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문 역사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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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한국 신문 역사 정진석

대한민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한국 신문 역사

지은이 정진석 펴낸이 박영률 초판 1쇄 펴낸날 2013년 2월 25일 커뮤니케이션북스(주) 출판등록 2007년 8월 17일 제313-2007-000166호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청원빌딩 3층 전화 (02) 7474 001, 팩스 (02) 736 5047 commbooks@commbooks.com www.commbooks.com CommunicationBooks, Inc. 3F Cheongwon Bldg., 571-17 Yeonnam-dong Mapo-gu, Seoul 121-869, Korea phone 82 2 7474 001, fax 82 2 736 5047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북스(주)가 저작권자와 계약해 발행했습니다. 본사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정진석, 2013 ISBN 978-89-6680-184-8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신문의 역사와 한국 현대사: 개화 계몽 항일 민주화를 선도했던 언론

주제 선정의 한계 은둔의 작은 왕국 조선이 역사상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 자 한반도는 일본과 제국주의 서구 열강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웠던 시기에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 報)≫였다. 신문은 선진국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

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침략에 대응한 다는 이중적 사명을 띠고 출발했다. 서구 여러 나라의 신문은 정보 전달과 이윤 추구를 목 적으로 출현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전했으 나 우리는 개화와 국민계몽이라는 뚜렷한 목적과 이상을 지니고 출발했다. ≪독립신문≫ 이후에 나타난 여러 개의 민간신문도 국민계몽과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는 전통을 이어나갔다. 일제강점기 1910년대 무단정치 기간에 총독부는 민족 지를 모두 없애고 한국인에게는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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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그러다 1920년에 3개 민간지의 발행을 허가하면서 신문은 조선인의 의사를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대변하고 항일과 동시에 문화 창달을 견인할 수 있었다. 신문의 저 항적 전통은 광복 후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 되었다. 언론은 현대사의 격동기를 헤쳐 오는 동안 긍정적인 역 할만 수행하지는 못했다. 민족 전체가 시련을 겪었던 식 민지 치하에서는 항일과 동시에 친일의 행적도 남겼다. 광복 후 좌·우익의 대립과 이데올로기의 혼란, 동족상잔 의 비극적 6·25전쟁, 자유당의 독재와 4·19 학생혁명, 5·16 후의 군사통치와 같은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언론은 때로는 권력에 영합하거나 상업주의에 물들기도 하였다. 오늘의 한국 언론은 표현과 경영의 자유가 선진국 수준 에 도달했으나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 갈라진 이데올로기 갈등의 와중에 편향된 보도와 논평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한국의 언론은 역사의 기록자이면서 언론 자체가 역사 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개화사, 독립운동사, 문화사, 문학사를 포함하여 역사 전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언론 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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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원래 신문에 국한된 역사 보다는 언론의 역사로 범위를 더 넓혀서 기술할 생각이었 다. 그러나 지면이 제한되어 폭넓은 주제를 다룰 수 없다 는 출판사의 의견에 따라 ‘신문’으로 범위를 좁혔다. 따라 서 잡지, 출판, 광고, 방송 등 여러 분야를 포괄적으로 고 찰하여 서술할 수 없었고, 신문에 국한하여 주제를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현대사의 핵심 주제인 언론의 역사를 제한된 분량에 담 는다는 시도 자체에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출판 사측과 여러 차례 의견을 나눈 결과로 부족한 대로 10개의 주제를 선정했다. 3장에 포함된 ≪대한매일신보≫는 독립 된 항목으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신문인데도 다른 여러 신 문과 함께 다루게 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도 언론사에 차지하는 비중으로 본다면 당연히 독립 항목 이 되어야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민간신문 항목에 통합되 고 말았다. 따라서 이 서문은 본문에 다루지 못한 주제와 설명이 부족한 내용을 보완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한성순보≫ 발행 전의 전근대적 언론 현상으로는 조 보(朝報; 또는 ‘기별’)로 부르던 필사신문, 대간(臺諫)제 도, 국가 통신제도인 봉수(烽燧) 등이 주요 연구의 대상이 다. 우리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한 민족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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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국제적으로 공인받고 있지만 다루지 못했다. 근대 이후의 언론사 가운데도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1920 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 일제강점기에 전개했 던 문맹 퇴치와 문자보급 운동은 언론이 벌인 대표적인 실 천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주제에 밀려 독립 항목으 로 다룰 수 없었다. 한말에 제정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 1950년 대 말까지 언론 탄압의 도구로 악용되었던 ‘신문지법’ (1907.7.24)과 ‘출판법’(1909.2.23)도 대단히 중요한 항목 이다. 신문지법은 엄격한 금지사항을 나열한 외에도 저촉 되는 경우에는 폐간과 정간 등의 행정처분과 병행하여 언 론인에 대한 사법처분을 가할 수 있는 악법이었다. 이 법 은 신문 발행의 허가제와 보증금의 납부를 의무화하여 발 행 허가 자체를 원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 시 다루어야 마땅하지만 10개 주제에 포함되지 못했다. 역사는 지나간 시대를 순서에 따라 통시적(通時的)으 로 서술하면서도 당시의 시대 상황을 횡으로 짚어보는 공 시적(共時的)인 고찰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사건 은 단절된 상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과 횡으로 연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된 형태의 제한된 분량 에 맞도록 주제를 다루다 보니 종과 횡을 아울러 살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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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 것 같아 아쉽다. 역사 연구에는 ‘시대 구분’이 있다. 구분의 절대적인 기 준은 없다. 왕조가 바뀌는 시기가 기준이 되기도 하고 역 사의 흐름을 바꾸는 큰 사건을 기점으로 전과 후를 가르는 방법도 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구분이 달라지고, 해석도 차이가 난다. 언론사의 시대 구분도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필자는 한성순보 이전을 ‘전근대적 언론’, 그 이 후를 ‘근대적 언론’으로 구분하고 근대언론은 10개의 시기 로 구분했다(정진석, ‘저자서문, 한국 언론사의 범위와 시 대구분’, 󰡔한국언론사󰡕, 1990, 나남출판).

근대언론의 시대 구분 제1기 근대 신문의 출현: 1883∼1896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근대 신문은 ≪한성순보≫ 이다. ≪한성순보≫는 동일한 제호 아래 정기성을 띠고 (음력 1일, 11일, 21일) 발행된 신문이었다. 순보는 1년 남 짓 발행된 후에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다가 곧 ≪한성주 보≫로 제호를 바꾸어 1주일 단위로, 더 발전된 형태의 신 문으로 속간되었다. 그러나 ≪한성주보≫도 1888년 7월 경에는 폐간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약 8년 동안은 신문 없 는 시기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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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공식 기관지 ≪관보≫는 1894년 8월 초에 창간 되었다. 관보의 역사는 조선왕조 또는 그 이전부터 발간 된 것으로 보이는 ‘조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관보는 신 문발달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초기의 신문은 관보 와 신문의 구분이 애매한 미분화 상태로 발간되다가 어느 단계에서 분화된다. 관보는 신문보다 먼저 일간으로 발간 된 정기간행물이었고, 관보에 실린 기사는 대한제국 시대 민간신문의 주요 뉴스원이 되었다. 궁중과 정부 각 기관 의 출입취재가 자유롭지 못했던 초창기 민간신문들에 관 보의 기사는 중요한 뉴스원이 되었다. 한말의 신문은 정부 관련 기사를 ‘관보’로 불렀다. ≪한 성순보≫의 ‘국내관보’란은 정부 관련 기사였다. ≪독립 신문≫은 기사를 ‘관보’와 ‘잡보’로 분류하여 정부가 공포 하는 법령과 인사발령을 ‘관보’란에 게재했다. ≪황성신 문≫, ≪뎨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한말의 다른 신문의 ‘관보’란도 같은 성격이었다. ‘관보’는 법령 공포의 수단이면서 정부가 공무원과 일반 국민에게 법령과 정부시책을 널리 알리는 공식 홍보매체 다. 따라서 정부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민간경영의 일반 신문과는 대조적인 기능을 지니며, 민간신문과는 다른 의 미에서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역할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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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민간신문의 성장: 1896∼1904

서재필은 민간신문의 시대를 열었다. ≪독립신문≫ 이후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는 자생적으로 민간신문이 나타나면서 언론계가 형성되었다. 민간신문은 개화운동 의 추진체 역할을 담당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 이 더욱 노골화되었을 때에는 신문이 여론형성의 중심기 관으로 성장했다. ≪독립신문≫ 창간 2년 후인 1898년은 언론사에 특기 할 해가 되었다. 이 해에는 언론사를 장식하는 중요한 일 간지 3개가 창간되었다. 배재학당 학생회 협성회(協成會) 가 창간한 주간신문 ≪협셩회회보≫(1898.1.1)가 제호를 ≪일신문≫(1898.4.9)으로 바꾸어 일간으로 발행되어 처음으로 일간지가 등장했고, 이종일과 이승만의 ≪뎨국 신문≫(8.10)에 이어 개신유학자 중심의 ≪황성신문≫ (9.5), 이듬해 1월에는 격일간 ≪시사총보(時事叢報)≫ 가 창간되었다. 한해 먼저 2종의 기독교신문도 발행되고 있었다.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창간 한 감리교의 ≪죠션크리스도인회보(The Korean Christian Advocate)≫(1887.2.1), 장로교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의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 (4.1)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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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순서로 보면 ≪한성신보≫(1895.2), ≪독립신문≫ (1896.4),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2), ≪그리스도 신문≫(1897.4), ≪일신문≫(1898.4), ≪뎨국신문≫ (1898.8), ≪황성신문≫(1898.9)으로 7개가 되어 당시로 서는 급격한 증가였다. 발행의 주체도 다양했다. ≪일 신문≫, ≪황성신문≫, ≪뎨국신문≫은 한국인 경영이 었고, ≪한성신보≫는 일인 경영, ≪죠션그리스도인회보≫ 와 ≪그리스도신문≫은 미국인이었으며, ≪독립신문≫ 은 한국인과 미국인의 공동경영 형태였다. 이해 10월에는 이들 신문사가 ‘신문사친목회’를 결성했다. 이로써 ‘언론 계’가 처음으로 형성되고 직업적인 언론인이 나타났다.

제3기 민족지와 친일지의 대립: 1904∼1910

이 시기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대 세력으로 부상 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지배권을 승인받으면서 한반도를 실질적으로 장 악한 기간이었다. 국내의 정세는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여러 갈래로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은 1904년의 러일전쟁 직후부터 한국 언론을 탄압 하면서 동시에 언론에 의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언론계는 ‘민족지와 친일지’로 논조가 양분되어 나라의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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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기울었던 때에 국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키 는 민족진영 신문과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거나 합방을 주장하는 친일지가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해외로 이주한 교포들은 미국과 러시아에서 신문을 발 간하여 한국 신문의 영토는 멀리 해외까지 확장되었다. 언론 상황은 이처럼 다양화, 다원화되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진출하여 여러 종류의 일본어와 한국어 신문을 발 행하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는 논조를 폈다. ≪만세보≫, ≪대한민보≫ 등 새로운 신문도 나타났다. 한국인 신문 가운데에도 ≪대한신문≫, ≪국민일보≫와 같은 신문은 친일적인 논조로 민족언론과 대립되는 입장 에서 발행되었다. 이 기간에 발행된 신문 가운데는 영국인 배설(裴說: Ernest Thomas Bethell)의 ≪대한매일신보; 영문판 The Korea Daily News≫가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이 신문은 발행인이 영국인이었으므로 일본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 기 때문에 총무 양기탁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와 같은 논객들이 강력한 항일논조를 폈다. 이 시기의 신문은 발행주체, 발행장소, 언어에 따라 다 음 <표 1>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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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1896∼1910 시기의 신문 현황 발행주체

장소

언어

한국 한국인

미국

황성신문, 뎨국신문 한국어

서양인

한국

공립신보, 신한민보 해조신문, 대동공보

러시아

일본인

대표적 신문

한국어

한성신보, 대한일보

일어

경성일보, 조선신문

영어

Seoul Press

한국어

대한매일신보

영어

Kore Daily News

한국

이완용 내각이 ‘광무신문지법’과 ‘출판법’을 공포하여, 언론에 법적인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자 언론은 새로운 법 적인 규제에 직면했다. 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이 실시되었 고, 정간처분과 압수·발매 금지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일반 출판물에 적용했던 ‘출판법’은 1차로 원고를 검열 받 은 후에 출판물을 제작하고, 2차로 ‘납본검열’을 받도록 하 여 이중의 통제장치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신 문지규칙’(통감부령 제12호; 1908.4.30 공포)을, 출판물에 대해서는 ‘출판규칙’(통감부령 제20호; 1910.5.20 공포)을 적용하여 한국 안에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차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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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로 언론을 탄압했다. 광무신문지법은 일제강점기에 언론 탄압의 도구로 활용되다가 광복 후 1952년에야 국회 에서 정식으로 폐기되었다. 여러 종류의 신문이 발행되면서 ≪독립신문≫ 이후에 언론계의 거목들이 나타난 것은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결과 였다. ≪황성신문≫의 남궁억, 유근, 장지연, 박은식, 신채 호, ≪뎨국신문≫의 이종일, 이승만, ≪대한매일신보≫ 의 양기탁과 같은 당대의 논객들이 우국적인 논설로 항일 여론을 선도했다. 외국의 문물을 직접 접했거나 국내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사람은 물론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한 유 생들도 신문 제작 일선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국민의 개 화와 국가의 발전을 열망하는 행동파 지식인들이었는데, 점차로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 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언론과 관계를 가지거나 언론 발전에 기여한 서양인들 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발 행되는 신문에 종사한 언론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계 통의 출판물이나 신문을 제작한 사람들이다. 미국인 헐버트 (Homer B. Hulbert), 영국인 하지(John Weekley Hodge), 베셀(裴說, Ernest Thomas Bethell), 만함(萬咸, Alfred W. Marnham)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신문을 발간했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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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아펜젤러(亞扁薛羅, H. G. Appenzeller), 언더우드 (元杜尤, H. G. Underwood), 프랑스 천주교 신부 드망주 (安世華, Florian Demange)도 우리나라에 와서 직접 언 론사업을 벌인 사람들이다. 언론은 애국계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구국과 국민계몽 의 소임을 다하려 노력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처 음으로 발기되었는데, 언론이 중심 역할을 맡으면서 구국 의 열정에 불탄 국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급속히 전국 으로 확산되었다. 초기에는 전국을 통괄하는 중앙의 구심 체가 없이 산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발기되어 이를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언론이 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다. ≪황성신문≫은 국채보상의무사와 국채보상연합회의 본 부 역할을 맡았으며,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의연 금총합소의 본부가 되어 이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성공 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했으나 민족운동사에 미친 영향과 의미는 컸다. 자발적인 민중운 동이 이처럼 단시일에 전국적으로 확산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흩어져 있던 국민의 힘을 이 운동은 결집시켰으 며 숨죽이고 있던 국민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 민족진영 의 역량을 축적시켰기 때문에 이 운동은 이후의 항일운동 으로 이어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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