 전개 과정과 성격이 여러 면에서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런 가운데서도 라디오가 우리 사회에 수용되고 점차 정착되면서 라디오 청취자로서 조선인의 수용양식 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현상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시기 라디오의 출현은 한국 커 뮤니케이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 보다 라디오 방송 그 자체가 우리말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던 시기에 단순히 우리말을 존립
4 윌리엄스는 1920년대 서구 산업사회는 사회적으로 유동성이 증가하면서 동시에 가정 중심적인 삶 의 방식인 유동적 사사화(mobile privatisation)의 경향이 나타났는데, 당시 라디오 방송은 핵가족화한 가정 에서 달리 접근할 수 없는 외부 세계에 대한 뉴스를 제공하면서 발전한 사회적 산물이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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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킨 것만이 아니라 조선어를 근대적인 담론의 언어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Robinson, 1999). 또한 라디오가 출현하면서 그 이전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라디오 청취라는 생활습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전혀 새로운 커뮤니 케이션 현상이 전개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라디오가 우리 사회에 소개되 면서 조선인들은 새로운 매체에 대해 큰 호기심과 호감을 나타냈다. 라디오 의 기능과 역할이 올바르게 이해되었는데,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오히려 지나치게 그 영향을 과대평가한 경향도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매체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음을 말해준다. 라디오가 상업 활동에 적극 활용되었으며, 가정에는 가족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오락을 제공하는 수 단이 되었다. 라디오 방송으로 방송을 통한 음악 감상, 드라마 청취, 스포츠 실황 청취 등과 같은 오락이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출현한 것이다. 이에 따 라 라디오의 보급이 늘면서 라디오라는 매체를 매개로 한 대중문화의 초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식기미 등의 경제정보와 전쟁 관련 뉴 스를 제공하면서 라디오는 기존 매체였던 신문보다 더 신속한 보도기관으 로 인식되었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나 교양 강좌 등은 우리 사회에 처 음 출현한 새로운 유형의 사회교육이었다. 이처럼 라디오 방송이 다루는 범위가 광범위하면서 라디오의 사회적 영 향도 점차 확대된 것이다. 식민지 사회라는 역사적 제약 아래 다른 나라에 비해 라디오 수신기의 보급은 미미했지만 당시는 공동으로 청취하는 경우 가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새로운 매체로서의 신기함과 매력이 강력했던 라 디오의 사회적 영향은 여러 면에서 적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 로운 매체로 등장한 라디오는 식민지 조선의 기존의 미디어 체계에 단순히 하나의 매체가 추가된 것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환경 을 형성해 간 것이다. 라디오는 이 시기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유형 과 문화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친 중요한 동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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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라디오 방송은 일본 식민당국의 통제를 받으면서 일본인 들이 주체가 되어 운영되었으나 그 중요한 수용자들은 조선인들이었다. 식 민지 시기라는 역사적 특수성으로 부정적인 영향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 만 라디오 방송과 그 수용자인 라디오 청취자들이 존재하였고, 그들의 청취 행위가 있었다는 역사적 현상을 그 자체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 욱이 일제 강점기의 방송 청취자들의 수용 경향은 당시 방송의 성격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에 관한 다각적인 분석과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할 때 일제 강점기 방송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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