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인류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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Европа и человечество 유럽과 인류


≪유럽과 인류≫에 언급된 생각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내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도 확신 을 얻고, 다른 사람들도 설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이 주 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많은 사람들과 벌인 토론들은 내가 더욱 깊이 있게 주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고, 내 생각과 논거들을 다듬어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 나 나의 기본적 입장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출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대부분의 사람들 이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난해하게 설명해서가 아니라, 유럽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받아들 여지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나의 생각들이 유 럽의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심리적 토대에 반하는 내용 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패러독스를 즐기는 사 람이라고 생각했고, 나의 연구를 기이한 것으로 여겼다. 이 렇게 내가 전적인 몰이해에 부딪쳤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 들을 일반인들에게 내놓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고, 더 좋은 시기가 오기를 고대했다. 마침내 내가 이 책을 출판하 기로 결정한 것은 최근에 나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 가운데 나의 기본적인 입장들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의하는 사람 21


들이 점점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나 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데, 나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그러 한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세계대전은 ‘문명화된 인류’라 는 신념을 뒤흔들고, 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는 러 시아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급격히 붕괴되었 는지를 본 목격자들이다. 그렇게 빨리 그리고 쉽사리 무너 진 것이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 이 이러한 현상의 원인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이 책자 가 나의 동포들 가운데 이 문제에 대해 자기 생각들을 규명 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러시아 역사와 러시아 현실 속에서 더 많은 사례들을 끌어들여 내 입장들을 더 상세하게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했다면 설명은 더욱 흥미롭고, 더욱 생생한 것이 되 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삽입구들 때문에 전반적인 논지의 명확성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비교적 새로운 사상 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그러한 사상들 을 분명하고, 일관성 있게 제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의 생각들은 단지 러시아인들하고만 관련 된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로마인이나 게르만인이 아니면 서 유럽화를 받아들인 다른 모든 민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22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러시아어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단순 히 자신의 셔츠가 자기 몸에 가장 잘 맞기 때문이며, 또한 개 인적으로는 나의 생각들이 내 동포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습 득되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책자에서 소개되고 있는 나의 입장들이 옳다고 인정된다면 사람들은 더욱 자세하게 연구를 추진할 의무를 가져야 한다. 즉 이 책에 소개된 나의 입장들을 받아들이면 서 실제와 관련하여 그것들을 발전시키고 구체화해야 하며, 또한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삶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재 검토해야 한다. 만일 내가 옹호하고 있는 나의 생각들이 실제로 거짓된 것이며, 해로운 것이라면 그것들을 반박하려고 해야 한다. 저자 자신은 이미 10년 이상 고민해 왔지만 만일 어느 누구 든 논리적으로 나의 생각들이 틀린 것임을 증명한다면 어떠 한 서운함도 없이 이러한 불쾌하고 시끄러운 생각들을 털어 버릴 것이다. 내 책자에 비평을 가하려는 모든 사람들은 다음의 주소 로 편지를 보낼 것을 부탁한다.

Bulgarie, Sofia, Université, Faculté des Lettres, Mr. N. Troubetzkoy, do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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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제기 (유럽의 자기중심주의)


유럽인 각자가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가질 수 있는 입장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개의 극단적인 경계, 즉 쇼 비니즘과 코즈모폴리터니즘이라는 경계 사이에 있다. 모든 민족주의는 쇼비니즘과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요소들을 합 성한 것에 불과하다. 유럽인에게 쇼비니즘과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근본적으 로 서로 다른 관점에서 나온 대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 를 그렇게 결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쇼비니즘과 코즈 모폴리터니즘 사이에 원칙적이며 근본적인 차이는 없으며, 같은 현상의 두 가지 양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양 자를 더욱 집중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쇼비니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민족은 자기 민족이 라는 선험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민족이 창조한 문화가 다른 모든 문화보다 우수하고 완전한 것이다. 오직 자신의 민족만이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고, 우위에 있을 권 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민족들은 자기 민족의 신앙, 언어, 그리고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 또한 자기 민족에게 종속되 어야 하고, 자기 민족과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코즈모폴리턴은 민족 간의 차이를 부정한다. 만일 어떠 한 차이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문명화된 인류는 하나로 통일되어야만 하며, 하나의 문화를 가져야만 27


한다. 문명화되지 못한 민족들은 이러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며, 여기에 참여하고, 문명화된 민족의 일원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세계진보’라는 하나의 길을 가야만 한다. 문명 은 최고의 선이며, 문명의 이름으로 민족적인 특징들을 희 생시켜야 한다. 그런데 코즈모폴리턴들은 문명이라는 말을 유럽의 로마 민족과 게르만 민족이 함께 만들어낸 문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문명화된 민족이라는 말 역시 먼저 로마인 과 게르만인들을 의미하며, 다음으로 유럽 문화를 받아들인 다른 민족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코즈모폴리턴들의 견해에 따르면 다른 모든 문화 를 몰아내고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 문화는 다름 아닌 특정 한 민족지학적, 인류학적 집단의 문화이며, 쇼비니스트들 역시 이러한 집단이 주도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근본적인 차이는 전혀 없다. 실제로 민족적으로, 민족지학과 인류학 적으로, 그리고 언어학적으로 볼 때 유럽 각 민족의 단일성 은 단지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유럽 각 민족은 더 작은 여러 종족의 집합체이다. 이러한 종족들은 고유한 지방 문화적 특성과 인류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혈연의 끈과 공통의 역사로 서로 묶여 있다. 쇼비니스트는 자기 민족이 창조의 정점이며, 가능한 모 든 장점을 지닌 유일한 존재라고 선포하며, 모든 민족이 하 28


나의 집단에 속하기를 옹호하는 사람이다. 더욱이 쇼비니스 트는 다른 민족들이 고유한 특성을 버리고 자기 민족과 합 쳐지기를 바란다. 쇼비니스트는 이미 그렇게 합쳐져서 고유 한 민족적 성격을 잃고 자기 민족의 언어와 신앙 그리고 문화 를 터득한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을 자기네 사람처럼 대한다. 본질적으로 유럽의 코즈모폴리턴은 쇼비니스트와 다르 지 않다. 그가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문명과 문화는 혈 연의 끈과 공통의 역사로 서로 묶여진 몇몇 민족이 공유하 는 문화적 가치의 총체이다. 다른 모든 문화는 그러한 문화 앞에서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쇼비니스트가 자기 민족의 일원으로 들어온 개별 종족 집단들의 특수성을 외면하는 것 처럼 코즈모폴리턴 역시 로마-게르만 개별 민족들의 문화 적 특수성은 치워 없애고 단지 그 민족들의 공통된 문화적 총체에 속하는 것만을 취한다. 또한 코즈모폴리턴은 로마- 게르만 문명을 완전히 이해하고, 이러한 문명에 반하는 자 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민족적 성격을 로마-게르 만의 보편적 속성으로 교체한 비로마-게르만인의 문화적 가치도 인정한다. 쇼비니스트와 아주 똑같다. 쇼비니스트 도 지배 민족에 철저히 동화된 외국인이나 다른 민족을 자 기 국민으로, 자기 민족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쇼비니스트와 코즈모폴리턴은 완전히 상응 29


한다. 차이는 단지 쇼비니스트는 코즈모폴리턴보다 더욱 좁 은 종족 집단을 취한다는 것이다. 즉 차이는 원칙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단지 정도에 있을 뿐이다. 유럽의 코즈모폴리턴을 평가함에 있어 ‘인류(человече-

ство)’, ‘보편적 인류 문명(общечеловеческая цивилизация)’ 등의 문구는 매우 부정확한 표현이며, 그 뒤에 매우 특 정한 민족지학적 개념이 숨겨져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 다. 유럽 문화가 인류 문화는 아니다. 유럽 문화는 특정한 종족 집단의 역사적 소산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게르만족 과 켈트족은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서로 뒤섞여 자신 의 민족문화의 요소와 로마 문화의 요소로 이루어진 공통의 생활방식을 만들었다. 공통의 민족지학적, 지리학적 조건 때문에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의 공통된 삶을 살았다. 그들 은 지속적인 상호교류 덕분에 무의식적으로 로마-게르만 이 하나라는 단일한 감정이 존재했을 만큼 그들의 일상과 역사 속에는 공통된 요소들이 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 차 로마-게르만인들은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문화적 원천을 연구하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로마와 그리스 문헌들을 통해 그리스-로마 세계의 특성 인 초민족적인 세계 문명에 대한 이데아가 표면으로 드러나 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이데아 역시 민족지학적, 지리학적 30


원인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연히 로마에서 ‘전 세계’라는 말은 단지 오르비스 테라룸(Orbis terrarum),1) 즉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거나 이 바다와 연계된 민족들을 의 미한다. 고대의 코즈모폴리터니즘적 이데아는 유럽 교육의 토대가 되었다. 고대의 이데아는 로마-게르만의 단일성이 라는 무의식적 감정의 비옥한 토양에 떨어져 유럽 코즈모폴 리터니즘의 이론적인 토대가 되었으며, 그것을 더 정확하게 는 범로마-게르만적인 쇼비니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쇼비니즘의 심리적인 토대 역시 같 다. 이것을 자기중심주의(эгоцентризм)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한데, 일종의 무의식적인 편견이다. 자기중심적 인 심리를 가진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고, 창조의 정점이며, 모든 존재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며, 가 장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존재 가운데 자 신과 더 가까운 것이 훌륭한 것이고, 더 먼 것이 나쁜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심리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 속에 침투해 있다. 극히 소수만이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1) 오르비스 테라룸: 라틴어로 오르비스(orbis)는 구(球)를 뜻하며, 테라룸 (terrarum)은 땅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르비스 테라룸을 직역하면 지구라고 할 수 있지만 로마인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계, 즉 지중 해에 인접한 민족들만을 오르비스 테라룸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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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심리가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것 은 쉽게 눈에 뜨이며, 그러한 표출이 불합리하다는 것이 명 백하기에, 극단적인 표출은 보통 비난과 항의 또는 조롱을 받기 마련이다. 자신이 누구보다 똑똑하며 훌륭하다고 믿는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이 좋다고 믿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 게 조롱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극단적인 자기중심 주의의 표출은 드물며, 혹 표출되더라도 보통 저항에 직면 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중심주의가 더 폭넓은 인간 집단 사 이에 퍼져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때에도 물론 저항은 있지만, 그러한 자기중심주의를 꺾기는 훨씬 힘들다. 흔히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두 집단의 싸움이 되기 마련이며, 승리한 집단은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 러한 일은 계급투쟁에서 볼 수 있다. 귀족을 타도한 부르주 아는 다른 모든 신분에 대해서도 자신의 우월성을 믿는다. 프롤레타리아 역시 부르주아와 투쟁하면서 자신을 ‘땅의 소 금(соль земл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자기중 심주의 역시 명백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며, 의식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고 시야가 넓게 트인 사람이라면 보통 이러한 편견 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종족들이 모인 집단에 관 한 것일 때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훨씬 어렵다. 많은 프러시아의 범게르만주의자들은 자신의 동족 가운 32


데 프러시아인을 다른 모든 독일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사람 들을 격렬히 비난하며, 그들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고 편협한 ‘과장된 애국주의(квасный патриотиз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인이 최고의 존재이며, 인류의 꽃이 라는 입장은 범게르만주의자들에게 어떠한 의구심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프러시아 코즈모폴리턴은 한결같이 자신 의 동족 범게르만주의자에게 격분하며 그를 편협한 쇼비니 스트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이 똑같이 쇼비 니스트라는 것, 단지 독일 쇼비니스트가 아닐 뿐 로마-게 르만 쇼비니스트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결국 문제는 강도 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한쪽은 쇼비니즘의 자기중심주의적 토대를 다소 강하게 느끼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그것을 다 소 약하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으로부터 양심적인 로마-게르만인 이 쇼비니즘과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명백해진다. 그는 쇼비니즘이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자 기중심적인 심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심리가 처음부터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이론을 위해서도 기본 토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 을 인식해야 한다. 양심적 로마-게르만인이라면 자기중심 주의가 본질적으로 반문화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넓은 의미 33


에서 ‘더불어 사는 것(общежитие)’, 즉 모든 존재의 자유로 운 교류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명백 한 것은 이러한 자기중심주의의 여러 모습이 단지 항상 승 리자가 차지하는 영역으로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심적인 로마-게르만인은 쇼비니즘뿐 아니라 코즈모폴 리터니즘 역시 거부해야만 하며, 또한 이 두 개의 극단 사이 에 위치한 민족문제에 관한 모든 견해들을 거부해야만 한 다. 그러나 누구보다 비로마-게르만인, 즉 처음부터 유럽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은 민족 의 구성원들이 유럽의 쇼비니즘과 코즈모폴리터니즘에 관 한 이러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자기중심주의는 유럽 로마-게르만 문화가 하나라는 시 각 때문에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 이것이 문화의 전부라는 시각 때문에도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각 이 사람들 사이에 모든 문화적 교류를 파괴하는 반사회적 시 각의 시초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로마-게르만 민족 가 운데 자기 민족이 선택된 민족이며, 그 문화에 다른 모든 민 족이 종속되어야 한다고 선전하는 쇼비니스트들이 있다면, 그들의 모든 동족이 그러한 쇼비니스트들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그런데 만일 그러한 민족 가운데 자신의 민족이 아니 라 다른 외국 민족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선전하며, 34


자기 동족들에게 이러한 ‘세계적 민족(мировой народ)’에 게 완전히 동화하기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명 이러한 선전 속에는 어떠한 자기중심주의도 없 다. 반대로 이것은 최고의 탈중심주의(эксцентризм)이다. 따라서 쇼비니스트를 비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러 한 선전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의의 본질 자체가 그것을 전파 하는 개인보다 덜 중요할 수는 없다. 만일 A 민족의 일원이 A 민족이 B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선전한다면, 이것은 명백 히 쇼비니즘이며 자기중심적인 심리가 발현된 것이다. 이러 한 선전은 B 민족이나 A 민족으로부터 당연한 저항에 직면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B 민족의 일원이 A 민족의 일원 의 의견에 가담한 것이라고 해서 과연 모든 사태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쇼비니즘은 쇼비니 즘으로 남는다. 이 모든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활동 인물은 물론 A 민족의 일원이다. 예속시키겠다는 의지, 즉 쇼비니 즘적인 이론의 본질이 그의 입술로 표현된 것이다. 반대로 B 민족의 일원의 목소리가 더 클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는 더 작은 의미를 갖는다. B 민족의 일원은 단지 A 민족 일 원의 논거를 믿고, A 민족의 힘을 확신하고, 스스로를 이끈 것이며, 아니면 단순히 매수된 것이다. A 민족의 일원은 자 35


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B 민족의 일원은 다른 이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A는 B의 입술을 빌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B 민족의 일원이 선전하는 것 역시 위장한 쇼비니즘으로 볼 충분한 근거가 있다. 사실 이러한 모든 고찰들은 전반적으로 그다지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것들은 많은 시간을 바쳐 논리적으로 증명할 가치가 없다. 명백히 어떤 사람이 자기 동족에게 접근해서 민족 고유의 신앙, 언어, 문화를 버리고 이웃 민족, 예를 들 어 X 민족에게 동화되어야 한다고 선전한다면, 당연히 사람 들은 이 사람을 정신 나간 사람이거나 아니면 X 민족에게 우롱당해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을 상실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다. 아니면 선전의 대가로 어떤 포상을 받고 파견된 X 민족의 밀사로 여길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이 신사 의 등 뒤에서 그가 X 민족 출신의 쇼비니스트라고 의심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선전에 대해 그것이 동족에게서 기 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우리는 그것이 우월하 다고 선전되는 민족에게서 기원했음을 직시한다. 그래도 우 리는 이러한 선전을 부정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 한 태도를 취하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서 어떠한 정상적인 민족도, 특히 국가를 형성한 민족이라면, 동화라 는 이름으로 자기 민족의 외형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을 묵 36


과할 수 없는 것이다. 슬라브인, 아랍인, 터키인,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 가운 데 이미 많은 코즈모폴리턴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 는 민족적 특수성을 거부하고, 모든 비로마-게르만적인 문화를 경멸하면서 심지어 그들의 유럽 동지들보다 훨씬 더 정통을 고수한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슬라브인들에 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친게르만적 선전에 대한 약간의 힌 트를 주는 것으로도 충분할 텐데, 어떻게 해서 범로마-게 르만적 쇼비니즘이 슬라브인들에게서도 명백한 성공을 거 두는가? 어찌해서 러시아 지식인은 자신이 독일의 ‘융커ᐨ민 족주의자들(юнкерыᐨнационалисты)’의 도구로써 사용될 수 있다는 견해를 격하게 거부하는가? 수수께끼의 해답은 용어들의 최면술에 있다. 앞에서 얘 기한 것처럼 로마-게르만인은 오직 그들만이 ‘인류’라고, 자신의 문화만을 ‘보편적 인류 문명’이라고, 마침내 자신의 쇼비니즘을 ‘코즈모폴리터니즘’이라고 우직하게 믿어왔다. 이러한 용어를 가지고 그들은 모든 실제적인 민족지학적인 내용을 숨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이러한 모든 개념은 다른 종족 집단의 구성원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 유럽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비로마-게르만 37


민족들 사이에 확산된 것은 순전히 그릇된 해석 때문이다. 로마-게르만의 쇼비니스트들의 선전에 넘어간 이들은 ‘인 류’, ‘보편적 인류 문명’, ‘세계 진보’ 등의 말에 속은 것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안에 매우 특정하고도 편협한 인종학적인 개념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로마-게르만인들에게 우롱당하는 비로마-게르만 민 족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아야만 한다. 그들이 보편적 인류 문명의 형태로 가져다 놓은 문화가 실제로 단 지 로마-게르만 민족의 특정한 종족 집단들의 문화라는 것 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통찰을 통해 비로마-게르 만 민족의 지식인들은 자기 민족문화에 대한 태도를 상당히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인류 보편적 이상(실제로 는 로마-게르만의 이상)의 이름으로 자기 민족에게 타 문 화를 강요하고, 또한 민족적 독창성을 말살하려고 애쓴 것 이 옳은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로마-게 르만 민족의 지식인들은 단지 로마-게르만인들이 문명화 된 인류라는 칭호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원숙하고 도 논리적으로 탐구한 후에야 비로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즉 로마-게르만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또는 받아들 이지 않는 것은 단지 다음의 질문에 답한 후에야 가능할 것 38


이다.

1. 로마-게르만 문화가 현재 존재하고 있거나 또는 과 거 언젠가 존재했던 다른 모든 문화보다 완전하다는 것 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2.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이 창조한 문화에 완전히 편입 될 수 있는가? 더욱이 두 민족이 인류학적으로 서로 섞 이지 않고도 그러한 편입이 가능한가? 3. (편입이 가능하다면) 유럽 문화에 편입되는 것이 선 인가? 악인가?

유럽 코즈모폴리터니즘과 범로마-게르만적 쇼비니즘 의 본질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 해야 하며, 여하간 이것들에 답해야만 한다. 단지 이러한 모 든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긍정적인 경우에만 전반적인 유럽 화가 필요한 것이며,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답변 이 부정적인 경우에는 이러한 유럽화는 기각되어야만 하며,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

4. 전반적인 유럽화는 불가피한 것인가? 5. 어떻게 유럽화의 부정적인 영향들과 맞서 싸울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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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까?

앞으로 우리는 이상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해 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이 올바르고, 무엇보다 유 익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독자들을 자기중심적 편 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시간으로 초대해야만 하며, ‘보편적 인류 문명’이라는 우상을 거부하고, 로마-게르만 학문의 특징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야만 한다. 물론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편견은 유럽식으로 교육받은 모든 사람들의 인식 속에 아주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선입견을 거부하는 것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 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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