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성의 변증법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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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Dialektik des Konkreten: eine Studie zur Problematik des Menschen und der Welt 구체성의 변증법: 인간과 세계의 문제에 대한 연구


1장 구체적 총체성의 변증법

1. 사이비 구체성의 세계와 그 파괴 변증법은 ‘사상(事象) 자체(Sache selbst)’1)를 추구한다. 그 러나 사상 자체는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사상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노력뿐만이 아니라 우회하는 것도 필요하다. 따라서 변증법적 사유는 사상 (sache)에 대한 표상(表象, Vorstellung)과 개념(Begriff)을 구별한다.2) 변증법적 사유는 이 구별을 현실(Wirklichkeit) 에 대한 인식의 두 가지 형태와 단계로서 이해할 뿐만 아니 1) (옮긴이 주) Sache란 말은 (1) 사물, 물건, (2) 사건, 사실, (3) 문제, 요점 등 의 뜻을 지닌다. Sache selbst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철학 학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변증법에서 추구하는 Sache selbst가 무엇인가 하는 점 이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영역본에는 Sache selbst와 Ding an sich(물자 체)가 모두 thing itself로 되어 있다. 2) (옮긴이 주) ‘표상(表象, Vorstellung)’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직관적 의식 내용, 혹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흔히 갖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을 뜻하며 ‘개념(Begriff)’과는 구별된다. ‘관념’이라는 말도 표상과 같은 의미로 사용 되기도 한다. 개념은 변증법에서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독특한 의미를 지니며,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표상과 개념의 구별은 이 책에서 앞으로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Vorstellung은 문맥에 따라 ‘표상’, ‘관념’, ‘생각’ 등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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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나아가 무엇보다도 인간 실천의 두 가지 범주로서 이해 하는 것이다. 인간이 현실과 일차적·직접적으로 접할 때 에, 인간은 추상적인 인식 주체, 즉 현실을 사변적으로 다루 는 사유하는 두뇌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이고 실천적 으로 활동하는 존재, 즉 자연과 타인에 대하여 실천적인 행 동을 수행하며 사회관계의 특정한 맥락 속에서 자신의 목적 과 이해를 실현하는 역사적 개인으로서 접한다. 그러므로 현실은 인간에게 일차적으로는 직관·연구·이론화의 대 상으로서가 아니라(이런 경우에 대상의 맞은편 극은 세계 안에, 그리고 동시에 세계 밖에 존재하는 추상적 인식 주체 일 것이다), 그의 감각적·실천적 활동의 영역으로서 다가 오는 것이며, 이러한 활동이 인간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 고 실천적인 직관의 기초가 된다. ‘관여된(engagiert)’ 개인 은 수단과 목적, 도구, 욕구와 그 충족의 세계로서 나타나는 현실 속에서 사물들과 실천적·공리주의적인 관계를 맺음 으로써, 사물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형성하며, 현실의 현상 적 형태를 포착해 둘 수 있는 적절한 직관의 전(全) 체계를 만들어 간다. ‘실제적인 실존(reale Existenz)’과 현실의 현상 형태는 역사적으로 제약된 실천을 수행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표 상의 다발로서나 혹은 ‘일상적 사고’의 범주들(유치한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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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르자면 개념들)로서 직접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 형태들이란 다양한 것이며, 또 자주 현상의 법 칙, 사물의 구조, 즉 사물의 본질적인 내적 핵심, 그리고 그 에 상응한 개념과 모순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화폐를 사용 하며 그것을 가지고 대단히 복잡한 거래를 수행한다. 그러 나 그들은 화폐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없다. 직접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실천과 그에 상응한 통속적 사고 는 이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 끔 하고 사물들과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하며 또 그것들을 조작할 수 있도록 하지만, 사물들과 현실에 대한 개념을 제 공하지는 못한다. 마르크스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상호 연 관이 결여된, 그리고 그러한 분리 속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현상 형태들의 세계 속에서도 사회적 상황의 실천적 담지자 들은 마치 물속의 고기와도 같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 고 산다고 썼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종일관 모순되는 것들 속에서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며,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전도에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한 이러한 실천은 역사적으로 제약된 것 이다. 즉 이는 분업과 사회의 계급분화, 또 그로부터 결과한 사회적 지위의 위계화에 근거한 개인들의 일면적이고 분열 된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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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개인의 특정한 물질적 환경이며, 또한 현실의 피상적 모 습을 허구적인 친밀감과 신뢰에 싸인 세계로서 고정시키는 정신적 분위기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활동하며 이런 세계와 일상적으로 관계맺는 것이다. 인간생활의 매일의 환경과 일상적 분위기에 꽉 들어차 있고, 자율성과 자연성이 있는 듯한 가상(假象)을 주는 일 종의 규칙성과 직접성, 자명성을 지닌 채 활동하는 인간의 의식에 침투해 들어가는 이 현상의 집합이 바로 사이비 구 체성의 세계를 구성한다. 사이비 구체성의 세계는 다음과 같은 세계다. ∙ 현실적이고 본질적인 과정의 표면에서 진행되는 외적 인 현상들의 세계. ∙ 조달과 조작, 즉 인간의 물신화된 실천(이는 인류의 혁 명적이고 비판적인 실천과 동일시될 수 없다)의 세계. ∙ 외적인 현상이 인간의 의식에 투영된, 즉 물신화된 실 천의 산물들인 통속적 관념들의 세계. 이것은 이 물신화된 실천의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형태이다. ∙ 그 자체로서 자연적 상태라는 인상을 주며, 인간의 사 회적 활동의 결과로서 직접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고정화된 대상들의 세계. 사이비 구체성의 세계는 참과 거짓이 섞여 있으며 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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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진행된다. 현상은 본질을 드러내 줌에도 불구하고 또 한 본질을 은폐한다. 본질은 그 자신을 현상 속에서 드러내 지만 그것은 부분적이며 어느 정도까지일 뿐이고, 어떤 측 면과 양상 속에서일 뿐이다. 현상은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지시해 주고 있으며 오직 자신의 대립물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본질은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 상에 의해서 매개되며, 따라서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여 준다. 본질은 현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본질이 현상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그 것이 운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본질은 고정되고 수동적인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 로 현상은 본질을 드러내 준다.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현상 의 활동이다. 현상 세계는 노출되고 묘사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구조 와 질서 그리고 법칙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 세계의 구조는 아직은 현상 세계와 본질 사이의 관계를 포착하지 않고 있다. 만약 본질이 현상 세계에서는 전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실재(實在, 또는 현실, Wirklichkeit)의 세계는 현상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일 것 이다. 마치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에서와 같이 ‘실재의 세계’ 는 인간에 대해서는 ‘저 다른 세계’일 것이며 인간이 접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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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유일한 세계는 오로지 현상의 세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 세계란 자체로서 자율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것 이 아니다. 현상은 본질과의 관계를 통해서 현상적 세계로 전화하는 것이다. 현상은 본질과 근본적으로 분리되는 것 이 아니며 본질 또한 현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가진 실재 인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현상은 본질에 대해서 아무 런 내적인 관련을 갖지 않게 되고, 현상은 본질을 은폐할 수 도 드러낼 수도 없을 것이며, 이들의 관계는 상호 외면성과 무관심의 관계가 될 것이다. 어떠한 사상(事象)의 현상을 포착한다는 것은 사상 자체가 그 현상 속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가라는 점뿐만 아니라 사상 자체가 어떻게 현상 속에 은폐되어 있는가를 조사하고 기술한다는 것을 말 한다. 현상의 파악은 본질에 들어가는 통로를 연다. 현상이 없다면, 즉 드러내고 보여 주는 활동이 없다면 본질 그 자체 에는 접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이비 구체성의 세계에서 는 사상의 현상적 측면이(여기에서 사상이 드러나는 동시 에 은폐되는데) 그대로 본질로 간주되며, 현상과 본질의 구 별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현상과 본질을 구별한다는 것이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혹은 실재의 서로 다른 두 가 지 질서를 구별함을 말하는 것인가? 본질은 현상보다 더 실 재적인가? 실재는 현상과 본질의 통일이다. 만약 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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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쪽이 분리되어 그것이 ‘진짜’ 실재라고 간주된다면, 그것이 본질이건 현상이건 마찬가지로 비실재적일 것이다. 이와 같이 현상이란 은폐된 본질과는 반대로 자신을 직 접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왜 ‘사상 자체’나 사 상의 구조는 직접적으로 즉시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왜 우 리는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회를 해야 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왜 ‘사상 자체’는 직접적인 지각에게는 은 폐되어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은폐되어 있는가? 사상 자 체는 절대적으로 은폐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일단 사상의 구조를 탐구할 수 있고 사상 자체를 알고 싶어 한다 면, 그리고 사회의 은폐된 본질 혹은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 는 것이 여하튼 가능하다면, 인간은 이미 모든 탐구에 앞서 서 일정한 인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즉, 사상 의 구조, 본질 혹은 사상 자체 같은 것이 존재하며, 직접적 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현상과는 다른 사상의 어떤 감추어 진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 않을 수 없기 때 문이다. 인간은 드러내야 할 진리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상 자체를 어떻게든 인식하고 있기 때문 에, 비로소 우회를 하고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사 상의 구조에 즉시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가? 왜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회가 필요하며, 우회를 통해 도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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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곳은 어디인가? 직접적인 지각에 의해서는 ‘사상 자체’가 아니라 사상의 현상이 포착된다면, 그것은 사상의 구조가 현상과는 다른 질서를 가진 실재이기 때문인가? 따라서 사 상의 구조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전혀 다른 실재인가? 본질은 현상과는 달리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사상의 은폐된 기초는 특수한 활동을 통하여 드러내 져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과학과 철학이 존재하는 분명한 이 유이다. 만약 사물의 현상 형태와 본질이 동일한 것이라면 과학과 철학은 불필요할 것이다.3) 예로부터 철학에서는 사상의 구조와 ‘사상 자체’를 밝혀 내고자 하는 노력이 항상 행해져 왔다. 여러 가지 중요한 철 학 조류들은 인류의 상이한 발전 단계에 따라 이 기본적인

3)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관계들의 내적인 구조가 아니라, 오직 직접적인 현상 형태만 반영한다. 만약 그 내적인 구조도 그대로 반영된다면 과학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67. 6. 27. Marx-Engels, ≪Werke≫, Berlin, 1961ff., Bd. 31, S. 313). “… 만약 사물 의 현상 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필요 없을 것이 다”[Marx, ≪Das Kapital≫, Berlin, 1953ff., Bd. III, S. 313(≪Capital≫, New York, 1967, vol. 3, p. 817)]. “모든 현상 형태들과 거기에 숨겨진 배후 와의 구별은 현상 형태와… 본질적 관계의 구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현 상 형태는 일상적인 사유 형태로 직접적이고 자연스럽게 재생산되며 본질 적 관계는 과학에 의해 비로소 발굴되어야 한다”[Marx, ≪Das Kapital≫, Bd. I, S. 567f.(≪Capital≫, vol. 1, p. 542); 강조는 Kosí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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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의 다양한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철 학이란 인류의 불가결한 활동이다. 왜냐하면 사상의 본질, 현실(Wirklichkeit)의 구조, ‘사상 자체’ 혹은 사물들의 존재 는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즉시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이란 사상 자체를 포착하고 사상의 구 조를 드러내며 사물들의 존재를 밝히는 것을 지향하는 체계 적이고 비판적인 노력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사상의 개념(Begriff)이란 사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함 (Begreifen)을 뜻하며 사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사상의 구조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인식의 가장 독특한 성격은 그것이 하나를 둘로 나눈다는 데 있다. 변증법은 외 부로부터, 혹은 뒤늦게 인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인 식의 속성도 아니다. 오히려 인식은 변증법의 여러 형태 가 운데 하나의 형태를 띠고 있는 변증법 자체이다. 즉 인식은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에서 ‘개념’과 ‘추 상(Abstraktion)’이란 용어는 사상의 구조를 지적으로 재생 산하기 위하여, 즉 사상을 개념 파악하기 위하여 하나를 나 눈다는 방법의 의미를 지닌다.4) 4) 어떤 철학자들은(예를 들어 G. G. Granger, <L'ancienne et la nouvelle économique>, ≪Esprit≫, 1956, S. 515) ‘추상’의 방법과 ‘개념’의 방법이 전적으로 헤겔에만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철학이 사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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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은 본질과 현상의 분리로서, 본질적인 것과 주변적 인 것의 분리로서 실현된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한 분리만 이 그들의 내적인 연관과 더불어 사상의 특수한 성격을 보 여 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주변적인 것은 밖으로 버려 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덜 현실적이라거나 혹은 비현실적이 라고 하여 떼어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상의 진리를 그 본질 속에서 증명함으로써 그것이 현상적인 혹은 주변적 인 것으로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를 둘로 나눈다는 것은 철학적 인식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이며−나눔이 없 이는 인식도 없다−인간의 활동의 구조와 유사한 구조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활동 역시 하나를 둘로 나누는 데 근거 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저절로 현실의 성격에 대립되는 방향으로 움직 이며 그것은 현실을 고립시키고 ‘마비시키는’ 효과를 갖는 다. 그리고 이 자연발생적인 움직임은 추상성으로 나아가 는 경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자체는 사유의 내 재적 속성이 아니며 오히려 사유의 현실적 기능에서 연유된 것이다. 모든 활동은 ‘일면적’5)이다. 왜냐하면 모든 활동은 구조에 이르기 위한, 즉 사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5) 마르크스, 헤겔, 그리고 괴테는 모두 낭만주의자들의 허구적 ‘전면성’에 반 대하여 이 실천의 ‘일면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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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목표를 추구하며 따라서 현실의 일부 계기들만을 본 질적인 것으로 고립시키고 다른 계기들은 배제해 버리기 때 문이다. 이 자연발생적 행동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중요한 특정한 계기들만 끄집어냄으로써 통일된 현실을 균 열시키며 현실에 개입하고 현실을 ‘평가한다’. 현상들을 고 립시키고 현실을 본질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으로 나누는, ‘실천’과 사유의 자연발생적 경향은 특정한 측면이 그 속에 서 그리고 그로부터 고립되어서 나오는 전체에 대한 자각을 항상 수반한다. 비록 그것이 소박한 의식에게는 덜 분명하 고 흔히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이 자각도 역시 저절로 이뤄 진다. 하나의 전체로서의 ‘무규정적 현실의 지평’에 대한 희 미한 자각은, 비록 소박한 의식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모든 활동과 사유의 필연적인 배경을 형성한다. 현상과 사물들의 현상 형태는 일상적 사유 속에서 현실 (즉 현실 자체)로서 저절로 재생산된다. 이는 이들이 표면 에 있고 따라서 감각적 인식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들의 현상 형태는 매일매일의 실천의 자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의 공리주의적(utilitaristisch) 실천은 운 동과 존재의 한 형태로서의 ‘일상적(routine) 사유’−이는 사물들과 그들의 피상적 외관에 대한 친숙성과 더불어 실제 로 사물들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을 포괄한다−를 발생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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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일상적 사유는 일상적 인간 행위의 이데올로기적 형태 이다. 그러나 인간의 물신숭배적 실천, 조작과 조달 속에서 인간에게 드러나는 세계는, 비록 그것이 현실세계의 ‘견실 성’과 ‘효력’을 갖고 있기는 해도, 진정한 세계는 아니다. 그 것은 오히려 ‘가상(假象)의 세계’(마르크스)인 것이다. 사상 에 대한 표상이 사상 자체인 양 가장하고 이데올로기적인 외모를 띠지만, 그것은 사상이나 현실의 자연적 속성은 아 니다. 그것은 오히려 특정의 화석화된 역사적 상황이 주체 의 의식 속에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 표상과 개념,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사람들의 일상적인 공리주의적 실천과 인류의 혁명적 실천 등을 구별한다는 것, 즉 한마디로 ‘하나를 둘로 나눈다’는 것은 바로 사유가 ‘사상 자체’에 도달하기 위한 양식이다. 변증법은 ‘사상 자 체’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길을 체계적으로 찾아 나가는 비판적 사유다. 따라서 변증법은 일상적 관념들을 독단적으로 체계화하거나 낭만화하는 것 에 대립된다. 현실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사유는 이 현실의 추상적 도식이나 현실에 대한 똑같이 추상적인 표상에 만족 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는 일상적으로 직접 접촉하 는 세계가 지니는 겉보기의 자율성을 폐기(219쪽 주석 119 참조)해야 한다. 이러한 사유는 구체성에 이르기 위하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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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 구체성을 폐기하는 것으로서, 가상세계의 배후에 있 는 현실세계를, 그리고 외면적인 현상의 배후에 있는 현상 의 법칙을, 눈에 보이는 운동의 배후에 있는 현실의 내적 운 동을,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 다.6) 이러한 현상들에 사이비 구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현 상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현상의 존재가 지니는 겉보기 의 자율성이다. 사이비 구체성을 파괴함에 있어서 변증법 적 사유는 이들 현상의 존재 자체나 객관적 성격을 부정하 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의 매개성을 보여 줌으로써 현상의 허구적인 자립성을 폐기하고, 현상의 파생적 성격을 증명 함으로써 현상이 사칭하는 자율성을 반박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고정화된 가공물이나 구성물 및 대상들, 혹은

6)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허위의식과 사물들에 대한 현실적 파악을 구별 하는 데서 방법론적으로 구축된다. 연구되는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주된 범주들은 다음과 같다. ∙ 현상−본질 ∙ 가상의 세계−현실세계 ∙ 현상의 외적인 가상−현상의 법칙 ∙ 실제적인 현존−내적이고 본질적인 감춰져 있는 핵심 ∙ 눈에 보이는 운동−현실적인 내적 운동 ∙ 표상−개념 ∙ 허위 의식−참된 의식 ∙ 표상들의 독단적 체계화(‘이데올로기’)−이론과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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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물질적 세계와 표상과 일상적 사유의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전복합체에 대해, 그것들을 근원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변증법은 이들을 이미 완성된 형 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변증법은 이들을 탐구하며, 그럼 으로써 객관세계와 관념세계의 물화된 형태들을 해소시키 고 그것들에 고착된 자연적 성격과 허구적인 근원성을 박탈 하며, 그것들을 파생되고 매개된 현상으로, 인류의 사회적 실천의 침전물과 가공물로 보여 준다.7) 7) “마르크스주의는 물화된 경제세계의 사이비 직접성의 배후에 있는, 그 경 제세계를 형성하였으며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경제세계) 배후에 숨겨 져 있는 사회관계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다”(A. de Waelhens, ≪L'idée phénoménologique de l'intentionalité≫, La Haye 1959, S. 127f.). 비마르크 스주의자인 한 저자가 제공한 이 성격 규정은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증언이 다. 이는 20세기의 철학에 있어서 사이비 구체성과 모든 양식의 소외를 파 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철학들은 그 문제 의 해결 방식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실증주의와[실제적인 혹은 억측된 형이상학에 대한 카르납(Carnap)과 노이라트(Neurath)의 투 쟁을 참조] 현상학과 실존주의가 모두 공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자인 쩐 덕 타오(Tran-Duc-Thao)는 그의 저작에서 최초로 진지하게 현상 학과 마르크스주의를 대조시키려고 시도했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이 갖 는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고 그것이 20세기의 철학적 문제와 내적인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 것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에 의해 최초로 행해졌다는 사실 은 특기할 만하다. 쩐 덕 타오는 사이비 구체성의 현상학적 파괴가 갖는 모 순적이고 역설적인 성격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일상 언어에서는 가상의 세계가 현실 개념이 지니는 모든 의미를 도용해 왔다. … 가상은 현실세계 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으며 그 가상을 제거한다는 것이 세계 자체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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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판적인 반성적 사유8)는 직접적으로 변증법적 분석 없이 고정된 표상들을 똑같이 고정적인 조건에 인과적으로 관련짓고 나서는, 이러한 ‘소박한 사유’ 방식을 관념들에 대 한 유물론적 분석이라고 사칭하려 한다. 사람들이 ‘광부의 신앙’이나 ‘소시민적 회의’의 범주들에 의해 자기 시대를 자 각해 왔기 때문에(즉, 경험하고 평가하며 비판하고 파악해 왔기 때문에), 공리 공론가는 단지 이러한 관념들에 상응하 는 경제·사회·계급적 등가물을 찾아내기만 하면 그 관념 들의 과학적 분석이 이뤄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 ‘물질 화’의 과정은 단지 이중의 신비화를 수반할 뿐이다. 즉 가상 (혹은 고정된 관념들)세계의 전도는 전도된(물화된) 물질 성에 닻을 내린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왜 사람들이 자신 께 쓸어 가는 형태를 취했다. … 인간이 되돌아가는 진정한 현실은 이제 역설적으로 순수의식이라는 비현실적 형태를 취했다”[Tran-Duc-Thao, ≪Phenoménologie et materialisme dialectique≫, Paris, 1951, B. 223f. (≪Phenomenology and Dialectical Materialism≫, D. Reidel, Dordrecht and Boston)]. 8) 헤겔은 반성적 사유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반성이란 대립들을 확립하 여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되 그들을 결합시키거나 이들을 삼투하는 통일을 실현하지는 않는 활동이다”[Hegel, ≪Philosophie der Religion≫, 1부, ≪Werke≫(Glockner), d. 15, S. 215. (≪Philosophy of Religion≫, London, 1895, pp. 204f.)] 또한 마르크스의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Berlin, 1953, S. 10(≪Grundrisse≫, p. 8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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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대를 바로 이러한 범주들을 통하여 인식하게 되었는 가, 그리고 사람들이 그 범주들 속에 어떠한 종류의 시대가 반영되었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서 분석을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을 함으로써 유물론자 관념과 상황 양쪽 모두의 사이비 구체성을 파괴할 기반을 준비하며, 이 기반 위에 비 로소 각 시대와 그 관념들 사이의 내적인 연관에 대해 합리 적인 설명을 내놓을 수 있다. 참된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 사물세계와 관념세계의 물 신화(物神化)된 가공물들을 해체시켜 버리는 변증법적ᐨ비 판적 사유 방식으로서의 사이비 구체성의 파괴는, 물론 현 실을 변혁하기 위한 혁명적 방법으로서의 다른 측면에 지나 지 않는다. 세계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해석 자 체가 혁명적 실천에 근거해야 한다. 오직 우리 자신이 현실 을 형성하고 또한 현실이 우리에 의해 형성됨을 우리가 알 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현실은 혁명적으로 변혁 될 수 있다는 점을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연적 현실과 사회ᐨ인간적 현실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키고 변경시킬 수 있는 반면에 사회ᐨ 인간적 현실은 오직 혁명적으로만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 것도 그가 이 현실을 스스로 형성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사이비 구체성에 의해 은폐되면서도 다시 그 속에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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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드러내는 현실 세계는, 비현실적 상황에 대립된 현실 적 상황의 세계가 아니며 주관적 환상에 대립된 초월적 세 계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실천의 세계인 것이다. 현실 세계는 사회ᐨ인간적 현실을 생산과 생산물, 주체와 객체, 발생과 구조의 통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세 계는 마치 플라톤적 이데아가 자연주의적으로 유추되는 경 우처럼, 물신화된 대상 형태의 배후에서 초월적인 존재를 영위하는 고정된 ‘실재적인’ 대상들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 려 현실세계란 사물이나 의미 그리고 관계들이 사회적 인간 의 생산물로 이해되고 자신이 사회적 세계의 현실적 주체로 서 나타나는 세계이다. 현실세계는 천국에 관한 세속화된 이미지도 아니며 이미 완성된 무시간적 상태에 관한 이미지 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와 개인이 그들의 진리를 실현해 나 가는, 즉 인간을 인간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현실의 세계는 사이비 구체성의 세계와는 달리 진리를 실현해 나가는 세계 이며, 진리가 주어지거나 예정되며 인간의 의식 속에 이미 완성되어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복제되는 그러한 세계가 아 니라 진리가 생겨나는 세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의 역 사는 진리의 이야기이며 진리의 발생사가 될 수 있다. 사이 비 구체성을 파괴한다는 것은 진리가 얻어질 수 없다거나 아니면 한꺼번에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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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진리 자체가 발생한다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전개하 고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비 구체성은 따라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파괴된 다. (1) 인간의 비판적ᐨ혁명적 실천에 의해서−이는 인간 의 인간화와 동일한 것이며 그 결정적인 단계는 사회혁명이 다. (2) 현실과 ‘사상 자체’에 이르기 위해 물신화된 가상세 계를 해체시키는 변증법적 사유에 의해서 (3) 개체발생적 과정 속에서 진리를 실현하고 인간적 현실을 형성함에 의해 서. 왜냐하면 진리의 세계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 개인의 독특한 개인적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은 남이 대신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문화를 향수해야 하며 자 신의 삶을 이끌어야 한다. 따라서 사이비 구체성을 파괴한다는 것은, 장막을 찢어, 그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활동과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이 미 완성되어 주어진 현실을 발견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이 비 구체성이란 인간의 생산물이 자율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이며 인간이 공리주의적 실천의 수준으로 환원됨을 말한다. 사이비 구체성의 파괴는 구체적 현실을 형성하는 과정이며 현실을 그 구체성에서 바라보는 과정이다. 관념주의적 경 향은 주체를 절대화한 나머지 어떻게 현실을 바라보아야 그 것이 구체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집착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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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혹은 객체만을 절대화한 나머지 주체가 현실로부터 완 전히 제거되면 될수록 현실은 더욱더 현실적으로 된다고 믿 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이비 구체성의 유물론적 파괴는 ‘주체’의 해방(즉 현실에 대한 물신숭배적 ‘직관’과는 구별되 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파악)과 아울러 ‘객체’의 해방(즉 인 간적으로 투명하고 합리적인 상황으로 인간의 환경을 형성 하는 것)을 결과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사회적 현실은 주 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통일로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극히 다양한 형태의 사이비 구체성에 대한 반발로서 주 기적으로 들려오는 ‘근원으로’라는 표어나, 실증주의의 방 법론적 규칙인 ‘선입견으로부터의 해방’은 사이비 구체성의 유물론적 파괴 속에서 토대와 근거를 지닌다. 물론 ‘근원’에 의 회귀는 두 개의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한다. 때때로 그것은 인문주의적이고 현학적인 원전 비판이나, 고대의 문헌과 문물에 대한 연구로 나타나며, 여기에서 참된 현실이 도출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다 깊고 중요한 형태에서 는, 비록(셰익스피어나 루소에 대한 반응에서 볼 수 있듯이) 세련되고 현학적인 철학은 그것을 유치하다고 보았지만, 이 ‘근원으로’라는 표어는 문명과 문화에 대한 비판을 의미 한다. 이는 생산물과 가공물의 배후에 있는 생산적 활동을 발견하고 지배적 문화의 물화된 현실의 배후에 있는 구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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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참된 현실’을 찾아내며, 고정화된 관습의 침전물 속 에서 역사의 진정한 주체를 발굴해 내려는 낭만적 혹은 혁 명적 시도이다.

2. 현실의 정신적·지적 재생산 사물들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보여 주 지 않으며, 인간은 직접적으로 사물들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류는 우회로를 통해 사물들과 그 구조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긴 여행의 고달픔을 회피해 보고자 단번에 사물들의 본질을 직 관할 방법을 찾으려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회로만이 진리 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신비주의는 진리 추구 에 대한 인간의 조급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이 우회의 과정에서 길을 잃거나 중도에서 멈춰 버릴 위험 도 있다. ‘자명성(自明性)’이란 사상 자체의 명석 판명함과는 거 리가 멀고 오히려 사상(事象)에 대한 표상의 불명료함일 뿐 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비자연적인 것임이 밝혀진다. 인간 이 인간으로 되고(인간은 노력하여 점차 인간이 된다)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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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현실로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는 ‘자연상태’를 벗어나 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시대의 모든 경향의 위대한 철학 자들, 이를테면 동굴의 신화를 얘기한 플라톤, 우상의 이미 지를 얘기한 베이컨, 혹은 스피노자, 헤겔, 후설, 마르크스 등은 모두가 인식의 특징을 자연적인 것의 극복, 최상의 활 동, ‘힘의 사용’으로 올바르게 규정했다. 인간의 인식에서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변증법은 특히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서 나타난다. 즉 사물들 자체(Dinge an sich)9)를 알기 위해서 는 인간은 그것을 인간에 대한 사물들(Dinge für sich)로 변 형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사 물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간의 실천 속으로 끌어들 여야 한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사물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에 개입하여야 한다. 인식은 관조가 아니 다. 세계에 대한 관조는 인간 실천의 결과에 근거한다. 인간 은 그가 인간 현실을 형성하며 근원적으로 실천적 존재로서 활동하는 한에서 현실을 알 수 있다. 9) (옮긴이 주) ‘Ding an sich(物自體)’는 칸트의 용어로서 경험을 초월하여 있 는, 그대로의 대상을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이 그 자체로 어떠한 것 인지에 대해서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으며 다만 사물의 현상, 다시 말하 면 사물이 우리의 감각을 촉발함으로써 우리 내부에서 생겨나도록 하는 표 상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변증법은 실천을 매개로 이 ‘물자체’라는 망령 을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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