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나비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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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나비



나의 나비 −지은이의 말−

1 ≪그녀의 이름은 나비≫의 서문을 쓰기 위해서 다른 장편 인 ≪빅토리아 클럽≫부터 거론해야 하겠다. 1988년 ‘홍콩 이야기’ 시리즈가 일단락을 고하자 나는 장 편소설을 통해 홍콩 생활 10년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이리 하여 식민지의 상징인 빅토리아 클럽에서 일어난 부패 사건 을 쓰려고 계획했다. 구상의 과정에서 몸에 영국인의 피가 4분의 1이 흐르고 있는 법관 웡 윌리엄의 가계를 추적해 나가는 가운데 홍콩 역사에 대해 탐구하게 되었고, 1894년에 영국인의 개항 이 래 가장 심각했던 흑사병이 이 식민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 을 알게 되었다. 나는 쥐가 인간을 통치하던 시절을 시대적 배경으로 해서 위생국 대리 국장인 애덤 스미스라는 인물을 창조하고, 그가 명령에 따라 전염병 발생 가옥을 폐쇄하던 중에 바이파 거리의 창부집에 잘못 들어갔다가 홍콩으로 납 치되어 와 창부가 된 둥관 농민의 딸인 웡딱완과 일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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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을 맺는데, 이로 인해 사생아인 혼혈아 웡 리처드가 태 어남으로써 웡씨 집안의 제1세대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서곡으로 삼았다. ≪연합보(聯合報)≫ 문예면에 게재할 때 나는 그 앞에 ‘홍콩’이라는 두 글자를 덧붙였다. 이렇게 역사의 서곡이 시 작되었으며, 나는 이것이 장편 서사시 방식의 첫 부분이라 고 생각하면서 그에 이어 본문으로 들어갔다. 그 내용은 그 로부터 87년 뒤 웡딱완의 손자인 웡 윌리엄이 식민지의 대 법관 자리에 올라 어느 부정 사건을 심리하게 된다는 것이 었다. 나중에 나는 서곡과 본문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너무 커서 연결이 약간 미흡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 과 영국의 이 두 이국인 사이의 인연에 대해서는 거론만 하 고 말았기 때문에 미진한 감이 들었다. 이리하여 ≪빅토리 아 클럽≫에서 이 부분을 들어내기로 결정했고, 일단 분리 시키고 난 후에는 계속 서곡을 발전시켜 나가서 독립적인 책 한 권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홍콩 3부작’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방대한 계획이 생겨난 것은 순전히 1989년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간접적으로 영향 을 주었기 때문이다. ‘6·4’의 총성은 나 자신과 창작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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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10여 년을 체재하고 있던 홍콩 에 일체감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600만 명의 홍콩인과 운명 을 함께하기를 바라면서 가두시위 때마다 빠짐없이 참여했 다. 중국 공산당이 학생들을 학살한 사건은 한 개인의 무력 함을 느끼게 하면서 나를 침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의 성찰을 거친 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지 않 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과거에 비해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나는 펜을 들고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했다. 1894년의 홍콩 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웡딱완과 그녀의 후손에게 집중하고, 홍콩 사회의 변천과 긴밀히 연 계하면서 1997년의 홍콩 반환 때까지 계속 써 나가야 했다. 제1부 ≪그녀의 이름은 나비≫는 나비라는 상징을 부각 하며 홍콩의 형성을 암시했다. 나는 화인과 양인이 한데 뒤 섞인 식민지로 무대를 옮기고, 영국 식민자들이 직접 모습 을 드러내어 말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인 작가들이 과거에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영역―백인 통치자의 내부로 들어가 서 식민자의 온갖 심리를 검토하는 것―에 과감히 도전했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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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홍콩 서곡>을 독립적인 장절로 만들고 그에 이어서 소 설의 스토리를 전개해 나갔기 때문에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 해 나는 일종의 구조적인 기법을 시도했다. 이후 각 장을 서 곡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부분으로 만들되, 단독으로 읽 어도 되는 독립적인 글로서의 구성을 갖도록 하면서 다른 부분과 연결해서 읽어도 맥락이 분명하게 유지되도록 했다. 앞뒤가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나는 의도적으 로 앞장의 주요 스토리가 뒷장에 중복해서 출현하도록 안배 했다. 마치 음악의 모티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도록 함으 로써 그 여음이 길게 이어지면서 시적 정취가 쌓여 가는 것 과 같은 효과다. 나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참고하면서 상상력을 발휘 해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백 년 전의 홍콩을 다시금 건설하 고자 했다. 화려하고 내밀한 지난 세기의 말, 나의 펜에서 창조된 인물들이 이 시대의 틀 속에서 움직이면서, 그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착수하 기 전에 나는 관련 사료와 민속 풍정의 기록을 두루 읽어 보 았으며, 소설에서 언급한 거리 풍경, 배와 수레, 건물 모습, 영국인의 빅토리아풍 실내장식, 창부집의 가구 설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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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의복 취향, 생활 음식, 중국과 서양의 명절 풍속, 심지어 식물·화초·조류·곤충에 이르기까지 고심해서 세세하게 서술했고, 상상 속 그 시대의 색채·냄새·소리까지도 소 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그 시대의 인정·풍 토적인 배경을 되살려 내고자 했다. 내가 표본 속에서 노랑나비를 발견했을 때의 그 놀라운 기쁨은 살아생전에 잊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순수한 홍콩 특산품인, 여인네처럼 연약하며 섬세한 노랑나비를 보았 다. 다 같은 나비이지만 홍콩의 노랑나비는 연약한 외피 아 래에 과감히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며 역사의 음울한 그림자 속에서도 조그마한 한 부분을 밝혀 주는 빛을 발하고 있었 다. 문학 언어 면에서는 회고의 정서로 이 소설을 쓰고자 했 기 때문에 적절한 언어를 찾아서 그 시대의 역사적인 분위 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나는 고전 시가 문학 에서 보여 준 여인네의 원망과 우수를 되새기면서 고풍스럽 고 처연한 문체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백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문장 스타일을 통해 시대적인 거리감을 만 들어 내면서, 이를 읽노라면 마치 오래되어 퇴색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되기를 기대했다. 창작의 과정에서 나는 마치 그림을 그릴 때처럼 붓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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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지치지도 않고 내 인물에게 한 획씩 물감을 칠해 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나의 나비에게 색을 입히면서 나 는 사파이어 빛깔의 쪽색, 연지 빛깔의 붉은색 등 선연한 색 조를 사용해 음란한 차림에 화려한 장식을 한 바이파 거리 에 있는 청루의 이름난 창부를 그려 냈다. 이와 동시에 그녀 주변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두운 분위기로 물들이는 것 또 한 잊지 않았다. 나비, 나의 노랑나비, 나의 홍콩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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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곡

1 그해 웡딱완은 열세 살이었다. 정갈하게 빨아 입은 잔꽃무 늬의 짧은 저고리에 두 소맷자락은 부드럽게 늘어뜨린 채 가볍게 대바구니를 끼고 있었다. 마을 서쪽의 짜우 의원에 게서 약을 받아 나오는 길이었다. 전날 밤 태어난 지 한 달 도 안 되는 남동생이 밤새 난리를 쳤고, 엄마는 경기가 들려 서 애가 그렇다며 딱완더러 집에 올 때 천후묘1)에 들러 집 안을 평안하게 하는 부적을 받아 오라고 시켰던 것이다. 웡딱완은 시냇가에 한 줄로 늘어선 향나무들을 에돌아 서 천후묘 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발에는 반쯤 낡은 헝겊신 을 신었는데, 신발 끝에 황토가 걷어 채여 아주 조금씩 흙먼 지가 날아오르면서 9월의 청량한 햇빛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춤을 추었다. 웡딱완의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발밑의 이 든 든한 황토 땅에 의지해서 살아왔다. 원래 향나무는 인도차

1) 천후묘(天后廟): 중국 동남부 연해 지역의 민간 전설 속에서 항해를 관장한 다는 여신인 마조신(媽祖神)을 모신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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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반도의 베트남 북부가 원산지였는데, 당나라 사람들이 그 넘쳐나는 향기에 반했고, 진귀한 나무라고 여겨서 중원 에 옮겨 심었다. 하지만 토질이 맞지 않아 심는 족족 잎이 누렇게 말라 시들어 버렸고, 번식에 알맞은 땅을 찾아 천하 를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광둥 둥관의 메마르고 거친 토질 이 향나무의 생장에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본 래 고기 잡는 일을 본업으로 하던 둥관 사람들은 이리하여 명청 시대 이후 그물을 내려놓고 육지로 올라와서 땅을 일 구고 향나무를 심어 둥관 향나무를 탄생시켰다. ≪광둥사지(廣東史誌)≫에는 “둥관에는 향나무로 집안 을 일으킨 사람이 많으며,” “한창 때는 둥관 향나무가 1년에 수만금이 넘게 팔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외지로 팔려 나 간 둥관 향나무는 일단 배에 실어 남중국해의 조그만 섬에 있는 섹파이 만에 모은 다음 다시 대형 화물선에 실어 광저 우·장쑤·저장 등의 개항장으로 운송했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그 조그만 섬에 있는 섹파이 만은 향나무를 실어 낸다고 해서 향기로운 항구 즉 홍콩(香港)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이 말은 섬 전체를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대나무 광주리를 팔에 낀 웡딱완은 동생 걱정 때문에 양 미간에 일말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열세 살 소녀는 마음속 걱정에 잠겨 있었을 뿐 천후묘 앞마당 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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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 마지막 계단을 디디는 그 순간 그녀의 일생이 완전히 뒤바뀔 것이라고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어찌 웡딱완이 상상할 수 있었으랴. 한 시진 후 그녀는 대대로 삶을 의지해 온 향나무와 함께 같은 뱃길을 따라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 치며 남쪽으로 내려가서, 둥관 향나무를 내보내는 데서 이 름이 붙은 홍콩으로 실려 가게 되리라고. 그녀는 두 지역 사 이의 미묘한 관계를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천후묘의 높다란 문턱을 넘어섰지만 천후님의 탄신일이 갓 지났기 때문에 천후묘 마당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녀 는 깨금발로 돌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아직도 동심이 남아 있는 아이일 따름이었다. 돌계단을 뛰어오르자 적동 귀고 리가 흔들거렸다. 남쪽 천후묘 주랑의 기둥 뒤편으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계단 아래 목서나무 섶에서도 바스 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갓 피어난 목서꽃의 청아한 향기 가 퍼져 나왔다. 웡딱완은 이웃 동네 무뢰배들이 담벼락 밑 에 오줌을 갈기는 들개를 기다리다가 기회를 틈타 손을 쓰 려고 또 천후묘에 숨어 들어온 줄로만 여겼다. 가을철이 되 어 보신을 할 때가 되면 살진 놈이든 여윈 놈이든 간에 마을 안팎의 개들은 불운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웡딱완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커다란 자루가 마치 커다란 우물처럼 머리부터 들씌워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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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지를 새도 없이 마대를 사이에 두고 큰 손바닥이 입언저리를 거칠게 틀어막았다. 웡딱완은 보이지 않는 손 을 향해 고개를 뒤틀어 깨물려고 했지만 마대만 깨물고 말 았다. 비릿하고 짭짤하니 바닷물에 찌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웡딱완의 허리춤을 어깨에 둘러메었고, 그 바 람에 온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뭔가가 데구루루 굴러떨 어졌다. 적동 귀고리 한 짝―그녀가 이생에서 유일하게 고 향 둥관에 남긴 물건이었다. 웡딱완은, 다른 쪽 적동 귀고리를 매단 채, 선창의 칠흑 같은 밑바닥에 갇혔다. 배가 파도에 오르내리면서 그녀는 뱃멀미로 토해 낸 오물과 함께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어릿 어릿 혼미한 상태에서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웡딱 완이 다시금 태양을 보게 되고 갑판 위에서 어린 동물의 그 것과 같은 눈을 떠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을 때도 그녀는 자 신이 홍콩―빅토리아 여왕의 도시에 도착한 줄은 몰랐다. 1839년, 웡딱완이 페더 부두에 도착하기 반세기 전, 도 광 황제는 흠차대신을 남방으로 파견해 아편을 금지시켰다. 당시 전 중국에서 아편을 피우는 사람의 수는 이미 200만 명에 달했다. 명을 받들어 린쩌쉬가 광저우로 갔고, 신속하 고 단호하게 외국 아편상의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해서 후 먼의 모래사장에 모아 놓고 바닷물로 적신 뒤 다시 석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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