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우 동화선집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동화문학선집>은 100명의 작가와 그들의 대표작입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다 보면 우리의 본성을 만나게 됩니다. 작가가 직접 쓴 자기소개, 평론가의 수준 높은 해설, 깊은 시선으로 그려진 작가 초상화는 우리 시대 최고의 동화문학선집을 만들어 냈습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동화문학선집
심상우 동화선집 심상우 짓고 강정구 해설하다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편집자 일러두기 ∙ <한국동화문학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아동문학연 구센터가 공동 기획한 한국 아동문학 100년의 문학사적 총정리입 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동화작가 100명의 대표작 선집입니다. ∙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가 해설자로 참여했습니다. ∙ 기획위원 김종회, 김용희, 최지훈, 배익천, 박상재, 고인환, 장성 유가 작가를 선정했습니다. ∙ 작품 선정은 예술적 가치가 높고 문학적 보편성을 지닌 것, 현재 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도 앞으로 그 문학적 가치가 인정될 것, 독자 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대중성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 작가가 직접 자신의 대표작을 고르고 자기소개를 썼습니다. ∙ 작고 작가는 편저자가 대표작을 고르고 작가소개를 썼습니다. ∙ 작고 작가의 작품은 편집 방침에 따라 초판본의 표기를 그대로 살렸습니다. 초판본은 작품이 처음 발표된 지면의 것을 기준으로 삼되, 편저자 혹은 학계의 판단에 따랐습니다. 단, 오기가 분명하 다고 판단되는 표기는 바로잡았습니다. 초판본을 구할 수 없는 경 우에는 초판본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 초판본의 표기를 살리는 이유는 현대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작품 의 오리지낼리티가 훼손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띄어쓰기는 가독성을 고려해 현대의 표기법에 따랐습니다. ∙ 생존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제공한 내용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외래어는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외래어 표기 원칙을 따랐습니다. ∙ 요즘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 어려운 한자어, 사투리에는 주석을 달았습니다. 작품 내용 중 이해를 위해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작가
에게 문의해 주석을 달았습니다. ∙ 삽화 없는 동화책입니다. 독자를 아동에 국한하지 않고, 남녀노 소 누구나 동심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는 시리즈로 만든 다는 기획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 작가 초상화를 실어 특별함을 더했습니다. 작가 선집이라는 의 미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 초상화는 화가 류장복이 작가를 직접 만나 그렸습니다. ‘그때 그 장소에 작가가 있었다’는 존재감을 콘셉트로 했습니다. 단, 작고 작가나 사정상 화가와 직접 만날 수 없었던 작가는 동영상이나 사 진을 보고 그렸습니다. ∙ 초상화 옆 지면에는 그림 제목, 초상화를 그린 일시와 장소, 작품 크기와 재료를 기록했습니다. 작가에게 좋아하는 색을 묻거나 작 가 소개의 인상 깊은 부분을 따와 그림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 각 작품의 마지막에 작품이 처음 발표된 지면과 시기를 밝혔습 니다. 출전이 표시되지 않은 것은 발표 지면을 알 수 없는 경우입 니다. 작고 작가의 작품 저본이 발표 지면과 다를 경우 괄호 안에 따로 표시했습니다.
차례
작가의 말 ····················xiii
봄꽃 선생님····················1 들꽃처럼 당당하게 ················13 아빠하고 나하고 ·················25 홍방울새의 나들이 ················33 왼쪽 나라와 오른쪽 나라··············43 슬픈 미루나무 ··················55 사람이 된 느티나무 ················73 물고기가 열리는 나무 ···············83 노란 곰 그림이 있는 기와집 ············93 웃음나무 ····················105 말하는 개미는 어디로 갔을까 ···········115 우리 꽃 이름을 불러 주세요············127 도도새는 정말 살아 있다 ·············139 벌레를 포장한 책 ················153 상수리나무 친구·················165
나무 도령을 만났어요 ··············181
해설 ······················199 심상우는 ····················207 강정구는 ····················224
“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의
”
쪽빛 푸른색을 좋아합니다
49.7x34.7cm, charcoal on paper, 2012. 12. 21. 18:22
동교동 ‘CAFE ATTIC’에서 작가를 직접 만나 그리다.
작가의 말
자연과 인간이 어울리는 풍경 풀이나 나무는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해서 그런 것들에게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풀이나 나무 는 거기 그 자리에 늘 있어서 어디로 달아나거나 쉽게 없 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도 말을 하고, 그들 마 음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풀과 나무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은 바람과 새, 나비 들입니다. 바람과 새와 나비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기 쁜 일, 슬픈 일, 좋은 일, 나쁜 일은 물론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들까지 죄다 들을 수 있습니다. 바람과 새와 나비가 자주 사람들 곁을 찾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풀과 나무가 전하는 말도 자주 듣지 못하게 됩니 다. 자연과학에서는 풀과 나무들은 물, 공기, 햇빛만 있으 면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풀과 나무에게 꼭 필 요한 건 또 있습니다. 바람과 새와 나비들입니다.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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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한 것들을 풀 과 나무에게 들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 줄 때 풀과 나무는 더욱 푸르고 힘차게 살아갑니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풀과 나무와 사람이 어 울려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없습 니다. 풀과 나무와 바람과 새와 나비,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 각 달라도 아끼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환상이라는 창을 통해 서로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자연이 주는 크고 작 은 감동을 통해 우리들 마음은 한결 풍성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작은 풀씨가 되고 꿈의 나무가 되 었으면 합니다. 2005년 단편동화책을 펴내면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 습니다. 그러고 보면 십 수 년 넘게 동화를 써 오면서 내 주된 관심은 ‘풀과 나무와 바람과 새와 나비, 사람들’입니 다. 이건 아마 앞으로도 죽 그러할 것입니다. 특히 나무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는 생명체입니 다. 지구의 주인은 사실 나무입니다. 그 나무들이 하는 소 리를 제대로 듣기만 하면, 인류의 역사는 새롭게 써야 할 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자연에 더욱 귀를 기울여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길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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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와도 친구가 되고, 멸종됐다고 하는 도도새 도 우리가 자연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얼마든지 살려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들이 맨 처음 아예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으로 다가온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은 잠시 어디에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더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면, 분명 새로운 모습으로 다 가올 것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아니 일찍이 모두가 어린이였던 어른 들의 마음에 자연과 생명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 퍼질 때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것을 믿습니다. 사람은 자연 과 어울릴 때가 가장 행복해 보인다는 걸 동화로 보여 주 기 위해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책을 펴내는 일은 풀과 나무 특히, 나무를 소비하는 일 입니다. 그들 나무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겠지요. 풀과 나무를 가꾸는 이들과도 친구가 되어, 그들의 이 야기를 듣고 전하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 그러면 내 앞에도 아름다운 숲이 하나 보이겠지요!
2013년 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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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선생님
진달래꽃
봄입니다. 이제 겨울은 끝났습니다. 누가 뭐래도 오늘은 봄입니다. 어떻게 봄인지 아느냐고요? 그거야 4학년이 시 작되는 첫날이니까요. 오늘은 3월 2일, 아침 날씨는 쌀쌀하지만 참 맑을 것 같 습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날씨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학교 에 가야 합니다. 그렇게도 돼 보고 싶은 4학년이 되었으니 까요. 그런데 내가 누구냐고요? 내 이름은 김민호. 야동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교실입니다. 내 둘레에서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 로 신나게 떠들고 있습니다. 동수랑 같은 반이 되어, 올해 도 참 즐겁게 보낼 것 같습니다. 동수는 내 둘도 없는 짝꿍입니다. 동수는 장래 꿈이 개 그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수는 개그맨은 책을 많 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합니다. 동무들은 동수가 한 말을 모두 믿습니다. 그냥 별다른 뜻이 없는 말 도 동수가 하면 언제나 그럴듯하고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작년 봄에 있던 일입니다. 개그맨이 되기 위해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은 동 수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작년 봄 어느 날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하는 설문 조사를 할 때 동수는 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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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이라고 써넣었습니다. 그냥 개그맨이라고만 써넣었으면 뭐 신통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동수는 ‘개그맨(세상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개그맨)’이라고 써넣었습니다. 오하린 담임선생님은 동수가 쓴 설문지를 내보이면서 아주 잘 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설문 조사 답을 잘 써서 칭찬 받은 친구는 3학년 전체를 통틀어 동수밖에 없을 것 입니다. “동수야! 어떻게 ‘세상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개그맨’ 이 될 생각을 했지?” 오하린 선생님이 동수에게 물었습니다. 동수가 냉큼 대 답하였습니다. “저번에 텔레비전에서 김국진 아저씨가 그러던데요. 개 그맨은 책을 많이 읽어야 될 수 있다구요.” “하하하하−!” 반 아이들 모두 웃었습니다. 동수는 벌써 개그맨이 된 듯 반 아이들을 웃겼습니다. 오하린 선생님도 호호호 웃었습 니다. 지금도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오하린 선생님과 보낸 3학년 봄을 생각하자 갑자기 눈 물이 나려고 합니다.
3학년이 되자마자 예쁜 오하린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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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어 우리는 모두 기뻤습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3학년 때 나는 정말 못 말리는 개 구쟁이였습니다.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만큼이나 심 술궂고 장난이 심하여 그냥 한곳에 붙어 있질 못하였습니 다. 여자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하고 있는 곳에 몰 래 벌레를 잡아다 던져 놀라게 해 주기도 하고, 화가 난 날 은 학교 유리창에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부 시간에 선생님 몰래 앞자리에 앉은 동무와 장난을 쳐 자주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심부름 을 보내면 엉뚱한 곳에서 하루 내내 놀다가 늦게 돌아오기 일쑤인 참 어처구니없는 개구쟁이였습니다.
개그맨이 되겠다는 동수는 나보다 더 심한 장난꾸러기 였습니다. 언제나 동수가 곁에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동 수는 참 일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두 시간쯤 걸려야 서 울에 닿을 수 있습니다. “민호야! 우리 서울에 있는 방송국에 가 볼까?” 동수가 뜬금없이 방송국에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습니 다. 아마도 개그맨 아저씨들을 만나고 싶었나 봅니다. “선생님한테 말씀드려서 우리 반 모두 가 보는 게 어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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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 로 쭈르르 선생님한테 달려갔습니다. 오하린 선생님은 호호호 웃으시면서, 안 그래도 5월 어 린이날에는 방송국에 갈 계획을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동 수는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했습니다. 나도 덩달아 기뻤습 니다. 4월이 되자, 학교 울타리에는 개나리가 다투어 피고, 야 트막한 뒷산에는 진달래도 붉게 피어났습니다. 어린이날 이 가까워 오는 어느 날, 오하린 선생님은 우리 반 친구들 을 모두 데리고 자연 학습인가 꽃구경인가를 시켜 주시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뒤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들판에는 우리가 늘 보던 진달래꽃은 물론 민들레꽃, 꽃다지, 애기똥풀, 냉이꽃, 제비꽃 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습니다. “세 명씩 조를 짜서 들판에 어떤 꽃들이 피어 있는지 자 세히 관찰하고 한 시간 뒤에 이곳에 모이세요. 저기 미루 나무와 개울이 있는 곳을 벗어나면 안 돼요. 모두 알았죠?” 우리들은 선생님이 손끝으로 한 바퀴 빙 휘둘러 정해 준 둘레 안에서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마냥 즐겁게 뛰어놀 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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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수와 애리, 이렇게 셋이 한 조가 되어 꽃들을 관 찰하였습니다. 동수는 앙감질*을 해 대며 얼마 안 있으면 어린이날에 방송국 견학을 갈 거라고 연방 떠들어 댔습니다. 애리와 나 는 동수가 하는 말 때문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 뒤 우리는 모두 선생님 곁으로 모였습니다. 선생님은 날짜가 조금만 더 지나면 민들레 까만 꽃씨가 하얀 날개를 달고 하늘로 하늘하늘 날아 이곳저곳에 꽃씨 를 퍼뜨린다는 걸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앞산에 울긋불 긋 피어 있는 진달래꽃을 가리키며 우리나라엔 진달래꽃 을 노래한 매우 훌륭한 시인이 있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습 니다. “김소월!” 동수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모두들 “와−!” 하면서 동수를 바라보았습니다. “동수가 잘 알아맞혔다. 그런데 <진달래꽃>이란 시 읽어 봤니?” “예.”
* 앙감질: 한 발은 들고 한 발로만 뛰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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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니?” “예.” “그럼 한번 외워 봐라.”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우리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멍하니 동수를 쳐다보았습 니다. 동수는 정말 책을 많이 읽나 봅니다. 나는 김소월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동수는 도무지 무 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시를 줄줄 외우고 있다니! 참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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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동수와 선생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들 은 너무나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 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왜 그러셔요?” “….” 선생님은 얼굴을 돌린 채 한참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가 먼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얘들아! 사람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지는 날도 있단다. 내가 곧 저 멀리 미국으로 떠나야 하기에 오늘이 너희들과 는 마지막 공부 시간이란다. 난 너희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동수야! 시 잘 외웠다. 그리고 요번 돌아오는 ‘어린이날’엔 이웃 슬기반 선생님하고 갈 수 있도록 이야 기를 해 놨다.” 우리들은 그때, 선생님이 느닷없이 우신 것도 놀라웠지 만, 며칠 있으면 미국으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까무러 치도록 놀랍고 슬퍼졌습니다.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생님을 에워싸고 두 팔에 매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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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갑자기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자 우리는 모두 울고 말았 습니다. 나 또한 북받치는 설움에 느껴 울어 목이 콱콱 잠기고, 눈물샘이 모조리 말라 버린 듯 꺽꺽 소리를 내었습니다.
얼마쯤 지난 뒤 선생님은 우리들을 달래기 시작하였습 니다. 우리들이 겨우 울음을 그쳤을 때, 선생님은 서로서 로 손에 손을 잡게 하시고 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얘들아, 벌레에 대해 알고 있지?” “예−.” 우리들은 합창하듯 입을 모아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선생님이 왜 ‘벌레에 대해 물으시는지’ 궁금해졌습 니다. “동수야! 벌레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아는 대로 말해 봐.” “예, 벌레에는 메뚜기, 개미, 매미, 지렁이, 나비, 땅강아 지, 벌, 송충이, 진드기, 바퀴벌레, 무당벌레, 사마귀, 귀뚜 라미, 모기, 파리, 방아깨비 같은 게 있습니다.” “그래, 잘 말했다. 동수가 방금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 벌레는 참 많다. 그리고 그 벌레들은 모두 제각각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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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을 갖고 있으며, 모양도 가지가지이다. 그런데 신기 한 것은 진흙 구덩이나 거름 더미, 수챗구멍같이 더러운 곳에 사는 구더기, 지렁이, 바퀴벌레, 그리마, 지네 같은 것들은 한결같이 징그럽지만, 꽃이나 나무에 사는 매미, 나비, 여치, 방아깨비, 잠자리, 벌 따위는 아무리 벌레이기 는 해도 귀엽고 예쁜 빛깔과 모양을 갖고 있다. 사람도 이 와 마찬가지이다. 너희들도 아름다운 풀밭에서 예쁜 꿈을 키워 나가면 나비나 여치, 잠자리, 매미처럼 예쁘게 자랄 수 있다. 시궁창이나 더러운 곳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보기 싫은 모습이 된다. 사람은 자기 주변의 모습을 닮는 법이란다. 언제나 씩씩한 용기를 갖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키워 나가야 한다. 이 말을 잘 귀담아 두어라. 모두 알았 지!” 우리들은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죄다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생각이 여물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이 무슨 말씀 을 하시려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어깨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습니다. 선생님은 어여쁜 한 송이 꽃처럼 환하 게 웃으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마다 꽃잎이 흩 어져 우리들 마음은 어느새 꽃 빛으로 물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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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린 선생님은 이튿날부터 학교에 오시지 않았습니 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몹쓸 병에 걸리셨던 것입니 다. 선생님은 미국이 아닌 저승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동수야! 오하린 선생님 생각나니?” “응.” 동수가 짧게 대답했습니다. 동수도 그때 일이 생각나는 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우리 이따가 저기 들판에 나가 볼까?” “아직 아무런 꽃도 피지 않았을 거야. 봄꽃이 피거든 가 보자.” “그래. 봄꽃 선생님이니까.” 동수와 나는 서로 의미 있는 눈길을 주고받으며 4학년 첫날을 시작하였습니다. 봄꽃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를 새록새록 가슴에 새기면서.
‘나는 지금 어떤 벌레로 어느 곳을 뒹굴고 있는 것일까?’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대교문화,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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