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사회학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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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미디어사회학 서명준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미디어사회학

지은이 서명준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펴낸날 2014년 4월 15일 커뮤니케이션북스(주) 출판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청원빌딩 3층 전화 (02) 7474 001, 팩스 (02) 736 5047 commbooks@commbooks.com www.commbooks.com CommunicationBooks, Inc. 3F Cheongwon Bldg., 571-17 Yeonnam-dong Mapo-gu, Seoul 121-869,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가 저작권자와 계약해 발행했습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서명준, 2014 ISBN 979-11-304-0167-6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나무에서 숲으로

미디어사회학의 출발점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은 인쇄 출판업자를 낳았고, 지식 전달자와 생산수단 소유자를 분리했다. 인류의 오랜 대인 커뮤니케이션은 인쇄 혁명 이후 커뮤니케이션 산업으로 발전해 왔다. 구텐베르크 이후 산업자본주의를 거쳐 정보 자본주의 시대에 이른 오늘날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가능 성과 그 형식은 무한대에 가깝다. 더구나 미디어를 제외 하고 현대사회 커뮤니케이션을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오 늘의 미디어 융합(convergence) 환경은 15세기 구텐베르 크의 인쇄매체 시대와 시간을 초월하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간의 삶은 그때도 지금도 오직 사회적 삶으로서만 가능 하다는 점이다. 이성과 감성, 욕구, 욕망, 믿음과 같은 개 인의 정신적·물질적 삶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사회적 삶 속에서 비로소 형성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하는 까닭이다. 19세기 프랑스 사상가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가 ‘사회학’을 천명한 이래 사회에 관한 과학인 사회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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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규정된 복합적 총체인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 을 탐구한다. 독일의 커뮤니케이션 사상가인 불프 훈트 (Wulf D. Hund)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커뮤니케 이션 과정은 “수많은 관념적이고 물질적인 제도들을 창출 했으며, 이는 산업사회학, 경제사회학, 정치사회학, 법사 회학, 문학사회학, 종교사회학,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 정보사회학 등 다양한 특수 사회학들”이 등장하게 만들었 다고 밝히고 있다. 신문·잡지·영화·방송·통신 등 현 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는 현상은 이른바 미디어사회학이라는 이론 영역을 발전시키고 있 다. 미디어와 사회의 복합적인 관계를 탐구하는 미디어사 회학은 다양한 미디어 유형과 콘텐츠 환경이 사회에 끼치 는 영향과 효과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미 디어가 사회를 반영하는 다양한 형식을 복합적으로 인식 한다. 훈트는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 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인 바로 그 사회의 특성에 대한 탐구 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이 책은 미디어사회학의 다양한 이론적 모델과 방법들 을 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학적 미디어 연구의 출 발점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을 사 회적 관계의 구성 부분으로 인식하는 개념을 따르는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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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이와 관련된 다양한 현상을 분석한다. 미디어 커뮤니 케이션은 그 자체로 논의의 출발점이 아니다. 오히려 ‘사 회적 앙상블’로서 미디어 현상을 관찰한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미디어 분석이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과 유물론 커뮤니케이션 개념을 사회적 삶의 본질적 구성 부분으로 파악하는 것은 기능주의적 개념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의 유명한 커뮤니케이션 개념인 S-M-C-R-E는 송 신자와 수신자 모델에 기반을 둔 기능주의적 커뮤니케이 션 모델이다. 이 모델은 송신자(sender, source)가 전달하 고자 하는 메시지(message)를 전송체계(channel)를 통하 여 수신자(receiver)에게 전달하는 송수신 과정과 그 효과 (effect)를 기술(記述)하고 있으며, 커뮤니케이션의 기능 과 영향력을 밝히는 이른바 효과이론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이 모델에서 송신자와 수신자는 사회적 삶, 다시 말해 사회경제적·역사적 조건과 무관한 수동적이고 정 태적인 개인이다. 무엇보다 기능주의적 사회 이해에서 물 질적 삶의 재생산이라는 계급적 구조와 정신적 삶의 구조 가 조응하는 삶의 총체성은 인식되지 않으며, 송신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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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그리고 미디어는 사회적 관계와 유리된 추상적 개인 이자 테크놀로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사회관 계에서 송신자인 저널리스트는 임금노동자이고 미디어는 자본의 이윤법칙에 종속된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다. 수신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 하고 살며 일하는 계급·계층 집단의 한 구성원이다. 이 러한 현실과 달리 라스웰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기반을 두고 있는 실증주의 사회학은 정교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실재의 일면을 개념화하고 그 내부 요소들의 관련성을 분 석하여 체계화·일반화한다. 이때 연구자의 학술적 행위 의 목적과 방법은 절대 중립적이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된 다. 그러나 송신자·수신자·미디어와 사회관계에서 보 이듯, 미디어 연구자의 학술 행위와 그 결과, 나아가 그 가 치도 마찬가지로 사회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미디어 연구 의 결과는 연구자의 사회·계급적 위상과 관련된 ‘진리’ 다. 여기에 사회적 생산과 지배관계를 바탕으로 삼아 커 뮤니케이션 개념을 해명해야 할 객관적 이유가 있다. 개인은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규정되는 지배 형태에서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지배적 생산관계 에서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소통’이 아니다. 커뮤 니케이션은 오히려 특정한 생산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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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되는 세계에 속한 개인들 사이의 의식 교류다. 개인 들 사이의 소통인 커뮤니케이션 개념은 본질적으로 노동 의 사회적 형태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생산하기 위해서 상호 협력 관계를 맺는다. 이 상호 협력은 곧 커뮤 니케이션을 뜻한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카를 마르크 스(Karl Marx)가 󰡔자본󰡕에서 분석한 “노동의 이중성”에 따라 규정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과정이 다. 노동 과정에서 인간은 한편으로 자연과, 다른 한편으 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자연의 소재적 측면과 인 간-인간의 사회·경제적 측면이라는 이중적 규정 속에 있 다. 그리고 여기 ‘커뮤니케이션의 이중성’이 있다. 언어에 서 종이, 전파에 이르기까지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물리· 소재적 측면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고대 노예사회에서 봉 건사회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사회·경제 적 측면의 규정을 받는다. 언어와 종이는 그것이 인류사 에 등장한 이래 여전히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이지만 오늘 날 자본이 지배하는 전파 미디어인 방송·통신 기술은 다 른 모든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급속히 주변부화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내용과 형식은 노동의 역사적 형태에 종 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면대면 커뮤니케이션과 종이 매체 의 퇴조는 노동과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서 해명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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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것이 미디어유물론의 기본 명제다.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구체적인 노동체계 속에서 개념 적으로 구체화하는 유물론적 과학은 미디어유물론의 기 반이다. 유물론적 과학은 인간 사회를 물질적이고 관념적 인 삶의 도구와 다양한 관계들을 생산하는 과정으로 인식 한다. 이에 따르면 무엇보다 물질적 생산 과정에서 형성 된 사회적 관계는 마르크스가 말하듯 “물질적 산물보다 더 중요한 산물”이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서 이렇게 말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 정 신적 생산수단도 지배한다.” 그러므로 미디어유물론의 관 점에서 미디어는 사회적 생산과 지배로부터 해방된 담론 의 공간이 아니다. 미디어가 창출하는 이데올로기는 기능 주의 효과 이론의 분석 대상인 미디어 기업의 조작과 개입 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정보를 상품으로서 생산하고 유 통시켜 이윤을 획득해야 하는 미디어 ‘자본’의 법칙이 이 데올로기 창출의 근원이다. 즉, 이데올로기 조작은 정보 생산자의 선의나 악의에서 비롯되는, 외부의 어떤 개입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 ‘상품’이 갖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모순적 갈등에서 비롯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 든 정보 생산자가 교환가치를,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객 관적 법칙이 이데올로기의 본질이다. 콜라 병이 섹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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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되듯이, 뉴스도 섹시한 테마를 다루고 또 섹시하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정보는 동시에 오락이 되어야 한다.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는 자본의 이데올로기 ‘조작’ 의 한 현상이다.

상품 세계와 미디어 오늘날 상품만큼 멋지고 아름답고 섹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약속’하고 영원한 꿈을 디자인해 주는 친구는 매우 드물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일상을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상품 세계다. 감성과 센스, 스타일로 디 자인된 이 ‘감각의 제국’에서 기능 합리적인 소비는 점차 옛말이 되어 간다. 이 제국은 독일의 사회철학자 볼프강 하우크(Wolfgang F. Haug)가 분석한 “상품 미학”의 제국 이다. 하우크에 따르면 상품이 약속하는 아름다운 세계는 결코 완전히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세계다. 그 약속은 상 품의 쓸모(사용가치)와 무관하다. 상품의 아름다운 외양 을 소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상품 미학은 광 고에서 나타난다. 광고는 행복을 약속하고 소비자는 약속 의 땅을 찾아 끊임없는 소비의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욕망이 충족된 지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행복의 약속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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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페인들의 약속이다. 소비자는 새로운 욕망들에 이끌려 또 다시 소비 여행을 떠난다. 상품 미학 앞에서 소비자는 자신의 욕망이 이미 충족되었음을 결코 눈치채지 못한다. 이를 눈치채고 소비 행위를 거부하는 개인은 시스템 부적 응자로 치부된다. 소비는 시스템에 속한 삶의 기초대사 다. 끝없는 소비는 더 많은 생산으로 이어진다. 노동이 끝 난 여가 시간에 소비하는 개인은 더 많은 소비 비용을 벌 기 위해 여가를 반납하고 다시 노동으로 되돌아간다.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이 일을 해야 하는 역설이다. 그 러므로 완전한 행복은 언제나 실현되지 않는 공허한 약속 일 따름이다. 행복은 끝없는 ‘다음’으로 연기된다. 상품 미 학의 가상 속에서 소비 중독과 소비하지 못하는 절망은 악 순환한다. 광고 약속은 TV의 약속으로 전이된다. 이른바 막장 드 라마가 약속하는 재미와 감동에 만족하지 못한 시청자는 ‘다음 회’의 약속을 믿는다. 시청 후 남겨진 불만과 공허, 기만의 감정은 다음 회에서 해결될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다. 다음 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시청자는 부산을 떤다. 드 라마가 남겨 놓은 긴장 상태는 다음 회에서 해소되어야 한 다. 적어도 또는 어쩌면 다음 회는 지난 회보다 나을 것이 라는 약속이다. 다음 상품이 출시되기를 기다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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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음 회를 기다리는 즐거움이다. 이 반복되는 공허한 즐거움이 클수록 시청률은 올라간다. 막장 드라마의 성공 은 그 내용보다 오히려 시리즈의 ‘형식’에 있다. 소수의 특정 기업이 지배하는 독점 단계에서 이윤 창출 은 리스크가 적은 광고에 의존한다. 독점자본이 의존하는 광고의 이데올로기는 ‘소비자 선택 주권’이다. 시장에 나 온 상품들은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받는다. 광고는 이 자유의 표현이다. 소비자는 광고를 통해 모든 정보를 얻는다. 광고가 소비자를 현명하게 만든다. 소비자는 거 짓을 말하는 광고를 간파한다. 질 낮은 상품은 구매자를 만나지 못하고 시장에서 축출된다. 생산은 고객의 주문에 따라 이루어진다. 진정 창조적인 행위는 더 이상 생산이 아니다. 주문이, 구매 행위가 자아를 실현하는 창조 행위 다. 주권자의 권능은 생산이 아닌 소비에 한정된다. 주권 자는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 영역에는 관여하지 못하는 무 능한 군주다.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는 TV 소비 행위에 서 실현된다. 방송의 주인으로 칭송받는 시청 소비자는 콘텐츠 제작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자본이라는 점을 깨닫 지 못한다. 콘텐츠 소비가 곧 창조 행위라는 이데올로기 에 가려 콘텐츠 ‘생산’에 관여하지 못하는 무능한 군주임 을 깨닫지 못한다. 방송 주권자의 개입은 TV 채널 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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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pping)가 유일하다. 재핑은 곧 쇼핑이다. KBS와 MBC, SBS와 종합편성·보도전문 채널 등 뉴스 프로그램들 사 이의 재핑은 펩시콜라와 코카콜라, 맥도널드와 버거킹, 스타벅스와 카페베네 사이의 쇼핑이다.

미디어 문화 산업 비판 광고와 TV는 독일 사회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맥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비판한 대표적인 ‘문화 산업’에 속하 는 것으로,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를 창출한다. 아도 르노에 따르면 문화 산업은 일방적인 시스템 광고이며 노 동이 끝난 자유 시간에 소비자가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진 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시 말해 아도르노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비판 이론가들은 소비자인 임금노동자의 모든 문화 행위는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 유지에 기여한다. 따라 서 그것은 ‘나쁜 재생산’ 행위일 뿐이다. 테크놀로지 디스토 피아(distopia)의 비판 이론은 이렇듯 닫혀 있다. 그러나 여 기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의 대중문화 이론이 출구 를 제시한다. 베냐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예술 작품 을 대량으로 재생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 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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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로지는 오히려 대중의 예술·문화 행위 가능성을 증대 시켰다고 진단한다. 대중은 여가 때조차 소비에서 벗어나 지 못하지만, 대중 의식은 성장과 발전을 멈추지 않는다. 부르주아 고급 예술이 가진 원본성의 신비함인 ‘아우라 (Aura)’는 오히려 자본주의 복제와 재생산으로 인해 소멸 된다. 예술은 이제 더 이상 배타적인 고급문화에 국한되 지 않는다. 베냐민은 ‘생산력의 발전이 예술에서 발휘하는 해방적 역할’에 주목한다. 생산력은 자본주의 시대에도 건 축에서 사진, 영화나 광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형 상화 방식을 창출한다. 오늘날 문화는 고상한 가치들의 배타적인 영역이 아니 다. 그것은 일상적 삶을 관통하는 ‘대중 예술’이다. 대형 록 콘서트와 팝아트(pop art) 그리고 펑크록은 저항 정신 의 상징이다. 록 음악은 오히려 문화 산업의 음악 ‘상품’에 적대적이다. 문화 산업 내부에서조차 독자적이고 탈규격 화한 서브컬처의 자기비판이 가능하고 허위의식은 폭로 된다. 획일적이고 규격화한 문화 상품이 결코 완전히 충 족시키지 못하는 다양한 문화적 욕구와 자유를 향한 에너 지는 오락과 저항이 담긴 ‘사이 문화’를 갈구한다. 이 서브 컬처는 문화 산업에 흡수되지만 끊임없이 또 다른 내용과 형식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획일화한 문화 산업에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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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없이 틈새와 균열을 낸다. 자본의 문화 산업은 그 자본 의 내부로부터 분열된다.

정보사회와 미디어 생태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사회 변동의 물질적 요소로 파악하는 것은 유물론적 사회 인식 방법이다. 인간의 노 동력과 결합한 테크놀로지는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적 생산관계는 이에 조응하여 형성된 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손절구는 봉건 영주 를, 증기제분기는 산업자본가의 사회를 양산했다”는 통 찰을 보여 준다. 정보 기술(IT)에 기반을 둔 생산력 혁명 이 일어나는 사회는 이른바 ‘정보사회’로 부른다. IPTV, 스마트TV, 스마트폰, SNS 등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융합 (convergence) 시대는 세계 IT 업계 거장인 빌 게이츠(Bill Gates)가 󰡔미래로 가는 길󰡕에서 기대했던 “마찰 없는 자 본주의”의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찬사다. 노동 집약적이지 도 자본 집약적이지도 않은 대신 지식 집약적인 정보사회 는 세계 어디서나 정보 소스에 접속하기만 하면 실시간 정 보 교환이 가능하다. 정보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무한 대다. 이는 가상공간(cyberspace)에서 커뮤니케이션 자 유가 무한대라는 믿음의 근거가 되고 있다. 누구나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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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참여하며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접근성(public access)은 정보사회 테크놀로지 생산력의 이데올로기다. 이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고전적 자유주의 의 요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근대 자유주의의 고전 적 요구인 공정한 시장(市場)은 디지털 시대에 공정한 사 이버 마켓플레이스(market place)에 대한 요구다. 신문·방송 등 일방향적 미디어 공급자와 그 수용자 그리 고 이를 규제하는 국가로 구성되었던 아날로그 시대 미디어 시장이 제작-유통-소비의 일방향적 가치 사슬의 구조였 다면, 오늘날 그것은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의 국 면에 있다. 그 이름은 미디어 생태계다. 여기에서 공급자는 신문·지상파·위성·인터넷·통신 등 다양한 플랫폼 사 업자로 변환되고, 수용자는 유저(user)로 그리고 국가 외에 시민사회가 규제 역할을 분담할 뿐만 아니라 각 시장 주체 들이 협력하고 공진화(co-evolution)하면서 가치를 창출하 는 가치 네트워크로 변환된다. 이 트랜스포메이션의 형식은 앞서 말한 보편적 접근성(public access)이고 내용은 ‘마찰 없는’ 시장 자유다. 보편적인 것은 시장화할 수 있는 것이다. 무한 가치 증식의 욕구를 가진 자본은 시장에서 끊임 없이 독점 지배를 추구한다. 또 자본이 지배하는 자동화, 네트워크화는 수많은 인간 노동력을 시장에서 퇴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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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다.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인간은 “스스로 고용 을 창출해 내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 부담을 갑자기 안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비용 절감으로 경영난을 해소하려는 자본의 욕구가 또 다른 노동·실업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은 미국 사이버네틱스의 창 시자인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가 그의 저서 󰡔사이 버네틱스󰡕에서 내린 평가다. 󰡔하이테크 자본주의: 생산 방식, 노동, 섹슈얼리티, 전쟁과 헤게모니󰡕를 펴낸 독일 사회철학자인 볼프강 하우크(Wolfgang F. Haug)와 󰡔노 동의 종말󰡕의 저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 (Jeremy Rifkin)은 자본주의 테크놀로지 생산력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종말을 초래한다고 진단한 대표적인 이론가 들이다. 게이츠의 “마찰 없는 자본주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다만 미디어 생태계에서 인간과 그 정신적 능 력만으로 경제적 가치를 형성하는 디지털 IT ‘생산력’은 또 다른 미래 사회적 ‘생산관계’를 예고하고 있다.

공론장과 체계 이론적 사유 근대 입헌 국가 성립 과정에서 절대주의 권위에 맞선 부 르주아 계급은 경제·정치적 자유를 관철하기 위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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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의 공개성, 투명성, 합리성 등을 핵심으로 하는 공 (公)의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독일의 사회철학 자 위르겐 하버마스는(Jürgen Habermas)는 󰡔공론장의 구조변동: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에서 공 개념을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경제·물질적 과정과 유리 된 독립적 이데올로기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오늘날 그 것은 하버마스의 이론적 기획에 힘입어 공론장(公論場, Öffentlichkeit, public sphere)이라는 공적 영역이 된다. 자유롭고 동등한 법 주체들은 공론장에서 합리적인 토론 을 통해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일정한 부를 소유하고 교 육을 받은 개인들은 자유 시장에서 자유로운 여론 형성에 참여한다. 따라서 여론 시장에서는 사실상 부와 교육을 전제로 한 개인들에 한해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 여론은 전체 국민의 의견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배 질서에 종속된 공론장 기구들 속에서 형성되고 창출된 의견들의 총합이며, 지배 담론의 요소다. 경제·물질적 과정에서 유리된 독립 공간인 공론장에서 인간은 노동과 생산에 참 여하지 않고 커뮤니케이션하는 존재로 전제된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서 벗어난 공론장은 보편적 계몽과 참 여의 공간이며,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합의로 완성되는 통합의 이상적(ideal)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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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송신자-수신자의 ‘인간적 합의’ 에 기반을 둔 커뮤니케이션 개념과 달리 니클라스 루만 (Niklas Luhmann)의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송신자는 타아 (他我, alter)이며, 수신자가 자아(自我, ego)로 간주된다. 정보를 선택하여 통지하는 송신자에 비해 그것을 ‘이해’하고 이어지는 후속 커뮤니케이션(Anschlusskommunikation) 의 자극제가 되는 정보를 생성시키는 것은 오히려 수신자이 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로서 수신자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능동적 이용자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위 커뮤 니케이션이 계속 연결되는 후속 커뮤니케이션으로 자기생 산(autopoiesis)하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작동을 중단한다. 이에 루만은 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인간’이 아 니라고 분석한다. 루만은 󰡔사회학적 계몽󰡕에서 “인간은 커 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는데, 그들의 두뇌는 커뮤니케이션 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의식은 커뮤니케 이션할 수 없고, 커뮤니케이션만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 다”면서 자기생산적(autopoietisch) 커뮤니케이션 체계 이론을 전개한다. ‘자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autos’와 ‘제 작’을 뜻하는 ‘poiein’의 합성어인 자기생산(autopiesis)은 루만 체계 이론의 주요 개념이다. 게오르크 크네어와 아 만 낫세이(Georg Kneer & Armin Nassehi)는 󰡔니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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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만으로의 초대󰡕에서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법, 학문, 매스미디어 등 사회적 체계들이 “그것들을 이루는 구성 요소와 구성 부분을 스스로 생산하고 산출함으로써, 그래 서 그 체계들의 작동을 통해 그들 자신의 조직을 계속해서 만들어 냄으로써”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심리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자립적인 것으로, 창발적 (emergent) 질서인데, 이는 질적으로 새로운 질서 차원이 등장하는 것을 뜻한다. 체계 이론적 사유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송신자와 수신 자의 합의가 아닌 선택의 과정이다. 공론장을 창출하는 것은 송신자인 매스미디어 기업이 아니다. 지배 제도의 요소이자 여론 시장을 독점하고 지배 담론을 주도한 매스 미디어는 공론장 형성을 위한 콘텐츠만을 공급할 뿐이다. 오히려 공론장은 지속적으로 명멸(明滅)하는 커뮤니케이 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후속 커뮤니케이 션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론장은 곧바로 소멸한다. 미디 어 융합 환경에서 콘텐츠는 무한대로 나타나지만 콘텐츠 나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은 모두 그 자체로 공론장을 창출 하지 않는다. 미디어 콘텐츠를 선별하고 통지하며 이해하 는 과정, 즉 커뮤니케이션만이 공론장을 창출한다. 여기 수신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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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에는 처음부터 이용자만이 존재한다. 체계 이론적 사유는 오늘의 다양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현상 들을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참고문헌 Adorno, Theodor W., Horkheimer, Max(1988). Dialektik der

Aufklärung. Fischer Taschenbuch Verlag. 김유동 옮김(2001).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Benjamin, Walter(2002). Medienästhetische Schriften. Suhrkamp Verlag. 최성만 옮김(2007).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도서출판 길. Gates, Bill(1996). The Road Ahead. Penguin Books. 이규행 옮김(1995). 󰡔미래로 가는 길󰡕. 삼성. Habermas, Jürgen(1990). Strukturwadel der Öffentlich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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