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작품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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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도(巫女圖)



ㄱ 무녀도는 슬픈 그림이었다.

우리 집에 있던 여러 가지 값 먹은 패물과 진기한 골동 품들 중에도 내가 가장 중히 여기고, 혹한 것은 저 무녀도 였었다. 그 참 값을 처음으로 발견한 이도 내요, 그 슬픔을 진정 으로 깊이 느낀 것도 나뿐이라 했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가지 서화 패물들을 가산과 함께 모두 유실하고도 오직 저 무녀도만은 내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저것만은 언제까지 라도 나의 가난한 책장 곁에 걸려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집은 옛날의 소위 명문이라는 것이었다. 돈과 권세 도 있었고, 글하는 선비란 것도 있고 또 그밖에 진기한 패물 과 골동품으로도 매우 유명했었다. 이 골동품을 즐기는 취 미는 아비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손자로 대대 가산과 함께 내려오는 전통적 가풍이었다. 우리 집 살림을 전혀 파방처버린1) 것은 아버지 때였으니 1) 파방처버린: ‘파방(罷榜)’은 ‘옛날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하던 일을 ’ 뜻하며, 여기에서 전이되어 ‘파방치다는 ’ ‘살던 살림을 그만두다라는 ’ 뜻 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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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십여 년 전이다. 그때까지 아버지께서는 민족주의 요 사회주의요 하시고 만주에서 상해로 침이 마르게 돌아다 니시는 통에 가산이 모두 은행으로 넘어가버리고 이어 아버 지의 옥사와 함께 완전히 탁방나버린2) 것이었다. 한 스무나문 해 전만 해도 살림사리가 옛날과 다름없이 할아버지께서는 사랑에서 나그네를 치르셨고 그러자니 서 화 운객들이 끊일 새 없이 드나들었었고 따라서 탐스러운 물건에는 값을 아끼지도 않았었다 한다. 그 지음이라 한다. 왼종일 흙바람이 불어 후원에 살구꽃이 피고 하는 어느 봄날 어스름때였다. 이상한 나그네가 대문 앞에 닿었다. 한 오십이나 가까이 된 듯한, 동저고리바람에 갓을 쓰고 그 우에 명주수건으로 잘라 맨, 체수가 조고마한 사내가 나 귀ㅅ고삐를 잡고 서고, 나귀 우에는 열대여섯쯤 먹어 뵈는 얼굴이 몹시 파리한 처녀가 타고 있었다. 얼핏 보아, 늙은 하인과 그 상전의 따님인 상 싶었다. 그러나 이튿날 그 늙은 사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여아는 소인의 여식이옵는데 화재(畵才)가 볼만하와 2) 탁방나버린: ‘탁방(坼榜)’은 ‘옛날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성명을 게시하던 일을 ’ 뜻하며, 여기에서 전이되어 ‘탁방나다는 ’ ‘어떤 일이 결말이 나다라는 ’ 뜻 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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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의 문전을 찾었삽내다.” 소녀는 힌 옷을 입었었고, 옷빛보다 더 새하얀 얼골엔 깊 은 슬픔이 서리어 있었다. 혹 주인이 소녀에게 묻는 말 같이 건너보아도 소녀의 자 그만 입은 굳게 닫히어만 있었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리고 몇일 뒤 주인은 소녀에게 힌 비단 한 폭을 주었다. 그것이 곧 지금 저 벽에 걸린 무녀도가 된 것이다. 뒤에 물러 누은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넓다랗게 흐 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 우로, 검은 강물 우로 모두 떨어질 듯한 파-란별들 어느 것이나 이슥한 밤중이다. 강 ㅅ가 모래ㅅ벌엔 차일을 치고, 거적을 두르고, 마을 여인들 이 자욱이 앉어, 무당의 시나위ㅅ 가락에 취하여 있다. 그들 의 얼골에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 한 빛이 보인다. 무당은 시방 한창 청승에 자즈러져 뼈도 살 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히 쾌자3)ㅅ자락을 날리며 춤 을 춘다…. 거기엔 발(자연)의 리듬과 사람의 호흡이 무당의 춤을 통 하야 혼연히 융화되어 있었다. 그것은 소녀의 얼굴에서 보 는 듯한 어떤 슬픈 숨ㅅ결이었다.

3) 쾌자: 소매가 없고 등솔기가 허리까지 트인 옛날 전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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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림에 깊은 이해가 없는 주인 할아버지이라도 지금까지 보아온 산수화나 매란죽에서와 다른 필치를 느낄 수는 있었다. 그것은 이해와 비판 저편에 흐르는 향수의 공 명이었다. “아기의 이름은?” “…” 소녀는 굵은 눈으로 한번 그를 바라보았을 뿐, 대답이 없 었다. 아비가 대신 딸의 이름을 대어, “낭이(琅伊).” 하고, 말을 끊어서, 다시 이었다. “여식은 귀가 먹었습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주인은 두 사람을 일헤ㅅ동안이나 붙잡어 머물게 하고, 그들의 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떠나는 날에는 값진 비단과 좋은 음식과, 충분한 노자를 주어 보내었다 한다. 그러나 나귀 우에 앉은 가련한 소녀의 얼굴엔 올 때나 조 곰도 다름없는 슬픔이 있을 뿐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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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할아버지가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그 우에 할아버지의 이 해와 추측을 합처 나에게 들린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경주 읍에서 성 밖으로 두어 마정 나가면 가장 오래된 조 고만 평민촌(집성촌)이 있다. 이 평민촌 한 구석에 모화(毛火)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 다. 모화서 온 사람이라 하야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머리 찌프러저 가는 묵은 기와집이었다. 집웅 우에는 기와 버섯이 퍼렇게 뻗어 올라 독한 흙냄새를 풍기 고, 너른 뜰에는, 도트라지, 오요개지 같은 이름도 모를 잡초 들이 거다게 성하야 군데군데 사람의 키가 묻힐 지경이었고 땅(마당)은 봄에 물이 녹을 때부터 시작하야 도루 얼어붙을 때까지 사뭇 축진해서4), 배암 같은 지렝이들이 한 자씩이나 폇다 움추리고, 잡풀 뿌리 지음에는 개구리 머그리들이 쌍 쌍이 앉어, 얼을 빼고, 집 주위는 높지도 않은 앙상한 돌ㅅ 담이 문허지다 남은 옛성처럼 꼬불꼬불 외어 쌓다, 한군데 가 끊어졌을 뿐 울타리이랄 것도 없고, 우울한 처마 아래 단

4) 축진해서: 물기가 많이 있어 눅눅하고 끈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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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방문은 언제나 무겁게 닫혀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이 집에 오기를 꺼리었다. 어떤 사 람은 가까이 지나가기도 싫어했다. 그들은 집만 아니라, 이 집의 사람들까지도 가까이 하지 않었다. 그들은 스스로 백정이나 무당의 족속과는 잘 분별 하야, 그 웃 지위에 처할 것을 잊지 않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사람이 아프거나, 죽거 나 하면 반드시 모화를 찾었다. 한번 찾은 사람은 자칫하 면 또 찾고 했다. 그만치 그들은 모화를 보는 것이 위안이 되었었다. 모화는 온 고을에서도 제일 이름난 무당이었다. 산ㅅ굿 이고, 용신ㅅ굿이고, 언제던 큰 굿이면 반드시 모화를 불러 갔다. 모화가 불린 굿을 모화굿이라 했다. 모화굿이라면 여인 들은 이십 리 삼십 리 산 고개를 넘기쯤은 예사고, 오십 리 육십 리 밖에서도 밥을 싸서 모여들었다. 모화굿을 보고는 울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날이 다 새어, 굿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인들은 말 했다. “모화 시나위ㅅ가락이사 돈을 암만 줘도 아까운 줄 모를 러라.”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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