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행동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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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Action 인간행동 I


서론


1. 경제학과 인간행동학 경제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새로운 학문이다. 지난 200년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친숙했던 학과목들로 부터 새로운 학문들이 많이 탄생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이 탄생한 학문들은, 고대 그리스인들 의 학문 체계 속에서 미분화된 채 존재했던 것이 이제 하나 의 학문으로 분화해 독립된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학문의 영역이 보다 정밀하게 나뉘었고 또 새로운 방법이 연구에 도입되었다. 지금까지는 전혀 관심 밖이었던 분야들이 연 구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관 점에서 사물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학문의 영역 자체를 확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학을 통해서 경제학자는, 고대 그리스인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웠고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영역을 인문과학에 자리매김했다. 시장현상의 연관 이나 상호 의존의 규칙성 발견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전통적 인 학문 체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 발견을 통해서 경제학 자는 논리학, 수학, 심리학, 물리학으로, 또 생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을 만들어 냈다. 철학자들은 신이나 자연이 인류 역사에서 실현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오랫동안 열망해 왔다. 철학 자들은 이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인류의 운명과 진화의 법 칙을 탐색했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론을 사용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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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성향과 무관하게 탐구한 철학자들까지도 인류의 운 명과 진화의 법칙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전체로 서의 인류를 다루거나, 아니면 국가, 민족, 또는 교회와 같 은 전체론적 개념들을 다루었다. 그들은 그러한 전체의 행 위가 도달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목적에 대해 지극히 자의적 설정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요인 때문에 행동하는 다 양한 개인들이 전체의 냉혹한 진화가 지향했던 목표가 달성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만 했는가 하는 질문에 만족스럽게 답변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계시, 혹은 신이 보낸 예언자나 성직자들이 대신하는 신의 기적 같은 개입, 예정 조화설, 운명예정설, 또는 신화적이고 믿기 어려운 세계정 신이나 민족정신의 작용 등과 같은 궁색한 임시변통들에 의 존했다. 또 다른 철학자들은 ‘자연의 간지(奸智)’를 말하면 서, 이것이 자연이 원하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도록 인간을 유도하는 충동을 그의 마음속에 이식했다고 한다. 다른 철학자들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자연이나 신의 구상을 추측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통치의 관점 에서 인간사를 보았다. 그들은 정치적 행동의 규칙, 말하자 면 정부와 정치인의 기교를 확립하려고 했다. 대담한 사회 개혁가들은 사회를 철저하게 개혁하고 다시 건설하려는 야 심만만한 계획을 도출해 냈다. 약간 더 온건한 철학자들은 역사 경험 자료들을 수집하고 체계화하는 정도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사회적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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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진로 속에는 인간의 추론 과정과 자연현상의 연쇄적 과 정에서 이미 발견되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규칙성과 불변성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바라는 대로 인간이 사회를 조직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회 적 협동의 법칙들을 탐구하지 않았다. 만일 개혁가들이 원 하는 사회적 조건을 성취하지 못하고 그들의 이상향을 실현 하지 못한다면, 그 잘못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흠결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회문제들을 윤리의 문제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군 주와 덕망 있는 시민들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올바른 사람 들만 있다면, 이상향은 어떤 것이든 실현될지도 모른다. 시장현상 속에 불가피한 상호 의존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발견됨으로써,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폐기했다. 당황스러 웠지만 사람들은 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했 다. 사람들은 인간행동을 선과 악, 공평과 불공평, 정의와 불의의 측면과는 다른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놀 라워하면서 배웠다.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자신 들의 행동을 맞추어야 할 현상의 규칙성이 사회적 사건들의 진행 과정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지극히 자의적 기준과 주 관적 가치판단의 관점에서 어떤 사건을 승인하거나 부인하 는 검열관과 같은 태도로 사회적 사실들에 접근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우리들은 물리학자가 자연법칙을 연구하 듯이, 반드시 인간행동의 법칙과 사회적 협동의 법칙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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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야 한다. 인간의 행동들과 사회적 협동은 주어진 연관 성에 관한 과학의 연구 대상이지, 더 이상 ‘마땅히 그래야 한 다’는 규범학(normative discipline)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관점의 변화야말로 사회적 행동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지식 과 철학에서도 엄청난 결과를 낳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렇지만 100년 넘게, 추론 방법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 가 가져온 결과는 극히 제한되었다. 왜냐하면 그 방법들이 오로지 인간행동의 전체 분야 중에서 좁은 부분, 즉 시장현 상에만 관련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전파 경제학자들 은 그들의 조사 연구 과정에서 그들이 미처 제거하지 못한 장애물, 즉 가치의 명백한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가치 이론은 결함이 있었으며, 그 가치 이론 으로 인해 그들은 그들의 과학 영역을 제한했다. 1800년대 후반까지도 정치경제학은 여전히 ‘경제적’ 측면에서 본 인 간행동의 과학, 즉 부와 이기주의 이론으로 남아 있었다. 정 치경제학은−아주 불만족스럽게도−이윤 동기라고 표현 된 것이 인간의 행동을 활성화한다는 정도까지만 인간의 행 동 문제를 다루었다. 그 외에 다른 인간행동도 있지만, 그것 을 다루는 것은 다른 과목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고전파 경 제학자들이 처음 시작했던 사고의 전환을 정점에 올려놓은 것은, 시장가격 이론을 인간 선택 일반 이론으로 바꾸었던 현대 주관주의 경제학(subjectivist economics)이었다. 고전파적 가치 이론을 주관적 가치 이론으로 전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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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장교환에 대한 덜 만족스러운 이론을 보다 만족스러운 이론으로 대체한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 들은 오랜 기간 동안 깨닫지 못했다. 선택과 선호의 일반 이 론은 캉티용, 흄, 애덤 스미스로부터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 는 경제학자들이 경계를 정했던 경제 문제 영역의 지평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 그리고 상품과 물질 적 후생의 개선을 위해 행하는 인간의 투쟁을 단순히 ‘경제 적 측면’에서 본 이론 이상의 것이었다. 선택과 선호의 일반 이론은 모든 종류의 인간행동을 다루는 학문이다. 선택하 는 것이 모든 인간의 결정을 좌우한다. 사람들은 선택을 할 때 단지 여러 가지 물질적인 것들과 서비스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가치는 선택 대안 앞에 놓인다. 모든 목적과 수단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관념적인 것 이든, 고상한 것이든 생활필수품이든, 기품 있는 것이든 천 한 것이든, 한 줄로 정렬되어 있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을 제쳐 두는 결정에 따르게 되어 있다. 인간이 지향 하고 싶거나 회피하고 싶은 어떤 것도 등급 분류나 선호의 고유한 척도에 따라 정렬되지 않는 것은 없다. 현대 가치 이 론은 과학의 지평선을 넓혔고, 경제 연구의 영역을 확대시 켰다. 고전학파의 정치경제학에서 벗어나 인간의 행동에 관한 일반 이론, 즉 인간행동학이 탄생했다.1) 경제적 문제

1) ‘인간행동학(praxeology)’이라는 용어는 1890년에 에스피나(Espinas)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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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혹은 교환학적(catallactic)2) 문제들은 더 일반적인 과학 속으로 편입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끊길 수 없는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경제학 고유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도 선 택이라는 행동들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학 은 여태까지는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분야였지만, 이제 보다 일반적 학문인 인간행동학의 한 부분이 되었다.

2. 인간행동에 대한 일반 이론의 인식론적 문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과학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 처럼 보였다. 전통적 지식 체계 속에서는 그것이 낯선 존재 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분류할지, 그것 에 적절한 자리를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고 또 이 문제를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들 은, 경제학을 지식 목록에 포함시킨다고 해서 총체적 틀을 재정비하거나 확장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의 논문 <과학기술의 기원(Les Origines de la technologies)>(≪Revue Philosophique≫, 15년차, XXX), pp.114∼ 115, 그리고 같은 제목으로 1897년 파리에서 발간된 그의 책을 참조하라. 2) ‘교환학, 즉 교환의 과학(Catallactics or the Science of Exchanges)’이란 용 어는 와틀리(Whately)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의 책 ≪정치경제학개 론 강의(Introductory Lectures on Political Economy)≫(London, 1831), p.6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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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편람 체계가 완전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만일 경제학이 기존의 학문 체계 분류에 들어맞지 않았다면, 그 잘못은 경제학자들이 문제들을 다루는 데 적용한 방법이 만 족스럽지 못한 데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경제학의 본질, 영역 그리고 논리적 성격에 관한 논의를 단지 현학적인 교수들의 학자적 트집일 뿐이라고 격하하는 것은 이런 논의가 가진 의미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현학적인 교수들이 가장 적절한 절차적 방법론이 무엇인가에 관해 공리공담을 하는 동안에도, 경제학 그 자 체가 이러한 한가한 논쟁과는 상관없이 조용히 제 갈 길을 갔다고 하는 것도 널리 퍼지긴 했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오 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과 자칭 ‘호엔촐레른 왕가의 지식 경호대’인 프러시아 역사학파 간의 방법론 논쟁, 그리고 클 라크(John Bates Clark)학파와 미국의 제도주의학파 간의 논쟁에서는, 어떤 종류의 절차가 가장 성과가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걸려 있었다. 실제 쟁점은 인간 행동과학의 인식론적 기반, 그리고 그것의 논리적 정당성 이었다. 인간행동학적 사고를 이상하게 보는 인식론적 체 계로부터 출발해, 또한−논리학과 수학을 제외하고는−오 로지 경험적인 자연과학과 역사만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하 는 논리로부터 출발해, 많은 저자들은 경제 이론의 가치와 유용성을 부인하려고 했다. 역사주의는 경제학을 경제사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리고 실증주의는 경제학을 뉴턴 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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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논리 구조나 유형을 채택하는 환각적 사회과학으로 대체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들 두 학파 모두 경제사상의 성과 물 모두를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경제학자들은 이 모든 공 격에 침묵으로 일관하기가 어려웠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이성에 대한 전면 부정론(nihilism)이, 경제학을 이렇게 도매금으로 비난한 근본주의를 곧바로 추 월했다.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 할 때 인간 마음에 있는 논리 구조가 단일하고 불변이라는 점을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간주해 왔고, 모든 과학적 탐구가 이러한 가정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저자들은 경제 학의 인식론적 성격에 관해 논쟁하면서 인간 역사상 처음으 로 이 전제까지도 부인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기를, 인간의 사고는 그의 계급적 소속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사 회계급은 자신만의 논리를 가진다. 사상의 산물은 그 사상 가의 이기적 계급 이해의 ‘이데올로기적 위장’일 뿐이다. 철 학과 과학 이론의 실체를 벗겨 내고 그것들의 이데올로기적 공허함을 폭로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의 과제다. 경제학은 ‘부르주아’의 미봉책이고, 경제학자들이란 자본에 대한 ‘아첨꾼들’이다. 사회주의자들 의 유토피아인 계급 없는 사회만이 이 이데올로기적 거짓말 들을 진실로 대체할 것이다. 이러한 다중논리주의는 또한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도 가르쳐 왔다. 역사주의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논리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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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역사의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속에서 변화되기 쉽다 고 주장했다. 인종적 다중논리주의는 각 인종에게는 그 인 종 고유의 논리가 있다며 고유 논리를 할당해 주었다. 마지 막으로 비합리주의가 있는데, 이는 이성 그 자체가 인간의 행위를 결정짓는 비합리적인 힘들을 밝혀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학설들은 경제학의 범위를 넘어서 더 진군했다. 이 학설들은 경제학과 인간행동학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식 과 인간의 추론 과정 일반 모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 학설들은 경제학은 물론 수학이나 물리학에 대해서까지 도 언급했다. 그러기에 이 학설들을 논파하는 과제는 어떤 하나의 분과적 지식 부문에 맡겨질 것이 아니라 인식론과 철 학에 맡겨져야 할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면, 인식론적 문 제들에 개의치 않고, 또 다중논리주의나 비합리주의가 제기 하는 반대에도 괘념치 않고, 조용히 연구를 지속하는 일부 경 제학자들의 태도가 외관상으로는 정당한 양 꾸며진다. 물리 학자들은 누군가 그들의 이론을 부르주아, 서구인 혹은 유태 인의 이론이라고 낙인을 찍어도 괘념치 않는다. 똑같은 방식 으로라면 경제학자도 비난이나 중상을 무시해야 했다. 경제 학자도 개들이 제멋대로 짖도록 내버려 두고 그들이 캥캥거 리는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했다. 스피노자의 금언 을 상기시키는 것이 경제학자들에게 그럴듯해 보인다. “정 말이지, 마치 빛이 스스로와 어둠을 가르는 것처럼, 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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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와 거짓에 대한 기준을 설정한다.” 그러나 경제학이 처한 상황은 수학과 자연과학이 처한 것 과 똑같지는 않다. 다중논리주의와 비합리주의가 인간행동 학과 경제학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비록 다중논리주의와 비 합리주의가 일반적으로 모든 지식 분야에 관해 언급하고 있 으나, 그들이 실제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행동과 학이었기 때문이다. 다중논리주의와 비합리주의는, 과학 연 구가 모든 시기, 모든 인종, 모든 사회계급의 사람들에게 언 제나 타당한 결과를 이루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라 고 말한다. 그들은 특정 물리학, 생물학 이론들을 부르주아 적이라거나 서구적이라고 경멸하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그 러나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낙인찍었 던 학설들을 적용할 필요가 생기면, 그때는 그들은 자신이 그 학설들을 비난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소련의 과학기술은 부르주아의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의 모든 결과를, 마치 모든 계급에게 유효한 것처럼 활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나치정권의 기술자들과 의사들은 ‘열등한’ 인종이나 국민들의 이론, 발견, 발명들을 활용하는 것을 경멸하지 않았다. 모든 인종, 국민, 종교, 언어 집단, 그리고 사회계급의 사람들의 행 위야말로, 논리학, 수학, 그리고 자연과학에 관한 한 그들이 다중논리주의와 비합리주의 학설을 지지하지 않고 있음을 명백히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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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논리주의, 역사주의, 비합리주의 학설이 발달한 주요 동 기가 경제정책 결정 시 경제학의 가르침을 무시할 것을 정 당화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 인종주의 자, 민족주의자, 그리고 국가주의자들은 경제학자들의 이 론을 반박하고 겉만 그럴싸한 자신들의 학설들이 옳다는 것 을 증명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 같은 좌절 때문에 그들은 세속적인 행동에서나 과학적인 연 구에서 인간의 추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논리적·인식론적 원리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들의 반대를 단순히 그들을 고취한 정치적 동기에 근 거해서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어떤 과학자 도, 자신에 대한 비평가들이 열정이나 당파적 편견으로 이 미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들에 대한 부인이 근거 가 없는 것이라고 미리부터 단정할 권리가 없다. 과학자라 면 모든 비판의 잠재적 동기나 배경을 전적으로 묻지 말고 그에 대해 답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학의 정리들이 생 활 속에서는 도저히 실현되지 못할 가설적 가정 내에서만 타당하며, 따라서 현실을 정신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그 정리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흔히 주장하는 견해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용납할 수 없다. 몇몇 학 파들이 이러한 의견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전적으 로 곡선을, 그리고 방정식을 작성하는 일을 조용히 계속한 것은 이상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 전개가 가지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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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논리 전개가 실제 생활 및 행동 의 세계와 가지는 연관성에 대해서 괘념치 않았던 것이다. 이는 물론 지지받을 수 없는 태도다. 모든 과학 탐구의 첫 번째 과제는 여러 진술들이 타당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 든 조건과 가정에 대해 철저히 기술하고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경제 연구를 하기 위한 모델이나 전범 으로 삼는 것은 실수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를 범했던 학자 들의 경우 최소한 한 가지 사실은 알았어야 했다. 즉 어떤 물리학자도 물리학 정리의 가정들과 조건들을 규명하는 일 이 물리학 연구 범위 바깥에 있다고 믿은 적이 없었다는 점 이다. 경제학이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요 문제는, 경제 학의 진술들이 그 연구 대상으로서 정신적으로 파악할 인간 행동의 현실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단명했을 뿐 아니라 이미 사라져 버린 자유주의 시기의 서구 자본주의체제에서만 경제학의 가르침이 타당 했다는 주장을 철저하게 다루는 일이 경제학에 맡겨졌다. 경제 이론의 진술들이 인간행동이라는 문제들을 규명하는 데 유용하다는 점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제기된 반대들을 검토하는 것도, 다른 학문이 아닌 경제학이 해야 할 일이다. 경제사상의 체계도 비합리주의, 역사주의, 범물리학주의 (panphysicalism), 행태주의 그리고 모든 종류의 다중논리 주의 측으로부터 가해지는 어떠한 비판들에도 견뎌 낼 수 있는 방식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경제학적 노력이 맞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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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무용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매일같이 새로운 주 장들이 개진되고 있음에도, 경제학자들이 짐짓 이 모두를 무시하는 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태도다. 우리는 경제학적 문제들을 전통적인 틀 내에서는 더 이 상 충분히 다룰 수 없다. 인간행동에 관한 일반 이론, 즉 인 간행동학이라는 견고한 기반 위에서 교환학 이론을 수립하 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이론을 정립하게 되면, 우리는 경 제학에 대한 많은 잘못된 비판들에 대해서도 방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적절하게 알려지지도 못했고 여전 히 만족스럽게 해결되지도 못한 많은 문제들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제들 중에는 특히 경제계산이라는 근본 적인 문제도 있다.

3. 인간행동에 관한 경제 이론과 실제 통상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을 후진적이라고 비난하 고 있다. 물론 우리의 경제학 이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 은 지극히 명백하다. 인간의 지식에서 완전이라는 것은 없 으며, 인간이 이룩해 놓은 다른 어떠한 성취에서도 완전이 라는 것은 없다. 인간은 전지(全知)하지 못하다. 지식에 대 한 우리의 갈증을 완전히 만족시킨 듯이 보이는 아무리 정 교한 이론도, 언젠가는 새로운 이론에 의해 수정되거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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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이론으로 대체된다. 과학은 인간에게 절대적이고 최종 적인 확정성을 주지는 못한다. 단지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과 널리 퍼진 현재의 과학 지식의 수준 안에서만 확신을 줄 뿐 이다. 과학적 체계는 지식에 대해 끝없이 진행되는 탐색의 과정에서 지나치는 하나의 역(驛)일 뿐이다. 과학적 체계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모든 노력에 내재해 있는 불충분성에 영 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사실들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날의 경제학이 후진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단 지 경제학이 살아 있는 것임을,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불 완전과 변화 모두를 내포함을 의미한다. 이른바 경제학의 후진성에 대한 비난은 두 개의 서로 다 른 관점에서 경제학에 반대해 제기된 것이다. 한편에서는 경제학이 자연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실험실 내에서 행하는 방법과 절차를 적용하지 않는 다는 이유에서 비난한 자연과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 있다. 이들의 이런 생각이 안고 있는 오류를 밝히는 것도 이 책의 과제 가운데 하나다. 이 서론에서는 그들의 심리적 바탕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속 좁은 사람 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르면 이렇게 다른 모 든 측면들을 헐뜯는다. 우화 속에서 낙타는 다른 동물들이 등에 혹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모든 동물들과 달 리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인 것처럼 여기며, 루리타니아 사 람들은 자신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라퓨타니아 사람들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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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한다.3)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는 사람은 실험실만을 유일 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여기며, 또한 미분방정 식만을 과학적 사고의 결과를 표현하는 유일하게 건전한 방 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이 인간행동의 인식론적 문 제들을 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들에게는 경제학이 란 일종의 역학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조건들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틀 림없이 사회과학들에 뭔가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200∼300년 동안 자연과학은 놀 라운 성과를 거두었고, 이 성과를 실제적으로 활용해 일반 적인 생활수준을 유례없이 개선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 비 판가들이 말하길, 사회과학은 사회적 조건들을 더 만족스 럽게 만들어야 하는데도 그 과제를 달성하는 데 완전히 실 패해 왔다. 사회과학은 곤궁과 기아, 경제 위기와 실업, 전 쟁과 전제정치를 근절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결실을 맺지 못했으며, 행복과 인류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 도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사회과학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은, 과학기술적 생산 방법의 엄청난 진보와 그 결과물인 부와 복지의 증대가 경

3) (옮긴이 주) 루리타니아는 영국의 소설가 앤서니 호프(Anthony Hope)의 작품에 나오는 유럽 중부의 가공의 낭만적인 왕국이고, 라퓨타니아는 스위 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부도(浮島) 라퓨타를 변형한 것이다. 미제스는 임의의 두 나라의 이름으로 이들의 이름을 가져다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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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의 가르침을 실제로 적용한 자유주의적 정책들을 추구 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낡은 법률, 관습, 그리고 기술의 진보에 대한 편견으로 이루 어진 장애물을 제거하고, 아울러 길드(동업조합)의 구속, 정부의 감독, 여러 종류의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개혁가나 혁신가의 천재성을 해방시켰던 것이야말로 바로 고전파 경 제학자들의 사상이었다. 정복자나 착취자들의 위세를 줄이 고 사업 활동으로부터 도출되었던 사회적 편익을 입증해 낸 사람들도 고전파 경제학자들이었다. 만약 경제학자들이 자 본주의 이전 시대의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제거하지 않았다 면, 현대의 위대한 발명들 중 어떤 것도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보통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것도 경제학자의 학 설이 초래했던 이데올로기 혁명의 소산이다. 경제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낡은 교리들을 타파했다. “더 좋고 더 싼 물건 을 생산함으로써 경쟁 상대를 앞지르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 고 정당하지 못하다. 전통적인 생산 방법으로부터 벗어나 는 것은 사악하다. 기계는 실업을 야기하므로 악이다. 효율 적인 사업가가 부자가 되는 것을 막고, 효율적인 사업가와 의 경쟁으로부터 덜 효율적인 사업가를 보호하는 것이 시민 정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정부의 강제를 통해, 혹은 다 른 사회세력으로부터의 강압을 통해 기업가의 자유를 제한 하는 것이 국민의 후생을 증진하는 적절한 수단이다.” 영국 의 정치경제학과 프랑스의 중농주의가 현대 자본주의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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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열어 주었다. 대중들에게 편익들을 수확하게 만들었던 응용 자연과학의 진보가 가능해진 것도 바로 영국의 정치경 제학과 프랑스의 중농주의 덕이다. 우리 시대의 잘못된 점은,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경제적 자유 정책이 지난 200년 동안의 과학기술 진화에서 수행했 던 역할을 대체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산 방법의 개선이 우연하게 반간섭주의와 동시대에 일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오류의 희생양이 되었다. 사람들은 마 르크스주의의 신비에 현혹된 나머지 현대 산업주의를 이데 올로기의 요소들과는 무관하게 신비로운 ‘생산력들(productive forces)’이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고전파 경제학이 자본주의를 발흥시킨 요인이라고 믿기보 다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결과물인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라고, 즉 자본주의 착취자의 불공정한 요구를 방어하기 위 해 구상된 학설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폐지 해도, 즉 시장경제와 자유기업을 사회주의적 전체주의로 대체해도 과학기술의 진보가 손상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본가들의 이기적 관심을 지키기 위해 길 가운데 에 설치된 방해물인 자본주의를 없애야 기술 진보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파괴적 전쟁과 사회적 해체로 얼룩진 이 시대의 특징적인 성격이 바로 경제학에 대한 반동이다. 토머스 칼 라일은 경제학에 ‘우울한 과학’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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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스는 경제학자들에게 ‘부르주아계급의 아첨꾼’이라는 낙 인을 찍었다. 이 협잡꾼들은−그들이 특허 낸 약과 지상낙 원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찬양하면서−경제학을 ‘정통’, ‘반 동’이라고 멸시하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민중 선동가들은 자신들이 경제학에 승리를 거두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실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경제학에 대한 그들의 경멸과 ‘안락의자(armchair)’ 경제학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자랑스러워한다. 지난 수십 년간의 경제정책들은 어떠한 종류건 건전한 경제 이론들조차 냉소하고 오히려 경 제학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사이비 학설을 찬양하는 정서의 산물이었다. 소위 ‘정통’ 경제학은 거의 모든 나라의 대학에 서 제지당했고, 이에 따라 지도적인 국정 담당자나 정치가, 저작자들은 사실상 정통 경제학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경제 상황이 불만족스럽다고 해도 그것을 통치자나 대중들 모두가 멸시하고 무시했던 사회과학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 는 것이다. 지난 200년간 백인들이 발전시켜 왔던 현대문명의 운명 이 경제학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도 강조되어 야만 한다. 경제정책 문제에 대한 경제학적 가르침의 적용 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을 압도했기 때문에, 이 문명의 생성 과 존립이 가능했다. 만약 각 민족들이 어쩌다 경제적 사고 를 거부하는 학설의 주술(呪術)에 사로잡혀 앞으로 계속 추 구한다면, 그 문명은 장차, 또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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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이론적 과학이며, 이론적 과학답게 어떠한 가 치판단도 삼간다는 것은 옳다. 사람들이 무슨 목적을 지향 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 경제학의 과제는 아니기 때 문이다. 경제학은 선택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용할 수단 에 대한 과학이지, 확실히 선택할 목적에 대한 과학이 아니 다. 궁극적 결정, 가치판단, 그리고 목적의 선택은 어떠한 것이든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과학은 인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과학은 단 지, 인간이 어떤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길 원한다면 그가 어 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 줄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과학이 정말 보잘것없게 보이 는 것 같다. 있음(is)에만 연구를 국한하고, 가장 숭고하고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가치판단은 표현하지 못하는 과학이 야말로 삶과 행동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이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 틀린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를 타 파하는 것도 이 책 자체의 목적 중 하나이며, 서론에서 끝낼 과제가 아니다.

4. 요약 왜 이 책이 경제 문제들을 인간행동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 는 광범위한 틀 안에서 다루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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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앞서 이런 언급들이 필요했다. 현 단계에서는 사회조직 의 기본적인 현안에 관해 경제학적 사고와 정치학적 토론을 할 때 모두, 교환학 고유의 문제만을 따로 분리해서 다룰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들은 인간행동에 관한 일반 이론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며, 또 반드시 그렇게 다루어져야 하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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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인간의 행동


1장 행동하는 인간

1. 목적을 추구하는 행동과 동물적 반응 인간의 행동은 목적을 추구하는 행동이다. 혹은 다음과 같 이 말할 수도 있다. 행동은 현재 작동하고 있으면서 다른 매 개물로 변형된 의지다. 행동은 목적과 목표를 지향하는 것 이다. 행동은 자극에 대해, 그리고 환경조건에 대해 자아가 의미 있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행동은 인간의 삶을 결정 하는 세상의 조건에 인간이 의식적으로 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구들이 아마 기존의 정의를 더 분명하게 하고, 오 해의 소지를 없앨 수는 있다. 그러나 정의는 그 자체로 적절 하며, 주석을 붙여 보완할 필요는 없다. 의식적 혹은 의도적 행동은, 무의식적인 행동, 즉 육체의 세포와 신경이 어떠한 자극에 대해 반사적으로 또는 무의식 적으로 하는 반응과는 첨예하게 대비된다. 사람들은 때때로 의식적인 행위와 인간의 육체 내에서 작용하는 힘들의 무의 식적인 반응 사이의 경계가 다소 애매하다고 생각하기도 한 다. 어떤 구체적 행위가 자발적인 것인지 혹은 무의식적인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는 점에서는 이러한 생각 이 정확하다. 그러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구별은 뚜렷하 며 어느 쪽인지 분명히 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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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기관 및 세포의 무의식적인 움직임도 행동하는 자아에게는 외부 세계의 다른 어떠한 사실 못지않게 하나의 여건이다. 행동하는 인간은 날씨, 이웃의 태도 등 다른 여건 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육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도 감안해야 한다. 물론 목적의식적 행동이 육체적 요소의 작 용을 중화하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몸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때때로 그의 의지의 힘으로 질병을 극복하고 선천적 혹은 후천적 체질의 결함을 상쇄하며 반사적 작용들을 억누르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 한, 목적의식적 행동의 범위는 넓어 진다. 만일 사람이 세포 및 신경중추의 무의식적 반응을 통 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제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행동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목적의식적이다. 우리가 다루는 과학의 영역은 인간의 행동 그 자체이지, 행동으로 귀결되는 심리적 사건이 아니다. 인간행동의 일 반 이론, 즉 인간행동학을 심리학과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심리학의 주제는 일정한 행동으로 나타나거나 혹 은 일정한 행동을 초래할 수 있는 내적 사건들이다. 인간행 동학의 주제는 행동 그 자체다. 이것은 또한 잠재의식이라 는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인간행동학의 관계를 정해 준다. 정신분석학 역시 심리학으로서, 행동을 탐구하는 것이 아 니라 일정한 행동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힘들 및 요소들을 연구한다. 정신분석학의 잠재의식은 심리학의 범주이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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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동학의 범주가 아니다. 하나의 행동은, 그것이 명료한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든, 혹은 깊숙한 의식의 심층에서 의 지를 지휘하는 잊혔던 기억이나 억눌렸던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든 간에, 그 행동의 본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 는다. 잠재의식적 충동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건,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관찰자에게는 얼핏 무의미해 보이 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신경쇠약 환자이건, 이들은 모두 행 동한다. 즉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목적 을 지향하고 있다. 신경쇠약환자나 정신병자의 행동조차도 의미가 있음을 밝혀 준 것은 정신분석학의 업적이다. 스스 로를 정상적이고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에게는, 신경쇠약 환자나 정신병자들이 목적을 선택할 때 사용한 추론 과정이 황당무계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들이 목적의 달성과 상충되어 보인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역시 행동하고 있으며 목적을 지향하 고 있음을 밝힌 것은 정신분석학의 업적이다. 인간행동학에서 사용되는 ‘무의식적(unconscious)’이라 는 용어와, 정신분석학에서 적용되는 ‘잠재의식적(subconscious)’ 및 ‘무의식적’이라는 용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고 및 연구 체계에 속한다. 다른 학문 분야 못지않게 인간 행동학도 정신분석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있다. 그럴 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인간행동학을 정신분석학으로부터 구별하는 경계선을 알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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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만이 단순히 선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사물이나 사건들을 피할 수 없거나 또는 피할 수 없을 것이 라고 믿어지는 상황에서도 선호를 보인다. 그래서 사람은 비보다 햇살을 선호하며, 태양이 구름을 쫓아 버리기를 바 랄 수도 있다. 오로지 소망하고 희망하기만 하는 사람은 사 건의 진행 과정이나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능동적으 로 개입하지 못한다. 그러나 행동하는 인간은 선택하고 결정 하며,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두 가지 모두 동시에 가질 수 없을 때, 사람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한다. 그러므로 행동은 항상 취사선택을 수 반한다. 소망과 희망을 표시하는 것, 그리고 계획된 행동을 공표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떤 일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인 한 행동의 형태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와 관 련된 행동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공표하고 권 고하고, 거부한 행동들과는 동일하지 않다. 행동이란 실물 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총체적 행위이지, 계획은 되었으 나 실천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그 사람의 말이 아니다. 다른 한편, 행동은 노동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행동이란 목 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사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용 되는 수단 중의 하나가 행동하는 인간의 노동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특별한 조건에서는, 요구되는 모든 것 은 한마디 말뿐이다. 명령하거나 금지시키는 사람은 노동 을 하지 않고도 행동할 수 있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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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그리고 미소를 짓거나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이 하나의 행동이 될 수 있다. 소비하고 즐기는 것은, 소비 하고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억제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행동이다. 인간행동학은 따라서 ‘능동적인’ 혹은 정력적인 사람과, ‘수동적인’ 혹은 게으른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자기의 조 건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활기찬 사람이 사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나태한 사람보다 행동을 더 하는 것 도, 덜 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가하게 있는 것 역시 하나의 행동이며, 그것 역시 사건의 진 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개입할 만한 조건이 존재 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개입하든지 개입하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사람은 행동하는 것이다. 그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또 다른 결과를 얻기 위해 개입하 는 사람 못지않게 행동을 한다. 스스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생리적 및 본능적 요소의 작동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는 사람도 역시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은 무엇을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 이기도 하다. 우리는 행동이 인간의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의 지식에 무엇을 더하지는 않는다. 왜 냐하면 의지라는 용어는 다름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상황 들 중에서 선택하고, 하나를 선호하고 다른 것은 제쳐 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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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내려진 결정에 따라 선택한 상태를 지향하고 다른 것 은 버리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인간행동의 필요조건 더 이상 어떤 행동을 초래하지도 않고, 또 초래할 수도 없는 그런 인간의 상태를 우리는 유족함 또는 만족이라고 한다. 행동하는 인간은 불만족한 상태를 좀 더 만족스러운 상태로 바꾸고 싶어 한다. 그의 마음은 그에게 좀 더 적합한 상태를 상상하고, 그의 행동은 이 바람직한 상태의 실현을 지향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하는 동기는 항상 약간의 불편 이다.4) 자기가 처한 상황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은 변화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소망하지 도 바라지도 않을 것이며, 완벽하게 행복해할 것이다. 그는 행동하지 않을 것이며, 근심걱정 없이 그저 살아가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불편함과 더 만족스러운 상태에 대한 상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세

4) 로크(Locke), ≪인간의 이해에 관한 소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Fraser 편집, Oxford, 1894), I, pp.331∼333, 라이프니 츠(Leibniz), ≪새 인간오성론(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Fammarion 편집),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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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조건이 필요하다. 즉 목적의식적 행위를 함으로써 그 것이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없애거나 최소한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가 그것이다. 이 조건이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가항력에 굴할 수밖에 없다. 그는 운명에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행동의 일반 조건들이다. 인간은 이 러한 조건에서 사는 존재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일 뿐 아니 라 그에 못지않게 행동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사람으로 태어 났으나 선천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얻은 장애로 인해 영원 히(그 용어의 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어떠한 행동에도 부적합한 사람은 사실상 인간이 아니다. 법 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으로 간주되겠지만, 그들 은 인류의 본질적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 갓 태어난 아기 역 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생아는 인간의 특성이 충분히 발달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아직 지나지 않았다. 이 진화가 끝나야 신생아는 행동하는 존재가 된다.

행복에 관해

우리는 일상적 대화를 할 때 자신의 목적 달성에 성공한 사 람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의 상태를 좀 더 적합하게 표현 하려면, 그 사람이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 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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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관용어법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오해들을 피해야 한다. 인 간행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항상 행동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 족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 개인의 가치판단만이 무엇이 더 큰 만족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며, 그 이외에 다른 기준은 없다. 이 가치판단은 사람에 따라, 또는 같은 사람이라도 때 에 따라 다르다.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또는 덜 불편하 게 느끼도록 만든 것은, 그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기준으로 해서 그 자신의 개인적·주관적 가치판단을 통해 그 자신이 수립한 것이다. 무엇이 동료 인간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판단해 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정립하는 것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물질주의와 이상주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무신론과 종교 등의 대립 명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로지 그 자신의 조 건을 개선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사람이 있지만, 이에 반 해 동료 인간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그에 대해 그 자신의 어 려움만큼, 혹은 그 이상 불편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성생활, 먹고 마시는 것, 좋은 집, 기타 물질적인 것 외에는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보통 ‘더 고고한’, ‘이상적’ 이라고 불리는 만족에 더 신경을 쓴다. 사회적 협동이라는 요구조건에 자신의 행동을 맞춰 나가길 열망하는 사람이 있 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사회생활의 규율을 무시하는 다 루기 힘든 사람도 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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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천국에서의 생활을 위한 준비에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 면, 어떠한 종교의 가르침도 믿지 않으며 전혀 종교에 영향 을 받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행동학은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다. 인간행동학이 발견해 낸 것들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 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행동에 유효하다. 인간행 동학은 수단의 과학이지 목적의 과학이 아니다. 인간행동학 은 행복이라는 용어를 순전히 형식적 의미로 사용한다. 인간 행동학에서, 인간의 유일한 목적이 행복을 얻는 것이라는 명 제는 동어반복이다. 그 명제는 인간에게 행복을 기대할 상태 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행동의 주요 동기는 항상 어떤 불편이며 그 행동의 목적은 가능한 한 그러한 불편을 없애는 것, 다시 말해 행동 하는 인간이 좀 더 행복을 느끼려는 데 있다는 생각이 행복주 의와 쾌락주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말하는 쾌락(ἀταραξία=ataraxia, 커다란 기쁨)은 모든 인간 활동이 추구하는, 그러나 아직까지 그 전체를 다 성취한 일 이 없는, 완벽한 행복과 충족의 상태다. 이러한 인식의 웅대 함 앞에서, 이 철학의 대표자들이 고통과 기쁨이라는 개념 이 가진 순수 형식 논리적 특성을 깨닫지 못했으며, 그 개념 에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육체적 의미만 부여했다고 비판 해 봤자 별 의미가 없다. 신학, 신비주의, 그리고 다양한 윤 리를 주장하는 여러 다른 학파들도, 쾌락주의가 ‘더 높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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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상한’ 기쁨을 무시했다고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반 대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학파의 핵심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행복주의, 쾌락주의 및 공리주의의 초 창기 옹호자들의 저작들은 몇 가지 점에서 분명 오해의 소 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 특히 현대 경제학자의 언어는 너무나 정확하고 직설적이어서 오해의 여지가 없다.

본능 및 충동에 관해

본능사회학의 방법으로는 인간행동의 근본 문제에 대한 이 해를 증진할 수 없다. 본능사회학파는 인간행동의 여러 가 지 구체적 목표들을 분류하고, 분류된 각각의 목표마다 그 것의 동기로서 특정한 본능을 할당한다. 인간이 마치 여러 가지 선천적 본능과 기질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보인다. 이러한 설명이 경제학 및 공리주의적 윤리의 혐오스러운 가 르침을 한 방에 제거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포이어바 흐는 이미 모든 본능이 행복을 향한 본능이라고 정확히 관 찰했다.5) 본능심리학(instinct psychology), 본능사회학의 방법은 행동의 직접적인 목표들을 자의적으로 분류하고 이 들 각각을 실재(實在)로 보고 있기에, 인간행동학에서는 하

5) 포이어바흐(Feuerbach), ≪전집(Sämmtliche Werke)≫(Bolin and Jodl 편집, Stuttgart, 1907), X,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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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동이 추구하는 목표가 어떤 불편을 제거하는 것이라 고 하는 반면, 본능심리학에서는 그것이 본능적인 절박성을 충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능학파의 옹호자들은 행동이 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합리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선천적인 힘, 충동, 본능 및 기질과 같은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다는 점 을 입증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합리주의의 겉핥기를 타파해 왔다고 확신하며, 경제학에 대해 “잘못된 심리학적 가정으로부터 도출된 잘못된 결론투성이”6)라고 경멸한다. 그러나 합리주의나 인간행동학 혹은 경제학은 행동의 궁극 적인 원천이나 목표가 적절한지를 다루지는 않으며, 추구하 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 채택하는 수단이 적절한지를 다룬다. 설사 충동 혹은 본능이 분출되어 나오는 그 깊은 곳에 대해 서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의 만족을 위해 선 택하는 수단들은 지출 및 성공에 대한 합리적 고려를 통해 결정된다.7) 감정적 충동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역시 행동하는 것이 다. 감정적 행동이 다른 행동과 다른 점은 투입과 산출에 대 한 가치판단에 있다. 감정은 평소의 가치판단을 뒤흔들어

6) 윌리엄 맥두걸(William McDougall), ≪사회심리학 개론(An Introduction to Social Psychology)≫(14th ed., Boston, 1921), p.11. 7) 미제스(Mises), ≪경제학의 인식론적 문제들(Epistemological Problems of Economics)≫(G. Reisman 번역, New York, 1960), p.52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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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다. 열정에 불타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차분하게 생각 할 때보다 목표에 대해서는 더 바람직하게 여기고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덜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다. 의심의 여 지 없이 사람들은 감정적인 상태에서도 수단과 목적에 대해 고려하고 있는데, 열정적 충동에 굴복할수록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런 고려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감정적 흥분 상태나 만취한 상태에서 범행한 사람을 다른 범죄자보 다 가볍게 처벌하는 것은 그런 지나친 행위를 고무하는 것 과 마찬가지다. 겉보기에 통제 불능인 감정에 휩싸인 사람 조차 엄격한 보복의 위협으로 제지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이 어떤 순간의 지배적 충동에 굴복한다는 가정에서 동물의 행동을 해석한다. 동물이 먹이를 구하고, 가족을 이루고, 다른 동물 혹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서 우리는 동물의 영양, 재생산 그리고 공격 본능에 대해 이 야기한다. 우리는 그러한 본능들을 선천적인 것이며 무조건 적으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사람은 만족을 아주 절박하게 추구하는 충동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될 존 재가 아니다. 사람은 그의 본능, 감정, 그리고 충동을 억제 할 수 있는 존재다. 즉 사람은 그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조절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바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불타오르 는 충동의 만족을 포기한다. 사람은 욕구의 꼭두각시가 아 니다. 사람은 그의 감각을 자극하는 모든 여성을 추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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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않는다. 사람은 입맛을 당기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우지 않는다. 사람은 죽이고 싶은 모든 사람을 때려눕히지는 않 는다. 사람은 일정한 척도에 따라 그의 욕망과 욕구를 배열 하고, 선택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행동한다. 사람을 동물 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사람이 심사숙고 해 그의 행동을 조절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금기(禁忌)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그의 충동과 욕구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이며, 또한 본능적인 욕구와 충동을 억제할 힘을 소유 한 존재다. 어떤 충동은 너무나 큰 나머지, 이를 충족함으로써 야 기될 어떤 불리함도 그 개인에게는 이를 충족하는 일을 막 을 만큼 커 보이지 않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이 경우도 역시 선택이다. 그 사람은 특정 충동에 굴복하길 선호하는 쪽으 로 결정한 것이다.8)

3. 궁극적 기정사실로서 인간행동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모든 존재의 이유와 모든 변

8) 이러한 경우에는 해당되는 두 개−충동에 굴복함으로서 기대되는 것, 그리 고 바람직스럽지 않은 결과를 피함으로써 기대되는 것−의 욕구 충족이 동 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환경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 앞의 책, pp.479 ∼49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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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이유로서 최초의 원동자에 대해, 모든 것의 출처이자 그 자체의 원인인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과 학은 더 겸손하다. 과학은 인간정신의 한계와 지식 탐구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과학은 모든 현상을 그 원천을 찾아 추적해 올라가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이러한 노력이 넘 을 수 없는 벽에 반드시 부딪히고 만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세상에는 분석될 수 없고 다른 현상으로 추적될 수 없는 현 상들이 있다. 그것들을 궁극적 기정사실(the ultimate given)이라고 한다. 과학 탐구의 진보로 인해 예전에는 궁 극적인 기정사실로 여기던 것이 이제는 이를 몇 개의 구성 요소들로 환원할 수 있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환원될 수 없고 분석될 수 없는 일부 현상, 즉 궁극적 기정 사실은 항상 남을 것이다. 일원주의(monism)는 궁극적 실재가 단 하나 있다고 하 고, 이원주의(dualism)는 두 개, 다원주의(pluralism)는 여 럿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다툴 접점은 없 다. 그런 형이상학적 토론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수준으로는 모든 사람이 만족하게 여 길 만한 답을 가지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단이 없기 때문 이다. 유물론적 일원주의는 인간의 사고와 의지가 신체 기관, 뇌세포 및 신경이 작동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생 각, 의지, 행동은 어느 날엔가 물리적·화학적 탐구 방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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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완전히 설명될 수 있을 물질적 과정을 통해서만 일어 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지지자들은 그것을 흔들릴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진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주장도 역시 형이상학적 가설일 뿐이다. 마음과 육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다. 그 학설들은 관찰된 사실과 관계없는 추측 일 뿐이다. 확실히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과정과 생리적 과정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들이 있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연관의 본성 및 작동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 을 정도다. 구체적인 가치판단들과 일정한 인간행동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분석할 여지가 없다. 그 구체적인 가치판단과 일정 한 인간행동들은 이것들이 있게 한 원인들에 절대적으로 의 존하며, 조건이 정해진다고 우리가 가정하거나 믿어도 별 문 제가 없다. 그러나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외부의 사실들이 어 떻게 인간의 마음에 구체적 행동으로 귀결되는 일정한 생각 과 의지를 만들어 내는가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방법론적 이원주의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의 현재 지식수준에서 볼 때 실증주의·일원주의·범물리 학주의의 근본 명제들은, 어떠한 과학적 기초도 갖고 있지 않으며 과학적 탐구를 위해서는 아무 의미도 없고 또 소용 도 없는 형이상학적 가정들일 뿐이다. 이성과 경험은 우리 에게 두 가지 분리된 영역, 즉 물리학적·화학적·생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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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현상이라는 외적 세계와, 생각, 느낌, 평가, 목적의식적 행동이라는 내적 세계, 두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영역을 연결해 주는 다리는−현재 우리 눈앞에는− 없다. 동일한 외부 사건이 때로는 인간에게 서로 다르게 반 응하게 하고, 서로 다른 외부 사건이 때로는 인간에게 동일 하게 반응하도록 한다. 왜 그런지 우리는 모른다. 이러한 사정을 접하면 우리는 일원주의 및 유물론의 본 질적 진술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과 학이 화학적 화합물의 생산을 일정한 요소 결합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설명하듯이, 언젠가는 자연과학이 일정한 사상, 가치판단, 행동에 관해서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성 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동안은 방법론적 이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행동은 변화를 야기하는 매개체 중의 하나다. 그 것은 우주의 활동과 변화의 한 요소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 은 과학적 연구의 정당한 대상이다. 인간의 행동은−적어 도 현재로서는−그 근원으로까지 추적해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어진 것, 즉 궁극적 기정사실 로 간주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연구되어 야 한다. 인간의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가 거대한 우주의 힘 이 작동한 효과와 비교할 때 아주 미미하다는 점은 옳다. 영 원의 관점에서, 그리고 무한한 우주라는 관점에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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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아주 미미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에게 인간의 행동과 그 행동의 부침(浮沈)은 현실적인 것이 다. 행동은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핵심으로, 그의 생명을 보 존하고 그 자신을 동식물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수단이 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노력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소멸 되기 쉽고 미미할지라도, 인간과 인문과학에게 가장 중요 한 것이다.

4. 합리성과 비합리성: 주관주의와 인간행동학 연구의 객관성 인간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항상 합리적이다. ‘합리적 행동’이라 는 말은 따라서 동어반복이며, 그렇게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의 궁극적 목적에 적용해 볼 때 합리적, 비합리적이라는 말들은 적절치 못하고 의미가 없다. 행동의 궁극적 목적은 항상 행동하는 사람의 어떤 바람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행동하는 다른 개인의 가치판단을 자신의 가치판단 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적과 의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헛된 일이다. 무엇 이 다른 사람을 보다 행복하게, 또는 덜 불만족스럽게 만들 것인가를 선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평가는 만일 그가 그의 동료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그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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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했을 것이라고 믿는 바를 우리에게 말하기도 한다. 즉 독 재자와 같은 거만한 태도로 자기 동료의 의지와 열망을 경솔 하게 재단하면서, 그 동료가 처한 조건이 비평하는 사람 자신 에게 더 맞았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만일 어느 행동이 ‘물질적인’ 또는 실질적인 이득을 희생 시키고 ‘이상적인’ 혹은 ‘보다 고고한’ 만족의 획득을 지향하 고 있으면, 우리는 보통 그 행동을 비합리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말하길, 예를 들어−어떤 때에는 찬성하고 또 어떤 때에는 찬성하지 않지만−어느 사람이 ‘보 다 고고한’−그가 갖고 있는 종교, 철학 및 정치적 신념에 대 한 충성, 또는 자기 민족의 자유와 번영 등과 같은−목적을 얻기 위해 그의 생명, 건강 혹은 부를 희생할 때, 비합리적 고 려에 의해 그의 동기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 다 고고한 목적의 추구는 다른 인간적 목적에 대한 추구보다 더 합리적이거나 덜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삶과 건강에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바람이 다른 재 화 또는 쾌적한 설비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자연 적이며 혹은 정당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다. 음식과 따 뜻한 안식처에 대한 취향은 인간 및 다른 포유류에 공통적 이며, 일반적으로 음식과 주거할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은 그의 노력을 이러한 절박한 욕구의 충족에 집중하며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옳다. 살려고 하는 충동,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충동,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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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명력을 강화할 모든 기회를 이용하려는 충동은 살 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서 찾을 수 있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이 충동에 대한 굴복이−인간에게는− 불가피한 필연은 아니다. 모든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충동, 번 식의 충동에 무조건적으로 이끌리는 반면, 인간은 심지어 이러한 충동마저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인간은 그의 성적 욕구, 살려는 의지 모두를 통제할 수 있다. 인간은 그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조건이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느껴질 때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다. 인간은 대의를 위해 죽을 수도 있으며, 자살을 할 수 도 있다. 산다는 것도 인간에게는 선택의 결과이자 가치판 단의 결과다. 풍족하게 살고자 하는 바람도 마찬가지다. 고행자가 있 다는 것, 또 자신의 신조를 따르기 위해, 혹은 자신의 위엄 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이득을 단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바로 그것도, 좀 더 실질적인 쾌적한 시설들의 추구 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의 결과라는 증거다. 물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죽음보다는 삶을, 그리고 가난 보다는 부를 좋아하지만. 육체의 생리적 요구를 충족하는 것만을 ‘자연적’이며 따라 서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인위적’이 며 따라서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의적이다.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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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른 모든 동물들처럼 음식, 주거지 및 함께 살기를 추구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만족도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 본 성의 성격적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바람과 필요보다 더 ‘고고하다’고 부를 수 있는 인 간 특유의 바람과 필요를 가지고 있다.9) 목적의 달성을 위해 선택된 수단에 적용할 때, 합리적 혹 은 비합리적이라는 말은 사용한 절차에 대한 편의성과 적합 성 판단을 함축한다. 비평가는 문제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그것이 가장 적합한가 하는 관점에서 그 방법에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인간의 이성은 무오류가 아니며, 또 한 사람이 수단을 선택하고 적용할 때 자주 잘못을 범하는 것은 사실이다. 추구하는 목적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는 기 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목적에 반하지만, 그러나−비 록 잘못된 것이라 해도−이성적인 숙고의 산물이며, 비록 효과가 없었다고 해도−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도 라는 점에서−합리적이다. 암의 치료를 위해 현대의 의사 라면 쓰지 않을 어떠한 방법들을 사용했던 100년 전의 의사 들은−현대 병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교육을 잘못 받았

9) 임금철칙에 함축되어 있는 실책에 관해서는 III권의 p.1168 이하(21장 6절 임금과 최저생계비 개념) 참조[인간은 임금철칙설이 이야기하는 동물적 수 준의 생존을 넘어서고 있다]. 맬서스학파 이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관해 서는 III권의 pp.1295∼1306(24장 2절 산아제한) 참조[인구 증가와 식량 간의 관계에서도 인간은 동물적 수준의 성적 발현을 넘어서 산아제한을 의 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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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따라서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사들이 비합리 적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아마 도 앞으로 100년 이내에 많은 의사들이 이 질병 치료에 보 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들이 현재의 우 리 의사들보다 더 효과적이지만, 더 합리적이지는 않을 것 이다. 행동의 반대말은 비합리적 행위가 아니다. 그 반대말은 신체 기관의 한 부분을 자극한 데 대한 반사적 반응이고, 그 사람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본능들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해 인간은 어느 조건에서는 반사적 반응과 행동 같은 두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독을 마셨다면 신체 기관은 해독방어력을 갖추어 반응한다. 이에 덧붙여, 해독 제를 사용하는 식으로 행동이 개입한다. 합리적 및 비합리적이라는 두 대립 명제에 관한 문제에 서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간에 차이가 없다. 과학은 항상 합 리적이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이용 가능한 모든 지 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우주현상을 정신적으로 파 악하고자 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어느 대상을 그 구성 요소로 분석하면,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만다. 인간 의 정신은 더 이상 분석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궁극적 기정 사실에 의해 제한되지 않은 종류의 지식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 지점까지 인간의 마음을 이끌고 온 과학적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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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으로 합리적이다. 더 이상 과학으로 분석될 수 없는 궁 극적 기정사실만을 비합리적 사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요즈음에는 너무나 합리적이라는 점을 들어서 사회과학 을 흠집 내는 것도 유행이다. 경제학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반론은, 경제학이 삶과 현실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성을 무 시하고 무한히 다양한 현상들을 무미건조한 합리성의 틀과 냉정한 추상성 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비난 도 이보다 더 황당할 수는 없다. 모든 분야의 지식과 마찬가 지로, 경제학도 합리적 방법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한도까지 갔다. 그런 연후에−적어도 현재 우리의 지식수준에서는−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현상, 즉 궁극적 기정사실에 직면했 다는 사실만 수립해 놓고, 경제학은 그 이상의 탐구를 멈추 었기 때문이다.10)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의 가르침은, 인간행동의 잠재적 동 기, 원인, 목표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행동에 대해 타당하다. 궁극적인 가치판단, 그리고 궁극적인 인간행동의 목적은 어 떠한 종류의 과학적 탐구에게도 궁극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분석할 여지가 없다. 인간행동학은 그러한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된 방식과 수단을 다룬다. 인간행동학의 연구 대상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10) 우리는 나중에, 경험적 사회과학들이 궁극적 기정사실을 어떻게 다루는 지를 보게 될 것이다(2장 7절 역사학의 영역과 특수한 방법론, 8절 개념과 이해, pp.9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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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인간행동과학의 주관 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행동과학의 주관주의 는 행동하는 인간이 선택한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여건으 로 삼고, 그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완전히 중립적이며, 어 떠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도 삼간다. 인간행동과학이 적 용하는 유일한 기준은 선택된 수단이 지향하는 목적 달성에 맞는지 여부다. 행복주의에서 행복을 말할 때, 그리고 공리 주의나 경제학이 효용을 말할 때, 행동하는 사람의 눈에 그 것이 바람직해 보였기 때문에 그가 지향하는 것처럼, 우리 는 이러한 용어들을 주관주의적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현대적 의미의 행복주의, 쾌락주의, 공리주의는 옛날의 물 질적 의미와 상반되게 되었고, 현대의 주관주의 가치 이론 도 고전파 정치경제학에서 설명했던 바와 같은 객관주의 가 치 이론과 상반되게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형식 논리 때문 이다. 동시에, 우리 과학이 객관적인 것은 주관주의 때문이 다. 우리 과학은 주관주의적이기 때문에, 또 우리 과학은 행 동하는 사람의 가치판단을 더 이상 비판적 검토의 여지가 없는 궁극적 여건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은 당파 및 분파들 의 모든 싸움에 초연하며, 그것은 그 자체로 모든 독단주의 학파들 및 윤리적 학설들의 충돌에 무관하며, 또한 평가, 미 리 주입된 사상과 판단으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보편적 으로 타당하며, 절대적으로, 또 완전히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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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행동의 필요조건으로서 인과성 인간은 우주 안에서 변화와 생성을 결정하는 인과관계를 발 견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행동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다. 행동하는 것은 인과성의 범주를 요구하며 또한 전제하 고 있다. 인과성에 비추어 세상을 보는 인간만이 행동에 적 합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과관계는 행동의 한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수단과 목적이라는 인간행동학의 범주는 원 인과 결과라는 인식론적 범주를 전제하고 있다. 인과성, 그 리고 현상의 규칙성이 없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추론이나 인 간의 행동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그러한 세계는 인간이 당 혹스럽게도 어떠한 방향성이나 길잡이도 찾을 수 없는 혼돈 상태일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혼돈상태의 우주라는 조건 들을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어떠한 인과관계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인간은 행동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진술의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이 관련 된 인과관계를 알 수 있을 때조차, 만일 그가 원인에 영향을 끼칠 위치에 있지 않다면 그는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과성 탐구의 원형은 다음과 같다. 내가 개입하지 않을 때 흘러갈 사건의 진행을 나의 소망에 더 잘 맞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 이 러한 의미에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사물 의 기저에는 누가 있으며 무엇이 존재하는가? 사람은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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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길 원하기 때문에 규칙성과 ‘법칙’을 탐구하게 된다. 이 이 후에야 비로소 형이상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탐구가 존재와 존속의 궁극적 원인을 찾는 탐구라고 더 폭넓게 해석되었 다. 수백 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처럼 허황되 고 무모한 생각들로부터 벗어났고, 이런저런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 사람이 어디에서 개입해야 하고 또 개입할 수 있 는가와 같은 좀 더 겸손한 문제 제기로 되돌아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인과성의 문제는 몇몇 저명한 물리 학자들이 초래했던 혼동으로 인해 약간 불만족스럽게 다루 어졌다. 철학사의 한 장을 차지할 이 불유쾌한 부분이 미래 철학자들에게 경종이 되길 바란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변화들이 있 다. 때때로 우리는 그중 일부 지식의 획득에 성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A는 모든 경우 중 70%가량 B로 귀결되고, 나 머지 경우에는 C로, 혹은 심지어 D, E, F 등등으로 귀결된 다. 이 단편적인 지식을 좀 더 분명한 지식으로 바꾸려면, A 를 그 요소들로 분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요소들 로 더 나누지 못하는 한 우리는 소위 통계적 법칙을 받아들 여야만 한다. 그러나 이 사실도 인과성이 지닌 인간행동학 적 의미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어느 분야에서 우리가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이 인과관 계의 범주를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인과관계와 불완전한 귀납이 지닌 철학적·인식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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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인간행동학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인간행동학에서는 행동하기 위해 사람이 사건들, 과정들 혹은 상태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립 할 뿐이다. 그가 이 관계들을 아는 한에서만, 그의 행동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할 때 우리는 순환논리에 빠져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 면 우리가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증거는 그 지식에 의해 인도된 행동이 기대된 결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에 의 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인과 성도 행동의 범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악순환적 입 증을 피할 수 없다. 인과성이 행동의 범주이기 때문에, 인간 행동학은 철학의 이 근본적인 문제에 어느 정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6. 나와 똑같은 다른 사람 만일 우리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과관계라는 용어를 받아 들인다면, 목적론도 다양한 인과관계 탐구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최종 원인은 으뜸 원인이다. 한 사건의 원인은 바로 어떤 목적을 지향한 하나의 행동 또는 유사 행동이라 고 간주된다. 원시인도 갓난아이도 모두, 순박한 신인동형동성설(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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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同形同性說)과 같은 태도로, 모든 변화 및 사건에 대해

이것이 마치 그들 자신이 하는 방식과 똑같이 행동하는 존 재가 행동한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정말 그럴싸하다. 그들은 동물, 식물, 산, 강, 연못, 심지어 돌과 천체까지도, 그들 자신처럼 느끼고 의욕을 갖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믿는 다. 그 이후 문화 발전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인간은 이러한 애니미즘11)적인 생각을 버렸고, 그 대신 기계론적 세계관 (역학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기계주의(역학주의)가 행 위 원리로서 너무나 만족스러운 것으로 판명된 나머지, 사 람들은 결국 기계주의가 사고 및 과학적 연구에서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리라 믿는다. 유물론과 범물리학주의는 기 계주의가 모든 지식의 핵심이며, 자연과학의 실험적 방법 과 수학적 방법이야말로 유일한 과학적 사고 방법이라고 선 언했다. 모든 변화는 역학의 법칙에 따른 동작으로 파악되 었다. 기계주의의 옹호자들은 인과성 및 불완전한 귀납 원리 의 논리적·인식론적 기초 중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 러한 원칙들은 잘 작동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건전하다. 이론이 예견한 결과가 연구실에서의 실험을 통해 나오고,

11) (옮긴이 주) 애니미즘(animism): 모든 존재와 사물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 다는 이론. 애니미즘은 우주의 모든 사람과 비슷하게 사물에도 행동할 자 격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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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과학기술이 예견한 방식으로 공장의 기계가 가동된다 는 사실은, 그들이 말하길, 현대 자연과학의 방법 및 발견이 건전하다는 점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설령 과학이 우리에 게 진리를 가져다줄 수 없다고 하더라도−그러면 진리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어쨌든 과학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 이다. 그러나 범물리학주의의 독단이 지니고 있는 공허함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 실용적 관점을 수 용할 때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과학은 마음과 육체의 관계 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자 아(Ego)가 마치 다른 자아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생각하 고 행동하는 존재인 것처럼 다른 모든 인간 존재들을 다루 는 바로 그 원리는, 일상생활에서나 과학적 탐구에서나 모 두 그 유용성을 입증해 왔다는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원리가 작동되고 있다는 점은 부인될 수 없다. 나, 즉 자아가 하듯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다른 사 람들을 보는 이런 방법이 성과가 좋다고 판명되었음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이와 달리 자연과학의 대상과 똑같은 방식 으로 사람들을 취급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가정은 그와 비슷 하게 실용주의적 지지를 받을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제기하는 인식론상의 문제는, 인과관계와 불완전한 귀납의 문제에 못지않게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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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논리와 정확하게 같다는 명제, 반드시 절대적으로 유일한 인간의 논리라는 명제, 또 한 나의 행동 범주가 다른 모든 사람의 행동 범주이며 반드 시 절대적으로 모든 인간행동의 범주라는 명제 각각에 대 해, 우리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용주의자라면 이러한 명 제들이 현실 생활에서나 과학에서 잘 작동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며, 그리고 실증주의자라면, 그가 그의 동료에 게 자신의 이론을 제기할 때 자신이 이미−암묵적으로, 그 리고 내재적으로−주체 상호 간 논리의 타당성, 그에 따라 다른 자아의 사고와 행동의 영역이라는 실체, 뚜렷한 인간 적 특성의 영역이라는 실체를 전제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2)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 한 특징이다. 그것들은 모든 인간 존재에게만 고유한 것이 다. 그것들은, 동물학적 종(種)인 호모 사피엔스의 구성원 이라는 의미를 뛰어넘는, 사람의 특징적 표지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관계를 조사하는 것은 인간행동학의 영 역이 아니다. 인간행동학으로서는, 인간의 마음에 이해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논리가 있으며, 인간의 마음에 인간적

12) 알프레트 쉬츠(Alfred Schütz), ≪사회의 현상학(Der sinnhafte Aufbau der sozialen Welt)≫(Vienna, 1932), p.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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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파악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행동 양식이 있다는 사실 을 확립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디엔가−초인간적이든 혹 은 인간보다 열등하든−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는지, 혹은 있을 수 있는지와 같 은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행동에 관한 연구에 우리의 노력을 한 정해야 한다. 인간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행동은 논리적 필 연성에 의해 조건화되어 있다. 인간정신이 우리 정신의 논 리 구조와 상이하게 논리적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 다. 인간정신이 우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범주들과 상이 한 범주들을 지닌 행동 양식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에 대한 정신적 이해를 위해 이용이 가능한 원리는 두 가지밖에 없다. 즉, 목적론과 인과성의 원리가 그것이다. 이 두 범주 중 어느 하나로 편입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정신 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 두 원리 중 어느 하나에 의해 해석 될 수 없는 사건이란 인간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거나, 신비로운 것일 뿐이다. 변화는 기계적 인과성이 작동한 결 과이거나 목적의식적 행위의 결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마음에는 제3의 다른 길이란 불가능하다.13) 이미 언

13) 카렐 엥글리스(Karel Englis), ≪경험적 인식 형식으로서의 목적론의 근 거(Begründung der Teleologie als Form des empirischen Erkennens)≫ (Brünn, 1930), p.15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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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대로, 목적론을 인과성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 은 옳다. 이 사실을 확인한다고 해서 두 범주 사이의 본질적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범기계주의적 세계관은 방법론적 일원론을 범한다. 범기 계주의적 세계관은 어떤 인지적 가치든 전부를, 또는 적어도 목적론보다 더 높은 인지적 가치를 오로지 기계적 인과성의 탓으로만 돌리기 때문에, 오직 기계적 인과성만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형이상학적 미신이다. 인지의 두 원리−인과 성과 목적론−는 모두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하며, 궁극적인 지식을 전해 주지 못한다. 인과성은 이성이 도저히 다 규명해 낼 수 없는 무한 회귀14)로 이끌고 간다. 목적론은 최초의 원동자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되자마자 곧 곤궁해진다. 두 가지 방법 어느 것도 모두 분석 될 수도 없고 해석될 수도 없는 궁극적 기정사실 앞에서 딱 멈추어 선다. 추론과 과학적 탐구는 우리 마음에 충분하게 안도감을 가져다주거나, 명백한 확실성을 가져다주거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이러한 것을 얻으려는 사람은 신념에 의지해야 하며, 교리나 형이 상학적 학설을 받아들여 그의 양심에 평정을 가져오도록 해 야 한다.

14) (옮긴이 주) 무한 회귀(regressus in infinitum): 원인을 되짚어 나가는 일 이 무한하게 끝이 안 난다는 것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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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이성과 경험의 영역을 초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동료 인간들이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유행하는 선입견과 자의적 의견 을 지지하기 위해, 이런 사실까지 무시할 자유가 없다. 우리 가 날마다 하는 경험은, 인과성의 범주가 우리의 인간 외적 (물리적) 환경의 조건을 연구하는 데 유일하게 적합한 방법 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에 못 지않게 우리 자신이 행동하듯이 우리의 동료들도 행동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해 준다. 행동에 대한 이해 를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해석과 분석의 틀, 즉 우리 자신 의 목적의식적 행위에 대한 인지와 분석이 제공해 주는 틀 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는 문제는 영 혼이 존재하는가, 혹은 불멸의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 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경험주의, 행태주의, 실증주의 가 다종다양한 영혼 이론에 대해 반론을 하는 한, 그것들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가 다 루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인간행동을 일정한 목적을 달성 하고자 하는 의미 있는 목적의식적인 행위로 파악하지 않으 면서도 과연 인간행동을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여부 다. 행태주의 및 실증주의는 경험적 자연과학의 방법을 인 간행동이라는 실체에 적용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행동 을 자극들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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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도 자연과학의 방법으로는 전혀 묘사될 수 없다. 그 자 극을 묘사하려는 어떤 시도도 행동하는 사람이 그 자극에 부 여한 의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상품을 판매용 으로 내놓는 것을 ‘자극’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러한 판매 제안에서 핵심적인 부분, 그 제안을 여타 제안들 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행동하는 측이 그 상황에 부여한 의 미와 관계없이 묘사될 수 없다. 아무리 말의 기교를 부려도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목적지향성에 의해 인간이 추동 된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채 갈 수 없다. 우리 과학의 주제는 이러한 목적의식적 행위−즉 행동−다. 우리는 행동하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즉 주어진 사정에) 부여하는 의미, 그 리고 그 상황과 관련된 자신의 행위에 부여하는 의미를 무 시한다면, 우리의 주제에 접근할 수 없다. 물리학자가 최종 원인을 탐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물리학의 대상인 사상들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목적을 겨냥해서 행동하는 존재가 행동했던 것의 결과라고 해석되 어야 할 그 어떤 지표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행동의 연 구자가, 행동하는 존재가 의지와 의도를 작동시키고 있다 는 점을 무시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그것들은 의심의 여 지가 없는 기정사실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이 점들 을 무시한다면, 그는 인간행동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매우 자주−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해당 사 건들은 자연과학의 관점과 인간행동학적 관점 양쪽 모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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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탐구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권총을 발사한 것 에 대해 물리학 및 화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사람이 인간행 동학의 연구자일 수는 없다. 그는 목적의식적 인간행위를 다루는 과학이 규명하고자 하는 바로 그 문제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능의 유용성에 관해

본능의 유용성과 관련해 제기된 문제들이, 인간에 대한 연구 에서는 인과성 혹은 목적론이라는 오로지 두 가지 접근 경로 만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의 증거를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의 인과의 방법으로는 철저하게 설명될 수 없는 행 위 유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목적의식적인 인간행동으 로 볼 수 없는 행위 유형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위를 파 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임시변통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의 성격을 행동 비슷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우리 는 그것을 유용한 본능이라 부른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관찰한다. 첫째, 살아 있는 유 기체가 자극에 대해 일정한 패턴으로 반응하는 선천적 경 향, 둘째, 유기체의 생명력을 강화 혹은 유지하는 데 이러한 종류의 행위가 지닌 유리한 효과. 만일 그런 행위에 대해 이 를 목적의식적으로 일정한 목적을 지향한 결과라고 해석할 위치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동이라고 부르고, 인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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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목적론적 방법을 사용해 그 행동을 다룰 것이다. 그 러나 우리가 이러한 행위의 배후에서 의식적인 마음의 흔적 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 미지의 요소를−우리는 그것 을 본능이라고 부른다−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본능 이 목적의식과 비슷한 동물의 행위를 지휘하고, 본능이 인 간의 근육과 신경의 (무의식적이지만 유용한) 반응을 지휘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행위의 설명되지 않는 요 소를 힘이라고 실체화하고 그것을 본능이라고 부른다는 단 순한 사실이 우리의 지식을 넓혀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본능이라는 말이, 적어도 현재까지는 우리가 그것을 넘 어 과학적 연구를 더 진행할 수 없는 지점을 가리키는 표지 에 불과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물학은 예전에는 본능의 작동으로 돌렸던 많은 과정 들에 대해 ‘자연적’, 즉 기계적 설명을 발견하는 데 성공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계적·화학적 자극에 대 한 기계적·화학적 반응이라고 설명될 수 없는 많은 부분들 이 남아 있다. 동물들은 어떤 지배적 요인이 작동한다는 가 정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납득될 수 없는 태도를 보여 준다. 동물심리학의 방법을 사용해 외부로부터 인간행동을 연구하려는 행태주의의 지향은 환상일 뿐이다. 동물의 행태 가 호흡 및 신진대사와 같은 단순 생리적 과정을 넘어서는 한, 그것은 오히려 인간행동학에 의해 개발된 의미와 개념 들의 도움을 받아 조사될 수밖에 없다. 행태주의자는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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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대상에 목적과 성공이라는 인간적 개념을 가지고 접근 한다. 그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연구 주제에 유용 성 및 유해성이라는 인간적 개념을 적용한다. 그러나 그는 의식성 및 목적 지향성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하지 않음으 로써 스스로마저도 속이고 있다. 사실상 그의 마음은 어디 서나 목적을 추구하고 있으며, 왜곡된 개념인 유용성의 잣 대를 가지고 모든 태도를 잰다. 인간행위에 대한 과학은− 그것이 생리학이 아닌 한−의미나 목적에 대한 언급을 방기 할 수 없다. 인간행동과학은 동물심리학으로부터, 또 신생 아의 무의식적 반응의 관찰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인간행동과학이 줄 수 있는 도움을 거절할 수 없는 쪽은 오 히려 동물심리학과 유아심리학이다. 인간행동학의 범주들 을 동원하지 않은 채 동물과 유아의 행동을 상상하고 이해 하라고 하면, 우리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동물들의 본능적 행태를 관찰하면 사람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아무도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된 다. 하지만 동물, 심지어는 식물까지도 목적의식을 지닌 것 과 유사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은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는 사실, 그리고 무기체의 세계에서는 물리학의 기능적 상 응 관계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 유기체의 세계에서는 생물 학적인 과정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비해 더도 덜도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탐구하는 우리의 마음에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궁극적 기정사실이라는 의미에서 신비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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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우리가 동물적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궁극적 기정사실이다. 동작, 힘, 생명, 의식 등의 개념처럼 본능이 라는 개념 역시 궁극적 기정사실을 표시하는 용어에 불과하 다. 확실히 그것은 어떠한 것을 ‘설명’해 주지도 않고, 존재 이유 혹은 ‘궁극적 존재 이유’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15)

절대적 목적

인간행동학의 범주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자명한 사실 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행동학은 인간행동에 대한 역사 과학처럼, 목적의 식적인 인간의 행동을 다룬다. 인간행동학이 목적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염두에 두는 것은 행동하는 사람이 지향하 는 목적이다. 인간행동학이 의미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행동하는 사람이 그의 행동에 부여하는 의미를 언급하는 것 이다. 인간행동학과 역사학은 인간의 마음이 구현된 것이며, 그래서 유한한 인간의 지적 능력에 좌우된다. 인간행동학과

15) “모든 첫 번째 원인이 그러하듯이, 인생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이다. 실험과학도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실험과학(La Science expérimentale)≫(Paris, 1878),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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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은 다음에 대해 일체 아는 체하지 않는다. 절대적이 며 객관적인 마음의 의도, 사건의 진행이나 역사적 진화의 진행에 내재된 객관적 의미, 그리고 신, 자연, 세계정신, 혹 은 명백한 운명16)이 우주와 인간사를 주관하며 실현하고자 하는 계획. 인간행동학과 역사학은 역사철학이라고 불리는 것과 아무런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헤겔, 콩트, 마르크 스, 여타 무수한 저술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행동학과 역사학은 감히 삶과 역사의 참되고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의 미에 대한 정보를 드러낸다고 주장하지 않는다.17)

식물과 같은 인간

일부 철학자는 행위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일체 행동의 완전 한 포기를 추구할 것을 권한다. 그들은 삶을 고통, 괴로움,

16) (옮긴이 주)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미국이 대서양에서 태평양 해안까지 확장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의 옹호자들은 확 장이 좋을 것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고 확실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 말은 잭슨파 민주당에 의해서 1840년에 오리건 준(準) 구성국, 텍사스 병합, 멕 시칸 할양 등 서부 미국이 된 부분의 병합을 촉진하는 데 쓰였다. 1890년 이후에는 공화당 지지자들이 북미 외부로 확장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 해서 썼다. 민주주의를 진흥하고 방어할 미국인의 ‘임무’라는 믿음으로서 의 명백한 운명은 미국의 정치 이념으로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하 는 비평들도 있다. 17) 역사철학에 관해서는 미제스, ≪과학이론과 역사학(Theory and History)≫ (New Haven, 1957), p.159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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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으로 가득 찬 절대 악으로 생각하며, 이에 따라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노력만이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 음을 당연히 거부한다. 행복은 의식과 의지, 그리고 삶을 완 전히 배제함으로써 얻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축복과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은 식물처럼 완전히 수동적이고 무관심하며 비활동적으로 되는 데 있다. 지고의 선은 생각과 행동을 완 전히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여러 가지 인도철학, 특히 불교 철학과 쇼 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적 가르침이다. 인간행동학은 그것들 에 대해 가타부타하지 않는다. 인간행동학은 모든 가치판단 과 궁극적 목표 선택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다. 인간행동학의 과제는 승인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인간행동학의 주제는 인간행동이다. 인간행동학은 행 동하는 사람을 다루는 것이지, 식물로 변화된 사람이나 단 순히 식물적 존재로서만 연명하는 사람을 다루는 것이 아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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