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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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0555

Judith Eine Tragödie in fünf Akten 유디트 5막 비극

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 지음 윤도중 옮김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나오는 사람들

유디트 홀로페르네스 홀로페르네스의 부장들 홀로페르네스의 시종들 리비아의 사신들 메소포타미아의 사신들 병사들과 근위병들 미르차: 유디트의 하녀 에브라임 베툴리아의 원로들 베툴리아의 사제들 베툴리아 시민들, 그들 가운데 아몬 호세아 벤 아사드와 그의 아우 다니엘: 신들린 벙어리, 장님 21


사마야: 아사드의 친구 여호수아 델리아: 아사드의 부인 아키오르: 모압족1)의 장군 아시리아2)의 사제들 여자들, 아이들 백발노인 사무엘과 그의 손자

무대: 도시국가 베툴리아 성의 안팎

1)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인들과 자주 싸웠던 셈족의 한 분파. 2) 아시아 서남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에 제국을 세웠던 셈계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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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막



홀로페르네스의 진영.

무대 전면 왼쪽에 총사령관의 막사. 다수의 막사. 병사들과 웅성거리는소리. 배경에는산이있고그속에도시가보인다. 총사령관 홀로페르네스가 부장들을 거느리고 열린 막사에 서 나온다. 음악이 울려 퍼진다. 얼마 후 홀로페르네스가 손 짓을 하고 음악이 멈춘다.

홀로페르네스: 제물을 바쳐라. 대사제: 어느 신에게 바칠까요? 홀로페르네스: 어제는 어느 신에게 바쳤더라? 대사제: 총사님의 명에 따라 심지를 뽑은 결과 바알 신1)으 로 결정되었습니다. 홀로페르네스: 그럼 바알 신은 오늘은 배가 고프지 않겠군. 너희들이 모두 알면서도 정작 모르는 신에게 바치도록 해라. 대사제: (큰 소리로) 총사님의 명령이다. 우리 모두가 알면 서도 정작 모르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라신다. 홀로페르네스: (웃으면서) 그거야말로 내가 제일 존경하는 신이다.2)

1) 셈족의 태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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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을 바친다) 홀로페르네스: 근위병! 근위병: 무슨 분부십니까? 홀로페르네스: 병사들 가운데 부대장에게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해라. 이걸 공포하라. 근위병: (병사들의 대열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자기 부대장 에게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너라. 총사님께서 들어 주시겠단다. 한 병사: 우리 부대장을 고발합니다. 홀로페르네스: 이유가 뭔가? 병사: 어제 공격에 나섰다가 여자 종을 하나 생포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예쁜 나머지 전 기가 죽어 감히 손도 대지 못했 습니다. 저녁 무렵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 부대장님이 제 막 사에 오셔서 그 계집을 보시고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단칼 에 베어버리셨습니다. 홀로페르네스: 고발당한 부대장을 처형하라. (한 중무장 병 사에게) 어서! 고발한 놈도 함께. 그놈도 끌고 가라. 하지만 부대장을 먼저 죽여라. 병사: 절 부대장님과 함께 죽이실 겁니까?

2) 자기 자신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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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페르네스: 내가 보기에 네놈이 너무 건방지기 때문이 다. 내가 그 명령을 내린 건 너희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다. 너 같은 놈들이 부대장을 고발하는 걸 허락한다면 누가 부 대장들의 고발로부터 날 지켜주겠느냐? 병사: 제가 그 여자를 건드리지 않은 건 총사님 때문입니다. 총사님께 바치려고 했던 겁니다. 홀로페르네스: 거지가 왕관을 줍는 경우 그것이 임금 것임 을 아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느냐. 그러니 거지가 그걸 갖 다 바치더라도 임금은 두고두고 고마워하진 않는 법이다. 하지만 네 뜻이 갸륵하니 보답하겠노라. 오늘 아침엔 왠지 너그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술을 맘껏 마셔도 좋다. 끌고 가라. (중무장 병사가 그 병사를 무대 뒤로 끌고 간다) 홀로페르네스: (한 부장에게) 낙타에 고삐를 채워라. 부장: 벌써 채웠습니다. 홀로페르네스: 내가 벌써 명령했던가? 부장: 그건 아닙니다만 총사님께서 곧 하명하시리라고 예측 했습니다. 홀로페르네스: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내 머릿속의 생각을 훔치는 것이냐? 그런 성가시고 약삭빠른 놈은 질색이다. 내 뜻이 먼저고 너희들의 행동이 그다음이지, 그 반대는 아니 27


란 말이다. 명심해라. 부장: 송구합니다. (퇴장) 홀로페르네스: (방백) 남으로 하여금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 하게 하기, 영원히 비밀로 남기, 이게 바로 비결이다. 물은 이 비결을 몰라. 그래서 사람들이 바다에 제방을 쌓고 강바 닥을 파낸 거야. 모르는 건 불도 마찬가지. 주방의 심부름꾼 마저 그 속성을 알아낼 정도로 불은 그 위상이 추락하고 말 았어. 그래서 이제는 어떤 잡놈에게나 시중을 들어줘야 해. 심지어 태양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궤도를 알아냈 고, 구두장이도 재단사도 해시계로 시간을 잰다. 하지만 나 는 그 비결을 안다. 사람들은 내 주위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내 마음의 틈새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아무거나 내 입에 서 흘러나오는 말에서 내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내 려고 한단 말이야. 하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는 같지 않다. 나란 인간은 용렬한 허영심으로 자기 자신 앞에 무릎 꿇으며 하루하루를 판박이로 살아가는 얼간이가 아니다. 즐 거운 마음으로 오늘의 홀로페르네스를 토막 내서 내일의 홀 로페르네스에게 먹이로 주겠다. 내가 삶에서 보는 건 단조 로운 배 채우기가 아니라 존재의 끊임없는 갱생과 재생이 다. 멍청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때때로 마치 나 혼자 있는 것 같고, 사람들이 감각을 가지는 건 내가 그들의 팔다리를 28


벨 때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도 그걸 점점 더 알 아차려 가고 있어. 그러나 정신적으로 내게 근접하거나 뛰 어넘는 대신 뒷걸음질 치고, 토끼가 수염이 탈까 봐 불을 피 하듯 날 피하니 딱한 일이지. 하나라도 좋으니 적수가 있다 면, 감히 나와 맞서려는 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그런 자가 있으면 입을 맞추어주련다. 격투 끝에 그자를 땅바닥에 쓰러트린다면 내 몸을 그 위에 던지고는 함께 죽 겠다. 느부갓네살3) 왕은 안타깝게도 끝없이 덩치를 키움으 로써 시간을 죽이는 오만한 숫자에 불과해. 이 몸과 아시리 아를 빼면 남는 건 기름 덩어리로 가득한 인간의 가죽뿐. 나 는 왕에게 세계를 복속시켜 주겠다. 그리고 세계가 왕의 손 에 들어간 다음에는 내가 다시 빼앗으련다. 한 부장: 우리 대왕께서 보내신 사자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홀로페르네스: 즉시 데려오너라. (방백) 목아, 너는 아직도 깊숙이 숙일 만큼 부드러우냐? 왕은 네가 숙이는 걸 잊지 않 게 해주는구나. 사자: 대지도 굽실거리고 해가 뜨는 동쪽부터 해가 지는 서 쪽까지 지배하는 권력을 가지신 느부갓네살 대왕께서 홀로 페르네스 총사령관에게 무운을 빈다는 인사를 전하라고 하

3) 바빌론의 왕(BC 604∼BC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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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습니다. 홀로페르네스: 삼가 어명을 받겠습니다. 사자: 폐하께서는 이제부터 대왕 이외에 어떤 다른 신을 숭 배하는 걸 바라지 않으십니다. 홀로페르네스: (의기양양해서) 아마 내가 최근에 거둔 승전 보를 접하시고 내리신 결정 같군. 사자: 오직 폐하께만 제물을 바치고 다른 신들의 제단과 신 전은 모두 불태워 없애라는 어명입니다. 홀로페르네스: (방백) 여럿 대신 하나라, 제법 편하게 됐군. 그런데 왕보다 편해진 사람은 없어. 반짝반짝 빛나는 투구 를 벗어 들고 거기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기도하면 되 니까. 다만 배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 그래야 잔뜩 찡그린 면상을 보고 기겁하지 않을 테니. (사자에게) 대왕께 서 지난달에는 치통이 없으셨나 보군? 사자: 저희는 그걸 신들의 가호로 알고 고마워합니다. 홀로페르네스: 폐하께 감사한다는 말이겠지. 사자: 매일 해가 뜰 때 폐하께 제물을 바치라는 어명입니다. 홀로페르네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해가 질 때 제물을 바 치겠다. 사자: 폐하께서는 마지막으로 홀로페르네스 총사님에게 몸 을 보중하고 목숨을 위험에 내던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30


홀로페르네스: 이보게, 칼을 휘두르는 사람 없이 뭔가 눈부 신 일을 해낼 수 있다면야 그리하지. 그리고 또 말인데 폐하 의 건강을 위해 술잔을 드는 것보다 내 생명에 해가 되는 일 은 하지 않아. 한데 그걸 중단할 수야 없지 않은가. 사자: 폐하께서는 신하 중 그 누구도 총사님을 대신하지 못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폐하께서 앞으로 총사님 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홀로페르네스: 알았네. 폐하께서 명하시니 자중자애하지. 폐하께서 발을 올려놓으시는 발판에 입을 맞추겠다. (사자 퇴장) 홀로페르네스: 근위병! 근위병: 무슨 분부십니까? 홀로페르네스: 느부갓네살 대왕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이 걸 공포하라. 근위병: (병사들의 대열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느부갓네살 대왕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한 대사제가 지나간다) 홀로페르네스: 이보게 사제, 내가 공포하라고 시킨 걸 들었 겠지? 사제: 네, 들었습니다. 홀로페르네스: 그럼 가서 우리가 끌고 다니던 바알 신상을 31


파괴하라. 그걸 태울 나무는 주겠다. 사제: 제가 숭배했던 걸 어찌 파괴할 수 있겠습니까? 홀로페르네스: 저항이야 바알 신이 하겠지. 신상을 파괴하 든가 목을 매든가 하나를 선택해라. 사제: 파괴하겠습니다. (방백) 바알 신은 금팔찌를 끼고 있어. 홀로페르네스: (방백) 느부갓네살이여, 저주나 받아라. 위 대한 생각을 했기에 저주를 받아라. 그자는 그 생각을 명예 로운 것으로 만들기는커녕 훼손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나 할 게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건데 모든 인간이 가진 원 대한 목표는 오직 하나, 자기 몸에서 신을 낳는 것이다. 그 런데 인간들이 낳은 신은 자신이 신이란 걸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영원히 인간과 맞서 싸우고, 동정심이랄지 자 기 자신에 대한 전율이랄지 자신의 엄청난 임무에 대한 두 려움 등과 같은 어리석은 감정 따윈 모두 억제하며, 인간을 박살 내고 죽는 순간에도 신을 찬양하는 환호성을 지르도록 강요하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느부갓네살은 그 일을 손쉽게 해낼 줄 아는군. 그를 신이라고 공포하는 일은 근위병이 맡고, 그걸 세상에 증명하는 일은 내 몫이지. (아까의 대사제가 지나간다) 홀로페르네스: 바알 신상을 파괴했느냐? 사제: 지금 활활 타고 있습니다. 바알 신이여, 용서하소서. 32


홀로페르네스: 느부갓네살 대왕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자 네에게 명하노니 그 근거를 찾아내라. 근거 하나당 황금 1온 스를 주겠다. 사흘간 시간을 주겠다. 사제: 명에 따르겠습니다. (퇴장) 한 부장: 어떤 왕의 사신이 알현을 청합니다. 홀로페르네스: 어느 나라 왕인가? 부장: 송구합니다. 총사님께 무릎 꿇는 왕이 하도 많은지라 다 기억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홀로페르네스: (부장에게 황금 줄을 던져준다) 내 맘에 드는 첫 번째 불가능이로다. 데려오너라. 사신들: (땅바닥에 엎드린다) 장군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저 희 도성에 입성하신다면 리비아의 국왕께서 이렇게 장군 앞 에 엎드릴 겁니다. 홀로페르네스: 어째서 어제나 그제 오지 않았느냐? 사신들: 장군! 홀로페르네스: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냐, 아니면 경외심 이 너무 적었던 것이냐? 사신들: 아이고, 큰일 났네! 홀로페르네스: (방백) 마음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구나, 느부갓네살에 대한 분노가. 자비를 베풀어주어야겠군. 그 래야 이 버러지 같은 족속들이 무엄하게 내 분노의 원인이 33


자기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지. (사신들에게) 일어나라. 그리고 너희들의 왕에게 전해라… 부장: (등장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사신이 왔습니다. 홀로페르네스: 데려오너라. 메소포타미아의 사신들: (땅바닥에 엎드린다) 메소포타미 아는 위대한 홀로페르네스 장군에게 항복하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홀로페르네스: 나는 자비를 그냥 베풀어주지 팔지 않는다. 메소포타미아의 사신: 그런 뜻이 아닙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어떤 조건이건 항복하겠습니다. 그저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홀로페르네스: 그 소원을 들어주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너 희는 너무 오래 망설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사신: 길이 너무 멀어 늦어졌을 뿐입니다. 홀로페르네스: 그게 그거지. 나는 맹세했노라. 맨 나중에 항 복하는 민족은 씨를 말리겠다고. 그 맹세를 지켜야 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사신: 저희가 맨 마지막은 아닙니다. 이리 오는 도중에 들은 바로는 모든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히브 리인들이 싸우기로 작정하고 성문을 닫아걸었다고 합니다. 홀로페르네스: 그렇다면 내가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너희들 의 왕에게 전해라. 조건이 뭔지는 그 이행을 위해 파견할 내 부장을 통해 듣게 될 것이다. (리비아의 사신에게) 너희 국 34


왕에게도 같은 말을 전해라. (메소포타미아의 사신에게) 히 브리란 대체 어떤 민족이냐? 메소포타미아의 사신: 장군, 그자들은 머리가 돈 민족입니 다. 감히 장군께 대항하겠다고 나서니 알조 아닙니까? 자신 들이 직접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유일신을 숭배하니 더욱 명백하지 않습니까? 그 신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 면서도 제물을 바칩니다. 그 신이 우리 신들처럼 화가 나서 위협적으로 제단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 들은 저 산속에 삽니다. 홀로페르네스: 그놈들의 도시는 무엇이고 그놈들은 무슨 일 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왕이 다스리고 병사는 얼마나 되느냐? 메소포타미아의 사신: 장군, 그 민족은 음흉하고 의심이 많 습니다. 저희가 그들에 대해 아는 건 그들이 자신들의 볼 수 없는 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 족과의 접촉을 꺼립니다. 저희와 한자리에서 먹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저희와 하는 일이란 전쟁이 고작입니다. 홀로페르네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면서 웬 말이 그리 많으냐? (손짓을 하니 사신들 무릎 꿇고 절하며 퇴장) 모압인들과 암몬인들의 장수들을 데려오너라. (근위병 퇴 장) 내게 저항하는 민족을 존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걸 모두 없애야 하니 안타깝도다. 35


(장수들 등장, 그 가운데 아키오르가 있다) 홀로페르네스: 저 산속에 사는 건 대체 어떤 족속이냐? 아키오르: 총사님, 제가 잘 아니 그들의 실상을 아뢰겠습니 다. 그 민족은 창과 칼을 들고 출정할 때는 허약합니다. 무 기가 그들의 손에서는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들의 신이 그걸 부러뜨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우고 손 에 피를 묻히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지요. 신 혼자서 적을 쳐부수려고 한답니다. 하지만 그 신이 명하는 대로 공손하 게 신에게 복종하고, 엎드려서 머리에 재를 뿌리고, 통곡하 면서 자신들을 저주할 때엔 그 민족은 무서운 사람들로 돌 변합니다. 그러면 마치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 듯하고, 자연 은 법칙을 잊어버린 것 같은 상태가 됩니다.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됩니다. 바다가 갈라져서 양쪽에 단단한 성벽처럼 우뚝 서고, 그 사이로 길이 생깁니다. 하늘에선 빵이 떨어지 고 사막의 모래밭에선 시원한 물이 솟아나기도 한답니다. 홀로페르네스: 그 신의 이름은 뭣인고? 아키오르: 그 사람들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죄로 여깁 니다. 그런 일을 하는 이방인은 반드시 죽일 겁니다. 홀로페르네스: 그들의 도시는 어떤 것들이 있는고? 아키오르: (산속의 도시를 가리키며) 여기서 제일 가깝고 총 사님께서 눈으로 보시는 저 도시는 베툴리아라고 합니다. 36


그들은 저 도시를 요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도성은 예 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저는 거기 가서 신전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신전에 필적할 만한 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경탄하면서 그 앞에 서 있을 때 뭔가 제 목덜미에 올라가 내 리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느닷없이 엎드리게 되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하마터면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다시 일어섰을 때 신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불가항력적인 충동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벌은 죽음이랍니다. 어떤 어여쁜 처녀가 길을 막고 그걸 말 해주었습니다. 젊은 저를 동정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교 도가 신전을 더럽히는 게 걱정되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 니다. 총사님, 이제 제 말씀을 잘 들으시고 경시하지 않으시 기 바랍니다. 먼저 그 민족이 자기들 신에 거역하는 죄를 지 었는지 알아보십시오. 죄를 지었다면 공격 명령을 내리십시 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들의 신이 그들을 총사님의 손에 넘겨줄 것이고, 총사님은 쉽게 그들을 굴복시키실 겁니다. 그러나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회군하십시오. 그들의 신 이 그들을 보호해서 우리는 온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기 때문입니다. 총사님은 막강한 영웅이십니다. 하지만 그 들의 신은 너무 힘이 셉니다. 만약 총사님에게 필적할 만한 자를 내세우지 못한다면 총사님께서 자신에게 화를 내서 스 37


스로 죽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 그런 예언을 하는 건 마음속의 두려움 때문 이냐 아니면 흉계 때문이냐? 무엄하게 나 이외에 다른 자를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네놈을 벌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진 않겠다. 네 입으로 너에 대한 판결을 내린 것으로 하겠다. 히브리인들에게 닥칠 운명이 바로 네 운명이다. 이놈을 포 박해서 해치지 말고 적에게 넘겨주어라. (그 명이 시행된다) 저 도시를 점령할 때 저놈을 죽여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그 무게만큼 황금을 주겠노라. (큰 목소리로) 베툴리아로 진격 하라! (병사들의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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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막



유디트의 방. 베틀에 앉아 있는 유디트와 미르차.

유디트: 이 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미르차: 아이, 그러지 마시고 제 말을 새겨들으세요. 유디트: 나는 걷고 또 걸었어. 마음이 몹시 조급했지만 발길 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다.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그러면 큰 죄를 짓는 것 같았어. 가자, 어서 가자고 말하고는 이전보다 더 빠르게 걸어갔어. 미르차: 지금 막 에브라임이 지나가셨어요. 매우 슬퍼 보였 어요. 유디트: (그 말을 듣지 않은 채) 갑자기 내가 높은 산 위에 있 는 거야. 현기증이 났어. 그런 다음 태양 가까이 온 게 뿌듯 했어. 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한참 쳐다봤지. 그러다가 갑자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발 앞이 낭떠러지란 걸 알았 어. 깜깜하고 깊이를 알 수 없었으며 연기가 자욱했어. 그런 데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고 걸음을 멈추지도 못하고 비틀비 틀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덜컥 겁이 나서 “하느님, 하느님!” 하고 불렀더니… “나 여기 있노라”라는 말이 절벽에서 들려 왔어.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였지. 내가 뛰어내렸는데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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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운 팔이 받아줬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품에 안긴 것 같 았어. 말할 수 없이 편안했지. 그런데 내가 너무 무거운지 그 사람은 날 지탱하지 못하는 거야. 나는 하염없이 밑으로 떨어졌고, 그 사람이 우는 소리를 들었으며, 뜨거운 눈물 같 은 게 내 뺨에 떨어졌단다. 미르차: 해몽가를 하나 아는데 불러올까요? 유디트: 유감스럽게도 그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 만 그런 꿈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건 안다. 그런데 말 이지 내 생각은 이렇다. 사람이 자리에 누워 잠잘 때면, 긴 장을 풀고 자의식에서 풀려나면 미래에 대한 감각이 현재의 생각이나 심상을 모두 밀어낸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 들이 그림자처럼 마음속을 지나가며 준비를 시키기도 하고 경고도 하고 위로도 해준다. 어떤 일이 생겨도 우리가 실로 혼비백산하는 경우가 아예 없거나 드문 건 바로 그 때문이 다. 또 좋은 일은 오래전부터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도, 나 쁜 일에 대해서는 부지불식간에 벌벌 떠는 것도 다 그 때문 이다. 나는 종종 사람은 죽기 직전에도 꿈을 꾸는지 생각해 보았다. 미르차: 제가 에브라임 얘기를 꺼내면 어째서 한사코 듣지 않으시는 거죠? 유디트: 남자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기 때문이다. 42


미르차: 하지만 서방님이 있으셨잖아요. 유디트: 네게 비밀을 털어놓아야겠구나. 서방님은 정신이 이상한 분이었단다. 미르차: 그럴 수가! 제가 어떻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요? 유디트: 그분은 그랬어. 나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내 가 소름 끼치는 무시무시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구나. 들어보렴. 내 나이 채 열네 살도 되지 않아 서 마나세스 서방님에게 시집갔지. 너는 나를 따라왔으니 그날 저녁 일을 기억할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을 때마 다 가슴이 점점 더 조여왔어. 이걸로 내 삶이 끝장이라는 생 각이 들기도 하고 또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 아! 그날 저녁은 하도 매혹적이고 고혹적이어서 저항할 수 없었어. 온화한 바람이 내 면사포를 들추는 게 마치 이제 때 가 되었다고 말하는 듯했어. 하지만 나는 면사포를 꼭 붙잡 았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느꼈고, 그게 부끄러웠으 니까. 아버님이 내 곁에서 걸어가시면서 진지하게 많은 말 씀을 해주셨는데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어. 가끔 아 버님을 쳐다보고는 생각했지. 마나세스란 분은 분명히 다를 거라고. 그래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이냐? 너도 그 자리 에 있었잖아. 43


미르차: 저도 아씨처럼 부끄러웠거든요. 유디트: 마침내 시댁에 당도해서 서방님의 노모께서 엄숙한 얼굴로 맞아주셨어. 그분을 어머님이라 부르기가 정말로 쉽 지 않았지. 친정어머니가 무덤 속에서 그걸 듣고 가슴 아파 하실 것 같았거든. 그런 다음 네가 쥐오줌풀 기름과 올리브 유를 발라주었어. 그때 정말이지 내가 죽어서 시신에 기름 을 발라주는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핏기 없이 창백하 다고 너도 말했잖아. 그런 다음 서방님이 오셔서 날 바라보 셨지. 처음엔 수줍어하다가 점점 대담해지셨어. 마지막에 가선 내 손을 잡고 뭔가 말씀하려고 하셨으나 입이 떨어지 지 않았지. 그때 나는 불구덩이에 갇힌 듯한, 내 몸에서 불 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단다. 이런 얘기를 해 서 미안하구나. 미르차: 아씨는 처음엔 얼마 동안 손으로 얼굴을 가리셨다 가 갑자기 펄쩍 뛰어 그분의 목을 껴안으셨잖아요. 제가 얼 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유디트: 난 그걸 보고 깔깔 웃었지. 느닷없이 내가 너보다 훨 씬 더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미르차야, 내 얘기를 계속 들어보렴.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어. 시어머님께서는 별의별 이상야릇한 짓을 하시면서 축복기도 같은 걸 중얼거 리셨어. 마침내 서방님과 단둘이 있게 되자 난 다시 가슴이 44


답답해지고 불안해졌어. 등잔불이 세 개 있었는데 서방님이 끄려고 하셨지. 나는 “끄지 말고 그냥 두세요”라고 부탁했 어. 서방님은 “이런 바보!”라고 하시면서 날 포옹하려고 하 셨어… 그때 등잔불이 하나 꺼졌는데 우린 알아차리지 못했 지. 내게 입을 맞추셨어… 그러자 등잔이 하나 더 꺼졌어. 서방님은 오싹하셨고 나도 뒤따라 그랬지. 그러고 나서 서 방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셨어. “세 번째 불은 내가 직접 끄겠 소.” 나는 “어서 끄세요, 빨리요” 하고 재촉했어. 온몸이 벌 벌 떨렸거든. 서방님이 불을 끄셨어. 달빛이 비쳐 방 안이 환했어. 내가 침상에 누우니 달빛이 바로 내 얼굴 위에 떨어 지는 거야. 서방님은 “당신 모습을 대낮처럼 분명하게 보겠 구려”라고 하시면서 내게 다가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 니 꼼짝도 안 하시는 거야. 시커먼 땅이 손을 뻗어 꽉 붙잡는 것 같았어. 나는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서 “어서 이리 오세 요”라고 재촉했는데 전혀 부끄럽지 않았단다. 서방님은 둔 탁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도무지 갈 수가 없소!”라고 대답하 셨어. “갈 수가 없소!”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시고는 눈을 부 릅뜨고 소름 끼치게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셨어. 그런 다음 비틀비틀 창문으로 가시더니 “갈 수 없소!”란 말을 한 열 번 쯤 잇달아 반복하시는 거야. 내가 아니라 뭔가 낯선 걸, 무 시무시한 걸 보시는 것 같았단다. 45


미르차: 가엽기도 하시지! 유디트: 나는 사정없이 울기 시작했다. 내 몸이 더렵혀진 것 같았어. 나 자신이 밉고 혐오스러웠지. 서방님은 좋은 얘기 를 해주셨어. 내가 팔을 뻗었지만 나한테 오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셨지. 내 심장은 뛰기를 멈추고 내 몸의 피 가 얼어붙는 것 같았어. 나는 내 안으로 파고들어 갔는데 어 떤 다른 물체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마침내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깨어 있는 느낌이었어.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서방님이 침대 앞에서 한없이 측은하다는 눈길로 날 바라보시는 거야. 나는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질식 할 것 같았지. 그때 내 몸 안에서 뭔가 찢어진다는 느낌이 들 었어. 거침없이 웃음보를 터뜨렸지. 그러자 다시 숨을 쉴 수 있더군. 시어머님이 침울하고 비웃는 눈길로 날 바라보시는 걸로 봐서 죄다 엿들었다는 걸 알겠더구나. 시어머님은 나 한테는 한마디 말도 안 하신 채 아들을 데리고 소곤거리며 한구석으로 가시더라. “그게 말이나 됩니까!” 느닷없이 서방 님이 화가 나서 외치셨고, 이어서 “유디트는 천사예요”라고 하셨어. 나에게 입을 맞추려 하셨으나 내가 거부했어. 이상 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긴 하셨지만 알겠다는 태도였다.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여섯 달 동안 서방님의 아내였어… 하지만 서방님은 내 몸에 손도 대지 않으셨단다. 46


미르차: 그다음은요? 유디트: 우리 부부는 그렇게 따로따로 살았지. 부부라는 소 속감이야 있었지만 우리 사이에 뭔가 깜깜하고 알 수 없는 게 장벽같이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서방님은 가끔 소름 끼 치게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는데, 그런 순간에는 서방 님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어. 무서운 나머지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야. 서방님의 시선은 독화살처 럼 내 몸을 파고들었어. 너도 알다시피 3년 전 보리를 수확 할 때 서방님은 밭에서 돌아오시는 길로 몸져누웠다가 사흘 도 안 되어서 돌아가셨지. 서방님이 내 영혼 가장 깊숙한 곳 에 있는 걸 빼앗아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병 때 문에 그분을 증오했어. 그분이 몹쓸 짓으로 날 위협하듯 죽 음으로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어. ‘죽으면 안 돼요!’ 나는 속 으로 외쳤어. ‘그 비밀을 무덤으로 가져가게 해서는 안 돼. 너는 마침내 용기를 내서 물어봐야 해.’ 나는 그분 위로 몸을 구부리고 물었어. “서방님, 우리의 첫날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분의 검은 눈은 이미 감겼는데 힘들게 다시 뜨 셨어. 나는 떨었어. 그분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게 마치 관 속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분은 날 한참 바라본 후 이렇게 말씀하셨어. “그래, 그렇지. 그래, 이젠 말 해줘도 되겠소. 당신은…” 그런데 내가 절대로 알아서는 안 47


된다는 듯 사신(死神)이 재빨리 나와 그분 사이에 끼어들어 그분의 입을 영원히 봉해버리고 말았단다. (깊이 침묵한 후) 미르차야, 어디 말해보아라. 내가 서방님을 미쳤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면 내가 미친 게 아니겠느냐? 미르차: 몸서리가 쳐지네요. 유디트: 너도 종종 보았다시피 내가 조용히 베틀에 앉아 있 거나 다른 일을 하다가 때때로 느닷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 기도하기 시작하지 않더냐. 그 때문에 내가 믿음이 깊고 하 느님을 공경한다는 말들을 했던 거야. 미르차야, 네게 말하 지만 내가 그랬던 건 떠오르는 생각들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내가 기도를 드리는 건 하느님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방식의 자살행위에 불과해. 절 망한 사람이 깊은 물에 뛰어들 듯 영원한 하느님 안으로 뛰 어든 거야… 미르차: (억지로 말머리를 바꾸며) 그런 순간에는 거울 앞으 로 가시는 게 낫겠어요. 그런 암울하고 괴로운 생각도 아씨 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 앞에서는 눈이 부시고 주눅이 들어 물러가고 말 테니까요. 유디트: 이런 바보! 저 자신을 먹어치우는 열매가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느냐? 젊고 아름다운 게 단지 너 혼자만을 위한 거 라면 너도 젊고 아름답지 않은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게 48


다. 여자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남자에 의해서만 뭔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남자를 통해서 엄마가 될 수 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건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자연 에게 바치는 유일한 감사의 표시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는 불행하다.4) 이 몸은 처녀도 아니고 유부녀도 아니니 곱절로 불행하구나! 미르차: 아씨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위 해서도 젊고 아름다운 걸 누가 막겠어요? 가장 고귀한 남자 분들 가운데 고르실 수 있잖아요? 유디트: (아주 진지하게) 나란 사람을 도통 모르는구나. 내 미모는 독 있는 벨라도나5)와 같은 거야. 그걸 먹으면 미치 거나 죽게 돼. 에브라임: (급히 들어온다) 이런, 태평들 하시군. 홀로페르 네스가 성문 앞까지 쳐들어왔는데도. 미르차: 하느님,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에브라임: 아씨, 내가 본 걸 직접 보셨다면 정말로 벌벌 떠실 겁니다. 단언컨대 두려움이나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건 죄다 이교도에게 고용된 것 같아요. 낙타와 말, 전차와 공성 망치

4) 불임은 어떤 숨겨진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간주되었다. 5) 약재로 사용되는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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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찌나 많은지! 성벽이나 성문에 눈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본다면 그것들도 겁이 나 주저앉고 말 겁니다. 유디트: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신 모양이군요. 에브라임: 아씨한테 말하지만 지금 베툴리아 전역에서 열병 에 걸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홀로페 르네스란 사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으신 것 같군요. 나는 잘 압니다. 그자가 뱉어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맹수처럼 사납기 그지없어요.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유디트: 그럼 그 사람은 불을 켜라고 하겠지요. 에브라임: 그거야 우리나 하는 일이지요. 나나 아씨 같은 사 람 말입니다. 홀로페르네스는 마을과 도시에 불을 지르게 하고선 이렇게 떠들 겁니다. “이게 내 횃불이다. 나로서는 이게 다른 것보다 싸게 먹힌다.” 한 도시가 타는 화염에 자 기 칼을 닦고 고기를 굽게 한다면 크게 자비를 베푼다고 생 각할 겁니다. 베툴리아를 보았을 때 웃으면서 전속 요리사 에게 조롱하듯 물었다더군요. “어떠냐? 저길 불태우면서 타 조 알 하나는 구울 수 있겠느냐?” 유디트: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군요. (방백) 아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에브라임: 아씨가 그 사람 눈에 띄면 큰일 납니다. 홀로페르 50


네스는 남자들을 창이나 칼로 죽이듯 여자들은 입맞춤이나 포옹으로 죽인답니다. 아씨가 이 도시의 성벽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오로지 아씨 때문에라도 쳐들어왔을 겁니다. 유디트: (웃으며)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성에서 나가 그 사람을 맞이하기만 하면 되고, 우리 도시와 나라는 구원받겠지요. 에브라임: 그런 생각을 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씨밖에 없 어요. 유디트: 왜 안 그러겠어요? 모든 사람을 위해 살고, 또 항상 뭘 위해 사느냐는 자문을 소득 없이 해온 여자라면 그럴 권 리가 있잖겠어요?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온 게 아니라면 나 때문에 온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 순 없을까요? 그 거인의 머 리가 공중에 우뚝 솟아 있어서 당신네들의 손이 미치지 않 는다면 그자의 발밑에 보석을 던져보세요. 그자는 그걸 줍 기 위해 몸을 구부릴 게고, 그러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겁 니다. 에브라임: (방백) 내 계책이 너무 어리석었군. 이 여자에게 겁을 주어 내 품속으로 뛰어들게 하려는 계책이었는데 역으 로 담대하게 만들고 말았군. 이 여자의 눈을 보면 단죄당한 기분이야.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보호해 줄 사람을 찾 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보다 가까운 사람은 없으니까. (유디 51


트에게) 아씨는 아름답다고 하기엔 너무 용감하시군요. 유디트: 그대가 진짜 사내라면 그런 말을 하셔도 됩니다. 에브라임: 나는 남자이니 더 많은 말을 해줄 수 있습니다. 아 씨, 들어보세요. 어려운 때가 닥쳤어요. 무덤에 누워 있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안전하지 않은 때라고요. 아버지도 없 고 남자 형제도 없고 지아비도 없는 처지에 이 어려운 시기 를 어떻게 넘기려 하시오? 유디트: 설마 홀로페르네스를 그대의 중매쟁이로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요? 에브라임: 놀리고 싶으면 놀리세요. 하지만 잘 들어보세요. 내 구혼을 거부하신다는 건 압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세 상이 이렇게 위협적으로 돌변하지 않았다면 난 두 번 다시 아씨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칼이 보이십니까? 유디트: 아주 반들반들해서 거울처럼 내 얼굴을 비춰볼 수 있겠네요. 에브라임: 아씨가 비웃으며 날 내쳤던 날 이 칼을 갈았어요. 지금 아시리아 군대가 성문 앞에 버티고 있지 않으면 이 칼 은 벌써 내 가슴에 박혀 있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면 아씨는 그걸 거울로 사용할 수 없겠죠. 내 피가 묻어 녹슬었 을 테니까요. 유디트: 이리 줘보세요. (그녀가 그의 손을 찌르자 그가 손 52


을 뒤로 뺀다) 피! 자결 운운하더니 손을 찌르는 것도 무서 워 벌벌 떠시는군요. 에브라임: 그대는 내 앞에 있어요. 나는 그대를 보고 그대의 음성을 듣고 있어요. 지금 나는 몸을 아껴야 합니다. 나 혼 자만의 것이라 느끼지 않고, 그대가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 입니다. 자결 같은 건 깜깜한 밤중에나 감행하는 짓입니다. 마음속에 깨어 있는 것이라곤 고통뿐일 때, 잠이 눈꺼풀을 누르듯 죽음이 영혼을 짓누를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 이 명하는 바를 무의식적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을 때나 하 는 겁니다. 아, 나는 그걸 압니다. 그때 갈 데까지 갔었으니 까요. 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는 상태 까지 갔단 말입니다. 그건 용기나 비겁함하고는 상관없습니 다. 잠자고 싶을 때 문에 빗장을 지르는 것과 같아요. 유디트: (그에게 손을 내민다) 에브라임: 아씨, 난 그대를 사랑하지만 그대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이거나 저거나 다 불가항력입니다. 그런데 사랑하 지만 거부당한다는 게 뭔지 알기나 하십니까? 그건 여느 고 통과는 전혀 다릅니다. 누가 오늘 내게서 무얼 빼앗아 가는 경우 내일이면 그것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됩니다. 누 가 내게 상처를 입히면 치료할 기회가 있지요. 하나 내 사랑 을 바보짓으로 취급한다면 내 가슴속의 가장 성스러운 걸 53


거짓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대를 향한 이 감정이 거짓이라면 하느님 앞에 엎드리는 마음이 진심이라 는 보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르차: 그걸 느끼지 못하시겠어요, 아씨? 유디트: 동정심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가? 저 사람으로 하여 금 칼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 청혼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 래야 할 것 같군. 에브라임: 아씨, 다시 한 번 청혼하겠습니다. 그대를 위해 이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허락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대 를 노리는 칼을 받아낼 방패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유디트: 이 사람이 적군 진영을 한 번 보고 나서 넋을 잃은 듯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내 치마를 하나 빌려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사람 말이야. 눈에는 불꽃이 이글 거리고 불끈 주먹을 쥐고 있군. 아, 하느님! 저는 사람을 존 중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을 땐 제 살을 베어내는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 전 그대를 괴롭혔어 요. 저도 괴로웠어요. 그대 눈에 사랑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 았어요. 그대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비웃었던 겁니다. 이제 보상해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만약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해야 할 일이 제가 말하는 그대로, 기필코 해내야 한다고 명 54


하는 필연으로서 그대 영혼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오로지 그걸 해내기 위해 살아 있다는 마음이 아니라면 그대는 구 제 불능입니다. 가서 홀로페르네스를 죽이세요! 그러고 나 서… 그런 다음에 저한테 바라시는 대가를 달라고 하세요. 에브라임: 정신 나갔군! 부하들의 무리 속에서 홀로페르네 스를 죽이라니? 어떻게 할 수 있겠소? 유디트: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요? 전들 알겠어요? 만약 안 다면 제가 직접 해치우겠죠. 제가 아는 건 그게 반드시 필요 하다는 사실뿐입니다. 에브라임: 그놈을 본 적은 없지만 지금 눈으로 보는 것 같 군요. 유디트: 저도 그래요. 그자의 얼굴은 온통 눈, 그것도 위압 적으로 명령하는 눈이고, 밟으면 땅이 꺼질 것 같은 발을 가 졌군요. 하지만 그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니 더 는 존재하지 않을 때도 오겠죠. 에브라임: 그놈에게 벼락을 쳐서 군대를 없애시오. 그럼 내 가 감행해 보겠소. 하지만 지금은… 유디트: 하겠다는 의지만 가지세요! 그리고 저 깊은 심연과 하늘의 성채에서 보호해 주는 신성한 기운을 불러오세요. 그대의 몸은 아닐지라도 위업은 축복하고 보호해 줄 겁니 다. 그대가 하려는 일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 55


지요. 그건 하느님이 최초로 진노하시면서 궁리하시는 일입 니다. 자연도 자기 속으로 낳은 그 거인이 두려워 벌벌 떱니 다. 그런 사람을 두 번 다시 낳지 않을 겁니다. 만약 낳는다 면 오직 첫 번째 거인을 없애기 위해서겠죠. 그런 자연도 고 통스러운 꿈속에서 이를 갈며 그 일을 계획하고 있을 겁니다. 에브라임: 날 미워하기 때문에, 날 죽이고 싶어서 그런 생각 할 수도 없는 일을 요구하는 거 아닙니까? 유디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내가 당신에게 취한 태 도가 결국 옳았군요. 뭐라고요? 그런 생각이 피를 끓게 하지 않나요? 열광시키지 않는다는 겁니까? 당신은 날 사랑합니 다. 나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뛰어넘게 하려고 그 생각을 당신의 정신 속에 주입 시키고자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당신을 짓누르 기만 하는 무거운 짐에 불과하다는 겁니까? 그런데 말이에 요, 당신이 환호성을 지르며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광풍 이 불듯 칼을 들고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뛰어나 갔다면, 그랬다면, 아, 나는 생생하게 느껴요, 그랬다면 나 는 울면서 당신을 붙잡았을 겁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걱 정되어 벌벌 떠는 불안한 심정으로 당신에게 닥칠 위험을 상세히 설명했을 거예요. 당신을 붙잡거나 뒤따르거나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아이고! 당신에 대한 내 행동은 실로 56


정당한 것이었어요. 당신의 사랑은 비겁한 천성에 대한 벌 입니다. 그건 당신을 죽이는 저주가 되었어요. 만약 당신에 게 조금이나마 동정을 느낀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낼 겁니다. 이제 당신을 속속들이 알겠어요. 당신한테는 가장 숭고한 것이 가장 비열한 것이 된다는 것도, 내가 기도하면 당신은 반드시 비웃으리라는 것도 알겠어요. 에브라임: 맘껏 경멸하시구려.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일을 가 능하게 만들 사람을 먼저 보여주시오. 유디트: 보여주겠어요. 그런 사람이 나타날 겁니다. 반드시 나타나고 말 겁니다. 만약 당신의 비겁한 행태가 남성 전체 의 행태라면, 모든 남자들이 봉착한 위험에서 고작 그 위험 을 피하라는 경고밖에 보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위대한 일 을 할 권리는 여성에게 넘어간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당 신에게 그걸 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젠 그게 가능하다는 걸 내가 반드시 입증해 보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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