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과학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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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al Science in the Middle Ages 중세의 과학


차례

서문 ······················vii

1장 500년부터 1000년 사이 과학의 상황 ·······3 2장 과학의 시작과 번역의 시기: 1000년에서 1200년까지 ························29 3장 중세 대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조의 영향 ··43 4장 운동의 물리학 ················76 5장 지구, 하늘, 그리고 그 바깥 ··········124 6장 결론 ····················172

참고문헌 ····················188

해설 ······················235 지은이에 대해··················242 옮긴이에 대해··················243


서문

중세 과학의 역사는, 그 가장 중요한 의미로 고대 그리스 과 학−비잔틴 제국에서 이슬람으로, 뒤이어 서구 유럽으로 전해진−의 전파, 동화,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의 역사다. 나는 중세 유럽이 아랍,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덜하지만 비잔 틴 문화에 진 엄청난 과학적 부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에서 내 목적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부터 1500 년경까지의 시기에 걸쳐 서유럽에서 형성된 과학의 중요한 발전들과 해석들을 간략히 기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을 개별 과학 분야 전 영역에 걸쳐 충분하게 기술하려면 여기 에 계획한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책−또는 책들−이 필요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12세기 말엽부터 중세 과학을 지 배했던 내용과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 의 과학과 철학에 의해 강력히 형성되고 좌우되었다. 우주 의 구조와 그것의 물리적 작동에 대한 그의 설명과 해석들 이 너무도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술이 제기한 문제와 그 해답의 범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독자에게 중세 과학의 본질, 성과들 그리고 실패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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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진정한 통찰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설득력 있는 이유 때 문에, 처음 두 장에서 초기 중세 과학을 특징지은 후에, 나는 중세 후기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물리 과학과 관련된 문제 와 논쟁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그 학파의 구성원들은 피상적이건 깊이가 있건 간에 중세에 연구되던 사실상 모든 과학 분야 들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거대한 분량의 전문적 이고 분화된 과학 저술이 고대 후기에 상세히 논의되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시기보다는 뒤였지만, 그것들이 서 유럽에 유입되기보다는 수세기 전이었다. 이러한 발전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 책의 범위를 뛰어넘는 일이다. 그러 나 나는 적절하고 유관한 곳에서는, 이 거대한 분량의 과학 저술로부터 나온 근본 특징들과 관념들−중세 아리스토텔 레스주의 과학에 편입되었거나 중세 대학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졌던 논쟁 속에서 거부되었던−을 포함시켰다. 나는 이러한 과정이 보다 넓은 의미에서 중세 과학의 역사가 출 현할 여지를 또한 허용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나의 주된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고의 전반적인 영향과 아리 스토텔레스의 저술을 통해 나타난 중요한 물리적·천문학 적 문제 몇몇에 대해 중세의 대응이 갖는 적절한 의미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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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우주론에 대한 중세의 집착과 중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그것들의 중심적 역할은 이러한 접근 방법을 충분히 정당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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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과학


1장 500년부터 1000년 사이 과학의 상황

그리스 철학과 과학이 처음으로 로마 세계에 침투했던 BC 1 ∼2세기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간 중 서유럽의 과학은 500 년에서 1000년 사이에 가장 침체해 있었고, 이 침체했던 과 학이 서서히 개선되면서 12세기와 13세기 초에는 그리스와 아랍의 과학 서적들의 유입이 실질적으로 새로운 일단의 과 학 저술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 는 사실이다.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한심스러운 상태가 생 겨났으며, 무엇이 그러한 상태를 수백 년 동안 지속되게 했 는가? 로마 제국의 점차적 분열과 변형, 그리고 국교로서 기독 교의 승리가 이 시기에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 사건은 거 의 불가피하게 과학의 쇠퇴를 살펴보는 데 커다란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의 재위 기간(285∼305)부터 수세기 동안의 정치적 불안정 은 로마 제국의 동서 분할을 가져왔고, 395년 테오도시우 스(Theodosius)의 죽음 이후 그 분할은 돌이킬 수 없게 되 었다. 5세기를 통해서는 서로마가 게르만 부족 침입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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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이 되었고, 500년에는 상당 부분이 게르만족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Justinianus)의 노력에도, 제국은 겉가죽만 남았을 뿐 그 실 체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으며, 몇 세기 전과 판이하게 달 라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서유럽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 적·정치적 활동을 형성했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 정부의 붕괴와 제국의 초창기 몇 세기 동안을 아주 잘 특징지었던 도시 생활의 점차적인 소멸과 함께 서유럽의 지적인 생활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적당한 정 도의 정치적 안정, 도시 활동 그리고 어떤 종류의 ‘개인적 후 원(patronage)’이 과학의 추구에 필수적이거나 적어도 도움 이 된다고 한다면, 이것들의 부재는 어떻게 서유럽 역사의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과학의 이해와 그 성과가 쇠퇴하고 침체했는가를 아주 일반적인 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다. 기독교의 승리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시작해서 392년 테 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만이 유일한 합법적 종교라고 선 언할 때까지 계속되어 온 신비적 종교들과 숭배 신앙 사이 의 투쟁과 경쟁의 완결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회 각층의 사 람들에게 경제적·정치적 압박이 점점 무거운 짐이 되자 신 비적 종교들이 지지를 받았고, 그들의 교리들은 로마의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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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펼쳐진 지역들을 연결하는 훌륭한 도로망을 통해 쉽게 전파되었다. 그노시스교(Gnostics), 기독교 등뿐만 아니라 이시스(Isis), 미트라(Mithra), 키벨레(Cybele), 솔 인빅투스 (Sol Invictus, 정복되지 않는 태양) 등의 숭배 신앙들은 서 로의 생각과 의식(儀式)을 빌려 썼을 뿐 아니라 몇몇 기본 적인 믿음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세상은 악하며 결국은 사 라질 것이라거나 그 본성이 죄를 범하게 되어 있는 인간은 이 세상의 일들을 외면하고 영원한 영혼의 세계의 일들을 구해야만 불사(不死)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 것이다. 다양한 정도의 금욕주의와 함께, 많은 숭배 신앙 들은 충실한 추종자들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위해 대신 죽을 구세주가 올 것임을 믿었다. 심지어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 신피타고라스주의(Neo-Pythagoreanism) 등과 같은 당시의 몇몇 철학 학파들조차도 그들의 동조자들 을 구원(救援)하고 신(神)과의 결합으로 이끌려 했으며, 그 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술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비록 지적인 수단을 더 많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리스인에게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 세 번 위대한 헤르메스)로 알려진 이집트의 신 토트(Thoth)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입증하듯이, 기원후 처음 몇 세기 동안 마술과 초자연적 힘들은 사실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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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헤르메스의 문헌은 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 스토아 철학 등 당대 다양한 철학들의 여러 요소들을 받아들였고 동시대의 과학적 지식과 이론의 여러 면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전통적 인 합리적 접근법에 대한 반작용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그 것은 우주를 마술, 직관, 신비주의에 의해 이해하고 설명하 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헤르메스 신이 쓴 것이라고 믿어졌고 이집트의 지혜를 강조했기에 독자들은 이것들을 플라톤보다, 심지어는 모세보다 앞선 위대한 고대의 저작 들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들은 고대 지혜의 원초적 자료의 창고였으며 그런 면에서 굉장한 영향을 미쳤 다. 심지어 교회의 신부들까지도 그것들을 읽고 경탄했다. 그리스 원어로 그것들을 읽었던 락탄티우스(Lactantius, 300년경)는 헤르메스를 매우 존경했으며 그를 기독교에 대 한 이교도 예언자로 생각했다. 이들 책 중 적어도 한 편을 라틴어 번역으로 읽고 마술적 방법을 통해 이집트 신들의 상(像)에 생명을 부여하는 거기에 담긴 기록을 받아들이기 를 거부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헤르메 스가 모세 이후,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현인들보 다 훨씬 전에 이집트에서 강한 도덕적 힘을 행사했던 사람 임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비록 헤르메스의 책들 중 몇 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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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번역으로 나돌았고 중세를 통해 영향을 지녔지만 그 것들의 완전한 효과는 자연과 종교의 탐구와 이해를 위해 널리 받아들여진 안내의 역할을 했던 르네상스에서야 나타 나게 되었다. 자연 세계를 경멸했거나 아니면 마술과 초자연적 힘을 통해서 그에 접근했던 내세의 구원에 대한 강렬하고 널리 퍼진 추구가, 그 이전 시대에 살았더라면 과학과 수학에 재 능을 바쳤을 사람들의 생각과 정력을 사로잡았을까? 만약 실제로 그랬다 하더라도 적어도 기독교의 승리 이전에는 그 런 일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기독교가 비교 적 약했고 영향력이 없었으며 그 존속을 위해 경쟁 상대들 에 대항해서 투쟁했던 로마 제국 초기 몇 세기 동안에, 고대 세계의 위대한 과학 저술들이 씌어졌고(항상 그렇듯이 그 리스어로) 그들 중 몇몇은 그 후 중세 과학의 진로와 그보다 훨씬 뒤의 르네상스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기원후 1세기에는 중요한 업적들이 많이 나타났다. 알렉 산드리아의 헤론(Heron)은 기학(氣學, pneumatics), 역학 (力學), 광학(光學), 수학 등에 저술을 남겼고, 니코마코스 (Nicomachos)는 피타고라스 산수에,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와 메넬라오스(Menelaos)는 구면 기하학(球面幾何學, Spherical geometry)의 저술을 남겼다. 메넬라오스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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