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지고전천줄 0022
王維 詩選 왕유 시선 왕유(王維) 지음 박삼수 역해
대한민국, 서울, 지만지, 2008
산장의 가을 저녁녘
빈산에 새로이 비 내린 뒤 어스름 저녁이라 가을 기운 물씬 풍긴다 밝은 달빛은 솔숲 사이로 비쳐오고 맑은 샘물은 산석(山石) 위로 흐른다 빨래 나온 여인들 돌아가며 대숲이 떠들썩하고 고기잡이배 내려가며 연잎이 흔들거린다 향기로운 봄풀이 제멋대로 다 시든다 해도 왕손은 의연히 산중에 머무르리라1
山居秋暝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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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설
이 시 역시 망천 ‘역은’ 기간의 작품으로, 비 온 뒤 가을 저녁녘의 산촌(山村) 경색을 묘사하였는데, 산수 자연의 청신한 아름다움 과 촌민(村民)의 생동하는 삶의 숨결은 시인의 피세 은둔의 결심 을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1.
이상의 2구는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에서 “왕손은 타향
을 떠돌며 돌아오지 않는데 / 봄풀만 자라서 무성하구나 / …왕손아! 돌아 오소서 / 산중에 오래 머물러선 아니 되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 萋. …王孫兮歸來, 山中兮不可以久留)”라고 한 뜻을 역(逆)으로 써서 산중 은거의 결심을 은근히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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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의 즐거움1
마름 열매를 따노라니 나루터 강바람 거세고 지팡이 짚고 있노라니 촌락 서편으로 해 기우는데 은행나무 단(壇) 옆에는 고결한 어부 한가롭고2 도화원3 안으로는 인가가 올망졸망 정겹다
田園樂 採菱渡頭風急 策杖村西日斜 杏樹壇邊漁父 桃花源裡人家
해 설
이 시는 고결함과 유벽(幽僻)함이 넘치는 전원생활의 흥취를 묘 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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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진 방초(芳草)에 봄이 푸르고 우뚝 솟은 소나무에 여름도 서늘하다 소와 양은 저희끼리 마을 골목으로 돌아오고 아이놈은 의관의 벼슬아치가 무언지도 모른다
萋萋芳草春綠 落落長松夏寒 牛羊自歸村巷 童稚不識衣冠
해 설
이 시는 한껏 청려(淸麗)하고 자재(自在)한 전원 경물과 세속과 동떨어져 순박하기 그지없는 민정(民情)을 묘사하였다.
복사꽃 붉은데 또 간밤 빗방울을 머금었고 버들잎 푸른데 또 짙은 봄 안개에 휩싸였다 꽃송이 떨어지는데 아이는 아직도 쓸지 않고 꾀꼬리 우는데 산객(山客)4 은 여전히 잠만 자누나
桃紅復含宿雨 90
柳綠更帶春煙 花落家僮未掃 鶯啼山客猶眠
해 설
이 시는 밤비 내린 이튿날 아침의 맑고 아름다운 봄 경치와 무위 자연의 한적함을 즐기는 은자의 생활 정취를 묘사하였다.
1.
이 시편(詩篇) 역시 망천 ‘역은’ 기간의 작품으로 원래는 모두 7수였으나
여기서는 그 가운데 3수만 뽑았다. 2.
이 구는 옛날 공자가 숲 속 은행나무 단(壇)에서 거문고를 타는데 백발
의 어부가 언덕으로 올라와 그 소리를 들었다는 고사를 빌려 시인이 은거하 고 있는 이곳에도 고결한 품성의 어부가 살고 있음을 표현함. 3.
도화원(桃花源): 22쪽 <도원행> 참조.
4.
산객: 은자. 여기서는 시인의 자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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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산 석문정사
해 질 무렵 산천이 더욱 아름다울 제 배 띄워 바람에 맡겨 가는데 기묘한 풍광 즐기노라니 길이 먼 줄도 모르고 나선 김에 수원(水源) 찾아 끝까지 가본다 구름 높이 솟은 나무들의 수려함에 아득히 빠져 처음엔 길을 잘못 들었나 의심도 하였건만 어찌 알았으랴, 맑은 개울물 굽이돌아선 우연히도 앞산 기슭으로 통하고 있음을! 뭍에 올라 경책(輕策) 짚고 갔더니 과연 다다른 곳이 한껏 마음에 들거니 노승 네다섯 사람이 소나무 잣나무 그늘 밑에서 소요하도다 새벽 독경에 숲 속은 아직 밝지도 않고 밤중 참선에 산속은 더욱 적막한데 불가의 도심(道心)이 목동에게까지 미치니 세속의 일일랑 나무꾼에게 물어본다 해 저물어 큰키나무 숲 아래에서 묵으며 향불 피우고 정갈한 돗자리에 누워 있노라니 산골 물가의 꽃향기는 사람의 옷깃에 스미고 92
산마루의 달빛은 석벽을 비춘다 다시 찾아오더라도 길 잃을까 두렵건만 날 밝아오자 또 산천을 두루 유람할 양으로 웃으며 도화원 사람들을 하직하고 떠나거니 명년 복사꽃 붉게 필 즈음에 다시 오리라1
藍田山石門精舍 落日山水好 漾舟信歸風 玩奇不覺遠 因以緣源窮 遙愛雲木秀 初疑路不同 安知淸流轉 偶與前山通 捨舟理輕策 果然愜所適 老僧四五人 逍遙蔭松柏 朝梵林未曙 夜禪山更寂 道心及牧童 世事問樵客 暝宿長林下 焚香臥瑤席 澗芳襲人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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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月映石壁 再尋畏迷誤 明發更登歷 笑謝桃源人 花紅復來覿
해 설
이 시는 시인이 망천에서 은거할 때 부근의 남전산을 유람하며 지 은 것으로, 우연히 산사(山寺) 석문정사에 다다른 과정과 그야말 로 세속과는 단절되어 있어 마치 무릉의 도화원과도 같은 산사의 정경을 그리면서 시인은 명년 봄에 다시 찾아올 뜻을 세운다.
1.
이상의 4구는 무릉의 어부가 우연히 도화원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 다시
그곳을 찾아갔으나 길을 찾을 수 없었다는 도연명 <도화원기>의 고사를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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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에서
형계 시냇물 줄어 바닥 흰 돌 드러나고 날씨 차가워 어느덧 단풍잎도 드문데 한적한 산길에는 본디 비 내리지 않았건만 빈 산중의 짙푸름은 사람의 옷을 적실 듯하다
山中 荊溪白石出 天寒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
해 설
이 시 역시 망천 ‘역은’ 기간의 작품으로 늦가을의 산중 경색을 묘 사하였는데, 짙푸른 산색(山色)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흰 돌과 붉 은 단풍이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소동파가 바 로 이 시를 예로 들어 왕유의 시는 ‘시 속에 그림이 있다고 ’ 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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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천 별장을 떠나며
아쉬움에 머뭇거리다 마침내 거마를 움직이고 서글피 한탄하며 송라1 무성한 산속을 나오나니 마지못해 이 푸른 산을 떠난다 할지라도 유유히 흐르는 저 푸른 물은 또 어이 하리?
別輞川別業 依遲動車馬 惆悵出松蘿 忍別靑山去 其如綠水何
해 설
이 시는 시인이 ‘역은’ 생활을 마무리하고 망천 별장을 떠나며 지 은 것으로, 실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못내 아쉬워하 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1.
송라(松蘿): 소나무겨우살이. 지의류(地衣類) 식물로 깊은 산중에서
소나무 가지에 기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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