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무라트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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Хаджи Мурат 하지 무라트


나는 들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고 있었다. 한여름이었다. 건초를 만들기 위해 꼴을 베고 난 뒤, 쌀보리의 추수를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해마다 이 계절이 되면 아름다운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빨강·하양·분홍의 향기롭고 보드라운 토끼풀, 우윳빛 꽃 잎에 노란 꽃술을 가진 향기로운 여름국화, 달콤한 꿀 향기 를 풍기는 노란 유채꽃, 연보라색과 흰색의 종 모양으로 피 어 있는 늘씬한 자태의 초롱꽃, 땅바닥에 엉켜 있는 야생 완 두 넝쿨, 노랑·빨강·분홍·연보라의 산뜻한 체꽃, 은은 한 향기를 풍기는 작은 분홍 꽃망울을 가지런히 단 질경이, 햇볕을 받으면 밝은 푸른색의 꽃망울을 터트리지만 저녁 무 렵이나 시들 때가 되면 점점 연한 붉은색을 띠는 수레국화, 민들레 향이 나지만 금방 시들어 버리는 우아한 편도나무 꽃 등이 만발했다. 나는 꽃들을 꺾어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고는 다시 개천 가에 활짝 핀 꽃들을 구경하며 집으로 돌아가다가 심홍색의 아름다운 엉겅퀴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그 꽃을 ‘타타르인’이라고 부르는데, 풀을 벨 때 그 꽃을 베 지 않도록 조심한다. 만약 실수로 엉겅퀴 꽃을 베면, 손이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던져 버린다. 나는 그 엉겅 퀴 꽃을 꽃다발의 중앙에 꽂아 보고 싶었다. 개천으로 내려 가서 꽃 속에서 달콤하게 잠을 자고 있던 뒤영벌을 쫓아 버 리고 엉겅퀴 꽃을 꺾기 시작했다. 매우 힘든 일이었다.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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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으로 감싸고 꺾었지만 엉겅퀴 줄기의 가시는 손수건 을 뚫고 손을 찔렀다. 게다가 줄기가 무척 질겨서 5분 정도 기를 쓰고 난 다음에야 겨우 꺾을 수 있었다. 마침내 엉겅퀴 꽃을 꺾었을 때 줄기는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꽃의 신선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더구나 거칠고 강한 그 꽃은 내 꽃다발 속의 부드러운 꽃들과 조화를 이루지도 못했다. 피어 있던 자리에서는 아주 아름답게 보이던 그 꽃을 경솔 하게 꺾어 버렸다는 생각에 애석한 마음이 들어 홧김에 꽃 을 던져 버렸다. ‘하지만 얼마나 강한 생명력과 힘인가! 그 꽃은 자신을 지키려고 끈질기게 노력했어. 생명을 쉽게 내놓기 싫었던 거지.’ 엉겅퀴 꽃을 꺾는 데 들여야 했던 노력을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 쟁기질을 끝낸 검은 휴경지(休 耕地)를 가로질러 나 있었다. 나는 검은흙으로 된 오르막길

을 걸었다. 지주의 그 밭은 저 멀리 언덕 꼭대기에 이를 정 도로 넓어서, 눈앞에는 평탄하게 이어진 밭고랑과 축축한 검은흙의 휴경지만이 펼쳐져 있었다. 쟁기질이 잘돼 있어 서, 잡초나 살아 있는 어떤 식물도 볼 수 없고 오직 검은흙 뿐이었다. ‘인간은 파괴적이고 잔인한 동물이야. 삶을 유지 하기 위해 생명체인 식물들을 마구잡이로 죽이잖아.’ 나도 모르게 검은흙에서 살아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애쓰면서 생 각했다. 오른쪽으로 난 길에서 조금 전 쓸데없이 꺾어서 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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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버렸던 엉겅퀴 꽃과 같은 종류의 작은 덤불을 발견했다. ‘타타르인’이라고 불리는 그 덤불엔 세 개의 가지가 있었다. 한 가지는 팔이 잘린 것처럼 밑동만 남아 있었고, 다른 두 가지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들은 한때는 붉은색이었 지만 지금은 검은색이다. 가지의 줄기 하나는 두 동강이 나 서, 끝에 핀 꽃은 흙이 묻은 채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다 른 줄기는 여전히 위로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역시 검은흙 이 묻어 더러웠다. 수레바퀴가 꽃을 밟고 지나갔지만 다시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서 있긴 하지만 약간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마치 몸의 한 부분이 찢어지고, 창자가 터지고, 팔이 절단되고, 눈이 튀어나온 것 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변함없이 인근의 자신의 모든 형제들을 파멸시켜 버린 인간에게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지독한 생명력이야!’ 나는 생각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정복하고 수백만 종의 식물을 파괴해 왔지만, 이 생명체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았어.’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오래전에 들었던 한 캅카스1)인

1) 캅카스(Кавказ):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50여 소수민족들 이 뒤섞여 살고 있다. 통용되는 언어만도 40여 종에 이르고, 러시아 정교와 이슬람교, 크리스트교 등이 공존한다. 산맥을 중심으로 러시아 쪽인 북(北) 캅카스와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쪽인 남(南)캅카스로 구분된다. 최근에 는 이곳의 석유 자원과 더불어 유럽·러시아·중동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노리는 러시아와 미국이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 운동에 직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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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는 내가 직접 목도했던 부 분, 목격자에게 들었던 부분, 내 상상력이 첨가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 기억과 상상 속에서 구성된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접적으로 간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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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1851년에 있었던 일이다. 11월의 추운 저녁, 하지 무라트는 말을 타고 마흐케트에 왔다. 키자크2) 태우는 냄새와 연기가 자욱한 마흐케트는 호전적인 체첸인3)들이 살고 있는 벽지(僻地)다. 회교 사탑에서 들려오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수도자의 엄숙한 영창 소리도 사라지자, 키자크 태우는 연기 냄새가 밴 산의 맑은 공기를 뚫고, 벌집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 클랴4) 사이로 돌아다니는 가축들의 낮은 울음소리를 넘어, 논쟁하는 남자들의 굵은 목소리와 샘터에서 여자들과 아이 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하지 무라트는 샤밀의 부관으로서 큰 공훈을 세운 것으 로 유명했다. 깃발을 든 수십 명의 추종자들이 언제나 그를 수행했다. 그가 지금 두건과 부르카5)로 몸을 숨기고 단 한

2) 키자크(кизяк): 남러시아 등지에서 땔감으로 사용하는 말린 쇠똥. 3) 체첸인(чечен): 50여 민족이 뒤섞여 살고 있는 캅카스 지역의 소수민족들 중 하나. 러시아는 차르식 통치 방식(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차르는 변방 영 토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간의 대립을 교묘하게 이용해 적대적 민족을 축출 하거나 지배했다)을 통해 체첸 민족을 지배해 왔다. 지금까지도 체첸 민족 은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원하고 있다. 용맹한 체첸 민족은 1994∼ 1996년,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와 분리·독립을 위한 전쟁을 수행 했다. 4) 사클랴(сакля): 진흙으로 지은 캅카스 지역의 전통 가옥. 5) 부르카(бурка): 캅카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즐겨 입는, 소매가 없는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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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추종자만을 데리고 도망자처럼 마을로 들어선 것이다. 그의 부르카 아래로 라이플총이 보였다. 그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검은 눈동자로 마주친 사람들 을 주의 깊게 보았다. 마을로 들어선 하지 무라트는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 대 신에 왼쪽의 좁은 골목길로 갔다. 언덕 기슭에 있는 사클랴 앞에 이르자 그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클랴 의 처마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붕 위에 새로 진 흙을 바른 굴뚝 옆에서 한 남자가 모피 외투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하지 무라트는 가죽을 덧댄 채찍 끝으로 그를 건드리며 뭐라고 말했다. 얼룩지고 번들거리는 낡은 베시 메트6)를 입고 침실용 모자를 쓴 노인이 모피 외투를 치우고 얼굴을 내밀었다. 붉고 축축한 눈꺼풀에는 속눈썹도 없었 는데, 그는 마치 속눈썹을 떼어 내기라도 하듯 눈을 껌벅거 렸다. 하지 무라트는 얼굴을 보이며, “셀럄 알레이쿰(그대 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노인도 그 를 알아보고는 “알레이쿰 셀럄(그대에게 평화가 있을지어 다)”이라고 인사하며 이가 다 빠진 입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 다. 노인은 여윈 다리로 일어서서, 굴뚝 옆에 둔 나무 굽 슬 리퍼를 신었다. 그리고 구겨진 모피 외투를 천천히 입고는, 나 산양 가죽으로 만든 망토. 6) 베시메트(бешмет): 타타르인이나 캅카스 민족이 즐겨 입는, 무릎까지 솜을 넣은 속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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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를 타고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동안에도 노인은 햇 볕에 그을린 가늘고 주름진 목을 끊임없이 움직여 고개를 흔들면서 잇몸만 남은 입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노인은 지붕에서 내려오자마자 하지 무라트가 타고 있는 말 의 굴레와 오른쪽 말등자를 다정스럽게 잡았다. 그러자 하 지 무라트의 건장한 추종자가 재빨리 말에서 내려 노인에게 물러서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 무라트도 말에서 내렸고, 다 리를 약간 절룩이며 처마 아래로 갔다. 그때 문을 열고 열다 섯 살 정도 된 소년이 뛰어나와 놀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보았다. 잘 익은 구스베리 열매처럼 새까만 눈동자였다. “사원으로 달려가서 아버지를 모셔 오렴.” 노인은 소년 에게 말하고 나서, 서둘러 하지 무라트에게 사클랴로 들어 가는 삐걱대는 문을 열어 안내했다. 하지 무라트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빨간 베시메트 위로 노란색 상의를 걸치고 푸른색의 헐렁한 바지를 입은 중년의 야윈 여인이 방석을 들고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손님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손님 이 앉을 수 있도록 방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의 아들들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하지 무라트도 부 르카와 라이플총과 칼을 벗어 노인에게 건네주며 대답했다. 노인은 라이플총과 칼을 받아, 벽에 걸린 집주인의 무기 옆에 나란히 걸었다. 깨끗이 진흙을 바르고 그 위로 흰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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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죽을 덧바른 벽이었다. 하지 무라트는 등에 멘 권총을 바로잡고, 체르케스카7) 를 여미며 방석 위에 앉았다. 노인은 그 옆에 맨발로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위로 해서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 무라트도 노인과 똑같이 했다. 그들은 기 도문을 번갈아 암송한 다음, 수염 끝에 닿게 손을 내린 후,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ᐨ하바르(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하지 무라 트가 노인에게 물었다. “하바르 이요크(새로운 소식은 없어).” 노인이 대답했다. 노인의 생기 없고 충혈된 붉은 눈은 하지 무라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그의 가슴 언저리만 바라보았다. 그러면 서 노인이 말했다. “나는 양봉장에 살고 있어. 오늘은 그저 아들을 만나러 왔을 뿐이야. 아들 녀석도 알아.” 하지 무라트는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을 노인이 알고 있지 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가볍게 고 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좋은 소식이라곤 없지. 단지 토끼는 독수리를 몰아낼 방법을 연구 중이고, 독수리는 토끼를 분열시키려 한다는 소식뿐이지. 며칠 전 러시아 개들이 미치츠키의 건초 더미

7) 체르케스카(черкеска): 캅카스의 자치주인 체르케스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입는, 깃 없는 긴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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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 불을 질렀어. 그놈들의 면상을 찢어 놓아야 해!” 노인 은 분노에 찬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무라트의 추종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건장한 다리 로 소리 없이 걸어왔다. 하지 무라트처럼 그도 단검과 권총 만을 지니고, 부르카와 라이플총과 칼을 벗어 벽에 박힌 못 에 걸었다. “누구야?” 노인이 추종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제 추종자입니다. 이름은 엘다르입니다.” 하지 무라트 가 대답했다. “멋있구먼.” 노인은 엘다르에게 하지 무라트 옆에 놓인 펠트 방석 위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엘다르는 책상다리로 방석에 앉았다. 열심히 말하고 있는 노인을 그는 숫양의 눈 처럼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노인은 지난주에 마을 의 용감한 남자들이 러시아 군인 두 명을 붙잡아,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죽이고 다른 한 명은 베데노에 있는 샤밀에게 압송했다고 말했다. 하지 무라트는 노인의 이야기를 무심히 듣고만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집주 인인 사도가 들어왔다. 40대 중반인 그는 수염을 짧게 길렀 고, 길쭉한 코와, 그를 부르러 갔던 아들처럼 반짝이지는 않 지만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도 아버지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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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문 곁에 앉았다. 사도는 문 앞에서 나무 슬리퍼를 벗 고, 오랫동안 자르지 않아 덥수룩한 머리 위에 쓴 낡은 모자 를 벗었다. 그러고는 하지 무라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노인이 했던 것처럼 그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팔 을 들어 올려 기도문을 외웠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여 절 을 했다. 그러고 나서 입을 열었다. 하지 무라트를 죽이든지 생포하든지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샤밀의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샤밀의 첩자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 있 었고, 마을 사람들이 샤밀의 명령을 거역하기는 힘들기 때 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느 누구도 내 집에서 나의 쿠나크8)를 해치지 못하지. 하지만 집 밖은 달라. 우리 는 그걸 생각해야 돼.” 사도가 말했다. 하지 무라트는 사도의 말을 새겨들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사도가 말을 끝내자 하지 무라트가 말했다. “좋아, 지금 러시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야겠어. 내 추 종자가 편지를 전하겠지만, 안내인이 필요해.” “바타를 보내지. 빨리 가서 바타 삼촌을 이리로 모셔 와 라.” 사도는 아들에게 말했다. 소년은 용수철처럼 튕기듯이 일어나서는 재빨리 집 밖 으로 뛰쳐나갔다. 10분쯤 지나자, 소년은 체격은 작아도 골

8) 쿠나크(кунак): ‘의리로 맺어진 친구’를 뜻하는 캅카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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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이 단단해 보이는 체첸인과 함께 돌아왔다. 태양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 소매가 너덜거리는 넝마 같은 노란 체르케 스카와 구겨진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지 무라트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체할 시간이 없 다는 듯 바로 물었다. “내 추종자를 러시아인들에게 안내해 줄 수 있겠소?” “그럼요, 확실히 해낼 수 있습니다. 나만큼 길을 잘 아는 체첸인은 없을걸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갈 수 있다고 말하 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약속하겠지만, 모두 허풍이에요. 하 지만 저는 할 수 있지요!” 바타는 유쾌한 목소리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좋소.” 하지 무라트가 말했다. “수고의 대가로 세 개를 받게 될 거요”라고 말하면서 그 는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바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자 신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며, 하지 무라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산악 지대에 사는 사 람이라면 누구나 하지 무라트를 알았고, 그가 비열한 러시 아인들을 어떻게 토벌했는지도 알았다. “좋소. 밧줄은 길어야 하지만, 말은 짧아야 하는 법이오.” 하지 무라트가 말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바타가 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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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군 강이 절벽을 끼고 구부러지는 숲 속의 초지에 건 초 두 더미가 있는 곳을 아오?” “알지요.” “그곳에서 부하 네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소.” 하지 무라 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마고마를 찾아 물어보시오. 그가 할 일을 알려 줄 거 요. 그를 러시아군 보론초프 사령관에게 데려다 줄 수 있겠 소? 가능하겠소?” “데려다 주겠습니다.” “그 사람을 데리고 갔다가 숲으로 오시오. 나도 숲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하지요.” 바타는 일어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는 밖으로 나갔다. “게히에도 사람을 보내야 해.” 바타가 나가자, 하지 무라 트가 사도에게 말했다. “게히에서 반드시…” 하고 하지 무라트가 말을 이으려는 데,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는 체르케스카의 탄약 주머니에 재빨리 손을 넣었다가, 집 안으로 두 여자가 들어오자 주머 니에서 손을 빼고 입을 다물었다. 한 여자는 사도의 아내로, 아까 방석을 내어 준 야윈 중 년의 여인이었다. 다른 여자는 소녀였는데 붉은색 바지와 초록색 베시메트를 입고 있었다. 은화를 연결해서 만든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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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이가 상의 앞부분을 덮고 있었고, 그리 길진 않지만 풍성 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땋아 야윈 어깨뼈까지 늘어뜨린 모습 이었다. 땋은 머리카락 끝에도 은화가 달려 있었다. 아버지 와 남동생의 눈동자처럼, 구스베리 열매같이 검은 눈동자 는 낯익었지만 젊음의 생기로 반짝였다. 그녀는 손님들을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 었다. 사도의 아내가 차, 버터 바른 블린9), 치즈, 추레크10) 그 리고 꿀로 상을 차려 내왔다. 소녀는 대야, 물 항아리, 그리 고 수건을 가져왔다. 두 여자가 바닥이 부드러운 붉은색 슬리퍼를 신고 오가 며 조용히 손님들 앞에 상을 차리는 동안, 사도와 하지 무라 트는 내내 침묵했다. 여자들이 집 안에 있는 동안, 엘다르도 내내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숫양의 눈을 닮은 눈으로 자 신의 무릎만 내려다보았다. 여자들이 방을 나가고, 문 뒤로 조심스러운 슬리퍼 소리가 사라지자, 비로소 엘다르는 안 도의 한숨을 내쉬고, 하지 무라트는 체르케스카의 탄약 주 머니에서 탄환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탄환 안에 돌돌 말아 꽂아 둔 쪽지를 빼서 사도에게 건네주었다. “내 아들에게 건네주게.” 하지 무라트가 말했다.

9) 블린(блины): 얇은 팬케이크. 10) 추레크(чурек): 빵을 얇게 펴서 늘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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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답장하라고 할까?” 사도가 물었다. “자네에게 보내라고 하게. 자네가 내게 보내 줘.” “그렇게 하겠네.” 사도는 대답을 하고 쪽지를 자신의 체 르케스카의 탄약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대야 를 하지 무라트 앞에 놓고 물 항아리를 들었다. 하지 무라트 는 베시메트의 소매를 걷어 올려 하얀 근육질의 팔이 드러 나게 한 뒤, 사도가 물 항아리에서 부어 준 차갑고 맑은 물 줄기에 손을 씻었다. 천연섬유로 만든 깨끗한 수건으로 손 을 닦은 다음 하지 무라트는 상으로 갔다. 엘다르도 그렇게 했다. 그들이 식사하는 동안, 사도는 맞은편에 앉아 방문해 줘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문 옆에 앉은 소년은 하지 무라트에게서 반짝이는 검은 눈을 잠시도 떼지 않았는데, 마치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들의 방문이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 무라트는 거의 24시간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만, 빵과 치즈만 조금 먹었다. 그는 칼집에서 꺼낸 단검으로 꿀을 빵 조각에 발랐다. 그가 꿀을 발라 먹는 모습을 흐뭇하 게 바라보던 노인이 말했다. “꿀맛이 좋을 거야. 올해는 어느 해보다도 좋아. 양도 많 고 질도 좋아.” “감사합니다.” 하지 무라트는 이렇게 말하며 음식이 놓인 작은 탁자에 서 돌아앉았다. 엘다르는 조금 더 먹고 싶었지만, 그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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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행동에 따랐다. 그는 작은 탁자에서 나와, 하지 무라트에 게 물 항아리와 대야를 건네주었다. 사도는 하지 무라트를 맞아들인 것이 목숨이 걸린 위험 한 일이란 것을 알았다. 샤밀과 하지 무라트가 논쟁을 벌인 후, 즉시 샤밀이 체첸의 모든 주민들에게 하지 무라트를 손 님으로 맞아들일 경우 처형당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포고령 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도는 마을 사람들이 곧 자신의 집에 하지 무라트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하지 무 라트를 넘기라고 요구할 것도 알았다. 그러나 사도는 개의 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리로 맺어진 친구인 손님을 보호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즐거웠 다. 그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고 해도 그는 기 뻤고,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하지 무라트에게 거듭 말했다. “자네가 내 집에 있고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느 누구 도 자네를 해칠 수 없을 거야.” 하지 무라트는 사도의 빛나는 눈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난 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신의 가호로 자네에게 기쁨과 생명이 넘치기를.” 사도는 덕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어 보였다. 사클랴의 덧문을 닫고 난로에 장작을 넣은 후, 사도는 무 척 즐겁고 흥분된 기분으로 쿠나크가 머무는 방을 나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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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들이 모두 모여 있는 사클랴의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여 자들이 아직 잠들지 않은 채, 쿠나크 방에서 묵는 위험한 손 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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