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유 동화선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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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동화문학선집

장성유 동화선집 장성유 짓고 고인환 해설하다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

땅 어머니



어느덧 새벽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둘 사위어 가고 있습니다. 풀잎에 는 어느덧 푸른 서리가 내려앉고 있습니다. 멀리 검은 산마루 위로는 작은 샛별 하나가 등대마냥 반짝반짝 눈을 깜박이고 있습니다. 한 소년이 턱을 괸 채로 가만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 고 새벽이 다가오는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먼 항해를 꿈 꾸는 것일까요? 소년은 밤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은 검푸른 물을 풀어 놓은 듯합 니다. 소년은 창턱을 스쳐 가는 희미한 바람과 별, 그리고 달 빛 따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같이 자 기에게 먼 것이지만, 늘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언덕 저쪽에 사는 안나라고 하는 소녀의 이름을 떠 올렸습니다. ‘안나, 넌 지금쯤 잠들어 있을 테지? 얼마나 아름다운 새 벽인지 몰라….’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안나 또한 소년처럼 깨어 일어나 있었습니다. ‘철진아, 잠들어 있니? 이렇게 아름다운 새벽을 함께 보 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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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는, 이날따라 유난히 새벽하늘이 푸르다고 생각 했습니다. ‘당장 달려가서 안나를 불러낼 수 있다면….’ 소년은 주먹을 볼끈 쥐었다가 맥없이 손을 풀어 놓습니 다. 소년의 두 다리는 무거운 짐 덩이마냥 조금도 움직이 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다리를 못 쓰게 된 까 닭입니다.

그때였습니다. 승무원을 태운 큰 바구니 하나가 미끄러지듯이 소년의 집 창문 앞에 멈추었습니다. 소년은 당황해 처음에는 두 팔로 기어서 방구석에 숨으려 했습니다. “얘야,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의 승무원이란다.” 소년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짙은 남빛 옷에 번쩍거리는 단추를 달고, 모자를 단정 히 눌러쓴 채 승무원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소년의 눈 은 금세 빛났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이라고요?” “그렇단다.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이 있단다.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새벽 첫 전철을 넌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저희 아버진 첫 전철을 타고 일터로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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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까요.” “그 전에 전철이 한 대 더 운행되고 있단다. 아무도 모르 는 첫 전철이지.” “그래요?” “그렇단다. 너처럼 새벽에 깨어 있는 마음 착한 사람들 만 탈 수 있는 전철이지. 오늘처럼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그 속에서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을 때란다. 별들이 사라질 즈음엔 전철도 자취 없이 모습을 감추게 된단다.” 소년은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게 한꺼번에 떠올라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어디로 가 는데요?”였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라로 간단다.” 승무원이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라도 있어요? 아! 그곳에는 아무도 모 르는 사람이 살고 있나요?” 호기심에 어린 소년의 눈은 아무도 몰래 반짝반짝 움직 였습니다. “그렇단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지. 어떠니,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을 한번 타 보지 않으련?” 소년은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승무원의 눈길을 옆으로 피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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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리를 못 쓰는걸요. 제 다리가 안 보이세요?” 소년은 이내 고개를 떨군 채 원망 섞인 목소리로 울먹 입니다.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긁으면서, 구멍이라도 있다 면 꼭꼭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승무원은 조 용히 웃으며 물었습니다. “얘야,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에서는 그런 건 아무런 장 애가 되지 않는단다. 두 팔에 힘을 주고 네 몸을 들어 올려 봐. 그러면 네 몸이 새가 된 듯 가벼워질 게다.” “….” 소년은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 습니다. 그리고 승무원이 시킨 대로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밀어내듯이 들어 올려 보았습니다. 몸이 바람을 만난 깃 털처럼 사뿐 떴습니다. 소년은 창밖으로 날아가 승무원의 바구니에 올라탔습니다. 바구니는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 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소년은 안나의 집이 보이는 언덕 저쪽을 보았습니다. 방금 그쪽에서 불빛이 비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저 기 솟아 있는 빌딩 때문에 안나의 작은 집은 더 이상 보이 지 않았습니다. 얼마쯤 가니까, 과연 아무도 모르는 전철을 타려는 사 람들이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승무원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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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에서 훌쩍 뛰어내렸습니다. 승무원은 조심스러운 목 소리로 어떻게 전철을 타야 하는지 일러 주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에서는 표를 팔지 않는단다. 네 손바닥을 개찰구에 살짝 올려놓았다가 떼기만 하면 돼. 자, 그럼. 난 또 새벽에 깨어서 별빛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찾으러 다녀야 한단다.” 소년은 사람들을 따라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습니다. 마 침 아무도 모르는 나라로 가는 전철이 곧 도착한다는 방송 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소년은 비로소 자기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소 년은 전철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서 있다가, 사람들에게 떠밀려 전철 안으로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자리를 차지하 지 못한 것이 소년은 더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 게 두 다리로 설 수 있다니! ‘이렇게 묵직하고도 단단한 것이 무엇일까? 이게 땅의 무게인가, 두 다리의 힘인가!’ 소년은 온몸이 뻐근해지도록 다리에 힘을 줘 봅니다. 그때였습니다. 큰 어른들 속에서 안나의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습니 다. 그러나 전철은 비좁고 안나는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 다. 안나는 일찌감치 소년을 발견하고는 마음으로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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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생각합니다. ‘안나의 눈높이로 봐서, 나처럼 서 있는 것이 틀림없어. 안나… 너도 휠체어를 두고 날아왔구나.’ 그랬습니다. 안나는 어릴 때 그만 계단에서 떨어져 다 리를 다친 뒤로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처음 들 어 보는 역 이름이 많기도 합니다. 진달래 언덕, 찬 우물 터, 밤나무 숲, 남쪽 성문, 푸른 동굴…. 마침내 전철은 아 무도 모르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라는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 습니다. 파란 풀밭이 펼쳐져 있고, 언덕 밑에선 시냇물이 흐르고, 멀리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도 있었습니다. 풀밭 에서는 풀과 꽃향기가 물큰하게 피어올랐습니다. “아름다워…. 철진아, 땅속에 이런 곳이 있었을까?” 안나의 말에, 소년은 싱긋 웃고 대답했습니다. “이곳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대.” “그러니? 얘,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사 람을 알아낼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둘은 즐겁기만 했습니다. 얼 마나 서투르게 걷는지 두 사람은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리 는 나뭇가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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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디선가 꺼질 듯이 큰 한숨 소리가 들려왔습니 다. ‘이게 무슨 소리지?’ 둘은 눈을 찡긋 맞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갔습니 다. “아… 무거워…. 아… 무거워….” 아무도 모르는 나라에 내린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듣고 같이 소리 나는 쪽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찾 아도 목소리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에서 들리는 것 같고, 왼쪽으로 가면 또 오른쪽 에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다녀도 ‘아… 무 겁다…’라고 외쳐 대는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외쳐 보아요.” 안나가 사람들 앞에서 용기 있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안나의 생각에 모두 찬성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크게 외쳤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어찌 된 일인지, 땅 어머니는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습 니다. 사람들은 비참하게 일그러진 땅 어머니를 보고 퍽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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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 도대체 뭐가 불평인 거 요!” “머리가 무거워…. 예전에 내 머리는 아주 가뿐했지. 그 러나 지금은 늘 찌뿌드드하고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단 말이 지. 머리가 이렇게 무거우니 아름다운 것을 봐도 전혀 즐겁 지가 않단 말이지…. 왜 이렇게 머리가 무거워졌을까….” 땅 어머니는 고통을 참는 듯 눈을 감았습니다. 승무원이 뒤이어 말했습니다. “여러분, 땅 어머니가 이렇게 시름에 잠겨 있어서 큰일 이오. 전철을 타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따라서 어두워 지고 말았지 뭡니까!” 경매장으로 가던 장사꾼이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땅 어머니한테 빚이 있을 거요. 나도 지금 빚쟁이 때문 에 골이 터질 것 같거든.” 막 수술을 끝내고 집으로 가던 의사도 지지 않고 말했 습니다. “아냐! 머릿속에 가위가 있을 거요. 틀림없어! 내 환자 도 그랬다오. 머리가 쑤시고 흔들려서 병원에 왔는데, 세 상에! 머릿속에서 이 주먹만 한 가위가 들어 있지 않겠소. 지난번 수술 때 그대로 넣고 기워 버린 것이었다오.” 그때 새벽까지 술을 마시던 술꾼이 코를 비틀며 외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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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다 소용없어! 그럴 땐 술을 퍼마셔야 해. 머리가 아플 땐 머리가 아프다는 생각을 잊는 게 최고야!” 하지만 그 누구의 말도 땅 어머니의 시름을 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이때 소년은 안나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습니다.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보내자 소년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땅 어머니의 머리가 무거워진 건 땅 위에 있는 빌딩 때 문인 것 같아요!” “빌딩? 그게 뭐지?” 땅 어머니는 처음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습니 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집이에요. 어떤 것은 수십 층도 더 되는데, 사람들은 너도 나도 없이 서로 높이 지으려고 경쟁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그런 빌딩을 지으려면 땅속으 로 기둥을 수십 미터씩이나 박아야 하는데, 땅 어머니의 머리가 오죽 아팠을까요?” “아! 이제 알겠어…. 하지만 얘야, 그곳에도 사람이 살 고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그 빌딩을 없앨 수 없어. 사람이 다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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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또다시 걱정에 잠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대체 어떡하자는 거요!” 이때 소년이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이며 소리쳤습니다. “땅 어머니 걱정 마세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빌딩들에 게 날개를 달아 주세요!” “날개?” “예. 빌딩 때문에 땅 어머니도 머리가 무거워졌지만, 빌 딩들도 사실은 얼마나 날고 싶을까요?” 땅 어머니는 가만히 눈을 뜨고 있다가 천천히, 그러나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습니다. “오! 좋아. 바로 그거야!” 땅이 뒤흔들릴 듯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첫 전철이 곧 도착합니다.”

이제 창공의 별은 모두 사라지고 동녘 하늘이 밝아 옵 니다. 아무도 모르는 첫 전철이 사라지는 때가 온 것입니 다. 저 먼 데서 곧 해가 뜨려는 듯, 산 능선이 가물거리는 눈시울 같습니다. 손을 잡고 서 있던 철진과 안나는 어느새 날고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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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드러운 길가의 삼나무 잎사귀가 두 사람의 발목을 어루만집니다. 전철을 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사람들 의 어깨는 솜처럼 가볍고 발걸음은 새로 피어난 꽃처럼 산 뜻해 보입니다. 소년이 소리쳤습니다. “안나, 저기 봐!” “어머!” 안나는 외마디 탄성을 터뜨렸습니다. 모든 빌딩들이 하나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있는 게 아닙니까! 잠시 후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싱긋 웃어 보였습니다. ‘아… 땅 어머니의 머리가 예전처럼 가벼워졌나 보다.’ ‘아무도 모르는 나라의 아름다운 그곳…. 땅 어머니는 얼마나 즐거울까!’ 저기, 마주 보고 있는 두 산이 기지개를 켜듯 팔을 길게 뻗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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