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한 사람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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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moraliste 부도덕한 사람


편집자 일러두기 ∙ 이 책은 1975년 출판된 플레야드판 ≪앙드레 지드 전집≫ 3권 을 원전으로 삼았습니다. ∙ 이 책의 주석은 모두 옮긴이가 붙인 것입니다. ∙ 외래어 표기는 현행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다.


차례

서문 ······················ 5 1부 ······················ 13 2부 ······················ 83 3부 ······················ 159

해설 ······················193 지은이에 대해··················200 옮긴이에 대해··················203


I

내 친구들아. 너희들의 변함없는 우정을 알고 있었다. 내 부 름에 달려와 주었군. 너희들이 불렀다면 나도 마찬가지였겠 지. 서로 보지 못한 지 3년. 서로 만나지 못했던 세월을 견디 었던 너희들의 우정이 이제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도 견 딜 수 있기를 바란다. 갑자기 너희들을 부르고 먼 내 거처까 지 여행을 하게 한 것은 단지 너희들을 보기 위해서, 너희들 로 하여금 내 이야기를 듣게 하기 위해서다. 너희들에게 말 하는 것 외에 다른 도움은 필요 없다.−나는 내 삶에서 이제 는 더 지나갈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 무기력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태다. 나는… 털어놓고 싶다. 자 신을 어떻게 자유롭게 만들 것인가를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려운 것은 어떻게 자유로운 상태로 자신을 유지 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내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기 힘 들겠지만, 내 지난 과거를 이야기하겠다. 겸손도 자만도 없 이 담담하게. 나 자신에게 하는 것보다 더 담담하게. 내 이 야기를 들어주기 바란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내 결혼식이 있었던 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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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작은 시골 교회로 기억하고 있다. 하객들이 많지는 않 았지만, 평범했을 예식이 친구들의 배려로 감동적인 예식이 되었지. 내 느낌으로는 모두 감동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것 때문에 나 자신도 감동했었다. 예식이 끝나고 내 아내가 된 사람 집에 모여 웃지도 떠들지도 않고 조용히 조촐한 식사를 나누고, 미리 예약한 자동차로 우리 부부는 떠났다. 우리 머 릿속에 결혼과 출발역을 이어주는 그 풍습에 따라 말이지. 나는 내 아내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아내 역 시도 나를 더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크게 괘념치 않았다. 곧 임종을 앞두고 혼자 남게 될 나를 걱정하시는 아 버지를 안심시켜 드리는 데 급급한 나머지 아내에 대한 애 정 없이 결혼한 것이지. 아버지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 던 나는, 임종의 고통을 신경 쓰느라 그 힘든 마지막 순간을 더 편안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까 인생 이 어떤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없이 내 인생을 얽어맨 거 였지. 죽어가는 분의 머리맡에서 약혼을 했을 때 즐거운 마 음은 아니었지만 엄숙한 기쁨이 없지는 않았다. 그만큼 내 약혼으로 아버지가 느끼셨던 평온은 큰 것이었다. 약혼자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적도 없었 기 때문에 내 눈에는 그것으로 우리의 행복은 보장된 것으 로 보였다. 내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 아직 알지 못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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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내 모든 것을 그녀에게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고아였고, 남자 형제 둘과 살고 있었는데, 이름은 마르슬린이고, 갓 스무 살이었으니까 나보다 네 살 아래였다. 말했지만 나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 다. 사랑이 애정이나 일종의 연민,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뜻한다면 나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지만. 그녀는 가 톨릭교도였고, 나는 신교도였다… 나 스스로는 거의 의식 이 없었지! 신부가 나를 받아들였고 나 역시 신부를 받아들 였고, 별 문제 없이 결혼이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말하자면 ‘무신론자’였다고 할 수 있겠지. −아 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조심스러움 때문에 한 번도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신 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믿 고 있다. 어머니의 엄격한 청교도 교육은 어머니에 대한 좋 은 추억과 함께 내 마음속에서 서서히 지워졌다. 너희도 알 다시피 나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으니까. 어린 시절 처음 으로 받은 정신 교육이 얼마나 우리는 지배하는지, 우리 머 릿속에 어떤 깊은 자국을 남기는지 상상도 못했었다. 어머 니가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라는 원칙을 가르치면서 내게 물 려주신 자제심으로 나는 학업에 전념했다. 아버지는 열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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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에 어머니를 잃은 나를 정성스럽게 보살피시면서 교육하 는 데 열정을 쏟으셨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이미 배웠던 나는 아버지와 헤브라이어,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페르시아 어와 아랍어를 배웠다. 스무 살 때는 내가 얼마나 열심이었 는지 아버지는 당신의 연구 작업에 나를 넣어주시기까지 했 다. 아버지는 나를 동료로 취급하면서 즐거워하셨고 그 증 거를 내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 이름으로 출판된 ≪프리지아 지방 제식들에 관한 소고≫는 아버지가 약간 감수하는 정도였고 순전히 내 작품이었지. 그처럼 많은 찬 사를 들었던 아버지의 저서가 없었는데, 매우 기뻐하셨다. 나로서는 그런 엉터리가 성공적이라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 웠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나는 학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 고 대단한 학자들이 나를 동료로 취급하게 됐다. 사람들이 내게 베풀었던 모든 영예를 생각하면 지금 미소를 짓게 된 다… 책이나 유적들만 바라보며,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것 도 모른 채 그렇게 스물다섯 살이 된 나는 일에 이상할 정도 로 열정을 쏟았다. 친구들을 사랑했지만(그중 몇이 너희들 이지), 친구들보다 우정 자체를 사랑했다고 해야 할 것 같 다. 친구들에 대해서 아주 성실했지만, 그것은 품위를 갖추 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으니까. 내 안에서 고결한 감정들을 키우고 싶었던 거지. 한마디로 나는 나 자신도, 친구들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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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있었다. 한번도 내가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으며, 달 리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으니까.

아버지나 나나 소박한 것으로 충분했다. 우리 둘은 아주 적은 돈을 쓰면서 살았기 때문에,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도 록 우리가 부자라는 것도 몰랐다.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우 리가 먹고살 것을 가지고 있는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 다. 아버지와 함께 살며 절약하는 습관이 들었던 나로서는 내가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거 의 난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그 방면에 얼마나 무심 했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도 아니고, 결혼 계약서를 작 성하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좀 더 확실하게 알 게 되었다. 마르슬린이 지참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지. 내가 모르고 있었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사실은 내 건강 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건강으로 곤경에 처한 적이 없었 던 내가 어떻게 알았겠나? 가끔 감기를 앓기는 했어도 소홀 히 지나쳤으니, 너무 조용한 일상생활이 나를 약하게 만들 기도 하고 보호하기도 했던 것이지. 마르슬린은 건강해 보 였고, 실제로 나보다 훨씬 건강했다는 것을 머지않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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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결혼식 당일 밤 우리는 방 두 개가 준비되어 있는 파리 시 내 아파트에서 지냈다. 우리는 꼭 필요한 물건을 사는 시간 동안만 파리에서 머물렀다가 마르세유로 출발했고, 거기서 곧 튀니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 다급한 일들, 멍해질 정도로 너무도 빨리 진행된 사건들, 초상을 치르면서 느낀 흥분과 곧 이은 결혼에 따른 피할 수 없었던 흥분, 이 모든 것들에 나는 지쳐 있었다. 배 위에서 피곤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벌어지는 일마다 피곤을 잊게 하면서 동시에 피곤을 키우고 있었던 셈이지. 배 위에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여유로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되었는데, 처음 있었던 일 같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일에서 멀어져 있는 것도 처음이었 다. 그때까지 나는 짧은 휴가밖에 만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와 한 달 이상 스페인을 여행하기도 하 고, 한 번은 6주 동안 독일 여행을 하기도 했다. 다른 여행도 있었지만, 모두가 답사 여행이었다. 아버지가 아주 뚜렷한 연구 목적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일을 그만두고 책 읽기에 몰두했었다. 우리 부 부가 마르세유를 떠나자마자 그라나다와 세비야에 대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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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맑은 하늘, 선명한 그늘, 축제, 웃음 소리, 노랫소리, 그것을 우리가 보게 되리라는 기대감이 생 겼다. 나는 갑판으로 올라가 마르세유 항이 멀어져가는 것 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내가 마르슬린을 혼자 버려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나는 뱃머리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처음 진정으 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보았으니 알고 있겠지만 마르슬린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진작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자책감이 들었다. 그녀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 보지 못했던 것이지. 우리 두 가족은 항상 가깝게 지냈고, 나는 그녀가 커가는 것을 보면서 그 우아한 모습에 익숙해 져 있었으니… 그녀가 얼마나 돋보이던지 놀라웠다. 수수한 검은 밀짚모자 위로 넓은 베일을 흩날리고 있는 아내는 금발이었지만 연약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같은 스타 일의 스커트와 블라우스는 우리가 함께 고른 체크무늬 천으 로 만든 것이었는데, 아버지의 초상으로 어두운 차림을 하 는 것을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낀 아내가 내 쪽을 바라보 았다… 그때까지 내가 그녀에게 보여준 것은 의무감에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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