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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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학자는 화가 났다. 그림자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 보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떠올랐 기 때문이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 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했더라 면, 사람들은 그가 인간 흉내를 내는 그림자라고 말할 게 뻔했다. 안데르센, <그림자> 중에서

낯선 이야기가 마치 내 피와 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재구성해 세상에 발표했을 뿐이다. 안데르센, <내 삶의 동화> 8장 중에서



나오는 사람들

학자 학자의 그림자 피에트로: 호텔 주인 안눈치아타: 피에트로의 딸 율리야 쥴리: 여가수 공주 국무총리 체자리 보르지아: 기자 3등문관 의사 사형집행인 집사장 하사관 궁녀들 궁정 대신들 요양객들 오락 간호사 치료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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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전관들(전령들) 재무장관 시종들 경비병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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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남쪽 나라에 위치한 호텔의 작은방. 한쪽 문은 복도로 향해 있고, 다른 문은 발코니 쪽으로 향해 있다. 해 질 녘. 26세의 젊은 학자가 소파에 반쯤 누워 있다. 그는 책상을 더듬으며 안경을 찾고 있다.)

학자

안경을 잃어버리면 곤란하기도 하지만 좋은 점도 있 어. 노을이 질 때면 이 방이 전혀 낯선 곳으로 변한단 말씀이야. 의자를 덮은 이 담요도 사랑스럽고 멋진 공주님처럼 느껴져. 난 이 공주님께 흠뻑 빠졌어. 이 분이 내게 왕림해 주셨지. 물론 혼자 오신 건 아냐. 공주님은 항상 수행원들과 함께 다니시거든. 나무 상자로 만든 이 길쭉한 시계도 사실은 시계가 아냐. 이건 공주님의 영원한 동반자인 3등문관이지. 그의 심장은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뛰고, 그가 공주님께 드리는 조언은 매시간 달라져. 그는 귓속말로 자신 의 조언을 전하지. 비밀스러운 조언자라고나 할까. 이 3등문관은 자신의 조언이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판명 나면, 그건 자기가 한 말이 아니라며 발뺌하기 도 해. 사람들이 자기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거라며 우 겨 대는 거야. 참 편리한 처신술이지. 근데 저건 누 구지? 저 낯선 남자는 누굴까? 마르고 날씬한 체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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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검은 옷을 입고 하얀 얼굴을 가졌네. 저 사람이 공주님의 약혼자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왤까? 아, 난 정말 공주님과 사랑에 빠졌나 봐! 공주님이 다른 남 자와 결혼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 내가 이렇게 공주 님을 사랑하는데 말이지. (웃는다.) 이런 공상의 매 력은 내가 안경을 다시 쓰기만 하면 모두 다 제자리 로 돌아온다는 거야. 담요는 담요가 되고, 시계는 그 냥 시계가 되지. 그리고 저 음산한 낯선 남자도 사라 지고. (두 손으로 책상을 더듬는다.) 안경이 여기 있 군. (안경을 쓰자마자 비명을 지른다.) 이게 뭐야?

(화려한 의상을 입은 미모의 여인이 가면을 쓰고 안락의자 에 앉아 있다. 그녀 뒤로 예복을 입은 대머리 노인이 서 있 다. 그는 별을 들고 있다. 벽 쪽에는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검은색 연미복에 화려한 셔츠를 입고 서 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손에는 빛나는 보석 반지를 끼고 있다.)

(촛불을 밝히며 중얼거린다.) 이게 웬일이람? 나 같 은 보잘것없는 학자에게 이런 지체 높은 손님들이 오시다니.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러분을 뵈어서 반 갑긴 합니다만…. 어인 용무로 이렇게 왕림하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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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왜 아무 말이 없으신지 요? 아, 알겠다. 내가 지금 졸고 있군. 꿈을 꾸고 있 는 거야. 가면 여인 아니오, 이건 꿈이 아니에요. 학자

맙소사! 대관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가면 여인 원래 이런 동화예요. 잘 있어요, 학자 양반!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연미복 남자 또 봅시다, 선생!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 별을 든 노인 (속삭이며) 잘 있어요, 존경하는 학자 나리! 우

리 다시 만납시다. 당신이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모 든 것은 해피엔드로 끝날 거요.

(노크 소리가 들리자 셋 다 사라진다.)

학자

이게 꿈이야, 생시야!

(다시 노크 소리)

들어와요!

(검은 머리에 부리부리한 검은 눈을 가진 안눈치아타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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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온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힘이 넘치지만, 몸가짐과 목소 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머뭇거림이 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17세 아가씨다.)

안눈치아타 죄송해요, 전 손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어! 학자

왜 그래요, 안눈치아타?

안눈치아타 분명히 이 방에서 사람 소리가 나는 걸 들었는

데! 학자

내가 자다가 꿈에서 잠꼬대를 한 거요.

안눈치아타 하지만…. 여자 목소리도 들렸어요. 학자

꿈속에서 공주님을 봤거든요.

안눈치아타 노인이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고요. 학자

그건 내가 꿈속에서 3등문관을 본 거요.

안눈치아타 웬 남자가 당신께 소리치는 것 같기도 하던데요. 학자

그 사람은 공주의 약혼자였소. 자, 이제 그게 다 꿈이 었다는 걸 믿겠어요? 그런 불쾌한 손님들이 어떻게 현실의 나에게 나타나겠소?

안눈치아타 농담하시는 거죠? 학자

맞아요.

안눈치아타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항상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아마 제가 옆방 소리를 잘못 들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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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그래도 저에게 화를 내시는 건 아니겠죠?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해도 되나요? 학자

그럼요, 안눈치아타.

안눈치아타 오래전부터 당신께 미리 들려주고픈 얘기가 있

었어요. 무례하다고 화내진 마세요…. 당신은 학자 고, 전 미천한 소녀일 뿐이지만…. 저만 알고 당신은 모르는 어떤 얘기를 해 드리고자 해요.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 숙인다.)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학자

천만에! 말해 주세요! 저를 가르쳐 주세요! 저는 학 자입니다. 학자는 평생 배워야 합니다.

안눈치아타 농담하시는 거죠? 학자

아니요, 아주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안눈치아타 그렇게 말해 주셔서 고마워요. (문 쪽을 둘러본

다.) 책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기후도 좋고, 맑은 공 기에 멋진 경치와 따사로운 태양을 가진 나라라고 써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우리나라에 대해 책 에 어떤 내용이 써 있는지 잘 아시죠? 학자

그럼요, 잘 알죠. 그래서 제가 이곳으로 온 겁니다.

안눈치아타 네. 당신은 책에 쓰인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책에

쓰여 있지 않은 것은 잘 모르실 거예요. 학자

학자들에겐 가끔씩 있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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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눈치아타 지금 당신이 계신 곳이 아주 특별한 나라라는 생

각은 못했을 거예요. 우리나라에선 남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동화 같은 일들이 정말 매일같이 일어나 고 있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마을 분수대 오른편 에 있는 담배 가게 아시죠? 거기서 걸어서 다섯 시간 걸리는 곳에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살기도 했답니 다. 지금은 죽었지만요. 마을 전당포에서 감정평가 사로 일하는 자는 식인종이에요. 식인종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고요. 별명이 꺽다리인 장신의 여자와 결혼한 난쟁이도 있답니다. 근데 그 집 아이들은 당 신과 저처럼 중키예요. 정말 놀라운 건 뭔지 아세요? 별명이 꺽다리인 그 여자는 키만 컸지, 그 난쟁이한 테 완전히 잡혀서 산대요. 꺽다리 여자는 시장 갈 때 도 그 난쟁이를 데려가요. 난쟁이는 그녀의 앞치마 주머니에 악마처럼 웅크리고 앉아, 물건값을 흥정한 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화목하게 살고 있어요. 여 자가 그렇게 남편에게 극진하다네요. 명절날 미뉴에 트를 출 때면, 그녀는 늘 이중 안경을 끼고 있어요. 춤추다가 본의 아니게 남편을 밟아 버릴까 봐서요. 학자

그것참 흥미롭군요.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은 책에 쓰 지 않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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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눈치아타 (문 쪽을 둘러보며) 모든 사람이 동화를 좋아하

는 건 아니니까요. 학자

그래요?

안눈치아타 그럼요. 이건 상상도 못하셨죠! (문 쪽을 둘러본

다.) 우린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우리나라에 발길을 끊을까 봐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렇 게 되면 우린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거든요! 절대 비 밀을 누설하시면 안 돼요! 학자

그럼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안눈치아타 그렇게 말해 주셔서 고마워요. 불쌍한 제 아버

지는 돈을 무척이나 밝힌답니다. 아버지가 기대치보 다 돈을 적게 벌면 전 절망에 빠져요. 아버지는 기분 이 나쁘면 제게 욕설을 마구 퍼붓거든요. 학자

하지만 제가 보기에 당신 나라의 동화가 사실임이 밝혀지면 방문객이 늘어날 것 같은데요.

안눈치아타 아뇨. 우리나라에 아이들만 방문한다면 아무 일

이 없겠죠. 하지만 어른들은 조심성이 많습니다. 그 들은 동화가 대부분 슬프게 끝난다는 걸 잘 알고 있 죠. 제가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씀도 바로 이거예요. 제발 조심하셔야 합니다. 학자

어떻게 하란 말이죠?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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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입으면 되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발밑을 잘 보고 걸으면 되죠. 하지만 슬픈 결말을 가진 동화 를 피해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안눈치아타 글쎄요…. 저도 그건 모르겠어요…. 잘 알지 못

하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나눠선 안 돼요. 학자

그럼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군요. 전 이방 인이니까요.

안눈치아타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제발 조심하셔야 해요.

당신은 무척 좋은 분이세요. 꼭 그런 사람한테는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고요. 학자

무슨 근거로 제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죠?

안눈치아타 전 부엌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요. 우리 요

리사한테 여자 친구가 열한 명 있는데, 그들은 세상 만사를 모두 다 알고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모조리. 그들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집집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낱낱이 알고 있다니까요. 마치 유리벽 너머를 보는 것처럼. 우리 는 부엌에 모여 앉아 함께 웃고 울고, 함께 놀라워한 답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질 땐 매번 음식 을 태우곤 하죠.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당신은 좋은 사람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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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당신 나라의 동화가 모두 사실이라고 말해 준 것도 그 사람들인가요?

안눈치아타 네. 학자

저도 저녁 무렵에 안경을 벗고 있을라치면 그 말을 믿고 싶어진답니다. 하지만 아침에 호텔 방을 나설 때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 어느 나라 와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을요. 부자와 빈자, 귀족과 노 예, 죽음과 불행, 이성과 무지, 성자와 범죄자, 양심 과 파렴치, 이 모든 게 마구 뒤섞여 있어서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이 모든 걸 해결하고 정리해서 사람들 이 상처받지 않게 만드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것 같 아요. 동화에선 모든 게 아주 단순한데 말이죠.

안눈치아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 숙인다.) 고마워요. 학자

무엇이오?

안눈치아타 저 같은 미천한 소녀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말씀

을 해 주셨잖아요. 학자

별말씀을. 학자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근데 전에 이 방에 묵었던 제 친구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도 당신네 동화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안눈치아타 네, 안데르센 씨도 그 동화에 대해 알고 있더라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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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그래, 그는 그 동화에 대해 무슨 말을 하던가요?

안눈치아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태껏 저는 제가 진실

을 쓰고 있는지 회의를 품었답니다.” 그분은 우리 집 을 매우 사랑하셨어요. 우리 집이 매우 조용했기 때 문이죠.

(귀가 찢어질 듯한 총성)

학자

이게 무슨 소리죠?

안눈치아타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가 누군가와 싸우

는 소리예요. 아버진 성격이 불같거든요. 또 누구한 테 총을 쏜 거 같아요. 하지만 지금까지 누굴 죽인 적 은 없어요. 워낙 신경질적이라서 쐈다 하면 오발이 죠. 학자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버지가 명사수 라면 그렇게 자주 총을 쏠 수도 없었겠죠.

(무대 뒤에서 “안눈치아타!”라고 외치는 소리)

안눈치아타 (큰 소리로) 가요, 아빠. 전 가 볼게요! 아, 여기

온 이유를 깜빡하고 있었네요. 커피, 우유, 뭘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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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릴까요?

(문이 활짝 열린다. 넓은 어깨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사내가 방으로 들어온다.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얼굴은 안눈치아 타와 닮았다. 무뚝뚝하고 사람 눈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이 가구 딸린 호텔 방의 주인이자 안눈치아타의 아버지 피 에트로다.)

피에트로 왜 부르면 곧장 오지 않는 거냐? 어서 가서 총을 재

장전해라. 애비가 총 쏘는 소릴 들었잖아. 일일이 설 명하고 참견해야 하다니, 원. 빨리 가!

(안눈치아타가 조용히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이마에 입을 맞춘다.)

안눈치아타 갈게요, 아버지. 나리, 안녕히 계세요. (나간다.) 학자

따님은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군요, 피에트 로 씨.

피에트로 세상에, 그러게 말입니다. 딸애는 제가 마치 이 도

시에서 가장 착한 아비라도 되는 양 군답니다. 학자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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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딸애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전 남들이 내 기분이나 생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걸 참을 수가 없어요. 뭣도 모르는 애라니까요! 제 주변엔 늘 안 좋은 일만 일어나요. 15호실 손님이 또 방세를 못 내겠다고 버티지 뭡니까. 홧김에 14호실 손님한테 한 방 갈겼죠. 학자

14호실 손님도 방세를 안 내나요?

피에트로 그 사람이야 방세를 내죠. 하지만 보잘것없는 인

간이거든요. 우리 국무총리한테 단단히 찍혔어요. 방세를 안 내는 그 망할 놈의 15호실 손님은 우리네 추잡한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아휴, 이 망할 놈의 세상! 빌어먹을 호텔 손님들한테서 방세를 쥐 어짜 내며 살아도 도통 수지가 맞지 않는단 말입니 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부업을 안 할 수가 없다 니까요. 학자

정말 다른 곳에서도 일하세요?

피에트로 그럼요. 학자

어디서요?

피에트로 마을 전당포에서 감정평가사로 일해요.

(갑자기 음악 연주가 시작된다.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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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바로 옆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크게 들린다.)

학자

이 음악 소리가 어디서 나는 거죠? 말씀 좀 해 주세 요, 네?

피에트로 건너편에서요. 학자

거긴 누가 사는데요?

피에트로 몰라요. 무슨 공주라나 뭐라나. 학자

공주요?

피에트로 들리는 소문이 그래요. 참, 당신께 일이 있어서 왔

어요. 그 망할 놈의 15호 손님이 당신을 방문해도 되 는지 묻더군요. 빌어먹을 신문쟁이 같으니. 그 멋진 방을 공짜로 쓰려고 하다니, 도둑놈이 따로 없네. 허 락하시겠소? 학자

그럼요, 방문하신다니 기쁘군요.

피에트로 미리 기뻐하진 마쇼.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간

다.) 학자

호텔 주인장이 마을 전당포의 감정평가사라니. 그럼 식인종? 굉장한데!

(학자가 발코니 쪽으로 난 문을 연다. 건너편 집의 벽이 보 인다. 학자 방의 발코니와 건너편 집의 발코니는 거의 닿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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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가깝다. 학자가 문을 열자 거리의 소음이 방 안으로 밀려 온다. 웅성거리는 소음 사이로 사람들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 수박이오, 수박! 조각으로도 팔아요!

물 사세요, 얼음물 사세요! 살인용 칼 팝니다! 살인용 칼 필요하신 분! 꽃 사세요, 꽃! 장미, 백합, 튤립 있어요! 비켜요, 당나귀 지나갑니다! 이봐요, 옆으로 비키세 요. 당나귀 갑니다! 불쌍한 장님한테 한 푼만 줍쇼! 독약 있어요, 독약. 순도 100퍼센트 독약이오! 학자

이 거리는 정말 북적거리는구나. 이곳이 참 마음에 들어! 이 세상이 불행한 건 내가 그 구원 방도를 찾아 내지 못했기 때문인 거 같아. 날 괴롭히는 이 끝없는 근심 걱정만 사라져도 얼마나 좋을까! 저 건너편 집 에 사는 여인이 발코니로 나와 주기만 한다면, 딱 한 가지, 정말 사소한 한 가지 일만 남을 텐데. 그러면 모든 게 명확해질 거야.

(잘 차려입은 아름답고 젊은 여자가 학자의 방으로 들어온 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방 안을 두리번거린다. 학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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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녀를 보지 못한다.)

저 산과 바다가 조화롭다면, 그리고 당신도 조화로 운 존재라면, 그건 이 세상이 좀 더 질서정연하게 만 들어졌다는 말이겠지…. 여자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학자

(고개를 돌린다.) 네?

여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요. 당신이 중얼거 린 말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고요. 그게 당신의 새 로운 논문 주제인가요? 지금 당신은 어느 쪽에 있죠? 오늘 무슨 일 있었나요? 절 못 알아보시겠어요?

학자

죄송합니다만, 모르겠는데요.

여자

제가 근시라고 놀리시는 건 아니죠? 그건 점잖지 못 한 행동입니다. 당신은 거기 어디쯤 있어요?

학자

전 여기에 있습니다.

여자

좀 더 가까이 와 주세요.

학자

자, 여기 왔습니다. (미지의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간 다.)

여자

(그녀는 깜짝 놀란다.) 당신 누구세요?

학자

전 이방인입니다. 이 호텔 방에 머물고 있죠. 소개가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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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죄송해요…. 제 눈 때문에 또 실수를 했군요. 여기 15호실 아닌가요?

학자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여자

당신 얼굴은 참 선량하고 매력적이군요! 당신은 왜 여태 우리 모임에 들어오지 않은 거죠?

학자

어떤 모임 말인가요?

여자

아, 배우와 작가, 귀족들로 구성된 모임이에요. 장관 한 분도 가끔씩 오세요. 다들 예의 바르고 편견이라 곤 없는 너그러운 분들입니다. 당신은 유명 인사인 가요?

학자

아니요.

여자

정말 유감이네요! 우린 유명 인사만 받는답니다. 하 지만…. 하지만 그 점은 제가 양해해 드릴게요. 당신 이 제 마음에 꼭 들었거든요. 화내시는 건 아니죠?

학자

그럼요, 아니고말고요!

여자

여기 잠깐 앉았다 가도 될까요?

학자

물론입니다.

여자

전 당신이 제가 평생 찾아온 바로 그분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소리나 어투만 보고 그분으 로 착각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혀 그분이 아니었죠. 물러서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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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죠. 그 사람이 너무 빨리 다가와 버렸거든요. 예쁜 여자가 근시로 사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제 말 을 듣기 싫으신가요? 학자

아닙니다, 아니고말고요!

여자

어머, 어쩜 그렇게 단순 명쾌하고 침착하게 대답하 실 수가 있을까! 그 사람은 제 속을 상하게만 하는데.

학자

누가요?

여자

제가 찾아온 그 사람 말이에요. 그는 지독히도 불안 정한 사람이랍니다. 세상 사람 모두의 마음에 들려 고 안달이죠. 유행의 노예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볼 게요. 선탠이 유행한 적이 있죠. 그 사람은 흑인처럼 까맣게 될 때까지 몸을 태웠답니다. 그러다가 선탠 의 유행이 지나가자 복원 수술을 결심했죠. 그 사람 몸에서 하얀 부분은 팬티 안쪽뿐이었거든요. 의사들 이 그 피부를 얼굴에 이식했죠.

학자

부작용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여자

부작용은 없었어요. 단지 극도로 뻔뻔해졌을 뿐이에 요. 그 사람이 자신의 뺨을 뭐라 부르는지 아세요? ‘엉덩짝’.

학자

그러면서 당신은 왜 그 사람 호텔 방을 내왕하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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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어쨌든 그는 우리 모임의 회원이니까요. 잘나가는 사람들 모임 말이에요. 게다가 그 사람은 신문사에 서 일한다고요.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아세요?

학자

아뇨.

여자

저는 가수예요. 이름은 율리야 쥴리.

학자

당신은 이 나라에서 유명하겠군요!

율리야 그럼요. 만인이 제 노래를 알죠. <엄마, 사랑이 뭔

가요>, <아가씨들, 어서 행복을 찾아요>, <하지 만 나는 그의 애욕엔 냉정하다네>, <아아, 나는 왜 푸른 초원이 아닐까> 같은 노래를 불렀죠. 당신은 의사인가요? 학자

아니요, 전 역사학자입니다.

율리야 여기엔 휴가차 오셨나요? 학자

전 당신 나라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율리야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를요? 학자

그렇지만 그 역사만큼은 다른 나라 못지않아요. 그 점이 참 기쁘답니다.

율리야 왜요? 학자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 이 존재한다는 말이니까요. 예를 들어, 한곳에서 오 래 살면서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게 되면 세상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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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단순하다고 여길지 모르죠. 하지만 바깥으로 나 가 보면 세상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답니다. 그래서….

(문밖에서 누군가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유리 깨지는 소리)

거기 누구요?

(젊은 멋쟁이 남자가 몸을 털면서 들어온다. 그 뒤로 안눈치 아타가 당황한 표정을 하고 따라온다.)

젊은이 안녕하십니까! 저는 당신 방문 앞에 서 있었을 뿐인

데, 안눈치아타가 절 보고 놀랐나 봅니다. 정말 제가 그렇게 무섭나요? 안눈치아타 (학자에게)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 드리려고 가

져온 우유 잔을 깨뜨리고 말았어요. 젊은이 저에게는 사과하지 않으실 건가요? 안눈치아타 나리가 잘못하셨잖아요. 왜 남의 방문 앞에 숨

어서 꼼짝도 않고 있는 거죠? 젊은이 엿듣고 있었거든요. (학자에게) 제 솔직함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학자들은 모두 정직한 사람들이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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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니까 제 솔직함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렇죠? 자, 그럼 저의 솔직함이 마음에 든다고 말해 봐요. 저 는 어때요? 저도 마음에 드나요? 율리야 대답하지 마세요. 당신이 ‘네’라고 대답하면, 저 사람

은 당신을 경멸할 것이고, 만약 ‘아니요’라고 대답하 면, 당신을 증오할 거예요. 젊은이 율리야, 율리야. 이 사악한 여자! (학자에게) 제 소개

를 해도 될까요? 저는 체자리 보르지아라고 합니다.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학자

네.

체자리 그래요? 정말요?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들었나요? 학자

많은 얘기요.

체자리 절 칭찬하던가요? 아니면 험담하던가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학자

그냥 제가 오늘 신문에서 당신이 쓴 정치 비판 기사 들을 읽은 겁니다.

체자리 큰 성공을 거둔 기사들이죠.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

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욕먹고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전 완전한 성공 비법을 찾고 있답니다. 그 비법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저의 이런 솔직함이 마음에 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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