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tilitarianism 공리주의
제1장 개요
인문 지식의 현행 상태를 구성하는 것들 중에는 옳고 그름 의 기준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려는 작은 진전(進展)을 이 루기는커녕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장 중요한 사안에 대한 사색조차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방황하는 퇴행 적 상태를 나타내는 많은 정황들이 포착되고 있다. 최고선 (summum bonum)1)에 관한 물음, 또는 같은 말인 도덕의 1) 최고선이란 인간의 행위를 어떤 목적의 실현에 두는 목적론적 윤리학의 중 심 개념이다. 목적론적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위란 하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합리적 수단을 선택하는 행동을 말하는데, 이에 따르면 목적은 필연적 으로 높고 낮은 목적으로 구분되고 계열화된 목적의 왕국을 이루고 있다. 이런 목적의 계열에서 볼 때 최고의 위치에는 이른바 궁극목적이 존재하게 되고, 이 궁극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목적론적 윤리학은 다시금 쾌락주의 윤리학과 행복주의 윤리학으로 나뉜다. 즉 궁극목적을 쾌락이라 하면 이 로부터 쾌락주의 윤리학이 생겨나고, 행복이라 하면 행복주의 윤리학이 생 겨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쾌락 또는 행복이 최고선으로 간주되는 것이 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쾌락이나 행복은 후천적 경험에 의존하는 한낱 실질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칸트는 인간의 경향성에 맞서 싸우면 서 의무로서 도덕법칙을 지켜내려는 마음을 최상선(最上善, das oberstes Gut)이라 하고, 이것을 인간으로서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덕이라 했다. 한편 유한한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은 언제나 행복을 욕구함으로써 완전선 (das vollendetes Gut)을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덕과 행복의 결합을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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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定礎, foundation)에 관한 물음은 철학의 여명기부터 사변적 사고의 핵심 문제로 간주되어 왔다. 이 물음들은 천 부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로 하여금 무척 골머리를 앓 게 했고, 또한 이들을 각기 다른 당파나 학파로 분열시켜 서 로 처참한 대립 투쟁을 벌이게끔 만들었다. 그로부터 2000 년 이상이 흐른 지금도 똑같은 논의가 반복되고 있으며, 철 학자들은 여전히 똑같은 기치(旗幟) 아래 서로 반목하고 있 는 형국이다. 도덕의 기초를 다지는 문제에 관해 사상가들 이나 일반인들이 한결같이 의견의 일치를 못 보는 것은 대 체로 (만일 플라톤의 대화편이 사실적인 대화에 기초를 둔 것이라면) 청년 소크라테스가 늙은 프로타고라스의 설교를 듣고, 이른바 소피스트들의 통속적인 도덕에 항거해 공리 주의 이론을 주장했을 때2)와 사정이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트는 최고선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윤리를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부터 규정하려는 공리주의자들로서는 다시금 이런 칸트의 입론을 비판한다. 칸 트 비판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뒤의 제1원리에 관한 비판을 참조할 것. 2) 소피스트란 고대 그리스에서 스스로 지자(知者)라고 말하던 사람들을 총 칭하는 용어다. 이들은 판단 기준을 인간의 감각과 업적에서 구했고, 하나 의 학파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아테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 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들 소피스트의 판단 기준과 진리의 탐구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즉 진리의 판단은 감각과 같이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불변적·절대적인 기준과 합리적인 방법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이성과 방법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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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와 유사한 혼란과 불확실성이, 그리고 어떤 경우 에는 이와 유사한 불일치가 모든 과학의 제1원리들(the first principles)에 관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모든 학문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겨져 온 수학조차도 이 점에서 예외 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과학의 결론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크게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일반적으로 말하 자면 전혀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언뜻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어떤 세세한 과학 학설은 통상 과학의 제1원리라고 불리는 것으로부터 연역되는 것이 아니며, 이 세세한 학설 에 대한 논증 또한 제1원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세세한 학설의 논증이 제1원리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대수(代數, algebra)만큼 근거가 빈약하고 불충분하게 증명 된 결론을 지닌 학문도 없을 것이다. 대수의 확실성은 학습 자가 통상적으로 대수의 기본 요소라고 배워온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기본 요소는 몇몇 가 자각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이런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지식인들이 이해하 기 힘들었고, 이런 연유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주장 이 공리주의적이라는 밀의 견해는 18세기 영국의 자본주의 상황에서 통속 적으로 통용되던 도덕설에 맞서 공리주의 원리를 대비시킨 자신의 노고를 소크라테스의 업적에 빗대어 말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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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탁월한 교사들이 언명하듯이 영국의 법률만큼이나 허구 로 가득 차 있고, 신학과 마찬가지로 신비로 채워져 있기 때 문이다. 궁극적으로 과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진리 는 실제로 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기본 개념들을 토대 로 이뤄지는 최종적인 형이상학적 분석의 결과다. 제1원리 의 과학에 대한 관계는 건축물에 대한 골조(骨組)의 관계가 아니라, 수목에 대한 뿌리의 관계와 같다. 뿌리는 결코 파헤 쳐지는 법이 없고 햇볕 속으로 드러나는 법도 없지만, 그렇 더라도 나무는 시종일관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간 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개별적인 특수 진리가 일반 이론보 다 선행한다고 하더라도, 도덕이나 입법과 같은 어떤 실천 적 기술(a practical art)의 경우에는 일반 이론이 특수 진리 보다 선행하는 그런 반대의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상 해 볼 수 있다. 모든 행위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기 때문에, 행위 규칙은 모두 스스로 따라야만 하는 이런 목적으로부터 유래하는 성격과 색깔을 취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 연해 보인다.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한다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어떤 명료하고 엄밀한 개념이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 는 1차적인 것(the first thing)으로 생각될 것이지만, 그렇다 고 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 의 판정 기준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확인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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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수단이어야만 하며, 이미 확인된 것으로부터 나온 어떤 귀결이어서는 안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식별해 주는 자연적 능력, 즉 감각이 나 본능을 갖추고 태어난다는 항간의 통속 이론에 호소할지 라도 어려움3)을 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그런 도덕적 본능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 자체가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이런 속설의 신봉 자들은 어느 정도 철학적 소양(素養)이 있는 사람이라면, 각기 다른 우리의 감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빛이나 소리 를 식별하듯이, 특수한 경우에 즈음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 이 그른가를 판정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 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능력을 이와 같이 해석하는 사 람들 중에서 사상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이 다만 도덕 판단의 일반 원칙을 제공할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도덕적 능력은 이성의 한 갈 래[枝]지, 감각적 능력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성에 관한 추상적인 학설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도덕성을 지각하려고 해서는 안 된 3) 이것은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기준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관한 어려움을 말하는데, 이른바 도덕감각(moral sense)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 말이다. 도덕감각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각주 4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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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일반 법칙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직각론적 윤 리학파4)나 귀납론적 윤리학파5)는 모두 일치한다. 양 학파 는 모두 개별적인 행위의 도덕성을 직접적으로 지각하기 위 한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법칙을 개별적인 경우에 적용 시키기 위한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이들은 또한 대부분 동일한 도덕법칙을 승인한다. 다만 도덕법칙을 증명하는 방식과 도덕법칙의 권위를 도출해 내는 원천이 다 를 뿐이다. 한쪽의 의견에 따르면 도덕원리는 용어의 의미 를 이해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동의를 이끌어 낼 필요도 없 는 선천적(a priori)으로 자명한 것이다.6) 또 다른 쪽의 학설 에 따르면 옳고 그름의 구별은 참과 거짓의 구별과 마찬가
4) 직각론적 윤리학파(the intuitive school of ethics)란 도덕적 가치판단이 이 성의 반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도덕법칙을 규정하는 도덕의 기초도 또한 직관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학파를 말한다. 직각론은 크게 정서적 직각론과 지적 직각론으로 나뉘는데, 전자에는 도덕 감각(moral sense)을 주장하는 애덤 스미스를 필두로 한 정서적 도덕론자 들이 속한다면, 후자에는 리드(T. Reid), 버틀러(J. Butler), 스튜어트(D. Stewart) 등이 속한다. 5) 귀납론적 윤리학파(the inductive school of ethics)란 개별적인 것의 관찰 에서 출발해 이런 개별적인 것의 특수한 사례들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보 편적인 도덕법칙을 추리해 내는 학파를 총칭하는 용어로, 로크(J. Locke), 흄(D. Hume) 등의 윤리설이 이에 속한다. 6) 이것은 직각론자들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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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순전히 관찰과 경험의 문제일 따름이다.7) 그렇지만 양 자는 공통적으로 도덕성이 원리들로부터 연역되어야만 한 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직각론자와 귀납론자 모두 도덕과학(science of morals)이 성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학파도 좀처럼 도덕과학의 전제로서 기여하게 될 각종 선천적 원리들의 목 록을 열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런 각종 [선 천적] 원리들을 유일한 제1원리 또는 의무의 공통 근거로 환 원시켜 보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어느 쪽도 일상적인 도덕의 교훈 을 선천적인 권위의 교훈이라고 가정하거나, 격률 자체보다 훨씬 더 권위가 떨어지는 어떤 일반론이 격률의 공통 근거 라는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이런 일반론은 대중적인 지지 를 얻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직각론자들이나 귀납론자들의 주장이 나름대로 인정받으려면, 어느 쪽이든 간에 모든 도덕성의 근저에 있는 하나의 토대가 되는 기초 원리나 법칙을 반드시 갖추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기초 원리나 법칙이 여러 개 있다면, 그들 사이에는 우선순위를 확정지어 두어야만 한다. 이 하나의 토대가 되는 원리가 자
7) 이것은 귀납론자들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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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해야만 한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원리들이 서로 갈등할 때는 다양한 원리들 사이에 있는 우선순위를 결정하 는 규칙도 또한 자명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런 결함의 악영향이 실제로 얼마나 완화되었는지 또는 궁극적인 기준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인류의 도 덕적 신념이 얼마나 손상되거나 불확실하게 취급되어 왔는 가를 조사하려면, 고금(古今)의 윤리학설을 모두 검토한 후 에나 겨우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기준8)을 암중모색하는 가 운데 이런 확고부동한 도덕적 신념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 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공인된 제1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것은 윤리학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실제적인 심정 (sentiments)을 신성하게 만들어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심정으로서 호감 (favour)과 반감(aversion)은 모두 여전히 자신의 행복에 미 치는 사물의 영향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크게 좌우된다. 그 렇기 때문에 벤담(J. Bentham)이 말년에 최대 행복의 원리 (the greatest happiness principle)9)라고 불렀던 공리의 원 8) 이것은 공리의 원리를 가리킨다. 9) 벤담은 프리스틀리(F. E. L. Priestley)에게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사고방식을 터득했고, 엘베시우스(C. A. Helvetius)로부터 배워서 이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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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가장 경멸적인 어조로 이 원리의 권위를 걷어차 버린 사람들의 도덕 학설을 구성하는 데 또한 큰 기여를 했던 것 이다. 행위가 행복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심지어 도덕의 세세한 부분들을 고려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기를 꺼려 하는 학파는 이제 아무도 없다. 이들은 공리의 원리가 도덕 성의 근본원리이며, 도덕적 의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기 꺼이 인정해 마지않는다. 나아가 논증의 필요성을 조금이 라도 인정한다면, 아무리 선천적인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 이라 할지라도, 결코 공리주의적 논증을 무시한 채 지나칠 수는 없다는 점을 나는 감히 말해야겠다. 지금 이런 선천적 도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나의 목표는 아니다. 그렇 지만 하나의 사례로서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상가의 한 사람인 칸트의 체계적인 저작 ≪도덕 형이상학(the Metaphysics of Ethics)≫(원저 명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입법의 원리로 삼았다. 그리고 행복의 내용으로서 쾌락의 실존과 고통의 부재를 생각해 냈고, 이것을 흄(D. Hume)에 따라 공리의 원리라고 불렀지 만, 후에 공리라는 말이 행복만큼 명확한 쾌락과 고통의 관념을 나타내지 않을뿐더러 이해관계자의 사람 수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고 있다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최대 행복의 원리라는 말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J. Bentham, ≪도덕과 입법의 원리 입문≫, 제1장 1절 8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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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칸트의 사상 체계10)는 철학적 사색의 역사에서 획기 적인 사건의 하나로 오랫동안 길이 남을 것이지만, 이 탁월 한 사상가는 방금 말한 저작에서 도덕적 의무의 기원과 근 거로서 보편적인 제1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네 행 위의 격률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 의해 법칙으로 채택되도록 행동하라(So act, that the rule on which thou actest would admit of being adopted as a law by all rational beings). 그러나 칸트가 이 격률(precept)로부터 실제적인 도덕성의 의무를 연역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는 십중팔구 실패한 것 임에 틀림없다. 그는 거의 해괴망측하다고 해야 할 정도의 모순, 즉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가장 극악무도하고 비도덕
10) 도덕 형이상학을 다룬 칸트의 저작에는 두 개가 있다. 즉 도덕 형이상학의 원리를 다룬 ≪도덕 형이상학 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과 도덕교육론을 주제로 한 ≪도덕 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이 그것인데, 본문에서 언급한 책은 앞의 ≪도덕 형이상학 원론≫ 을 가리킨다. 이 책에 나타난 칸트의 윤리 사상 체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은 누구나 선의지(das gutes Wille)를 가지고 태어나 지만, 현실적으로 경향성에 직면해 선의지는 각자에게 하나의 의무로서 주어진다. 의무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으로서 정언적 명법의 형식 을 띠는데, 우리의 도덕법칙은 바로 이런 정언적 명법을 담지한다. 그러나 인간의 경향성에 직면해 도덕법칙은 최상선을 나타내지만, 유한한 이성 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또한 완전선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행복을 필요 로 한다. 그리하여 칸트는 최상선과 완전선의 결합을 최고선이라 불렀는 데,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다름 아닌 신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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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행위 법칙을 채택한다는 어떤 모순을 보여 주거나 (물 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가 나타 내려 한 것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채택할 수 있는 결과 (consequences)이지만, 어느 누구도 무엇이 일어날지를 결 코 선택할 수 없는 그런 결과다. 지금 여기서 나는 더 이상의 다른 학설들에 대한 논의는 접어 두고, 공리설이나 행복설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나마 다할 생각이다. 또한 나는 공리설이나 행 복설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논거를 찾기 위해 총력을 기 울일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일상적이고 통속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상의 의미에서 행해지는 증명일 수 없다는 점 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궁극목적들(ultimate ends)에 관한 문제는 직접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선(善, good)11)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선이란
11) 윤리학에서 선은 보통 그 자체로서 목적인 선과 어떤 목적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한 것으로 구분된다. 선 자체는 가치의 일종이지만, 목적으 로서 선이 도덕적 가치를 의미한다면, 수단으로서 선은 인간의 삶에 유용 한 하나의 종속 가치를 의미한다. 이런 가치들을 하나의 선으로 나타내는 것은 가치가 언제나 오직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문제 되기 때문이다. 즉 종 속 가치가 행위의 목적 달성 여하에 따라 판단되는 반면에, 도덕적 가치는 그 자체가 자명한 것으로 언제나 행위의 기준이 되어 왔다. 이와 같이 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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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논증하는 대신에 선이라고 인정되는 것에 대한 수단을 제시함으로써 증명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를테면 의 학적 방법은 의학이 건강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선이라는 것 이 증명되지만, 건강이 선이란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 을까? 또한 음악이라는 예술(the art of music)이 선이라는 것은 어쨌든 음악이 다른 이유보다 즐거움을 산출한다는 이 유만으로도 증명될 수 있지만, 즐거움이 선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 밖에 그 자체에서 선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공식이 있고, 이 공식 외에는 모두 가 목적으로서 선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선이 된다고 주장한 다면 우리는 이 공식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것이지만, 이 공식은 증명을 통해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그런 주제가 아니 다.12)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공식에 대한 수용이나 거절이 맹목적인 충동이나 임의의 선택에 의존할 것이라고 자명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종래의 윤리학은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덕적 가치를 실천할 것인가를 항상 문제 삼아 왔던 것이다. 12) 여기서 우리는 선의 의미를 쾌락의 존재 여부로 정의하려는 밀의 방식에 대해 그 진리성을 심각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선이란 가치어이고, 쾌락 은 사실어다. 이런 가치어를 사실어로 설명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이른바 가치어를 사실어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밀의 환원주의적 오류 를 무어(G.E. Moore)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어의 자 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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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해서는 안 된다. 증명이라는 말은 보다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이 문제13)는 철학의 다른 논쟁 거리인 문제와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이성 능력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내 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성 능력은 이 문제를 오로지 직관의 방법으로만 처리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지 성이 이 원칙에 동의할지, 거부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가를 고려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증명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이런 고려가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검 증하고, 우리가 고려한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개별적인 경 우에 적용되며, 그리하여 어떤 합리적 근거에 따라 공리주 의 공식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공식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것이 우리 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의 기본적인 (preliminary) 조건이다. 나는 통상적으로 형성된 공리주의 의 의미에 관한 매우 불완전한 관념이 공리주의를 쉽게 받 아들이지 못하는 주된 장애라고 믿는다. 공리주의의 의미가 명료해지고 우리가 조잡한 오해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13) 이것은 어떤 것(예를 들어 쾌락, 행복 등)이 선인가를 나타낼 수 있는 공식 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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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의외로 간단해질 것이다. 또한 어려움도 대부분 사 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리주의 기준에 관해 동의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에 대한 논의를 개시하기 전에, 공리주의 학설 자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리고 공리주의를 다른 이론들과 구별함으로써, 공리주의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거나 이런 잘못된 해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실천적 반대 이론을 격파함으로써, 공리주의가 무엇인 가를 다시 한 번 명료하게 나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함께 가 지고 있다. 이렇게 터전을 닦은 다음에, 철학적 이론의 하나 로 간주되는 문제를 조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매진할 생 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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