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르 시선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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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poèmes choisis d'Anne Hébert 에베르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은 인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작품만을 선정합니다. 오랜 시간 그 작품을 연구한 전문가가 정확한 번역, 전문적인 해설, 풍부한 작가 소개, 친절한 주석을 제공하는 고급 시 선집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Les poèmes choisis d'Anne Hébert 에베르 시선 안 에베르(Anne Hébert) 지음 한대균 옮김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편집자 일러두기 ∙ 이 책은 캐나다 퀘벡의 보레알 출판사(Les Éditions du Boréal)에 서 2004년 출간한 안 에베르의 ≪Œuvre poétique 1950-1990≫을 원전으로 삼아 옮긴 것입니다. ∙ 본문의 주석은 모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단 것입 니다. ∙ 괄호 안의 말과 바깥 말의 독음이 다를 때, 괄호가 중복될 때에는 [ ]를 사용했습니다. ∙ 외래어 표기는 현행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 다. 다만 성서에 나오는 말은 대한성서공회에서 펴낸 공동번역 개 정판의 표기를 따랐습니다. ∙ 이 책은 프랑스문화진흥국의 출판 번역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 으로 출간되었습니다(Cet ouvrage a bénéficié du soutien des Programmes d'aide à la publication de l'Institut français).


차례

≪왕들의 무덤(Le tombeau des rois)≫ 샘물가에서 깨어나·················3 빗속에서 ·····················5 커다란 샘물들 ··················7 낚시꾼들 ·····················9 손 ·······················11 작은 절망 ····················13 밤 ·······················14 새소리 ·····················16 작은 도시들 ···················18 목록 ······················21 낡은 그림 ····················24 깡마른 소녀 ···················26 축제를 대신해 ··················29 기껏해야 담장 하나 ················31 닫힌 방 ·····················34 숲 속의 방 ····················37


점차 더 좁게

··················40

그대 발길을 돌려라 ················42 어느 가련한 죽음 ·················44 정원에 우리 두 손을················46 분명 누군가 있다 ·················48 세상의 이면 ···················50 성(城)에서의 삶 ·················53 고난의 골짜기에서 구르다 ·············55 풍경 ······················57 비단 소리 ····················58 왕들의 무덤 ···················60

≪언어의 신비(Mystère de la parole)≫ 언어의 신비 ···················67 빵의 탄생 ····················71 하루의 연금술 ··················76 장미가 바람에 실려 오길··············81 나는 땅이요 물이니라 ···············83 눈[雪] ······················86 눈먼 계절 ····················87


도시의 봄 ····················89 지혜는 내 팔을 부러뜨렸다·············92 살해당한 도시 ··················95 설익은 큰 덕목들 ·················98 수태 고지 ····················99 너무도 좁은 곳에서 ···············100 이브 ······················102 사로잡힌 신들··················106

해설 ······················109 지은이에 대해··················121 옮긴이에 대해··················125



≪왕들의 무덤(Le tombeau des rois)≫ (1953)



샘물가에서 깨어나

졸음이 파고드는 밤을 떠나며 뜻밖의 꿈이 있는 어두운 숲 나는 명철한 두 눈 뜨고 일상적인 놀랄 것 없는 내 행위들 아침의 순결한 물에 처음 빛을 다시 반사시키는 시간에 내 앞에 펼쳐진 오오! 너른 여유의 시간 무구한 샘물이여.

밤은 내 옛 흔적들을 모두 지워 버렸다. 무정한 그 물 위로 미지의 어느 물 한없이 순수하고 평탄한 수면(水面)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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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목의 뿌리 손가락에서 어깻죽지까지 팔 전체에서 창조되는 어느 몸짓의 솟구침을 느끼는데 아직도 그 깊은 매혹을 알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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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에서

아 빗줄기는 정말 계속되는구나! 힘없이 부드럽게 물러선 세상 위 느긋한 싱그러움이여.

빗줄기 빗줄기여 유약한 안식처 같은 투명한 수면(睡眠)을 제 것으로 만들며 잠들어 있는 여인 위로 내리는 느리고 느린 빗줄기여.

빗속에 반이 가려진 거주지 고통의 몸짓들이 전율하는 순결한 물속에서 어른대는 감춰진 안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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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여인 위로 쏟아진 하루의 모든 물방울들.

너울처럼 그녀가 제 고통 위로 가져오는 하루

오로지 그 하루를 가로질러 우리는 그녀의 가슴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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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샘물들

저 깊은 숲 속에 가지 말자 깊숙한 곳에 커다란 샘물들이 잠들어 있으니.

커다란 샘물들을 깨우지 말자 벌 받은 눈꺼풀은 거짓 졸음으로 감고 있다 어떤 꿈도 바닷속 희고 진귀한 꽃을 그곳에서 만개시킬 수 없구나.

주변의 빛살과 노래하는 키 큰 나무들은 그곳에 어떤 모습도 담그지 않는구나.

이 어두운 숲의 물은 아주 순결하게 홀로 흘러 내 모습을 비추는 바다의 소명 근원의 이 흐름에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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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내 인내심의 곧게 뻗은 기둥들이 밤 지새우며 그대들을 지키고 있는 이 근엄한 공간 깊은 곳 내 안에서 흐르는 오오 눈물이여 영원한 고독 물의 고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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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들

낚시꾼들은 그들의 젖은 투망으로 새를 낚는다.

전도된 이미지. 이 물 위는 아주 고요하다.

잎이 달린 나무는 이파리들 위로 부는 바람의 굳어 버린 데생 그리고 가지들 위에는 여름의 색채들.

곧게 선 나무 전체 그리고 새, 이런 종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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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순진한 왕.

그 이후, 또한, 나무 아래 정오의 강한 햇살 속에서 바느질하는 이 여인.

앉은 이 여인은, 한 땀 한 땀, 세상의 모욕을 수놓고 있다, 불타 버린 두 손의 온화한 인내심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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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1)

그녀는 계절의 변두리에 앉아 햇살에 두 손을 비추고 있다.

그녀는 낯선 여자 세월이 채색하는 두 손을 바라보고 있다.

두 손 위의 세월들은 그녀를 점령하고 그녀를 매혹한다.

그녀는 세월들을 결코 움켜쥐지 않고 늘 팽팽하게 펼쳐 낸다.

세상의 기호들은 그 손가락들에도 새겨져 있다.

1) “손”은 안 에베르의 주요 시적 테마다. “팔”이나 “손가락들”과 함께 ≪왕들 의 무덤≫에 수없이 등장하는 “손”은 안 에베르에게 얼굴만큼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는 신체의 일부이며, 얼굴의 표정은 손의 모습이나 손짓으로 완 성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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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많은 깊은 숫자들은 잘 세공된 묵직한 반지들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

모든 환대와 사랑의 장소에는 이런 냉혹한 제물이 있는 법 그녀로부터는 우리를 위해 태양으로 열린 치장된 고통의 손들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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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절망

내가 사랑했던 섬들은 강물에 휩쓸렸고 침묵의 열쇠는 상실했으며 접시꽃은 생각만큼의 향기가 없고 물은 노래하는 만큼의 비밀이 없다

내 심장은 부서졌고 순간은 이제 그것을 싣고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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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밤의 침묵이 해저의 거대한 조류처럼 나를 감싼다.

난 고요한 청록 물속에서 쉬며 등대인 듯 비추다가 다시 꺼지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소리 없는 리듬 비밀스런 코드 나는 어떤 신비도 해독하지 못한다.

빛이 비출 때마다 나는 두 눈을 감는다, 내가 잠겨 드는 침묵의 영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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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연속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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