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수 작품집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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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수 작품집


쑈리·킴


바루 언덕 위, 하필 길목에 벼락 맞은 고목나무(가시는 썩어 없어지고 꺼멓게 끄슬린 밑둥만 엉성히 버틴 나무)가 서 있 어 대낮에도 이 앞을 지나기가 께름하다. 하지만 이 나무 기 둥에다 총 쏘기나 칼 던지기를 하기는 십상이다. 양키들은 그런 작란을 곧잘 한다. 쑈리는 매일 양키부대에 가는 길에 언덕 위에 오면 의례 이 나무에다 돌맹이를 던져 그날 하루 ‘재수 보기를 ’ 해봐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세 번 던져 한 번도 정통으로 맞지 않았다. 아마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인가 보다. 재수 더럽다고 침을 퉤− 뱉고, 쑈리는 언덕 아래로 내려 갔다. 언덕 아래 넓은 골작에 양키부대 캼프들이 뜨믄뜨믄 늘어서 있다. 저 맞인쪽 행길가에 외따로 있는 캼프는 엠피 (M·P)가 있는 것이고, 그 옆으로 몇 있는 조그만 캼프는 중 대장이랑 루테나1)랑 싸징2)이랑 높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캪텐 하우스뽀이인 딱부리 놈이 바루 게 있다. 이쪽 바루 언 덕 아래에 여러 개 늘어슨 캼프엔 맨 쫄뜨기 양키들뿐이다. 쑈리가 늘 찾아가는 곳은 이 쫄뜨기 양키들이 있는 곳이다. 거기엔 밥띠기(쿠크) 빨래꾼(세탁부) 이발쟁이 찔뚝이랑 몇

1) 루테나 : 루테넌트(lieutenant). 중위와 소위의 통칭. 2) 싸징: 서전트(sergeant). 하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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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한국 사람도 있지만, 쑈리는 그들보다 양키들하고 더 친 했다. 거기 쫄뜨기 양키들은 몇 사람만 빼놓곤 모두 몇 번씩 따랑 누나하고 붙어먹은 일이 있어, 아무 때고 쑈리가 가기 만 하면 ‘웰컴 쑈리 킴이다 ’ . ‘김이라는 ’ 멀쩡한 성을 양키들은 혀가 잘 안 돌아가 ‘킴이라고 ’ 부르는 것이다. 양키들이란 참 재미있는 자들이다. 근처에 얼신만 해도 뭐 쑈톨3)이나 해 가는 줄 알고 ‘까뗌뽀이 까라 —’고 내쫓는 뚱뚱보 싸징이나, 검문소의 엠피 같은 깍쟁이 놈도 있긴 하 지만 그래도 양키라면 한국 사람들보다 모두 좋았다. 그렇다 고 뭐 먹다 남은 닭다리나 쬬코렡 부스러기 따위를 얻어먹는 맛에서가 아니다. 양키들이 어른답잖게 말발굽쇠 던지기랑 화약 터치기랑 어떤 놀이던(돈내기 포카 놀음만 말고) 버젓 이 한목 부쳐주는 게 좋단 말이다. 어떤 땐 슬며시 으젓한 데 에 불러다가 사추리를 까 내놓고 그것을 좀 주물러 달라거나 흔들어달라고 징글맞게 놀 때도 있지만, 그 작란만 말곤 양 키들이 노는 작란은 뭣이고 다 신나는 것뿐이다. 생각해 보 면 코흘리게들이나 할 작란이지만 말발굽쇠 던지기나 화약 터치기 따위를 할 땐 게서 더 재미있는 게 없었다. 서울서 고 작 파카 만년필이나 론손 라이타를 날쳐다가 왕초 몰래 똘만

3) 쑈톨: 도둑질(st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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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끼리 팔아먹던 재미나, 피엑쓰 앞에서 깔치들에게 매달 려 한 푼 달라고 생떼를 쓰다가 옷자락에 타마구4)를 슬적 발 라주던 그때의 재미 따위는 이젠 생각해 보면 참 시시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보니 사람 사는 집이라곤 통 없는 일선 지구 산골 이지만, 진작 서울서 이곳에 오길 참 잘한 것이다. 예서 양키 들에게 양갈보나 부쳐주고 그럭저럭 얼려 지내다가 딱부리 처럼 하우스뽀이라도 되기만 하면 그땐 팔자 고치는 거다. 뭣보다도 이곳엔 뭐 날쳐오라고 야단치는 왕초도 없거니와, 어디서 뭘 날치거나 쑈톨질을 안해도 뭣이던 쓸 만한 건 양 키부대에 쌓여 있어 좋다. 양키들이란 먹을 것 입을 것 워낙 흔하니까 그들이 먹다 쓰다 남은 것만 얻어도 쑈리는 가치 있는 따링 누나하고 둘 이서 싫것 먹고 쓰고도 남을 것이다. 허지만 그 따위 찌꺼기 나 얻어먹는 데데한 짓은 아예 안한다. 그저 하루에 한두 놈 씩 뒷구녁으로 슬적 꾀내어 따링 누나에게 부쳐주기만 하면 된다. 이따금 재수 좋게 전방에서 처음 온 양키가 걸려들기 만 하면 그건 수체 노다지보나 다름없다. 처음 색씨 맛을 들 여놓면 한 보름 동안은 ‘쑈리킴, 캄앙−’ 하며 몸이 달아 줄줄

4) 타마구: 아스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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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런 놈을 슬금슬금 잘 궈삶기만 해봐 라, 그냥 바카사탕이랑 레이숑5)이랑 마구 생긴단 말이다. 여 기 수송중대 쫄뜨기 양키들도 따링 누나가 서울서 처음 왔을 때엔 한꺼번에 여나문씩 몰려들어 저희끼리 차례를 다투곤 했었다. 그 통에 따링 누나가 여러 날 동안 되게 진땀을 빼긴 했지만 그땐 신바람 나게 수지가 맞았었다. 씨레이숑6)이 통 째로 생긴 것도 그때였다. 요새는 모두 따링 누나에게 맛을 볼 만큼 다 봐놨고 또 웬 만치 약아질 때도 돼놔서 꽤 인색해졌지만 그래도 하루에 어 수룩한 놈 하나씩만 잘 주물르면 딸라 다섯 장은 고시란히 떨어지는 것이다. 오늘은 단골 양키라도 꾀내야지− 생각하 는 동안 쑈리는 부대 앞에 이르렀다. 캼프마다 조용하다. 마당에 차가 없는 걸 보니 또 물건을 실고 전방에 가서, 저녁때가 다 됐는데도 아직들 안 돌아온 모양이다. 도람통을 세워만든 정문 앞에보초병 혼자 하품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하모니카 잘 부는 뾰죽코가 보초 다. 뾰죽코는혼자 심심했던판에너 잘왔다는듯 “쑈리킴 —” 하고 어깨를 쓸어주며 청하지도 않은 담배까지 준다. 검둥이 5) 레이숑: 레이션(ration). 야전용 휴대 식량. 6) 씨레이숑: Cᐨ레이션(C-ration).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전 투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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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잘 피우는 꺼먼 잎담배다. 이게 다 따링 누나에게 꿍꿍 이셈이 있어 제 딴엔 한턱 쏘는 걸 게다. “쌩큐 —” 하며 받아 넣고 쑈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캼프는 일 안 나간 양키들이 있을 게다. 마침 문 앞 첫째 캼프에서 떠들썩하기에 넘석해 봤다. 따링 누나의 단골 손님인 놉보와 한국말 잘하는 떠버리, 그리고 딱부리 놈은 언제 왔는지 셋이 얼려 지아이(G·I)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판이다. “할로” 하며 들어서니까 놉보랑 떠버리랑 “웰컴, 웰 컴” 하며 잡아끌어다가 대짜고짜로 술병을 앵긴다. 이렇게 되면 이건 재미없다. 요전에 멋모르고 한 목음 마셨다가 목 구녁이 칵칵 맥혀 혼이 났었는데 또 이렇게 억지로 마시라는 덴 딱 질색이다. 게다가 딱부리 놈까지 “야, 이제 오니? 까짓 거 아무 맛도 아냐, 어서 마셔봐” 하며 덩다라 한술 뜬다. 그 리고 자식은 술맛이나 아는지, 낼름낼름 받아 마시며 떠버리 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준답시고 ‘네에미×××’ ‘네애비××’ 따위 쌍말만 지꺼려댄다. 자식이 요전에 캪텐이 서울 피엑쓰 에서 사다준 거라고 입고 자랑하던 가죽쟘바를 또 입었다. 모자는 할로 모자를 빼뚜루 쓰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금시 계를 찼고, 허리엔 작란깜 권총과 진짜 단도를 양쪽에 하나 씩 멋뜨러지게 차고 나 보란 듯이 꺼떡대며 “오라잖아 캪텐 따라 미국에 간다”고 야불댄다. 요게 어쩌다가 하우스뽀이 31 쑈리·킴


가 됐다고 요렇게 멋을 부리며 함부로 뻐기는 게 참 얄밉다. 자식이 제나 내나 다 같은 똘만이면서 뭬 잘났다고 요렇게 거만한지 모르겠다. 똘만이 쩍 생각을 해서라도 이러진 못할 게 아니냐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곳에 데리구 와서 자식 팔자만 고쳐준 게 여간 분한 게 아니다. 자식은 원래 나이는 경치게 먹어 열네 살이나 되지만 제 나이값에도 못 가는 얼벵이다. 피란 나오 다 잃어버린 제 아버지 이름도 모른다니 말이다. 똘만이 쩍 만 해도 돈 못 버러온다고 청계천 다리 밑 왕초한테 지독히 얻어맞으면서도 아예 도망칠 염도 못 내던 겁보였다. 그때 쑈리는 자식하고 같이 얻어맞았지만 얼마라도 뺑손이 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 뺑손이 쳤다간 남아 있는 자식만 경칠 게 가엾어서 며칠을 별르다가 겨우 같이 뺑손이 친 것이다. 뺑손이 치는 날로 재수 사납게 교통순경에게 먼저 붙잡힌 건 딱부리였고, 교통순경에게 끌려 청량리 고아원에 가서 보름 이나 골탕을 먹은 것도 꼭 이 못난 딱부리 때문이었었다. 고 아원에서 한 보름 동안 그때처럼 배를 곺아본 일은 정말 없 었다. 깡통을 차고 다니는 게 치사하긴 해도 그렇게 배고프 진 않았는데, 게선 겨우 하루 두 끼씩(아침에 우유죽, 저녁에 깡보리밥) 주는 걸 가지곤, 간에 기별도 가기 전에 노상 뱃속 에서 쪼르륵 소리만 났었다. 그때도 “야, 배고파 못 살겠다 32


찌라싱7) 부르자” 하니까, 딱부리 놈은 “찌라싱 하면 어딜 가 니, 이번에 왕초한테 걸리면 당장 죽는다야 —” 하며 벌벌 떨 기만 했었다. 그러면서도 “너 혼자 가지 마아” 하고 울멍울멍 하는 꼴이 가엾어서 또 같이 도망쳐 준 것이다. 고아원에서 (몇 달 먼저 들어왔다고 눈꼴시리게 굴던 반장이란 놈을 둘 이 패주고) 도망쳐 나와, 마침 지나가는 양키 추럭의 포장 속 에 거뜬히 올라탄 것은 쑈리 솜씨였다. 왕초나 교통순경에게 또 붙잡힐가바 얼결에 집어탄 것이지만, 지나는 차의 포장 속 에 숨는 재주는, 한때 도강증 없이 한강을 왔다 갔다 하던 때 배운 솜씨란 말이다. 아무튼 포장 속에 숨어 얼마 동안 흔들 리다 보니까 바루 일선 지구인 이곳에 와 닿게 된 것이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에 저 건너 엠피한테 좀 혼나긴 했지만 곧 다른 양키들하고 친하게 사귄 것도 딱부리 솜씨로는 어림 도 없다. 예 와서 얼마 동안 쫄뜨기 양키들하고 얼려, 그렁저 렁 같이 얻어먹고 지내던 판에, 어찌 어쩌다가 쑈리는 서울 서 돈버리 왔다는 양갈보(따링 누나)를 만나 같이 있게 됐고, 딱부리는 마침 캪텐 눈에 들어 하우스뽀이가 됐고… 그저 어 찌 어찌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 뭐 자식이 더 잘나고 더 똑똑 해서 자식만 하우스뽀이가 된 것은 아니다.

7) 찌라싱: ‘도망을 ’ 뜻하는 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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