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의 기수_맛보기

Page 1

백마의 기수



이 이야기는 내가 50여 년 전에 증조모님인 시정대신(市政 大臣) 페더즌 부인 집에서 그분의 안락의자 옆에 앉아 푸른

색 표지의 잡지를 읽다가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라이프 치히 문집≫인지 ≪파페의 함부르크 문집≫이었는지는 생 각나지 않는다. 그때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가 부드러운 손 으로 이따금씩 내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시던 일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몸이 떨린다. 이제 할머니나 그 시절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나는 그 후에 그 잡지들을 찾아보았지만 허탕만 쳤다. 그 래서 만약 누가 ‘그 이야기 진짜냐?’고 시비를 걸어도 사실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 은, 이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날 계기가 전혀 없었는 데도 그때부터 내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금세기 30년대의 10월 어느 오후 심한 악천후를 무 릅쓰고 북프리슬란트의 제방 위로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 라는 말로 당시의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왼쪽의 소 택지는 한 시간쯤 전에 가축들을 모두 몰아내어 황량한 모 습이었으며, 오른쪽에는 북해의 개펄이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제방에서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보일 법도 한데 검누 런 물결이 쉴 새 없이 성난 소리를 지르며 제방에 부딪쳐 가

3


끔씩 나와 말에게 더러운 물거품을 끼얹을 뿐이었다. 저 멀 리 어스레한 저녁놀 속에서 하늘과 땅은 구분할 수가 없었 다. 이미 솟아 있는 반달조차도 두둥실 떠가는 구름에 거의 가려져 있었다. 몹시 추웠다. 나는 손이 곱아서 말고삐를 쥐 고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까마귀와 갈매기가 계속 까옥 까옥, 끼루룩끼루룩 소리를 내며 폭풍에 육지로 밀려왔지만 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땅거미가 깔리자 내 가 타고 있는 말의 발굽조차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이 라곤 보이지 않았으며, 나와 내 우직한 말을 향해 스칠 듯 날 아오는 새들 울음소리와 바람과 물이 날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솔직히 몇 번이나 편안한 숙소에 들고 싶은 마음 이 들었다. 벌써 사흘째 이런 날씨가 계속되었다. 나는 북부 지역에 사는 친한 친척의 농가에서 무리하게 신세를 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나는 여 기서 남쪽으로 서너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에 볼 일이 있었 다. 사촌과 그의 아내가 온갖 말로 설득하고 또 손수 재배한 ‘페리네테 리처드와 그랜드 리처드’라는 사과를 맛봐야 한 다고 했지만 난 오후에 그곳에서 나왔다. “바다까지나 가게 될까?” 사촌은 여전히 대문께에 서서 내 뒤에 대고 외쳤다.

4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자네 방은 그대로 두겠네!” 그리고 과연 사방이 먹구름으로 둘러싸여 칠흑같이 어두 워지고 또 돌풍까지 윙윙 몰아쳤다. 말과 함께 제방에서 날 아갈 뻔하자 순간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보처럼 굴지 마! 돌아가서 네 친구들이 기다리는 따뜻 한 집에 있어.’ 그러나 곧 돌아가는 길이 목적지보다 더 멀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외투 깃을 귀까지 올려 세우 고 계속 말을 달렸다. 그런데 둑 위에서 누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조각달이 처량한 빛을 흘리자 흐 릿한 모습이 점점 뚜렷하게 보이는가 싶더니 곧 가까이 다 가왔는데, 그는 다리가 수척한 백마를 타고 있었다. 거무스 름한 외투가 어깨 언저리에서 펄럭였으며, 옆을 스쳐 갈 때 창백한 얼굴이 타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누구일까? 뭘 하려는 것일까? 문득 나는 말발굽 소리도, 말이 헐떡이는 소리도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말을 탄 사 람이 바로 내 옆으로 가까이 지나갔는데도! 나는 그 생각을 하면서 계속 말을 달렸는데,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그가 뒤에서부터 내 옆을 지나간 것이 다. 펄럭이는 외투가 날 스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그

5


환영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내 옆을 지나가 버렸 다. 그러고는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다 갑자기 제방 안쪽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머뭇머뭇 그 뒤를 따라갔다. 그 자리에 이르러 보 니, 제방과 맞붙은 간척지 아래의 커다란 웅덩이에서 물빛 이 번뜩이고 있었다. 해일로 땅이 파이면 대개 작고 깊은 웅 덩이가 남는데 그런 곳을 여기서는 늪이라고 부른다. 물은 제방으로 막아 놓았는데도 유난스레 일렁이었다. 기수(騎手)가 물을 흐려 놓은 것 같진 않았으며, 그의 자취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나 타났다. 내 앞, 아래 간척지 곳곳에서 많은 등불이 나를 향 해 깜박이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 높은 둔덕 위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채 길게 늘어서 있는 프리슬란트식 집들로부터 새어 나오는 불빛이 었다. 내 바로 앞, 안쪽 제방의 작은 언덕에도 같은 종류의 큰 집이 서 있었는데 그 남쪽, 대문 오른쪽에는 창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너머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폭풍 속에 서도 그들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내 말은 제멋대로 둑길 을 내려가 나를 그 집 문 앞으로 데려갔다. 그 집이 주막이라 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창 앞에 가축이나 말을 매어 두 도록 두 기둥 위에 큰 쇠고리가 달린 들보를 걸쳐 놓은 울짱

6


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쇠고리 하나에 말을 매고는 현관 으로 들어서다 마주친 하인에게 말을 부탁했다. 방문 쪽에 서 떠들썩한 사람들 목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뚜렷하 게 들렸다. 나는 하인에게 물었다. “여기서 무슨 모임이라도 있는가?” “그러문입쇼” 하인이 저지독일어1)로 대답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기서는 벌써 100년도 넘게 저지독일어와 프리슬란트말을 함께 쓰고 있었다. “제방 감독관과 위원님들 그리고 다른 관계자 분들이죠! 홍수 때문이지요!” 들어가 보니 창 밑에 길게 놓인 식탁에 여남은 명 되는 사 람들이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큰 펀치 잔이 놓여 있었는 데, 풍채가 훤한 사나이가 이 자리를 주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인사를 하고 같이 앉게 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기꺼이 허락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제방을 지키시나 보군요! 바깥 날씨가 험악해요. 제방이 위험해지겠는데요!”

1) 저지독일어(Plattdeutsch): 북부 독일 방언.

7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